최근 수정 시각 : 2024-11-05 19:50:58

킴 필비

<colbgcolor=#000,#000000><colcolor=#fff,#dddddd> 킴 필비
Kim Philby
파일:7345A567-20FB-47E7-8BF6-73631704A5EC.jpg
본명 해럴드 에이드리언 러셀 "킴" 필비
Harold Adrian Russell "Kim" Philby
출생 1912년 1월 1일

[[인도 제국|]][[틀:국기|]][[틀:국기|]] 펀자브 하리아나 주 암발라
사망 1988년 5월 11일 (향년 76세)

[[소련|]][[틀:국기|]][[틀:국기|]] 러시아 SFSR 모스크바
국적
[[영국|]][[틀:국기|]][[틀:국기|]] →
[[소련|]][[틀:국기|]][[틀:국기|]]
가족 배우자
학력 케임브리지 대학교 트리니티 컬리지 (경제학 / 학사)
직업 첩보 요원, 정치인
소속 MI6
케임브리지 5인조
주요 서훈 레닌훈장
인민우호훈장
1. 개요2. 생애3. 활동4. 발각5. 말년6. 미디어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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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영국의 첩보기관 MI6의 요원이었으나 실상은 도널드 매클린(Donald Maclean), 가이 버지스(Guy Burgess), 앤서니 블런트(Anthony Blunt)와 함께 케임브리지 5인조라고 불린 소련의 거물 간첩이었다.

2. 생애

영국령 인도 제국에서 저명한 아랍 학자 존 필비의 아들로 태어났다.

케임브리지 대학교에 공부하던 와중에 마르크스주의에 심취했다. 이때 소련 첩보조직은 옥스퍼드 대학교와 더불어 영국 엘리트의 산실인 케임브리지 대학교에 일단의 마르크스주의자들이 있다는 것에 주목하고 그를 포함한 5명을 포섭했다. 자서전인 '나의 케임브리지 동료들'에 따르면 이때 소련의 담당 정보원은 다섯 명에게 급진적 사회운동 조직과 일체의 인연을 끊을 것을 명령했다고 하는데 영국의 높으신 분들이 보기에 뭔가 책 잡힐 게 있어서 출세를 못하면 안 된다는 이유였다고 한다.

이 때문에 버지스나 블런트는 아예 소련을 방문하고 나서 소련에 대한 환상이 깨졌다며 동네방네 떠들고 다니면서 공산주의와 거리를 두는 모습을 보여주었고 그는 이미 공산주의자들과 어울린 것이 알려져 있었기 때문에 일부러 공산주의자들과 연을 끊고 친구들을 만날 때마다 공산주의 비판을 하며 거리를 두는 모습을 보여주었다고 하는데 심지어 자신이 공산주의자가 아님을 보여주기 위해 영국의 나치 지지자들과 어울리기도 하였다고 한다.

1933년에는 유럽 국가를 순방하면서 코민테른과 사회주의 지하 조직들 간의 연락원이 되었고 이 때 오스트리아에서 만난 공산주의자 앨리스 프리드먼과 결혼했다. 귀국한 후 자유주의적인 잡지 "리뷰 오브 리뷰스"의 편집장이 되어 소련에게 가치 있는 정보를 출판하였다.

스페인 내전에서는 타임즈의 종군기자로서 프란시스코 프랑코에게 접근하여 소련에 정보를 빼돌렸다. 프랑코에게 접근할 수 있었던 이유는 프랑코 군대의 전선을 취재하면서 공화파의 공격으로 부상을 입고 훈장을 수여받은 경력으로 나름 신임을 받았기 때문이었다고 한다.

제2차 세계 대전 중에 영국 정보기관 MI6에 들어갔다.[1] 첩보원으로서는 치명적인 결격 사유인 말더듬이가 있었지만 이게 오히려 전화위복이 되어 다양한 정보를 접할 수 있는 내근요원으로 발령받았다. 1949년에는 미국 워싱턴 D.C.MI6 미국 지부 조정관으로 파견되어 CIA와의 연락 임무를 맡았다.

냉전이 본격화되자 공산주의 인맥을 사용하여 소련으로부터 정보를 빼내는 역할을 맡아서 승승장구하며 승진했지만 실제로 가치 있는 정보는 오히려 영국 MI6와 미국 CIA로부터 소련으로 줄줄 새어나가고 있었다.

친구인 도널드 매클린가이 버지스의 간첩질이 들통나고 소련으로 망명하면서 1951년 첩보직에서 제외되고 1955년에는 MI6에서 해임되어 다시 언론인이 되었다. 결국 미국에서 소련의 비밀통신을 감청하고 암호를 해독해 내면서 꼬리가 밟혔으나 1963년 베이루트를 거쳐 유유히 소련으로 망명한 후 KGB에서 새로 일자리를 얻고 대령까지 진급했다. 말년에는 안드로포프 서기장의 대외정책상담역으로 활동하면서 회고록까지 출판하는 등 끝까지 MI6를 엿먹이다가 천수를 누리고 1988년 세상을 떠났다. 그의 장례식은 소련의 당, 정, 군 최고위 인사가 모두 참여한 국장으로 치러졌으며 소련에서는 그의 얼굴을 집어넣은 기념우표까지 냈다.

3. 활동

1950년대 미국과 영국이 동유럽에 각종 공작을 하려는 게 상당수 실패로 돌아갔는데 알고 보니 공작 관련 정보가 죄다 그를 통해 새어나간 것이었다. 가장 유명한 것은 1950년 서방 연합국이 알바니아에 무장 반공집단을 침투시켜 공산 정권을 전복시키고 조구 1세를 다시 왕으로 옹립하려던 계획을 누설한 것이다. 때문에 수천 명의 알바니아인이 떼죽음을 당했다. 소련에 침투한 서방 간첩의 명단이나 기타 내부 정보를 넘긴 것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 꼬리가 잡힌 도널드 매클린가이 버지스가 도망갈 수 있도록 언질을 준 것도 이 사람이다.

2016년 BBC가 발굴해 보도한 동독 슈타지 요원 특강 동영상(1981)에 따르면 처음부터 언론인의 길을 걸은 것 자체가 KGB의 정교한 계획의 일부였는데 MI6에 들어가는 방법으로 언론인의 길을 걸었다. # 이 때 그가 털어놓은 이중간첩질의 비결이 압권인데 그냥 퇴근할 때 서류가방에 특급 기밀 서류를 넣고 와서 KGB 요원이 사진을 찍은 뒤 아침에 출근할 때 되돌려 놨다고 한다.[2]

그를 위시한 케임브리지 5인조의 활약으로 MI6는 거의 초토화되었고 CIA조차 70년대까지 피해를 복구하지 못할 정도[3]였다고 한다.

4. 발각

그러나 꼬리가 길면 밟힌다고 1950년부터 그를 포함한 케임브리지 5인조는 의심의 대상이 되기 시작하였다. 1955년에는 일단 당시 영국 외무장관이면서 훗날 총리가 되는 해럴드 맥밀런이 하원에서 그의 무죄를 "입증"하는 것으로 끝났지만 저런 상황에 몰리는 것 자체가 파멸의 시작이었다.

이후 그는 레바논 베이루트에 언론인 겸 MI6의 비공식적 요원으로 파견되었다. 이미 별거 중이었던 두번째 아내가 1957년에 영국에서 사망하자 1959년에 세번째 부인과 재혼하고 MI6와의 관계도 희미해지면서 중동 파견 언론인으로 제2의 삶을 시작하는가 싶었지만 소련 KGB의 주요 요원이 미국으로 망명해 버리면서 그에 대한 모든 의혹을 떠벌리는 바람에 일이 꼬이기 시작했다. 결국 1963년의 어느 날 저녁 아내와 파티에 가겠다는 약속마저 허겁지겁 저버리고 종적을 감춰 소련으로 탈출했다.

5. 말년

소련 망명 후 소련 정부는 그에게 연방 시민권과 레닌훈장을 수여했다. 반대로 영국 정부는 그에게 수여한 훈장을 취소했다. 그는 자신이 KGB에서 중요한 업무를 맡을 줄 알았지만 그가 다시 영국으로 돌아가려 할 것을 염려한 소련은 신변을 경호한다는 명분으로 그를 몇 년간 사실상 가택연금에 처했다. 이 기간 동안 그는 회고록 작성에 몰두했는데 아이러니하게도 이 회고록은 영국 정부의 방해에도 불구하고 1968년에 영국에서 출간된 반면 소련에서는 1980년대에 가서야 출간되었다. 1970년대에는 원하던 대로 KGB에서 교육 임무와 첩보 문서를 관리하는 임무를 맡았다.

그의 부인의 증언에 따르면 그가 모스크바에서 궁핍하게 살았으며 공산주의의 이상과 현실의 괴리로 인해 우울증에 빠져 살았다는 서구의 선전은 사실이 아니었다고 한다. 그가 망명했을 때 러시아 일반 노동자의 월급은 80루블 정도였는데 그에게는 매달 500루블의 생활비가 지급되었다. 가택연금 중에 회고록을 출판하고 희망하던 KGB에서 중책을 맡았고 말년에는 서기장의 상담역으로 활동한 것을 보면 궁핍하게 살 이유가 없다.

다만 서방에 남겨 놓은 자식들에 대한 그리움과 영국 생활에 대한 향수가 있었던 것은 분명하며 대외적으로 그는 영국에 대해 영국에 남겨진 친구들, 머스타드 소스우스터 소스를 빼면 그리운 게 없다고 주장했지만 실제로는 더 타임스BBC 방송을 청취하고 크리켓에 관심이 많았다고 한다.

그는 초기에는 한동안 알콜 중독으로 고생했고 모스크바에서의 생활 중 일부분과 특정 정치인, 특히 브레즈네프에 대해서는 불만이 많았다고 한다. 부인이나 친구들의 증언으로 미루어 볼 때 그는 비록 이상주의자였지만 '이쪽이나 저쪽이나 이상과 현실 간 괴리가 있는 건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하고 위안으로 삼은 듯하다.

그는 1988년에 심부전으로 사망하였고 소련 정부는 국장으로 성대한 장례를 치러주며 여러 훈장을 사후 수여하였다.

6. 미디어에서

프레드릭 포사이스[4]존 르카레[5][6] 등 영국 첩보 소설가들의 거의 모든 작품 속에 실명으로 등장하거나 그를 모티브로 했다는 것을 누구나 알 수 있는 가명으로 등장할 정도로 임팩트가 크게 남은 인물이다. 그를 소재로 한 작품으로 팅커 테일러 솔저 스파이, 디클레어, 케임브리지 스파이가 있다.

Hearts of Iron IV에서 레지스탕스 DLC 발매 이후 소련의 영국계 간첩으로 등장한다.
[1] 이 때 추천해 준 사람이 먼저 MI6에 자리잡고 있었던 케임브리지 5인조의 멤버 중 한 사람인 가이 버지스다.[2] 특급기밀 문서 관리를 담당하던 직원에게 자주 술을 사 주면서 환심을 산 것도 하나의 이유였겠지만.[3] CIA 방첩 책임자였던 제임스 앵글턴은 필비의 절친한 친구였는데 필비가 탈출하기 직전까지 그가 간첩이었음을 까맣게 몰랐다. 그 사실에 충격을 받은 앵글턴은 극심한 편집증에 시달리며 매카시즘 시대는 저리가라 할 정도의 초 고강도 스파이 수색전을 벌였는데 이 과정에서 수많은 실력 있는 요원들이 쫓겨나고 전향자를 잡아서 몇 년씩 감금하는 등 CIA를 반쯤 초토화시켰다. 결국 이 광풍은 1974년에 반쯤 미쳐버린 앵글턴이 CIA에서 반쯤 쫓겨나듯 사임하면서야 수습되었다. (당시 CIA의 삽질에 대해 다룬 영화가 2007년에 개봉했던 '굿 셰퍼드'.)[4] 대표작으로 자칼의 날이 있다.[5] 특히 르카레는 MI6 재직 중 필비가 르카레를 비롯한 요원들의 정보를 유출하는 바람에 본인의 현장 커리어가 끝장났다.[6] 얼마나 미웠으면 그의 소설 《팅커, 테일러, 솔저, 스파이》에서 킴 필비를 모티브로 한 이중간첩 빌 헤이든이 검거된 후 소련으로 송환되기 전에 사살해 버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