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1-19 05:12:21

틱꽝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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틱꽝득
釋廣德(석광덕)[1] | Thích Quảng Đức
파일:Bồ_Tát_Quảng_Đức.jpg
출생 1897년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안남 보호령
사망 1963년 6월 11일 (향년 66세)
남베트남 사이공시
사인 소신공양
종교 대승불교

1. 개요2. 생애3. 영향4.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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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베트남의 최고위 고승이다. 소신공양을 통해 큰 영향을 미쳤다.

2. 생애

베트남 불교 단체에 의하면 7살에 베트남 임제종(Lâm Tế tông)에 입문하여 출가했고 1932년까지 수행을 거듭하다가 1932년에 안남불교회가 성립되면서 베트남 중부와 남부 일대를 돌아다니면서 포교와 사찰 재건에 힘을 썼다고 한다. 이후 캄보디아로 유학 가서 상좌부 불교에 대해서도 공부했고 베트남이 프랑스 식민 지배 체제에서 벗어난 후에는 남베트남에 머무르면서 사찰 재건 및 포교, 신도 교화에 힘을 쓰면서 남베트남 불교계의 거목이 되었다.

그러나 바오다이를 내쫓고 남베트남의 대통령이 된 응오딘지엠(Ngô Ðình Diệm)이 불교 탄압 정책과 독재 정치를 펴기 시작했고[2] 친인척들이 대규모로 비리를 저지르면서 남베트남의 형세가 다시 막장이 되기 시작했다. 게다가 불교 탄압 정책에 맞서서 저항하던 승려들을 무차별 진압하는 일과 베트남 곳곳에서 가톨릭을 내세워 불교 신자인 마을 주민들을 강제로 가톨릭으로 개종시키는 일도 벌어졌다.

1963년 5월 8일은 부처님오신날(베삭 데이) 2507주년인 만큼 남베트남 전역에서 일련의 축하 행사가 열렸는데 가톨릭 신자였던 응오딘지엠은 불교 행사를 못마땅하게 여기고 종교적인 상징을 내세우고 거리 행진하는 것은 법에 저촉된다며 부처님오신날(베삭 데이) 축하 행사를 진압할 것을 경찰에 명령했다. 당연히 진압 과정에서 충돌이 발생했고 경찰의 총에 맞아 사망하는 사람도 발생하였다.[3]

틱꽝득은 이에 맞서 1963년 6월 11일 불교 승려들의 침묵 가두시위가 있었던 사이공에서 가부좌를 틀고 주변 승려들의 도움을 받아 휘발유를 몸에 붓고[4] 소신공양을 감행하였다. 그리고 사진과 영상이 특보에 호외, 속보를 타고 전 베트남은 물론 전 세계로 일파만파 전파되었다.[5] 소신공양 당시 67세(세는나이), 법랍[6] 47년이었다.

2.1. 소신공양

내가 눈을 감아 부처님의 곁으로 가기 전에, 국민들을 받들고 조국의 무궁한 영광을 위해 종교적 평등을 실행하기를 응오딘지엠 대통령께 정중히 간청드립니다. 모든 덕 높으신 비구, 비구니, 부처님의 자손들이여, 그대들이 결속하여 불교를 지키기를 바라며 이 몸을 바칩니다. 나무아미타불.
Trước khi nhắm mắt về cảnh Phật, tôi trân trọng kính gởi lời cho Tổng thống Ngô Đình Diệm nên lấy lòng bác ái từ bi đối với quốc dân và thi hành chánh sách bình đẳng tôn giáo để nước nhà vững yên muôn thủa. Tôi thiết tha kêu gọi chư Đại Đức Tăng Ni Phật tử nên đoàn kết nhất trí hy sinh để bảo tồn Phật giáo. Nam Mô A Di Đà Phật
𠓀欺𥄮眜𧗱境佛碎珍重敬𠳚𠅜朱總統吳庭艷𢧚𥙩𢚸博愛慈悲對貝國民頗施行正册平等宗教底渃茹凭安𨷈咀。碎切他呌噲諸大德僧尼佛子𢧚團結一智。希生底保存佛教。南無阿彌陀佛[7]
틱꽝득이 소신공양 전 유언으로 남긴 편지
I was to see that sight again, but once was enough. Flames were coming from a human being; his body was slowly withering and shriveling up, his head blackening and charring. In the air was the smell of burning human flesh; human beings burn surprisingly quickly. Behind me I could hear the sobbing of the Vietnamese who were now gathering. I was too shocked to cry, too confused to take notes or ask questions, too bewildered to even think ... As he burned he never moved a muscle, never uttered a sound, his outward composure in sharp contrast to the wailing people around him.
나는 그 광경을 다시 볼 수도 있었지만 한 번으로 족했다. 불꽃이 솟구치더니 몸이 서서히 오그라들면서 머리는 새까맣게 타들어갔고, 사람 살 타는 냄새가 진동했다. 놀라울 정도로 인간의 몸은 빠르게 불탔다. 내 뒤에 모여든 베트남 사람들은 흐느끼며 울기 시작했다. 너무나 충격을 받은 나는 울음도 나오지 않았다. 극도로 혼란스러워 메모를 작성하거나 질문을 던질 수도 없었다. 생각조차 할 수 없을 지경이었다... 불길에 휩싸여 타들어 가면서도 틱꽝득은 미동은커녕 신음소리 하나 내지 않았다. 그런 그의 모습이 울부짖는 주위 사람들과 날카로운 대조를 이루었다.
뉴욕타임스 베트남 특파원 데이비드 핼버스탬(David Halberstam, 1965), 《The Making of a Quagmire》, New York: Random House
  • 틱꽝득의 소신공양 사진. 충격적일 수 있으므로 클릭 시 주의- 사진과 영상이 전 세계로 보도된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소신공양의 사례일 것이다. 참고로 해당 소신공양 장면을 촬영한 미국의 사진가이자 저널리스트인 '맬컴 브라운(Malcolm Wilde Browne)'은 이 사진과 베트남 전쟁의 이면을 담은 생생한 기사 및 부패한 응오딘지엠 정권에 대한 고발로 1964년 퓰리처상 국제보도 부문상을 수상했으며 2012년 8월 28일에 사망하였다.

정권에 저항한 분신자살 시위의 성격이 강하다고 할 수도 있지만 끝까지 가부좌를 풀지 않고 비명조차 지르지 않는 위업은 종교적인 열망과 독재 정권의 패악에서 고통받는 민중을 구원하고자 하는 진심을 기반으로 했기 때문에 가능했다고밖에 볼 수 없다. 인간이 느낄 수 있는 통증 중 굉장히 고통스럽기로 유명한 작열통을 죽음에 이를 때까지 겉으로 드러내지 않고 태연하게 견딘 것은 평범한 인간을 초월한 인내력이 아니면 불가능한 행위다. 문지방에 발가락 끝을 부딪혔을 때[8]도 저절로 아! 소리가 나오고 얼굴이 찌푸려지며 때론 욕설까지 나오기도 하는데 온몸이 활활 불타는 상태에서도 신음 한 번 내지 않고 가부좌를 유지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울지는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9]

소신공양을 감행하기 전에 그는 제자들에게 "앞으로 넘어지면 흉한 것이니 해외로 피신해야 하며 뒤로 쓰러지면 투쟁이 승리할 것"[10][11]이라는 말을 남겼고 뒤로 쓰러져 사망했다. 이건 정말 자유에 대한 갈망이 낳은 기적적인 일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신체는 반사작용을 통해 고통이 있는 부위를 중심으로 움츠러들게끔 설계되어 있어 소사체는 근육들이 수축해서 자연스레 안으로 오그라들기 때문이다.[12] 그렇게 되지 않았다는 것은 본인이 고통을, 그것도 작열통을 견디면서 그 고통과 동반되는 신체작용을 의식적으로 억제했음을 의미한다. 그는 그렇게 표현조차 하기 힘든 고통을 인내하면서 초월적인 의지로 몸을 펴고 사망했다. 이 경이로운 광경에, 그리고 그 숭고한 최후에 경찰들은 넋을 잃고 멍하니 서서 바라보았으며 주위의 승려들은 틱꽝득에게 일제히 절을 올렸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승려들을 감시하던 경찰들도 같이 그에게 절을 올리거나 받들어 총 자세로 예를 갖추었다.

Google에 틱꽝득을 검색하면 당시의 상황을 찍은 모습이 여럿 나온다.(불에 탄 시신의 흑백 사진이므로 주의)

소신공양이 끝난 후 그의 법체는 다시 한 번 소각로에 넣어져 8시간 동안 화장(火葬)되었지만 그의 심장은 전혀 타지 않았다는 말이 있다.[13] 이후 남베트남 정부에서 파견된 비밀경찰이 황산을 뿌려 훼손을 시도했으나 이마저도 실패[14]해 금속 용기에 구리줄로 봉인하여 스웨덴 은행에 맡겨졌다가 하노이 국립 은행에서 소장 중이라고 한다.

3. 영향

이 사진이 미국 언론에 보도된 덕분에 원래도 이미지가 안 좋아지던 응오딘지엠 정권의 이미지는 바닥을 치게 되었고 응오딘지엠을 그때까지 지원하던 미국은 부패 정권을 돕고 있다는 비판을 피할 수 없게 되면서 베트남 개입의 명분이 약해졌으며, 인구의 90%에 달하는 불교를 탄압하면서 시선을 끌던[15] 응오딘지엠 정권의 민심은 더욱 분노해 사회 혼란은 가중되었다.

게다가 응오딘지엠의 동생인 응오딘누의 부인이자 역시나 당시 응오딘지엠 정권의 부패와 깊숙히 연결되어 있었던 '마담 누'[16] 쩐레쑤언[17]은 틱꽝득의 소신공양에 대해 미국 방송 인터뷰에서


그에 비하면 불교 지도자 놈들이 한 게 뭐가 있습니까? 기껏해야 중놈 하나 바베큐로 만든 것뿐인데 말입니다.
What had the buddhist leaders done comparatively? The only thing they have done: They have barbecued one of their monks.

이런 마라도 차마 못 할 고인에 대한 모욕을 해서 베트남 국민들의 깊은 분노를 불러일으켰다. 이외에도 서구화에 항의하는데 미국제 가솔린을 쓰고 있으니 누군가에 의한 계획된 것이 아니냐고 이야기하면서 "중놈들이 그렇게 불쇼가 하고 싶으면 미국제 가솔린 말고 나한테 오면 내가 가솔린 공급해 주겠다", "중놈들이 활활 불타오르게 놔두고 우리는 그 불쇼를 보면서 박수나 쳐 주면 된다"등 종교를 떠나 같은 사람으로서 차마 입에 담지 못할 발언들을 아무렇지도 않게 말해 존 F. 케네디 미국 대통령를 포함해 그 자리에 같이 있었던 미국인들도 "뭐 저런 정신나간 미친 여자가 있어?"라며 어이없어했을 정도였다.[18]

쩐레쑤언은 응오딘지엠 대통령 본인의 부인이 아닌 제수였지만 응오딘지엠이 독신주의자라 영부인이 없어 실질적인 퍼스트레이디 역할을 하던 사람이었다. 그녀는 친오빠가 공산주의자들 손에 처형된 일로 인해 반정부 세력에 대해 앙심을 품고 있었는데, 한 개인으로서야 심정을 이해할 만하지만 일국의 퍼스트 레이디로서는 부적절할 정도로 지나치게 극단적인 증오심을 표출하고 다녔다. 이거 하나만 문제가 아니라 오만가지 비리와 폭정에 관여하는 심각한 무개념이었기에 베트콩의 선전에도 간접적으로 도움이 되었다. 미국 보수파들도 이를 두고 스스로 베트남 반공 세력을 좀먹게 한다고 한탄했을 정도였다.[19] 아무리 미국이 반공주의 국가이자 표현의 자유를 추구하는 국가라고 해도 이 정도로 심각한 고인드립은 용납이 안 될 정도로 대단히 질 나쁜 욕이었다. 엄청난 작열통 속에서 이를 의지로 버티면서 앞이 아닌 뒤로 넘어진 것은 미국인들과 베트남을 깔보던 사람들까지 감명받을 일이었는데도 그걸 두고 '바베큐'라고 비하한 것이니 그걸 들은 사람들의 반응은 말할 것도 없다. 뒤늦게서야 발언이 경솔했다고 사과했지만 받아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여기에 응오딘지엠 대통령은 대통령대로 정신 못 차리고 불교도들의 저항을 강경하게 찍어눌렀고 8월 초 응오딘뉴가 사이공의 싸 러이 사원에 군경을 보내 짓밟아 반발심을 초래했다. 쩐레쑤언이 가사를 입었든 말든 외국인 선동자들은 모두 추방해야 된다고 주장하면서 강경진압을 옹호한 것은 물론, 이를 두고 "1955년 빙쑤옌 진압 이후로 내 인생에 가장 행복한 날(the happiest day in my life since we crushed the Bình Xuyên in 1955)"이라는 발언까지 하면서 불교 신자들을 공산주의자로 몰아갔다. 베트남 국민의 90%가 넘는 불교도들이 분노한 것은 당연했지만 응오딘지엠은 이게 다 빨갱이들의 준동일 뿐이라는 자신의 생각을 굽히지 않았다. 가톨릭을 내세워 불교 신자들을 공산주의 내지 그 협력자로 몰면서 주민들을 가톨릭으로 강제개종시키는 짓도 여전히 각지에서 자행되었다.

응오딘지엠 정권의 이런 막장 대응에 식겁한 백악관은 결국 응오딘지엠 정권을 종교를 탄압하는 악질 부패 독재 정권으로 인식하게 되었다. 미국은 1961년의 쿠데타를 묵인했으며 1963년 10월에는 백악관 주도로 응오딘지엠 교체가 논의되었고 케네디 대통령은 응오딘지엠 제거에 동의했다. 이러한 미국의 모습에 남베트남의 군사 지도자들은 미국이 응오딘지엠에게 완전히 등을 돌렸다는 것을 확신하고 크게 고무되었다.

결국 1963년 11월 베트남 공화국 육군의 즈엉반민(楊文明)[20] 소장이 일으킨 군사 쿠데타로 응오딘지엠 정권은 무너졌다. 한편 응오딘지엠 대통령은 사이공의 한 성당으로 달아난 뒤 미국 대사에게 지원을 요청하고 미국의 입장을 요청했지만 주 베트남 미국 대사 롯지는 아무런 입장이 없다며 사실상 도움을 거절했고 '자신은 누가 쿠데타를 일으켰는지 모른다'면서 신변상의 이유로 하야를 권하고 '쿠데타 세력이 만약 당신이 항복한다면 안전한 출국을 보장한다'고 말하면서 사실상 쿠데타 세력에 편중된[21] 모습을 보였다. 실망한 응오딘지엠은 질서 회복에 노력할 것이라고 하고 전화를 끊었다.

하지만 대세는 완전히 기울어졌고 이후 동생 응오딘뉴(吳廷瑈 1910~1963)와 함께 11월 2일 오전 6시에 쿠데타군에게 항복했으나 군부에게 처형당하는 비참한 최후를 맞았다. 쿠데타군이 두 형제의 안전한 출국을 보장하겠다며 호송용 육군 장갑차를 보냈고 거기에 탑승하자마자 양손을 결박한 뒤 장갑차 안에서 총살해 버렸다. 물론 군부는 그들이 탈출 중에 사살당했다고 주장했지만 후일 공개된 처형 직후의 사진은 양 손이 묶여 있고 머리에 총알구멍이 난 전형적인 총살당한 사람의 모습이었다.

한편 응오딘뉴가 참혹하게 사살당할 때 방미 중이던 쩐레수언은 얼른 달아나서 프랑스, 미국, 영국 등 외국을 떠돌다가 87세까지 살며 천수를 누렸다. 물론 목숨만 건졌을 뿐 말년은 초라해서 2011년 4월 24일 생을 마감한 곳이 이탈리아 로마의 초라한 호텔이었다. 죽기 얼마 전에 베트남 정부에 대해 고향에서 죽고 싶다고 애원했으나 베트남 정부나 여론은 "우리는 그쪽네 시체도 받아줄 생각이 추호도 없고 50년 가까이 지났어도 당신 죽이고 싶어하는 사람 아직 많으니까 베트남에 오면 당신 시체도 보전 못 한다. 그러니까 그냥 가만히 해외에서 죽어라."시체 보전하고싶다면 오지말라는 친절한싸늘한 반응을 보였다.[22] 결국 쩐레쑤언은 이탈리아의 공동 묘지에 대충 묻혔다.[23] 방미 당시 두 딸을 데리고 있었는데 큰딸은 1967년에, 작은딸은 2012년에 차례로 사망했다. 사인은 공교롭게도 모두 교통사고였다고 한다.

베트남 전쟁의 시작과 끝을 각각 한 장의 사진으로 표현한다면 틱꽝득의 소신공양 사진으로 시작하여 소녀의 절규로 끝나지 않을까 하는 말이 있다. 영화 왓치맨에도 오프닝에서 베트남전을 상징하는 TV 영상으로 위 장면이 나왔다.

어쨌든 이 사건 이후 1970년대부터 서구에서는 뉴에이지와 같은 반동적 흐름이 나타났는데 이런 흐름이 이 사건과 아주 무관하다고 보기는 힘들 것이다.

틱낫한 스님이 마틴 루터 킹 목사에게 이 사건을 거론하면서 남긴 말도 전해지고 있다.
…1963년 베트남 스님들의 소신공양은 서구 기독교의 도덕 관념이 이해하는 것과는 아무래도 좀 다릅니다. 언론들은 그때 자살이라고 했지만 그러나 그 본질을 살펴보면 그것은 그렇지 않습니다. 그것은 저항 행위도 아닙니다. 분신 전에 남긴 유서에서 그 스님들이 말하고 있는 것은 오로지 압제자들의 마음에 경종을 울리고 그들의 마음을 감동시키는 것을 목적으로 하고 있으며, 베트남 사람들이 겪고 있는 고통에 대하여 세계의 이목을 집중시키는 것을 목적으로 하고 있습니다 [24]……

사실 틱광둑의 소신공양 이전에도 불교 탄압에 항의하는 승려들의 분신 사례가 북베트남과 중국에서도 역시 발생한 바 있었기 때문에 북베트남 사회주의 정권도 종교적 신념에 의한 소신공양을 반체제 행위로 보아서 달가워하지 않았고, 분신 당시 틱꽝득의 의연한 태도와 심장 보존 등의 기적이 사람들에게 회자되는 것도 유물론을 신봉하는 사회주의자들이 보기에 그리 달가운 것은 아니었다. 사회주의자뿐 아니라 쩐레쑤언을 포함한 남베트남의 가톨릭 신자들 중 일부도 틱꽝득이 약에 취한 상태가 아니었는지 의심하기도 했으며, 미국에 거주하는 남베트남 출신 이민자들 중 일부는 '틱꽝득이 베트콩 첩자들에게 납치되어 마취당한 후 희생되었다'는 음모론을 지금까지 제기하기도 하지만, 이들의 주장은 당시 현장을 목격한 사람들의 주장과도 어긋나는 데다 타당한 근거로 뒷받침되지 못한다.

일각에서는 "결과적으로 틱꽝득이 소신공양을 벌였기 때문에 남베트남이 무너져서 베트남이 적화통일된 것 아니냐"고 남베트남 붕괴의 원인을 틱꽝득에게 몰아가려고 하는데, 이는 명백하게 인과관계를 호도한 억지 주장일 뿐이다. 틱꽝득의 소신공양 배경에는 분명히 남베트남의 독재와 부패 그리고 종교 차별[25] 등의 분명한 실정이 있었으며, 하다못해 틱광둑이 '제발 더 이상 종교 차별하지 말아 달라'는 편지를 남기고 분신했을 때라도, 쩐레쑤언의 문제의 막말이나 불교도를 공산주의자로 몰아가는 짓거리만 하지 않았어도(그러니까 사고 난 뒤에 뒷수습이라도 제대로 했어도) 남베트남 사람들이 남베트남 정권에 대해 그렇게까지 분노하지는 않았을 것이고, 미국도 그런 남베트남을 종교 탄압하는 독재 국가로 인식하게 되는 일은 없었을 것이며, 남베트남이 멸망하는 지경에는 이르지 않았을 것이다. 틱광둑의 소신공양을 탓하기 전에 틱광둑이 그렇게 소신공양이라는 결정을 내릴 수밖에 없도록 몰아간 남베트남의 부패상이나 종교 차별, 소신공양 이후에조차 "중놈 하나 바베큐 된 거 갖고 되게 난리떠네ㅋㅋ"라는 막말을 내뱉은 쩐레쑤언의 무개념부터 짚고 넘어가지 않으면 안 된다.

4. 기타

  • 세계적으로 유명한 사건이지만 어째 한국에서는 그리 기억되는 사건이 아니었다. 반공주의의 영향과 베트남 전쟁으로 인해 경제 성장의 발판을 마련할 수 있었던 한국의 상황상 베트남 전쟁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을 허용하지 않았던 분위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니 과거에는 교과서에서 틱꽝득의 소신공양 사건을 단순 베트남의 혼란상 정도로 소개했다. 틱꽝의 소신공양에 대해서 당시 대한민국의 한 언론인은 방법의 과격함과 그 내용이 정교 분리에 어긋나는 것임을 들어서 비난하였다. #
  • 틱꽝득 스님에 대한 책은 없었지만 미야우치 가쓰스케(宮內勝典)가 쓴 틱꽝득을 다룬 《분신》이라는 소설이 나왔다.
  • 역시 베트남에서 유명한 승려 중 하나인 틱낫한의 스승이었다는 이야기가 있다.
  • 틱꽝득 스님의 사건을 모방한 사례가 있었다. 사이공 미국 대사관 직원의 어린 아들이 가솔린을 몸에 뿌리고 불을 낸 사건이었는데 다행히 살아남았지만 몸에 불을 지른 만큼 심각하게 화상을 입었고 나중에는 "어떤 느낌인지 궁금해서 그랬다"는 한 마디를 했다.
  • 냉소적인 사람들은 틱광득의 분신에 대해 정작 뒤에서 자기들은 안 죽고 순진한 스님을 꼬드겨 앞세워 공개적인 퍼포먼스 마냥 죽인 뒤 '시체팔이'로 악용한 것 아니냐고 비꼬기도 하는데[26] 틱꽝득은 저항 시위와 소신공양 사건의 주도자이자 주체자였으므로 가스라이팅이나 시체팔이니 하는 단어를 운운하면서 틱광득의 분신을 깎아내리려는 해당 주장은 논리적 비약과 왜곡이 심한 해석이며 대를 위해 소를 희생한다는 생각을 남에게 강요하거나 남을 희생시킨다면 그 집단을 비난할 수 있지만 그러한 생각으로 자기 스스로 희생하는 것은 그의 철학을 문제삼을지언정 절대 아무나 할 수 없고 감정적으로도 할 수 없는 매우 숭고하고 고귀한 행동임에는 틀림없다. 주변의 승려들은 대부분 틱꽝득의 제자들로 사전에 행동을 철저히 지시받았을 테고 영상의 중간에 보면 감정이 무너져 경찰 저지선을 뚫고 들어가려고 밀치는 광경이 몇 번이나 포착되며 현장을 전한 여러 외신들에 따르면 미동도 없이 차분한 자세로 분신하는 틱꽝득과 대조적으로 주변에서는 울부짖음과 불경을 외는 소리가 가득했다고 증언했다. 이를 보아 집단살인이니 광기니 가스라이팅이니 하는 비판은 매우 편협하고 무지한 견해라고 볼 수 있다. 틱광득이 분신 전 그의 몸에 기름을 붓는 승려를 가리켜서 대를 위해 소를 희생한다는 전체주의적 명분이 있다고 한들 스님이 자기 아들이었어도 태연히 불을 붙일 수 있었겠느냐며 현대 사회에서는 아무리 상대가 죽여 달라고 했다 한들 상대를 죽이면 '타살'이 된다고 하는데 틱광득이나 다른 승려들은 모두 당시 남베트남 정권이 반공을 내세워 자행하던 종교 편향 및 불교 탄압책에 대한 문제의식을 공통적으로 공유하고 있었고 주변의 승려들은 그를 스승으로 모시던 제자들이었으며 장기간 투쟁으로 철저하게 합의하고 결정하고 계획을 세웠던 일이었다는 점에서 광기라거나 집단살인이라는 관점은 매우 편협한 해석이다.
  • 게임 리그 오브 레전드의 챔피언 리 신의 모티브가 바로 틱꽝득이었다. 초창기 리 신의 스토리는 소신공양으로 인해 눈이 멀었다는 스토리였지만 리그 오브 레전드 유니버스로 스토리가 정립된 후에는 녹서스에 맞서서 자신의 능력을 쓰다가 시력을 잃었다는 설정으로 바뀌었다.
  • 2018년 1월 7일자에 방송된 신비한 TV 서프라이즈에도 영원한 심장이라는 제목으로 다루었다.
  • 미국의 랩 메탈 밴드 레이지 어게인스트 더 머신의 데뷔 앨범 Rage Against The Machine앨범 아트로 위 퓰리처상의 사진이 인용되었다. RATM 밴드의 정부 반항적인 성향에 걸맞은 선정이다.
  • 응우옌 왕조의 수도였던 후에 외곽의 티엔 무 사원이 틱꽝득 스님이 생전에 거처하던 곳이었고 틱꽝득의 기념관도 설립되어 사이공으로 갈 때 타고 갔던 차가 전시되어 있다. 박물관 전시 실황


[1] 광덕 스님이라는 뜻이다. 중국 불교의 영향을 받은 동아시아 승려들은 석가모니의 제자라는 뜻으로 법명 앞에 석(釋)자를 마치 성씨처럼 붙이는 관습이 있으며 지금도 일부 승려들은 이렇게 한다. 중국 동진시대의 고승 도안(道安, 312~385)이 증일아함경의 "출가하면 모두 석자(釋子)가 된다."는 구절을 근거로 승려들은 모두 석(釋)자를 성처럼 써야 한다고 주장한 것에서 유래한 오래된 관습이며 한국에서도 1500년 전 화랑들의 스승으로 세속오계를 지은 신라원광삼국유사 원문에는 '석원광'으로 적혀 있고 오늘날 한국 승려 중 현각도 자신의 페이스북 등에서 사용하는 이름은 '석현각'이다.[2] 응오딘지엠은 가톨릭 신자였다.[3] 응오딘지엠은 진압 과정에서 벌어진 충돌에서 경찰의 총에 사망한 이들의 유가족에 대해 국가 차원의 손해배상을 추진했지만 이를 반대한 것이 쩐레쑤언이었다.[4] 현장의 뒷편에는 틱꽝득이 사이공으로 내려올 때 탔던 오스틴 모터 컴퍼니 웨스트민스터 차량이 보닛이 열린 채로 정차되어 있었는데 이곳에서 휘발유를 추출했다. 물론 이 차도 그의 기념관에 전시되어 있다고 한다.[5] 한국에도 1963년 6월 12일자 경향신문이 소식이 보도되었다.[6] 불교에서 비구계를 받은 해를 원년으로 계산한다.[7] 원문은 쯔놈으로 되어 있다. 당시만 해도 베트남의 원로 승려들은 한놈을 구사할 수 있었다.[8] 이 고통을 작열통으로 비견하자면 불 붙은 종이를 아주 잠깐 몸에 댔다가 떼는 정도에 불과하다. 그런데 이러한 불이 전신을 태우는 걸 1분 이상 조용히 견딘다는 건 의지 문제를 떠나서 그 전에 쇼크로 기절할 수도 있는 수준이다.[9] 다만 영상에서도 나오듯 맨정신으로 스스로 몸에 불을 붙인 것이 아니고 이미 가부좌를 틀고 깊은 명상에 빠져 있는 상황에서 제3자가 몸에 불을 붙인 것이다. 2008년 영국의 최면술사는 마취 없이 오른손 절개수술을 받았는데 약 30초간 스스로에게 자기최면을 걸고 83분여의 수술을 받은 그는 오른손목에서 뼈를 잘라내는 과정이 느껴졌지만 아프지는 않았다는 소감을 밝혔다. 사람이 깊은 명상(무아지경)이나 최면 상태에 빠지면 통증을 인위적으로 컨트롤할 수도 있기 때문에 실제로 마취 개발 이전에는 수술 중 통증 문제로 인해 최면을 활용하기도 했다. 물론 이것은 고승의 수준이었기 때문에 대단한 것임은 틀림없으나 통증을 '참아낸 것'이 아니라 '아예 못 느꼈을 수' 있다. 그 정도 경지를 단지 가부좌 틀고 명상하면서 이루어냈다는 점에서 이미 평범한 인간의 경지를 아득히 뛰어넘었다.[10] 그리고 정말 이 말은 여러 의미로 예언이 되었다. 1차적으로 베트남 불교의 투쟁이 그의 소신공양으로 승리했고 2차적으로 호치민의 베트남 민주 공화국(북베트남)의 '투쟁'이 베트남 전쟁 승리로 성공하였으며 3차적으로 그런 베트남이 개혁개방을 하면서 종교의 탄압이 약해져 베트남의 종교 인구가 증가했다.[11] 단순히 상징적인 표현이 아니라 틱꽝득 승려 본인의 의지와 지식에서 기반한 자기 실현적 예언일 가능성이 높다. 사람이 고통을 겪으면 몸이 오그라들어 앞으로 넘어지기 마련이고, 이는 사실 조금만 생각해보거나 관련 지식, 경험이 있으면 알 수 있는 일이다. 이를 알고 있던 틱꽝득 승려가 자신이 이 불에 타는 고통을 참아내고도 의식을 유지한채 뒤로 넘어질 수 있다면 인간의 의지, 숭고한 정신이 물질적 한계를 초월 할 수 있다는 증거로 생각될 수 있다고 여겼을 것이다.[12] 일명 투사형 사체. 팔과 다리가 오그라들어서 권투선수처럼 보이기 때문에 이런 이름이 붙었다. 이와 관련된 예제로 자해공갈죄 사건에서 "뒤로 쓰러졌다"고 하면 일반적으로 자해공갈 피의자와 옹호자의 증언에 대한 신빙성이 급격히 줄어든다. 사실상 실수로라도 이런 증언을 하면 증언이 오락가락할 수밖에 없다.[13] 오늘날까지도 심장은 따로 남아 있는데 심장이 숯이 되었다는 얘기도 있고 전혀 타지 않았다는 얘기도 있다. 검색해보면 사진을 볼 수 있지만 어두운 색깔이 숯이 된 것인지 단순히 그을린 것인지는 구별하기가 어렵다.[14] 제자 승려들이 화장을 끝내려고 타지 않고 남은 심장을 염산에 녹이려다가 실패했다는 이야기도 있다.[15] 1963년 6월 8일 쩐레쑤언은 여성연대 운동을 통해 불교 신자들을 중립주의자로 고발하는 성명을 발표하면서 불교를 사실상 공산주의 협력자라고 비난했다.[16] 서양에서는 드래곤 레이디라고 불렀는데 절대 좋은 의미에서 붙인 별명이 아니다. 용을 왕이나 황제의 상징으로 여기는 동양과는 달리 서양의 기독교 문화권에서 드래곤은 묵시록의 붉은 용과 같이 사악한 악의 최고 자리인 사탄과 같은 존재인지라 그 의미는 마귀 같은 년 정도다. 불교도 부모에게서 태어났으나 프랑스인 학교에서 공부하면서 프랑스를 준거집단으로 삼았기 때문에 불교 분위기의 집안을 지긋지긋해하여 응오딘뉴와 결혼하자마자 가톨릭으로 개종했다. 하지만 불교 분위기가 지긋지긋하다며 가톨릭으로 개종해놓고 정작 본인의 행동이나 사고방식은 정작 가톨릭과는 거리가 멀어도 한참 멀었다.[17] Trần Lệ Xuân, 陳麗春, 1924년 4월 15일~2011년 4월 24일[18] 당장 케네디도 가톨릭 신자였는데 같은 가톨릭 신자여도 절대로 용납 불가능한 망언을 내뱉은 것.[19] 오히려 미국 정부는 사태가 매우 심각하다는 것을 깨닫고 직접 베트남에 사절을 보내 문제의 절로 가서 위로할 정도였다.[20] 응오딘지엠이 직접 장군으로 임명한 것으로도 유명했고 이 사건 이후 만 12년도 못 되어 북베트남군에게 사이공이 함락될 때 잡혀간 마지막 대통령으로 더 유명하다.[21] 쿠데타를 누가 일으켰는지도 모르는데 쿠데타 세력의 입장은 누구한테 들어서 알고 있었을까?[22] 사실 베트남 정부도 이럴 만한 게 쩐레쑤언은 한때 해외를 떠돌면서 반공투사 행세한 적도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살아 생전에도 극단적인 반공 세력에게 지지받은 것을 제외하면 해외의 베트남 정부에 불만을 가진 이들 역시 저 여자도 다를 거 없다고 혐오했다.[23] 이 사건으로부터 시간이 많이 지난 후에 달렸을 영상의 댓글을 보아도 쩐레쑤언에 대한 욕설이 99%일 정도인 만큼 당시의 반응은 짐작하고도 남을 것이다.[24] 틱꽝득 이후 승려들의 소신공양은 티베트에서 다시 등장했다. 티베트 승려들의 소신공양도 틱낫한의 말처럼 티베트인들이 겪고 있는 고통에 대해 세계의 이목을 집중시키고 압제자들의 마음에 무언가 일말의 경종을 울리는 것을 목적으로 하고 있다고 해석할 수 있다.[25] 아무리 북베트남이 공산 국가이고 종교를 좋아하지 않는다고는 하지만, 남베트남 역시 반공을 이유로 독재를 자행하면서 각지에서 종교를 내세워 불교 신자를 공산주의 부역자로 몰았고, 마을 주민들을 협박해 강제로 가톨릭으로 개종시키는 짓거리를 벌였다. 어쩌고 보면 현재 베트남 보다도 종교적 자유는 가톨릭이 아니면 없다고 봐도 될 정도.[26] 실제로 한국에서도 미네르바 사건 당시 미네르바가 감옥에 있었을 때 이상한 사람들이 면회를 와서 당신이 자살하면 이명박 정부를 무너뜨릴 수 있다며 제발 자살해 달라고 읍소하며 설득하여 기겁했다고 밝힌 적이 있다. 만약 미네르바가 이들의 가스라이팅에 세뇌되어 자살했다면 반 이명박 정부 선동의 도구로서 활용되었을 것이라면서 말이다. 하지만 틱꽝득 사후 북베트남 정권에서도 틱광둑의 소신공양을 반체제 행위로 보아 달가워하지 않고 평가절하했던 것을 보면 음모론자들이 말하는 '배후 세력'이 북베트남이었다고 보기는 어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