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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ul Keres 파울 케레스 | |
<colbgcolor=#000><colcolor=#fff> 출생 | 1916년 1월 7일 |
러시아 제국 나르바 | |
사망 | 1975년 6월 5일 (향년 59세) |
핀란드 헬싱키 | |
국적 | 소련 에스토니아 SSR (現 에스토니아) |
타이틀 | GM (1950) |
세계 챔피언 | 1930-60년대 중반 |
Elo 레이팅 | 2615 (최대 레이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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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에스토니아의 체스 선수로, 30년대 중반부터 60년대 중반까지 세계 체스 그랜드 마스터들 중 1명이었다.2. 생애
1916년에 태어나 13세(!)부터 공식 대회에 참가해서 각종 대회에서 상을 탔다.본래 진로는 수학 전공 후 언론인이 되는 것이었지만, 결국 체스 선수로 전향했다.
1930년대 여러 토너먼트에 참가하며 알렉산더 알레킨과의 챔피언전이 계획될 정도로 우수한 성적을 거뒀으나 유럽 전역에는 2차 세계대전의 암운이 드리우고 있었고, 다른 선수들처럼 그에게도 험난한 시기가 기다리고 있었다.
1939년 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고 상술한 챔피언전 등 많은 경기들이 취소되었지만 그는 에스토니아의 대표로서 개전 당시 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의 토너먼트에 참가하는 등 경력을 지속하려 노력했다. 그러나 다음 해 소련이 에스토니아를 침공해 합병해버렸고, 케레스는 소련 국적이 되었다. 그는 1940년 소련 체스 챔피언십 대회에서 쟁쟁한 선수들 사이로 미하일 보트비닉 다음 2위를 기록했다.
불운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1941년, 이번에는 나치 독일이 소련을 침공했고 몇 달 뒤 에스토니아와 그곳에 잔류했던 케레스는 나치 독일의 치하에 놓이게 되었다. 케레스는
과거를 털어내고 1946년부터 그는 다시 소련 국적으로 선수생활을 계속했다. 당시 소련에는 케레스와 보트비닉은 물론 스미슬로프, 브론슈타인, 탈, 플로어, 타이마노프, 볼레슬라브스키, 아로닌, 아베르바흐, 겔러, 페트로시안, 스파스키, 콜모프 등 가히 공포의 외인구단을 보는 듯한 선수들이 있었다.[1] 물론 그곳에서 케레스의 자리는 항상 상위권에 있었다.
다만 아쉬운 점은 소련 체스 챔피언십에서 1등을 먹어도 세계 체스 챔피언십에는 진출한 적이 없었다는 것이다. 상술한 보트비닉과 탈, 브론슈타인, 스미슬로프, 스파스키 등의 틈바구니에 끼어 체스 챔피언십 직전인 도전자 챔피언십에서 1950(4위), 1953(3명 공동 2위), 1956(2위), 1959(2위)[2], 1962(겔러와 공동 2위), 1965년(스파스키에게 준결승 탈락) 연속으로 1위를 따지 못해 챔피언십에 나가지 못했다. 그러나 마냥 그들에게 무력했던 것은 아니었고 여러 국제 대회에서 강력한 호적수로 평가받았다.
1975년 헬싱키에서 에스토니아로 돌아가던 도중 심장마비로 사망하였다.
3. 기풍 및 기타
전략적, 전술적 능력 모두 뛰어났으며 나이트를 변칙적으로 다뤘다. 어린 바비 피셔를 흑으로 이길 때를 보자면 탈이 시실리안 디펜스에서 마법을 보였다면, 케레스는 카로칸 디펜스를 선보여 백을 서서히 말려버렸다. 그가 경기에서 이겨 본 (당시 현재 또는 미래의)체스 세계 챔피언은 카파블랑카부터 알레킨, 오이베, 탈, 보트비닉, 스미슬로프, 페트로시안, 스파스키, 피셔로 총 9명에 달한다. 특히 그는 탈과 카파블랑카, 오이베를 상대로 전적이 좋다.시실리안 스헤베닝겐의 케레스 어택(6.g4), 루이 로페즈 클로즈드 메인라인의 케레스 디펜스(9.h3 a5, 9...Na5 10.Bc2 c5 11.d4 Nd7), 케레스 디펜스(1.d4 e6 2.c4 Bb4+), 잉글리시 오프닝의 케레스 시스템(1.c4 e5 2.Nc3 Nf6 3.g3 c6), 님조 인디언 디펜스의 케레스 디펜스(1.d4 Nf6 2.c4 e6 3.Nc3 Bb4 4.Qc2 0-0 5.a3 Bxc3+ 6.Qxc3 b6, 4.e3 b6 5.Bd3 Bb7 6.Nf3 0-0 7.0-0 c5 8.Na4), 킹즈 갬빗의 메이슨-케레스 갬빗(1.e4 e5 2.f4 exf4 3.Nc3) 등이 그의 이름을 땄다.
그의 형인 헤럴드 케레스는 물리학자로 에스토니아에서 이론물리학계의 거장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