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7-06 18:26:34

페드로 카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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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초상화 중 가장 잘 알려진 것.
Don Pedro Caro y Sureda (3rd) marqués de la romana (1761~1811)
돈 페드로 카로 이 수레다, 로마나 후작 (3세)

1. 개요2. 생애
2.1. 북방 사단2.2. 반도 전쟁의 발발과 탈출2.3. 반도 전쟁과 요절
3. 평가4. 기타

1. 개요

이베리아 반도 전쟁기의 스페인 장군. 미국 독립전쟁 등에도 참여해 활약했던 군인이나, 사람들에게는 나폴레옹 전쟁기에 스페인의 최정예 부대였던 '북방 사단(División del Norte)'을 이끌며 분전했던 것으로 잘 알려져 있다.

2. 생애

페드로는 발레아레스 제도 마요르카 섬의 도시 팔마의 귀족 가문에서 태어났다. 청소년기부터 군인이 되기 위해 프랑스로 유학, 장교가 되기 위한 과정을 밟았으며, 그의 아버지가 죽어 스페인으로 돌아왔을 때 당시 국왕 카를로스 3세로부터 스페인 해군의 장교직을 제수받게 된다. 그는 살라망카 대학에서 공부를 계속 할 수 있었으며, 졸업 이후에는 마드리드 제국 대학에 입학하게 된다.

그가 경험한 첫 실전은 바로 미국 독립전쟁이었다. 다만 그는 격전이 한창이던 아메리카로 직접 건너가지는 않았으며, 대신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 당시 영국에게 빼앗긴 스페인의 영토들, 즉 메노르카, 지브롤터 등의 탈환전에 참여하게 된다.[1] 그는 성 필립 요세를 함락하는데 기여하였으며, 이후 지브롤터의 해상 봉쇄를 담당하게 된다.

그리고 다들 알다시피 이 전쟁은 영국의 패배로 끝나게 되었고, 스페인은 메노르카 섬을 영국으로부터 되찾을 수 있었다. 페드로는 이 때의 공적을 치하받아 군에서 물러나 유럽을 여행하며 쉴 기회를 얻게 되었다.[2] 그러나 그의 여가는 그리 길지 못했다. 1792년 프랑스 혁명전쟁이 발발하고, 스페인이 이에 참전하게 되자 페드로는 귀국하여 그의 삼촌이 지휘하던 기병대의 장교로 재입대, 1793년에 전선으로 뛰어들게 된다. 훈련이 부족했던 프랑스 혁명군을 상대하며 그는 혁혁한 전과를 세울 수 있었으며, 이 때 세운 전과들은 전후 그를 카탈루냐 방면의 사령관으로 만들게 된다.

2.1. 북방 사단

프랑스 혁명전쟁이 끝남과 동시에 나폴레옹은 프랑스의 정권을 잡고 스스로 황제의 자리에 오른다. 이 당시 전 유럽은 가뜩이나 꼴보기 싫었던 프랑스가 제국을 자칭하며 광역 어그로를 끌자 기다렸다는 듯이 전쟁을 선포, 나폴레옹과 맞서게 된다. 그러나 그 결과는 처참했으며, 당대의 최강국 중 하나였던 신성 로마 제국이 하루아침에 개발살이 나버리고 기껏 맺었던 대불동맹도 순식간에 깨어지게 된다. 나폴레옹 전쟁은 이렇게 이겼다! 나폴레옹 전쟁 끝!으로 순조롭게 종결지어질 듯 했으. 곧 프로이센이 참전해 대불동맹이 재형성, 유럽은 다시 전쟁의 폭풍 속으로 휘말려 들어가게 된다.

물론 스페인도 예외는 아니었다. 당시 스페인은 나폴레옹의 프랑스 제국과는 동맹을 맺고 있었으며, 이어진 독일.폴란드 원정에서도 프랑스의 동맹국으로서 참전하게 된다. 예나-아우어슈테트 전투에서 프로이센을 완파한 나폴레옹은 북독일 주둔군의 전력을 보강하기 위해 스페인에 파병을 요청[3]하는데, 이에 당시 스페인 국왕이었던 카를로스 4세는 페드로를 사령관으로 임명해 15,000명의 스페인군을 파병하게 된다. 이 사단이 바로 스페인의 최정예 사단이라 불리게 되는 '북방 사단'이다. 페드로와 그의 사단은 브륀 원수의 휘하에서 함부르크에 주둔, 슈트랄준트 공성전 등에서 활약하였으며, 이후 덴마크로 기지를 옮겨 베르나도트 원수 휘하로 재배속, 발트해 남서쪽의 방어를 수행하게 된다.

2.2. 반도 전쟁의 발발과 탈출

1808년의 이베리아 반도를 한 단어로 표현하자면 개판만큼 적절한 단어가 없을 것이다. 나폴레옹의 정치적 실책과 조아킴 뮈라만행은 온 스페인인을 분노하게 하였고, 결국 이는 스페인 전역의 항쟁으로 번지게 된다. 심지어 이 항쟁의 불길은 포르투갈에도 옮겨붙어 마침내 전 이베리아 반도가 나폴레옹으로부터 등을 돌리는 형국에 이르게 된다.

페드로 역시 이 소식을 듣게 된다. 문제는 그의 사단과 그 자신이 프랑스군의 휘하에 있었다는 점으로, 고국은 나폴레옹 프랑스에 맞서는 전쟁에 참전하게 되었는데 정작 스페인인인 자신과 병사들은 프랑스를 위해 일하고 있었던 것이다. 당연히 페드로와 그의 병사들은 이런 상황을 전혀 달가워하지 않았고, 오히려 고향의 동료들과 함께 프랑스군에 맞서 싸우기를 원하고 있었다.

한편, 영국군 역시 이러한 페드로의 처지를 잘 알고 있었다. 이베리아 반도 전쟁이 발발함과 동시에 영국은 페드로와의 연락을 취하려 하였으며, 이를 위해 아서 웰즐리의 소개를 받은 스코틀랜드의 가톨릭 사제를 밀무역자로 위장시켜 페드로에게 보내게 된다. 당시 푸넨 섬에 주둔하고 있던 페드로는 이런 제안을 처음에는 의심했으나[4], 휘하의 많은 병사들이 프랑스군에 맞서 싸우기를 원하는 점을 고려해 제안을 승낙, 탈출을 결심하게 된다.

이 탈출 계획은 순조롭지만은 않았는데, 첫 번째 걸림돌은 스페인군이 덴마크 전역에 뿔뿔이 흩어져 있다는 점이었다. 이는 덴마크 각지의 수비를 위해서였기도 했지만, 스페인 공략 이전에 내부의 스페인군을 흩어놓아야 할 필요를 느낀 나폴레옹의 계략 때문이기도 했다. 아무튼 이들을 한 곳에 규합할 필요가 있었는데, 페드로는 당시 베르나도트에 의해 주관된 '호세 1세에게 충성을 맹세하는 서약식'을 빌미로 병사를 모으고자 하였으나 정작 이 소식을 듣고 스페인군 일부가 반발하여 먼저 반란을 일으켜버리는 바람에 계획이 무산되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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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인에의 충성을 맹세하는 페드로와 북방 사단의 병사들.
결국 페드로는 각지의 친 스페인파 사령관들에게 제각기 병사를 통솔해 푸넨 섬까지 올 것을 명령하였으나 여기서 두 번째 걸림돌, 즉 친불파 사령관들의 밀고와 저지가 이어지게 된다. 때문에 14,000여의 병사들 중 성공적으로 푸넨 섬까지 도착한 병력은 9,000명 정도 뿐이었으며, 나머지는 프랑스군덴마크군에 저지당해 항복하여 프랑스군 휘하에 들어가거나[5] 최후를 맞게 된다. 결국 남은 9,000명으로라도 탈출을 감행해야겠다고 결심한 페드로의 지휘 아래 북방사단은 본격적으로 총부리를 돌려 덴마크군을 향해 진군하기 시작했으며, 푸넨 섬의 니보르그 항구를 지키던 덴마크 육군은 싸우기 싫어서 몰래 항구를 버리고 도주, 그나마 있던 해군은 바다로 나가 '여기서부터는 한 발짝도 못 나간다!'라며 버티다 뒤이어 도착한 리처드 키츠 제독의 영국 해군의 공격에 순삭을 당하게 된다.

이후 살아남은 페드로와 그의 병사들은 영국 해군의 수송선을 타고 스페인으로 향하게 된다. 1808년 10월 11일, 페드로의 병사들은 마침내 산탄데르 항구에 도착하는데 성공하였으며, 페드로 본인 역시 10월 19일 라 코루나에 도착, 모두 고국의 땅을 밟게 된다.

2.3. 반도 전쟁과 요절

당시 프랑스군에 맞서 싸우는 스페인군의 수준은 그야말로 오합지졸이었다. 각지의 장교들이 이끄는 군대는 '스페인군'이라는 큰 틀을 제외하면 사실상 완전히 따로 놀고 있었으며, 이 때문에 반격은 커녕 자신들의 거점을 지키기에도 급급했다. 당시 산탄데르가 위치했던 좌익을 지휘하는 장수는 호아킨 블레이크였는데 페드로의 부대는 곧 이들과 합류하기 위해 에스트레마두라로 진격, 호아킨의 스페인군과 성공적으로 합류하게 된다. 안 그래도 열세였던 시점에 9,000의 대병, 그것도 정예병 9,000명이 합류한 것은 호아킨에게 큰 힘이 되어주었으며, 이 힘을 과신한 호아킨은 프랑스군을 향한 공세에 나서기 시작한다.

그러나 호아킨의 군대는 판코르보에서 르페브르의 지휘를 받는 프랑스군에게 패배, 공세는 실패로 돌아가게 된다. 하지만 스페인군 역시 단 600명의 병력 손실만을 내고 후퇴에 성공하는 등 과거와는 확연히 다른 모습을 보여주었으며, 이어진 발마세다 전투에서는 역으로 방심한 프랑스군을 털어버리는 활약까지 하게 된다. 이 두 전투에서 페드로가 열심히 키운 북방 사단은 제 몫을 다 했으며, 프랑스군을 곤경에 빠뜨렸다.

이 상황을 그냥 보고있을 나폴레옹이 아니었다. 나폴레옹은 클로드 빅토르 휘하의 프랑스군에게 호아킨이 이끄는 스페인군을 박살낼 것을 명령, 1808년 11월 10일 에스피노사에서 스페인군과 맞붙는다. 처음에는 스페인군을 얕보았던 빅토르의 실책과 북방 사단의 활약으로 프랑스군이 약간의 피해를 입었으나, 하루 뒤인 11일, 빅토르가 정신을 차리고 스페인군을 본격적으로 몰아붙이며 전세가 역전, 호아킨의 스페인군이 완전히 무너지고 만다. 열세 속에서도 후퇴에 성공해 전멸은 면한 스페인군이었지만, 3,000의 병력을 잃고 부대의 체계가 완전히 무너져 내린 것은 굉장한 손실이었다. 아이러니하게도 같은 시각, 페드로는 호아킨을 대신해 스페인군 좌익의 갈리시아군을 지휘할 총사령관의 직위에 임명되었으며, 그가 임명된 뒤 마주한 것은 뿔뿔이 흩어지고 남은 6,000명의 갈리시아/북방사단 병사들 뿐이었다.

그러나 페드로는 남아있는 병사들을 적극적으로 사용하고자 한다. 당시 이베리아 반도 영국군의 사령관이던 존 무어경의 후퇴를 돕기 위해 빌라프란카에 주둔하는 소수의 프랑스군을 전멸시키는 등, 전면전은 피하되 계속해서 프랑스군의 힘을 갉아먹는 방식[6]으로 프랑스군을 괴롭혔으며, 이는 프랑스군의 산파요 전투 패배, 아서 웰즐리가 이끄는 영국군의 포르투갈 상륙과 맞물려 술트 원수가 갈리시아를 포기하게 만드는데 일조한다. 결국 술트가 웰즐리를 상대하기 위해 포르투갈로 향했을 때 페드로는 아예 한 술 더떠 갈리시아 동쪽의 아스투리아스까지 탈환해버린다.

이후 아서 웰즐리가 이끄는 영국-스페인 연합군 장교의 일원으로 프랑스군을 이베리아 반도에서 몰아내는데 일조하게 된다. 그러나 1811년 1월 23일, 바다호스 탈환을 앞두고 호흡 곤란으로 인해 숨지게 된다. 그의 나이 50이었다.

3. 평가

상술되었듯이, 그는 최정예 부대를 이끌며 혁혁한 전공을 세웠고, 부대가 완전히 무너진 이후에도 신중하면서도 기회를 놓치지 않는 적극적인 공세로 이베리아 반도의 프랑스군을 계속해서 괴롭혔다. 당시 같은 전선에서 싸웠던 아서 웰즐리가 거의 유일하게 인정해준 스페인군 장교였다고. 때문에 그가 죽었다는 소식을 들은 뒤 매우 아쉬워했다고 전해진다.

4. 기타

영어가 된다면 읽어보자. 로마나 후작의 일대기를 잘 정리해 두었다.


[1] 전선은 딴판이었지만 미 독립전쟁의 연장선에 있는 침공전이었다.[2] 단순 여가 목적이 아닌 스페인의 스파이로 파견되었다는 설도 있다.[3] 말이 요청이지 사실상 압박이었다.[4] 사실 영국도 스페인과 관계가 좋지는 않았을 뿐더러, 프랑스군이 판 함정일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었을 것이다.[5] 이 때 항복한 병력들은 훗날 러시아 원정에서 프랑스를 배신, 나폴레옹의 몰락 후 결국 스페인 땅을 밟게 된다.[6] 페드로가 벌인 전투가 게릴라와 같은 비정규전은 아니었으나, 그 성향이 유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