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8-22 20:14:19

평양 10만호 건설사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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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상세3. 문제점4. 결말5. 재개(?) - 평양 5만세대 건설사업6. 남한과의 비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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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008년에서 2012년까지 벌어진, 북한의 건설사업.

2. 상세

평양 10만호 건설 사업이 처음으로 관측된 것은 조총련 기관지 조선신보의 2008년 1월 18일 보도이다.기사 이 기사에서 북한은 2012년까지 5년 이내에 10만 세대의 아파트를 건설한다는 계획을 발표했다. 원래에는 장성택 당 행정부장 주도로 평양시 용성ㆍ서포ㆍ역포 지구에 3만 5천 세대, 2011년 말까지 만경대지구 3만 세대, '강성대국 원년'인 2012년 4월까지 만경대지구 3만 5천 세대 등 총 10만 세대를 건설한다는 계획이었다고 한다. 기사

2009년 9월부터 본격적으로 건설이 시작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건설은 전형적인 북한식 속도전 방식으로 무작정 사람들을 동원해서 닥치는 대로 세우고 있다. 이것도 원래는 평양에 흔히 지어지던 저층 아파트 식으로 건설을 하는 것이 목적으로 보였다. 하지만...

김정일이 2010년 5월 방중 이후 '평양의 중심거리가 이렇게 한심하니 좀 잘 건설합시다' '평양을 상하이처럼 만들라' 는 지시를 내려서 40여 층 아파트를 건설하는 과감한 계획이 되었고, 2011년 10월 10일 당 창건일까지 모두 건설을 완료하려는 무리한 지시까지 내려왔었다고 한다.관련기사

3. 문제점

  • 북한의 자재난은 여전히 심각했다. 시내 지역에서는 그나마 자재가 공급되었으나, 시외 지역에서는 자재도 장비도 제대로 공급되지 않았다. 전력, 장비는커녕 시멘트조차 제대로 주지 않았으니 사람을 모아놓은들 아파트를 지을 도리가 없었다. 당시 중국으로부터 건축자재 수입이 상당히 많이 늘어났다는 기사가 있는데도 불구하고 자재는 부족했던 듯 하다.관련기사
  • 부족한 물자를 공사현장에 모으느라 공사 기간 중에 전력난, 식수난이 급등하였다.관련기사
  • 무리한 공기단축을 위해서 인해전술을 펼치려고 군인은 물론, 2011년에는 대학생들까지 강제로 휴학을 시키고 투입했다. 당연히 건설 경험이 없는 미숙한 대학생들이라 작업을 하다가 사고를 당하거나 추락해서 목숨을 잃는 일도 빈번하게 벌어졌다. 물론 미숙한 인력이 건설한 만큼 부실공사의 가능성은 더 심각해졌다.관련기사 일부 간부 집안 대학생은 뇌물을 바치고 동원에서 해방되는 비리도 있었다고 한다.관련기사

4. 결말

  • 결국 2년 정도 지난 2011년 6월 20일 최종적으로 2만~2만 5천 세대 정도로 목표를 크게 축소하고 중지하였다. 특히 만경대구역 건설은 아예 포기한 데다가 2010년 말 기준으로 완공 실적은 고작 500세대에 불과했고,[1] 그것도 전부 중구역 한 곳에서만 건설된 것이라고 한다. 관련 기사
  • 본래 김정은의 치적 사업으로 삼는다는 의혹이 있었으나, 자신들도 민망했는지 제대로 언급도 되지 않고 넘어가버렸다.관련기사
  • 평양 시내 쪽의 2 ~ 3만 세대 정도 건설이 된 건물도 단지 외장만 올라갔을 뿐, 내장이 되어 있지 않았으며 주민들에게 자체적으로 알아서 하라는 지시만 내려왔다. 당연히 불만 투성이라고 한다.관련기사
    다만 탈북기자 주성하는 '원래 북한에서는 인테리어 없이 분양한다'고 언급했다. 어느 쪽이든 비정상적인 방식인 것은 매한가지인 셈.
  • 결국 대부분 미완성. 건설이 중단된 아파트들은 흉물로 전락하고 말았다. 류경호텔 하나만으로도 어처구니가 없는데 이런 폐허들을 잔뜩 만들어 놓았으니 기가 막힐 지경. 부지 확보를 위해 주택을 철거당한 주민들 입장에서는 차라리 사업을 시작하지 않으니만 못한 결과가 나오고 말았다.관련기사
  • 철거민들에게 제대로 된 보상이 없는 것은 물론 거주지조차 마련해주지 않고 아무 집에나 임의로 들여보내 두 가구가 한 집에 살도록 지시했다. 그런데 정작 아파트 건설은 실패해서 중단돼버렸다. 이렇게 두 가구가 얹혀살게 된 집에서는 나가라는 원주민과 달리 나갈 곳이 없는 철거민들의 싸움이 벌어지게 되었다고.
  • 그나마 완공된 아파트도 전력 및 수도 공급이 원활하지 않아 저층이 인기라고 한다. 전력 공급이 특정 시간대에만 제한적으로 이루어지다 보니 엘리베이터가 운행하지 않는 일이 잦기 때문이다. 즉 전력 공급이 끊기는 때에는 40여 층을 걸어서 올라가야 한다. 또한 수도 역시 공급 수압이 낮아 사실상 단수나 다름 없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이 때문에 고층은 소위 '없는 사람'들이 사는 곳이라고 한다.#

5. 재개(?) - 평양 5만세대 건설사업

이후 이 기획은 김정은[2] 집권 10년차인 2021년 평양 5만세대 건설사업으로 다시 실현되게 되었다. 첫 목표의 절반에 불과한 수치로 떨어지긴 했어도 10만호 건설사업은 이로써 10여년만에 재개되었다.

이전에도 창전거리, 미래과학자거리, 려명거리신도시처럼 평양의 신시가지[3]를 만들었던 김정은은 2021년 1월 조선로동당 제8차대회에서 2021년부터 2025년까지 평양에 해마다 1만 세대씩 모두 5만 호의 주택을 건설하겠다고 발표했고, 이 일환으로 2022년 송신·송화지구, 2023년 화성지구 1단계, 2024년 화성지구 2단계가 완공되었다.

이 건설을 위해 평양시에 있던 논밭 174헥타르(약 53만 평)[4]을 뒤엎었다고 한다.[5] #

2021년 3월 23일 송신·송화지구 착공식에 참석한 김정은의 연설에 따르면 이 사업은 '수도 시민들에게 보다 안정된 생활 조건을 제공하기 위해 벼르고 준비해 온 숙원 사업'이며 '우리 당과 정부에 있어 최중대 과업으로 간주된다'고 말했고, '이 막중한 과제를 어떤 불리한 조건과 환경에서도, 어떤 일이 있어도 반드시 감당해야 할 혁명 과업으로 받아들이고 있다'는 언급도 했다. #

2021년 4월 11일 조선신보는 평야 5만세대 건설사업에 대해 '도시 구획을 동서방향과 북쪽방향으로 넓히면서 대규모의 현대적인 새 거리들을 일떠세우는 역사적인 건설사업'이라고 언급했으며, 평양 외곽 지역의 5만 호 외에도 중구역 승리거리에도 고층 살림집을 위시해 1만 6천 세대가 세로 건설되고 있다고 한다. 조선신보에서는 5만 호가 들어설 구역으로 송신지구, 송화지구, 금천지구[6], 9.9절거리지구[7], 서포지구[8]를 언급하고 있는데, 송신지구와 송화지구는 '송신·송화지구'로 합쳐지며 완공되고 대평지구(구 금천지구)와 서포지구는 규모를 절반 미만으로 축소하며 평양 5만호 건설사업에서 뺀 채로 완공했으며 9.9절거리지구는 화성지구로 이름이 변경된 후 1만 세대씩 2단계로 나누어 건설했다. #

2024년 1월 23일 화성지구 3단계 착공식이 진행되고 2024년 4월 6일 로동신문 기사에서도 "올해 건설을 시작한 화성지구 3단계, 다음해에 예정되여있는 화성지구 4단계 전망계획"이란 식으로 언급되었다. #

이러한 건설 사업은 김정은 집권기 들어 중간에 사업이 중단되지 않고 지속되는 사업 중 민간 분야에선 사실상 유일한 것이나 다름 없다. 이는 정권 차원 정도가 아니라 김정은이 직접 이 사업 추진에 관여하고 있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아무리 집을 빨리 대충 건설한다 해도 상당한 비용이 필요할텐데도 이 사업이 지속되는 것은, 북한 당국의 평양 인구 통제에도 불구하고 주택 수요 압력이 상당히 크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한편 지방 주민들은 평양 주택 건설을 위해 한 세대당 5000원(약 0.6달러)[9]과 함께 노동자들의 먹을 음식과 공사에 필요한 자재들을 평양에 바쳐야 한다고 한다. #

6. 남한과의 비교

남한은 북한보다 20년도 더 전에 10만 호를 넘어 백만 단위 호 건설 계획을 세웠으며, 둘 다 백만 단위의 집을 짓는 데에 성공했다.
  • 노태우 정부: 공약으로 200만 호 건설 사업을 내세웠는데, 북한의 계획으로부터 20여년 전인 1989년에 시작된 이 계획은 '실현 불가능한 수치'라는 말이 나왔지만 예상보다 1년 이상 앞선 1991년 8월 말에 조기 달성되었다. 물론 5대 1기 신도시에 지은 주택 총합은 30만 호 정도였으나, 나머지 170만 호는 수도권의 택지지구였기에 가능했던 일이었다. #
  • 전두환 정부: 무려 500만 호 건설 사업을 기획했으나 이는 1988 서울 올림픽 유치용 홍보에 불과한 비현실적인 목표라 목표의 1/3 정도만 달성하며 대실패로 끝났다. 그러나 그것조차 176만 호를 짓는 데에는 성공했다.

더구나 북한의 '평양 5만세대 건설사업'보다 30년 앞서 건설된 분당신도시만 해도 1991~1996년까지 5년 동안 10만 가구가 건설되었다.[10] 북한은 '최중대 과업'으로 간주하는 것조차 30년 전의 남한보다도 훨씬 열악한 수준인 셈이다.
[1] 예술인 아파트 2개동(23층) 200세대, 해방산구역 간부 아파트 7개동(9~14층) 300세대.[2] 아이러니하게도 10만세대 건설사업의 주도자였던 고모부 장성택을 처형한 인물이기도 하다.[3] 사실 신시가지라고는 해도 남한 기준으로 보면 규모가 대규모 아파트단지 수준이다. 창전거리와 미래과학자거리는 3000세대에도 못 미치고 려명거리신도시도 5000세대 가량에 불과하니...[4] 여의도 면적의 약 60%나 되는 규모다.[5] 사족으로 이만한 논에서는 5천 명이 1년 동안 먹을 쌀/1만 명이 1년 동안 먹을 옥수수를 재배할 수 있다고 한다.[6] 만경대구역 남서쪽에 위치한 금천동에 지어질 예정이었으나 이후 금천동에서 대평동으로 위치가 변경되며, 금천지구에서 대평지구로 명칭이 변경되었다.[7] 1998년 개통된 거리, 금수산태양궁전과 잇닿은 림흥 로타리로부터 형제산구역 신미동까지 약 8km 길이의 거리다.[8] 평양 중심부로부터 북쪽방향 평양 비행장으로 향하는 길 도중 형제산구역 내에 있으며 신미동에 위치하고 있다.[9] 북한 노동자의 한 달 월급이 6~12달러 내외다.[10] 1년 동안 지은 가구 수만 해도 북한의 2배에 달하는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