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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color=#fff> 최은희·신상옥 납치 사건 崔銀姬·申相玉 拉致 事件 Abducation of Choi Eun-hee and Shin Sang-ok | |
최은희 신상옥 북괴 납북 (1984년 4월 6일 / 대한뉴스 제 1483호)[1] | |
<colbgcolor=#bc002d> 발생일 | 1978년 1월 14일 (최은희 납북) 1978년 7월 19일 (신상옥 납북) |
발생 장소 | [[틀:국기| ]][[틀:국기| ]][[영국령 홍콩| ]] |
유형 | 납치 |
가해국 | [[북한| ]][[틀:국기| ]][[틀:국기| ]] |
피해자 | 최은희, 신상옥 |
영향 | 국내 반공주의 확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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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1978년 1월 14일 김정일의 지시로 영화배우 최은희가 납북되고 그녀를 찾으러 왔던 신상옥 감독까지 동년 7월 19일에 납북된 사건. 판문점 도끼 만행 사건과 함께 당시만 해도 아직 베일에 가려진 김정일이라는 존재를 대한민국과 전 세계에 본격적으로 각인시킨 사건이다.[2]2. 납북 과정
당시 최은희는 신상옥과 이혼한 뒤[3][4] 안양영화예술학교 교장직을 역임하며[5] 후학을 양성하고 있었다.그때 김정일의 지시를 받은 북한인들과 조총련 관계자들이 최은희에게 합작 작품 및 지원을 의논하고 싶다며 최은희를 홍콩으로 초청했다. 신상옥 감독은 일면식도 없는 사람들의 후원 교섭을 수상하게 생각했지만 최은희는 학교의 발전을 생각하며 홍콩으로 갔는데 며칠 일정대로 움직이더니 마카오로 넘어갔다가 뜬금없이 중국 본토로 가는 배에 태우고 "우리는 지금 장군님 품으로 가는 중입니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이에 최은희는 울며불며 내려 달라고 외쳤지만 결국 이들이 준비했던 마취제에 의해 기절했다고 하며 배 안의 침대에서 깨어났는데 벽에 걸린 거대한 김일성 사진을 보고 다시 한 번 기절했다고 한다.
신상옥 감독은 홍콩에서 실종된 최은희를 수소문하다가 자신의 지인과 친한 사이인 김형욱 전 중앙정보부장에게까지 정황을 설명하고 자문을 구했는데 '납북이 틀림없다'는 말에 아연실색했다고 한다. 아무리 이혼한 사이지만 수십 년 동안 같이 지낸 동반자가 사라졌다는 것으로만 해도 충분히 충격적인데 이유가 납북이니 당연히 놀랄 수밖에 없었다.[6] 결국 최은희를 찾으러 홍콩에 갔던 신상옥 감독도 납북되고 말았다.[7] 현지에서 신필림 홍콩지사를 운영하던 교포 이영생이 사실은 북한의 공작원이었다. 거기에 신상옥의 지인이자 신필림 홍콩지사장을 맡고 있던 김규화가 그들이 쥐어주는 돈에 넘어가서 거짓 일정을 만들어준 것이 결정타가 되었다. 그는 귀국 후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15년을 복역했다.
납북 루트는 홍콩에서 당시 북한 공작원의 아지트였던 마카오를 거쳐 중국 본토로 들어갔다 북한에 들어간 것이었다. 북한인의 홍콩 입국은 까다로운 관계로 일본으로 귀화한 조총련계 인사들을 앞세웠으며 이들은 일본 여권을 들고 있어 홍콩 이민국의 아무런 의심을 받지 않았다.
홍콩 경찰은 형사조사국(CID)을 앞세워 두 사람을 중국 본토로 끌고 간 정체불명의 일본인들을 추적했고 이들의 정체가 북한 공작원임을 밝혀냈지만 이들은 이미 도주한 뒤였다.
3. 월북 루머
사실 신상옥과 최은희는 지금이야 납북이라고 밝혀졌지만 당시 남한에서는 북한으로 밀입국한 것이 아니냐는 이야기가 대놓고 돌았는데 이는 박정희 정권과 신상옥의 불화가 배경이었다. 시작은 신상옥이 겁도 없이 전태일 분신사건을 영화로 찍겠다고 말하고 다닌 것이다. 당연히 분노한 박정희 정권은 신상옥의 영화 촬영을 집요하게 방해했다. 여기에 화가 난 신상옥은 1975년 '장미와 들개'라는 자신의 영화에서 검열당한 오수미의 상반신 노출 장면을 예고편에 집어넣는 반항을 했다. 이 사건으로 신상옥의 영화사 '신필름'의 인가를 취소당했고 신상옥이 여기에 행정소송을 냈다가 남산으로 끌려가는 사건까지 일어났다. 결국 뒤에 행정소송은 취하되었지만 이미 정권에 의해 제대로 낙인 찍힌 신상옥이 영화 제작을 원활하게 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8]최은희가 납북되는 계기인 안양예술고등학교도 다른 사람도 아닌 신상옥이 이사장인 학교였다. 이런 상황에서 경제적 어려움을 겪었다면 정치적 외압의 영향을 부정할 수 없을 터였다. 이런 상황에서 둘이 사라졌으니 납북보다 밀입국 설이 신빙성을 갖고 회자될 수밖에 없었다. 이 때문에 신상옥과 최은희의 자녀들은 '월북한 빨갱이의 자식들'이라면서 오랜 시간 동안 손가락질 당하면서 억울한 세월을 보내야만 했다.
4. 북한에서의 생활
이들은 영문도 모른 채 북한에 끌려왔지만 비교적 환대를 받으며 생활했다. 최은희는 남포항에 도착하자마자 김정일이 인사하러 직접 나와서 기다렸고 그녀를 보자마자 크게 반가워하며 악수를 청했다고 한다.[9] 최은희는 정신이 혼미한 나머지 그의 손에 자신의 손을 맡겨 악수를 했고 공식 사진도 남아 있다. 최은희는 주변에서 자꾸만 사진을 찍어대서 움찔움찔 놀라고 신경질적으로 찍지말라고 외치며 필사적으로 얼굴을 가렸다.신 감독은 납치당한 직후에는 배후를 북한이 아니라 남한이라고 생각하여 박정희가 자신을 죽이려고 하는 것이 아닌가 의심했지만[10] 자신을 납치한 것이 북측의 공작원들이라는 것을 알고 오히려 죽일 속셈은 아닐 거라고 여기고 여유있는 모습을 취하며 배 안에서 영화를 보는 등 공작원들이 제공하는 서비스를 누렸다. 북한에 끌려온 다음엔 벤츠 승용차를 탈취해서 청천강까지 달려간 후 정주 즈음에서 기차로 갈아타서 중국으로 달아나려고 했지만 석탄간 위에서 꼬박 잠드는 바람에 기관사에게 들켜 끝내 잡히고 수용소에서 상당한 고생을 했다. 하지만 수용소를 나오자마자 다시 숙소의 군관 방에 숨어 2차 탈출을 시도하려다가 몇 년이나 수용소에서 사상 교화를 빙자한 고문을 당했고[11] 큰 고생을 하곤 교화소로 이동했다. 거기선 대접이 좀 나아서 비곗덩어리도 제공되었는데 이웃 죄수들과 대화하는 게 금지였음에도 이웃 죄수들과[12][13] 수다를 떨면서 정보를 얻다 걸려서 징계를 받았다. 눈에 띄게 형편없어진 식사에 저것들이 설마 '나를 죽이려나?' 싶어서 그들의 속내를 알아보기 위해 단식했다. 처음 간수들은 "그래봐야 당신이 손해다. 단식질 하다가 나중에 빌던 놈 많다.", "나중에 그쪽에서 밥달라고 애원할 걸?"이라고 비웃었지만 6일을 내리 굶은 신상옥이 똥오줌을 싸고 기절하자 온 교화소가 발칵 뒤집혔고 정치보위부장[14] 김병하가 달려와서 "저 사람 죽으면 니들도 다 죽는다!"라고 길길이 날뛰어 그를 의무실로 옮겨 그때부터 잘 대우했다고 한다. 이후 김정일은 신상옥의 '반성문'을 접수한 다음 그를 풀어주어 최은희와 재회하게 했다.
이후 이들은 북한에서 재결합했고 부부는 매우 대접을 잘 받아서 최은희는 납치 직후 아무나 못 간다는 김정일의 생일 파티에 김정일 본인이 초대해 줬다고 한다. 당시 김정일은 북한의 공식 후계자로 아버지 김일성에 못지 않은 최고의 실권자였다. 당연히 김정일의 생일 파티에는 북한에서도 엄청난 상류층이 아니면 절대 갈 수 없었다. 최은희의 감시원인 강해룡과 김학순은 자기들도 아직 못 가 본 자리라고 엄청나게 부러워했다고 한다. 여담으로 바로 이 자리에서 당시 7세였던 김정남과 성혜림까지 만났으며[15] 최은희가 김정남에게 이름이 뭐냐고 묻자 감히 자신의 이름을 묻는 사람을 처음 본 김정남이 몹시 부끄러워하면서 "남의 이름을 다 물어?"라고 중얼거리면서 꽁무니를 빼자 곧바로 김정일이 "어른이 말씀하시면 '예' 저는 누굽니다' 이렇게 대답하는 거야."라고 타일렀다는 일화가 있다. 사실 이 일화는 최은희의 입장만 알려져 있지만 김정남의 입장도 이한영 수기를 통해 기록되어 있다. 김정남은 최은희를 보고는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가 자기 앞에 있다고 놀랐다고 하며 최은희에게 이름을 물었는데 최은희라는 이름을 듣고 이름이 곱다고 대답했다고 한다.
이렇게 환대를 받고 김정일과 가깝게 지냈다고 해도[16] 가족들이 남한에 있는 마당에 억지로 끌려와서 경험하게 된 북한에서의 생활은 굉장히 힘들었다고 한다. 우선 탈출 우려 때문에 늘 도청과 감시를 받고 있었고 언제라도 자신들이 필요없다고 여겨지면 제거될지 모른다는 스트레스에 최은희는 이동만 시켜도 히스테리를 일으킬 정도였으며 사상 교육과 개조를 한다며 주체사상과 김일성 교시 등을 교육시켰는데 이걸 수시로 받는 것도 고역이었다. 그래도 예술계에서 오래 종사한 둘 답게 한동안 북한식 표현과 문법을 교정받은 후에 그럴듯한 편지들을 써서 바칠 수 있게 되었고 이에 흡족한 김정일이 최은희에겐 국기훈장도 내렸으며 가명을 쓰고 주요 외교 행사에도 수차례 불러 방북한 중국공산당 중앙위원회 주석 겸 국무원 총리 화궈펑도 본 적이 있다.
최은희는 밤 11시에 남한의 라디오 방송을 몰래 들었는데[17] 자신의 실종 소식을 안타까워하는 라디오 진행자[18]가 울먹이며 "언니, 어디 있어?"라고 하는 목소리를 듣고 수도꼭지를 틀고 서럽게 울었다고 한다. 이들은 북한에 끌려온 지 5년이 지난 후에야 김정일의 주선으로 재회하게 되는데 그들은 너무도 큰 충격으로 너무도 어색하게 서로를 쓸어안았다. 신상옥은 만약 자기 배우들이 그랬으면 화내면서 컷을 외쳤을 동작이라고 했다.[19] 파란만장했던 북한에서의 생활 때문인지는 몰라도 신상옥이 자신을 찾기 위해 동분서주하다가 북한에 똑같이 끌려왔다는 것을 알게 되고 모든 미움이 눈 녹듯이 사라졌다고 한다.[20]
여차저차 하던 중에 목적을 갖고 이들을 납치했던 김정일의 권유를 받고 전폭적인 지원 아래 북한에서 신필름 영화촬영소를 차리게 된다. 애초에 김정일은 문화, 특히 영화에 관심이 많아서[21] 영화 분야를 발전시키고 싶어 이들을 납치했다. 재미있는 것은 한국에서 신필름이 허가 취소를 받은 지 얼마 안 되는 시점에 신상옥 감독이 납북되었고 몇 년 후에 북한에서 신필름을 차리게 된 것인데 참 여러 가지로 영화 같은 이야기다.
사실 남북분단 당시 많은 연예인들이나 문화 예술인들은 대우가 그야말로 형편없었던 데다 딴따라, 저급 문화라며 차별을 받은 경험이 있어 공산주의 사상에 감화되는 경우가 많았고 북한이 더 경제적으로나 사회적으로 안정적이었으므로 인재풀 자체는 남한보다 더 풍부했지만 김일성이 차츰 차츰 권력을 강화했고 대중문화 부분에 있어서 그야말로 세세한 부분에까지 일일이 간섭하게 되었는데 그 과정에서 최승희, 안막, 임화처럼 정치 투쟁에 휘말려 숙청되거나 백석, 심영처럼 중앙에서 쫓겨나 지방으로 좌천당하거나 하방당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했고 소재 제한도 강화되었다. 북한의 문화 예술인들이 한직으로 내몰리거나 예술계에서 쫓겨나지 않기 위해서 소재 제한을 의식해 연극과 영화, 노래, 소설, 만화, 드라마 등을 만들었고 결국 문화 예술 부분은 형편없는 수준으로 전락했다. 실상을 따지고 보면 남한도 당시에는 영화나 만화, TV 프로그램을 만드는데 이런저런 제약이 많기는 했고 실제로도 대통령과 닮았다는 이유로 방송 출연이 끊기거나 배우들을 강제로 반공 영화, 반공 드라마에 출연시킨다는 등 온갖 말도 안 되는 전횡들이 횡행했지만 국가에서 배우와 작가들의 일거리를 보장해 주 지는 않았기 때문에 어떻게든 벌어먹을 방법을 찾아야 했고 북한이 검열의 끝판왕 수준이었기 때문에 그나마 북한보다는 상대적으로 제약이 덜했기는 했다. 여하튼 북한의 김정일이 "공산주의 사회에서 노력하지 않는 북한의 예술 관련 인민들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노력하고 경쟁하는 예술인들이 더 뛰어나더라."라는 사실을 본인의 입으로 인정하게 된다.[22]
김정일은 대외 선전용으로 영화 예술의 힘을 빌리고 싶었으나 북한 내부의 인력들은 수많은 제약에 길들여져 있고 이런 분야로는 워낙 인재가 없었기 때문에 두 부부를 일찍이 점찍어 놓고 납북을 계획했다고 한다.[23] 한 번은 북한과 친한 캄보디아의 국제영화제를 노리고 영화를 만들어 출품한 적이 있으나 게릴라를 미화하는 내용 때문에 시아누크가 자기보고 망하라고 굿판을 하는 영화를 가져왔다고 노발대발해서 날뛰는 바람에 싹싹 빌고 달아난 일도 있다고 한다.
신상옥과 남한 언론에서는 김일성에게 바치기 위해 최은희를 납북한 것이 아닌가 하고 추측하기도 했지만 애초에 최은희도 이미 50대였고 김일성도 칠순을 앞둔 노인이었다. 김정일은 오히려 최은희를 어머니 대하듯이 깍듯이 모셨으며[24] 최은희의 분위기를 편하게 만들기 위해 "최선생, 저 난쟁이 똥자루 같지 않습니까?"라며 개그도 서슴지 않았다고 한다. 나중에 신상옥에게는 '내가 최선생을 아버지한테 바치려고 데려왔다는 소문이 돈다던데요, 천만의 말씀입니다. 우리 공산주의자들은 이렇게 깨끗이 최선생을 돌려드립니다.'라고까지 했다. 다만 최은희는 김정일이 자신을 유혹하려고 하지 않았냔 의혹에 대해서는 그런 게 전혀 없었다고 강하게 부정했지만 김정일이 자신이 김일성을 잘 만나지 못하게 하고 한복, 양복 등 온갖 옷을 입혀 사진을 찍은 후에 김일성에게 보내는 것 때문에 자신을 김일성에게 바치려는 것이 아닌가 하는 공포를 느끼긴 했다고 덧붙였다. 김일성은 최은희의 사진을 보고 대단한 미인이라고 평가했다고 한다.
그리하여 최은희·신상옥 부부는 북한에서 영화를 만들게 되었고 유럽 쪽의 영화제에 여러 편의 작품들을 출품했다. '돌아오지 않는 밀사', '탈출기', '소금' 등을 출품했으며 '춘향전', '불가사리' 등 여러 작품을 김정일의 전폭적인 지원[25] 하에 제작했다. 최은희, 신상옥 부부의 작품은 당대 북한 영화계 기준으로는 블록버스터급 작품이거나 참신한 영화들이었기 때문에 북한 인민들에게 신선한 충격을 안겨줌과 동시에 큰 인기를 얻었고 김일성과 김정일 부자도 흡족할 만큼 작품성도 뛰어난 작품들도 찍어서 해외영화제에서 상도 탔다. 최은희는 모스크바 국제영화제에서 여우주연상을 타고 신상옥 감독은 감독상 타던 와중에 런던의 영화제에서 한국의 영화배우 남궁원과 김지미를 만나서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는데 남궁원과 김지미가 북에서의 생활이 어떻냐고 운을 띄우자 놀라울 정도로 쌀쌀맞게 이들을 대하던 신상옥은 "우리는 위대한 수령님의 따뜻한 배려로 세상에서 부러울 것 없이 잘 지내고 있으며 영화제작도 한국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을만큼 당의 지원을 받고 있고 최대한으로 자유분방한 예술활동을 할 수 있는 곳은 지구상에서 공화국밖에 없다."고 체제 선전을 하면서 이상한 생각하지 말고 접근하지 말라고 두 사람에게 엄포를 놓았다. 물론 진심이 아니었기 때문에 신상옥은 이 말을 하고 나서 엄청나게 속이 상했다고 한다.
이 일 덕분에 남궁원도 남한 귀국 후 강도 높은 조사를 받게 되었다.[26] 이 성공적인 퍼포먼스 덕분에 김정일은 크게 흡족해하면서 두 사람에 대한 대우를 더욱 개선하였고 이후 자유로운 해외여행도 허락해 주었다. 이렇게 북한에서도 성공적인 커리어를 이어나갔다.
한편 한국 정부는 체제 경쟁, 언론통제 등의 명목으로[27] 이들의 납북 사실을 공개하지 않다가 이들의 활동이 대외적으로 알려지게 되면서 납북으로부터 6년 후인 1984년 4월 2일에 와서야 이 사실을 공개했다. 당시 세간에서는 엄청난 충격을 받았는데 한 시대를 풍미한 감독과 배우가 동시에 사라진 후 난데없이 북한에 있다는 것이 확인되었기 때문이다. 21세기로 예를 든다면 박찬욱이나 이영애가 실종되었다가 6년 만에 북한에서 잘 먹고 잘 산다는 게 공개된 것이나 같은 일이다. 사실 박찬욱이나 이영애 이상으로 1960~70년대 한국 영화계에서 신상옥과 최은희의 비중은 컸다.
이때 증거로 제시된 건 두 사람이 북한의 명소를 배경으로 찍은 사진과 육성 테이프, 그리고 자필 편지였으며 당시 국가안전기획부는 북한이 미국 입양(혹은 유학)을 미끼로 신상옥의 두 아들을 해외로 유인 납치하기 위해 두 사람을 사주해 조총련과 연계된 일본인을 통하여 서울로 사진 등을 보냈다고 발표했지만 훗날 밝혀진 바에 따르면 사실 그 일본인은 멀쩡한 교도통신 기자 에노키 아키라(榎彰, えのき あきら)로, 신상옥의 지인이었으며 우리는 자의가 아니라 타의로 북한에 살게 됐다는 암묵적인 언질까지 서울의 가족들에게 넌지시 전해준 상태였다.[28] 즉, 신상옥은 북한의 추가 납치 공작을 역으로 이용해 부부가 함께 납북되었음을 전세계에 공표한 셈이었다.
5. 탈출 과정
1986년 3월 13일에 영화 촬영과 관련하여 중립국 오스트리아의 빈을 방문하던 중 미국 대사관으로 기습 입장하는 데 성공하여 자유를 찾아 미국으로 망명했다.[29]신상옥은 앞서 언급한 에노키 아키라에게 빈에 갈 것이라고 알렸으며 점심 약속을 핑계로 불러냈다. 북한 감시원들의 감시를 따돌린 최은희·신상옥 부부는 에노키가 탄 택시가 도착하자 동승하여 숙소를 빠져나오는 데 성공했는데 숙소에서 멀리 떨어졌음을 확인한 이들은 택시 기사에게 미국 대사관으로 방향을 바꿔 줄 것을 요구했고 에노키에게 자신들은 자진 월북한 게 아니라 납북당했으며 자신들은 절대로 공산주의자가 아님을 털어놓았고 빈 주재 미국 대사관 앞에 도착하자마자 택시에서 뛰쳐나와 뒤도 안 돌아보고 미국 대사관 안으로 뛰어들었다.[30] 이렇게 망명에 성공한 최은희·신상옥 부부는 곧장 한국으로 돌아오지 않고 미국에서 거주하였는데 바로 한국으로 갔다간 워낙 북한과 지척이라 배신자를 처단하라는 김정일의 지령을 받은 추격자나 스파이들이 무슨 짓을 할지 몰라서 두려웠다고도 한다. 북한의 이름으로 영화제에 영화를 출품하여 해외 영화제에서 상까지 받아서 한국에서는 이들이 배신, 변절했다는 이야기도 돌았으며 영화사 허가 취소를 받은 신상옥 감독이 최은희를 찾을 목적 겸 해서 될대로 되라는 식으로 자진 월북했다는 이야기까지 있었지만 이들은 납북수기에 살기 위해서 한 행동들이라고 분명하게 기술했다.
말 그대로 영화처럼 탈출에 성공한 부부는 미국으로 망명하는 길을 택해서 북한의 암살공작원들이 자신들을 해코지하고 죽일지도 모른다는 걱정, 그리고 한국 정부(정확히는 국가안전기획부)가 자신들을 북한의 영화 발전에 기여하고 동조했다면서 추궁하거나 국가보안법을 위반한 책임을 물을 걱정들을 영화처럼 일거에 날렸다. 실제로 안기부는 훗날 신상옥을 취조하면서 무조건 그가 자진 월북했다고 멋대로 결론 짓고 "십수년 전 홍콩에서 머문 호텔 방 번호를 불어라!"라는 등의 말도 안 되는 심문을 했고 신상옥이 써낸 탈출기는 읽은 사람이 하나도 없었다고 한다. 애초에 이춘재 연쇄살인 사건에서 볼 수 있듯이 수사나 심문기법이 후진적이었던 데다 눈돌리기에 눈이 멀어 살인범을 영웅으로 만들고 살인 피해자를 간첩으로 조작하는 일이 다반사로 벌어졌을 때가 이 시기였는데 못된 버릇이 신상옥에게도 도진 것이다. 정작 일본의 뉴 오타니 호텔에서 우연히 만난 도쿄 경시청장은 신상옥을 보고 "선생님이 쓰신 수기를 모든 직원들이 돌려 보고 있습니다."라며 그에게 존경을 표해 신상옥은 한동안 벙쪘다고 한다.
한편 강명도의 증언에 따르면 조직지도부 제1부부장 고갑종의 주도로 북한의 신필름 배우와 직원들을 대상으로 강도 높은 사상투쟁이 벌어졌으며 신상옥을 수백명의 여배우들을 유린한 인간말종으로 만드는 작업이 이어졌다고 한다. 최은희, 신상옥을 관리하던 선전선동부 부부장 최익규도 이때 상당히 고생하게 된다.
6. 미국 생활
미국의 CIA는 자국에 망명한 이들 부부의 목숨에 50만 달러의 현상금이 북한에 의해 걸려 있는 상황에 맞서 언제나 그들을 경호해 주었으며 LA에 정착할 수 있도록 집도 마련해 주었다고 한다. 북한은 영화 제작 비용으로 쥐어준 230만 달러를 횡령하기 위해서 부부가 배신했다고 날뛰었지만 신상옥-최은희 부부가 돈을 돌려 주자 말을 바꾸어[31] 미국의 납치극이라고 날뛰었고 신상옥에게는 없던 일로 할 테니까 돌아오라고 수 차례 접촉하기도 했다. 신상옥은 그래도 북한에서 잘 대접받은 것 때문에 북측에 자신의 입장을 설명하고자 북한 측 인사들과 접촉을 시도하기도 했지만 CIA가 그럼 경호하기가 어렵다고 허락하지 않아서 이루어지지 않았다.이 부부는 CIA에 중요한 정보로 활용될 수 있는 김일성, 김정일의 일상적인 대화[32]를 녹음해 왔는데 그야말로 희귀한 육성 테이프를 미국 정보기관 CIA에 제공하는 대가로 미국 정부는 이들 부부에게 평생 연금을 지급했다.
이듬해인 1987년에 《김정일 왕국》이라는 납북 수기를 써서 동아일보의 김일수 특파원의 도움을 받아 출판했다. 8년간의 북한에서의 생활과 김정일과 고위층들과의 만남, 여러 가지 북한에서의 에피소드들, 그리고 소망하던 탈출을 이루기까지 적나라하게 밝혀낸 서적이지만 앞서 말한대로 시기가 시기였으며 1989년 노태우 정부의 방한을 권유받아 일시 귀국하였는데 이때 국가보안법에 따라 안기부에서 21일 간 조사를 받았다. 상술한 말도 안 되는 심문이 벌어진 것이 바로 이 때다. 이후 신상옥 감독은 1990년에 대한민국 복귀작을 내놓았는데 북한의 대한항공 858편 폭파 사건을 영화화하여 마유미라는 제목으로 대한민국에 개봉했다. 영어 제목은 《Virgin Terrorist》.[33] 마유미의 촬영은 한국에서도 이루어졌는데 김현희가 김승일과 머물던 부다페스트 호텔 씬을 현재 그랜드 힐튼 호텔이 된 스위스 그랜드 호텔에서 촬영했으며 이후에도 미국에서 계속 활동했다.
신상옥은 1994년 증발이라는 영화를 제작하였는데 극중 이름은 다르지만 노골적으로 박정희 정권을 디스하는 영화로서 지금까지 말이 많은 김형욱이 흔적도 없이 사라진다는 것과 군사 독재 정권에 대한 실상을 전달하려고 했다. 한국에선 일부 장면이 가위질당하고 흥행엔 실패했지만 칸 영화제 초청작에 오를 정도였다. 군사 독재 정권에 대한 날선 비판이 어느 정도였냐면 본인이 북한에 납치당했던 감독이 영화 속 대사를 통해 "북한도 있는데 어디서 데모질이나 하냐"고 중앙정보부에서 여대생 강리나를 고문하고 강간하는 장면이 나오고 북한을 빌미로 독재를 시행하는 군사정권을 적나라하게 비판할 정도다. 사실 1990년대 중반 정도면 꽃잎이나 모래시계, 제3공화국, 제4공화국이 나오기도 했지만 그럼에도 아직은 크게 민감했을 때였다. 그런데 신상옥의 증발의 수위는 지금 봐도 상당한 수준이라서 권력자들이 나체의 여성을 덮치는 장면이 수두룩하게 나올 정도였으니 한국 배우들은 아무도 대통령 역을 맡으려고 하지 않아서 미국 배우 조지 타케이[34]가 대통령 역을 맡았고 김형욱 전 중앙정보부장 역은 대배우 김희라가 맡았다. 초기 시놉시스는 아시아의 어떤 국가라고 하지만 미국의 지원을 받고 있고 한국어를 쓰며 무엇보다도 마지막 장면 뉴스 영상에서 대통령 유고 후 미국은 한반도의 안정을 위해 항모를 파견한다는 대사가 나온다.미국에서 살던 신상옥은 몇 차례 영화를 만들어 성공했지만[35] 아시아계 감독이란 이유로 미국에서 그에게 주어지는 감독직은 싸구려 무협물을 비롯한 뻔한 자리였고 만들고 싶은 영화를 못 만들던 신상옥은 매우 괴로워했다고 하며 2000년에 한국으로 완전히 귀국했다. 귀국 후에도 자신의 탈출기를 영화로 만들려고 했지만 남북관계에 악영향을 주는 영화라고 정부에서 압력을 넣어 제작이 무산되었다고 전해진다. 신상옥은 이 후 계획을 틀어 2002년 저예산으로 유작인 겨울이야기를 제작하게 되고, 4년 뒤인 2006년 지병으로 사망했다.
최은희는 신상옥 사후 남편의 기념사업에 전념하다가 2018년 노환으로 타계했다.
7. 매체에서
최초로 다뤄진 건 1984년 6월 19일 KBS 1TV에서 방영된 6.25 전쟁 특집 연속기획 9탄 드라마 '함정'이었는데[36] 불과 두 달 전인 4월에 안기부가 두 사람의 납북 사실을 발표했을 뿐 그 외 자세한 정황은 전혀 알려져 있지 않았으므로 최은희가 홍콩에 가서 납치되는 과정까지만 실제 사실과 똑같고 이후 북한에서의 행적은 그냥 창작에 불과했다. 최은희가 북한 수뇌부의 온갖 겁박에 도리어 독기를 품고 대남 방송을 강력히 거부하자 김정일이 부들부들거리는가 하면 손목을 그어 자살 시도를 한 게 미수에 그친 뒤 군인들의 감시 속에 넋이 나간 표정으로 누워있는 모습으로 드라마는 끝난다. 앞서 언급했듯이 실제로는 김정일이 최은희를 깍듯이 대하며 조심스럽게 어르고 달랬던 것과는 전혀 달랐다. 어차피 실제와 차이가 있었더라도 반공 드라마라서 그렇다.그로부터 11년 후인 1995년 12월 MBC에서 방영된 제4공화국 19~20화에서는 두 사람의 증언을 기반으로 시나리오가 진행된다. 신상옥은 박영태, 최은희는 양금석이 맡았는데 실제 인물과 비교해 보면 외모가 꽤 흡사했고 엔딩 화면에는 두 부부의 실제 모습을 담은 사진이 나왔다. 특히 20화에서는 두 부부가 납북 후 처음으로 서울에 귀국한 모습이 나오기도 했다. 다만 실제 두 사람의 증언의 일부가 반영되지 않았는데 일례로 신상옥이 탈출을 시도하는 건 최은희를 만나기 이전 딱 1번만으로 묘사되었고 김정일·김일성과 대화할 때 녹음기를 켜는 모습도 생략되었으며 나중에 오스트리아에서 탈출할 때는 지인인 에노키 아키라가 직접 몰고 온 승용차를 타고 미국 대사관으로 가는 내용으로 나왔다.
덧붙여 그들의 납북과 탈출에 대한 논픽션 영화를 만든다는 카더라 통신이 있었는데 2016년 Ross Adam, Robert Cannan 감독의 다큐멘터리 영화 The Lovers and the Despot이 이 영화로 보인다.[37] 아래는 영화 예고편. 한국에서는 2016년 9월 연인과 독재자라는 제목으로 개봉하였다.
그런데 한국어 자막이 심각해서 영어가 되는 사람이면 그냥 영어로 듣는 게 훨씬 나을 것이다. 얼마나 개판인지 예시를 조금 언급하면 조선 혁명을 한반도 개혁으로,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를 노동위원회로 번역하는 등 용어를 사실상 2차 창작을 했으며 북한에서 최은희를 납치하기 위해 홍콩에서 영화 사업을 하는 부자에 대해서 설명하면서 최은희를 꾀어냈다는 대사를 이해를 못해서 홍콩은 영화하는 사람과 부자인 사람이 많은 도시라고 오역할 정도다. 근데 중간중간에 신상옥이 일본어로 회고한 대목은 영어 번역에 비해서는 수준이 높다.
8. 사건 이후
김정일 사망 직후 최은희는 "납치에 대해서는 용서할 수 없지만 죽었다니 안 됐다."라는 취지의 인터뷰를 했다.(기사)김정일 육성녹음 1부, 김정일 육성녹음 2부는 김정일의 육성파일로, 조갑제 기자가 입수한 뒤 정리해서 최초로 일반에 공개하였다. 상술한 바와 같이 이 녹취를 바로 최은희가 몰래 녹음하였다. 김정일의 육성은 생전에 일반대중에게 거의 알려진 바가 없는데 이유는 김정일이 연설을 싫어했고 발음이 안 좋아 부끄러움을 많이 타는 성격이었기 때문이라고 한다.[38] 해설 기사 네 부에 전문이 수록되어 있다. 기사 1부, 2부, 3부, 4부
《김일성 김정일 육성 녹음 테이프의 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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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일성 김정일 육성 녹음 테이프의 내용!
김정일(金正日) 육성테이프 반동(反動)분자 같은 놀라운 고백 60분세계 최초의 김정일 육성자료… 이 녹음테이프로 북한이 무너질지도 모른다{우리 사회주의에 자체 모순… 국가가 먹여살려 주니까 인민은 의욕이 없다… 南은 대학생인데 우리는 유치원 수준… 이대로 가다간 꼴지 중에서 1등 할 것}주체사상의 수호자라는 金正日이 신상옥(申相玉)·최은희(崔銀姬)를 상대로 마치 反動분자처럼 쏟아 놓은 불평·불만, 사회주의의 자체 모순과 북한 인민의 나태성을 경멸하듯 비판하고 남한 체제의 우월성을 인정한다. 申, 崔 두 사람을 유인·납치한 것도 낙후된 북한 영화를 선진된 자본주의 방식으로 발전시키려고 함이었다는 실토. 독특한 말투에서 드러나는 허무주의와 고독… 그는 회의(懷疑)하는 폭군이 아닐까?<1995년 10월호 월간조선>자신만만한 자기 비판-총구에서 나오는 배짱〈편집자 注〉 북한 사람들은 金正日의 모습을 텔레비전을 통해서 일상적으로 보아왔지만 그의 목소리는 한 번밖에, 그것도 10초 정도의 외마디밖에 들은 적이 없다. 그가 대중 앞에서 부끄럼을 타기 때문이라느니 연설을 잘 못하기 때문이라느니 나중에 극적으로 등장하기 위한 자세 낮춤이라느니 별별 추측만 있었다. 그런 가운데 1986년에 신상옥(申相玉)·최은희(崔銀姬)씨가 북한(北韓)을 탈출하면서 갖고 나온 金正日의 육성녹음테이프는 金正日의 인간적 내면과 사고방식을 적나라하게 드러낸 희귀한 자료였다.사석에서 솔직하게 쏟아 놓은 金正日의 토로를 몰래 녹음한 것이었기에 인간 金正日을 더욱 정확하게 분석할 수 있도록 하였다. 기자(趙甲濟)는 이 자료를 재검토하면서 활자의 한계와 육성의 중요성을 다시 한 번 실감하였다. 金正日의 녹취록을 읽었을 때?느낌과 이해는 육성을 들었을 때 크게 수정되고 보안되었다.사람 목소리에 담기는 한 인물의 성격·인품·버릇·사고(思考)체계 같은 입체적 정보는 1차원적인 활자에선 느낄 수가 없기 때문이다. 金正日의 육성 녹음테이프 60분에 실려있는 정보가운데 가장 충격적인 내용은 북한 사회주의 체제에 대한 가차없는, 때로는 허무적인 느낌의 경멸과 비판이다. 주체사상의 수호자요, 유일한 계승자라는 그가, [사회주의는 불패(不敗)의 위대한 사상]이라고 주장해온 그가, [반동분자]들보다도 더 신랄하게 [사회주의 제도의 자체모순]을 이야기하고 있다.그가 金正日이 아니라면 이런 불평, 불만은 그를 돌아오지 못하는 수용소로 보내고도 남았을 것이다. 이 녹음테이프를 북한 주민들이 듣게 된다면, 혹은 우리 정부나 국민들이 의지와 지혜를 모아 북한주민들로 하여금 그것을 듣도록 만든다면 金正日체제는 무너질 것이란 예감이 들 정도이다.기자는 申相玉씨에게 金正日과 그 측근들의 희한한 행태에 물어 본 적이 있었다. 申씨는 {마적단 같더라}고 했다. 북한이란 마을을 점령하고 주민들을 인질로 삼은 뒤 그 자신들은 온갖 퇴폐적인 생활을 하면서도 양심의 가책이 없는 집단이란 뜻이었다. 申씨는 그러나 주의를 하나 주었다. {그들이 남한 노래 부르고 남한 경제를 높게 평가하는 것을 오해해서는 안됩니다. 남한을 부러워하거나 두려워해서 그러는 게 아닙니다. 오히려, 남한이 잘 사는 것 우리 인정한다, 그러나 그런 남한을 무력으로 점령해 버리면 우리 것이 되는 것 아닌가 하는 배짱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북한을 노획물로 보는 마적단 적 발상으로 남한을 노획의 대상으로 보니까 별다른 갈등 없이(언젠가는 우리 것이 될) 남한의 영화·노래·여배우들을 좋아할 수 있다는 설명이었다. 사회주의니 주체사상이니 하는 것도 그들의 신념이 아니라(마적단엔 신념이 있을 수 없다) 정권유지용 통치도구에 불과하니까 [별다른 갈등 없이] 비판을 할 수 있을 것이다.金正日의 그런 배짱은 물론 무력(武力)에 의해서만 보증될 수 있다. 하나회같은 군부(軍部) 내 사조직에 의한 군사 쿠데타로 성립된 정권은 국제적인 압력에 약한 데 반해 유고의 티토, 쿠바의 카스트로, 북한의 金日成처럼 게릴라에 의해 성립된 정권은 오래 간다고 한다. 게릴라 출신들은 체험에서 우러나온 진리를 하나 알고 있는데, 그것은 총은 빵보다 강하다는 것, 즉 어떤 어려움 속에서도 [빵을 위해 총을 놓을 수는 없다]는 믿음이란 것이다. 金正日의 [자신만만한 회의(懷疑)와 자가 비판]에서 우리가 놓치지 않아야 할 핵심은 [총구에서 나오는 그의 배짱]일 것이다. 金正日의 신념은 주체사상도, 사회주의도 아닌 무기의 힘, 바로 그것일 테니까.녹취록의 프롤로그 : 인간 金正日 최초의 육성저는 월간조선(月刊朝鮮) 부장으로 있는 조갑제(趙甲濟)기잡니다. 앞으로 1시간에 걸쳐 이 녹음 테이프에 대한 해설을 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대한민국의 헌법체계가 反국가단체의 수괴로 규정하고 있으며 동족에 대한 전쟁·테러·학살의 양과 질로 따진다면 [민족의 원수]로 불러야 마땅할 북한의 金正日도 피와 눈물과 웃음을 가진 한 인간임엔 틀림이 없습니다. 7천만 한민족의 운명에 큰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金正日은 과연 어떤 인간인가. 공식적으로 알려진 그의 육성은, 3년 전 인민군 창건 기념일에서 내뱉은 [영웅적 인민군 장병에게 영광 있으라]는 외마디뿐이었습니다. 지금부터 들려드릴 金正日의 생생한 육성은 1978년에 납북된 신상옥(申相玉)·최은희(崔銀姬)가 녹음한 것으로서 1986년에 탈출할 때 가져와 세상에 공개한 것입니다.1989년에 국가 안전기획부는 그 녹음 테이프와 녹취록을 보도자료로서 언론사에 배포한 바 있으나 일반인들에게 金正日의 육성 테이프가 공급되는 것은 이것이 처음입니다. 인간의 목소리에는, 어떤 활자나 사진도 전달할 수 없는 현장감과 인격에 대한 느낌이 담겨지는 법입니다. 金正日의 육성을 통해서 인간 金正日의 실체에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다면 그것은 바로 우리가 북한체제를 더 정확히 이해하는 길이 될 것이고, 북한에 대한 오판이나 실수를 줄이는 데도 보탬이 될 것이라고 믿습니다. 녹음된 金正日의 목소리는 알아듣기 어려운 데가 있습니다. 월간조선(月刊朝鮮) 10월호에 실려 있는 녹취기록과 대조하여 들어주시면 이해하기가 쉽겠습니다.1·김정일(金正日)-신상옥(申相玉)·최은희(崔銀姬) 대화(1983·10·19)납치 공작 최종 책임자의 육성 자백金正日과 申相玉·崔銀姬씨 사이에 있었던 첫 녹음대화는 1983년 10월19일 저녁 6시부터 3시간 동안 평양 시내 노동당 중앙당사 內 3층 金正日의 집무실 바로 옆 접견실에서 이루어졌습니다. 崔銀姬씨는 소형 녹음기를 핸드백 안에 넣고 가서는 그것을 발 밑에 두고 몰래 녹음을 했다고 합니다. 테이프를 바꿔 낄 수가 없어 3시간의 대화 중에서 45분 정도만 녹음되었습求? 이날은 金正日이 지령한 버마 아웅산 테러로 우리나라의 엘리트 관료 17명이 객지에서 횡사한 지 10일이 지난날이기도 합니다.서울은 국상을 당한 충격과 분노로 침잠해 있을 때 동족집단 살인의 지령자 金正日은 즐겁게, 때로는 신들린 사람처럼 예술을, 또 영화를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金正日은 申相玉를 데리고 와 낙후된 북한의 영화를 발전시키려고 하나의 미끼로서 崔銀姬씨를 먼저 납치해 왔다고 스스로 실토합니다. 이것은 아마도 납치공작의 최종 책임자가 자신의 범행을 육성으로 자백하여 물증으로 남긴 세계 최초의 사례일 것입니다.{첫째 조건이 이북사람이다}金正日 : 에- 우리 남북교류에서 첫 번짼가 뭔가 하면 우선 문화교류다, 문화합작이다, 그렇게 하는데 내 타산이, 내 타산이 그렇습니다. 이왕 사람들이 이렇게 가고 오고 하는 거는 이제 이건 자기 의사에 따라서 가고 오고 하는데 (申감독이) 자기 발로 자기 뜻대로 이렇게 뜻을 가지고 오는 형식을 취할 수 있는 방도가 없느냐, 그래서 우리 동무들과 토론해 본 결과에 인제 홍콩 거점(申相玉씨의 가짜 중국인 동업자 이영생을 뜻하는 듯함)에서 연락 오기를 申감독 형님인가요저-, (申相玉씨의 형 신태선씨는 77년 여름 [신필림] 부도로 약 5개월간 홍콩에 피신해 있었음) 에- 자주 (홍콩에) 내왕한다는 거, 내왕하고 거기서 영화를 하자고 하는데 그 본질에 있어서는 남조선에서는 활동을 도저히 할 수 없고 나와서 이제 판을 치갔다 하는 게 그 때 그 말이 들어왔습니다. 그러면서 그 때 그러카는데 이제 그러니까 申감독 문제가 나온 거는 申감독 형님에 대한 문제부터 이야기 나와 가지고 그래서 인제 申감독에 대한 것을 그럼 요해(了解)해보자(알아보자).그래 그 때 쭉 영화들, 영화 그 자료들 다 훑어보니까, 인제 그 때 최익규 부부장 동무가 그때 그, 저-과장할 때입니다. 과장할 땐데 申감독이, 그 남조선에서는 누구를 제일 꼽느냐 그러니까, 申감독이다. 첫째 조건이 이북사람이다. (하하… 3인 웃음) 그 다음 그 사람이 정서가 정서상태가 지금 말하자면, 에, 이건 그저 우리 생각입니다. 그저 우리 생각인데 지금 박정희 밑에서는 아마 남조선에서는 아마 오래 지탱할라고는 안하는 것 같다, 그래 어떻게든지 해외에 나와서 자꾸 할려고 하는 기미가 있다는 거, 그걸 누구한테 들었는가 하면 그 형님한테, 그러니까 申감독도 사실 거기(한국) 들어가면 상당히 그저 지금 마지못해 왔다 갔다 하는데 진심으로는 앞으로는 바깥에 나와서 할 작정이다. 그런 거….申相玉 : 그 때 제가 (신필림) 허가를 취소 당했을 때지요.金正日 : 예예예. 에… 그래서 좋다. 그럼 그 사람을 한 번 데려와야갔는데, 그런데 그 사람 데려오는 걸, 남자 데려오는 건 좀 무리다. 그래 무린데 남자 데려오지 말고, 申감독을 유인, 유혹하자면 뭐가 필요한가. 그래서 실제 崔선생을 이렇게 데려다 놓았습니다. (모두 웃음) 그 때 나는 표방하는 게 뭐인가 하면 어떻게 남조선 사람들이 남반부 사람들이 우리에게 찾아와서, 공화국 품에 찾아와서 진정한 자유를 갖고 진정한 에, 그 영화하는 데 대해서 자기가 아무 근심 걱정 없이 한다는 걸, 하자고 표방은 그렇게 했지만 실제 내 생각은 왠가 하면 내가 그렇게 되어버렸단 말입니다.[경쟁이 없어 발전이 없다]고 실토金正日은 이어서 북한 영화인들의 나태성을 비판합니다. 그는 남한의 영화 수준이 높은 것은 경쟁이 치열하기 때문인데 북한에선 그런 자극이 없어서 발전도 없다고 실토합니다.金正日 : 그런데 우리나라를 보면 우리나라서는 그야말로 남북이 지금 대결하고 있어, 또 세계에, 세계에 지금 존재하고 있는 존재가, 존재 자체가 뭐인가 하면 어디까지나 지금 우리가 사회주의 국가에만 국한시켜 그저 사회주의 국가에만 나갈 수 있어. 어- 자본주의 국가에는 마음대로 나갈 수 없습니다. 실제상 일본사람들 하고 우리가 무역교역은 이렇게 한다고 해도 실제 우리 우리 민족간부 양성하기 위해서 기술 도입하고자고 실지 기술자들 보내자면 실제 그 사람들 받아주질 않습니다. 그건 적대적관계이니까 어디까지나….그래서 내가 생각한 거는 그 때 나 혼자 생각한 것은, 내 의도는 에- 누구한테도 말은 안했고, 내 그렇지 않아도 서방세계에서 서방세계에서 서방적인 기술을 습득해 가지고 자유자재로 이렇게 하던 사람들을 데려다가 우리가 그걸 바탕으로 해가지고 우리것 하고 합쳐가지고 서방에 침투해야 되겠다. 우리는 지금 동무들, 아니 선생님들 왔다가 보셨겠지만은 지금 딱 말하자면 울타리 안에서 자기 것만 보고 자기 것 좋다는 사람들이라구. (웃음) 이렇기 때문에 남하고 대비 안하고 대비해 볼 줄도 모르고… (중략)즉 말하자면 그 우리가 수준 차이가 좀 있단 말입니다, 솔직히 말하면. 그건 왜 그런가 하면 같은, 같은 기간에 어째서 남(南)은 밥을 먹어야 되겠고 돈을 벌어야 되겠으니까 피나는, 피눈물 나는 그러庸?애를 쓰는 결과와 여기 그저, 행복하고 그저 편안하고 하니까 또 채찍질하는 사람들이 없고 하니까 같은 기간인데 왜 우리 배우들이, 자라나지 못하는가, 또 남조선 배우들을 보게 되면, 이 배우들 역량(실력) 있는 사람들… 물론 역시 우리 신인들이라는 것은 한두 작품에서 쓰면 얼굴만 한 번 팔아먹으면 그저 그 뿐이라구. 연기력이란 건 전혀 없다니까.다 그저 두 번째 작품, 세 번째 작품은… 첫 번째 작품은 그 얼굴 보구 관객이 혹하는데 그 다음 두 번째 작품, 세 번째 작품은 연기력이 없다나니까 얼굴은 다 이미 친숙해진 게구 이거 연기력이 없다나니까 그거 꼼짝하지 못한단 말입니다. 그래 남조선 실태를 보게 되믄 젊은 사람도 많이 갖다 쓰는데 그걸 한 번 쓰고 집어 팽개치는 게 아니라 한 번 쓰고서 다음 번부터 보면 확실히 연기발전했다는 거 그거 알린다 말입니다.그래 나는 두 가지로 보았어요. 하나는 이 감독이라든가 이 신인 신인 신인 육성하는 데서 이제 많은 요구성을 높인다는 거 하나 있고, 그 다음에 신인들이 역시 배우 직업을 가진 사람들이 자기 노력이 없으면 법, 밥통이 떨어지고 돈이 떨어지니까 그 노력이 얻는 결과라는 거. 그 노력이 대단히 그 피나는 노력을 한다는 걸 내가 실질적으로 봤습니다. 내가 한 근 10년 동안 남조선 아이들 영화들을 죽 갖다 보구 테레비 그 그 사극들을 내가 잘 봐요. 이런 것들을 내가 죽 보는데 최근에 남조선놈들 그 사극이라는 거 보면 그거 못 찍는 것도 역시 그놈들도 지금 망하는 망할 망하는데 그 새끼들 지금…{내가 방패가 될 테니 申선생이 개혁을 해달라}金正日의 자가비판은 계속됩니다. 특히 그는 북한 체제의 낙후성에 대한 솔직한 인정과 비판도 자신밖에 할 수 없다면서 {내가 방패가 될 테니 申선생이 개혁을 해달라}고 부탁까지 합니다.崔銀姬 : 그렇지 않아도 그동안에 영화를 많이 보고 얼마나 안타까워했는지 모릅니다. 이 문헌고, 영화문헌고에 있는 영화를 왜 활용을 안했는지 모르겠다고, 그거 보면서 기술지도도 할 수 있고 연기지도도 할 수 있고 물론 그렇게 모방만 하는 게 아니고 창조적으로 적용할 수 있습니다. 얼마든지 그래 보면서도 안타까웠죠. 늘 그런 이야기 했어요. 그래서 친애하는 지도자 동지를 빨리 만나면 어떻게…金正日 : 그래서 난 밑에 동무들 보구는 다 대외적으로 얘기하는 거는 그저 申감독이나 우리 저 崔선생이나 다 그저 우리 제도가 좋으니까 그저 찾아왔다. 그리고 내 의도는 하지 않았어. 그렇게 하니까 어떤 사람들은 여기 실지 실무 일하는 사람들도 반신반의하지요. 그래서 일하면 얼마나 하겠나, 내 의도는 그렇지 않은데 그러나 실지 의도는 나 혼자 정치하는 사람으로서의 생각과 욕심이 바로 이런 바탕 위에서 이 두 분을 내가 요구가 됐고 그래서 이렇게 왔다는 겝니다.그래서 전번에도 3월달에도 그 때도 그 구체적 이야기하자 해도 옆에도 다른 사람들이 많다나니까 그 의도를 내 안알리고 그저 고문 노릇 해달라 그 그렇게 말로다가 둘러다 이야기하고 말았는데 그저 의도는 그겝니다. 그러니까 이거 우리 낙후한 걸 낙후하다는 것을 우리가 인정해야 됩니다. 그리고 신인이 육성 안되는 원인도 우리가 인정해야 됩니다. 그런데 이거 이거 감히 내가 말해야지 다른 사람들이 그거 말하게 되면 다른 사람들은 이 사람들은 왜 자기 것에 대해서 그렇게 만족하지 못해, 못하느냐 하하…. 그러니까 너 사대주의자 아닌가 이렇게 딱지가 붙으니까.그런데 여기서 새것을 지향하고자 하는 것에 대해서 누가 제일 잘 내 사고에 제일 적극적으로 나오는가 하면 저 최부부장이, 최부부장이 역시 영화문헌고 영화들을 거의 다 보았습니다. 이 동무가 이 동무가. 여기 이 동무는 어디까지나 당일꾼이지 그 뭐 이래라 저래라 뭐 요구하면 하나 받아 무는 게 열두 가지 받아 물어야 되구, 에 아 연출 고대로 받아물어야 되구 촬영도 받아 물어야 되구 미술도 받아물어야 되구 이렇게 되는데 그저 말할 때 그뿐이란 말입니다.다음 화면에 옮겨지는 걸 보면 그 새것으로 나가자고 하는 이런 지향하는 그런 게 전혀 없다 말입니다. 그저 교조적으로 다 똑같고. 그러니까 화면이 반복화면이 많고 도식적으로 이야기거리가 메워 있고. 내, 내 우리 이야기하지, 왜 우리 영화 밤낮 나오는 것, 예를 들어서 이 총체적으로 영화를 보구 야 과연 그 영화스토리가 거 주장하는 사상이 많다, 이런 거 결과를 놓고 보아야 되겠는데 왜 화면 장면 장면마다 자꾸 저렇게 초상난 집처럼 우는 것만 저렇게 많냐, 우는 게 저게 저 우리 영화 왜 영화 안우는 영화 저거 없지 않느냐 예 하, 하…. 상가집도 아닌데 왜 이거, 이렇게 맨드냐.崔銀姬 : 그야 충분히 알고도 남음이 있지요. 그렇지 않아도 그동안에 엄길선 감독이랑 생일날 배려해 주셔서 참석했어요. 그래서 (申감독이) 아이 맞대 놓고 막 비판을 해서 제가 송구스러워서 혼났습니다. 나중엔 인제 비판 받을 때 받더래두….
김정일의 육성테이프 - 반동분자 같은 놀라운 고백 60분(2){뭐 강제로 왔다 어쨌다 하는 것보다 에…}金正日 : 아니 아니 왜 이러세요. 내가 내가 뒤에서 뒤에서 인제 방패를 가지고 이렇게 막아주겠다니까 그러니까 이걸 과도적인 현상이지만 이걸 극복해야 됩니다. 이걸 극복해야 이 사람들이 창작방향을 어떻게 가져가야 되겠는가 하는 이걸 눈이 트이지 지금, 지금 가지고는 이걸 솔직히 말하면 곤란해. 내가 그런데 인제 내 딱 두 분한테 이야기합니다. 그러니까 이제 내가 오늘 만나자구 한 거는 사업에 착수하기 전에 꼭 만나 말씀드리자고 한 거는 왜 내 이 말을 강조하는가, 내 의도가 두 갠데 인제 이걸 알려주고 그러나 표현은 앞으로 다른 사람들한테,제삼자들한테는 우리 걸 너무 허무적으로 이렇게 하지 마시고 그야말로 내 의도만 내 꼭대기에서 의도는 이건데 당신네들이 그저 창작을 통해서 잘 모범을 하나 보여주고 그 다음에 자연히 따라오게 자연히 따라오게 만들구 에- 에, 그래서 만약 선각자 인제부터 말하자면 선각자 역할을 해야지 뭐. 그래서 내 의도는 내 왜 두 분이 필요했는가. 그래서 내 그렇게 하자구. 앞으로도 그래요. 앞으로두 이제 앞으로 일본 사람들을 만나자면 어떻게 만나구, 앞으로는 그래요, 그저 남조선 아이들은 그 민주주의가 없지 않은가. 자유가 없다구, 민주주의 없구. 그 다음에 창작에 너무 간섭이 많다, 에 그 간섭이라는 게 뭐이냐, 반공법 에- 딱 반공만 하라니까 요런데도 반공요소, 요쪽에도 반공요소 그러니까 자유가 없다. 그건 윤이상(尹伊桑) 선생도 그건 강조하신 게고.申相玉 : 저는 하여튼 미국생활 당시 쫓겨 나왔으니까 그건 뭐 다….金正日 : 그러기 때문에 자유가 없기 때문에 그저 외피적으로는 그저 진정한 자유를 찾아서, 진정한 자유를 찾아서, 창작의 자유를 보장받기 위해서 내가 여기 왔다는 거고. 그리고 작품 내용을 가지고는 인제 우리도 시작해서 꼭 선진국을 따라 간다, 아 따라가는 게 아니라 앞서간다, 앞선다, 이런 인제 우리 구호를 부르고 간다, 인제 이렇게 해놓으면 자연스러울 것 같습니다. 뭐 강제로 왔다 어쨌다 하는 것보다 에-. 지금 어, 옛날에 내가 [내가 찾은 길]이란 영화 내가 하나 실례를 들지요.[내가 찾은 길] 영화 우리가 한 번 그런 쓰라린 경험이 있습니다. [내가 찾은 길]이란 영화를 그 시아누크 캄보디아에서 영화축전 했습니다. 캄보디아 가니 시아누크가 영화를 좋아하는 사람이었지요. 굉장히 좋아하는 사람이지요. 그래서 불란서 등에 업고 내가 캄보디아 축전에 갔었는데 그런데 캄보디아하고 우리하고 관계가 좋았지요. 그 때 시아누크가 집권하고 있을 때인데 그래 우리 영화를 자꾸 내래서 [내가 찾은 길] 가지고 갔지요. 그 때 우리 주관주의가 얼마나 심했던가 하면(웃음)그 때 바루 영화를 돌려놓고 보니까 캄보디아 정부가 무어라고 그러고 이것은 캄보디아 국내에 있는 반(정부) 게릴라 부대들에게 고무를 주고 현정권을 갖다 반대하고 그걸 찬양하기 위해서 이 영화를 가져오지 않았나. 이게 하, 하…. 그래서 그걸 사정하고 손이야 발이야 빌면서 그런 거, 그런 거 우리가 생각하지 못하고 왔다는 것 그것 사죄했어요. 참가했다고 하는 그 등록이나 하고 왔단 말입니다. 거 양핼 구해가지구…. 거 이게 하나도 떳떳하지 못하지 않습니까?그래 내가 갔다 와서 그 다음부터 영화축전에 가지고 가는 것은 절대 가지고 가지 마라, 당에 보고하고 꼭-. 시아누크가 노발대발하구 시아누크는 그 때 반정부 게릴라가 있었단 말입니다. 그 빨치산들한테 고무를 주는 게구 자기네들의 왕국을 갖다 뒤집어 엎는, 이건 쿠데타 고무를 주는 게 되니 이게 날 반대하는 영화 아니고 뭐이냐. 이거 그거 노발대발해가지구. 그 사람들 가서 거 갔다 올 때까지 빌다 왔지 어-. 우린 에, 이거 하나 놓고 보아도 우리가 떳떳하게 이거 지금 예술제에 나갈 만한 작품이 없단 말입니다.(중략)이거 기쁨과 만족을 드리지 못해 죄송스럽습니다… 여보, 기쁨과 만족은- 지금 당신네들 걸음마 떼는 유치원 아이들인데 에- 南에는 지금 南에는 다 지금 지금 중등기술 다 소유해 가지고 지금 대학생들인데, 대학수준인데 우린 이제 유치원인데 뭐가 그러면서도 이 사람들이 뭐라 허면 새것을 받아들이지 안하고 완고합니다. 지금 이거. 그러니까 이것도 역시 내적으로 보면 우리 한 개 혁명인데 혁명적으로 이거 뒤집어 놓고 이거 새롭게 이제 말하자면 큰 목표를 놓고 지향 지향시키지 않고서는 꼭 이제 앞으로 이제 10년 어간 내에 우리가 못쫒아 가면은 인제 솔직히 말하면 세계적인 분포에서 보게 되면 우리 영화예술이 낙후한데서 아마 제일 낙후한데서 일위가 되지 않겠는가 에- 낙후한 데서 꼬랑지에서 삐리(꼴찌)가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申相玉 : 여하간에 친애하는 지도자 동지가 영화를 아시니 얼마나 일하기 좋겠습니까.崔銀姬 : 정말 얼마나 행복합니까.金正日 : 글쎄 그 사람들이 내 등을 엎고래도 하자 해야 되겠는데….申相玉 : 하나 하면 열을 아시는데 이거 얼마나 행복합니까.金正日, 교과서같은 북한 영화 경멸다음 대화에서 金正日은 이데올로기의 규제에 묶여 영화를 예술로서가 아니라 교과서같이 딱딱하게 만들고 있는 북한 영화인들을 경멸합니다.金正日 : [조선의 별]은 내가 말했어요. 이미 그 자들이 그 챙피스러운 말을 다른 데 가면 말 못할 겝니다. 내가 말한 겝니다. 이건 역사다, 책보기 힘든 사람들이 그걸로 봐라. 이건 예술이 아니다, 역사다. 그걸 솔직히 말하면 그걸 고리끼(러시아의 소설가)의 [어머니](고리끼 소설을 원작으로 한 러시아의 사회주의 영화)와 같이 그 어머니가 사망하는 장면 있지 않습니까? 돌아가시는 부분이나 이런 거는 그걸 예술적으로 더 잘 처리할 수 얼마든지….崔銀姬 : 아, 거기 참 아깝습니다. 그 장면….金正日 : 좋은 걸 놓친 게 많지요. 굉장히 많다 말입니다.申相玉 : 어머니가 그 장면 찍으려면 한 보름 굶어야 합니다.(웃음)金正日 : 살은 데룩데룩 쪄가지고 나와서…. 아, 그래서 내가 그랬어요. 이건 역사니까, 역사니까, 그런데 이거 앞으로 어느 때 가서는 다 개작해라. 언젠가 한 번 崔선생이 나하고 한 번 만난 적이 있지 않습니까. 거 [지대장에 대한 이야기](영화제목) 그 이야기거리 얼마나 좋은가, 그 이야기거리가 좋은 거 그 배우들이 자 잡쳐 가지고 편집 다 잡쳐 가지구 에….{개방, 하기는 해야겠는데 자체모순에 빠져 있다}金正日은 [유일사상 10대 원칙]이 10계명처럼 지배하는 이 북한을 개방시켜야 한다는 점에 대해선 공감하고 일정하면서도 그렇게 할 수 없는 딜레머를 이렇게 털어놓고 있습니다.金正日 : 그 모스크바에 가봤을 때도 그렇고 동부독일에도 한 번 가보시면 이제 유고슬라비아가 사회주의 진영치고는 유고슬라비아가 제일 개방된 사회주의, 사회주의 아닙니까. 개방시킨 나라인데 역시 중국도 요새 이번에 가 보니까 중국이 요새 역시 우리보고 나보고 그래요. 호요방이가. 자 이거, 어, 모주석이 모주석 모택동이 있을 때까지만 해도 자 이거 딱 문 닫아 놓으니까 우리 사람들한테 본 게 없어, 에-. 남의 것 보게 되면 남의 것 덮어놓고 좋다고 그래, 자기 것 자꾸 나쁘다 그래 어, 하하 하(웃음).그래 실지 자기가 나쁜 건 아는데 그럼 이걸 다 자기네 살구는 방법으로 해서 남의 것을 앞서야 되는데 아 이건 살구지도 않고 자꾸 남의 것만 좋다 하고 자기네 건 나쁘다고 하니까 이거 야단 아닌가. 그래 자기네들이 조금 개방해 놓으니까 뭐부터 배우는가, 개방 기술부터 배우는 게 아니라 청년들이 수염 기르고 머리 기르고(웃음) 아, 기술 배우라니 진탕 그저 외적인 것만 하니까 아직도 속에 들은 게 없어 그런 게 아닌가. 그 자기네 교육체계부터 좀 보편적으로 개혁해야 되겠다. 그렇게 나보고 솔직하게 얘기하더라구,호요방이. 역시 우리도 마찬가지라 말입니다. 우리도 그 외국영화 자꾸 돌린다고 하자 에, 테레비에다 대고 막- 공개적으로 돌린다면 또 역시 허무사상이 나온단 말입니다. 에, 그러하면 우리가 지금 양단돼 있는데 지금 어떻게 자기 민족적 자부심하고 그 다음에 애국투쟁 뭐 이런 게 있어야 민족심, 민족심이 강한 것도 키워야 되갔는데 아 덮어놓고 외국 것 외국 것 좋다고 숭배만 하게 맨들구. 그래 우리 기술이 그만큼 빨리 올라가게끔 만들어 놓은 다음에 외국 것을 개방해야 되갔는데 이것도 또 우리가 지금 자체모순에 빠져있는 문제의 하납니다. 에, 그러기 때문에 나는 그러기 때문에 말하자면 제한된 범위 내에서 이걸 권한을 주자, 내 의도가 그겁니다.{사회주의 제도 자체에 문제 있다}―스스로 인정다음에 나오는 육성에서 金正日은 중요한 고백을 하나 하고 있습니다. 자본주의 체제처럼 물질적인 보상을 통해서 일할 의욕을 돋워주어야 하는데 그렇게 할 수는 없는 사회주의란 이 제도에 문제가 있다고 스스로 인정합니다.金正日 : 그게 지금 쓰네 마네 하는 게 있습니다. 게다 지금 좀 과제를 팍 주면 조건 타발 나옵니다. 그게 봐서 무엇인가 하면 이 하두 우리가 지금 이게 해방 직후부터 이게 지금 말하자면 물질적인 이런 측면에서 그 말하자면 에- 의욕을 가지게끔 이제 이런 걸 우리가 하지 않고 다른 이제 저, 제도하고 관계있다고 난 생각합니다. 그러니까 그저 일년에 한 작품 나와도 생활비는 생활비대로 주고 작품 하나 썼댔자 그저 원고료 나오는데 그 원고료라는 건 어떻게나 하면 그게 주업이 돼야 되겠는데 그게 부업으로 됐단 말입니다(하략).에, 자기 실지 실지 써야 될 거는 부업이 되었고 이거 안 해도 생활비는 생활비대로 국가에서 먹여 살리고 돈은 돈대로 주니까 그러니 이 사람들이 의욕이 없단, 없단 말입니다. 그러니까 과제를 1년에 세 개 써라 이렇게 되게 되면 무슨 타발을 하는가 하면 그러니까 이게 너무 배부른 게 돼버렸지요. 그러니까 뭐냐 하면 그럼 자기는 사무실이나 집에서 쓰지 못하고 저기 어디 휴양소 보내 달라, 휴양소 가야 쓰겠다. 사람들이 거의 다 이렇게 됐단 말입니다. 그래 내가 전번에 우리 선전 일꾼들을 모다 놓고 얘기했는데 이게 사회주의제도 좋다고 하지만은 내부모순에서는 해결할 문제가 많지 않느냐 이겁니다. 예, 그러니까 사업에 대한 의욕이 전혀 없단 말입니다.申相玉 : 그래서 저도 그 문제를 한 번 생각해 보았는데 영화가 부흥되려면 우선 국내에서도 우수한 작품에는 시상하는 그런 제도가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새로운 아이디어를 내가지고 서로 경쟁하고 자극을 받습니다.金正日 : 네 그렇지요. 그래서 이제 우리 앞으로 이렇게 창작단에다가 따로 우리가 시범적으로 하나 해보자는 것도 있습니다. 그게 왜냐면 이렇게 놓고 그래 지금 보면 전부 다 국가예산이니까 국가예산젭니다. 그러니까 지금 솔직히 말하면 배우들 영화촬영하는데 컷, 컷트, 컷트 분할하는 걸 분할하면서도 한 로루(roll) 찍는 것도 말입니다, 어떡하냐면 우선 옛날에 과거 초기에는 에- 3대1이요. 5대1, 6대1 이렇게까지 나갔는데 지금은 거저 마감일 통과될 때까지 찍으니까 배우 하나 놓고 배우 하나 놓고 거저 한 컷트도 거저 예를 들어서 한 백미터 냅다 누른다 말입니다. (웃음)네, 지금 실태는 이렇단 말입니다. 에, 그게 망하면 보상은 국가가 보상하니까 영화가 우린 그저 저 이거 사상예술적으로 괜찮다 하면 그저 우선 그저 이렇게 교과서나 될 수 있다 해서 내보내면 문화예술부라는 것은 행정적으로 그저 도장 꾹 누르면 통과돼, 통과됩니다. 그럼 그 다 적자나는 것도 다 그저 보상해준단 말입니다. (하략)허무주의자 폭군, 고민 많은 독재자金正日의 이런 토로를 듣고 있으면 하나의 의문이 생깁니다. 북한 사회주의 체제의 모순을 멀쩡하게 파악하고 있는 金正日, 그리하여 선진 자본주의 국가의 영화 기술자를 납치까지 하여 북한 영화의 낙후성을 해결해보겠다고 달려들었던 그 金正日이 왜 아직도 문을 꼭꼭 닫아 건 채 북한을 자멸의 길로 인도하고 있는가. 金正日은 개방하지 않으면 망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개방할 수 없는 제반조건의 포로가 되어 있는 것이 아닐까요. 사회주의와 주체사상 이 두 가지 장애물과 우상을 걷어치우지 않고서는 개혁과 개방을 할 수 없는 金正日. 즉 아버지 金日成을 부정하지 않고서는 북한을 구제할 수 없고 그 金日成을 부정하면 필연적으로 자기 부정이 되어버리는, 이 헤어날 수 없는 수렁 속에서 발버둥치고 있는 것이 金正日이 아닌가 합니다.이 녹음 테이프를 계속 들어보시면 아마도 두 가지 이미지가 떠오를 것입니다. 네로 같은 허무주의적인 폭군, 그리고 햄릿 같이 고독하고 고민 많은 독재자. 문제는 金正日이 네로나 햄릿처럼 비극적인 최후로 나아갈 때 남북한 7천만 주민들의 안위에 어떤 영향을 미칠 것인가 하는 불안인 것입니다.2·金正日―申相玉 전화 1984·7월 하순){저짝 사람들 배아파하도록}金正日의 특명에 의해 신상옥(申相玉)·최은희(崔銀姬)씨는 평양에 [신필림]이란 이름을 그대로 사용한 영화사를 설립, [돌아오지 않는 밀사], [춘향전], [안중근, 이등박문을 쏘다] 등의 영화를 만들어 갑니다. 한편 1984년 4월 2일 국가안전기획부는 申相玉·崔銀姬씨가 서울의 가족들에게 보낸 육성 녹음 테이프를 공개하고 두 사람의 납치 경위와 북한에서의 활동상황을 발표하게 됩니다.그 석달 뒤인 7월 하순 평양에 있는 申相玉씨의 사무실로 金正日이 전화를 걸어왔습니다. 이 전화는 당에서 공식으로 설치한 녹음 장치에 의해 녹음되었습니다. 金正日의 모든 육성은 교시이기 때문에 그것을 정확히 받들기 위해서 녹음을 해둔다는 것입니다. 이 전화에서 金正日은 申相玉씨 부부가 납치되어 왔다는 인상을 주지 않기 위해서는 북한 공작원들의 보호하에서 유럽 각국을 자유롭게 돌아다니면서 영화제작을 하는 것이 좋겠다고 권합니다.申相玉 : 여보세요.金正日 : 이거 안됐습니다.申相玉 : 접니다. 아 이렇게 전화해주시고 바쁘신데….金正日 : 아니 일 없습니다. 저 여기 사회주의 나라들에 왔다 갔다 하는 건요, 뭐 우리가 담보하는 거니까 별 것 없을 거구요. 지금 제일 좋기는 그 저 오지리에 말입니다. 거 자본주의, 중립주의 나라들에 좀 나타나야 그게 나타나야지, 이 사람이 순전히 그저 사회주의 나라만 댕기는 거는 우리가 통제하에 댕기는 것처럼 말입니다. 이런 자꾸 인상을 주기 때문에요. 말하자면 저 중립주의 나라들 말입니다. 중립국가를 표방한 나라들에 댕겨가지고 우리 사람들 구루빠를 맨들어서 보호하면서 다니면요. 절대 단신, 단신 행동이라는 거는 있을 수 없는 거구요.그렇게 해서 항시 구라파에 댕기면서도 이제 이름을 날려야지. 그래 나 아까 최부부장 보고도 얘기를 했는데요, 그러니까 이 나라들에는 다 저 그 남조선 공안들이 있으니까요. 거 왔다리 갔다리 하면서도 손은 못대게 하고 그렇게 하고 우린 또 떳떳하게 댕기면서도 사방에서 우리가 보호하면서 말입니다. 그렇게 해야 이거 저 그놈들 저, 저짝, 저, 저짝 사람들이 좀 더 배아파하고 말입니다. 그, 그야말로 자유의 몸이지요.申相玉 : 그래야 우리가 말입니다. 떳떳하게….金正日 : 고럼.申相玉 : 공세로 나갈 수 있습니다.金正日 : 고럼, 그래 우리가 가만 내가 생각해보니까 그저 뭐 인터뷰나 해가지고 앉아서는 말입니다. 헤헤헤(웃음) 그래서 아까도 토론이 있었는데요. 그저 어떻게든지 우리가 이젠 이왕 이렇게 된 바 치고는 저 공세를 취하자, 공세를 취하고 그 뭐야 申감독이나 그 崔선생이나 다 뭐 그 뭐 그, 그 결심이 보통이 아닌 게고. 또 자기 여기 또 촬영소 다 꾸려, 또 차려 놓고 앉아 있는데 이제는 그 정치 무대를 저 범위를(약간 더듬는다) 좀 넓혀서 그래서 활약하면서 또 이 마음이 없어도 행동과 그 제스추어를 가지고 그놈들이 부러워도 하면서도 가능할 수 있도록 말입니다. 이렇게 나가는 게 더 좋지 않겠느냐…. 그래서 참 여기에 저 윤이상(尹伊桑)이가 또 왔어요.申相玉 : 또 왔어요. 네.金正日 : 네, 그래서 한 번 어느 때 한 번 만나지 않겠어요?申相玉 : 만나게 해 주십시오.金正日 : 두 분께서 만나시구요. 거 만나는 것도 저 역시 저쪽 사람들에게 이야기한 것처럼 같은 입장에서 말해야 될 것 같습니다.申相玉 : 그렇지요. 그런 거 많이 느꼈습니다. 오히려 저보다 무장 안된 사람이 더 많아요.金正日 : 하하… 그래서요 여기 적을 둔 게 아니고 저쪽에 두었다 하구 그렇게 尹伊桑이게도 이야기하고 필요하면 둘이서 서독인가 서백림(서베를린)에 넘어가서 사업할 수도 있는데 좀더 방조해 달라. 그건 합법적으로도 그렇게 해야지요.申相玉 : 네, 좋겠습니다. 국적이 저쪽이니까요. 여하간에 저는 지도자 동지한테 반한 사람이니까요. 필생의 대작들이 여기서 끝내기 전에는 가라고 해도 잘 안 갈 겁니다.金正日 : 그러면 인사 전해 주십시요
김정일의 육성테이프 - 반동분자 같은 놀라운 고백 60분(3)
3·金正日―申相玉·崔銀姬 대화(1984·8·4){개방하면 무장해제하는 것과 같은데…}崔銀姬씨가 감독한 [돌아오지 않은 밀사]는 1984년 7월 체코에서 열린 카를로바리 국제영화제에서 감독상을 받았습니다. 그 한 달 뒤인 8월 4일, 金正日은 申, 崔 두 사람을 중앙당 집무실로 초대하여 두 시간 반 동안 대화합니다. 이 자리에서도 金正日은 {인민들을 먹여살리기 위해서는 역시 서방세계로 뻗쳐나가지 않으면 도저히 할 수가 없다}고 고백하면서도 군사적 이유로 본격적인 개방은 어렵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金正日은 또 [6·25 전쟁은 인민들이 우리의 제도를 고수하자 해서 나간 것이다]라고 표현함으로써 남침사실을 사실상 시인하고 있습니다.金正日 : 앞으로 이 영화제에 많이 나가게 해서 앞으로는 이 세계 방방곡곡에다가 에, 만방에다가, 아마 조선이라는 게 영화 통해서 좀 선전해야 되겠다. 뭐 노동신문에 대가리 선전문에 큰 돈 들여가지고 선전을 해두 영화 하나 하는 것보다 못하단 말입니다.崔銀姬 : 예, 그렇습니다.金正日 : 우리가 그 전에 10여년 전, 20여년 전 무슨 소리를 했는가. 인민들은 좀 허리띠 졸라매자, 허리띠 졸라매고 남북이 분단돼 있는 조건에서는 우리가 우선 자체의 혁명역량을 준비해야 된다. 그러기 때문에 에, 허리띠 졸라매고 국방건설에 힘을 기울여야 한다. 국산화, 국산화 하는데 엔진개발, 남조선 아이들, 남조선 사람들 하는 것 보면 오토바이 하더래도 엔진 가져오고, 뭐 가져오고… 뭐 그저 다 조립품이거든. 승용차 요새 뭐든가, 그것도 다 완전히 조립품이란 말입니다.그래 자기네 국산화라는 그거 40%인데 조립해 가지고 선전을 어떡허나 국산화다. 자기네가. 우린 그렇게 하지 말고 기획공정 기계를 다 보여주라… 보여주고 하나에서부터 열까지 완성된 것까지 보여주고 그럼 이 기자들이라는 게 남조선에 【?그 남조선 공장하고 우리 공장하고 대비해 볼 게 아니냐. 그래서 지금은, 우리가 어떤 방향으로 나가는가. 좋다, 국방공업이나 중공업을 우선적으로 민다. 밀면서도 동시에 우린 뭘 해야 되갔는가, 이제 인민생활 올릴 때가 됐다. 왜냐하면 사회주의 인민들이 허리띠 졸라매는 거는, 내가 그 말 했습니다. 우리 동무들 보고… 참고해서 들어보세요.50년도 전쟁이 일어날 때 우리 인민들이 감정이 어드랬느냐? 그 때는 이 감정이 특히 남조선 사람들도 역시 그 때 인민군대가 나갈 때 받아들인 감정하고 그게 하나 맞아떨어진 게 있다. 몇몇 자본가나 몇몇 그 중산 계층을 위한 사회가 아니다. 그러니까 그 때 그 제도가 좋았다고 해서 우리가 그 때 뭐 있었는가. 소련이 그 때 무기 좀 대주었을 뿐이지. 사실 우리가 제도 좋다는 걸 알았기 때문에 그 제도를 고수하자 해서 나간 게지. 그러니까 남조선은 역시 자본가, 지주, 매판 자본가들이 있다. 그러니까 이거 나가 해방하자 하는데 의의가 있어서 했는데 그 때는 그걸 큰 득을 봤단 말입니다. 우리가. 이게 사회주의 한 30년 해보니까 역시 인민들 먹이고 살리고 하는 것은 서방세계로 뻗쳐 나가지 않으면 도저히 할 수 없다. 엄연히 서방세계보다 떨어져 있는데 지금. 그래 사람들이 지금 이거 의식문제가, 이거 아주 사상 문제가 아주 중요한데 이거 우리 지금 극복하기 위해서 동구라파 나라들이 지금 저 애먹죠.이번에 호요방이 만나고 와서 그래요. 우리나라 나왔을 때 당신네 왜 개방, 저 관광업 안하냐, 관광업 하면 돈 많이 번다. 이래서 내 이해해서 우리 관광업 이제 하겠다, 이제 하겠는데 역시 그것도 우리가 안하자고 해서 안한 게 아니라, 물론 안하자고 했지만 지금은 하자고 결심했다. 근데 그 남조선 아이들은 관광업 안하느냐, 관광업합니다. 대대적으로 하죠. 관광업을 하는데.그런데 우리는 글쎄 종심(縱深·세로 방향의 거리)이 이렇게 밭다. 수도하고 수도가 종심이 밭고, 또 이 분계선하고 종심이…. 이거. 아 이거 당신네 대륙이 큰 대륙을 가지고 있어서 이런 거 마음대로 하지만, 우리야 종심이 밭은데다가, 아 이거 국경이 해안연선이 이거 얼마되지 않은 데다가 총총히 총총히 다 지금 군사 요새화했는데 이걸 개방한다면 우리가 자연히 관광업도 한 걸로 해서 개방한다고 해서 자기네 병력 철수한 거나 같지 않은가. 밥 한 번 먹구 우리가 전략적으로 고착되기 시작하는데 아 다 와 보고 가면 다 개방하면 하하, 또 평양개방하면 마감에는 국경에 남겨 놓은 군대가 평양에 들어오라고 하는 거나 같다.그 다음은 평양에 와서 해야지, 자연히 무장해제 당하는 것과 같다. 무장해제 하는 거나 같은데 이거 통일된 다음에 우리가 하자 했다. 그러나 당신네 경험도 있고. 우리가 하겠다. 우리가 하겠는데 방법이 있는데 우리가 하겠는데 관광을… 그 사람들이 함흥 가겠다 청진 가겠다 뭐 다 있는데 함흥, 청진은 뭐 이제 가보시면 알겠지만… 이 태평양 함대, 소련함대, 태평양 함대 중국사람들 일본하고 거래하는데 청진항, 호요방이 청진항 갔다오지 않았습니까….청진항, 청진항 거 지금 우리나라가 전략적 위치라고. 일본놈들도 우리나라가 이거 소련하고 무역 거래, 중국하고 무역 거래에서 우리가 지금 딱 요충지대에 있는 거요. 일본놈들도 이거 래왕해야겠고. 그래서 이 호요방이 보고 그랬습니다. 우리 개방정책 이제 하겠다, 개방정책 하겠는데 제한된 국부적인 군데만 우리 하겠다. 어디 어디 하겠느냐 그래요. 청진하겠다, 청진하고 아 강원도 일대 다 하겠다. 그럼 서해안 안하는가? 아 서해안 그런 못하겠다. 서해안은 솔직히 말하면 이 개성서부터 이 짝에 거 저 종심이란 게 뭐 그 얼마 없지 않습니까? 그래 하겠다. 그래 관광업 우리 하겠다. 그래 당신 하는가 보자. 나 약속하고 왔습니다.{우리 사람 대여섯 붙어 다녀야지}崔銀姬 : 동경영화제 얘기, 말씀 안하세요? 동경영화제…申相玉 : 아 동경영화제 그걸 말씀드려야겠네요. 동경영화제 그걸 갖다가 그 집행위원인데 동경영화제를 내년도 1회에는 경쟁은 없고 신인만 경쟁이 있습니다. 신인감독. 그래서 신인감독도 우리가 하나 보내야겠는데 거 남조선도….崔銀姬 : 그 상금이 얼마나 될까요….申相玉 : 그 상금이 백50만불이요. 그걸 타면은 그 상금 탄 돈으로 새로운 제작을 하나 해가지고 서로 판권 노나 먹기로 이렇게 해가지고 상금 백50만불 타 씁니다. 그런데 상금 타는 게 문제가 아니고 우리가….金正日 : 그런데 그 자식들, 그 자식들이 보면 우리가 거거거거 배우가 당선됐다고 뭐 주겠어 거.申相玉 : 아니아니 그게 참가하는 게 문젭니다.金正日 : 동경영화제 한 번 그것도 나가봐야지 않캈어….申相玉 : 아니 나가봐야 됩니다. 왜 그런고 하니요, 저짝에 집행위원에 한 사람은 있으니까요. 우리가 여하간 참가를 해야 됩니다. 나는 요번에 가서 오지리 가서 그(불명) 정리를 하고요, 그리고 들어오고. 그 다음에 윤이상(尹伊桑) 만나가지고 서독관계를 좀 알아봐가지고 앞으로… 그렇게 좀 해야 되겠어요. 그래 제가 밖에 좀 드나들고 어쩌고 하는 것은 그 때, 그 때 저 보고를 드리겠습니다만은….金正日 : 예, 그런데 당분간은 다닐 때는 우리 사람들이 대여섯 명 붙어 다녀야지….申相玉 : 예, 그렇게 하겠습니다.金正日 : 그놈들(남한 공안)이 그…… 하질 않아서 그렇지 만약 한다, 마음 먹고 하면 거 우리보다 더 악착하게 하니까….{윤이상씨 한번 찔러봐요}이날 金正日은 申相玉씨에게 그때 서독에서 활동 중이던 작곡가 尹伊桑씨와 협조해보라고 권합니다.申相玉 : 그러고 저 문젠데요, 그래서 지금 저 윤선생을 한 번 만나면 서독관계 사항이 어드런지 좀 얘기를 들어보고…金正日 : 아 그러니까 내 의견은 전번 전화할 때는 내 얘기 안 했는데 윤이상(尹伊桑)이도 여기 아들, 아들 그 녀석이 장가가고 그래서 저저 정신도 제 정신이 돌아왔고. 그래 지금 성당(?)에 가서 휴양합니다. 내가 그래 돌아오면 제일 좋기는 그저 한 번 만나서 한 번 그 사람…, 그런데 그 사람이 이번에 와서 그런데 그 사람도 역시 고충이 있지요. 가서 그런데 한 번 물어 볼 거는 내가 그러니까 신총장이 내가 직접 지금 서부독일, 서베를린에 갈 수 있다. 얼마든지 우리 여권을 가지고도 나는 얼마든지 갈 수 있다. 갈 때, 가실 때 가는 경우에 당신이 뒤에서 받쳐 줄 수 있나 이렇게 할 번 찔러봐요.찔러 보구 자연스럽게 서독에 가는 방법을 아마 자기가 얘기하지 않겠는가. 그래 내 의견은 서독하고 역시 잘 하면 동독에서 서독으로 왔다 갔다 하는 거는 우리가 얼마든지 할 수 있지 않겠는가. 그래 갖고 우리가 은행구좌 가지고 있는 것도 역시 말입니다. 빈에다가 하나만 하지 말고 대개 내 구좌에다가 한 3백만불 정도 계산하고 중간중간 나가서 서독 내에다가…… 그렇게 해야지 이제 어 한 1년만 …사람이나 무슨 사람이나 거래해 보면 빠져나가는 것도 은행이야 아무 은행이나 구좌 하나 가지고 해먹는 것은 해 먹길래 그러니까 내가 그 수가 해딱 다 뒤집어져 말하자면 밑구멍 다 디다보이는 하여튼 하는 짓은 하지 말자…… 그래서 내가 자꾸 이 코스를 많이 찾아보라고 하는 긴데, 서독을 내가 택할 수 있습니다.그 다음에 동시에 하나는 제네바, 제네바 유엔기구가 있기 때문에 그 제네바에다가 하나 할 수 있지 않겠는가, 하나는 오지리, 지금 현재 하는대로 하나 할 수 있지 않겠는가. 서너 개 이렇게 하구 하나는 사회주의 국가 나라에다가 하나 그저 하나 다 받쳐 짓구 있구. 하면 한 네 곳이면 앞으로 이 서방인물들 이렇게 끌어 당기는 데서 좀 이렇게 호기심 가지게 할 수 있지 않겠는가. 그런데 계약하는 거는 그 저 원칙 그렇게 세워 주세요. 너 가서 숙식비, 아 우선 첫째는 안전담보, 안전담보는 우리나라 오는 경우에 첫째 조건은 그겁니다. 안전담보는 우리가 하갔다, 우선 하고 그리고 두 번 째는 뭐인가 하면 숙소하고 숙식비 그건 다 우리 부담이다. 뭐 재우는 건 우리 부담이다. 이렇게 두 가지만 두 가지 정도만 우리가 하는 조건에서 내가 보기에 오오오 오지 않겠는가 이렇게 생각합니다.{윤정희 정도만 만들어주면 좋은데…}영화광인 金正日은 남한의 텔레비전을 일상적으로 시청하면서 인기 드라마의 방영 시간까지도 잘 알고 있었다고 합니다. 그들이 납치하려다 실패했던 윤정희씨를 비롯 김희갑, 정윤희씨 같은 배우들의 이름도 줄줄대고 있습니다.金正日 : 누가 제일 유망해요?崔銀姬 : 창세 동무가….金正日 : 아니 여배우치고.申相玉 : 여배우치고… 네 정화가 괜찮죠. 정화가 괜찮은데… 요번에 걔들을 위한….金正日 : 그저 윤정희 정도만 맨들어주면 좋은데….崔銀姬 : 윤정희 댈 게 아닌 아이들이 좀 있습니다.申相玉 : 한 대여섯 명 나옵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그런 건 문제가 아닙니다.金正日 : 희갑이하고 저기 그 또래 배우들이 영화, 일생 영화 찍었다고 보는데 한 몇 편이나 했을 거 같애요?申相玉 : 한 5백편…崔銀姬 : 단역도 많이 하고 그랬을 테니까요.金正日 : 정윤희라는 거 저 테레비 나오는 거 보니까 정윤희라는 년이 벌써 백20편 했다구 그러더래요.崔銀姬 : 그렇게 될 겁니다.金正日 : 그래 내가 저거 엊그저께 나온 것 같은데 저거 벌써 백20편 했겠는가 그랬지요.崔銀姬 : 작품 수가 많으니까. 조금 팔린다 하면 그냥 사방에서 데려다 쓰니까…金正日 : 그런데 이번에 우리 사람들 갔다 와서 얘기하는 거 보니까 싱가포르도 무대 좋다고 그래요. 허담 비서 말에 의하면 홍콩 있지 않습니까. 홍콩은 이제는 그 쇠퇴하고 몰락하는 홍콩이고 소련, 중국 몇 개 나라는 비자 없으면 못 들어오구. 우리하고 관계 좋다나니까 싱가포르가, 어떡하는가 하믄 15일 날은(15일 동안은) 거저 마음대로 들어와서 거저 마음대로 거저 돌아다니면서 자기 하고 싶은 거 하라고…. 그래 15일 있다가 가게 되면 앞으로 영화무대를 동남아시아에서 한 번 해보자 하는 생각도 있는데… 15일 있다가 다시 옆에 나라 와 있다가 하루 있다가 다시 들어가면 또 그저 한 번 나왔다 들어가면 또 15일입니다.崔銀姬 : 홍콩까지 나왔다가….金正日 그래서 이제 금년도 구라파는 금년도에 내가 얘기하는 거는 구라파 뚫자는 겁니다. 구라파 저 이거처지를 갖다가 우리 명백하게 인식을 두기 위해서는 구라파구. 내년도부터는 구라파가 이제 확고하게 거처지가 인식되믄 내년도에는 이 저 신필림에서도 다른 놈들 싱가포르에도 좀 내돌리고 그래서 이 좀 세계적인 판도에서 이 좀 한번…. 지금 뭐 지금 어드래요? 지금 제일 저 외국하고 합작하고 가능한 제일 비슷한 게 거 어딥니까. 이탈리아죠?… 그래서 내가 말하는 것은 신이탈리아가 드디어 하나 나온다는 겁나다. 하하….
김정일의 육성테이프 - 반동분자 같은 놀라운 고백 60분(4)
4·金正日―申相玉·崔銀姬(1984·12·31){대외선전 차원에서 다 들고 나가야지요}1984년 12월 31일 오후 金正日은 申相玉·崔銀姬씨를 중앙당사 내 자신의 사무실로 불렀습니다. 金正日은 바로 다음날인 새해 아침에 金日成이 두 사람을 면접할 것이라고 알려주기도 합니다. 이 자리에는 영화담당 최익규 부부장이 배석했습니다.金正日 : 그래 그 영화 계획이 뭐냐 그래서 내가 영화 [춘향전] 최여사하고 같이 볼 계획이다, 그랬더니 아 내가 지금 심심한데 빨리 좀 봐야겠다. 그 영화 좀 메고 와서 나하고 같이 보자, 그래서 같이 보았는데 대단히 만족해 하십니다. 대단히 만족해 하시고 이번 설날에는 어떻게든지 몇 년째 수령님께서 최여사 신년 축하편지도 매해 받으셨다고 하시면서 그래서 이번에 그 전에 밑에 놈들한테 기대 걸지 말고 내 직접 이번 설날에 아침에 만나 보겠다, 이렇게 교시 계셨습니다. 그래서 내일 아마 내일 만나시게 될 것 같습니다. 만나시게 되면 그래 하여간 우리 부강한, 우리 조선을 우해서 헌신분투하겠다고 결의만 하시면 힘껏 고무해주시리라고 나는 생각합니다. (최익규에게) 이번에 어떻게 몇 코피나 떠?(춘향전 필름의 카피본 제작 개수를 물었음)최익규 : 지금 여섯 코피 떴습니다.金正日 : 왜 이제, 일본에서 떠야 되나?申相玉 : 예, 어제 아침에 일본에 부탁은 했습니다.金正日 : 아니 아니 몇 코피 떠야 되냐구. 한 2백 코피 뜨고 이 저 소련에 소련에 중앙아시아, 우리나라보다도 동남아도 대여섯 판 내보내고 이 소련에 원동에 있는 조선사람들, 그 다음에 중앙아시아에 있는 조선 사람들, 중국 동북에 있는 조선 민족들, 이거 이거 많이 선전해야 됩니다. 우리도 무슨 그런 문학이 없는 민족이라고 이렇게 생각하?때문에 다 이젠 다들 보게 해서 자꾸 이런 건 내보내는 게 좋습니다. 내보내는 게 좋고, 그 새 뭐 영국 런던 영화축제도 있었고 그 다음에 또 최여사께서 또 수술도 이렇게 큰 수술, 수술이라는 게 뭐 말이 수술이라고 사실은 목을 내맡기는 거나 같은 그거 큰 건데 솔직히 말하면 은근히 걱정도 많이 저희들은 했습니다. 봉화진료소 내 어저께 남인 소장한테 물어봤습니다. 그러니까 자기네는 이런 아직 그런 선진국적인 것 아직 파악이 없다고 실습도 많이 나가는데 아직 파악이 없다구. 그런데 실제로 자기네 내부 자체도 큰 일 날 뻔했다고 해요. 다행히도 외국가서 걸려도 걸린 게 천만다행이라고 그래. 허허허허….崔銀姬 : 과장이 직접 집도했는데요. 아주 굉장히 기술적으로도 능하지만 수술한 다음에 치료방법이 좀 다른 것 같습니다. 그래서….申相玉 :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하여간 그냥 뚫고 나가겠습니다.金正日 : 그거 대외 선전적인 견지에서 그거 할 수 있지 않은가.申相玉 : 뭐 국내판 아니라도….金正日 : 그거 하십시요. 자신 있으면…申相玉 : 국내판은 국내판대로 또 만들구요.金正日 : 자신있으면 하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申相玉 : 그런데 이 정당하게 정상적인 작품만 자꾸 들고 나가 가지고 이 시장을 침투 못하겠습니다.金正日 : 나쁘지 않습니다. 나쁘지 않고, 그 저 능력과 영향 관계인데 그 저 최대한으로 보장하고 만약에 결심이 나면 하나도 신경 쓸 거 없어…. 우리나라에서 뭐 우리나라 미관에 어떻게 맞겠는가 안맞겠는가 생각하지 마시고 그 어디까지나 대외 그 저 대외선전적인 견지에서 볼 때 거저 자신있는 것 다 들고 나가야지. 내년도에 선이 해결되면 MBC까지 보셔야 되겠습니다. 요새 텔레비 그 보면 그 뭐 사극이라 해가지고 또 뭐 많이 개발해 나오는데…. 申相玉 : [춘향전]은 끝났죠? 인제.金正日 : 예.申相玉 : 꽤 오래 하드만요. 그걸 좀 봐야 감각을 잡겠는데…. 아주 오래돼서 허허.金正日 : 역시 그 저 보면 다 그 전에 그저 판치는 게 그저 여자들 보면 거저 사미자 또래들 역시 그 또래죠.5·金日成―申相玉·崔銀姬 대화(1985·1·1){남조선 썩은 제도를 당장 맡으라고 해도 곤란해}1985년 1월 1일 아침 흔히 주석궁으로 불리는 평양의 금수산 의사당에서는 신년 축하연회가 열렸습니다. 申相玉씨와 崔銀姬씨는 접견실로 안내되어 처음으로 金日成과 대화를 갖게 되었습니다. 이 자리에는 金日成의 처 김성애(金聖愛)도 있었습니다. 이 대화도 崔銀姬씨가 손가방 안에 넣은 소형 녹음기로 담은 것입니다. 이 날 대화에서 金日成은 5백억 달러의 외채를 지고 있는 한국과 10억 달러의 빚을 진 북한을 비교하면서 자랑을 하고 있습니다. 金日成은 또 남북한이 하나의 연방국가로 UN에 가입해야 하겠다고 강조합니다. 그러나 그 뒤 10년, 국제환경의 변화에 밀려 북한은 결국 대한민국과 함께 UN에 따로 가입하게 되었고 경제는 파산해버렸습니다. 이 날 金日成이 보여주었던 자신감과 낙관은, 아첨꾼에게 둘러 싸여 세상 물정을 모르게 된 늙은 독재자의 오판으로 판명된 셈입니다.金日成 : 뭐 수술했다는 것 일 없어요(괜찮아요)?:崔銀姬 : 네, 일 없습니다.金日成 : 건강하세요?崔銀姬 : 네, 감사합니다.金日成 : 웽그리아(헝가리)에서 했어요? 수술.崔銀姬 : 네.金日成 : 申감독도 이제 나이가 어떻게 돼?申相玉 : 쉰 여덟입니다.金日成 : 어 쉰 여덟. 이제 오래지 않아 예순살이 되겠구만. 이제까지 한 작품들 다 훌륭했습니다. [돌아오지 않는 밀사], [탈출기], 새로 나온 [춘향전]도 좋았고, 춘향전 또 뭐야 난 이름을 잘 기억 못하겠는데….金聖愛 : [붉은 날개]…金日成 : 뭐야?金聖愛 : [붉은 날개]…金日成 : 어 [붉은 날개]…金聖愛 : [높은 영마루]…崔銀姬 : [철길따라 천만리]…金日成 : 지금 우리 평화통일 주장하는데 지금 자꾸 접촉하고 있습니다. 지금도 최근에 뭐이가 이원경이라고 하는 외무장관이 발트하임 보고 말하기를 두 개 조선이 UN에 가입해야 된다. 그러면 국제적으로 우리 조선을 영원히 분열시켜 놓겠다. … 그러지 말구 우리 주장하는 건 남조선 제도는 그대로 두고 북조선 제도도 그대로 두고 서로 자치를 하면서 한 개의 나라 두 개의 정부를 연방해서 한 개의 나라로 만들어 가지고 UN에 가입하믄 그 앞으로는 어떻게 되든지간에 이 국제적으로 분열된 조선을 영구화시키는 것은 아니거든.(중략)그런데 이 양반들이 뭐 에, 지금 레간(레이건)이가 연설하는 거 어제 말들을 보고 들어보니까 레간이라는 사람도 어폐가 있단 말이야. 두 개의 나라라고 말하지 않소? 두 개의 나라라고. 우리야 한 개의 나라 두 개의 정권 이걸 명백히 해야 돼. 그러니까 두 개의 정부를 시인토록 하는 데 이거 하믄 그저 연방정부 만들어 가지고 조선을 고려하고 하든지 그렇지 않으면 뭐 상대방에서 좋은 의견이 나오지 않으면 좋은 이름도 좋고. 그러나 신라라는 이름은 아마 우리에게 적합치 않아. 신라라는 건 왜 그런고 하니 우리 그 역사적으로 보면 당나라 하고 비밀리에 연합해가지고서 이 백제를 치고 고구려를 쳐서 망하게 해서 승리한 게란 말이요. 당나라하고. 그 다음에 신라식 통일이라고 하는 박정희의 그 논조도 우리는 찬성하지 않고 저 아마 신동지는 역사를 잘 알겠지.(중략)그러니까 서로 누가 누구를 먹을 내기하지 말고 서로 그 제도를 그대로 두고, 자본주의는 남조선에 경우에서는 그 썩은 제도를 당장 맡으라고 하기에도 곤란해. 5백억 달러의 빚을 졌어. 5백억 달러의. 5백억 달러라는 게 당신 생각해 보오. 간단한 문제가 아니란 말이요. 우리들은 어떤가 하니 한 10억 달러 빚진 것도 그것도 돈벌이를 해서 금년에 물고 명년에는 다 없애버리자고 하는데, 그것도 공짜 이자가 나가지 않아. 공짜. 우쯔노미야 도꾸마(일본 국회의원)가 나보고 와서 무어라고 그러는가 하니 자기가 남조선에다가, 너 남조선에다가 숱한 돈 자꾸 대주지 않는가 그러니까 그거 대준 게 이자만 물어도 거저 일년 이자밖에 안된다고, 이자!정치국원 : 위대한 수령님 만수무강을 축원합니다.金日成 : 감사합니다. 자 새해 인사합시다.6·金正日―崔銀姬 전화(1985·9·24){기자들, 거 거렁뱅이 같은 것들인데요}1985년 9월 21일 평양 대극장에서는 남북한 예술단 교류 공연이 열렸습니다. 김희갑, 김정구, 나훈아씨 등 申相玉·崔銀姬씨와 잘 알고 지낸 남한 연예인들도 출현했습니다. 申相玉씨는 영화 촬영 차 북경에 가 있었고 崔銀姬씨는 신필림 사무실에서 녹음작업을 하고 있었는데 평양 대극장 공연의 참관은 허용되지 않았습니다. 그 나흘 뒤 金正日은 신필림 사무실로 전화를 걸어왔습니다. 金正日은 여기서 한국 기자들을 [거렁뱅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金正日 : 여보세요.崔銀姬 : 여보세요. 예 저 최은흽니다.金正日 : 예, 안녕하십니까. 오래간만입니다.崔銀姬 : 아유, 정말…金正日 : 어디 몸은 계속 건강하십니까.崔銀姬 : 네, 건강합니다.金正日 : 이번에 저쪽 사람들이 왔다 갔는데요. 그 저 뭔가 [안중근](원제 [안중근, 이등박문을 쏘다]라는 영화)이 보구요, 대단하드만요. 하하하.崔銀姬 : 네, 그렇습니까?金正日 : 그런데 그 저기 뭐야 희갑이랑 그 왔댔는데 오늘 내 저 보고받았는데요. 그 崔선생 만나지 못해서 희갑이가, 희갑씨가 그저 뭐 崔선생 꼭 그저 공연장에 아마 나타나면 그저 자기 좀 따로 만나서 이야기나 좀 하자고 했는데 종래 나타나지 않았다구요.崔銀姬 : 네. 아니 그런데요. 그 기자들이 욱실욱실한다고 그래서 안보겠다고 그랬지요 뭐. 귀찮으니까 기자들 만나면요.金正日 : 기자들 거 거렁뱅이 같은 것들인데요.崔銀姬 : 그러게 말씀입니다.金正日 : 그런데 이번 희갑 선생은 아마 와서 말입니다. 다른 사람들은 다 이런 말 저런 말 했는데요. 일체 아무 말도 안했었지요.崔銀姬 : 네, 그럴 겁니다.金正日 : 네 구리고 이렇게 숙소에 들어와서 그저 술, 술 원래 많이 하셨댔나요? 崔銀姬 술 그렇게 많이 못합니다.金正日 : 그런데 뭐 술 많이 하더라고 그래요. 속상한 모양이지요?崔銀姬 : 아이 동생을 못봐서 속상했던가 보지요.金正日 : 하하, 그래 아마 그런 거 같아요. 그래서 아주 그 보고받구요 崔선생 생각이 나서 이렇게 지금 전화를 걸었지요.崔銀姬 : 감사합니다. 그런데 저 이번에 큰 상(모스크바 영화제 주연상) 받아 갖고 왔는데 친애하는 지도자 동지께서 좀 불러주실 줄 알았더니 안 불러주시구….金正日 : 아- 니 그거 대단히 미안하게 됐습니다.에필로그 : 찬양의 홍수는 증오와 분노로 타오를 것지금까지 들으신 金正日의 육성에서 잘 알 수 있듯이 그는 崔銀姬·申相玉 두 사람을 인간적으로는 적어도 천재 예술인으로서 깍듯이 대한 것 같습니다. 뿐만 아니라 자신의 속 마음까지도 그대로 드러내기도 했다고 합니다. 申相玉씨는 자신의 수기에서 이렇게 쓰고 있습니다. 〈金正日은 밴드원들에게 손을 들어 답례를 하고는 그만하라는 손짓을 했지만 기성은 그치지 않았다. 이때 金正日은 내 왼손을 잡아 앞뒤로 흔들면서 전혀 예상 못했던 말을 입 밖에 내놓았다. {신 선생, 저건 다 가짜야. 거짓으로 하는 소리지요} 그 전 날 연회에서 털어놓은 [내 연극을 용서하라]던 이야기와 함께 金正日의 직설적인 그 한 마디가 두고두고 마음에 걸렸다. 사실 저 모든 우상화와 찬양의 홍수는 역사의 어느 날 눈 녹듯이 사라질 것이 아닌가. 그것은 증오와 분노로 타오를지도 모른다. 그것을 적어도 金正日은 잘 알고 있다고 생각되었다. 독재자의 고독, 그것은 측은하기까지 한 것이 아닐까〉1986년 3월 13일 申相玉·崔銀姬씨는 비엔나 주재 미국 대사관으로 탈출합니다. 1978년에 납치된 이후 8년만이었습니다. 金正日은 막강한 권력과 금력, 그리고 깍듯한 예우로서 두 사람의 [예술]을 동토(凍土)의 왕국에 묶어 두려고 했으나 그들은 목숨을 걸고 자유를 선택했습니다. 이로써 자본주의의 선진 기술을 끌어 들여 북한의 낙후된 부분을 발전시켜 보려던 金正日 최초의 개방 시도는 실패로 돌아갔습니다. 그 뒤 10년. 아직도 金正日의 개방이 성공적이란 뉴스는 없습니다. 그것은 金正日 개인의 잘못이라기보다는 그가 솔직히 인정하면서도 어떻게 할 수 없었던 그 제도, 즉 金日成 유일체제의 경직성, 관료주의, 그리고 악마성 때문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단 두 사람의 예술혼과 자유정신도 잡아둘 수 없었던 金正日이 과연 2천만 북한 주민들의 마음을 얻을 수 있을 것인지, 앞으로 지켜 볼 일입니다.
신상옥, 최은희 부부와 사이가 좋지 않았던 영화인들은 간혹 이들이 납북된 게 아니라 자진 월북을 하였다는 주장을 하곤 한다. 상술했듯이 지금도 이들 부부의 입북에 대해 납북이냐, 월북이냐 말이 많은데 특히 어떤 감독은 자신의 회고록에 자신이 신상옥에게서 월북하겠다는 말을 들었다고 써 놓았다. 물론 그 감독의 회고록 내용은 일고의 가치도 없는 헛소리지만 당시 박정희 독재정권에 눈 밖에 난 신상옥은 한국에서 영화를 만들기는커녕 정상적인 생활을 하기도 힘든 지경에 있었다.
최은희가 먼저 납치되자 당시 한국의 어떤 언론은 신상옥이 돈 문제로 최은희와 다투다가 최은희를 살해하였다는 황당한 내용을 보도하기도 하였고 박정희 독재 정권은 어떻게든 신상옥을 영화계에서, 그리고 사회적으로도 완전히 매장시키려고 하였다. 이 상황에서 신상옥은 정처 없이 해외를 떠돌다가 급기야는 망명을 타진하기도 하였으며[39] 결국 납북이든 자진 월북이든 북한으로 끌려가게 된 것이다.
이와 별개로 성혜랑은 자신의 회고록 '등나무집' 에서 이들 부부의 납북, 탈북에 대해 잠깐 언급하는데 최은희에 대해서는 김정일 비위를 저 정도로 잘 맞추는 걸 봐서 대단히 똑똑한 여자인 것 같다고 했지만 신필름의 영화에 대해서는 저리 비싼 돈을 들여서 찍는데 영화에 저리 돈을 낭비해서 북한이 고난의 행군을 맞이한 것이라는 말도 있다면서 대단히 냉소적으로 보고 자본주의 나라에서 온 두 사람이 북한이 얼마나 숨막히는지는 상상도 못 했을 것이라면서 탈출한 것에 대해서 이해는 표하지만 둘이 달아나서 차라리 속이 시원하다는 식으로 언급한다. 한 번은 김정일에게 저 둘은 북한에 적응 못하고 달아날 것이라고 하자 김정일이 눈을 끔뻑이더니 세상에 영화 찍고 싶다고 기차까지 터트려줄 정도로 지원해주는 사람이 어디 있겠냐면서 영화인으로서 그럴 리가 없다고 했는데 그때 처음으로 둘을 잘 대해준 김정일이 불쌍했다고 서술했고 두 사람의 영화에 대해서도 북한에선 환영 받지 못했으며 다들 두 사람이 떠나서 속이 시원했다고 주장한다.[40] 여기서 최은희, 신상옥 두 사람의 수기에는 없는 내용까지 언급하는데 성혜림의 서울 말씨를 눈치챈 최은희가 술에 만취해서 성혜림의 무릎을 붙들고 제발 집에 보내달라고 울고불며 난리도 아니었다고 한다. 이에 김경희가 '이렇게 살기 좋은 세상에서 왜 나가고 싶어하느냐?'라고 체제 선전을 하자 최은희가 김경희의 엉덩이를 걷어차면서 '시끄럽다! 나가라!'라고 소리를 지르고 난리도 아니었다고 한다.
신상옥, 최은희 부부는 탈북 후 《김정일 왕국》이라는 수기를 발표하였는데 이 수기에서 나오는 북한이라는 나라는 정말 상상 이상으로 너무나도 말이 안 되어서 신상옥 감독 자신의 표현을 빌리면 '마적떼들 소굴'이었기 때문에 당시 "세상에 이렇게 말도 안 되는 미친 나라가 어디 있느냐? 이거 다 나중에 영화로 만들려고 지어낸 얘기 아니냐."라며 수기의 내용을 믿지 않는 사람들이 많았다고 한다. 엄밀히 얘기하면 이때는 북한의 경제가 제대로 돌아갔던 시절이었기 때문에 그나마 인세지옥은 아니었지만 정치적으로나 사회적으로 말이 안 되는 일이 많이 일어났다.
AVGN이 영화 불가사리 리뷰를 하는 과정에서 이 사건에 대해서 아주 상세하고도 꽤 깊이 있는 언급을 한 바가 있다. 한국 괴수물 역사까지 파악한 것을 봐서는 리뷰를 위해 상당히 연구를 많이 한 것으로 보인다.
참고로 최은희가 납치되기 1년 전인 1977년에도 프랑스에 살고 있던 피아니스트 백건우와 영화배우 윤정희 부부가 북한으로 납치될 뻔한 사건이 일어났다. 다행히 백건우 - 윤정희 부부는 납치 직전에 눈치채고 미국 대사관으로 탈출해 위험을 면했다. 자세한 내용은 관련 블로그로.
외국에서 김정일에 대해 다루는 영상[41]에서도 이 납치사건은 김정일의 잔혹성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건으로 언급되고 있다.
[1] 1984년 4월 2일 최은희와 신상옥의 납북 사실이 알려졌다.[2] 김정일이 공식적으로 김일성의 후계자가 된 건 1980년 조선로동당 제6차대회 때다.[3] 신상옥은 배우 오수미(본명 윤영희)와의 불륜으로 두 아이를 낳았다. 최은희는 첫째 아들을 낳았을 때는 화를 내면서도 내가 아들을 못 낳아줬으니 어쩔 수 없다며 어느 정도 이해를 해 주었으나 둘째 아이를 낳았을 땐 참지 못하고 이혼을 요구했다. 신상옥은 둘째 아이가 있다는 것은 거짓말이라고 잡아떼다가 결국 이혼도장을 찍어주었지만 이혼 후에도 둘의 예술 세계가 워낙 얽혀 있는 관계로 최은희의 활동에 대해서 여러 조언을 해주곤 했다고 한다.[4] 오수미는 신상옥이 납북되자 홀로 아이들을 키우다가 유명 사진작가 김중만과 재혼했으나 1986년 그녀의 동생인 유명 모델 윤영실의 실종 사건이 일어났고 김중만과도 석연찮은 과정 끝에 이혼한 후 1992년 하와이에서 교통사고로 요절했다. 사건의 단초였던 윤영실의 실종이 최은희-신상옥이 한국에 돌아온 직후 벌어졌기 때문에 이 사건들이 최은희-신상옥과 어떤 연관성이 있고 당시 정부에서 이 실종 사건에 관여했을지도 모른다는 음모론이 있다. 자세한 건 윤영실 실종 사건 문서로.[5] 안양영화예술학교는 신상옥이 설립했던 학교였지만 신상옥의 납북 이후 1982년 학교법인 연암학원으로 매각되었다. 훗날 최은희라는 사람이 안양예고 교장과 이사장을 맡게 되지만 이 사람은 배우 최은희와 동명이인이다.[6] 안 그래도 최은희가 사라진 후 신상옥이 최은희를 보험금 노리고 죽였니, 내연녀와 작당해서 해코지 했니, 죽여서 바다에 던졌네 하는 소문이 돌아 맘고생이 심한 터였다. 결국 신상옥은 이 길로 자식들을 친척에 맡기고 "꼭 너네 엄마 찾아서 돌아 올 거니까 잠깐만 있어!"라고 말하고 뒤도 안 돌아보고 있는 돈 없는 돈 끌어모아서 최은희를 찾으러 나갔다고 한다. 신상옥의 아들의 말로는 그때가 납북당하기 전에 기억하는 마지막 모습이었다고 한다.[7] 신상옥 감독은 리펄스 베이 해안에서 정체불명의 일본인들에게 납치당해 그대로 중국 본토로 끌려갔다. 이들의 정체는 일본 국적의 조총련이었다.[8] 두 사람의 자녀들의 증언에 의하면, 이 시기에 영화 제작에 돈을 댔던 빚쟁이들이 한 겨울에 눈을 소복하게 맞으면서까지 돈을 내 놓으라고 신상옥네 집안 마당에서 밤새도록 농성을 할 정도였다고 한다.[9] 실제로 김정일은 상당한 영화광이었다. 학창시절부터 하라는 공부는 안 하고 김정일 전용 상영관에서 영화만 줄창 볼 정도로 영화에 심취했으며 후계자 시절에는 영화 제작을 비롯한 문화예술 분야에 대한 강한 육성 의지를 드러냈다. 일설에 의하면 남한에서 나오는 영화는 물론 람보처럼 미국 영화들도 꽤 즐겼다고 한다. 당연히 신상옥과 최은희가 연출하고 출연한 작품들도 잘 알고 있었다고 한다. 2007 남북정상회담 때는 이같은 김정일의 취향을 반영해 대장금, 겨울연가 등 남한 드라마와 남한 영화가 담긴 DVD를 선물로 줬는데 김정일이 매우 좋아했다는 이야기가 있다.[10] 신상옥 본인은 박정희와 친분이 깊었고 10.26 사건을 동료 죄수들에게 주워듣고 한동안 침울하기도 했을 정도였지만 영화인 모임에서 정부의 영화 정책을 비판했다가 그게 박정희에게 신상옥이 반정부 모임의 책동자라고 과장돼서 보고되는 바람에 박정희는 믿는 도끼에 발등 찍혔다고 격노했고 신필름의 허가도 취소해서 이미 이민이나 망명을 고려하고 있었다. 처음에는 미국으로 가려고 했으나 외교부에서 비자 발급을 해주지 않으려고 하자 무비자로 방문이 가능한 프랑스로 가서 다시 서독으로 피신할 계획까지 꾸몄고 서독에서 이미 자리를 잡은 윤이상에게 도움을 요청하기도 했다. 망명 자금 마련을 위해 동남아에 자신의 옛날 영화 수출을 추진하고 홍콩 은행에 있는 예금도 찾을 겸 홍콩에 돌아왔다가 납치됐다.[11] 하루에 열 시간 이상 꼼짝도 안 하고 정좌를 취하는 것이었다고 한다. 한두 시간도 아니고.[12] 말로는 월북한 국군 장병이라고 하는데 처음에는 그런가보다 하고 믿었지만 어느날 중정에서 김정일이 식물인간이 되었다는 가짜 뉴스를 내보낸 것을 두고 너네 중정은 대체 뭐하길래 멀쩡히 살아서 행사도 다니고 신상옥이도 북한으로 납치해온 김정일이가 식물인간이 됐다고 떠드냐고 괜히 화풀이를 했는데 식물인간이 뭐냐고 멍청하게 되묻는 것을 보고 놀라서 그 사람들이 자신의 의중을 캐보려는 보위부 첩자가 아닌가 의심하게 된다. 이후 일부러 이들 앞에서 북한이 체제 경쟁에서 이길 것이 틀림 없다면서 북한을 찬양했다.[13] 자기가 해방 직후 남한 연예계의 대부였다고 주장하는 최 지도원과 1967년에 숙청당한 북한 역사학자 리나영 등과도 친해졌는데 리나영은 아직도 조선혁명박물관에 김옥균 초상화가 있다고 생각할 정도로 고지식한 양반이었고 최 지도원은 남한 연예계에서 빠삭하게 아는 것을 보아서 실제 연예계 종사자로 보이긴 하는데 탈북 후에 남한 초기 연예계 역사에 대해 정통한 배우 황해를 통해 교차검증해 보니 허풍을 친 것이 워낙 많았다고 한다.[14] 당시 명칭은 국가정치보위부였고 1982년에 국가보위부로 개칭되었다.[15] 성혜림의 존재를 몰랐던 최은희는 성혜림을 김정일의 본처로 알려진 김영숙으로 지레짐작했지만 서울 말씨를 썼다는 점, 김정남과 같이 나타났다는 점에서 의심할 여지 없이 성혜림이다.[16] 김정일은 1942년생, 최은희·신상옥 부부는 둘 다 모두 1926년생이다.[17] 당시 KBS 사회교육방송을 통한 라디오 대북방송이 송출됐는데 단파라디오의 특성상 북한에서도 남한의 라디오 전파 수신이 가능했다. 게다가 김씨 왕조 일가가 남한의 TV를 즐겨보기도 했다.[18] 성우 고은정이었다고 한다.[19] 최은희도 영화에서 연기하거나 나오던 장면들이 다 거짓이었고 실제 상황이면 이러는구나 하고 탄식하였다.[20] "그럼요. 시간이 갈수록 더 그리워요. 요즘도 꿈을 많이 꾸는데, 항상 제 곁에 있어요. 촬영하는 장면이라든지..."(노배우의 목소리가 젖었다.)(#)[21] 이 때문에 최은희, 신상옥은 김정일의 영화 아카이브를 접할 기회가 있었고 지금도 떡밥으로 회자된다. 그 중 가장 큰 떡밥은 소실되었다고 알려진 만추 필름이 있더라는 떡밥이다.[22] 신상옥, 최은희의 회고록에 따르면 김정일은 "어디까지나 지금 우리가 사회주의에만 국한시켜, 그저 사회주의에만 나가고 있어, 자본주의 국가에는 마음대로 나갈 수 없습니다. (중략) 지금 딱 말하자면, 울타리 안에서 자기 것만 보고, 자기 것만 좋다는 사람들이란 말입니다. (중략) 인제 앞으로 10년 만에 못 따라가면은 인제 솔직히 말하면 세계적인 분포에서 보게 되면 우리 영화 예술이 낙후한 데서 아마 제일 낙후한 데서 1번이 되지 않겠는가..."라고 말했다. (출처: 와다 하루키 (2014) <북한현대사>, p. 192~193)[23] 최은희·신상옥 부부가 김일성·김정일과의 면담한 적이 있는데 최은희가 목숨 걸고 카세트 플레이어의 녹음 버튼을 몰래 누르고 녹음한 육성이 있다.[24] 김정일은 생모 김정숙이 사망한 후에는 어머니라는 존재 없이 살아 왔는데 특히 계모 김성애와의 사이가 매우 안 좋았다는 점까지 고려하면 최은희를 어머니처럼 생각했을 수도 있다. 더군다나 북한의 최고 실권자라고 할 수 있는 김정일이 하루가 멀다하고 불편한 심기를 감추지 않는 최은희를 직접 어르고 달래느라 쩔쩔맸다.[25] 특히 영화 '탈출기' 제작 과정에서의 일화가 유명하다. 신상옥이 김정일에게 '열차를 폭발시키는 장면을 연출하고 싶다'고 제의하자 '그 정도는 어렵지 않다'고 대답하면서 진짜 열차를 폭파시켰다고 한다.(관련 뉴스)[26] 김정일과 최은희의 전화 통화가 녹음된 육성 테이프에 의하면 김정일은 최은희가 남한 측 인사들과 만난 사실을 다 알고 있었지만 이걸 갖고 뭔가 의심한 게 아니라 그냥 최은희의 안부를 묻던 도중 자연스럽게 그 부분을 언급한 것이다. 이를테면 "그나저나, 일 끝나고 김희갑 만나기로 했다며, 왜 안 봤음?", "기자들 우글우글하다보니 귀찮아서...", "하기야 기자들이 참 거지같은 종자들이지..ㅋㅋㅋ.." 식의 대화였다고 한다.[27] 이때는 막걸리 보안법이 현역인 데다 남북간 경제력 차이도 크지 않던 시절이었고 북한과의 체제 경쟁에 엄청나게 신경 썼다. 북한에 지하철이 먼저 개통되었거나 컬러방송이 먼저 시작되었다는 것을 얘기만 해도 코렁탕 먹었을 정도였다.[28] 참고로 북한에선 신상옥과 최은희가 자식들이 남한에 있는데 우리가 어찌 여기 살겠냐면서 되돌려보내달라고 하소연했는데 이에 북한 측은 "에이 겨우 그런 게 문제면 언제든지 자식들 데리고 올 수 있는데 그런 쉬운 일로 걱정했냐?"라고 '자식들까지 납치해주마'라는 역제안을 하는 패기를 보였다.[29] 이에 대해서는 몇 가지 설이 있으나 CIA의 한국인 직원과 미리 이야기를 맞추었기 때문에 수월했다는 이야기가 있다.#[30] 미국 대사관으로 이동하는 중에도 혹시 북한 감시원이 따라붙지는 않는지 수시로 확인해야 했다. 당시 숙소에서 미국 대사관까지는 약 10분 거리였다.[31] 사실 북한에서 계속 돌려 달라고 징징대서 어쩔 수 없이 돌려 준 것이다. 신상옥 감독과 가까웠던 한 영화인은 미국에서 그를 만나 왜 굳이 돈을 가져왔느냐고 면박을 줬는데 당시 신상옥의 대답은 "야, 내가 거기서 그만큼 고생했는데, 이것도 못 가지고 나오냐?" 최은희는 나중에 신동아와의 인터뷰에서 만약 그 돈을 돌려주지 않았다면 김정일이 기어이 자신들을 죽였을 것이라고 혀를 내둘렀다.[32] 주로 면담할 때 카세트테이프에 녹음했다고 한다. 2000년대까지 자주 사용되던 그 찍찍이다.[33] 일본어, 영어, 한국어가 섞여 있다.[34] 스타트렉 시리즈에서 히카루 술루 역을 맡았다.[35] 이 중에는 불가사리의 리메이크작인 갈가메스도 있다. 미국에서 만든 만큼 배경은 고려 대신 중세 유럽이다.[36] 사실 당시 인기리에 방영 중이던 지금 평양에선의 100분 특집이었다.[37] 시놉시스가 납치 사건과 일치한다.[38] 실제로 녹취를 들어보면 아무리 평안도 사투리가 끼어 있지만 발음이 부정확하고 말이 빨라 알아듣기 힘들다. 김정일은 당시 나이도 젊은 편이었다. 북한 언론을 통해서 공식적으로 공개된 김정일의 육성은 1992년 조선인민군 열병식 때 외친 "영웅적 조선인민군 장병들에게 영광 있으라!" 단 한 마디뿐이며 2000년 김대중 대통령과 2007년 노무현 대통령의 방북 때 만찬장에서 건넨 몇 마디가 한국 측 녹음 자료로 공개되었다.[39] 그의 수기를 보면 박정희 정권이 여권을 연장 안 해줘서 위조 여권을 구입하는 내용까지 나온다. 이때 신상옥은 미국에서 김형욱의 초대를 받아 김형욱의 집에서 식사를 같이 한 적도 있었는데 김형욱은 아직 출판되지 않은 자신의 회고록 원고를 신상옥에게 보여주며 자신이 이 회고록으로 큰 돈을 벌게 되었다며 자랑했다고 한다. 신상옥은 당장 신변이 위협받는 와중에도 김형욱에게 자신의 영화에 투자할 것을 권유했다고 한다.[40] 반면 강명도는 처음으로 극장에서 신상옥의 영화를 보고 눈이 뒤집혀서 계속 보러갔다고 사술했다.[41] 유튜브 영상이든, 넷플릭스 다큐멘터리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