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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한대화의 선수 경력을 서술한 문서.2. 아마추어 시절
1960년 8월 29일 충청남도 대전시 신흥동(現 대전광역시 동구 신흥동)에서 아버지 한상준(韓相俊, 1924. 2. 25 ~ ?)과 어머니 연안 차씨 차정숙(車貞淑, 1937. 6. 11 ~ ) 사이의 2남 4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아버지 한상준은 평안남도 출신의 실향민으로[1] 천도교 대전 교구장을 역임했다고 한다. 또한 손병희 선생과 친분이 깊었던 천도교인이었다고 한다. 같은 평안남도 출신인 김응용 감독이 나중에 그를 해태로 부른 데는 이런 인연도 있다.[2]
대전신흥초등학교 5학년 때 야구를 시작했고 한밭중과 대전고 시절 유격수와 투수로 활약했다. 그는 원조 파워히터 유격수였다. 하지만 프로야구에서는 명 3루수로 이름을 날렸고 1982년 세계야구선수권대회 포지션도 3루수였다. 세계야구선수권대회에서는 성인야구 최고의 유격수 김재박이 있었기 때문에 3루수를 맡았다. 그러나 동국대에서 맡았던 주 포지션 은 유격수 와 2루수였으며 프로야구 에서도 선수생활 초기엔 유격수로 뛰었다. 어우홍 대표팀 감독이 4번 장효조 다음에 등장하는 5번타자로 대학 4년생인 한대화를 중용한건 그의 힘을 믿었기 때문이다. 탄탄한 하체에 강한 허리힘으로 대학 선수로는 유일하게 국제용으로 인정받았다. 이 대회에서 타격10위에 이름을 올린 한국선수는 한대화가 유일했다. 한대화는 동국대 1학년이던 1979년 4월 부산 시장기에서 타격왕 12타수 6안타 타율 0.500을 기록하며 일찌감치 가능성을 보였다. 그 해 춘계리그에선 3번 타자로 활약했다. 대전고-동국대 체육교육과(1979학번)를 졸업했다.
2.1. 1982년 세계야구선수권대회
그리고 대학 졸업반이던 1982년, 서울에서 열린 세계 야구선수권 대회 국가대표로 선발, 사실상 결승이나 다름없던 일본과의 최종전[3]에서 2-2로 맞선 8회말 2사 주자 1, 2루 상황에 타석에 나와 풀카운트 씨름 끝에 왼쪽 폴대를 강타하는 결승 3점 홈런으로 대한민국 야구 사상 2번째 세계 대회 우승[4]을 이룩하는 데 1등 공신이 되었다. 이날 이후 한대화는 해결사 이미지가 굳어진다.3. KBO 리그 시절
3.1. OB 입단 시절
1983년 고향 팀인 OB 베어스[5]에 입단해 프로 생활을 시작했다. 시즌 개막전에서도 3점 홈런을 기록하며 3점 홈런의 사나이라는 묵직한 별명이 붙기도 했지만 그 해 타율 0.272에 5홈런이라는 평범한 성적에 그쳤고, 1984년과 1985년에는 오히려 타율이 2할대 초반으로 뒷걸음질치며 팀의 애물단지로 전락하고 말았다. 게다가 1985년 시즌 직전에는 고향 대전에서 개인훈련[6] 도중 갈증을 해소하던 뒷산 약수터의 돌려쓰는 바가지가 화근이 되면서 간염이 발병해 체력 관리에 애로사항이 꽃피게 되었고, 거기에 훗날의 신인왕 출신 양심불량자처럼 척추 분리증을 앓고 있었으니 말 다한 셈이다. 설상가상으로 OB가 재일동포 출신 내야수 박창언을 영입하면서 한대화의 입지는 더더욱 좁아지고 있었다. 특히 부상과 A형 간염으로 인해 김성근의 강훈련을 소화할 수 없게 되자 강훈련으로 유명한 김성근 감독에 눈 밖에 나게 되고, 불화가 생기게 된다.[7]
OB 베어스에서 해태 타이거즈로 트레이드된 뒤 모습 |
결국 1986년 시즌을 앞두고 양승호, 황기선과의 2:1 맞트레이드로 해태 타이거즈 유니폼을 입게 되었다[8]. 당초 한대화는 새로운 고향 팀인 빙그레 이글스로의 이적을 원했지만, 그 당시 빙그레 이글스는 신생 구단이라 선수층이 극히 부족했던 탓에 OB 베어스로서는 한대화와 맞바꿀 만한 전력감이 없었던 바, 해태 타이거즈와의 트레이드를 적극으로 추진한 것이었고, 이를 받아들이지 못한 한대화는 결국 임의탈퇴 공시되며 몰렸다. 이는 한국프로야구 사상 최초의 임의탈퇴 사례다.
3.2. 해태에서의 전성기
KBO 골든글러브 3루수 부문 수상자 (1986~1993) |
한대화가 해태행을 거부했던 것은 고향 팀인 빙그레로 가고 싶다는 열망이 강하긴 했지만, 해태 특유의 강도높은 팀 분위기와 김응용 감독의 철권통치를 두려워한 이유도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한대화가 해태 유니폼을 입자, 김응용 감독은 되려 한대화에게 훈련할 때 시간 맞춰 올 생각 말고 오후에 느지막히 운동장으로 출근하도록 지시했다고 한다. 이는 간염을 앓고 있던 한대화가 늦잠을 자고 몸을 회복할 수 있도록 한 김응용의 배려였다.[11][12]
이후 결정적인 상황에서는 반드시 실력을 톡톡히 보여 주는 클러치 히터의 면모를 과시하며 김성한, 이순철과 함께 당대 최강의 타선을 이루며 1986년 이후 해태 타이거즈의 한국시리즈 6회 우승에 큰 공을 세운다. 3루 수비에 있어서도 좌우 수비폭은 넓지 않았지만 부드러운 글러브 핸들링과 정확한 송구로 안정적인 모습을 보여 주었다.
하지만 연봉 문제 등으로 구단과의 관계는 별로 좋지 않았다. 한대화는 매년 연봉 협상에서 함께 주축 타자로 활약했던 김성한에 준하는 대우를 해 줄 것을 해태 구단에 요청하였으나, 구단의 대우는 항상 그에 미치지 못해 관계가 좋지 못한 편이었다. 그 이유로는 원년 멤버이자 지역 연고 출신의 간판 스타였던 김성한과는 달리, 한대화는 비연고 출신에 트레이드로 합류한 '굴러온 돌'의 한계 때문이었다는 의견이 있다.[13] 공식적으로 확인된 바는 없지만, 해태에 있을 때도 고향팀인 빙그레 이글스로 트레이드해 달라는 요청을 여러 번 했다는 주장도 있을 정도.
한편 김응용 감독과의 관계 악화가 트레이드의 원인이라 보는 이들도 있다. 그 근거 중 하나가 1993년 올스타전 때 김응용 감독이 한대화에게 발길질을 한 것. 당사자들은 그저 장난삼아 저지른 해프닝이라고는 하지만, 실제 카메라에 잡힌 장면을 보면 꽤나 살벌한 분위기이다. 이 상황에 대해서 한대화는 “당시 감독님이 오해하셨다. 슬라이딩을 하다 손을 다쳐서 아이싱을 하고 있었는데 대기타석에 없다는 이유로 태업을 지적하셨다. 나도 화가 났지만 이틀 뒤 전화를 하셨다. ‘내일 훈련 나와’라고. 그래서 훈련을 나갔다”고 설명했다.# 하여간 1994년 LG로의 트레이드는 이런 상황을 기반으로 촉발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다만, 삼성 라이온즈에서 김응용이 사장으로 재임했을 때 한대화를 코치로 영입한 것을 보면, 그렇게 불화설까지 돌 문제까지는 아니었던 듯 하다. 아니면 뒤에 화해를 했던가. 어쨌든, 한대화가 간염 때문에 OB 감독 김성근한테 버려지고 온 해태에서 성공적인 재기를 할 수 있었던 것이 모두 김응용 덕분이고, 이후 인터뷰에서도 김응용에 대한 감사를 아끼지 않는다. 현재도 한대화가 김응용 감독의 팔순잔치에 참석하는 등 앙금은 다 푼 듯 하다.
3.3. LG에서의 고참 시절
LG 트윈스 시절 |
아무튼 1993년 시즌 종료 후 팀 동료 신동수와 함께 김상훈, 이병훈과의 2:2 트레이드로 LG 트윈스 유니폼을 입게 된다.[14] 한대화는 LG 트윈스에서 팀의 4번타자를 맡으며 유지현[15], 김재현[16], 서용빈[17] 3인방과 노찬엽[18], 김동수 등의 중견급 타자들과 더불어 견고한 타선을 구축하여 신바람 야구의 한 축으로 1994년 한 번 더 한국시리즈 우승의 축배를 들었다. 개인통산 총 7회째 우승이었다. LG 트윈스로 이적하자마자 해태와는 너무 다른 팀 분위기 그러니깐, 해태가 군기반장 팀이라면 LG는 그야말로 자유로운 팀.[19][20] 이후 한대화가 기강을 잡았다는 썰 외에도 타 팀의 선수[21]가 LG에 가면 자유를 넘어 팀 분위기가 너무 풀어졌었다. 라는 썰을 많이 푼다.[22][23]
1994-1995 LG는 최강의 팀이었고, 한대화 또한 알려진대로 팀 내 기강을 잡는 역할도 했지만 신바람 야구의 틀 안에서 후배들의 기둥 또는 큰형님 역할을 했다. 주로 위의 신인 3인방(유-김-서) 뒤에서 4번 타순을 쳤는데, 경기의 결정적인 순간에 앞에 살아나간 주자들을 묵묵히 큰거 한방으로 불러들이곤 했다. 대표적 사례가 1994년 태평양과의 한국시리즈 4차전에서 2타점 적시타와, 1995년 롯데와의 플레이오프 2차전에서 선제 투런홈런이다. 특히 95년 당시 1차전에서 LG가 자랑하는 에이스 이상훈[24] 김용수가 난타당하면서 뜻밖의 7대 8 패배를 당한 상황에서 팀 분위기가 급속히 가라앉을 수 있었던 상황에서, 다음날 고참인 자신이 홈런으로 팀 승리를 이끌며 승부를 원점으로 돌리는, 중요한 순간마다 해결사 역할을 잘 해냈다.
95년까지는 수비 또한 전성기 못지않았는데, 체력 안배차원에서인지 한대화가 처음 LG에 온 94년부터 이광환 감독은 송구홍 or 이종열 3루 - 한대화 지타 체제로 라인업을 짜는 일이 많았다. 그런데 96년이 되자 정말로 수비에서 포구 실수 등 급격히 빈틈을 보이기 시작하며 팬들을 안타깝게 했고 결국 구단 입장에서 트레이드 카드를 만지작거리는 빌미가 된다.
당시 경기 도중 중요한 시점에 한대화가 나오면 구장이 일순 조용해졌다는 이야기가 있을 정도로 한대화에 대한 믿음이 컸다. 그가 찬스에 유난히 강했음을 보여주는 일면. 이런 이유로 인해 당시 언론에서 붙여준 별명이 해결사. 그러나 그가 해결사였던 이유는, 다름아닌 그가 타이거즈 시절 9시즌동안 wRC+ 150을 찍었던 당대의 초 강타자였기 때문이다. 말 그대로 득점권의 사나이 즉, 우리가 알고 있는 해결사의 역할에 충실했던 것이다.
이런 모습은 LG에서도 그대로였다. 특히나 94년~96년은 끔찍한 투고타저인데다 잠실구장을 쓰며 스탯에서는 좀 손해를 보았지만, 득점권에서는 정말 해태 시절과 비슷하게 결승 타점이 많았다. 유달리 그에게는 홈런보다는 팀을 위해서 단타, 팀배팅을 할 줄 아는 선수라는 인식이 굳어져 있었고, 그것이 사실이었던 것.[25] 특히 해태에는 훌륭한 홈런타자였던 김성한, 장채근 같은 선수들과 같은 시기에 뛴 탓도 있을 듯하다. 그래도 현역시절 20홈런도 넘길 정도의 파워는 가지고 있었다.
3.4. 쌍방울에서의 은퇴
말년을 보낸 쌍방울 레이더스 시절 |
1996 시즌 후 투수 신영균을 상대로 쌍방울 레이더스에 트레이드되나, 당시 노장이었던 한대화에게 이전같은 3루 수비는 보이기 힘들었고 지명타자 슬롯도 마땅하지 않았다. 게다가 쌍방울 트레이드 당시 감독은 김성근. OB 베어스 시절 갈등이 있었던 사이었는데 김성근식 훈련에 맞지도 않았고, 소화도 하기 힘들었던 한대화는 구석에 몰리고 만다.[26] 한대화는 시즌 중 은퇴를 결심하고, 이에 쌍방울 레이더스 구단은 리그 역사에 빛나는 명 3루수인 한대화에게 은퇴식을 준비해 주려 했으나, 김성근 감독이 쌍방울에서 한 것이 없는데 무슨 은퇴식이냐며 거절했다.[27] 결국 한대화는 1997 시즌 후 쌍방울에서 임의탈퇴 공시되면서 그라운드를 떠나게 된다.
4. 총평
1983~1997년까지 15시즌 동안 1,331경기에 출장하여 타출장 0.279/0.370/0.450에 홈런 163개, 타점 712개, OPS 0.820을 기록했다. 통산 타율과 출루율의 갭이 9푼이나 되고 그의 통산 BB/K가 1.07라는 것에서, 한대화가 얼마나 볼을 잘 골라내는 타자였는지 알 수 있다. 그의 전성기인 86년~94년으로 한정하면 단 한번도 삼진이 볼넷보다 많은 시즌이 없으며, wRC+를 160 이상 기록한 시즌이 네번이나 될 정도로 생산성도 아주 뛰어났다. 또한 87년과 93년을 제외하면 매 시즌마다 타점 순위 10위 안에 그의 이름이 자리했다는 점에서 그에게 붙여진 '해결사'라는 별명이 결코 아깝지 않은 타자였다. 단일 시즌 기준으로 최고의 해였던 1990 시즌에는 타율 0.335(그해 타격왕),[28] 홈런 15, 타점 86, OPS 0.937을 기록.[1] 한대화의 19대조 한언침(韓彦忱, 1551 ~ ?)은 1605년(선조 38) 신경희(申景禧, ? ~ 1615)의 역모사건에 연루되어 한성부 도성 밖으로 추방되었다. 이후 평안도 영변도호부(現 평안북도 녕변군)에 입향했다.[2] 정작 한대화 본인은 김응용 감독에게 아버지가 실향민인 것을 삼성에서 코치를 할 때 밝혔다고 한다. 본인도 아쉬웠는지(?) 선수 때 그 말씀을 드렸으면 김응용 감독이 더 잘 봐줬을 것이라는 드립을 쳤다.[3] 당시 쿠바가 불참한 가운데 9개 국가가 풀 리그로 대회를 치렀고 대한민국과 일본간의 최종전을 앞두고 공교롭게도 두 나라가 6승 1패의 성적을 거두고 있었다. 대한민국과 일본의 패배는 모두 이탈리아에게 당한 것으로, 이탈리아는 이 대회에서 그것이 유이한 승리였다.[4] 첫번째 우승은 1977년 니카라과 슈퍼 월드컵 대회였고, 당시 김응용이 국가대표팀 감독이었다.[5] 당시 OB 베어스는 대전을 연고지로 하는 팀이었다.[6] OB 구단에서 주도한 보문산 동계훈련 때라는 설도 있다.[7] 이 때 김성근은 한대화가 훈련을 하기 싫어서 꾀를 부린다고 여겨서 더 심하게 훈련을 시켰고, 한대화는 더욱 심각히 은퇴를 고민했다.[8] 전년도에 친 2홈런이 해태전(동대문)에서 기록됐다[9] 공식적으로 그렇긴 하지만 한대화의 부친 고향이 김응용 감독과 같은 평안남도 평원군이라는 점이 작용했다고 한다. 영입에 매우 적극적이었고 결국엔 영입에 성공했다. 김응용이 보이지 않은 조력자인 셈이다.[10] 김일권은 1984년 이른바 해태 타이거즈 불고기 항명사건으로 김응용 감독의 눈밖에 난 상태였다. 그러나 김일권은 이 사건에서 억울하게 주동자로 몰렸다.[11] 알다시피 간질환 환자에게 충분한 휴식은 보약이나 다름이 없다. 훗날 인터뷰에서 한대화는 자신을 그 자리에 있게 만든 스승님은 김응용이라고 강조했다.[12] 선배 김성한과 같은 아파트 단지(농성동 럭키아파트)에서 살고 있었다. 김성한은 타지에서 온 동국대 1년 후배를 잘 챙겼다고 한다.[13] 이는 1950년대 말에서 60년대 뉴욕 양키즈의 황금기를 함께 이끌었던 미키 맨틀, 로저 매리스 중에 양키즈에서 내내 활동했던 프랜차이즈 스타 맨틀이 스포트라이트를 누린 반면, 타 팀에서 트레이드되어 온 매리스는 줄곧 맨틀의 그늘에 가렸던 것과 비슷하다. 김성한이 맨틀, 한대화가 매리스의 포지션이었던 셈.[14] 이 당시에도 한대화는 고향 팀 한화 이글스(1993년 말 빙그레 이글스에서 팀명 변경)로 트레이드를 원했으나 당시 한화는 강병철 감독이 부임함과 동시에 기존에 있던 베테랑 선수들도 하나 둘 쳐내는 등 리빌딩을 시작했던 터라 30대 중반의 한대화를 데려갈 가능성은 거의 없었다.[15] 94년도 KBO 신인상[16] 최연소 20-20를 만들고 당해 최연소 KBO 골든글러브 수상자[17] 드래프트 막차 순번의 신인최초 사이클링 히트와 KBO 골든글러브 수상자[18] 90년도에 타격 타이틀 승부를 한 적이 있었다. 승자는 당연히 한대화[19] 해태는 선배님이라는 호칭을 쓰지만, LG에서는 나이 차이 많은 후배들이 자신에게 "형형, 대화 형 또는 대화형님~" 이러는 모습을 보고 처음에는 니들 뭐여~?!하면서 불편한 반응을 보이고, 선배로서 기강잡기를 잠시 시도하기도 했다. 하지만 몇 경기 안되어서 LG 덕아웃의 분위기에 동화되었다. 그해 결국 1위를 했다.[20] 유난히 해태 vs LG의 트레이드에서 해태가 많이 손해를 본 이유이기도 하다. 자유분방하던 LG에서 선수간 분위기가 강압적이기로 악명 높은 해태로 트레이드되었으니 극과 극의 팀 분위기에 적응하지 못한 것은 당연하다. 손혁이 해태로의 트레이드를 강력하게 거부한 것이 괜히 그런 게 아니다. LG에서 해태로 이적한 선수들 중 거의 유일하게 해태에서의 적응에 성공한 선수가 바로 최훈재이다. 공교롭게도 친정팀 LG와 맞붙은 1997년 한국시리즈에서 해태의 마지막 우승을 확정짓는 결승타를 날리기도 했다. 최훈재와 송구홍이 술회했던 일화로, 타격 연습을 마치고 야구공을 주우러 나가자 도시락 먹고 있던 후배들이 '이러시면 저희가 곤란해집니다'하면서 앉히고 도시락 버리고 후다닥 야구장으로 나갔다고 한다. 해태에서만 볼 수 있었던 장면이며, 타팀 출신임에도 불구하고 선배 대접을 깍듯이 해서 놀랐다고 한다.[21] 특히 해태-기아와 삼성, OB-두산[22] 대표적으로 박명환야구TV에서 언급된 내용으로 경기를 졌는데 신인들이 거울보며 포마드 젤을 바르며 퇴근할 준비를 한다던가, 명품 옷리바이스 대신 트루 릴리지언 등을 치장하면서 여자친구를 자주 만나러 간다거나, 라커룸 응원을 안한다는 등..[23] 송유석이 전설의 타이거즈에서 언급한 내용으로 해태에서 LG로 이적하자마자 너무 자유분방한 팀 분위기에 놀라고 짬밥 순이 아닌 연봉 순으로 대접한다고 하자 본인은 그걸 용납못한다면서 군기를 잡았다. 내심 코칭스태프들도 군기반장 역할을 기대하였고 잘 소화했다. 선수단의 투표로 90%에 가까운 지지율로 LG 주장으로 선출됐고 선수들의 복지를 위해 늘 앞장서서 구단과 협상하였다가 프런트의 눈 밖에 나서 한화로 떠나게 됐다.[24] 시즌 말기 4일만 쉬고 등판하는 바람에 어느 정도 무리가 왔다.[25] 실제로 한대화의 통산 WPA는 클래식 스탯 체감보다도 상당히 높았다. 다른 선수들이 클래식 스탯으로만 평가받으며 평가절하되는 상황에서 한대화만큼은 (의도하진 않았겠지만) 세이버적 관점으로 접근하던 사람들이 많았다는 것.[26] 오랜 세월이 지나고서야 드러난 김성근의 행적을 볼때, 한대화의 입장에서는 차라리 눈 밖에 나서 기용되지 않은 것이 참으로 다행이었다.[27] 만약 LG에서 은퇴했다면 은퇴식을 했을지도 모른다.[28] 당시 빙그레의 이강돈보다 불과 타율 1만분의 1 차이로 앞질렀을 정도의 접전이었다. 이는 한대화가 골든글러브(3루수 부문)를 제외하고 유일하게 수상한 개인 타이틀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