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0-12 21:53:36

헤이스팅스 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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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라위 공화국 대통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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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라위 초대 총리
말라위 공화국 초대 대통령
헤이스팅스 카무주 반다
Hastings Kamuzu Band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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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bf0802><colcolor=#ffffff> 본명 아킴 캄은콸라 음툰타마 반다
(Akim Kamnkhwala Mtunthama Banda)
출생 1898년[1]
영국령 중앙아프리카 카숭구 현
사망 1997년 11월 25일 (향년 98~99세)
남아프리카 공화국 하우텡 주 요하네스버그
재임 초대 대통령
1966년 7월 6일 ~ 1994년 5월 24일
초대 총리
1964년 7월 6일 ~ 1966년 7월 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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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생애
2.1. 말라위의 독립 이전2.2. 말라위의 대통령으로서의 행보
2.2.1. 정치적 행보
2.2.1.1. 오튼 치르와 부부 납치 사건2.2.1.2. 각료 처형 사건2.2.1.3. 정적 암살
2.2.2. 사회 정책2.2.3. 우상화2.2.4. 대외 정책2.2.5. 긍정적 면모
2.3. 몰락
3. 사생활4. 여담5.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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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말라위독립운동가이자 초대 대통령, 독재자이다.

말라위의 독립운동을 이끈 독립운동가 출신으로 독립 이후 대통령으로 선출되었고, 교육과 의료 등의 인프라를 정비하여 민생을 어느정도 안정시키는데 성공했다. 그러나 30년 동안 장기집권을 하며 무자비한 철권통치를 자행했기 때문에 평가가 엇갈리는 인물이다.

2. 생애

2.1. 말라위의 독립 이전

니아살랜드(Nyasaland)에 있는 체와(Chewa)족 혈통의 가난한 농민 집안에서 출생했는데, 체와어 미들네임인 카무주(Kamuzu)는 어머니가 불임 치료를 위해 한 의사로부터 뿌리 약초를 받은 후 반다가 태어났다는 것에서 유래하며 '작은 뿌리'를 뜻한다.

어린 반다는 초등교육을 받은 후 1910년에 스코틀랜드 교회 교단에서 세례를 받았는데, 이후 반다가 존경하게 된 마을 근처의 스코틀랜드인 선교사 존 헤이스팅스(John Hastings)의 성을 따 반다는 이름을 '헤이스팅스'로 고쳤다. 1917년에는 남아프리카 연방요하네스버그로 걸어서 간 후 광산에서 몇 년 동안 일했고, 아프리카 감리교회의 감독이 반다에게 감명을 받아 교육을 후원해주겠다고 하자 반다는 1925년에 미국으로 유학을 간다.

미국으로 간 반다는 모어인 체와어를 연구해 책을 출간하고 역사와 정치학을 전공했으며, 한 부유층 부인의 후원을 받아 의학을 공부하며 1937년에 의학 박사 학위를 얻었다. 그러나 대영제국의 영토에 병원을 열려면 영국에서 의학 학위를 받아야 했고, 결국 반다는 스코틀랜드에 있는 에든버러 대학교로 떠나 1941년에 학위를 취득하고 같은 해에 리버풀의 빈민촌에서 의사로 일하게 되었는데, 환자들은 그를 매우 좋아했으나 얼마 안 가 양심적 이유로 병역을 거부했기 때문에 리버풀에서 쫓겨나게 되었다. 이후 반다는 1945년까지 뉴캐슬어폰타인 근처의 노스실즈에서 의사로 일했다.[2] 의사 헤이스팅스 반다는 집세로 써야 할 돈까지 의료 활동에 쓰면서 가난한 환자들을 무료로 돌보는 것으로 명망이 높았고, 그의 유능함과 친절함에 감격한 많은 환자들이 반다의 병원에 몰려왔다. 당시에는 인종차별이 지금보다도 더 노골적이었다는 것을 감안하면 경이로운 성과라고 할 수 있었다. 그 후 반다는 스코틀랜드 교회의 교구 장로가 되었고, 노동당과 1940년에 창설된 페이비언 식민국에 가입하여 정치 활동을 시작한다.

1945년에 반다는 맨체스터에서 열린 제5차 범 아프리카 회의에서 니아살랜드의 대표자로서 참석했고, 이후 반다는 백인의 선거권 우대정책, 니아실랜드와 로디지아와의 통합에 적극 반대하는 등 영국의 식민지배에 대항하는 독립운동으로 명성을 날렸고, 1958년 7월 8일에 42년 만에 고향으로 돌아가게 된다. 이후에도 반다는 전국을 돌아다니며 로디지아와의 통합을 반대하는 연설을 하다가 1959년 3월 초에 식민 당국이 자신이 총재로 있던 니아살랜드 아프리카 회의(NAC)에 대한 탄압의 일환으로 실시된 선라이즈 작전(Operation Sunrise)로 수감되어 1년간 옥고를 치른 적도 있었다.[3]

1960년 4월에 석방된 직후 런던으로 초청되어 말라위의 독립을 위한 회담에 참여한 반다는 1961년 8월의 선거로 공식적으로는 토지, 천연 자원 및 지방 정부 장관으로 임명되었으나 사실상 니아살랜드의 수상이 되었으며, 1962년 12월에 반다는 영국으로부터 니아살랜드를 독립시켜준다는 서약을 얻었다. 참고로 니아살랜드를 대신해서 '말라위(Malawi)'라는 국호를 정한 사람도 반다였는데, 이는 반다가 오래된 프랑스 지도에서 본 '마라비 호수(Lake Maravi)'에서 따온 말이었다고 한다.[4] 이후 1964년 7월 6일에 말라위가 독립하자 총리 자리에는 반다가 오르게 된다.

2.2. 말라위의 대통령으로서의 행보

2.2.1. 정치적 행보

말라위의 독립 직후이던 1964년 8월과 9월에 반다가 장관 3명과 의회 비서 1명을 강제로 해임하자 이들에 동조한 장관 3명과 의회 비서 1명이 사임하는 사건이 일어나며 내각 위기를 겪기도 했다. 이후 반다는 헌법을 바꾼 후 말라위 공화국이 성립한 1966년 7월 6일에 말라위의 초대 대통령이 되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독재자로 변질되었고 말라위 여당을 야당과 강제통합시키는 방식으로 말라위 의회당(MCP) 하나만이 허용되는 일당 독재국가로 만들며 1971년에는 아예 종신 대통령에 등극하게 된다. 반다가 종신 대통령이 된 이후 말라위는 그야말로 한국의 유신 체제의 확장판격인 극도의 억압적인 체제와 함께 헌법에서만 시민권과 자유가 보장되는 경찰 국가가 되었다.

종신 대통령이 된 헤이스팅스 반다는 유일한 합법 정당인 MCP의 대표도 겸했으며, 외무부, 법무부, 농업 및 공공 사업부 장관을 모두 반다 한 사람이 역임했다. 또 반다는 은행, 석유, 담배 및 건설 등 국가의 경제를 총괄했으며, 판사는 물론이고 1981년 개헌 후에는 대통령이 원하는 만큼 의원을 지명할 수 있었다고 한다.

반다는 자신을 대한 비난을 절대 용납하지 않아 1967년에 대통령 모욕을 금지하는 법률을 만들고는[5] 자신을 비난하는 사람은 친족이라도 신고할 것을 국민들에게 강요했고 집권할 무렵부터 '공공의 보전을 위해' 대통령이 직접 누구에게나 무기한 구금을 명령할 수 있었다. 게다가 모든 성인들은 MCP에 의무적으로 가입해야만 했으며 심지어 아직 태어나지 않은 아기들까지 MCP 당원이 되는 황당한 케이스도 있었다. 물론 MCP에 가입하지 않은 사람들은 심한 탄압을 받았다.

반다는 농촌 개발을 목적으로 만들었던 '말라위 청년 개척자(Malawi Young Pioneers)'라는 이름의 청소년 조직을 사실상 준군사조직 겸 반다의 친위대로 변질시킨 후 반다 본인이 직접 총사령관을 맡아 반정부 인사들을 감시하고 정보 작전을 담당하게 한 후 경찰이 이들을 체포하지 못하게 법을 제정했고, 당연히 이들은 권력자의 비호 속에 온갖 전횡을 저질렀다. 물론 반다의 정적들은 대부분 재판도 없이 아무 혐의도 적용하지 않은 채 투옥된 후 구타와 강간, 불로 지지기 등의 고문을 당하거나 재산이 몰수당했고, 심지어는 살해된 후 교통사고로 사인이 조작되었다. 게다가 '전통적 법원'에서 재판을 거친다고 해도 법적 대리와 항소가 허용되지 않았으며, 이렇게 유죄 판결을 받고 수백 명의 사람들이 사법살인을 당했다.

당시 말라위에서 오고가는 편지들은 정부 당국이 강제로 열어본 후 수정했고, 전화는 도청당해 누군가가 정부를 비판하는 말을 하면 그 전화는 강제로 끊어졌다고 한다. 게다가 술자리를 포함한 사적인 자리에서 정부의 정책을 비판했다는 이유만으로 체포되어 장기간 구금된 사람들도 많았으며, 겨우 전직 장관의 모습이 담긴 사진을 가졌다는 이유로 '말라위 정부에 반란을 일으키려 한 사람을 따르는 것'이라고 판단되어 반역죄로 사형당한 사람도 있었고, 나라를 어떻게 다스려야 하는지에 대해 한마디 한 사람도 살해당했다. 당시 반다의 공포통치가 어느 정도였냐고 하면 지하에서도 반다에 대한 반대 활동이 존재하지 않을 정도였으며, 이런 반다의 철권통치 속에서 6천~1만 8천 명에 달하는 말라위 국민들이 살해된 것으로 추정된다.
2.2.1.1. 오튼 치르와 부부 납치 사건
1981년 크리스마스 이브에는 탄자니아에 망명해 '말라위 자유 운동'이라는 망명 정당을 세우는 등 반반다 운동을 하던 중 딸을 만나려 북부 잠비아로 가던 오턴 치르와[6] 부부를 말라위 보안군이 납치해 말라위로 끌고 가고는 이들이 '정부를 전복하려고 잠비아에 밀입국하려다 적발되었다'고 발표했다.

치르와 부부는 위조된 문서를 '자필 진술서'로 뒤집어씌운 불공정한 수사를 거친 후 대통령이 임명한 판사 앞에서 변호사와 증인도 부를 수 없는 데다가 법원에 심문하는 것도 금지된 불공정한 재판을 거쳤고, 2달간의 재판 끝에 1983년 5월에 이들 부부 2명에게 사형 선고가 내려졌으나, 반다는 이 형량에 대한 국제적 비판을 못 이겨 1달 만에 이를 무기징역으로 감형했다. 게다가 치르와 부부와 동행하던 아들까지 아무 이유도 없이 체포된 후 1984년 2월까지 감금당했다.

오튼 치르와는 독방에 감금된 채 다른 독방에 수감되었던 아내를 만나는 것조차 금지당할 정도로 외부적으로 완전히 고립되었으며, 다리가 사슬에 결박된 적도 여러 번이나 있었고, 결국 치르와는 치료도 제대로 받지 못해 백내장으로 실명하고 부분적으로 귀가 먹게 되었다. 그나마 1992년 11월에 영국 법률 전문가 대표단이 말라위에 오면서 치르와 부부는 잠시나마 다시 만날 수 있게 되었으나, 결국 오튼 치르와는 1992년 12월 20일에 향년 73세로 옥사한다. 참고로 치르와의 부인이던 베라 치르와[7]는 남편의 장례식에 참석하지 못했으며, 남편의 사망 1년 후인 1993년 1월 24일에야 석방되었다.

참고로 베라 치르와는 석방 후에 사형 폐지 운동을 벌이고 반다의 후임 정부에서도 인권과 정치적 권리를 위한 투쟁을 계속해 나갔으며, 2006년부터는 남아프리카 공화국 프리토리아 대학의 인권 센터에서 '진정한 아프리카 인권 변호사를 가장 잘 대표하는 개인에게' 베라 치르와 인권상을 수여하고 있다.
2.2.1.2. 각료 처형 사건
1983년 5월 17일에는 3명의 장관[8]과 1명의 하원의원이 각료 회의에서 다당제 민주주의를 찬성하며 종신 대통령제에 대해 반기를 들자 이에 분노한 반다는 내각을 해산한 후 회의가 진행된 방에 있는 모든 각료들의 정치적 지위를 박탈하고는 부하들에게 이 4명을 죽일 것을 명령했다.

이 지시를 받은 반다의 부하들은 이 4명을 의회 건물의 뒷방으로 연행한 후 고문했으며, 바로 다음날인 5월 18일에 이들을 결박한 후 머리를 망치와 쇠지렛대로 가격해 죽인 후 시신을 비밀리에 운송하고는 협곡 밑에 있는 차에 실은 후 이들의 사인을 '모잠비크로 망명을 하려다가 모잠비크 국경 인근의 협곡에서 차가 추락해 사망'으로 조작했다.

5월 19일에 이달 4명의 사망이 조작된 사인과 함께 발표된 후, 반다는 이들의 시신을 관에 넣은 후 '마지막 관찰'을 위해 관을 여는 것을 금지시킨 후 밤에 몰래 매장했고, 사망자의 유족들이 이들을 애도하는 것조차 금지시켰다.
2.2.1.3. 정적 암살
게다가 반다는 정적들이 해외에 망명하는 것도 용납하지 않아 붉은 셔츠를 입은 '말라위 청년 개척자'를 해외에 보내 정적들을 암살하기도 했다. 먼저 친공 성향 반반다 단체인 말라위 사회주의 동맹(LESOMA)의 지도자였던 아타티 음파카티(Atati Mpakati, 1933?~1983)는 1979년모잠비크마푸토에서 반다의 명령을 받고 파견된 정보원이 보낸 소포 폭탄에 왼손 전체와 오른손의 세 손가락을 잃었으며, 1982년에는 음파카티의 아들이 의문의 독살을 당했고, 1983년 3월 24일 밤에 짐바브웨 하라레에 있는 호텔의 방에서 상부의 명령을 받고 하라레에 온, 호텔 직원으로 변장한 말라위의 정보원들에 의해 눕는 순간 머리에 독극물이 퍼지는 방식의 배개 폭탄으로 살해당하고 호텔 인근의 배수구에 버려진 후 죽은 후에도 사인 조작을 위해 시신에 한두 발의 총알을 맞기까지 했다.

심지어 1989년 10월 13일에는 반다의 부하들이 잠비아루사카에 가서 언론인이자 반반다 정당인 말라위 자유 운동(Mafremo)의 홍보 및 정보 비서관을 역임하며 반반다 선전물을 배포하던 음콰파티라 음항고(Mkwapatira Mhango)의 집에 화염병을 던지기까지 했고, 이 때문에 현장에서만 7명이 사망했다. 정확히는 음항고의 아내 2명과 자녀 3명(이들 중 최연상은 고작 8살이었다.), 집에 방문한 여성과 그녀의 생후 2개월 된 아기가 이 테러로 사망했고 음항고 본인과 음항고의 다른 자녀 4명은 심한 화상을 입었다. 참고자료 참고로 음항고는 병상에서 이 테러가 음항고와 함께 머무르던 말라위 자유 운동의 회장 에드워드 치르와(Edward Chirwa)를 암살하기 위해 일어난 것이라고 주장했으나 음항고는 이 테러가 발생한지 3일 뒤에 사망했고, 겨우 살아남은 다른 자녀들도 4명 중 3명이 사망했다.

2.2.2. 사회 정책

반다는 1968년부터 특이한 복장 규제 정책도 실시했다. 먼저 반다는 '여성에 대한 존중과 존엄성을 심어줘야 한다'며 휴양지와 국립공원, 컨트리 클럽을 제외한 곳에서 무릎 위까지 오는 치마나 드레스, 잘록한 옷, 심지어 바지를 입는 것까지 금지했으며, '대통령에게 반대하는 것처럼 보인다'는 이유로 남성의 장발나팔바지 착용, 수염 기르기를 금지하여 거리에서 적발된 장발 남성들은 경찰에게 강제 이발을 당해야 했다. 덤으로 반다는 말라위의 비자를 얻으려는 외국인들에게도 이를 강요하기까지 했는데, 이러한 정책은 1993년까지 지속되었다고 한다. 게다가 공공장소에서 키스하는 것도 금지된 데다가 키스 장면이 나오는 영화들은 상영이 금지되었다.

물론 모든 영화와 비디오테이프는 개봉/출시 전에 당국의 검열을 받아야 했고, 말라위에 수입되는 해외 잡지는 일부 페이지가 잘려나가기도 했으며, 학교에서 배우는 모든 교재들은 검열 위원회의 승인을 거쳐야만 했고, 심지어 반다는 말라위의 국민들이 자신의 집권 전의 역사를 아는 것을 허용하지 않아 이것과 관련된 책들을 대량으로 불태우기까지 했다. 그리고 반다는 부족 통합을 명분으로 본인의 부족이 쓰던 체와어를 유일하게 쓸 수 있는 부족 언어로 지정했고, 언론과 라디오에서 다른 부족의 언어를 사용하는 것은 법으로 금지되었다.

물론 언론 탄압도 극심하여 정부 선전 창구 역할을 하는 국영 신문 2개(일간지 1개+주간지 1개)와 국영 라디오 방송국 1개를 제외한 모든 언론 매체는 금지되었고, 이에 따라 말라위 국민들은 반다의 집권 기간에는 텔레비전 방송을 볼 수 없었다.[9][10] 이 때문에 당시 말라위 언론은 '세계에서 가장 맹목적으로 순응하는 언론'으로 간주되기까지 했을 정도였다.

게다가 반다는 국민들이 록 음악도 듣지 못하게 했고 여호와의 증인을 탄압했으며, 심지어 툼부카족을 위시한 말라위 북부의 부족들이 그들의 고유어를 사용하는 것과 교사로 임용되는 것을 금지시켰다. 그리고 반다는 1976년 5월에 반다가 영국 여권을 보유한 상태로 말라위에 있는 130여명의 아시아인을 추방하라는 지시를 내리기도 했는데, 그 지시를 내린 동기가 황당하게도 '아시아인들이 라디오로 송출되는 반다의 연설을 듣기를 거부해서'였다는 소문도 있었다.

그리고 당시 말라위에서는 조지 오웰, 에밀 졸라, 존 스타인벡. 제임스 볼드윈, 어니스트 헤밍웨이, 월레 소잉카 같은 문학가들의 작품을 포함한 수천 권의 책이 금서로 지정되었다고 하는데, 실제로 반다 정권이 금서로 지정한 책이 얼마나 많았는지 반다가 미국으로 순방을 갔을 때 선물로 받은 책을 내각에 추천하려고 했더니 그 책이 알고 보니까 말라위에서는 금서로 지정된 책이었다는 황당한 일화도 전해진다.

2.2.3. 우상화

반다는 본인의 우상화에도 열중했는데, 반다는 자신을 '신이 생명을 위해 말라위를 구원하고 인도하기 위해 제공한 메시아'라고 선전하며 모든 사무실의 벽에 자신의 사진을 걸었고, 그 어떠한 것도 그의 초상화보다 높은 곳에 올리지 못하게 했으며, 반다가 더 늙어갈수록 반다의 나이를 언급하는 것도 금지되었고, 심지어 당시 말라위에서는 극장에서 영화를 상영하기 전에는 말라위의 국가가 울려퍼지며 반다가 손을 흔드는 영상이 나왔다고 한다. 뿐만 아니라 반다가 해외 순방을 마치고 말라위에 도착할 때에는 반다의 얼굴이 새겨진 옷을 입은 여성 파견단이 공항에서 반다를 마중나오고는 반다를 위한 춤을 추고는 했다.

당연히 말라위의 모든 지폐에는 반다의 얼굴이 새겨졌고[11], 반다의 생일은 국경일이 되었으며,[12] 반다의 이름은 공항, 고속도로, 경기장, 병원 등에도 등장했다. 그러면서 반다는 '하나님은 반다가 말라위의 지도자가 되게 하기 위해 태어나기 전부터 반다를 선택하고, 이렇게 반다는 평생 말라위를 이끌도록 성스럽게 임명되었다.'고 선전되었다.

2.2.4. 대외 정책

반다는 대외적으로는 반공주의를 표방하며 서구로부터 막대한 지원을 받았고, 로디지아이안 스미스에 저항하는 흑인들의 독립운동을 반대하거나 당시 아프리카의 흑인 지도자 중에서는 유일하게 아파르트헤이트로 악명 높았던 남아프리카 공화국과 수교를 하는 등의 정책을 펼쳤다.

그러나 의외로 서방으로부터 공개적으로 비토당하는 일은 드물었는데, 아프리카 동부 지역에 모잠비크탄자니아라는 거대 사회주의 국가가 존재함과 동시에 아프리카에서 매우 적극적으로 친서방 정책을 펼쳤기 때문이다. 어느 정도였냐면 로디지아나 남아프리카 공화국 같은 당시 사실상의 백인 식민지를 제외한 대부분의 아프리카 국가들이 포르투갈 식민지 전쟁 당시 독립군을 지지한데 비해 말라위는 포르투갈을 지지했다.

2.2.5. 긍정적 면모

이렇듯 극악한 폭정을 준 종신 집권하며 저질렀지만 동시에 국가 경영을 성공적으로 해내고 국가를 안정시켜서 생전은 물론 사후에도 자국 내에서 여전히 지지세가 높다. 여러모로 아프리카의 엔베르 호자라고 볼 수 있는 셈이다.

실제로 반다는 아프리카에서도 우수한 교육 체제를 유지했고, 여성들의 권리를 보장하고 교육과 행정 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내는 것을 돕기 위해 CCAM을 만들었다.[13] 그리고 반다는 농민들에게 비료와 농기구를 무상으로 나눠줬기 때문에 재임 기간 내에 말라위에서는 큰 기근이 발생한 적도 없었고, 학교나 병원 등의 인프라 구축 사업도 진행해서 일단 겉으로는 발전하는 모습을 보여줬다. 그리고 반다에 대해 다룬 영상에 말라위인들이 단 댓글들에 의하면 당시 말라위는 물가도 쌌던 데다가[14] 무장 강도 등의 범죄도 다른 아프리카 국가들에 비교하면 없는 수준이었다고 한다. 게다가 1980년대 초까지 말라위는 많은 이웃 국가와 달리 순수 식량 수출국이었으며 일반적으로 이 지역에서 보기 드문 경제적 성공 사례로 간주되었다. 비록 반다 시기에도 말라위는 1인당 GDP가 가장 높았던 1991년에도 1인당 GDP가 260달러도 되지 않는 극빈국이었으나, 국가 경제와 민생만큼은 주변국에 비해서는 확실히 안정시켰으니 경제적으로 성공했다는 평가가 나온 것이라고 봐도 무방하다.[15][16]

그리고 반다는 뒤에서는 남아프리카의 흑인 운동을 지지했고, 무조건적으로 넬슨 만델라에게 자금을 지원해줬다. 실제로 만델라도 반다의 장례식 무렵에 반다에게 경의를 표했을 정도.

2.3. 몰락

그렇지만 1980년대 내전이 한창이었던 모잠비크에서 난민들을 대대적으로 받아들인 바람에 1980년대 후반에 가뭄이 들면서 지지기반이 흔들어졌다. 말라위가 기근과는 그나마 거리가 먼 나라라 하더라도 1인당 GDP는 당대에도 세계 최하위권 수준이었던 데에다, 경제는 계속해서 침체되던 차에 난민들이 대대적으로 몰려들면서 식량이 부족해지는 상황이 초래되었기 때문이었다.

여기에 1992년 3월 8일에 7명의 가톨릭 주교가 독립 이후 처음으로 반다에 대한 첫 공개 비판을 담은 서한이 학생들을 중심으로 퍼져나가자, 말라위 경찰은 이들을 연행한 후 8시간 동안 심문하고는 그 편지를 금지했으며, 말라위 정부 관리들은 이 사제들을 죽이는 방법을 논의하기까지 했다. 이에 반발하여 3월 15일부터 반다 집권 이래 최초로 일어난 반정부 시위였던, 학생 중심의 대규모 반정부 민주화 시위가 일어나자 반다는 경찰과 친위대를 동원한 유혈진압에 나섰다.

특히 3월 17일 반다가 소유한 회사인 프레스 홀딩스(Press Holdings)가 소유한 상점에 학생들이 돌을 던지자 경찰은 최대 70명의 학생들을 연행한 후 이들 중 6명을 구타와 고문 끝에 죽게 했으며, 심지어 5월 6일에는 말라위 국민들에게 매우 인기가 있었던 차쿠프와 치하나(Chakufwa Chihana, 1939~2006)를 석방하라는 노동자들과 학생들의 시위에 경찰과 '말라위 청년 개척자'가 실탄을 발포하자 이에 시위대가 상점을 약탈하고 기물을 파손하는 것으로 번지며 최소 38명이 사망했다. 당시 사망자 대부분은 경찰의 총에 맞아 죽은 시위대였다.

반다는 5월 8일에 '신사 숙녀처럼 행동하라'는 라디오 연설을 하며 시위대를 해산시켰지만, 6월 기준으로 최대 2천 명의 반체제 의사들이 강제로 구금된 후 심하게 밀집된 감방에 갇힌 채 고문을 당했다고 한다. 이 폭력적 시위 진압에 대한 국제적 비판이 빗발치자 반다는 고문이 '우리의 공식 정책'이 아니라고 말하고 국제적십자위원회(ICRC)가 말라위의 감옥에 방문하는 것을 허용하며 수습에 나섰다.

그러나 이와 동시에 반다는 그러나 정당들이 '이 나라의 법에 어긋난다'며 '내전을 피하기 위해 구금이 필요하다'는 말을 덧붙였으며, 이후에도 1992년 10월에는 치하나의 재판이 끝났을 무렵에 치하나가 재판을 받던 고등법원 앞에서 시위하던 사람들에게 경찰과 '말라위 청년 개척자'가 무자비한 구타를 퍼붓는 유혈진압을 가해 최소 5명의 시위대가 맞아 죽었다.

이후 반다는 서방의 원조중지 압박에 굴복하고 10월 18일 반체제 인사들을 다당제 전환에 대한 국민투표를 가능한 한 빨리 실시하겠다고 발표한 후 1993년 6월 14일에 국민투표를 실시했는데, 국민들이 다당제 정치의 '혼란과 분열'을 거부할 것이라는 반다의 확신과는 달리 말라위의 국민들은 64%의 지지율로 다당제를 받아들였으며, 선거 참패 후 반다는 나이가 나이라 건강 문제를 피할 수 없게 되어 10월 초에는 뇌 수술을 위해 남아공으로 갔고, 1993년 12월에 '말라위 청년 개척자'는 말라위 육군이 '민주주의로 이어지는 정치적 과정에 개입할 것'이라는 우려를 하면서 '폭력적으로' 해산되었다.

여담으로 이 민주화 시위의 성공에는 팩시밀리가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한다. 실제로 말라위의 민주화 시위 참여자들과 정부에 불만을 품은 공무원들은 기업과 대규모 관공서, 독립적인 시민단체에 있는 팩스를 이용해 말라위의 상황에 대해 다룬 외국 신문의 보도들과 반정부 성향의 내용들을 공유해가며 반다가 말라위 주변에 구축한 검열이라는 장벽을 허물어버린 것으로 평가된다.

1994년 5월 17일에 열린 대선에서 패배한 후 4일 뒤인 1994년 5월 21일에 반다는 96세라는 엄청난 고령으로 대통령직에서 순순히 물러나고 야인으로 지내다가[17][18][19] 1997년 11월 25일에, 남아프리카 공화국 요하네스버그에서 호흡 부전으로 향년 99세로 사망했다. 반다의 장레식은 국장으로 치러졌다.

3. 사생활

공식적으로는 미혼이고 자식도 없었다고 알려져 있다.[20] 그러나 1945년에 런던에서 의사로 일했을 적에 머무르던 집의 주인이던 여성 메린 프렌치(Merene French, 1911–1976)와 부적절한 관계를 맺은 적이 있었고, 이 때문에 분노한 프렌치의 남편이 아내와 반다를 고소하고 이혼하는 스캔들이 있었다.[21] 이때 프렌치가 반다의 아이를 임신했다는 소문이 있었지만 입증되지는 않았다.

반다의 사후에는 짐 주마니 조핸슨(Jim Jumani Johansson, 1973–2019)이라는 남성이 자신이 반다가 영국인 여성과의 불륜 관계에서 태어난 자식이라고 주장한 바 있다.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사설 연구소에서 한 예비 DNA 검사에서는 조핸슨이 반다의 친자라는 결과가 나왔다고 하나, 반다의 유족들은 유산 상속 문재 때문에 DNA 검사에 참여하는 것을 거부했다. 이런 상황 속에서 조핸슨은 2019년 1월 26일에 향년 45세로 급사했다.

텔레그래프가 2014년 출판한 <독재자들의 만찬 : 폭군들을 즐겁게 한 고약한 맛 안내서>에 따르면 벌레를 말려 먹는 걸 즐겼다고 한다. #

4. 여담

  • 2009년에 반다의 생일이 다시 국경일이 될 시점에 말라위의 수도에는 12만 달러를 들여 반다의 청동상이 건립되었으며, 잡초가 무성하던 반다의 무덤은 75만 달러를 들여 거대한 영묘로 개조되었고, 당시 말라위의 언론은 '수사학북한 수준'이라는 평까지 들을 정도로 반다에 대한 온갖 찬사를 쏟아냈다. 참고자료
  • 단결, 충성, 복종, 규율(unity, loyalty, discipline, and obedience)을 '네 가지 초석'으로 삼고, 국민들에게 이를 준수하게 했다.
  • 1981년에는 "나는 내 아들딸들이 나처럼 교육을 받기 위해 해외로 떠나야 하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는 말을 남기며 이튼 칼리지를 모델로 삼은 '카무주 아카데미(Kamuzu Academy)를 세웠다. 이 학교에 다니는 학생들은 외국인 교사로부터 라틴어그리스어를 공부해야 하며, 토착어인 체와어를 말하면 징계를 받는다고 한다. 반다의 지지자들은 '카무주 아카데미'를 '아프리카의 이튼'이라고 부르나, 반대파들은 '반다가 카무주 아카데미에 국가의 거의 모든 교육 예산을 썼다'고 불평하고 있다. 참고로 이 학교는 오늘날에도 존속하고 있다. 공식 사이트
  • 자신이 주요 수탁자이자 주주로 있는 프레스 그룹(Press Group)을 경제의 모든 주요 부문에 연관짓고 그의 사유지에서 국가 담배 생산량의 40%를 생산하는 등 재산 축적에도 열을 올려 사망 시점에 최소 3억 2천만 달러의 재산을 남겼고,[22] 롤스로이스 리무진 1대와 개인용 제트기인 리어젯 1대, 13개의 궁전을 보유하고 있었다고 한다. 실제로 반다의 퇴진 무렵에 외교관들은 반다의 재산이 말라위의 전체 상업 부문의 3분의 1을 차지했다고 추정했다.
  • 반다의 정확한 신장은 불명이나, 1985년에 영국에 순방을 갔을 때 163cm였던 엘리자베스 2세와 찍은 사진을 보면 160~161cm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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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출생신고를 하지 못했기 때문에 정확한 생년월일은 불명이다. 1896년생이라는 설도 있지만, 1898년 1월생이 유력하다고 하며, 경우에 따라서는 1898년 2월 15일로 보기도 한다. 관련 자료. 반다는 1906년 5월 14일이 자신의 생일이라고 생각했고, 이 때문에 반다의 집권 시절에는 1906년 5월 14일이 반다의 공식 생일로 지정되었다.[2] 원래 반다는 고향인 니아살랜드에서 의사로 일하려고 했으나, 식민 정부가 반다를 영국인 의사와 동등한 조건으로 고용하는 것을 거부하자 영국에서 일하게 된 것이었다.[3] 여담이지만, 사실 선라이즈 작전 당시에 식민 당국은 정확히 350명의 '위험 분자'들을 구금하라고 지시하여 경찰과 군인들에게 할당량이 내려졌고, 첫 이틀 동안 정확히 263명이 연행되었으며, 동년 11월 1일까지 총 1,328명이 구금되었다고 한다. 다만 이 시점까지 구금되었던 사람들 중 830명은 석방되었다고 한다.[4] 참고로 '마라비'는 말라위, 잠비아, 모잠비크 및 짐바브웨 동부의 사람들의 총칭을 의미한다.[5] 놀랍게도 말라위의 민주화 후에도 그 법률은 여전히 없어지지 않았다! 당연히 사문화되었지만.[6] Orton Chirwa, 1919~1992. 말라위의 초대 법무부 장관이었으나, 독립 직후에 사임하고 탄자니아로 망명했다.[7] Vera Chirwa, 1932~. 말라위 최초의 여성 변호사였다.[8] 이들 중에는 반다의 친척도 1명 있었다고 한다.[9] 결국 말라위의 첫 TV 방송은 반다의 사망 2년 후인 1999년 4월 1일에야 시작되었다. 여담으로 말라위보다 늦게 TV 방송을 시작한 국가는 부탄(1999년 6월 2일), 보츠와나, 통가(각각 2000년), 키리바시(2002/2004년), 코모로, 팔라우(각각 2006년), 리히텐슈타인(2008년), 사하라 아랍 민주 공화국(2009, 다만 이쪽은 미승인국이다.) 8개국밖에 없다.[10] 이에 부유층들은 대체품으로 VCR용 모니터 세트를 구입했으며, 반다 본인도 위성 방송을 통해 외국 프로그램을 정기적으로 시청했다.[11] 그가 물러난 이후 잠시 퇴출되었다가 2012년 다른 역사적 인물들과 함께 다시 새겨져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12] 이 기념일은 반다가 퇴진한 직후에 폐지되었으나, 2009년에 원상복귀(?)된다.[13] 참고로 당시 말라위에서 여성들을 폭행하는 사람들은 '반다를 괴롭히는 것'과 같은 것으로 간주되어 재판 없이 투옥되고 처벌될 수 있었다.[14] 이와 비슷하게 투르크메니스탄사파르무라트 니야조프도 생필품과 식료품 물가는 엄청나게 싸게 잡아놔서 온갖 기행에도 불구하고 투르크메니스탄 국민들의 평가는 그리 나쁘지 않았다.[15] 어떻게 보면 오늘날에 폴 카가메르완다가 1인당 GDP가 1000달러도 되지 않는 극빈국인데도 아프리카 지역 내 대표적인 경제적 성공 사례로 간주되는 것과 비슷하다고 볼 수 있다.[16] 당장 간이 풍력발전기를 만든 윌리엄 캄쾀바의 고국이 말라위다.[17] 참고로 반다가 퇴진한 나이는 엘리자베스 2세가 사망한 나이와도 동갑이었다. 심지어 군주제의 지도자들까지 포함해도 반다보다 고령에 물러난(재위 중 사망 포함) 지도자는 극히 드물다.[18] 다만 반다는 인류 역사상 최고령 비왕실 지도자까지는 아닌데, 쁘렘 띤나술라논(เปรม ติณสูลานนท์, 1920–2019)은 라마 9세의 사후 라마 10세가 즉위할 때까지 만 96세의 나이로 1달여간 섭정을 맡았으며, 조반니 파올로 라스카리스(Giovanni Paolo Lascaris, 1560–1657)는 만 97세에 사망할 때까지 구호기사단 단장을 역임했고, 엔리코 단돌로는 무려 만 98세까지 베네치아 총독을 역임한 인류 역사상 최고령 비왕실 지도자이다. 물론 이 셋을 포함해도 반다가 인류 역사상 최고령 대통령이라는 것만큼은 변하지 않는다. 참고로 최고령 비왕실 지도자 5위는 2020년에 만 94세의 나이로 사임한 마하티르 빈 모하맛 전 총리로, 이쪽은 인류 역사상 최고령 총리이기도 하다.[19] 이와 반대로 역사상 최연소 대통령이자 최연소 비왕실 지도자는 아이티장 클로드 뒤발리에로, 무려 만 19세라는 어린 나이에 대통령이 되었다.(다만 이쪽은 아버지 프랑수아 뒤발리에의 권력을 세습받은 케이스다) 그리고 역사상 최연소 총리는 1985년에 만 32세에 캄보디아의 총리가 된 훈 센이다.[20] 참고로 당시에 사실상의 영부인은 반다의 비서이자 절친과도 같은 관계였던 세실리아 타만다 카자미라(Cecilia Tamanda Kadzamira, 1938–)이었지만, 둘 사이에 육체적인 관계는 없었다고 한다. 참고로 카자마라는 후에 반다가 너무 늙어 국정 운영이 사실상 불가능해지자 나중에는 많은 결정을 본인이 직접 내리게 되었다.[21] 프렌치는 이혼당한 이후 반다와 같이 내연남의 고향으로 갔고, 1976년에 빈곤 속에서 사망했다고 한다.[22] 참고로 1997년에 말라위의 GDP는 약 26.6억 달러 정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