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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치독일군의 운용장비 |
화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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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5cm PaK 41 |
1. 개요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독일 국방군이 운용한 구경 7.5cm[1] 57 구경장 대전차포. 크루프가 라인메탈의 7,5cm PaK 40과 경쟁하기 위해 개발되었다. 1941년부터 1943년까지 총 150문만 생산되었다.2. 상세
포구속력과 관통력을 늘리기 위해 개발된 구경감소포로 잘 알려졌다.| Pak 41의 포신 도면 |
| 탄약도면 |
포신은 게를리히 원리에 따라 포탄의 압착을 위해 세부분으로 정밀설계되었으며 뒤쪽은 일반 강선이 있는 평행 구간, 가운데는 무강선 원추 구간, 앞쪽 약 70cm는 다시 평행이지만 무강선으로 이루어졌다.
발사시 탄약의 스커트가 원추 구간을 지나면서 압축되어 속도가 크게 올라가기에 야전에서 마모가 심한 원추 구간만 따로 교체할 수 있게 설계된 점이 특징이나 포신 수명 자체가 400~600발[2] 정도로 매우 짧았다.
포가는 분할 트레일과 고무 타이어가 방패에 직접 붙어 있어서 무게를 줄였고, 전체적으로 낮고 안정적인 실루엣을 가졌다.
초속과 관통력은 PaK 40을 넘어서는 수준이었다. 특히 텅스텐 코어 탄을 쓰면 1,000m에서도 KV-1 같은 중전차 정면을 뚫을 수 있었다.
그러나 장거리로 갈수록 탄속이 급격히 떨어지고, 독일의 자재우선순위배분과 텅스텐 부족 및 포신 수명의 문제로 결국 대량 생산되지 못했다.
탄약이 떨어지거나 포신이 닳은 포는 대부분 폐기되었고, 예비 부품·탄약 부족으로 1943년 7월 25일 OKW 명령으로 중부집단군이 PaK 41 65문을 서부최고사령부에 이관, 수리 후 해안 방어에 사용되도록 전환되었으며 일부는 PaK 40 부품으로 개조되기도 했다.
실전 기록은 매우 적으나 전과는 화려한데, 1942년 8월경 제9군이 24문 이상 수령, 262보병사단에 3문[3]이 지급되어 43년 7월 오롈 전투에서 KV-1 41대를 깨부수며 저지에 성공한 기록과 르제프 전투에서 561대전차대대 2중대의 루돌프 비트너가 총 11대의 소련전차를 격파한 기록이 존재한다.
3호 전차 차체 위에 야전 개조로 올린 사례도 한 건 알려져 있다.
본격적인 자주포 파생형은 나오지 않았다.
3. 제원
| 구경 | 75->55mm | |||
| 전장 | 4.32m | |||
| 포신 길이 | 2.95m (L/57) | |||
| 중량 | 1,356 ~ 1,390kg | |||
| 앙각 | -12.5° ~ +16° | |||
| 선회각 | 60° | |||
| 발사 속도 | 분당 12 ~ 14발 | |||
| 포구 초속 | 1,125 ~ 1,230m/s (AP) | |||
| 유효 사거리 | 약 2,000m | |||
| 관통력 (30° 경사 장갑 기준) | ||||
| 탄종 | 초속 | 100m | 500m | 1,000m |
| Pzgr. 41 (HK) | 1,230m/s | 198mm | 172mm | 140mm |
| Pzgr. 41 (W) | 1,230m/s | 97mm | 80mm | 70mm |
| Pzgr. 41 (St) | ????m/s | ??mm | ??mm | ??mm |
| Spgr. 41(HE) | ????m/s | ??mm | ??mm | ??mm |
4. 기타
일본 제국도 Pak 41의 자체 버전인 게식(ゲ式) 75mm 대전차포’로, 게를리히 원리를 참고한 연구 계획을 세웠으나 생산 및 실전 배치까지는 가지 못했다.정식 연구명은 게식칠십오모대전차포(ゲ式七十五粍対戦車砲)로써 1943년 7월 개발에 착수했다. PaK 41 설계를 참고했다는 것이 일본 위키와 관련 연구 자료의 공통된 서술이다. 제1육군기술연구소 관련 연구사항 문서에는 “게를리히식 포신에 대해서도 연구한다”는 취지의 기록이 남아, 개발 초기부터 원뿔포신 탑재를 검토했음을 보여주며 일부 2차 자료에서는 포신 내경이 75mm에서 57mm까지 줄어드는 형태로 추정하며 구조와는 조금 차이가 있다. 5식 포전차 나토, 치토의 포로도 검토되었으며, 포구초속은 독일과 비슷하게 1,000m/s급 이상을 기대했을 가능성이 크지만, 실제 시제포가 완성되지 않아 확정된 제원은 존재하지 않는다.
일본군은 PaK 41이 보여준 ‘가벼운 포가와 초고초속을 이용한 중전차 전면 관통’이라는 메리트를 인지하고 1943년 여름에 이를 맹렬히 추격하려 했다. 그러나 기술적 한계와 자원난으로 인해 불과 1년 만에 타탄[5]과 일반 장포신 75mm로 방향을 전환했다. 결과적으로 게식 75mm는 시제포조차 완성되지 못한 채 문서와 연구 계획에만 남은 미완의 프로젝트로 끝났으며, 소수라도 실전에 투입되어 전과를 올렸던 독일의 원형 포들과는 달리 전장에 모습을 드러내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