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2-03 22:33:59

92식 70mm 보병포

제2차 세계대전기의 일본군 화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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九二式歩兵砲 (きゅうにしきほへいほう)
1. 개요2. 특징3. 실전

1. 개요

일본군대대보병 지원 화기로서, 동시대 미군의 81mm 박격포나 현대 대한민국 국군의 81mm 박격포와 비슷한 목적과 위치에 편제된 대대급 지원 화기인 보병포였다. 하지만 운용목적만 비슷할 뿐, 박격포가 아니라 경 곡사포였다. 1개 대대에 2문씩 배치되었으며, 그 때문에 '대대포'(大隊砲)라는 별칭으로도 불렸다. 본래의 이원화된 대대 지원 화기였던 11식 37mm 보병포11식 70mm 박격포를 함께 대체하기 위해 1920년대 후반부터 개발되기 시작하여 1932년 부터 배치되기 시작했는데, 1932년이 황기 2592년(쇼와 7년)이었기에 뒷글자를 따 92식 보병포로서 명명되었다.

2. 특징

본래의 11식 37mm 보병포는 37mm라는 작은 구경 때문에 화력과 저지력이 부족했고, 70mm 보병곡사포(박격포)[1]는 일본군이 원하는 직사화력을 제공해줄 수 없었으며 박격포 구조상 발사했는지 하지 않았는지 확인하지 않고 포탄을 이중으로 넣는 바람에 사고도 빈발했다. 더불어 이원화된 보급체계는 일본군에게 있어서 부담이었고, 그들은 직사와 곡사가 모두 가능한 보병 지원화기를 원해 해당 보병포를 개발, 배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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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가를 높게 올린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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낮게 내린 모습[2]
일본군이 원했던 대로 92식 보병포는 차축 크랭크축의 조절로 직사와 곡사의 사격이 모두 가능했고, 크랭크축 조절을 통해 포가와 포신을 가장 밑으로 내린 상태에서도 곡사사격이 가능했다. 가장 아래로 내렸을때는 - 6 ~ + 51도의 각도로 사격이 가능했고, 올린 상태에서는 + 13 ~ + 70도의 각도로 사격이 가능했으며 포가를 아래로 내린 상태에서는 지면과의 충돌 방지를 위해 후면에 구멍을 팔 필요성이 있었다. 최대 사거리는 2.8km 였으며, 발사 속도는 분당 10발이었다. 기존에 보유하고 있던 11식 보병포 보다는 다방면에서 뛰어났고, 11식 박격포와 비교해선 화력에서 뒤쳐졌지만 그럭저럭 정확도[3]나 안정성에서 뛰어나다 평가되어 좋은 평가를 얻었다.

운반시엔 말 한마리로 운반하거나, 세등분으로 분해하여 세마리로 나눠 운반했으며, 인력으로 운반할땐 10명이 동원되었다. 차로 견인할 때는 포 자체에 서스펜션이 없는 통짜 철제 구조이기에 그대로 견인하는 것은 불가능했고, 트럭 위에 따로 싣거나 해야 했다. 탄약은 한 박스당 5발들이 30키로 그램이었고 말로 운반할 때는 세개씩, 인력 운반할 때는 한개씩 짊어졌는데 당시 일본군의 부실한 체격에다 탄약운반엔 그 체격보다 더 떨어지는 인원을 유용했기에 이것저것 힘든 것이 많았고, 말로 견인되는 전용 탄약 운반 차량이 개발되기도 하였다.

3. 실전

실전에선 일본군이 원했던 대로 보병에게 수반되어 다용도로 사용되었다. 탄피는 재활용이 가능했으며 그다지 크지 않은 크기로 공격과 방어시 모두 활용되었고 경곡사포와 직사포를 겸하는 양용성으로 운용이 용이했다. 중일전쟁 부터 할힌골 전투, 그리고 태평양 전쟁까지 사용되었다. 그러나 같은 급의 박격포와 비교해서 크고 무거워 진지 변환이 용이하지 않았고, 결정적으로 종래의 곡사포와 다름없는 포연으로 발사위치를 파악하기 쉬웠다. 이는 진지변환의 어려움과 중첩되어 단점으로 작용했으며, 공세시에도 마찬가지였다. 대 전차전을 위한 철갑탄도 개발되어 있었지만, 여타 일본군 대전차포가 그렇듯 성능은 형편없는 수준이었다. 100m에서 30mm, 500m에서 25mm, 1000m에서 20mm 정도의 관통력 밖에 없었으며, 대전기에 개발된 3식 철갑유탄(성형작약탄)을 사용해도 90mm가 고작이었다.

일본에도 스토크블랑식 박격포가 도입되어 97식 곡사보병포라는 이름으로 제식화 되었지만, 도입시기가 92식 보병포 배치시기와 맞물렸기에 다시 체계를 갈아업고 편제를 재편성하는데에 부담이 컸던데다, 스토크블랑식 특성상 상대적으로 떨어지는 명중률은 일본군에게 감점요소였다. 발사속도가 높지만 명중률이 낮은 체계는 일본군의 부실한 보급체계로 탄약 소모량을 받쳐 줄 수 없다는 이유였다. 실제로 92식 보병포만 해도 탄약보급에 무리가 따랐다. 그 때문에 97식 박격포는 소수만 도입되었고 92식 보병포를 완전히 대체하지 못했다.

중국 전장에서는 그럭저럭 쓸만했다. 우선 상대하는 중국군은 중화기가 변변치 않았고, 방호시설의 수준도 낮았기 때문에 92식 보병포의 화력으로도 충분했고, 도로사정이 열악한 중국 전장의 특성상 상대적으로 가볍다는 것도 제법 이점이였다. 일본의 항복 이후, 중공군이나 국민당군이나 모두 중화기가 부족했기 때문에 노획한 92식 보병포를 국공내전에 투입했고, 자체로 카피 제작하기도 했다. 6.25 전쟁에서도 중공군은 92식 보병포를 다수 운용했다.

해당 체계를 노획한 미군은 그럭저럭 좋은 평가를 내렸고, 따로 노획무기 운용교본을 발간하기도 하였다.


[1] 1차대전 독일군의 박격포에서 영향을 받아 개발한 것으로, 현대의 스토크블랑식 박격포와는 다른 방아쇠끈 격발식 구조의 강선 박격포였다.[2] 출처: #.[3] 정작 실전에선 대충 맞는다고 운용병들이 놀려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