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ght Tank, M24 | |||||
파생형 | 실전 | 운용국 | 미디어 | 모형 |
1. 개요
M24 채피의 실전 기록을 정리한 문서.2. 대전기
2.1. 제2차 세계 대전
2.1.1. 서부전선
2.1.1.1. 벌지 전투
벌지 전투 당시 쁘띠티에의 미 육군 제14기병연대 산하 제18기병정찰중대 소속 M24 채피[1] |
아르덴 대공세 당시, 덤불이나 보카쥬로 인한 시계 불량과 사이드스커트 탓에 측면에서 볼 시 판터와 매우 흡사하여 점령지로 돌아오는 와중에 깜짝 놀란 전차 승무원들이나 포병들이 오인 사격을 하는 일도 다수 존재했는데, 이 때문에 상층부에서는 벨기에와 프랑스에 배치된 인원들에게 직접 채피를 보여주고 아군의 신형 전차니 절대로 사격하지 말라고 신신당부하였다고 하며, 이렇게까지 해도 이런 사고가 빈번하게 생겨 아예 상단의 차량처럼 사이드스커트를 제거하고 운용하는 차량들이 많았다. 결국 이런 일화 탓에 미군은 채피에 일명 "새끼 표범(Panther pups)"이라는 별칭을 붙였다.
그러나 미군도 이 점을 이용해서 신형 전차가 배치된 것을 모르는 독일군 기갑소대의 코 앞까지 다가가 4호 전차나 5호 전차 판터까지 격파한 사례도 존재한다.[2]
비록 등장 시기는 매우 늦었지만, M8 그레이하운드와 더불어 아르덴 대공세 당시 대활약했으며, 채피에 크게 데인 독일군은 "미군이 판터를 노획해서 우리를 공격하는구나!"라고 생각하며 두려워했다는 후문이 있다.
2.1.1.2. 독일 본토 진격전
"88번 도로"에서 격파된 미 육군 제116기갑사단 소속 M24 채피 |
라인베르크 시내에는 20mm 기관포와 40mm 기관포와 더불어서 88mm 포가 있었으며 독일군은 마을로 가는 모든 경로와 접근로에 진지를 준비했으며, 포병이나 전차병뿐만 아니라 보병들도 자동화기와 판처파우스트로 잘 무장되어 있었다.
당시 미군은 린트포르트-라인베르크 방면 도로에 "88번 도로"라는 별명을 붙여주었는데,[3] 당시 이곳은 미군의 대전차포와 야포 등의 직접적인 공격을 받고 있었기에 독일군은 포나 진지를 구축하기 위해서 눈에 띄는 차량이 아니라 군마를 주력으로 사용했다고 한다.
이에 맞서는 미 육군 소속 제8기갑사단의 전투사령부[4]은 제49기갑보병대대, 제36전차대대 및 제399기갑야전포병대대로 구성되어 있었으며, CCB는 사단에서 분리되어 미국 제35보병사단에 배치되어 독일군이 라인 강을 건너 탈출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라인베르크와 베젤 방향으로 공세를 명하였다.
1945년 3월 5일 CCB는 35보병연대를 이끌고 린트포르트와 라인베르크에 공세를 가하였으며, 독일군과 미군은 "88번 도로"에서 치열한 공방전을 벌였다. 이때 제36전차대대 산하 D중대에 속한 18대의 채피 중 17대가 격파되었고, 1량이 겨우 살아남은 상태에서 남서쪽으로 공세를 가하는 명령과 함께 후퇴를 하게 되었다.
당시 D중대 소속의 장교는 아서 에드먼 대위와 산하 1소대 장교 케네스 로빈슨, 2소대 장교 토마스 라이언, 3소대 장교 프랭크 리치였는데, 이 중 토마스 라이언과 케네스 로빈슨은 전투에서 전사하고 아서 에드먼 대위와 프랭크 리치는 중상을 입어 전투에서 후퇴하는 등 큰 피해를 입게 된다.
라인베르크를 사수하기 위해 독일군 측에서는 브뢰커 대위가 지휘하는 제60기갑척탄병연대 산하 2대대와, 슈나이더 대위가 지휘하는 제156기갑척탄병연대 산하 1대대가 전투에 참전했으며, 이들 대대에는 4호 구축전차 여러 대가 배치되어 미군의 공격을 저지하는 데에 사용되었다.
그러나 M24 채피를 필두로 한 미군의 맹렬한 공격에 독일군은 패배하고 1945년 3월 5일 저녁 라인베르크 북쪽의 새로운 방어선으로 후퇴하며 미 육군 제116기갑사단은 라인베르크를 점령하는데 성공하게 된다.
제49기갑보병대대는 68명의 사상자를 냈고, 제36전차대대에서는 31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독일군 측에서는 도합 512명의 포로와, 사망자 350명이 발생했다.
전투 직후 제36전차대대는 총 41대의 전차를 잃었는데, 특히 D중대는 상술했듯 채피 1량을 제외한 전량을 손실했으며, B중대는 채피 6량을 제외한 전량을 손실, A중대는 사정은 그나마 나았지만 도합 11대의 전차를 손실했다.
참고로 당시 미군은 독일군 측의 정확한 규모나, 소속연대 등을 3월 6일까지 몰랐다고 한다. 이는 점령 후 독일군이 버리고 간 서류나 장비 등에서 알아낸 것이다.
라인 강을 건너는 미 육군 소속 M24 채피 |
이로 인해 전차, 대전차 자주포, 지프 등을 운송하는 도하 작전이 크게 지연되는 바람에 원래 전투 차량들은 라인 강 도하 후 제1대대에 배치될 예정이었으나, 상륙 작전이 지연되자 상층부에서는 오후 2시 30분에 작전을 변경하여 독일군의 방어선을 돌파하기 위해 제3대대에 모든 전차들을 배치하기로 결정, M24 채피는 제744경전차대대 산하 제3소대에 배치되었으며, M10 GMC와 M36 GMC은 제823대전차대대로 배치되었다.
제744경전차대대에 배치된 M24 채피들은 같은 날 오후 4시 30분 경에 로트하우스호프를 향해 동쪽으로 진격하기 시작했다.
이때 당시 채피는 로트하우스호프 동쪽 방면에서 저항하는 독일군과 맞닥뜨려 진격이 불가해지자 이때, M24 채피 한 량이 높은 기동성을 바탕으로 독일군이 구축한 참호를 마치 기차가 선로를 타듯이 넘어가면서 독일군을 격퇴하였고, 전황이 불리해지자 독일군은 군마를 이끌고 야포를 견인한 채 탈출을 시도하다 포위되어 섬멸당했다. 오후 6시, 미군은 로트하우스호프를 점령하는데 성공했으며, 이렇게 M24 채피는 명성을 알리기 시작하였다.
2.1.1.3. 체코슬로바키아 해방전
체코슬로바키아 해방전 당시 플젠에서의 미 육군 제16기갑사단 소속 M24 채피 |
2.1.1.4. 오스트리아 전선
오스트리아 전선 당시 잘츠부르크 외곽에서의 미 육군 소속 M24 채피 |
2.1.1.5. 이탈리아 전선
베르가토의 미 육군 1기갑사단 81정찰전대 소속 M24 채피[5] |
3. 냉전
대독 전승 기념 퍼레이드 참가 미 육군 소속 M24 채피 |
3.1. 6.25 전쟁
6.25 전쟁 당시의 대한민국 국군 소속 M24 채피 |
더글러스 맥아더 사령관은 이를 부분적으로 수용한다. 야포를 제외한 중화기로 무장한 5만 명 규모의 대한민국 국군 창설을 미 합동참모본부에 다시 건의한다. 1948년 3월 10월, 합동참모본부는 M24 채피 전차를 대한민국 국군에게 지급하라는 결정을 내린다.
그러나 미군사고문단장 로버츠 장군이 한국의 지형에는 기갑병기가 무용지물이라고 보고하면서[6] 최종적으로 지원이 취소되었다. 하지만 1950년 6.25 전쟁이 발발하면서 본격적인 전장 데뷔가 시작되었다.
낙동강 전선에서 촬영된 미 육군 제24보병사단 소속 M24 채피[7] |
물론 초반의 절망적인 교환비는 채피의 성능문제라 보긴 어렵다. 전쟁 초 대한민국 국군과 주일미군의 상태가 하나같이 개판 오분전이라 훈련, 보급, 전략 전술 오류가 심각했으며, 경전차와 중형전차의 운용 차이도 이해하지 못하는 등의 실책을 범했기 때문이다.[8][9]
어찌됐든 상황이 이렇다보니 한반도에 본격적인 전차들이 대량으로 투입되자 채피는 후방에서 2선급 임무를 담당하거나 정찰용으로 사용되거나 혹은 청소년을 대상으로 모집한 소년전차병의 훈련용 전차로 사용되었다.
휴전 협정 후에는 대한민국 국군이 사용하던 채피 전량이 회수되어 대만에게 넘겨져 사용되었다.
부산 교두보 전투 당시의 미 육군 소속 M19 더스터 |
어찌나 대활약하였는지 중공군은 더스터만 보면 이를 갈며 "이 악마같은 전차를 잡는 병사에게는 포상금을 주겠다!"라고 천명하기까지 했고, 타 전차 진지는 적들이 몰려오지 않는데 반하여 더스터가 맡았던 진지는 중공군들이 이를 악물고 달려들어 전차병들이 권총까지 들며 백병전을 치른 일화까지 존재한다.
3.2. 알제리 전쟁
알제리 전쟁 당시의 프랑스 원정 군단 소속 M24 채피 |
알제리 전쟁 당시의 프랑스 원정 군단 소속 AMX-13-M24 |
3.3. 인도차이나 전쟁
3.3.1.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
디엔비엔푸 전투 당시의 프랑스 극동 원정 군단 제1경기병연대 3중대 소속 M24 채피 |
한국전쟁이 휴전하자마자 한반도에 주둔하고 있던 라울 마그랭 베르느레 휘하 장병들까지 베트남으로 건너가 디엔비엔푸 전투에서 채피 10대를 180개 부품으로 분해한 상태로 받은 뒤[10] 현지에서 조립하여 배치했다. 이들은 밀려오는 월맹군의 인해전술에 대한 카운터로 투입되며 활약했다. 얼마나 쉬지 않고 싸웠는지 나중에는 주포가 망가질 정도였다.[11]
디엔비엔푸 전투 당시 참전한 10대의 채피들의 명단과 행적은 다음과 같다.
차량 호칭 | 말로 |
콘티 | 4월 5일 "위게트 6" 작전 도중 대전차지뢰로 인해 반파. 이후 회수되어 활주로 방어에 사용됨. |
뮬하우스 | 3월 31일 "엘리앙 2세" 지역에서 "스몰렌스크", "에틀링겐", "노이마흐", "바젤"과 작전 수행 중 대전차로켓 1발 피격, 그러나 끝까지 전투에서 분전. |
바젤 | 3월 31일 "뮬하우스", "스몰렌스크", "에틀링겐", "노이마흐"와 작전 수행 중 대전차로켓 1발 피격, 완전 전소 및 격파됨. |
듀몽 | 4월 29일 작전 도중 105mm 포탄 1발 피격. 전차병 3명 전사, 이후 회수되어 수리됨. |
스몰렌스크 | 3월 31일 "뮬하우스", "바젤", "에틀링겐", "노이마흐"와 같이 작전 수행 중 57mm 무반동포 2발 피격. 변속기 고장으로 후방으로 이송됨. |
포젠 | 3월 24일 "이사벨" 방면 도로 확보 작전 중 대전차로켓 1발 포탑에 피격당함. 그러나 끝까지 작전을 수행함. |
에틀링겐 | 3월 31일 "뮬하우스", "바젤", "스몰렌스크", "노이마흐"와 작전 중 57mm 무반동총에 6발 피격당했으나 무사귀환, 이후 4월 5일 대전차로켓에 2발 피격당하였으나 역시 무사귀환, 4월 15일 대전차로켓에 의해 포탑에 피격당해 승무원 2명이 전사했으나 자력 주행으로 귀환. 이후 종전까지 사용됨. |
아우어슈타트 | 피격 기록 없이 종전까지 사용됨. |
노이마흐 | 3월 31일 "반 호 라이"에서 대전차로켓에 1발 포탑에 피격당했으나 종전까지 운용 |
라티본 | 4월 29일 "이사벨"에서 105mm 포탄 2발 피격. 그러나 큰 피해 없이 수리 후 종전까지 사용됨. |
그러나 전황이 불리해지면서 프랑스군은 패퇴하였고, 생존한 채피들은 전부 승무원들에 의하여 격파되었는데, 월맹군은 이 차량들을 수거하여 복원 작업을 진행하였고, 총 3량을 복원하는데 성공하여 하노이 전승 퍼레이드에 등장시켰다. 현재도 디엔비엔푸에 가면 이때 노획된 채피 몇대가 전시되어 있다.
3.3.2. 1955년 사이공 전투
1955년 사이공 전투 당시의 남베트남 육군 소속 M24 채피 |
3.3.3. 베트남 전쟁
베트남 전쟁 당시 포격 중인 남베트남 육군 소속 M24 채피 |
3.3.4. 1963년 남베트남 쿠데타
자롱 궁전에 포격 중인 남베트남 육군 소속 M24 채피 |
3.4. 그리스 군사위원회 쿠데타
그리스 군사위원회 쿠데타 당시의 그리스 육군 소속 M24 채피와 M8 LAC |
3.5. 4.21 쿠데타
4.21 쿠데타 당시 동원된 그리스 육군 소속 M24 채피와 M8 LAC, M113 |
3.6. 이프니 전쟁
이프니 전쟁 당시의 스페인 왕립 육군 소속 M24 채피 |
3.7. 인도-파키스탄 전쟁
3.7.1. 제2차 인도-파키스탄 전쟁
제2차 인도-파키스탄 전쟁 당시 격파된 파키스탄 육군 소속 M24 |
3.7.2. 방글라데시 독립전쟁
격파된 파키스탄 육군 소속 M24 채피를 살펴보는 인도군 |
이 중 특기할 전과로는 파키스탄 육군 제29기병연대 산하 1중대의 M24와 18펀자브대대의 보병중대가 인도군을 기습했는데, 이 때 파키스탄군의 M24는 인도 육군 제45기병연대의 PT-76 6대 중 5대를 무손실로 격파하는 활약을 하였다.
하지만 일부 차량의 경우 별다른 성과를 보이지 못하거나, 혹은 인도군이나 방글라데시 독립군에게 노획되었다.
3.7.2.1. 가리푸르 전투
가리푸르 전투 당시의 파키스탄 육군 소속 M24 채피 |
3.8. 이란-이라크 전쟁
호람샤르 공방전 당시의 이란 육군 소속 M24 채피 |
[1] 1945년 2월 초에 촬영된 사진이다.[2] 반대로 독일군 쪽도 진짜 판터를 개조하여 M10 GMC와 비슷하게 만들어 미군을 속이려고 했으나 포로로 잡힌 소대원 한명이 전부 불어버리는 바람에 이를 미리 알고 있던 미군에 의하여 격파당했다.[3] 실제로 이 곳의 도로명이 88번 도로가 아니라, 88mm 포가 무지막지하게 배치되어 있다고 해서 88번 도로라는 명칭이 붙은 것이다.[4] Combat Command B, 이하 CCB로 지칭.[5] 1945년에 촬영된 사진이다.[6] 당시 대한민국 국군의 능력으론 공여해주었던 M2 및 M3 하프트랙과 차륜형인 M8 그레이하운드에 대한 유지보수 상태가 처참했던 해당 보고가 어느 정도 작용했었을 수도 있다. 또한 로버츠 준장은 대한민국 국군의 전투력 향상에 마냥 관심 없는 사람은 아니라, 당시 대한민국 국군의 취약점인 전투지원 분야에 대한 강화 및 주일미군에서 퇴역시킬 전투기 50여대를 받아내려는 등의 노력을 했었다. 다만 대한민국 몫으로 할양된 원조예산이 부족했던 점과 당시 머릿수 확대에 혈안이었던 대한민국 국군의 반발로 결과적으론 큰 실효를 못 거두었다.[7] 1950년 8월 17일에 촬영된 사진이다.[8] 이게 어느 정도로 심했냐먼 고폭탄을 철갑탄 대신 전차전에 썼다고....[9] 사실 알았어도 불가피했던 것이 개전 당시 주일미군이 보유한 전차라곤 채피를 제외한 셔먼과 퍼싱은 가동률이 %가 아니라 다섯 손가락 안에 들어올 정도로 상태가 안 좋았다. 그 얼마 없는 전차들도 현지 설비로 보수한 부속품이 견디지 못해 부산항에 하역한 직후 얼마 안 가서 망가졌다.[10] 디엔비엔푸 진지 특성상 수송기로 운반해야 했는데, 이것도 좀 무게가 아슬아슬해서 해당 수송기에서 불필요한 부품을 좀 뜯고 나서야 겨우 운반할 수 있었다.[11] 적은 끝이 없는데 주포탄 적재량이 48발뿐이라서 전차 안팎을 가리지 않고 탄약을 채워넣어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