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5-03-20 10:19:19

경은군

이재성(1860)에서 넘어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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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실제 혈통이 아닌 족보를 기준으로 작성되었으며, 실선은 친자, 점선은 양자 관계임
※ 왕족 / 황족으로서 경술국치 이전에 정식 봉호를 받은 사람만 기재함
※ 은신군은 영조의 동생 연령군의 후사를 이었으나, 당시에는 장조 의황제의 아들로 간주하여 그 후손들에게 황족 작호를 수여함
※ † 기호는 사후 추증된 인물이며, 흥선헌의대원왕을 제외하면 대한제국 수립 이전 사망한 왕족임
※ 영친왕은 이은의 황태자 책봉과 더불어 폐기된 작호로, 황태자 자격으로 받은 '의민황태자'라는 시호가 있으나, 전주 이씨 대동종약원에서 지은 사시(私諡)이므로 표기하지 않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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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장종의 현손
대한제국 장조의 현손
경은군 | 景恩君[A]
봉호 <colbgcolor=#fff,#191919>경은도정(景恩都正)
→ 경은군(景恩君)[A]
이름 이재성(李載星)
생부 익평군 이희
적모 덕성군부인 덕수 이씨
생모 미상
부인 군부인 안동 권씨
군부인 여흥 이씨
자녀 1남
출생 1860년 12월 21일[B]
사망 미상[4]

1. 개요2. 생애
2.1. 초반과 가계2.2. 관직 생활2.3. 말년
3. 여담4. 가족과 후손

[clearfix]

1. 개요

대한제국의 황족. 사도세자의 3남인 은언군의 증손자였으며, 상계군의 양손자이자,[5] 익평군서자였다.

2. 생애

2.1. 초반과 가계

1860년(철종 11년) 12월 21일[B], 익평군과 그의 첩[7] 사이에서 태어났다. 4세(만 2세) 때인 1863년(철종 14년) 9월에 아버지 익평군을 잃었다. 실제 핏줄로 보면 그가 익평군의 가계(家係)를 이어야 했다. 그러나 서자인 데다가 당시 아주 어렸기 때문에 조선 제14대 왕 선조의 아버지 덕흥대원군의 12대손인 이덕주[8]가 익평군의 적장자로 입적해서 가문을 이었다. 왕족의 경우 4대까지는 서얼에서 빠지지만(대표적으로 철종), 이재성의 경우는 영조5대손이라 왕족 신분에서 벗어난 관계로 서얼로 판정되었다.[9]

익평군 사후 이재성은 영평군 이경응과 함께 효종의 혈통을 물려받은 단 둘뿐인 남성 왕손이었다.[10] 이 두 사람을 제외한 나머지는 전부 다 조선 중기 덕흥대원군, 선조, 인조 대에서 갈라진 사람들이 입양온 것이었다.
파일:조선후기 왕실 가계도(혈통).png
<colbgcolor=#29176e>양자 관계를 배제하고, 혈통 계보만 그린 조선 후기의 왕실 가계도. 연한 노란색 바탕 인물은 친아들 없이 사망한 사람들이다.
효종의 아들 현종은 외아들이었으며, 그의 아들 숙종도 외아들이었다. 숙종에게는 장성한 세 아들이 있었지만, 경종연령군은 후손을 남기지 못했고, 오직 영조만이 아들 둘을 두었다.

영조의 장남 효장세자는 9살에 요절했고, 차남 사도세자는 아들 5명을 두었다. 그러나, 장남 의소세자가 3살에 요절했고, 차남 정조는 2남을 두었지만, 그의 대는 헌종을 끝으로 끊기고 말았다. 사도세자의 4남 은신군과 5남 은전군은 자녀를 두지 못했으며, 오직 3남 은언군만이 7남을 두었다.

하지만, 은언군의 아들 중 4명은 후손을 남기지 못했고, 상계군, 풍계군, 전계대원군만이 아들을 두었다. 상계군의 아들은 서자인 데다 요절했으며, 전계대원군은 회평군, 영평군, 철종 세 아들을 두었지만, 모두 아들을 낳지 못했거나, 일찍 사망했다. 이들 중, 철종이 승하한 후에는 영평군만이 생존했다.

한편, 풍계군은 독자 익평군을 두었고, 익평군 역시 외아들 이재성을 남겼다.

결국. 철종 사후 효종의 남계 후손으로는 영평군과 이재성 단 두 명만이 남게 되었다.

철종이 승하한 지 몇 달 뒤인 1863년 12월, 익평군도 세상을 떠났다. 핏줄과 항렬로만 보면, 이재성이 왕위 계승 서열에서 가장 높은 왕족이었다.[11] 그러나 이재성은 만 3세의 어린 나이였고, 서출이라는 한계가 있었으며, 흥선군 이하응과 신정왕후 조씨 간의 정치적 커넥션 등 여러 요인으로 인해 왕위에 오르지 못했다.

2.2. 관직 생활

음서로 관직 생활을 시작했다. 20살 때인 1879년(고종 16년) 9월 승문원[12] 이문학관에 임명받았다.

그가 맡은 벼슬은 주로 왕실 관련 직책이었다. 국상 때마다[13] 종척집사[14]를 지냈고, 종정원(宗正院)[15] 주사를 역임했으며, 왕실 족보인 《선원보략》을 수정할 때 그것을 관리 및 감독했다. 또한 향관(享官)[16]과 사직서령(社稷署令)[17]을 역임했고, 시종원(侍從院)[18] 시어(侍御)[19], 전선사(典膳司)[20] 주사, 비서원승[21] 등 국왕을 최측근에서 모시는 직책을 맡았다.

1897년(광무 원년) 고종이 러시아공사관에서 환궁한 후, 종실 및 여러 대신들과 함께 고종에게 칭제건원할 것을 건의했다. 그리고 같은 해, 독립협회에 종친 자격으로 찬조금 40전을 후원했다.[22]

대한제국 수립 직후에는 이천군수, 원구단 황궁우 역소 별감, 내부 시찰관 등을 지냈다. 후원해주던 독립협회가 해산당한 후에는 담배 제조 공장인 연초제조주식회사(煙草製造株式會社)를 세워서 경영했다.[23]

1899년(광무 3년) 말에 고조부인 사도세자가 장종대왕을 거쳐 장조의황제로 추존받았다. 이에 임금의 4대손은 종친으로 대우한다는 예법에 따라 '경은도정(景恩都正)' 작호를 받았고, 1900년(광무 4년) '경은군(景恩君)'으로 승격했다.

경은군으로 승격할 무렵, 경운궁(덕수궁) 담장 확장 공사를 마무리한 공적으로 품계가 종2품으로 올라갔다.[24] 같은 해 2월 13일 회양군 공립 소학교의 교사가 되었으나 무슨 일이 있었는지[25] 해고를 당하고, 경은군의 작위 또한 박탈당했다. 1902년(광무 6년)에 사면을 받았고, 1903년(광무 7년) 8월에 궁내부 특진관(宮內府特進官)[26][27]으로 임명받으면서 다시 경은군(景恩君)에 봉해졌다.

1906년(광무 10년) 3월 2일 자 《대한매일신보》에서는 동구릉 수릉관으로 재직 중이던 경은군 이재성의 행적을 비판하는 기사를 실었다.
능관의 부도덕한 짓
본사에서 전해 들은 소식에 따르면, 최근 동구릉의 능관들이 법도를 어기고 기강을 문란하게 하며 직무를 모독하는 행위를 일삼고 있다고 한다. 특히 지극히 엄숙하고 존엄해야 할 재실[28] 가까이에 색주가를 무분별하게 설치하고, 밤낮으로 술에 빠져 향락을 즐기다가 그 사건이 발각되었다. 이에 따라 조만간 이들을 관직에서 파면하고 엄중하게 조사할 예정이라고 한다.

그런데 이 색주가가 설치된 근본적인 이유는 '경은군 이재성'이 주도하여 지휘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봉군된 사람이, 그리고 왕릉을 지키는 자가 이런 비열하고 불경스러운 행위를 감행하여 조정의 권위와 위엄을 손상시키고 남김없이 파괴했다. 능을 지키는 자리에서 경건함과 신중함을 지키지 않고 수많은 폐단을 초래한 것을 보면, 이들의 방탕한 행태를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고 한다.[29]
〈陵官悖擧〉, 《대한매일신보》, 1906년 3월 2일.
그해 7월 16일에는 황제와 가까운 종친이라는 이유로 고종으로부터 훈 1등 태극장을 하사받았다.# 이듬해인 1907년(광무 11년) 1월에는 《국조어첩》[30]의 서사관이 되었다.#

순종이 즉위한 후인 1907년(융희 원년) 9월 30일에는, 예장소의 광중명정 서사관으로 참여한 공로로 숙마 1필을 하사받았다.# 그러나 그해 10월 14일, 항일 의병과 내통했다는 혐의를 받았다. 이에 순종은 "경은군 이재성이 남몰래 행동하면서 나쁜 무리와 호응한다고 하니, 직명(職名)을 우선 환수하도록 하라."라고 하여, 직첩을 회수당했다.
경은군 이재성씨는 종적이 수상하고, 의병으로 간섭했다 하여 그 직첩을 우선 거두어 들이라고 조칙을 내리셨더라.[31]
〈직명을거두다〉, 《대한매일신보》, 1907년 10월 16일.
경은군(景恩君) 이재성(李載星)이 행적이 은밀하여 비적과 연계되었다고 하니, 직명을 우선 회수하라고 하셨더라.[32]
〈職名還收〉, 《황성신문》, 1907년 10월 16일.
일제강점기인 1932년에 이왕직에서 발간한 《선원계보기략》을 보면, 단지 이름 '재성(載星)'으로만 적혔으며, '경은군의 칭호를 거두고, 작위를 환수했다(收景恩君還收爵).'라는 부연설명이 있다. 이를 보아 나라가 멸망하는 그날까지 직첩을 돌려받지 못한 듯 하다.[33]

2.3. 말년

1910년(융희 4년) 3월에 실종되었다.
가는 곳이 어디인가
경은군 이재성씨는 요새 무슨 사건 때문인지 거처를 알지 못한다는데 경시청에서 그 종적을 샅샅이 찾는다는 말이 있다더라.[34]
〈가는데가어디여〉, 《대한매일신보》, 1910년 3월 23일.
언제 죽었는지, 무덤이 어디에 있는지도 모른다. 첫 번째 부인이었던 안동 권씨의 묘가 서울 왕십리에 있었지만, 그마저도 실전되었다.

3. 여담

  • 1898년(광무 2년), 이천군 군수로 재직하던 중, 경기도 관찰부에 납부해야 할 세금 3천 원을 도둑맞았다. 이에 당시 경기도 관찰사였던 김영덕이 이천의 세금을 면제해 줄 것을 상소하기도 했다.
  • 이천 군수로 근무할 당시 백성들의 삶의 현장에 직접 나서 그들의 고충을 경청하고 이해하려 했다고 전해진다.
  • 승문원 이문학관으로 재직할 때는 항상 관복을 단정하게 차려입고, 정시 출근하는 등 근엄한 태도를 유지했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교체되었다고 한다. 또한 독립협회를 후원하고 의병들과도 교류했다. 이런 점을 종합해 보면, 좋은 의미든, 나쁜 의미든, 확실히 전형적인 범생이 스타일은 아니었다고 볼 수 있다. 틀에 얽매이지 않았으며, 한량 기질이 있으면서도 나설 때는 적극적으로 행동했다. 이러한 면모는 조카뻘인 의친왕 이강과도 비슷하다고 할 수 있다.
  • 1924년 일본의 임시 중국공사대리 오다 이키치(太田爲吉)가 외무대신 시데하라 기주로(幣原喜重郞)에게 제출한 보고서에 따르면, 의열단원 유우근이라는 사람이 1919-1920년경 경성 사람 이재성(李載星)이라는 자와 함께 베이징으로 갔으며, 이재성의 소개로 이회영과 알게 되었다고 하는데,[35] 이 이재성이 경은군과 동일인인지 아닌지는 알 수 없다. 일단 출신지와 이름의 한자는 같다.
  • 패러독스 사의 〈Hearts of Iron IV〉 대형 대체역사 모드 중 하나인 〈마지막 제국〉에서도 등장한다. 대한제국이 칭제건원하여 황제국이 된 후, 초대 황제 고조 태황제의 유일한 태자인 효헌태자 이정이 요절하면서 황위를 이을 인물을 물색하게 된다. 이 과정에서 흥선군 이하응의 아들인 완경군 이재황을 대신해 낙점되어 황태제가 되었다. 고조가 천붕한 후, 황태제로서 즉위하며, 연호를 '광무(光武)', 휘를 '천(𠑺)'으로 정했다. 사후, 묘호는 '고종(高宗)', 시호는 '강문장인무의열성광황제(康文莊仁武毅烈聖光皇帝)'[36]로 정해졌다.

4. 가족과 후손

부인은 두 명이었다. 첫 번째 부인은 안동 권씨로, 권재익(權在益)의 딸이고, 1살 연상이었다. 1859년(철종 10년) 11월 5일[37]에 태어나 1888년(고종 25년) 5월 25일[38]에 사망했다. 두 번째 부인은 여흥 이씨로, 이병로(李丙老)의 딸이고, 19살 연하였다. 1879년(고종 16년) 6월 18일[39]에 태어났으며, 사망 연도와 월일은 확인되지 않는다.[40]

자녀로는 1남을 두었으며, 아들의 이름은 이준용(李埈鎔)이다.[C][42] 그는 1879년(고종 16년) 10월 23일에 태어났으며, 10년간 가정교사에게 한문을 배운 후, 한성사범학교에 입학했다. 19세(1898년)에는 일본육군사관학교 포병과에 입학했고, 21세(1900년) 귀국하여 대한제국군의 핵심 전력인 시위대[43]에서 소위[44]로 임관했다. 1943년, 태평양 전쟁 말기 당시, 이준용의 자녀로는 장남 이해영(李海暎), 차남 이해청(李海晴), 3남 이해매(李海梅), 4남 이해룡(李海龍), 차녀 이경숙(李敬淑), 3녀 이혜숙(李惠淑)이 있었다.[C] 이들의 이름은 《선원속보》에 기록되지 않았으며, 경은군의 다른 후손에 대한 추가적인 자료도 확인되지 않는다.

철종 사후, 효종의 생물학적 남계 후손 중 생존자는 영평군과 경은군 단 두 명뿐이었다. 영평군은 친아들을 두지 못했지만,[46] 경은군 이재성의 후손들은 손자 대까지 1943년에도 생존한 것이 확인된다. 이에 따라 효종의 직계 남계 후손이 현재까지 남아있을 가능성이 높으나, 후손들에 대한 구체적인 정보는 확인되지 않는다.
[A] 다만, 일부 자료를 보면, '경언군(景彦君)'으로 적혀있다. 단순한 오타인지, 비공식적으로도 이렇게 불렸던 것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오타라고 보기에는 관련 기사가 많고 각 기사의 한자 표기도 동일하지만, 그렇다고 '경언군'이라는 명칭이 널리 사용되었다고 보기에는 기사 수가 너무 적다. 현재로서는 정확한 이유를 알 수 없다.(출처: 〈관 위에 상 자를 쓰는 서사관 등의 별단〉, 《승정원일기》 3208책(탈초본 141책), 고종 44년 5월 4일 갑오 12/13 기사 대한 광무(光武) 11년, 〈禮葬所堂上兼任掌禮院掌禮法部協辦臣金珏鉉謹奏〉, 《官報》第3797號, 1907년(광무 11) 6월 20일., 京城東警察署長. 〈舊韓國國庫金 埋藏金塊發掘計劃의 件〉. 《思想에 關한 情報》(警察署長). 京城東警高秘 第777號, 1943년 3월 10일.)[A] [B] 음력 11월 10일.[4] 1910년까지는 생존 확인.[5] 친조부는 상계군의 동생이었던 풍계군이었다.[B] [7] 성씨와 이름은 알 수 없다.[8] 경은군 이재성과는 생가로 24촌 형제 뻘이다. 1868년(고종 5년)에 흥선대원군이 내린 〈종친 항렬자 통일령〉을 따라 이재덕(李載悳)으로 개명했다.[9] 1899년(광무 3년)에 사도세자가 장조로 추존받은 후에야 장조의 4대손 자격으로 비로소 정식 왕족이 되어, 작호를 받았다. 처음에는 경은도정이었다가 경은군으로 승격했다.[10] 여성 왕손으로는 영혜옹주 등이 있었다.[11] 철종과 가장 가까운 혈육은 그의 형제였던 영평군이었으나, 영평군은 철종보다 연장자였기 때문에 왕위를 계승할 수 없었다. 참고로 혈연상 철종과 고종은 17촌이었으나, 철종과 이재성은 불과 5촌에 불과했다. 이는 매우 큰 차이이며, 헌종과 이재성은 8촌 관계로 본래 왕실과 가까운 혈통이었다.[12] 조선시대에 외교 문서를 맡은 관청.[13] 신정왕후(1890년), 명성황후(1895년), 효정왕후(1904년), 순명효황후(1904년).[14] 조선시대 국상 때 가까운 왕실의 종친 및 인척에게 시키는 임시 벼슬.[15] 조선 말기 왕실 계보에 관한 업무를 맡아 보던 관청이었다.[16] 국가에서 실시하는 각 왕릉, 선원전 등의 제사를 맡아보는 관리.[17] 사직단과 그 주변의 청소를 관리하던 사직서(社稷署)의 벼슬이다.[18] 1895년의 관제개혁 때 왕실의 사무를 관장하는 궁내부 아래에 새로 소속된 관청.[19] 왕을 곁에서 보좌하는 직책을 말한다.[20] 고종 시기 궁중 내의 식사 공급 업무를 맡았던 관청이었다.[21] 비서원(秘書院)은 조선 말기에 왕명의 출납과 기록을 맡아보던 관아이다. 비서원승(秘書院丞)은 최고 책임자인 비서원경 바로 아랫 서열이었다.[22] 출처: 〈獨立協會 補助金 收入 人名〉, 《대조선독립협회회보》 12, 1897년 5월 15일.[23] 출처: 강만길, 1973, 〈대한제국 시기의 상공업문제〉, 《아세아연구》 16-2, 152~160쪽(주진오, 1993, 〈독립협회와 대한제국의 경제정책 비교 연구〉, 《國史館論叢》 41, 149쪽에서 재인용).[24] 고종은 러시아공사관에서 환궁한 이후 몇 년 동안 계속 경운궁 확장 공사를 했다.[25] 무슨 일인지는 알려지지 않았으며, 기록에도 없다.[26] 궁내부는 조선 말기 왕실 내부의 여러 업무를 총괄하던 관청으로, 특진관은 16명 이하의 인원으로 구성된 관리직이었다.[27] 칙임관(勅任官) 4등.[28] 齋室, 제사를 지내는 곳.[29] 원문: 陵官悖擧 - 本社傳書鳩에 所報ᄅᆞᆯ 據ᄒᆞᆫ즉 近日東九陵陵官들이 法紀를 弁髦ᄒᆞ며 事軆를 瀆셜ᄒᆞ야 莫重尊嚴ᄒᆞᆫ 齋室近側에 色酒家들 爛設ᄒᆞ고 晝夜沈湎娛樂하다가 該事件이 綻露돼야 將次免官重勘하리라ᄂᆞᆫᄃᆡ 該色酒家設置ᄒᆞᆫ 根由인즉 景恩君李載星氏가 主謀指揮ᄒᆞᆷ이라하니 以若封君也와 守陵官으로 此等鄙悖ᄒᆞᆫ 行爲ᄅᆞᆯ 敢行하야 朝家軆貌를 壞損無餘하니 凡於守陵之節에 不敬不愼하고 許多作獘ᄂᆞᆫ 推此可想이라하더라[30] 조선시대 왕족의 계보를 전주 이씨의 시조인 이한부터 조선 건국 이후까지 순서별로 엮어 기록한 책이었다.[31] 원문: 직명을 거두다 - 경은군 리ᄌᆡ셩씨ᄂᆞᆫ 죵젹이 슈상ᄒᆞ고 의병으로 간셥ᄒᆞ였다ᄒᆞ여 그 직텹을 위션 거두어 드리라고 죠칙이 ᄂᆞ리셧더라[32] 원문: 職名還收景恩君 李載星이 踪跡陰秘에 和應匪類云니 職名은 爲先還收라 셧더라[33] 출처: 李王職 編, 1932, 《璿源系譜紀略》, 816쪽.[34] 원문: 가ᄂᆞᆫᄃᆡ가 어디여 - 경은군 리ᄌᆡ셩씨ᄂᆞᆫ 근일에 무ᄉᆞᆷ ᄉᆞ건을 인ᄒᆞᆷ인지 거쳐를 알지못ᄒᆞᆫ다ᄂᆞᆫᄃᆡ 경시쳥에서 그죵젹을 형탐ᄒᆞᆫ다는 말이 잇다더라[35] 출처: 在支那 臨時代理公使 太田爲吉, 〈義烈團員柳友瑾ニ關スル件〉, 《不逞團關係雜件朝鮮人ノ部-別冊 義烈團行動 附 金元鳳 》 機密第316號 / 機密受第444號(外務大臣男爵 幣原喜重郞), 1924년 7월 1일(발신) / 7월 7일 (수신) [36] 줄여서 '광황제(光皇帝)'.[37] 음력 10월 11일.[38] 음력 4월 15일.[39] 음력 4월 29일.[40] 출처: 1900년(광무 3년) 제작 《선원속보 - 인조대왕자손록, 숙종대왕자손록, 장조의황제자손록 권7》[C] 출처:京城東警察署長. 〈舊韓國國庫金 埋藏金塊發掘計劃의 件〉. 《思想에 關한 情報》(警察署長). 京城東警高秘 第777號, 1943년 3월 10일.[42] 자료의 스캔본 101면 중 12면에 이름이 등장하며, 수기로 작성되어 해독에 따라 다르게 읽힐 수 있다. 한국사데이터베이스에서는 '李埈鎔(이준용)'으로 판독했다. '李堎鎔(이능용)' 또는 '李𫮊鎔(이원용)'으로도 해석될 수 있지만, '능(堎)'과 '원(𫮊)'은 둘 다 벽자이므로, '이준용'일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그럴 경우, 38년 간(1879-1917) 생존시기가 겹치는 흥선대원군의 장손 영선군의 본명과 한자까지 일치하는 동명이인이 된다는 점이 걸리게 된다. 일단, 본 문서에서는 한국사데이터베이스의 예를 따라 '이준용'으로 표기한다.[43] 황실과 황궁 경호를 담당하는 여단급 근위대였다. 1907년(광무 11년) 8월 1일 해산되었다. 시위대 1연대 1대대장이었던 박승환이 이에 반발해 자결했으며, 해산에 저항한 2개 대대는 일본군과 남대문 전투를 벌였으나 결국 진압되었다. 이후 많은 해산 군인들이 의병에 합류하면서 정미의병이 일어났다. 특히 남대문 전투와 진위대 봉기에서 탈출한 군인들이 가져온 소총과 탄약은, 주로 화승총을 사용하던 을사의병에 비해 상당한 전력적 우위를 제공했다.[44] 참위로 추정.[C] [46] 양자를 들였기에 족보상 후손은 존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