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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이즈미 준이치로/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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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젊은 시절3. 총리가 되다
3.1. 총리 시절3.2. 우정 민영화 추진 및 중의원 해산 이후3.3. 두 차례의 북일정상회담3.4. 고이즈미 극장
4. 퇴임 후: 정치적 제자와의 충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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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일본의 정치인, 제87~89대 내각총리대신을 역임한 고이즈미 준이치로의 생애를 정리한 문서.

2. 젊은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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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시절, 아버지 고이즈미 준야와 함께

1942년 1월 8일 가나가와현 요코스카시에서 출생하였다. 일본 총리들이 흔히 그렇듯 선거구를 3대째 세습해 온 정치 명문가의 3세 국회의원이다. 외조부 고이즈미 마타지로(小泉又次郎)는 야쿠자 조직 고이즈미구미(小泉組)의 보스로 시작하여 일본 제국 중의원에서 12선 의원과 하마구치 내각 - 제2차 와카쓰키 내각에서 체신대신을 지냈다.[1] 부친 고이즈미 준야는 9선 중의원과 1960년대 방위청 장관을 지냈다.

준야의 성씨는 본래 '사메지마(鮫島)'였으나 마타지로의 외동딸인 고이즈미 요시에(小泉芳江)와 결혼[2], 아내의 성씨를 따라 '고이즈미'로 성씨를 바꾸고 고이즈미 가문의 데릴사위가 되었다. 준야와 요시에는 장녀 미치코(道子), 차녀 다카코(隆子), 3녀 노부코(信子), 장남 준이치로, 차남 마사야(政也)를 낳았는데 2남 3녀 모두 '고이즈미' 성씨를 따랐다.

고이즈미는 가나가와 현립 요코스카 고등학교[3]를 거쳐 3수로 명문 게이오기주쿠대학 경제학부에 입학했으며 대학 졸업 후 유니버시티 칼리지 런던으로 유학을 갔다. 런던에서 공부하던 중 부친 준야가 급사하는 바람에 급히 귀국하여, 부친의 지역구를 물려받아(가나가와 2구) 총선에 출마하면서 27세의 나이로 정계에 입문했다.
파일:고이즈미 첫당선.jpg
1972년 중의원 총선거에서 첫 당선된 고이즈미

그러나 27세에 처음 출마한 선거인 1969년 중의원 선거에서 낙선했고[4], 훗날 일본 총리가 되는 자민당 우파의 거두 후쿠다 다케오 당시 중의원 의원의 비서관으로 들어가 정치를 배웠다. 2년 후인 29세에 중의원 초선에 당선되고 이후로 12선 중의원, 대장성 정무차관, 후생대신, 우정대신 등의 각료를 역임했다. 우정대신 때부터 민영화를 적극적으로 주장하기 시작해 결국 뜻을 이뤘다.

3. 총리가 되다

고이즈미는 1990년 가토 고이치, 야마사키 타쿠와 함께 YKK 연합을 결성하고부터 두각을 보이기 시작했다. YKK는 세사람의 영문이니셜로 이들은 다케시타파 지배에 반기를 들었다. YKK 연합은 고이즈미보다는 가토가 리더의 역할을 했기에, 사실상 이 연합의 막내격이었다.

1995년 9월에는 우정 민영화를 내걸고 게이오기주쿠대학 선배 하시모토 류타로와 총재직을 놓고 싸웠으나 대패하고, 1998년에는 오부치 게이조와의 대결[5]에서도 패하였다. 그러나 2000년 말 '가토의 난'이 실패하면서 고이즈미가 YKK연합의 대표로 나섰으며, 모리 요시로가 지지율이 10% 아래로 추락하면서 참의원 선거에서 패배가 확실시되었던 상황이었고, 2001년 4월 24일, 자민당 총재경선에서 예상 밖의 당원 돌풍을 일으키면서 95년 패했던 자민당 최대 파벌 헤이세이 연구회하시모토 류타로 후보를 압도적인 표차이로 누르고 총재도전 3수 만에 정상에 올랐다. 이후 2003년에 후지이 다카오 후보를 누르고 총재 자리를 연임했다. 그리고 2001년 10월 16일 방한했다.

한국의 인터넷에선 원래 노나카 히로무가 총리로 유력했으나 부라쿠민이어서 고이즈미가 이겼다는 식의 얘기가 퍼지기도 했는데, 사실이 아니다. 애초에 노나카 히로무는 총재 선거에 출마한 적도 없고, 하시모토 류타로후지이 다카오를 후보로 밀었으나 두 후보 모두 개혁을 내세운 고이즈미에게 패배한다.

3.1. 총리 시절

총리로 재임할 당시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내각으로는 사토 에이사쿠요시다 시게루 다음으로 오래 집권(1,980일)했고, 나카소네 야스히로 이후로 오래간만에 사임하지 않고 임기를 끝까지 마친 자유민주당 총재가 되었다.

총리가 된 후 잃어버린 10년을 극복하자며 성역없는 개혁이라는 슬로건하에 신자유주의적 개혁에 들어갔는데 공기업 민영화, 낙하산 철폐, 정경관 유착 해소, 조직 유연화 등이 대표적이다. 그 결과 당시 일본의 고질적인 문제점을 해소하는 데 상당히 기여했다는 평을 받기도 했지만, 반대로 복지 정책 축소와 이로 인한 양극화 심화 등 부작용에 따른 비판도 있었다.

국민의 정부 시절 방한하여 온전한 한일관계 유지에 노력하였으나, 참여정부 시절 야스쿠니 신사 참배와 함께 시마네현 의회가 다케시마의 날을 제정하면서 한국 네티즌들로부터 비난과 공격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다만 야스쿠니 신사 참배는 자기의 의지가 아닌 자민당내 우익들을 회유하기 위해 고이즈미가 쓴 수단이라고 보는 시각도 있다. 2000년 초반에 치도리가후치 전몰자 묘원을 국립묘지화하려는 움직임도 있었고, 그 외에 반원전 등을 주장하였으며, 2001년 10월 15일 일본 총리로선 최초로 서대문 형무소를 방문하여 참배하기도 했기 때문.# 물론 임기 내내 야스쿠니 신사 참배가 꾸준히 이어졌기 때문에 단순히 우익 회유 수단으로 참배를 했다고 보긴 좀 납득하기 어려운 점도 있다만. 아니면 회유를 넘어 친밀감을 심으려는 의도였을지도.

2001년 참의원 선거에서 9년 만에 자민당이 압승을 거둘때부터만 해도 탄탄대로를 걸을 거 같았지만, 2003년에 민주당자유당과의 합당을 통해 세력확장을 단행하면서 이를 저지하기 위해 온갖 어그로를 끌었지만 결국 자민당 의석이 줄어들어 단독과반 확보에 실패하고 오히려 민주당에게 비례대표 1당을 빼앗겼다. 그래도 연립여당인 공명당, 보수신당과 합해서 275석으로 절반을 넉넉하게 넘었기 때문에 정권을 안정적으로 연장할 수 있었지만 이듬해인 2004년 참의원 선거에선 민주당이 50석을 확보하며 1956년 참의원 선거에서의 기존 야당 최대였던 사회당 기록을 깨고, 자민당은 49석을 확보하는데 그치는 패배를 기록한다.

이렇게 두 차례 연속 선거에서 부진한 성적표를 보인 탓에 장기집권 여부는 불확실해졌고 당내에서도 점차 지지기반을 상실하고 있었으며 우정선거 직전에 치러진 2005년 도쿄도의회 선거에서도 자민당은 연립정당인 공명당과 합쳐서 과반을 획득했지만 어쨌든 의석수가 줄어드는 등 고이즈미 준이치로에게 썩 좋지 못한 상황은 계속되었다. 그러나 고이즈미는 이렇게 지지부진한 상황을 뒤엎기 위해 단박에 승부수를 던진다.

3.2. 우정 민영화 추진 및 중의원 해산 이후

2005년 8월 8일 중의원에서 통과된 우정 민영화 관련 법안이 민주당이 다수당인 참의원 본회의에서 부결되자 참의원 부결 30분 만에 내각에서 중의원 해산을 결정하고, 중의원 해산 결의 서명을 거부한 시마무라 요시노부 농림수산대신을 파면[6]한 뒤 본인이 '내각총리대신 겸 농림수산대신'으로서 겸직한 채 가결시키는 패기를 보인다.[7] 이른바 우정 해산. 이 건곤일척급의 도박으로 그동안 지지부진하던 정국을 한방에 뒤엎고 지지율이 급상승, 9월 11일 제44회 총선거에서 자민당은 296석을 획득하게 되는데 이는 1986년 중의원 선거 이래로 최다 의석수를 확보한 것이었다. 그리하여 연립여당 공명당의 31석까지 합해 총 327석으로 중의원 의석의 2/3를 넘어섰다. 이렇게되면서 참의원에서 부결된 법안을 중의원으로 다시 가져와 2/3 동의로 재의결시켜 법을 성립시킬 수 있어 야당의 비토를 신경쓸 필요가 없게 됐다.

이후 자민당 총재의 임기가 만료됨에 따라 2006년 9월 20일 일본의 아베 신조 내각관방장관이 자민당 제21대 총재로 선출되면서 내각총사퇴 후 내각총리대신직에서 물러났다. 사임하지 않고 임기를 마친 몇 안 되는 총리였다. 이후에는 스가 요시히데가 총재 임기 만료 후 재선을 포기함에 따라 만기 퇴임했다.

정책적인 면에서는 지금도 제법 회자되는데, 일본 역사에서 손꼽히는 리버럴리스트였다는 평을 받기도 한다. 고이즈미의 기본 기조는 작은 정부였으며, 이는 일본의 전통적인 정치성향과 정면으로 대치되는 경우가 많았기에, 야당 뿐만 아니라 여당에서도 호의적이지 않은 시선이 많았다. 모리 요시로 총리가 대표적. 그러나 신자유주의 성향의 인사들과 친미 기조 아래 '북일 정상회담'[8] 등 외교정책에서의 지지층도 있었기에, 이들을 결집시켜서 우정 민영화나 여계 혈통 천황 인정 등 일본의 내부적인 개혁 안건을 추진하기도 했다. 일본 같은 폐쇄적인 나라에서 고이즈미 같은 (일본 기준) 개혁 소장파 성향 인물이 총리직을 오래 할 수 있었던 데에는 나름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정책의 결과, 복지 혜택이 축소되고 많은 분야에서 불평등성이 심화되었다는 평가 역시 나온다. 특히 고이즈미 임기 만료 후, 이러한 폐단이 보도되기 시작했고 이 때문에 고이즈미를 비판하는 목소리도 있다.

관광 부문으로 2003년 1월에 2010년까지 관광객 1,000만 유치라는 목표 아래 Visit Japan 슬로건을 내세웠다. 이는 제2차 아베 신조 내각에 실현되었으며, 일본이 관광대국으로 가는 원동력을 만들었다.

3.3. 두 차례의 북일정상회담

북핵문제로 인한 고립을 돌파하기 위해서 2000년대 이후 개혁개방적 면모를 한창 보이던 김정일은 2000년 6월, 한국김대중 대통령과 남북정상회담을 가졌다. 같은 해 9월에 미국의 올브라이트 국무장관과 10월에 러시아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과 각각 회담을 마쳤다. 하지만 조지 W. 부시가 예상을 깨고 앨 고어를 꺾고 당선 되면서 상황은 뒤집힌다.

그러나 북한의 평화공세는 계속되었고, 결국 2002년 9월 전격적으로 평양을 방문한 고이즈미와 일북 수교를 위한 회담을 가졌다. 당시 김정일은 고이즈미에게 "남한에 8억 달러 줬으니 우리에게도 100억 달러는 줘야 한다"면서 속마음을 넌지시 드러내기도 했다. 당시 일본과의 실무협상을 맡은 사람은 'X'라 불린 정체불명의 인물이었는데 일본에서 그의 정체를 간파하기 위해 갖은 노력을 다했지만 간단한 신상조차 캐낼 수 없었다. 다만 일본 측에서 성의를 보이려면 스파이 혐의 누명을 쓰고 체포된 일본 기자를 석방해달라고 요청하자 정말로 석방해주는 등 막강한 힘이 있던 인물임은 분명한데 이후 북한 인질외교의 대가였던 보위부 부부장 류경이라는 것으로 의견이 모아지지만 결정적 증거는 없다. 만약 류경이 맞다면 그는 2010년 이명박과의 남북정상회담 성사 실패 이후 처참한 죽임을 당했다.

그런데 북한의 납북 일본인 문제가 불거지면서 일본 사회의 반북 감정이 심화되기 시작한다.[9] 요코타 메구미의 부모를 비롯한 납북자의 가족들이 연일 시위하면서 납북 일본인 귀국을 촉구했고, 이에 고이즈미는 "납북 일본인의 존재를 밝히고 사죄하라"는 요구를 하기에 이른다. 이에 당혹한 김정일은 "오후에 대답하겠다"고 자리를 피한 다음, 결정을 내렸는지 그날 오후 일본인 납북 문제를 시인하고 사과한다. 경제적 지원이 절실했던 김정일이 한발 물러선 것이다. 납북자 중에서도 제일 유명한 요코타 메구미의 경우에는 죽었다고 둘러대면서 실체가 불분명한 유골만 돌려주었지만 말이다. 그래도 소가 히토미를 비롯해서 그때까지 살아있는 일본인들의 귀국을 성사시키는 등 업적은 분명히 있었으며, 납북자 가족들이 그의 귀국 때 항의시위를 하자 특유의 승부심을 발휘하여 자신에게 항의하는 유족회 사람들을 마주하여 한마디의 변명도 하지 않고 묵묵이 그들의 비난을 들었고, 이에 일본 민심이 유족회를 비난하고 고이즈미를 옹호하면서 지지율 급등의 호재로 작용하기도 하였다.

허나 북미 관계가 개선되지 못하는 상황에서 고이즈미 내각이 북한과 수교를 서둘러봤자 얻을 것보단 잃을 것이 더 많아보였고, 이런 모험을 할 수 없던 고이즈미에 의해 결국 북일수교는 무산되고 만다. 당연히 북한은 제2의 경술국치, 제2의 을사조약 운운하면서 길길이 날뛰게 된다. 이후 지금까지도 북한과 일본은 납북자 문제를 가지고 지리한 외교적 공방을 벌이면서 관계 개선은 올스톱된 상태이다. 한편, 고이즈미도 일본에선 납북자들을 데려오지 못했다고 비난에 시달려야 했다. 특히 북한 칠보산 송이를 받아온 일은 일본인들에게 조롱거리가 되기도 했다.

결국 북한과의 관계 개선 시도는 본전도 못 건졌고, 이 납치 문제는 현재까지도 북일관계의 가장 큰 걸림돌이 되고 있다.
=== 주변국들과의 마찰과 고이즈미 담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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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도리가후치 전몰자 묘원을 국립 추도시설로 쓰는 방안을 구상하기도 했던 고이즈미였지만 2001년부터 2006년까지 매년 야스쿠니 신사를 참배하였다. 이에 대해 고이즈미는 2001년 8월 13일 첫번째 참배 이후, "내가 신사에 구애를 받거나 집착하는 것은 아니며 단지 수상 고이즈미 준이치로라는 자가 온 정성을 다해 신사에 참배를 했을 뿐이다. 주변 나라들의 반발과 입장도 고려해서 부득이 오늘(2001년 8월 13일) 참배한 것이다."라는 발언을 하기도 했다. 즉, 그래도 주변국 신경 써서 8월 15일에 안 했다는 소리. 중국은 여기에 대단히 화가 났는지 2차 참배 이후로 고이즈미의 방중을 거부하기도 했다.[10]

일본의 역사 교과서 왜곡 논란과 관련해서도 한국의 재수정 요구에 '일본 역사교과서는 별 문제가 없다'는 부정적 입장을 밝히는 한편, 자위대의 집단 자위권 용인 등 보수 우경화 정책을 시도하기도 했다. 덕분에 일본 우익층에선 호감을 샀지만, 반대로 일본내 양심 세력이나 주변국들에겐 제대로 어그로를 끌었다. 일본내에선 그래도 소장파 소리 듣던 고이즈미에 대한 환상이 깨지던 순간. 이에 대해 자민당 내부의 강경우익을 비롯한 고이즈미 반발 세력 약화와 선거에서의 보수층 결집을 위해 자신의 정치적 이념과는 약간 다른 방법을 택한 것에 가까웠던 것 아닐까 하는 의견도 있다.

그러나 패전 60주년이었던 2005년 8월 15일, 고이즈미는 기존 무라야마 담화를 그대로 답습, 계승하는 고이즈미 담화를 발표했다.[11]
일본국은 일찍이 식민지 지배와 침략행위로 인해 많은 나라들, 특히 아시아 제국의 국민들에게 막대한 손해와 고통을 주었습니다. 이러한 역사적 사실을 겸허하게 받아 들여 재차 통절한 반성과 진심으로 사죄의 뜻을 표명함과 동시에 지나간 전쟁으로 인한 내외의 모든 희생자에게 삼가 애도의 뜻을 표합니다.
담화 전문

그리고 앞선 그해 정월에도 야스쿠니 신사 참배를 미루는 등의 모습을 보였다. 이는 내각내 반대 탓도 있었고, 여론도 좋지 않았으며, 고노 요헤이 중의원 의장 등도 반대했기 때문. 그렇게 2005년엔 안가는가...했는데, 결국 2달 만인 10월 17일 개인 자격으로 신사참배를 강행하였다. 우정 해산 이후 승리에 따른 자신감으로 풀이되었다. 덕분에 같은 해 12월에는 국제무대에서 노무현 대통령과 야스쿠니 신사 참배 관련해 설전을 벌이기도 했다.#회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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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차 세계 대전 패전국인 독일의 경우) 국가의 이름으로 전쟁에 나가 이웃에 고통을 준 사람들에 대해 일체의 추모시설을 만들지 않았다. 독일은 일부 영토까지 포기할 정도로 역사인식을 철저히 청산했다. (역대 공동체 발전은) 과거 질서에 대한 철저한 반성에 기초해야 한다."
"한 명의 국민, 총리로서 자국 시설에서 평화를 빌고 전몰자에게 애도의 뜻을 표하는 것을 비판하는 마음이 이해되지 않는다. 전쟁을 미화하거나 정당화할 생각은 전혀 없다."
2005년 12월 14일, 대통령 노무현 - 총리 고이즈미 설전 내용.
아예 임기 마지막 해인 2006년에는 쐐기를 박았다.
일국의 수상이 내 나라에 있는 신성한 신사에서 수상 명의로 참배하는 것이 뭐가 그리 거슬리거나 잘못되었는지 나는 도무지 알 수가 없다. 고로 반대 세력들이 제발 좀 내정간섭이나 신사참배 가지고 뭐라고 안 했으면 좋겠다.
- 2006년 8월 15일 야스쿠니 신사 공식 참배 이후

3.4. 고이즈미 극장

고이즈미의 정치 방식은 일본의 일반적인 정치 방식과 궤를 달리한다. 자민당 일당우위제로 인해 일본 정치에선 파벌과 이익단체 등 배후의 움직임이 중요해졌다. 심지어 국민의 의견이나 정치계 표면의 움직임 보다도 중요한 경우도 곧잘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소위 '고이즈미 극장'이라는 방식을 쓰는 고이즈미는 일본 정치계에 큰 충격을 안겨주었다.

고이즈미의 정치적 접근법은 국민들에게 하나의 극장과도 같은 극적인 현실을 보여주고 그 무대를 통해서 주도권을 확보하는게 특징이다. 상대가 대응한다고 해도 그가 아니라 국민을 설득함으로서 상대의 대응을 무효화하고, 국민의 지지를 등에 업고 목적을 달성하는 식이다.

이러한 극장정치의 클라이맥스는 바로 우정민영화였다. 우정국(한국의 우체국) 개혁은 우정국이란 이익집단과 그에 편승한 일본 정치의 파벌 때문에 이루어지기 힘들다. 일반적인 정치 방식으로는 지지부진하게 협상이 이어지다가 부결되는 것으로 끝이다. 지루하고 재미없지만 정치는 협치와 협상의 결과물이기에 어쩔 수 없다는 것이 기존의 대체적인 생각이었다.

하지만 고이즈미는 협상과 정치력의 부족을 인정하는 대신, 극장의 막을 여는 것으로 대응했다. 즉각적으로 국회를 해산하고, 이에 반대하는 장관을 그 자리에서 파면했다. 국회 해산 이유를 우정민영화로 확고하게 선언함으로서 국민들에게 개혁을 각인시켰다. 민영화에 대해서 구구절절하게 설명하는 대신 '민간에서도 할 수 있는 우정서비스를 굳이 공무원만 해야 하는가', '단시간 근무자를 포함해 38만명이나 되는 사람들을 계속 국가공무원으로 유지해야 하는가' 등의 단순 명쾌하고 이해하기 쉬운 언어로 계속 어필했다.

중의원 해산 후 당내에서 반기를 드는 의원들을 공천에서 학살하고, 이에 반발하며 독립한 중진의원들과 야당이 고이즈미를 비난하면 고이즈미는 그들을 '내각의 방침에 반대하는 세력은 모두 저항세력이다', '나의 신념이다. (내가) 죽어도 좋다'라는 발언으로 강하게 받아쳤다. 언론들은 파격적인 상황에 연달아 특종과 취재를 보도했다.

이렇게 극적이고 재미난 무대가 열렸으니 국민들은 개혁의 장단점, 고려해야할 점 같은 머리 아프고 복잡한 주장들은 모조리 스킵하고 '주인공인 고이즈미'와, '주인공의 대적자'들이 출연한 고이즈미 극장을 흥미롭게 즐기기만 하면 되었고 결국 주인공의 편을 들어주면서 자민당 단독과반, 연립 여당 2/3의석 장악이라는 피날레로 막을 내렸다.

이러한 고이즈미 극장은 선과 악, 주인공과 주인공의 적, 개혁을 부르짖는 신예 정치인과 구시대의 망령, 국민의 지지를 받는 총리와 개혁의 발목을 잡는 자들로 고이즈미와 다른 이들을 나누었다.[12] 고이즈미 극장을 통해서 국민의 지지를 얻은 고이즈미를 일본 정치 구조에서 이길 수 없었다. 국민만 보면 이긴다는 걸 알고 있던 고이즈미와, 국민이 아니라 파벌을 보던 일본 정치인들의 차이는 역력했다. 고이즈미는 반대파를 설득하는게 아니라 국민을 설득하면 되는 거였고, 고이즈미 수준으로 국민을 설득할 수 있는 정치인은 드물었다. 고이즈미 극장 안에서 이길 수 있는 정치인은 더 드물었다. 고이즈미 극장은 일본 정치인들에게 저항불가능한 재해에 가까울 정도로 충격과 패배를 안겨주었다. 자민당의 파벌들과 고참 정치인들도 우정민영화로 펼쳐진 고이즈미 극장으로 큰 타격과 붕괴에 이를 정도였다.

정치계에서의 화려한 성과와 별개로 문제들도 많았다. 정치적 협상 대신 국민의 지지를 기반으로 했기에 정치적 대립은 심했고, 합리적인 반대 이유들까지 악역의 주장으로 취급해 여론의 뭇매를 맞았다. 반대측의 의견을 무시하는 강한 개혁 추구는 적지않은 부작용을 남겼다. 개혁과 혁신을 주장하면서 지지를 받았지만, 지지자들은 고이즈미가 뭔 개혁을 하는지도 제대로 몰랐다. 표퓰리즘 정치라는 비판도 강하다. 고이즈미라는 걸출한 정치인 외에 이런 방식을 따라하는 것은 힘들기에 이 방식을 이어간 일본 정치인은 없었고, 고이즈미가 사라지자 고이즈미 극장도 사라졌다.

장점도 단점도 있지만 고이즈미 시기는 일본 정치계에 큰 충격을 안겨주었고, 고이즈미 극장으로 대표되는 방식은 당대 일본 정치계를 상징하는 용어가 되었다.

4. 퇴임 후: 정치적 제자와의 충돌

5년 반을 집권한 자민당 총리인 그가 2010년대 들어선 원전 반대를 외치고 다녀서 아베 신조와 자민당 인사들을 당혹스럽게 만들고 있다. 일본의 시사 잡지 '프레지던트'의 창간 50주년 기념 행사에서 고이즈미는 "인간이 원자력을 제어할 수 있는지 의문을 가지고 있다. 정치권이 원전 제로를 결단해야 한다'"고 역설해 행사에 참석한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고 한다. 사회민주당과의 좌담 강연회에서는 "(기술 문제와 관계 없이) 국민과 정권이 마음만 먹으면 원전 제로를 실현할 수 있다"고 말하며 원전에 대해서는 급진적인 태도를 보이기도 했다.

사실 고이즈미는 총리 재직 시절만 해도 원전 찬성론자였는데, 2013년 8월 핀란드방사성 폐기물 최종 처분장을 방문한 뒤 지하수가 많고 지반이 불안한 일본에서 원전을 통제하는 것은 어렵다고 판단하여 탈원전으로 돌아선 것으로 알려져 있다. 2011년 동일본 대지진과 직후 터진 후쿠시마 원자력 발전소 사고도 큰 영향을 줬을듯.

그렇게 아베 내각과 각을 세우다 결국 2014년 1월 14일엔 탈원전을 기치로 하여, 2월 9일에 있을 도쿄도지사 선거에 나선 호소카와 모리히로 후보를 전격 지지 선언. 참고로 호소카와는 전 일본 총리로 비 자민당 출신 총리다. 이런 배경엔 정치적 스승인 자신의 탈원전 조언을 아베 신조가 무시한 채 중동 지방을 돌아다니며 원전 세일즈를 했던 것이 큰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

그렇게 전직 스승 총리 vs. 현직 제자 총리[13] 구도가 되어 언론에서 주목을 받았고, 자민당은 고이즈미 전 총리의 차남인 고이즈미 신지로를 자민당 유세에 투입하여 부자대결 식으로 맞불을 놓는 방안을 검토하기도 했으나 신지로가 가능성을 일축하면서 고이즈미와 정면 대결하기보다는 원전 이슈를 희석하는데 주력하고 있다. 선거 결과 자민당 후보가 막강한 화력을 등에 업고 호소카와 후보를 더블 스코어 이상으로 앞서며 승리했다.

자민당의 관계자는 고이즈미가 아베를 흔들려고 이런다기보다는 자민당 내에 친원전 의원들이 아베에게 원전 재가동을 압박하는 것을 막기 위한 제스처로 본다고 지적했다. 어찌 되었든 당의 원전 재가동 정책과는 정반대의 행보라 "그냥 말을 말았으면" 하는 반응이 대다수. 그의 아들인 신지로를 비롯해서 유력 인사들은 고이즈미의 발언과 자민당 사이에 선긋기를 시도하기도 했다. 하지만 아베와는 우정 민영화 철회 등으로 정책적 골이 상당한지라 고이즈미의 행보는 지속될 가능성이 높다고 보는 경우가 많다.

동일본대지진후쿠시마 원전사고 4주년인 2015년 4월 11일 후쿠시마현에서 행한 강연에서 “오염수는 통제되고 있다고 누군가가 말했지만 전혀 통제되지 않고 있다”고 지적했다.#

2016년 들어서도 탈원전 운동에 열심인 듯하다. 5월에는 미국 강연에서 "도호쿠 대지진 당시 구호작전에 나섰다가 피폭당한 미군을 도와야 한다"며 눈물을 보이기도 했다. 같은 때 방일한 조지 W. 부시 전 대통령은 아베 신조 총리와도 만났는데, 대화 주제 중 하나가 부시와 고이즈미와의 추억이었다고 한다. 아베가 고이즈미 정권 당시 관방장관 출신이라 그런 듯한데, 원전 문제로 둘 사이가 좋지 않은 것을 보면 미묘한 부분이 있다.

사실 고이즈미의 성향 자체가 완전히 통일된 게 아니라서 이런 일이 벌어진 건데, 정치/경제적으로는 좀 더 보수적인 성향이나 사회적인 문제에선 진보 성향을 보이기도 한다. 예를 들어 위에서 말한 우정 민영화야 개혁은 개혁이래도 경제적으로 봐서는 약간 보수적인 시각이겠으나, 천황의 여계 혈통을 인정하는 방안을 고려했던 사람도 고이즈미였다.[14] 더 정확히 말하자면 정치/경제적으로도 마냥 보수적 성향이라기보단, 정치/경제/사회 모든 분야에서 리버럴 성향이 드러난다고 일본내에서 평가받았던 게 고이즈미였다. 애초에 고이즈미는 작은 정부를 지향하는 신자유주의자이고, 사회 분야에서도 시민의 자유를 중시하는 자유주의적 신념을 가지고 있었다. 정치적으로도 자민당 총재직 역임 당시, 파벌 정치에 반대하고 자민당을 뿌리부터 바꿔야 한다는 신념을 가지고 있었다. [15] 다만 착각하면 안되는 것이 일본에서도 이런 과거사 발언 자체를 비판하는 사람은 많다. 주로 자민당에 반대하는 세력이나 자민당내 비주류가 많아서 문제일 뿐. 물론 그 수가 적진 않다. 당장 2019년 참의원 선거만 봐도 정당 득표율만 보면 범야권이 4할에 가까운 득표를 했다. 게다가 범여권인 공명당도 과거사 문제에선 자민당 주류와 결이 다르다.

2018년에는 고이즈미가 아베 신조 총리의 내년 개헌 완료 및 2020년 새 헌법 시행 추진과 관련해 "해야 하는 일은 안 하고 할 수 없는 일만 하려고 한다"고 비판했다. 고이즈미 전 총리는 12일 아사히신문과의 인터뷰에서 "(개헌에) 야당은 찬성하지 않는다"며 아베 총리를 지적했다.

고이즈미는 니가타현에서 열린 반(反)원전 집회에 참석해 야권이 지지하는 니가타현지사 후보와 악수를 했고, 아베 정권에 반대하는 야권 자유당의 오자와 이치로(小澤一郞) 공동대표가 주최한 강연회에서 '원전 반대' 목소리를 높였다.

2018년 12월에는 아사히신문과 인터뷰에서 아베 총리의 개헌 드라이브에 대해 "판단력이 나쁘다"고 비판한 적도 있다.

15일 NHK에 따르면 고이즈미 전 총리는 이날 이바라키현 히타치시에서 열린 '원전 제로(0)' 집회에 강연자로 나서 아들 신지로가 환경대신으로 입각한 것과 관련해 "힘냈으면 좋겠다. 그(신지로)는 공부를 열심히 하는 스타일로 나보다 공부를 많이 하고 있다. 환경은 지금 가장 중요하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그는 "자연환경을 중요하게 다뤄서 원전을 없앴으면 좋겠다"며 "(일본을) 자연 에너지로 발전 가능한 국가로 만들었으면 좋겠다"고 강조했다.#

고이즈미 전 총리는 후쿠시마 원전 사고 이후 '반원전' 목소리를 내고 있다. 틈만 나면 반원전 주장을 공개적으로 펼쳐 원전 재가동 정책을 펴는 아베 총리를 곤란하게 만들고 있다.

모리토모 학교 비리 사건과 관련하여 2020년 3월 31일 발간된 주간지 '슈칸아사히'(週刊朝日)에 실린 인터뷰에서 아베 총리는 사학 비리에 대해 책임지고 총리직에서 물러나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아베 총리를 작심한듯 강하게 비판했다. 고이즈미 전 총리, "아베 거짓말 해...총리직 그만둬야" 비난 '정치적 스승' 고이즈미 "아베, 거짓말 해... 그만둬야" 맹비난 처음에 아베 총리는 이에 대해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 대책에 전념하겠다면서 사퇴는 털끝만큼도 생각하지 않는다고 일축했다. # 그런데... 아베 총리는 결국 5개월 뒤 진짜로 사임하고 말았다. 물론 사학 비리는 입 안 대고 단순히 지병 때문이라는 이유만 붙이고 얼른 도망갔다. 그리고 후임에는 스가 요시히데가 선출되었다.

또, 2020년 11월 3일에는 홋카이도에 핵처리 폐기시설을 신설하는 문제에 대해서도 반대 의사를 표명했다. 비슷한 시기 홋카이도에 있는 가타오카하루오촌장 선거에서 자민당의 지원을 받은 핵폐기물 처분장 유치파가 승리했기 때문. 물론 이때 이미 총리는 스가 요시히데로 바뀐 이후지만 아베가 막후에서 여전히 실세로 활동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이렇게 이어져온 정치적 사제의 대립은 아베 신조가 2022년 7월 8일 선거 유세 도중 피살을 당하면서 어긋난 상태로 결말을 맺었다.


[1] 온 몸에 문신이 있었기 때문에 별명이 이레즈미(문신) 대신이었다.[2] 당시 준야는 마타지로가 간사장을 맡고 있던 입헌민정당의 일개 사무 직원이었는데 마타지로가 자신의 딸과의 관계를 반대하자 요시에와 함께 사랑의 도피(…)를 해 도쿄에서 동거를 시작했다고 한다. 마타지로는 이에 자신의 딸에게 돌아오라고 신문에 광고를 싣기도 했다. 결국 준야가 데릴사위가 돼서 마타지로의 뒤를 잇는 조건으로 두 사람의 결혼을 허락한다. 참고로 준야는 3남 6녀중 차남이다.[3] 지역에선 명문고이며, 아들 신지로는 요코스카 고등학교 입시에 떨어졌다.[4] 소선거구제로 전환한 이후로 편하게 당선되는 입장이 되었지만 이때 가나가와 2구는 상대적으로 자민당 약세 권역이었기 때문이었다. 특히 다가와 세이이치가 자민당을 탈당하고 신자유클럽에 합류하면서 1990년 중의원 선거구를 제외하면 해당 선거구에서 당선자 5명 가운데 1명만 자민당인 대표적인 자민당 약세지역이 되었다.[5] 오부치는 고이즈미 모교의 영원한 숙적와세다대학 출신이다.[6] 그래도 총선 공천은 줬다.[7] 내각제 하 각료회의는 만장일치가 기본이다. 각의의 결정사항에 대해 총리를 비롯한 각료 전원이 연대책임을 지기 때문. 그래도 내각의 대신은 천황의 재가를 받아서 임명되기 때문에 이 절차는 지켰다.[8] 2002년, 2004년 2차례 김정일과 정상회담을 가졌다. 이때 김정일이 일본인 납치 문제에 대해 사과하기도 했다.[9] 아베 신조 당시 관방장관 역시 고이즈미와 동행하여 2차례 평양을 방문했는데, 이때 그가 일본인 납치자 문제를 부각시켰다는 얘기가 있다.[10] 의외일수도 있겠지만 이런 총리의 야스쿠니 신사 참배를 중단했던 것이 2007년 1차 임기를 보내고 있던 아베 신조였다. 이후 총리가 한국, 중국과의 외교관계 악화를 우려해 직접 야스쿠니 신사에 참배하는 걸 자제하는 것이 자민당-민주당 정권을 가리지 않고 유지되다가 2013년 2차 임기를 맞이한 아베가 직접 이 관례를 깨고 다시 야스쿠니 신사에 참배했다. 하지만 이 참배로 인해 미국유럽연합에게 경고를 받게 되었고, 이후 일본은 현직 총리의 야스쿠니 신사 참배는 최대한 자제하고 있다.[11] 경술국치 후 100년 만에 나온 간 나오토간 담화가 가장 진보적인 입장을 갖고 있지만, 사실 고이즈미가 무라야마 담화를 후퇴시키지 않고 계승한 것만 해도 대단한 것이다. 10년 뒤 2015년에 나온 '아베 담화'의 후퇴를 고려하면 더욱 그렇다.[12] 물론 고이즈미 극장이 아니어도, 개혁을 부르짖으며 최후의 카드를 꺼낸 정치인과 그걸 막는 정치인들 중 누굴 국민이 더 선호할지는 명백하다. 이것 자체가 고이즈미 극장의 영향으로 도출된 생각에 불과하지만 말이다.[13] 아베 신조는 고이즈미 내각에서 내각관방장관을 지냈으며, 파벌도 똑같은 청화회(모리파) 출신인지라 고이즈미의 제자라 봐도 무방하다.[14] 1965년 이래 일본 황실에는 공주만 줄줄이 9명이 태어났고, 나루히토 황태자와 마사코 황태자비 내외는 오랜 불임 끝에 2001년 겨우 아이코 공주를 낳았다. 그래서 여성 천황이나 여계 천황 허용도 검토했던 건데, 2006년 나루히토 황태자의 남동생 후미히토 친왕이 늦둥이 아들 히사히토를 낳으면서 유야무야 되어 버렸다.[15] 이 부분을 보고 고이즈미가 극우 유권자들과 영합한것 아니냐고 주장할수는 있다. 사실 이건 과거사 인식에 하자가 있는 인물들과 우익 유권자들이 넘쳐나는(이중 극단종자는 세키호타이 사건 같은 신문사 테러를 저지르기도 했다) 일본 정치판에서 많은 정치인들이 겪는 딜레마이기도 하다. 천황이 전쟁에 책임이 있다고 발언했다 총격맞은 시장까지 있는 판국이니. 21세기 들어선 이런 물리적 테러 행위 자첸 줄어들었지만, 넷우익들이 기승이다. 즉, 자기 정치 활동에 차질을 안 빚기 위해 개인적 소신과 무관하게 혹은 소신을 바꿔가면서까지 떠벌리는 측면도 있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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