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2-15 19:44:13

관우/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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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통솔
2.1. 전적
2.1.1. 전술적 평가
2.2. 당대의 평2.3. 평가
3. 무력
3.1. 어록
4. 군사행정5. 지력6. 정치7. 충의
7.1. 유비와 관우의 관계
8. 성품
8.1. 손권 관련 해석8.2. 미방 관련 해석
9. 말말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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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관우의 평가를 다룬 문서.

2. 통솔

2.1. 전적

  • 계한보신찬에 따르면 유비가 위급에 처할때마다 장비와 함께 격투하여 위급을 구하고 유비 세력 초기부터 그의 대업을 도왔다고 한다.
  • 조조가 유비를 쳤을 때, 하비의 수비를 맡았다. 유비는 패해 원소에게 달아나고 관우는 조조에게 사로잡혀 항복한다.
  • 백마전투에서 조조 휘하로 출진하여 장료와 선봉을 맡았다. 많은 병사들 사이에서 안량의 수급을 베어 돌아왔으며, 원소의 제장들이 아무도 당해내지 못하여 백마의 포위를 풀었다. 이 공으로 조조에 의해 한수[1]정후(漢壽亭侯)에 봉해진다.
  • 당양 장판파에서 추격당하던 유비를 수군을 이끌고 구원했다.
  • 유비와 주유가 남군을 공격할 때 관우를 별도로 보내 북쪽 길을 끊어놓았다.
  • 번성 전투에서 조인을 궁지에 몰아넣고 번성에서 수해에 빠진 7군을 궤멸시키고 우금, 방덕을 사로잡았다.
  • 결과적으로 서황과 번성 내부의 협공에 밀려 번성 공략에 실패하고, 조조군과 손잡은 오의 공격에 형주를 점령당한다. 근거지와 퇴로를 잃은 채 군대가 와해되어 맥성에 고립되었다가 달아나지만, 결국 오군에 사로잡혀 참수된다.

2.1.1. 전술적 평가

강릉 전투를 보자면 여러개의 길목을 나누어 지키는데 한쪽길을 뚫기 위해 더 많은 병력이 투입되었기에 관우 쪽도 불시에 여러 방향에서 등장한 맹장들을[2] 상대하기는 힘들었다. 유비군의 주력은 조인의 군세와 싸우고 있었고 관우군은 수천으로 병력상 열세였다는 점은 참작해야 한다.

청니 대치의 경우 유비가 대병력을 이끌고 촉에 가 있는 시점에서 근거지를 잃을 위험을 감수하며 무리하여 싸울 필요가 없기에 대치만 하고 싸우지 않았다.

서황과의 전투도 관우가 조인, 우금의 군세와 장기간 전투를 벌인 피로와 번성과 양양을 포위하는데 병력이 나뉘었다는 점, 위와 오가 작정하고 대병력을 움직이고 있었고 서황에게 1만~2만의 대규모 지원이 있어 이끄는 군대의 숫자가 적지 않았을 거라는 점을 고려하면 관우가 불리했다. 거기에 서황도 관우를 상대로 정말 잘 싸워 버렸다. 번성과 양양 전투 막바지를 보면 관우는 번번히 지친 군세로 싸워 패퇴했고 본대만은 괴멸되지 않고 보전했다. 어느 정도 피해를 보긴 했지만 번성을 포위한 군세와 주변에 전개한 군세를 강 너머로 철수시키는데 성공했다. 그리고 조조의 대군에 맞서면서 면수를 완전 봉쇄하고 양양을 포위해 양양과 외부의 연락을 완전히 막아 장기전으로 넘겼다. 즉, 중간에 전투에서의 패배와는 별개로 대처는 문제가 없었다는 것은 저평가할 수 없다.

하지만 이는 결국 변호를 위한 변호일 뿐인데, 이렇게 안 좋은 상황을 극복하지 못했다면 전술적 능력은 잘 쳐줘도 평범하다고 볼 수밖에 없다. 그리고 불리한 상황이라면 진즉에 후퇴하는 편이 옳았다. 괜히 병력의 후퇴 시점을 잘 파악하고 후퇴하면서도 피해를 줄이는 지휘관이 높이 평가받는 게 아니다.

상용의 유봉맹달에게 지원군을 요청한 후 기다리고 있었던 것으로 보이며 지원군이 왔다면 양번을 계속 공격하든 서황을 공격하든 배를 타고 상용으로 후퇴하든 할 수 있었겠지만, 결과적으로는 지원 요청이 거절당하면서 악수가 되었다.

2.2. 당대의 평

(전략) 관우와 장비처럼 곰과 호랑이 같은 장수를 끼고 있으므로 (후략)
주유전
(전략) 관우와 장비 이 두 사람을 나누어 각기 한쪽에 배치하고 저 같은 자로 하여금 그들을 지휘하여 싸우게 한다면, 대사는 안정될 수 있을 것입니다.
주유전
관우와 땅을 나눠 접경하고 있었는데, 관우가 매섭고 빼어난데다 (후략)
여몽전
관우는 날래고 예리하니(驍銳) 승기를 잡아 진군해 오면 반드시 근심이 될 것입니다.
온회전
관우는 용맹하고 교활하니(驍猾), 다만 정남(조인)에게 변고가 있을까 두려울 뿐이오.
자치통감
(전략) 관우와 장비는 삼군을 뒤덮을 만한 용맹으로 (후략)
유엽전
촉나라는 작은 나라일 뿐이며, 명장으로는 오직 관우만 있었습니다.
유엽전[3]
장비와 관우는 모두 만인지적으로, 유비를 위해 사력을 다해 싸웁니다.
곽가전
유비는 영웅의 명성이 있고, 관우와 장비는 모두 만인을 대적할 수 있습니다.
정욱전
유비는 관대하고 어질면서도 법도가 있으며 사람을 얻는데 사력을 다합니다. 제갈량은 다스림에 통달하고 변화를 알고 바르면서도 모략이 있으니 재상으로 삼을 만합니다. 장비, 관우는 용맹하면서도 의리가 있으니 모두 만인지적으로 장수로 삼을 만합니다. 이 세 사람은 모두 인걸(人傑)로, 유비의 지략에다 세 인걸이 그를 보좌하니 무엇을 성공하지 못하겠습니까?
선주전 주석 부자
(전략) 관우가 자신의 용맹함과 명성에 기대어 병사를 인솔하는 정확한 법칙이 없었으며, 자신의 기분에 따라 돌발적으로 공격하였기 때문에 앞뒤로 여러 차례에 걸쳐 많은 병사들을 잃게 된 것입니다. 관우도 상랑과 문공(文恭)처럼 평범한 인간이었을 뿐입니다.
요립전[4]
폐하(손권)께서는 신무의 자태로써 하늘의 안배를 받아 오림에서 조조를 무찌르고, 서릉에서 유비를 패배시켰으며, 형주에서 관우를 붙잡았는데, 이 세 명의 적은 당대의 영웅호걸이었지만 모두 그 예봉을 부러뜨렸습니다.
육손전

2.3. 평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명장이라 꼽히는 장수의 전적은 논란의 여지가 있는 경우가 많다, 관우 역시 마찬가지다. 관우의 명성에 비해 정사에서는 패배한 기록이 많다는 점 때문에 지휘관으로서의 능력이 떨어진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다.

하지만 동시대인들이 관우에 대해 남긴 평가는 하나같이 용맹스럽고 무서운 장수라는 이야기 뿐이다. 그것도 조조, 정욱, 곽가, 주유, 여몽 같이 당대의 걸출한 인물들이 인정했다는 게 특이점으로, 사후 수백년 동안, 적어도 300년 이상 관장지용이라고 불리며 용맹한 장수들의 기준이 될 정도였다. 무엇보다 그가 받은 만인지적이라는 칭호는 그저 무예가 뛰어난 정도가 아니라 용맹과 병법이 뛰어난 장수에게 주는 것이다. 이는 그가 보여준 지휘관으로서의 능력을 간접적으로 증명한다.

사실 관우가 패배한 전투의 임팩트가 워낙 강해서 그렇지 시국 자체가 관우에게 유리하지 않았다. 위 언급된 전적 중 관우가 겪은 가장 큰 패전 둘을 살펴보면, 하비를 지키던 관우가 조조에게 패배할 당시 조조의 세력은 서주의 세력을 갓 규합한 유비에 대해 압도적으로 우세했고, 총사령관인 유비도 이미 패배해 도주한 상황이었다. 번성공방전은 조조 측에서 가동가능한 전력을 거의 쏟아부은 상태에서 동맹인 손권까지 등을 돌려 앞뒤로 포위된 상황이었다. 반면 세력의 규모가 극단적으로 차이가 나지 않을 시점인 번성공반전 초반에 조인을 상대로 (자연재해를 잘 이용한 것이든 뭐든) 무려 우금을 사로잡는 대승을 거두고, 조조 밑에서 일할 당시 백마전투에서 맹활약을 했다. 즉 생애 대부분 전투를 불리한 상황에서 치러 몇번의 큰 패배가 있긴 해도, 따지고 보면 제 역할 이상을 해주었다.

또한, 위에 언급된 관우의 능력을 평가한 이들이 대부분 그를 직접 써봤거나 적대해 본 인물들이었다는 사실에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들은 대부분 용병술과 군략에 뛰어났던 인물들이므로 관우라는 인물의 역량을 과대평가했을 가능성이 낮으며, 딱히 관우와의 다른 이해관계도 없었기 때문에 요즘 말로 립서비스를 해줄 이유도 없었다. 그런데도 누구 하나 관우를 만만하게 여긴 이들이 없고 오히려 관우를 이용해야 한다든가 경계해야 한다는 요지의 말만 가득하다.

특히 주유와 조조의 평가에 주목할 필요가 있는데, 주유는 적벽대전이라든가 남군 공방전 등에서 관우와 장비의 활약상을 가까이서 직접 본 인물인데다 아예 본인이 "내가 관우와 장비를 부리면 서촉을 평정하고, 조조 역시 도모해볼 수 있다"는 요지의 말을 했다. 당시 오의 군사적 1인자였던 주유가 저런 평가를 내릴 정도의 장수였고, 주유뿐만이 아니라 여몽 또한 손권에게 "관우는 용맹하고 군사를 부리는 게 보통이 아니라 대적하기 어렵다"고 이야기한 바 있고 실제로도 관우와 전면 대치를 한 게 아닌, 여러 기만책을 써 관우의 관심을 조인쪽으로 돌리고 뒤를 쳐서 관우가 제대로 싸우지 못할만한 환경을 만든 다음에야 승리했다. 적어도 오에서는 주유와 여몽같은 총사령관급 인사들이 관우의 군사적 능력을 매우 높게 평가하는 동시에 경계하고 있었음이 명확하다.

조조 또한 관우를 직접 써 본 사람인데, 그는 관우에게 한수정후라는 높은 직위를 주면서까지 어떻게든 자기 편으로 만들려고 노력했다. 게다가 번성 공방전 당시 조조가 관우에게 대응한 양상을 보면 조조가 그를 얼마나 높게 평가하고 또 두려워했는지 명확하게 알 수 있다. 조인이 수세에 몰리자 1차적으로 우금과 방덕을 파견해서 구원을 시도했으며, 이들이 격파당하고 각각 포로로 잡히고 사형당하자 서황을 추가로 투입했고, 서황마저 실패하자 서황에게 12영의 지원 병력을 추가적으로 더 보태어 결국엔 번성 포위를 무너뜨렸으며 본인이 친정을 계획하는 한편 오와 밀약을 맺어가면서까지 합비 방향에 있던 장료와 양주 26군의 사령관 하후돈을 관우쪽으로 소환했으며 손권이 그렇게 신뢰할만한 인물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온회전에 나오듯이 회남에 주둔하고 있던 여러 주의 군사들까지 각기 소집하며 회남 전선을 텅 비우면서까지 형주로 보내고 있었다. 당시 형주군과 위군의 역량 자체는 누가 봐도 위군이 훨씬 정병이었다는 점을 생각하면, 결국 조조는 오직 관우 한 사람을 경계하여 한중 방면에서 유비를 경계해야 하던 장합과 이미 사망한 악진 제외한 나머지 오자양장 전원을 동원했고 회남을 텅 비웠다는 결론이 된다.[5]
이 외에 유엽도 "촉나라는 소국이고, 장수는 관우뿐이다."라고 했는데, 유엽은 조조가 한중을 정벌한 직후에 여세를 몰아 익주의 유비를 치지 않으면 후환이 우려된다고 간언했을 정도로 전략적 식견이 있는 인물이었다. 그런 인물에게도 용력이 아닌 장수로서 높게 평가받았다. 단순히 연의의 장비같은 맹장 타입이었으면 저런 말이 나올 수가 없다. 또한 유비군 내에서도 관우는 유비 아래 최고 사령관으로 여겨졌다. 실제로 유비는 자신이 병력을 이끌지 않을 때에는 대부분 별도의 군을 관우에게 통솔하게 했다. 서주에선 하비에 진수하게 했고 형주에선 별도의 수군을 이끌게 하고 이후에도 형주에 진수시키면서 독자적인 군권을 주었다. 유비가 용인술이 굉장히 뛰어났다는 점을 생각하면 관우가 충분히 단독으로 형주를 지켜낼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고 보는 것이 옳다.

관우는 형주의 1/3도 안 되는 강릉, 무릉, 영릉 삼군의 병력만으로 천하를 진동시켰다.[6] 북쪽에선 위가 있고 동쪽엔 오가 있고 전선이 2중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오에서는 여몽이 기회를 엿보았고 위도 조인이 지키고 언제든 서황 등이 치고 내려올지 모르는데다 주요 참모, 장수진은 전부 다 익주를 안정시키는데 투입되면서 관우는 홀로 유비의 익주 진공 이후 상대적으로 역량이 떨어지는 2선급 장수들을 수습해서 활동을 해야 하는 처지에 놓여있었다. 물론 유비 역시 이걸 모르지 않아서 상용을 점거하고 행여나 있을 원군 요청에 대비해 양아들 유봉과 촉나라 출신 장수 맹달을 주둔시키지만 기본적으로는 관우의 역량을 전적으로 신뢰하여 형주에 누가 오든지 관우라면 막을 수 있다라고 여겼던 것으로 보인다.

추가로 동오와의 동맹 균열은 관우 혼자 깽판쳐서 동맹이 깨진 게 아니다. 관우가 손권을 개라고 한 것은 연의의 창작이고 오나라에게 직접적으로 문제를 일으킨건 상관에서 군량을 탈취한 것과 손권과의 혼담을 거절한 것 정도였는데, 정작 상관이 있던 영릉은 유비의 영역이기에 관우쪽에 나름의 명분이 있었고 혼담 거절건은 감정적인 사유도 없지는 않겠지만 이미 손권이 손부인과의 혼약을 통해 후계자인 유선을 탈취하려는 시도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해당 사건이 없었다 할지라도 언젠가는 터질 일이었는데 이상할 정도로 유비 세력에 우호적이었던 노숙을 제외하고는 대부분의 오 최고 사령관(대도독)들은 유비/관우를 경계해왔다.[7] 요약하자면 관우가 이상적인 외교 활동을 했다고 보기는 힘들지만, 입촉 즈음하여 손권이 유비가 관할하던 형주에 대놓고 욕심을 부리고 있던터라 관우가 아니었어도 언젠가는 터질 문제였다.

당시 상황에선 누가 가더라도 관우보다 잘하기가 어려운 상황이었다. 애초에 조인의 북형주군이 남하를 준비하고 있었고 조인이 털리자마자 지체없이 우금의 7군을 모아 내려보내는 것을 보면 대대적으로 조위가 형주 공격 준비 중이었는데 여기에서 북형주군과 우금 7군까지, 족히 10만은 넘을 위군을 제압할 만한 인물은 촉에서 찾아보기 힘들다. 심지어 관우는 오나라에게 뒤통수 맞기 직전까지 내내 승전보만 올리고 있는 상황이었다. 번성을 포위하고 있다가 서황에게 패해서 포위가 풀렸다고 해도 치명적인 타격까진 아니라서 그냥 적당히 물러나서 대치 전선만 세워도 위나라에 엄청난 압박이 가는 상황이었던 것. 이렇게 잘 나가던 상황에서 오나라의 공격으로 형세가 급변하고 성도에 있는 촉 입장에서는 어제까지만 해도 이기기만 한다고 보고 보내오던 장수가 하루아침에 멸망 직전의 상황으로 몰려버린 것이다. 고대 시대의 통신력을 생각해보면 뭘 어떻게 대처할 틈도 없이 지나치게 상황이 급변해 버린 것. 입촉과 한중 공략을 위해서 유비의 주력군이 전부 다 서천 쪽으로 떠난 상황에서 관우는 형주에서 새로이 손수 키워낸 병력들만 가지고서 익양대치 등 오나라의 압박과 조조의 7군을 모은 대규모 공격을 상대로 형주를 방어해내고 되려 7군 수몰 후 번성을 포위하면서 역공을 가하는 상황까지 밀어붙인다. 거기서 오나라의 공격으로 상황이 바뀌어버린 거라 형주 공방전 자체가 군사적인 문제보다는 정치적인 문제로 몰락한 것이라는 게 더 맞는 설명이다.

나관중의 소설이 원말 명초의 시대적 관점이 많이 들어가서 사람들이 착각하기 쉬운데 저 시대는 중앙집권 성격이 상당히 약했던 시절이다. 당시의 형주가 그냥 땅도 아니고 3국의 주요 전장무대였기에 지역 군벌, 호족 단속도 해야하고 군사적 성과도 내야 하고 참 어려운 지역이었다. 마음만 먹으면 독립하거나 조조 또는 손권에게 붙어버리기 쉬운 지역이기도 했고, 충성도나 능력을 고려했을시 유비 세력중 남 군(강릉)을 맡길만한 인재는 관우뿐이었다.[8] 그의 전략적 판단을 도와줄 모사가 없었다는 게 아쉽기는 하나 방통이 사망하고 그의 빈자리를 메우기 위해 법정, 제갈량 등이 모조리 투입된 상황에서 그것까지 바라는건 무리였다. 애초에 그 제갈량조차 관우를 신경쓰느라 쩔쩔맸었고.

상황 자체도 좋지 않았다. 그나마 가까이에 진주해 있었던 상용의 유봉군은 유봉과 맹달이 군악대를 핑계로 쌈박질을 하느라 지원을 제때 못갔고 유비의 거병 초창기에 합류해 그나마 믿을만하다고 판단되었던 중신 미방이 배신을 하고 여몽에게 길을 열어준 상황이었다.
추가로 위군만 후발대까지 합치면 적벽이래 최대군이 남하하고 있고[9] 오나라까지 뒤통수를 날리러 오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강릉 주위만 쥐고 있는 촉군이 아무나 강하게 공격한다고 형주의 절반 인구를 쥐고 있는 조인을 줘패고 완편시 7군을 괴멸시키는 게 가능하겠는가. 애초에 지원군만 제대로 왔거나 최소한 오의 뒤통수만 없어도 양번 중 양양은 취하거나 아니면 최소한 관우가 목숨은 보전한 채 후퇴는 가능했다.

또 정치적인 문제가 오로지 관우 혼자만의 문제인 것도 아니다. 남군 영토 대여 문제를 제대로 처리하지 않고 어물쩍 뭉개고 넘기려고 해서 오나라의 반발을 산 유비, 애초에 대여해준 남군도 아니고 유비가 자력으로 차지한 지역까지 내놓으라고 강짜를 부리고 과정이야 어쨌든간에 익양대치로 합의해서 북진을 위한 군사 거점만 빼고 다 반환받은 상태에서도 뒤치기를 감행한 손권도 촉오 동맹 균열에 큰 잘못이 있다. 형주를 지원하기 위한 최중요 거점이었던 상용에서 유봉과 맹달의 갈등으로 인해 지원군이 출전하지 못한 것, 익양대치로 이미 합의 끝난 상황에서 끝내 뒤치기를 감행한 오나라, 애초에 동맹에 균열이 가는 단초를 남긴 유비까지 형주 상실은 관우 혼자서 책임을 뒤집어쓰기에는 심히 억울한 상황인 것이다.

초반 공격을 강하게 하면 어느 정도 점령이 된다고 한다지만 관우의 형주군이 우금의 7군 격파 이후 사망 및 탈주 빼고 포로로 잡은 병력만 3만이다. 우금의 전체 군 규모가 관우의 형주군보다 훨씬 컸을 거라는 건 쉽게 예측할 수 있을것이다. 우금이면 조조군 전체를 통틀어서도 최고급의 명장이었는데 그런 상대를 완파하고 마찬가지로 위군 내에서 실력자였던 방덕을 죽인 것도 모자라 도리어 조인을 번성에 가둬놓고 두들기는 상황까지 몰아넣은 건 결코 아무나 할 수 있는 게 아니다. 여하튼 세력 내 서열, 정치적 관계, 형주 호족 세력에 대한 제어, 군사적 명성까지 포함해서 유비가 아닌 조조든, 손권이든 그 누가 그 자리에 있었더라도 관우를 인선했을 것이다.

관우는 결국 조인을 격파하지 못하기는 했으나, 이것은 전적으로 당시 관우가 지니고 있던 형주군의 역량 미달 때문인지 문제도 만만치 않다. 관우의 후방에 있던 미방과 부사인, 반준은 각각 후방에서 물자를 지원하는 일을 맡거나 치중종사임에도 관우가 만족할 만한 보급을 해 준 적이 없다. 물론 이건 관우의 행정 능력에 문제가 있어서라고 넘어갈 수도 있다. 그러나 위나라의 장수들과 비교해보자. 예컨대 장료가 창희를 토벌할 때 시간이 지체되자 우금은 군량을 계속 보내주어 마침내 함락시킨다. 양번 당시에도 조인이 수세에 몰리자 조조는 정예 7군과 우금, 방덕, 서황을 보내고 이들이 격파되거나 구원에 실패하자 조조 본인도 증원을 간데다 장료와 하후돈마저 부르기에 이르고 관우를 칠 엄두를 내지 못하던 서황에게도 계속 지원병을 보내고 손권까지 동원해 관우의 뒤를 치려는 계획까지 짠다. 단 한 명을 상대하기 위해서 위나라가 이렇게 동원할 수 있는 모든 역량을 동원하는 사례는 후일 촉의 제갈량과 강유, 오의 제갈각 정도를 제외하면 없으며 이들도 관우가 받은 지원보다는 더 많은 자원을 가지고 위나라를 상대했다. 설상가상으로 유비가 미리 상용에 진수시켜둔 유봉과 맹달은 서로 군악대 가지고 싸우기만 할 뿐 관우의 지원 타이밍을 아예 씹어버린 것과는 완전히 대조되는 상황이다. 보급과 지원에 있어서 관우군과는 완전히 천지차이인 셈이다.[10]

조조군의 자잘한 전투성과들을 자세히 살펴보면 증원에 힘입어 얻은 승리가 꽤 되며 조조군은 조조의 지휘하에서 지속적으로 물량의 지원을 통한 승리를 거둔바가 꽤나 많다. 번성공방전도 이와 비슷한 예라고 할 것이다. 당장 위나라 최고위 상장 하후연의 예를 보더라도 단독 전투로는 마초에게 대파당한 적이 있고 조조가 장안에서 밍기적 거리면서 지원이 끊기자 한중공방전에서 필사적인 저항을 해보았으나 결국 살해당한다. 조조는 그런 그의 군재를 폄하하면서 자신의 책임문제를 은폐하려 했지만 실제로 무도방면을 유비가 차지하지 못한건 전쟁 초기, 한중군 총사령관 하후연의 신속한 전술적 조치 덕분이었고 장합이 수많은 병력을 장비에게 날려먹어 한중군 전력이 약화된 와중에도 유비의 총력전에 수개월 이상 버티며 조조가 그나마 한중에서 유비와 싸울수 있는 상황을 만들어 내기까지 했다. 이런 마당에 관우가 결국 번성을 얻지못하고 서황에게 뚫린걸 단순히 장수의 역량 문제로 국한 될 수 있는지는 다시 한번 생각해 볼만한 문제다. 동맹과의 마찰이 예상되는, 상관의 쌀을 털어야 할 정도의 상황이었는데 더 말할 게 없을 것이다.

특이 사항으로는 관우는 하북 사람이면서도 수군에 일가견이 있어 형주에서 적벽대전이 벌어지기 전까지 수군을 이끌고 있었고, 번성공방전 때도 수군을 능숙하게 이용하였다. 정사 삼국지가 알려지면서 갈수록 위나라 제일의 장수라면서 조인에 대한 평가는 올라가는데 그 조인을 시기와 때를 잘 맞추어 번성에 몰아넣은 관우의 전투력에 대해서는 여전히 저평가 되는 경우가 있다. 장군으로서 조인이 적진 깊숙히 들어가 장마에 대비하지 못하고 있었다는 사실은 정사 온회전에도 나오고 위나라 군사들은 장마에 맞추어 총공세를 펼친 관우의 수군을 당하지 못했다. 당시 위와 촉의 국력을 생각하면 조인의 병력이 관우보다 적었을 리도 없고 위나라 군대가 장마에 당했다고는 하지만 장마가 조인, 우금, 방덕, 만총에게만 영향을 주고 거기서 싸우던 관우에게는 영향을 미치지 않았을 리는 없는 것이다. 단독으로 관우와 맞섰을 때 조인은 관우를 상대하지 못했고 결국 우금, 방덕, 서황의 지원을 받아서야 관우를 상대할 수 있었다. 번성이라는 천혜의 요새를 지니고서도 말이다.

관우는 홍수 이전에도 위나라 최고 명장인 조인과 맹장 방덕을 상대하면서 동시에 오자양장우금과 정예 7군 군세와 대등하게 맞서 싸웠고 홍수가 발생하자 조인을 번성에 몰아놓고 우금을 격파하여 사로잡았고 포로로만 무려 3만명을 잡았으며, 방덕을 참살했다. 상대편이 미처 대비하지 못한 홍수를 이용해 적을 격몰시켰는데 이런 연이은 명장들 상대로 원정에서의 대전공은 삼국이 정립된 삼국시대 전체로도 그렇게 흔하지 않다.[11] 앞서 언급했듯이 정사 온회전에 조자효(조인)이 적진 깊숙히 들어가 (자치통감에 따르면 큰비, 장맛비에 따라) 강물이 불어나는 것을 대비하지 못하고 있고 관우가 날래고 예리하니(驍銳)[12] 큰 위험이라고 온회가 걱정하고 있는 부분이 나오는데 이는 즉, 당시 홍수는 위나라 참모진 측에서도 걱정하고 있는 바였고 조인은 방덕을 배치하면서 관우의 적진 깊숙히서 이에 대비없이 싸우고 있다는 증좌로 볼 수 있다. 우금전에는 우금이 홍수가 온 다음에야 고지로 올랐으나 이미 피할 길 자체가 없었다는 기록이 있고 방덕전에 보면 방덕이 홍수가 나자 그제서야 제방위로 올라가서 저항한 기록이 나오는데 이 말인 즉슨 위나라군이 진작에 강물이 불어날 타이밍을 계산에 넣었다면 다른 고지로 후퇴해 수몰까지는 피할 수 있었다는 말과도 같다. 하지만 결과는 관우의 육군은 수몰 타이밍에 맞추어 그곳을 피했고 위나라 군대는 아무 대비도 없이 가만히 있었다가 그냥 수몰되었다는 것이다. 이는 관우가 진격할때부터 이를 염두에 두거나 적어도 어느 타이밍에 육군을 빼야하는지 최소한 위나라 장수들보단 더 잘 파악하고 있었다는 얘기다.

양번을 공략하기 위해서는 배를 타고 와야한다, 후일 몽골과 송나라가 그랬듯이. 그런데 논자들이 간과하는 지점은 "그럼 대체 관우가 수군을 끌고 올 때 위나라 번성의 수군은 어디로 증발했느냐? 관우가 육상에서 싸울 때는 나름대로 대응을 해놓고서는 정작 홍수에서 배를 타고 관우가 전장을 휘저었는데 위나라는 뭘했기에 7군과 번성 주둔군이 수몰될 동안 아무런 대비도 안했느냐?"인데 이에 대한 대답은 없다는 것이 중론이다. 만약 위나라 수군이 있었다면 7군이 그렇게 큰 피해로 수몰되진 않았을텐데, 기껏해야 방덕이 번성으로 후퇴할 때 조각배를 탔다는 기록 정도가 위나라 수군에 대한 기록의 전부고 양번 공방전이 끝날때까지 면수는 관우가 점령하고 있었다. 이는 두 가지로 밖에 해석이 안 되는데 조인과 방덕 등이 홍수나 면수 방어를 위한 수군 방비에 대비를 하지 않고 있었다. "즉, 수군 같은 걸 준비 안 했다.""명백히 열세인 관우의 수군에 면수가 장악 당할 정도로 완전히 밀리거나 격파되었다."는 결론 밖에 나오지 않는다. 조인과 방덕같은 명장들이 양번을 방어하기 위해선 수군을 준비해야 했다는 사실을 모를 리가 없다. 만약 정말로 그 사실을 이들이 몰랐다면 관우가 조인과 방덕보다 훨씬 군재면에서 우위에 있었다는 결론만 나올 뿐이다. 차라리 준비를 해놓고 격파되었다고 한다면 할 말이라도 있지.[13] 이미 육상에서는 관우가 방덕 등과 치열하게 맞서는 동안 위나라의 수군은 그 두 사람이 사용할 수 없는 상태로 격멸되었거나, 애초부터 없었다는 결론뿐이고 이건 무슨 변명을 갖다 붙여도 당시 번성 방어군이 바보 짓을 했다는 소리밖에 되지 않는다. 이는 홍수 이전부터도 관우는 육상에서는 화살을 맞고도 태연히 병력을 지휘하면서 용맹을 펼치고 있었고 수상에서는 면수를 완전히 장악했다는 얘기가 된다. 심지어 온회는 조인이 '적진 깊숙히 들어가서 현군(고립된 군대)이 되고 있다'는 표현까지 썼는데 이는 당시 조인이 이끄는 병력이 어떤 상황에 처해있는지 단적으로 보여주는 말이라고 할 수 있다. 즉, 이미 홍수 이전부터 관우의 병력이 우세를 잡아가고 있었다는 뜻이다.[14]

관우를 격파하고 번성의 포위를 푼 서황 역시 처음에는 구원할 생각을 하지 못하고 주개, 은서의 군사를 지원받고 12영의 군세를 지원 받아서야 관우의 포위망을 번성 내부의 만총과 함께 격파했는데 이때 관우가 이끌던 병사는 겨우 5천으로, 적어도 수만의 병력을 계획하고 계속 지원해준 위나라의 동원력에 비하면 초라한 수준이었다. 이어지는 조조의 주아부 립서비스는 덤 그리고 오나라의 명장인 육손이나 주연도 후일, 관우보다 훨씬 많은 병력을 가지고 양번 공략을 제대로 해내지 못했다는 점을 생각하면 단독으로 위나라 전체에서도 손꼽히는 명장들을 상대해낸 관우의 역량이 장수로서는 폄하될 이유가 없다.[15] 그것도 홈그라운드가 아닌 원정병력이라는 점에서 더더욱. 심지어 서황의 번성 포위망 격파 이후에도 양양의 포위는 풀리지 않았고 관우는 여전히 양번을 흐르는 면수를 장악하고 있었다. 후세의 일이지만 이 면수 수로를 완전히 장악당한 송나라몽골 제국과의 양양공방전 때 얼마나 힘든 싸움을 했어야 했는지를 생각해보면 관우는 열세의 전력에서도 이런 위협적인 판도를 구축할 수 있었다는 얘기다. 서황전에 따르면 조조는 (관우의) 번성 포위는 거, 즉묵의 포위보다 더했다면서 서황을 주아부의 풍격이 있다고 칭찬했는데 거, 즉묵의 포위라는 것은 과거 전국시대, 연나라악의가 제나라의 모든 성을 다 떨어뜨리고 거와 즉묵만 제나라에 남은 상황을 뜻한다, 즉 조조는 관우를 제나라를 공격하여 멸망의 위기로 몰아넣은 악의에 비했을 정도로 상황을 매우 위태롭게 본것이다.

따지고 보면 남군 공방전은 결국 손유 연합군이 이겼고 익양 대치는 입촉하느라 관우는 이런 전력이 분산된 어려운 상황에서 버텨낸 것이었다. 번성 공방전은 외교에 문제가 있었지 위나라가 자랑하는 조인을 성에 몰아넣고 우금을 때려잡고 방덕을 참살하고 양양을 고립시키고 위나라에서 최고 실적을 자랑하는 서황과 대치하고 서황 역시 조조가 각지에서 병력을 끌어다가 지원하고 12진영의 지원병을 끌어다 주기 전까지 번성 구원에 실패하고 싸울 생각을 못했다. 남양에 대규모 반란이 일어나서 양번 방어선이 크게 흔들렸었고 북벌의 최대호기에서 여몽 이후 다시 온건 유화책으로 가는 척했던 오나라가 동맹을 깨고 뒷통수를 칠줄은 몰랐을 터, 더군다나 미방의 배신, 유봉과 맹달의 의문스러운 움직임까지...

결국 관우의 몰락은 용맹이 부족해서도, 지략이 부족해서도 아닌 정치력 부재와 조직관리 문제였으니 전선을 맡은 장군에게 요구되는 역할과 전역을 책임지는 사령관의 역할은 다르다고 봐야 할 것이다.[16]

익양대치의 경우는 긍정적 평가를 내리기 어렵다. 손권이 파견한 관리들이 관우에게 쫓겨났을 때, 이후 손권측의 군사적 도발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비록 요립의 도주가 가장 큰 문제였지만, 관우의 빠른 후속조치가 이어졌다면 대비가 가능한 일이었다. 이후 노숙과 여몽의 부대가 양분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노숙 하나를 당해내지 못해 형주남부를 구원하거나 수복하지도 못했다. 특히 도하를 시도하다가 소수의 감녕군세에게 저지된 것은 큰 실책인데, 이는 엄연히 관우의 작전실패이고 오나라측 사기만 올려주는 결과를 낳았기 때문이다.

관우는 분명 당대의 명장으로 칭송되었고, 번성공방전 초기의 승리는 천하의 판세를 뒤집는 것이 가능할 정도의 대승인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위에서 살펴봤다시피 실책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3. 무력

정사에서 관우의 무예는 최강이었다고 할 수 있다.[17] 위에서 볼수 있듯 무력과 용맹에 관해서는 정사 삼국지 내에서 관우 만한 평가를 받은 장수가 없다. 만인지적이란 표현은 그 유래를 항우의 고사에 두고 있으며, 후대의 용례를 보더라도 그 시대의 용맹하기로 이름난 장수에게 부여되는 것을 알 수 있는데, 정사 삼국지에서는 관우와 장비만이 이 칭호를 얻었다. 이외에도 관우와 장비의 용맹을 일컫는 관장지용이란 표현이 따로 있을 정도라, 한나라 시대 이후 용맹한 장수들이 관우와 장비에 비견될 정도로 이 두 장수의 무력은 이미 널리 잘 알려져 있었다.

실제로 정사 주유전에선 주유가 관우와 장비의 용맹을 높이 평가하며 자신이 직접 지휘해보고 싶은 욕심을 보이기도 했으며, 화양국지에선 관우와 장비의 용맹이 삼국의 수위(으뜸)에 섰다고 평했다. 여기에 정사 장비전에서는 장비의 웅장위맹이 관우에 버금갔다고 서술하고 있으니, 관우에 대한 당대의 평가가 엄청났음을 알 수 있다.

평가뿐만 아니라 실제 결투 활약도 확실하게 기록으로 남아있다. 연의에 수많은 결투 장면들이 나오는 것과 달리, 정사에 나오는 결투 기록들은 모든 장수들을 통틀어도 채 10건이 안 된다. 그런데 그 얼마 안 되는 결투 중에도 관우가 안량을 벤 기록은 사실로 등장한다. 이는 정사 뿐만 아니라 소설인 연의까지 포함해도 보기 힘든 엄청난 무용을 보여주는 장면이고, 역사 전체에도 흔치 않는 사례다.[18] 이러한 이유로 관우의 개인 무력은 연의보다 정사에서 더 높이 평가받는다.

종합하면, 당대의 평가와 실제 결투 사례가 압도적인 수준이라, 정사의 개인 무력 최강자로 관우가 무조건 거론되고 있는 것이다.

다음은 관우의 연의 속 결투 장면들을 정사와 비교, 실제 사례와 연의의 창작으로 구분한 것이다.
  • 연의에서 관우가 술이 식기 전에 화웅을 베는 장면은 창작이다.
  • 연의에서 여포가 유비 삼형제와 결투를 벌인다는 삼영전여포 대목이 있는데, 이 역시 후대의 창작이다. 당대 무용으로 이름난 장수였던 여포를, 동시에 무명이었던 유관장 의형제가 비록 3:1이지만 그런 여포를 몰아붙이고 퇴각시켜 본격적으로 세상에 이름을 알리는 계기가 되는 작중 장치.
  • 연의에서 관우는 황건적 관해를 상대로 결투를 벌여 수십합의 경합 끝에 승리하는데 이것도 창작이다.[19]
  • 연의에서 관우는 기령을 상대로 한 일 대 일 대결에서 30여 합이 넘어가면서부터 우세함을 보이나 이것도 창작이다.
  • 정사에서 관우는 장료와 함께 선봉에 서서 타고 있던 말을 채찍질한 후 적진 한가운데 있는 상장 안량을 찔러 참했다. 이후 원소의 수많은 장수들 가운데 아무도 관우를 당할 자가 없어 백마의 포위가 풀렸다는 대목을 보면 관우가 얼마나 높은 수준의 무공을 지녔던 장수였는지를 알 수 있다. 정사 속 몇 안 되는 실제 결투 사례들 중 하나.
  • 연의에서 관우가 문추를 죽인 것은 허구다.
  • 연의에서 오관육참 후 관우와 하후돈이 경합으로 결투를 벌이는 장면이 있는데 이 역시 창작이다. 오히려 이 장면에서 연의를 통해 엄청난 무예 버프를 받은 것은 하후돈이다. 실제 역사에서의 하후돈은 선봉장은 커녕 일선 군 지휘관으로도 별반 역량을 드러낸 바 없고 군사행정이나 군수를 주로 담당하던 인물이었다. 게다가 왼쪽 눈을 다쳤다는 신체적 약점이 있어 원근감이나 사각 등에 큰 불리함을 가질 수 밖에 없는데 단순한 기병도 아니고 시대를 대표하는 인간흉기인 관우와 대등한 무예 대결을 펼치는 장면을 배정받은 것이다.
  • 연의에서 관우가 장사성을 공격했을 때 황충과 결투를 벌였다고 하지만 이 역시 창작이다.
  • 연의에서의 번성 공방전에서 방덕, 서황과의 결투가 경합으로 묘사되는데 정사에는 없는 창작된 장면들이다.
  • 정사에서 방덕이 화살을 쏴 관우의 이마를 맞췄는데 어찌된 일인지 관우는 죽지 않았다. 또 정사에 따르면 관우는 화살에 맞은 팔을 치료하는 과정에서 피가 넘쳐 흐름에도 불구하고 태연자약 했었다고 한다. 보통 사람이라고 믿기 힘들 정도의 관우의 강인함을 증명한다.[20]
    이마에 화살을 맞은 기록은, 견직물 항목을 보면 알수 있듯이 저 당시에는 질기고 튼튼한 비단으로 전투복을 만들었고, 흔히 관우의 이미진 풀빛 비단옷과 두건은 갑옷 위에 덧대는 일종의 방검복같은 용도였다.

이를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삼국지 연의에서 창작된 몇몇 결투 장면들로 인해 관우의 무예가 오히려 저평가를 받게 되었다는 점이다. 일 대 일 대결은 정사에 거의 등장하지 않는 싸움 방식인데 군담소설인 연의에서는 재미를 추구하기 위해 여러 장면들을 창작해서 넣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 가운데 관우의 결투 활약 역시 많이 늘어났긴 했지만, 사실상 위의 사례들 같은 경합으로 묘사된 창작들이 대부분이고, 또한 다른 용맹한 장수들의 활약도 창작되어 늘어난 결과, 직간접적으로 무력 면에서 저평가를 받게 되는 피해가 발생했다고 볼 수 있다. 행적과 성품의 묘사에선 연의의 최대 수혜를 받았지만, 정작 본업인 무예에서는 정사에도 안 나오는 결투 경합 장면들이 더해진 것이 되려 평가를 깎았다는 점이 아이러니하다.

혹자는 촉 진영 인물들의 기록이 상대적으로 부족하고 특히 초기 거병 시의 정보는 거의 사라지다시피 한 점을 지적하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관우는 항상 좋은 평가를 받았던 점, 그리고 유비의 위기 상황에서 관우의 활약이 있었다는 계한보신찬에서의 대목을 통해, 미처 후대에 전해지지 못한 관우의 초창기 시절 활약상이 꽤 많았을 것이라 추측하기도 한다.

추가로 관우가 독화살을 맞은 이후 의원이[21] 살을 가르고 뼈를 긁어내는 치료를 하는 동안 관우는 태연자약하게 술과 고기를 먹으며 담소를 나눴다는 정사의 기록을 봤을 때, 담력이나 인내심이 초인적이었던 것으로 보인다.[22]

3.1. 어록

관우와 장비처럼 곰과 호랑이 같은 장수를 끼고 있으므로 (중략) 관우와 장비 이 두 사람을 나누어 각기 한쪽에 배치하고 저 같은 자로 하여금 그들을 지휘하여 싸우게 한다면, 대사는 안정될 수 있을 것입니다.
주유전
관우는 실로 곰과 범같은 장수인데 어찌 계획을 미리 정하지 않을 수 있습니까?
여몽전
관우는 평소 용맹하여 그를 적대하는 것은 어렵습니다. (중략) 아울러 원래 공로가 있으며 담력과 기세가 성대하여 도모하는 일은 쉽지 않습니다.
육손전[23]
(전략) 관우와 장비는 모두 1만 명을 상대할 수 있으니 (후략)
정욱전
장비와 관우는 모두 만인지적으로, 유비를 위해 사력을 다해 싸웁니다.
곽가전
장비, 관우는 용맹하면서도 의리가 있으니 모두 만인지적으로 장수로 삼을 만합니다.
부간, 선주전
당초 장비의 웅장위맹(雄壯威猛)은 관우에 버금갔으므로 위의 모신 정욱 등이 모두 관우와 장비를 칭하길 만인지적이라 했다.
장비전
관우와 장비는 무용이 뛰어나며 (중략) 기세는 호랑이처럼 장렬하였다.
계한보신찬
하동의 관우운장, 동군의 장비익덕은 두 사람 모두 영웅장사로, 선주의 무장이 되었다.
화양국지, 유선주지
장비와 관우는 용맹이 삼국의 수위에 섰으니, 만인의 적이라고 칭해졌다.
화양국지, 유선주지
한나라 이후로 용맹하다고 칭하는 자는 반드시 관우와 장비를 든다...[24] 이는 모두 각 사서에 보이는 것이다. 관우와 장비 두사람의 이름은 단지 같은 시대 사람들만 보고 두려워했던 것이 아니라, 그들의 사후 수백년 동안에도 역시 두려워하고 놀라지 않는 이가 없었음을 볼 수 있다. 위세와 명성이 드리워진 바가 지금에 이르러도 변하지 않으니, 하늘이 낳은 신묘한 용맹이 진실로 헛되지 않다.
조익, 이십이사차기 제 96

4. 군사행정

《원화군현도지》(元和郡縣圖志)에 의하면 강릉성은 북쪽성과 남쪽성으로 이루어졌다고 했는데 남쪽성은 관우가 건설했다고 한다. 이런 기록을 보면 군사행정 능력도 우수하다고 할 수 있다. 여몽이 강릉성을 점령하자 관우가 이르길, "이 성은 내가 쌓은 성이니 공격할 수 없다"고 했다. 최진열 교수는 관우의 퇴각 동기가 탈영병 문제도 있지만 자신이 튼튼하게 건조한 성을 탈환하기 어려워서라고 분석했다.

5. 지력

관우는 워낙 출중하기도 하거니와 학문을 좋아해, 춘추좌씨전을 읽어, 거의 전부를 입으로 줄줄 외운다는데 (중략) 강직하고 웅대한 기백을 가지고 있습니다만 (후략)
강표전

관우의 전체적인 모습은 문무를 겸비한 걸출한 명장으로 그려지게 되었다. 관우는 지장이라고 불릴 정도는 아니었지만, 각종 기록에 관우가 학문을 좋아하고 옛 경전을 즐겨 읽어 출중하다는 기록이 있다.
  • 정사에서 관우가 학문을 좋아하고 춘추좌씨전을 외운다고 나와있다. 관우는 옛일의 사례들을 참고할 목적으로 춘추를 읽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 연의에서 관우가 단도부회에서 지략을 쓰고 빠져 나온 것은 허구다. 그래도 춘추좌씨전을 즐겨 읽는다는 점은 살려서 관우의 청빈함을 강조하는 아이템으로 종종 등장한다. 가령 유비의 위치를 알고 조조 밑을 떠날 때 조조에게 받았던 물건을 전부 봉하고 원래 물건만 챙기는데 이 중에 '평소 입던 헌 전포, 손에서 놓지 않던 춘추좌씨전' 등으로 묘사된다.
  • 정사에서 여몽이 병을 핑계로 건업으로 돌아가고 대타로 온 육손이 편지를 보내자 이에 속아 오에 대한 방비를 게을리했다. 단, 여몽과 육손은 오에서 손꼽히는 지략가다.[25]
  • 연의에서 관우가 번성에서 수공을 쓰는 지장의 면모를 보여준다. 그러나 정사에서는 수재(水災)였음이 명시되어 있다. 다만 정사 방덕전에 따르면 관우가 배를 타고 공격했었다는 언급이 있는 것으로 보아 그냥 가만히 있다가 이득을 본 것 같지는 않고, 나름대로 예상을 하고 준비는 했던 것으로 보인다. 더하여, 번성이 자주 침수되는 지역임은 알고 있었으나 정황상 당시 수재가 특히 심했던 듯 하다.

이를 통해 관우가 지장으로 칭송받을 정도는 아니지만 지략을 어느정도는 갖췄다는 걸 알 수 있다.

6. 정치

(전략) 그는 벌써 형주를 점거하고 은혜와 신의를 대대적으로 시행하고 있으며 (후략)
육손전

군사 지휘와 밀접한 관계를 가진 정치인으로서의 관우를 본다면 어떨까? 여러 가지 면을 볼 때 관우는 고대의 정치인으로서는 긍정적인 평가를 받기 어렵다.
  • 유비가 인정한 능력있는 인재 반준과 화목하지 못했다. 이게 중요한데 한자단어 상으로 반준의 경우에는 관우와 화목하지 못했다는 것이므로 단지 둘 사이가 친하지 않은 것으로 정리된다. 공무상으로 일을 같이 할 뿐이다. 때문에 반준의 경우 항복에 있어서도 능동적인 자세를 견지하지 않는다.
  • 형주 반환을 주제로 한 노숙과의 회담에서는 당연하지만 노숙의 말빨에 밀렸다.[26]
  • 외교 관계를 다루는 것은 그다지 뛰어난 모습을 보이진 못했다. 상대국의 군주인 손권을 대하는 태도에도 문제가 보였다. 다만, 손권 역시 지원군을 고의로 늦게 보내거나 느닷없이 관우 본인에게 혼담을 제의하며 딸을 사실상 인질로 내놓으라고 하는 등 어그로를 끈 것도 있다.
  • 미방사인 등 몇몇 부하들과의 사이가 좋지 못했다.
  • 병사들에게 잘 대해주거나 봉수대나 성채를 쌓으며 대비한 것을 보면 군정의 사령관으로써는 자신의 역할을 다했던 것 같다.
  • 번성 전투에서 물자 부족 현상을 겪었다. 단 이 문제는 군수물자를 대는 미방과 사인 두 사람에게도 문제가 있었다.
  • 처음엔 미방을 제외한 남군사람들은 항복의 마음이 없었고 오히려 여몽을 역습하려다가 우번의 간파로 인해 실패, 이후 여몽이 점령군의 군기를 엄정히 단속하여 고향 사람을 죽여가면서까지 후히 베푸는 정치를 하자 여몽의 통치에 백성들이 관우로부터 이탈했다.

민정과 행정에선 인심과 신의를 대대적으로 베풀었다고 쓰여진 기록으로 보아 어느 정도 좋은 점수를 줄 수 있다. 특히 오의 형주 침공 초반에 미방의 배신을 제외하면 큰 민심이반이 일어나지 않았고, 오히려 여몽을 공격하여 관우를 지원하려던 낌새마저 있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민생 관련 내정 측면에선 최선을 다한 것 같다. 오히려 형주에서는 호족이나 관리들을 중심으로 한 저항이 거셌다. 흔히 말하는 무릉만이들도 관우에게 호감을 더 가졌던 것으로 보이고 이후 그로부터 18개월이 지난 이릉전투에서도 호족 습진 등이 유비에게 가세한다. 관우가 패한 후에도 부하들 중 저항했던 이들이 등보, 곽목, 문포, 등개, 첨안, 진봉 등 여럿이다. 요화도 관우 사후 서쪽으로 도망쳤고, 18개월이나 오나라에 저항했던 습진의 사례도 있다. 그러니 형주 호족들이 등을 돌렸다는 건 애초에 사실이 아니다. 오죽 했으면 형주 일대에 백성들에게 선정을 베푼 대표적인 장군으로 관우양호가 자주 거론된다.

또 관우는 그 누구의 도움도 받지 않고, 꾸준히 익주로 병력이 차출되는 가운데 익양대치 이후 고작 형주의 1/3 가량에 지나지 않는 영토를 기반으로 모은 병력으로, 심지어 후방에 충분한 예비 병력까지 남겨둔 채, 천하의 2/3 이상을 차지하고 있었던 조조를, 그것도 형주방면 총사령관이자 자타공인 조조군의 에이스로 꼽히는 조인을 상대로 해서, 압도적인 우위를 점하고 공격을 퍼부었다. 군사를 모으고 조련하는 일에 있어서든, 전장에서 병사들을 지휘하여 적과 싸우는 일에서든 관우가 군정, 전투 모두 뛰어났다는 것엔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민정을 제외한 나머지 정략적인 부분에서 아쉬운 모습이 많았다. 외교에서 그러한 면이 두드러지는데 대표적인 경우가 우방국 최고 수장이었던 손권을 모욕한 예다. 이는 위나라에 맞서 결속을 다져도 모자를 판에 악감정만 증폭시켰다는 점에서 매우 위험한 행동이었다. 물론 손권이 먼저 지원군을 보낸다고 해놓고선 고의로 늦게 보냈다는 점, 혼인 제의 역시 그 꿍꿍이를 알 수 없다는 점은 감안할 필요가 있다. 하지만 사정이야 어찌됐든 최고 책임자로서 악감정은 접어두고 영리한 대처를 했어야 했는데 본인 성질을 못 이기고 거칠게 행동한 셈. 다만 이 기록 자체는 좀 조심히 봐야 한다. 기록 자체는 전략의 기록인데 주석자인 배송지부터가 '손권과 여몽이 겉으로는 화목했으나 안으로는 서로 시기하고 방비하니이 때문에 손권이 관우를 습격할 때 은밀한 군사를 몰래 일으켰다. 이 말대로라면 관우는 손권에게 도움을 청하지 않았고 손권은 필시 응당 갈 것이라는 말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만약 서로 원조하기로 했다면 무슨 까닭으로 그 거동을 숨겼겠는가?'[27] 라고 의문을 제기하고 있고 충분히 일리있는 지적이다. 자치통감도 이 지적에 공감했는지 이 기록을 수록하지 않았다.

내부 조직 관리 역시 물음표가 남는다. 특히 미방과 사인 처벌 사건에서 그러한 의문점이 두드러진다. 두 사람에게 군수물자를 날려먹고 보급을 제대로 하지 못했던 실책이 있었던 것이 사실이고, 상급자인 관우가 그에 대해 처벌을 논하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하지만 후방에서 수비와 보급의 중책을 맡고 있는 두 사람에게 처벌에 대한 불안감으로 딴 마음을 품을 시간적 여유를 줬다는 점에서 용인술의 문제점이 드러난다. 당시 위와 오를 동시에 상대해야 했던 관우로선 절대로 후방에 근심을 남겨두지 말았어야 했다. 따라서 미방과 사인을 처벌하려는 의도를 잠시 감추고 꺼내지 말든가, 아니면 신속히 처벌하여서 두 사람에게 딴 생각을 할 시간을 주지 말았어야 했다. 최소한 그 처벌에 있어서 공과 과의 명확한 선을 정해놓아 그들이 가질 수 있는 불안을 최대한 억제하는 게 필요했다. 법을 적용함에 있어서 입법이 정확한 양을 딱 정해놓기보다는 어느 정도의 기준치를 제시해두며 유연히 적용하도록 하는 것은, 법이 지향하는 목적, 안정되고 예측 가능하며 사람들의 보편적인 정의나 정감에 맞는 생활을 위함이다. 또한 공을 세운 자에게 면책의 특권을 부과하거나 죄를 가벼이 주거나, 죄가 중하지만 전날의 공을 생각해 문책하지 않겠다는 판결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이는 인간적인 정도 물론 있겠지만 용인술의 기본이다.

특히 미방은 유비를 서주부터 따른 창업 공신이자 당시 형주의 2인자로서 주요 거점을 지키던 핵심 인사였다. 관우 정도 위치의 책임자라면 고위 인사를 함부로 처벌하려 했을 때 일어날 반발과 파장 정도는 미리 예상했어야 했다. 배신까지는 아니더라도 내부 조직의 불안만 더 가중될 위험성을 간과한 것이다. 즉, 이른바 '조직 내부의 정치역학'을 다루는 영역에서 관우의 실책이 없다고 할 수 없다. 이와 대비되는 경우가 제갈량에게 처벌 받았던 마속, 이엄, 요립 등으로 그들은 결국 자신들의 죄값을 순순히 받아들였고 제갈량 사후 요립과 이엄은 두번 다시는 자기를 써줄 사람이 없게 되었다고 한탄하였다.

관우의 일화를 종합해보면 관우는 일반 민중들과는 좋은 관계를 유지했지만, 한 사회의 지배계급이라 할 수 있는 상류층, 지식인층과는 척을 지는 경우가 많았다. 이는 관우에 대한 평가 중 하나인 '병졸들은 잘 대해주었지만 사대부에게는 교만했다'라는 글귀와 일맥상통한다. 따라서 정치인으로서의 관우는 자신의 성격에서 비롯된 치명적인 문제점을 극복하지 못했다고 볼 수 있다.

물론 사대부 계급과의 불화가 권력에 아부하기를 거부했던 관우의 강직한 성품 때문이란 추측도 가능하겠지만, 꼭 그렇게만 볼수도 없는 것이 역사 속 다른 강직한 정치가들이 사대부들, 귀족 계층과 다 불화가 있었던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어찌됐든 실제 정치에서는 조금 더 민중을 괴롭히게 되더라도 상류층, 지식인층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는 쪽이 보통 더 효율적이었다. 고대로 거슬러 올라갈수록 민중들의 힘이나 결속력이 약했었기 때문에 더욱 그렇다. 삼국시대엔 백성들을 괴롭혔던 정치가나 군벌들은 수두룩했었고 결국 가장 성공했던 이는 학살과 수탈의 달인 조조였다. 또한 조조는 귀족 계층과 대체로 좋은 관계를 유지했는데, 꼭 그렇게 해야만 하는 것은 아니겠지만 관우처럼 대놓고 귀족계층과 불화했다고 얘기가 나오면 좋을 게 없다. 단순히 유비 밑의 무부, 장군 역할이었다면 유비가 관리해줄 테니 별 상관 없겠지만...

7. 충의

관우와 유비는 도의상으로는 군신(君臣) 관계지만, 은혜는 마치 부자(父子)의 관계입니다.
유엽전
관우는 조조에게 힘써 보답하고 (중략) 국사(國士)의 풍모가 있었다.
진수

인의지사 유비를 제치고 관우가 중국인들이 가장 선호하는 인물이 된 데에는 그의 용맹 뿐만 아니라 충의와 신의로 대표되는 그의 모습 때문이기도 하다. 관우가 신격화된 것이 따지고 보면 그의 충의지사의 모습 때문이다.
  • 관우는 유비와 같은 침상을 쓰고 은혜가 형제와 같을 정도로 군신의 관계를 뛰어넘어 평생 그에게 충성을 다했다.[28]
  • 조조 밑에서 원소군의 대표적인 장수 안량을 베는 엄청난 전공을 세웠음에도 불구하고 받은 관직, 보화를 모두 내놓은 채, 유비의 행방을 알자마자 바로 유비를 찾아 길을 나섰다.[29] 당시 유비는 근거지로 삼았던 서주를 잃고 원소의 객장 신분으로 잔여 세력을 추스리고 있을 뿐, 헌제의 밀서를 받았다는 정치적 입지를 제외하면 미래가 불투명한 상황이었다. 유비에게로 돌아간다는 것은 빈털터리나 다름없는 주군의 부하가 된다는 것이었으나 관우는 모든 것을 버리고 옛 주인에게 돌아갔다. 현대로 치면 잘 나가는 경쟁사 사장님의 적극적인 러브콜을 정중히 거절하고 미래를 기약할 수 없는 창업동지이자 원래 모셨던 사장님에게 다시 돌아간거다.
    사실 뿌리깊은 관우신격화[30]에 반발해 중국이나 한국에서 관우를 객관적으로 보자며 오히려 관우를 평가절하하는 시각도 종종 보인다. 이러한 해석 중 하나가 "대기업(조조)에서 부장직 하나 하느니 중소기업(유비)에서 부사장하는 게 훨씬 나은거라 돌아간 것"이라고 보는 것인데, 이 시점에서의 유비를 굳이 기업에 비유하면 유비는 중소기업도 아니라 부도난 기업이었다. 중소군벌도 아니고 원소의 객장 수준이었던 유비는 이 시점에서 사장이 아니라 그냥 대기업의 컨설턴트, 그것도 원래 대립하던 기업이라 자리도 불안정한 임시직에 비유하는 게 가깝다. 언제 길바닥에 나앉을지 모르는 상황에서, 경쟁기업이라고는 하지만 원래 자기회사의 전성기에 비교조차 안되던 초거대기업, 그것도 회장의 총애를 듬뿍 받는 상황에서 뒤도 안 돌아보고 사표 쓰고 나간 것이다. 그것도 그동안 받은 엄청난 보너스나 선물같은 건 고스란히 두고. 관우와 같은 상황에서 주인을 바꾼 사람들이 삼국지에만 해도 얼마나 많은지 생각해 보면 된다. 애초에 새 세력에서 대접이 맘에 안 든다고 다시 박차고 나간 사람은 있어도[31][32] 이렇게까지 좋은 대접을 받는데 오직 충성심하나로 그 좋은 대접을 다 포기한 사람은 역사상 거의 없다. 관우가 신격화되기 때문에 그 충성심이 과대평가받는 게 아니라, 상식적으로 이해가지 않을 정도로 강력한 그 충성심과 의리 때문에 그가 천년 넘는 세월동안 충의의 상징으로 칭송받으며 신격화된 것이다.[33] 관우같은 사람은 중국역사를 통틀어봐도 죽을 때까지 진충보국을 외쳤던 악비 정도가 꼽힐 정도로 드물다.
  • 연의에서 유비와 떨어져 있는 동안 형수님들을 잘 돌봐준 것은 나관중의 창작이다. 정사에서는 선주전에 유비의 처자가 관우와 함께 잡혔다는 기록이 있지만 이후 형수들의 행방에 대한 언급이 없어 유비에게 같이 데려갔는지조차 불분명하다.[34]
  • 화용도에서 조조를 보내주는 장면도 관우의 의로움을 부각시키기 위한 연의의 창작이다.
  • 정사에서도 유비는 관우가 죽은 일로 인하여 북벌을 미루고, 오를 치기 위해 전력을 다한다. 이 때문에 이릉대전에서 참패해 많은 인재를 잃고 본인도 병들어 사망했는데 당시 조운, 제갈량은 물론이고 조정의 신하들이 직위를 막론하고 모두 반대했음에도 오직 관우의 복수를 하기 위해 오에 국력을 쏟았을 정도로 유비에게 있어 관우의 위치가 특별했음을 보여준다.

7.1. 유비와 관우의 관계

관우가 황충과 같은 반열로 공적을 받았을 때 나온 반응에 대해서는 관우의 굳센 자부심으로 인한 오만으로 보는 것이 전통적인 해석이고 실제로 그러하다. '그래도 관직을 거부하지 않고 비시의 말을 듣고 깨우쳐서 관직을 즉시 받았으니 뭐 반발이랄 것도 없지 않나? 살짝 툴툴거렸다가 비시가 잘 타이르자 어험~ 하면서 넘어간 건데 그냥 일종의 해프닝 정도로 봐야 하지 않겠느냐.'라고 대수롭지 않게 여기며 관우가 이치에 맞는 말은 알아듣는 사람이라며 나름대로 해석하는 것도 일리가 있다.

흥미로운 지점은 이 당시 제갈량이 보였던 걱정이나 그에 대한 유비의 반응이다. 제갈량은 관우의 반응을 거의 정확하게 예측하고 간언했고, 유비는 다 알고 있다는 듯이 대수롭지 않게 곧바로 비시를 보내서 관우에게 자신의 뜻을 전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이 바로 "내(유비)가 직접 관우에게 이 상황을 이해시키겠다."면서 비시를 보낸 것이다.
"무릇 왕업을 세우는 데 있어 사람들을 쓰는 일에 한 가지 기준만 적용할 수는 없는 법입니다. 옛날 소하조참한고조와 젊은 시절 친구였으나, 진평한신은 망명하여 늦게 도착했음에도 불구하고 반열에 있어서는 한신이 가장 위에 있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소하와 조참이 이러한 일로 원망을 품었다는 이야기는 듣지 못했습니다. 지금 한중왕께서 한때의 공로를 가지고 한승을 높이고 계십니다만, 속으로 경중을 생각하는 바가 어찌 그대 군후와 같을 수 있겠습니까? 지금 한중왕과 군후께서는 말하자면 한몸과 같은 관계시니, 기쁨과 슬픔이 같고 재난과 복을 함께하는 것입니다. 제가 어리석게 생각건대, 군후께서 관호의 높낮이나 작록의 양을 따져서 마음속에 담아두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저는 일개 심부름꾼으로 명을 전하러 왔을 뿐이니 군후께서 절하고 받지 않으신다면 곧 돌아갈 뿐입니다만, 이러한 행동을 애석하게 여기며 후회하는 바가 있을까 그것이 두렵습니다."
정사 삼국지에서 비시가 한 말.

즉 비시의 입을 빌려 유비가 관우에게 하는 말을 정리하면 이렇게 된다.

"내가 한승(황충)을 너와 같은 반열에 올리면 네가 언짢아 할 것은 당연히 알고 있었어. 하지만 한고조한신을 최고 반열로 올렸다고 훨씬 오래 함께 하였던 소하가 화냈다는 이야기는 없잖아? 그러니 너도 화내지 않았으면 해. 그리고 한승이 일시적으로 큰 공을 세워서 관호를 높이 올릴 만한 이유가 있었어. 그렇다고 해서 내가 너를 한승과 같이 취급하는 건 아니야. 소하가 고제에게 그러하였듯이, 운장 아우가 나한테 있어서는 훨씬 더 소중한 존재야. 형 마음속에는 당연히 네가 언제나 최고라고, 응? 우리 사이가 그런 군호와 봉록의 차이로 이제 와서 흔들릴 거라고 생각하지 않아. 우리는 언제나 그랬듯이 한 몸처럼 기쁨과 슬픔을 함께 하고 화와 복도 같이 하는 의형제야. 그러니까 부탁할게. 제발 이 관직을 받아줘라. 그렇지 않으면 너 역시도 마음 속으로는 후회하게 될 거라고 생각하니 부디 잘 생각하고 결정해줘."

관우는 이 말을 듣자 언제 반발했냐는 듯 즉시 관호를 받는다.

흥미로운 건 비시(의 입을 빌린 유비)의 말에선 황충이 충분히 높이 올릴 만한 큰 공로를 세웠지만 관우 자신과 대등한 공을 세웠으니 인정해달라는 말 같은 건 하지 않는다. 중요한 건 다른 누구보다도 유비(나)한테 있어선 관우(네)가 (누구와 비교할 수 없는) 한 몸이나 다름없는 가장 소중한 존재이며 단순한 이익같은 것으로 서로를 재단할 수 없는 관계라는 점을 강조한다는 것이다.

관우가 화가 풀린 이유는 물론 그 말이 이치에 맞는 말이기도 했지만, '항상 관우 자신만을 가장 최고라고 생각하던 유비'가 '어느새부터 자기보다는 덜 신경 쓰고 있던 급이 낮은 다른 사람을 자신과 같이 보고 있는 게 아니냐'(장비는 자신보다 급이 낮다고 할 수는 없고 자신과 함께 처음부터 유비를 섬겼으니 제외)는 불만과 서운함, 질투를 풀어주는 말이었기 때문이기도 한 것이다.한 마디로 관심 안 가져줘서 삐진거다. 관심관우

관우는 제갈량이 처음 들어왔을 때도 유비제갈량이 가까운 걸 보고 장비와 함께 질투했지만 유비의 말로 풀어진 적이 있었다. 명망이 높은 마초 상대로도 그가 들어오자 '마초는 어떤 사람이냐?'라고 제갈량에게 물었을 때 제갈량이 '관우 당신보다는 못할 것.'이라는 말에 기뻐했다. 이건 제갈량이 관우의 눈치를 본 것이기도 했지만, 실제로 당대 관우의 명성을 생각한다면 거짓말한 건 아니었다.

즉, 그가 평생 보여준 자부심과 오만은 "그가 평생을 두고 사모하고 충성을 바친 유비의 세력에서 내가 가장 그에게 총애받는 사람이며, 천하의 주인이 될 자격이 있는 그 사람(유비)에게 있어서 언제나 내가 최고."라는 자부심으로 해석할 수 있다. 제갈량은 그 질투를 직접 겪어서 그런지, 관우 상대로 별명을 부를 정도로 친분을 가지면서도 늘 조심했다. 곱빼기 삼국지에서는 이런 관우의 성격을 하여간 잘 삐진다니까로 요약했다.

유비의 숙적이었지만, 한편으로는 그를 자신과 대등한 영웅으로 인정하고 두텁게 대했던 조조 밑에서의 관우는 오만한 모습을 보여준 적이 없다. 항상 장료서황같은 같은 항복한 장수들하고만 교분을 가지며 몸가짐을 삼갔다. 조조가 곧바로 눈치를 챘을 정도로 유비를 그리워한 탓에 조조의 사주를 받은 장료에게 추궁당한 적이 있지만 조조에게 무례히 군 적은 없다. 관우는 조조의 은혜를 부담스러워해서 한숨을 쉬었지만 '언젠가 은혜를 갚고 함께 죽기로 약속한 유 장군 곁으로 돌아가겠다'는 의지를 장료를 통해 조조에게 전했고, 백마에서 안량의 목을 베어 은혜에 보답하고 떠나며 약속을 지켰다.

이렇게 보면 손권에 대한 그의 적대감이나 대놓고 무시같은 것도 손오동맹 과정에서 손권 측이 보여줬던 '감히 내가 최고라고 인정하고 충성을 바치는 사람(유비)을 홀대한 것'에 대한 앙심에 가까운 것으로 충분히 해석될 수 있는 부분이다. 익양대치에서도 나와 있지만 양측의 동맹을 중요하게 여기고 주장하던 노숙조차도 은근히 유비를 디스하는 발언을 해서 대담 분위기를 험하게 만들었는데, 이를 눈앞에서 바로 본 관우로서는 주화파인 노숙도 저런데 다른 오나라 강경파들이야 오죽하겠냐고 생각했을 가능성이 높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비와 관우의 관계를 의심하는 사람들도 있다. 유비와 관우의 사이가 좋았던 것은 분명하지만 번성 공방전 시점에서는 벌어져 있었으리라는 주장이다. 이는 관우가 조조 세력과 전쟁을 벌이는데도 유비가 전혀 지원하지 않았고, 관우가 죽은 후에 슬퍼했다는 기록이 없으며, 관우가 죽은 후에 작위를 내리지도 않았다는 점 때문이다. 참고 번성 공방전에 대해서 많은 사람들이 북벌 초기에는 압도적인 전과를 올렸으니 지원이 필요하지 않았고 관우가 죽은 것은 결과론일 뿐이라고 하지만, 오히려 그러한 설명 쪽이 결과론이라고 볼 수도 있다. 거대 세력인 조조와의 전쟁을 시작한다면 북벌을 시작하기 전에 먼저 지원군을 보내서 전력을 보강하거나 한중 방면 등에서 협공하는 식으로 지원하는 편이 자연스럽고, 초기에 대승을 거둔 시점에서 보더라도 조조가 대군을 동원해서 다시 반격해올 것을 예상하기는 어렵지 않기 때문이다. 연의에서는 말할 것도 없고 정사에서도 뛰어난 제갈량의 혜안이 한 두 줄의 주석으로도 남아있지 않은 부분이 바로 이 번성전이기도 하다.[35]

정사 삼국지에서 유비는 관우의 죽음을 전해듣자 대노했다고 기록되어 있으며 한중공방전 직후 상용을 점령하였고 관우에게 지원군을 보내지 않은 것을 원망했다는 기록을 보면 유비가 지원을 준비하지 않았다고 볼 수 없다. 거기에 후계자 문제도 있지만 정사의 기록 상 유비는 관우를 구원하지 않은 유봉과 맹달을 원망하고 있었다. 결정적으로 관우가 죽은 뒤 유비는 대노하며 이릉대전을 일으켰으며 타국에서조차 유비와 관우는 부자의 관계와 같으므로 복수를 하지 않을리가 없다고 할 정도였으므로[36] 그가 관우와의 관계가 벌어졌다고 생각하기는 어렵다.

또한 다른 근거들로 따져도 유비가 관우를 추봉하지 않았고 관우가 장목후(혹은 장무후)로 추존된 것은 유선의 재위 말기의 일이라는 점은 장비, 마초, 방통, 황충이 시호를 받은 것도 같은 시점이라는 점에서 유비와의 관계를 의심할 이유로 보기는 어렵다. 유비 생전에 유비보다 먼저 죽은 신하들 중 시호를 받은 것은 오로지 법정뿐으로 익주평정에 많은 공을 세워 그토록 유비가 죽음을 애석해했던 방통도 시호를 받지 못했다.

그러나 유비가 황제의 자리에까지 올랐으면서도 왜 공신들에게 작위를 내리지 않은 것인지, 그리고 번성 공방전 시점에서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는 수수께끼이다.[37] 다만 상용에 있던 유봉이 관우를 지원하지 않았다는 이유가 유봉이 죽음에 이르는 한 원인이었기 때문에 여차하면 상용의 유봉, 맹달이 지원할 것이라 여겼을 수도 있고 관우는 한 지역에 진수하는 도독으로서 그런 지원을 요청할 권한을 가지고 있었다.

애초에 관우와 유비가 사이가 멀어졌다는 기록은 전무하며, "관우가 당하고 있는데 지원군을 보내지 않았고 작위를 내리지 않았다"는 정황적 증거뿐이다. 그리고 이는 당시 지리적 특성과 시간흐름을 간과한 해석일 뿐이다. 손권이 관우를 토벌하겠다고 조조에게 서신을 보내고, 장료가 소환된 것이 219년 10월, 그리고 관우가 사망한것이 12월이다. 즉 관우가 천하에 위세를 떨치던 시기로부터 고작 두달만에 갑작스레 전세가 바뀌어 사망한 것이다. 위에서 지적한대로 지원군을 보내 한중쪽에서 협공하는 것이 가능하긴 하나, 전쟁이 무슨 게임처럼 바로 병력을 보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유비가 한중을 점령하고 한중왕에 등극한 게 바로 같은 219년에 있던 일이었다. 강력한 세력이었던 한중을 점령하는데 소모된 유비의 군세가 바로 북벌을 시도한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38] 관우가 번성을 차지하는 동안 한중을 점령한 유비가 세력을 수습하고, 그 이후에 같이 관우와 유비가 양방향에서 공격하는 것이 자연스러운 흐름이다.[39][40] 그러나 손권이 개입하면서 오히려 관우가 양방향에서 오는 공격에 고립되게 되었고, 수를 쓸 수도 없이 순식간에 패배하고 만 것이다. 고대 중국이란 걸 잊지 말자. 관우가 고립되었다는 서신이 한중에 있는 유비에게 전달되어야 하고, 수만명이 되는 지원군을 동원하면서 식량과 무기, 장비도 준비해야 하고, 한중에서 출진했다고 해도 번성까지 진군하는 시간도 걸린다.[41] "앗 관우가 위험해? 5만 병력을 출격시켜라!"고 바로 이뤄지는 게 아니다. 즉 관우가 당하는 걸 유비가 수수방관한 게 아니라, 유비가 반응할 새도 없이 순식간에 당하고 말았다고 보는 게 적절하다.[42]

두번째로 작위를 내리지 않은 것의 경우, 관우가 사망한 것이 219년 12월이었고, 유비가 유봉을 숙청한 것이 220년 4월, 헌제가 조위에게 선양한 것이 220년 10월, 유비가 황제에 등극한 것이 221년 4월, 이릉대전을 위해 군대를 일으킨 것이 221년 7월이다. 12월에 사망한 관우의 소식이 유비에게 전해진 것이 220년 초의 일일텐데, 이로부터 얼마 후 관우를 제대로 지원하지 못했다는 이유로 문책당하고 죽은 것이다. 또한 이릉대전은 유비가 황제에 오르고 거의 처음 한 행위 중 하나이란 걸 알 수 있다. 평생을 싸워온 호걸인 유비가 의동생의 복수를 하는 것과 작위를 내리는 것 중 복수를 먼저 선택한 것인데,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다.[43] 유일하게 유비에게 시호를 받은 법정이야 당연히 원래 촉나라 측의 주요인물이었으니 나라를 안정시키고 민심을 얻는 과정에서 먼저 대접을 해줄 필요가 있었지만, 다른 장수들의 경우 당시 유비가 죽음을 앞둔 것도 아니었고 친정을 할 정도로 팔팔했던 그가 서둘러서 시호를 내릴 이유도 없었다. 또한 유비는 이릉대전 이후 성도로 귀환하지 않고 백제성에서 사망했으니 이때는 그럴만한 시간도 없었다.

애초에 관우를 포함해 장비, 마초, 방통, 황충이 시호를 받은 것은 이들 모두가 죽은지 수십년이 지난 260년, 조운이 받은 것은 261년이었다. 가장 늦게 죽은 조운(229년)이 죽은지도 31년이 지나서였다. 이를 보면 시호를 내리는 것이 그렇게까지 급하게 해야할 일이 아니었음을 알 수 있다.[44] 또한 이릉대전 몇달전에 죽은 장비 역시 유비에게 시호를 받지 못했으며, 관우는 형주측 총사령관, 장비는 거기장군에 임명되었을 정도로 저들은 당시 촉한에서 가장 직위가 높고 권력이 강한 무인들이었다.[45]

만약'시호를 못 받은 것은 유비와 사이가 멀어졌기 때문이다'란 설이 맞다면 유비는 거병 시절부터 함께한 형제와 같은 사이인데다가 진영 내에서 가장 중요한 장수들이었던 장비/관우와 말년에 둘 다 사이가 안 좋아졌으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중대한 사건에 대한 기록은 전혀 없고, 사이가 안 좋음에도 높은 직위와 권한을 줬다는 얘기가 된다. 또한 '관우와 유비가 멀어졌기 때문에 유비가 구원을 안 했다'는 게 맞다면 유비는 그렇게 사이가 안 좋아진 관우에게 가장 중요한 요충지 중 하나인 형주의 방어를 맡겼고, 관우가 싫다는 이유만으로 북벌에 필수적인 형주를 잃는 것을 수수방관했다는 얘기가 된다. 어떻게 봐도 앞 뒤가 안 맞는 얘기다.

8. 성품

관우는 병졸들은 잘 대해주었지만 사대부에게는 교만했고, 장비는 군자는 경애했지만 소인은 돌보지 않았다.
장비전
관우는 굳세고 자부심이 강하고 장비는 난폭하고 은혜롭지 않아서 자신의 단점으로써 패망하게 되었으니 도리와 이치의 상례로다.
진수
관우는 자신의 용기에 기대어 다른 사람을 능멸합니다.
육손

동시대의 사람들은 모두 관우를 굳세고 자부심이 강한 오만한 성격이라고 평가했다. 그를 형처럼 따랐던 장비와 가장 대비되는 점인데 장비가 사람을 군자와 소인으로 나누어 군자는 예우하고 소인에겐 가혹했다면 관우는 아랫사람들에겐 관용을 베풀었지만 기득권층에 속하는 사람들과는 트러블을 일으킨다.[46] 관우와 장비 각각 방식은 좀 다르지만, 모두 교활함과는 아예 거리가 있는 원리원칙이 분명한 강직한 성품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조금이라도 사특한 마음을 품은 무리들이 자기 영달을 위해 관우와 장비에게 접근하면 이들은 귀신처럼 알아채고 도리어 벌을 주거나, 아예 내쳐버렸을 것이다.
  • 제갈량으로부터 마초보다 관우가 낫다는 답장을 읽어보고는 아주 기뻐하여 주변의 빈객들에게 보여주기까지 했다.
  • 황충이 자신과 동렬에 놓이자 황충을 노병이라며 자신과 동렬로 두지 않으려 했다. 물론 비시가 벼슬의 높고 낮음을 따지는 것 자체가 잘못되었다고 지적하자 곧바로 반성하는 대인배 기질을 보이기도 했다.[47]
  • 손권이 정략혼을 하러 권하러 오자 그 사신을 모욕하며 쫓아냈다. 아무리 손권에게 악감정이 있어도, 진지하게 정략혼을 권하는 게 아니라 일부러 외교 마찰을 일으키려는 수준의 개소리라고 해도, 공식적인 외교 관계에서 이런 모습을 보여주는 것은 한 지역을 진수하는 사령관으로서 외교적 자질이 떨어진다. 당시 상황에서는 거절하는 게 정답에 가깝긴 했지만 그렇다고는 해도 방식이라는 게 있는 법이다. 주군인 유비한테 허락받지 않는 결혼은 곤란하다며 유비에게 결정을 미루거나 하는 식의 유연성이 있었으면 하는 아쉬움이 생길 수밖에 없는 대응이다.
  • 익양대치에서 노숙이 말을 돌리며 어그로를 끌자 이에 아군 병사가 항의하며 반박하여 발끈한 노숙이 언성을 높이며 회담 분위기가 과격해질 조짐을 보이자 관우는 오히려 병사를 물러나게 하는 한편 노숙에게 이런 이야기는 양측의 지도자가 더 자세히 나누는 것이 좋다며 더 큰 일이 터지기 전에 정리하는 면모를 보여줬다.
  • 관우가 평소 미방을 업신여겼다는 서술이 분명히 있으며, 이걸 대놓고 티를 내면서 후방을 맡겼다. 단 미방의 경우는 명백하게 자기 자신이 군법에 연루될 죄를 지었는데 벌받을 게 무섭다고 통수친거라 미방이 더 추하다.
  • 동맹국 군주 손권에게 오소리 새끼라고 비방하는 등 함부로 대했다. 단, 당시 손권이 관우에게 지원군을 보내겠다고 언질을 준 후, 고의로 지원군을 천천히 보낸 것이기 때문에 욕이 튀어나올 만한 상황이긴 했다. 하지만 욕이 튀어나올만한 상황에서도 허허거려야 하는 게 정치판이라는 것을 생각해보면 역시 아쉬울 수밖에 없다. 다만 이 일화 자체가 배송지는 믿을 수 없는 일화이며 비록 이들이 겉으로는 화목했으나 안으로는 서로 시기하고 방비하니 이 때문에 손권이 관우를 습격할 때 은밀한 군사를 몰래 일으켰다. 만약 서로 원조하기로 했다면 무슨 까닭으로 그 거동을 숨겼겠는가라며 의문을 표했다. 자치통감에도 이 일화는 기재되어 있지 않다.
  • 소인에게는 온화했던지라 관우는 우금과 3만의 포로들을 살려두었고 이들도 먹여살리려고 했다. 이는 군량과 포로 관리의 어려움을 이유로 포로들을 집단 학살했던 다른 역사적 인물들의 사례에 비춰보면 확실히 관용적인 태도였긴 했지만, 그 해결책이 동맹국이었던 오나라의 군량을 탈취하는 것이었다. 여몽이 언급했듯, 백성에게 너그러운 정치를 펼쳤다고 볼 수 있다 지방 호족과 화목하지 못했고 대표적인 예가 바로 반준이라는 주장도 있긴 한데 한자단어 상으로 반준의 경우에는 관우와 화목하지 못했다는 것이므로 단지 둘 사이가 친하지 않은 것으로 정리된다. 공무상으로 일을 같이 할 뿐이다. 때문에 반준의 경우 항복에 있어서도 능동적인 자세를 견지하지 않는다.
  • 관우의 성격적 특징으로 보통 오만함을 주로 손꼽는 경우가 많지만 관우가 보여주는 중요한 일관적인 특성중에 하나가 바로 언행이 완전하게 일치되어 희노애락의 속마음이 겉으로 그대로 드러낸다는 점이다. 몇번이나 두씨를 준다 약조한 조조가 약속을 깨자 마음이 불편하다는 것을 드러내기도 했고 조조를 죽이지 않아 화를 당한 주군 유비를 상대로 대놓고 "제 말을 그때 들었으면 이런 일은 없지 않았겠습니까?"라고 불만을 드러내기도 한다. 조조 밑에 있을때도 조조가 눈치 챌 정도로 불편한 심기가 있어 장료에게 속을 떠보라고 시켰을때도 너무나 적나라하게 조조를 떠나 유비 곁으로 어떻게든 가겠다는 속을 드러내 장료조차 이걸 말하면 혹시라도 관우가 죽지 않을까 걱정했을 정도였으며 이후 조조가 더 무겁게 은상을 베풀어도 그걸 봉인하고 애당초 약속대로 홀연히 떠난다. 형주에선 대놓고 유비에게 총애받는 제갈량을 질투하기도 하고, 그러면서도 또 제갈량에게 마초보다 그대가 낫다는 말을 듣고 기뻐하며, 황충과 같은 대우라는 점에서 화를 내기도 하지만 비시가 깨우쳐주자 바로 화를 풀기도 한다. 여기에 정치 문제에서도 나오는 얘기지만 사인과 미방의 실책에 대해서도 직설적으로 질책하여 문제가 되기도 하고, 직설적으로 손권세력과 마찰을 빚고 아랫사람에겐 관대했기에 자신의 휘하로 들어온 3만포로를 먹여살려야 한다는 입장에 처하자 주저없이 상관의 쌀을 가져오기도 한다. 번성공방전 당시 서황과의 대화에서도 서로 친했기에 사적인 대화를 나누다가 갑자기 서황이 이것은 나랏일이라며 태도를 싹 바꾸자 당황하려 두려워하는 감정이 그대로 드러나는,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담대한 영웅과는 또 다른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관우는 무쇠처럼 굳은 사나이기도 했지만 항상 생각과 마음, 신념이 몸과 하나가 되어 있어 감정과 생각이 직설적으로 나가는 사나이였다. 사실 오만하다는 평가를 받는 관우지만, 동시대엔 관우보다 더하게 오만하거나 성격이 나쁜 인물들은 얼마든지 있었다.[48] 유난히 관우의 오만한 성정이 돋보인 건 나쁘게 말하면 감정을 숨기거나 추스리는 걸 하지 못하거나 안 해서이고, 좋게 말하면 가식과는 거리가 멀어서일지도 모른다. 따지고 본다면 관우만 유독 성격적 단점을 부각당하며 집중포화를 당하는 경우가 많으니 관우로서는 억울한 면도 있을 것이다.[49] 이는 그만큼 관우라는 인물이 당대는 물론 수천년이 지난 지금도 그 이름값이 강할만큼 높은 위상을 가지고 있다는 이유도 존재한다 볼 수 있겠다.
  • 의외로 자신이 인정한 자들에게는 진중하거나 친근한 태도를 보였고 잘못된 것을 듣고 시정할줄 아는 풍모가 있었다, 장료와 서황과 형제처럼 친하게 지내며 장료에겐 자칫하면 위험할 수도 있는 발언인 유비에 대한 충정을 토로했고 비록 섬길 마음은 없었으나 조조에게 은혜를 갚고 그가 베푼 재물, 벼슬도 받지 않은채 홀연히 떠났다. 서황과 적으로 만나서도 흉금을 터놓고 얘기하다가 갑작스런 태도 변화에 당황한 기록도 있다. 처음엔 제갈량을 못마땅히 여겼지만 나중에 형주에 진수했을때 제갈량과 딱히 갈등이 있지 않았고 오히려 사람을 보는 제갈량의 안목을 믿고 마초를 평가해달라는 편지를 보내기도 했으며 그의 칭찬에 기뻐했다. 황충을 노병이라며 못마땅히 했지만 그런 태도는 잘못된 것이라고 지적하는 비시의 말을 듣고 마음을 고쳐먹는 면도 있었다. 적의 장수 방덕을 잡고 그를 높게 평가해 회유하고 장수로 삼으려는 태도도 보여주었다. 이런 면모가 그가 국사의 풍모가 있었다는 평가로 나타난 것으로 생각된다.[50]
  • 사실 당시 기준으론 "오만하다"고 평가되었지만 위에 소개된 일화를 자세히 살펴보면 현대 기준으론 솔직하고 지극히 인간적인 성격에 가깝다. 껄끄러운 사이였던 제갈량이 자신을 높이 평가하면 좋아하는 게 자연스러우며, 유비가 거병하던 시절부터 함께한 본인과 막판에 합류한 황충이 동렬에 놓이면 인간으로서 불편한 게 당연하다. 손권의 경우 당시 조조를 포함해 그 세대 사람들은 나이도 한참 어린데다 후발주자인 손권을 자신보다 아래로 여기고 있었다. 미방의 경우 죄를 지은 부하직원인데 좋게 볼 이유가 없다. 즉, 관우가 "오만하게" 행동한 경우 그와 비슷한 위치의 사람들도 대부분 그와 비슷하게 생각은 하고 있던 경우들이나, 관우의 차이점은 이를 솔직하게 표현했다는 것 뿐이다. 다른 이들은 이를 숨겼을 뿐. 현대적 시선으로 보면 관우는 사실 가식이 없고 솔직한 것이고, 반면 덕이 있다고 평가받은 유비는 자신의 본심을 숨기는 음험한 부분이 있다. 관우와 정반대 케이스는 이는 현대의 평가로는 피도 눈물도 없는 정치괴물인 원소가 당대 명사들에게 명망이 높았던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일반적으로 "오만한" 인물이라면 아무 힘없는 백성들이나 병졸들에게 잘해줄 이유도 없다. 또한 진짜 오만했다면 황충에 대해 폄훼하는 자신의 태도가 잘못된 것이란 (자기보다 아랫사람의) 지적을 듣고 마음을 고쳐먹을 리도 없다.[51][52] 즉 체면을 중시하는 시대에 상대를 가리지 않고 싫으면 싫다고 한 것이 당시로선 오히려 마이너스 요소였던 것.
  • 현대 독자들에게 남아있는 관우의 이미지는 연의에서 고고하고 점잖은 이미지와 정사에서 오만한 이미지가 섞인 감도 있는데[53], 실존 인물 관우의 행적만 살펴보면 점잔 떠는 이미지와는 거리가 매우 멀다. 순수하게 '인간 관우'의 행적만 보면 친구인 서황이 예상치도 못하게 갑자기 돌변하자 순간 쫄아서 "형 왜 그럼?"하거나, 60줄에 들어선 양반이 의형이자 주군이 항장(황충)을 좀 높게 대접했다가 삐쳤다가 부하가 와서 아직까지 유비의 최애가 관우란 걸 확인하고 금세 풀어지거나, 제갈량을 질투했다가 나중에 친해지거나, 두씨가 미인이란 걸 알고 취하길 원했다가 조조가 가로채자 마음에 담아두거나 하는 등, 능력이 출중하고 용감한 것과[54] 별개로 성격 자체는 가식과는 백만광년쯤 거리가 있는 지극히 솔직하고 인간적인 좌충우돌하는 인물이다. 연의나 삼국지 평화 등에서 그리는 인간미 넘치는 장비의 모습에 가깝다.[55] 사실 실존인물 관우는 대중이 감정이입하기 좋은 성격의 인물이었는데도 민간설화 속에서 점점 고고한 이미지로 변하면서 추앙을 받고, 장비는 차갑고 사무적인 인물이었는데도 대중들의 인식에선 점점 인간적인 캐릭터가 되었다는 것도 아이러니하다.

오늘날에 등장하는 삼국지 관련 창작물이나 관련 논의에서 관우의 부정적인 면모를 드러낼 때는 주로 관우의 오만함을 강조한다. 거의 의리와 충성심이 탑재되어 주군과의 관계가 끈끈해진 럭키 한신 취급.

8.1. 손권 관련 해석

손권은 유비가 자리를 비운 사이 무단으로 손부인을 데려가고 유선을 납치하려 했으며 더 깊게 생각하자면 손가와 유가는 원래부터 원수지간이다. 촉한의 유비는 유표와 형 동생하며 지낸 적이 있었고 유비는 유표의 후사 문제에 관여할 수 있을 정도로 유표와 어느 정도 의리를 간직하고 있었다.

문제는 유표가 동오의 손권에게는 뭘로도 갚을 수 없는 커다란 원한이 있다는 점. 유표가 손권의 아버지인 손견을 죽게 했기 때문이다. 형주의 점유는 이미 선대인 손견, 손책 때부터 손권 자신이 부친의 원수인 유표를 지속적으로 공격하고 적벽 이후 바로 형주를 공격했다는 것에서부터 알 수 있듯이 손가의 오래된 염원이기도 했다.한마디로 손권에게 형주 쟁탈은 단순한 땅따먹기만의 문제가 아니라 아버지인 손견의 넋을 달래줘야 한다는 점도 작용하고 있었다. 유비는 친한 형님이 물려준 땅을 함부로 남에게 내줄 수 없는 노릇이고 손권으로서는 어떻게든 아버지의 원한을 풀어줘야만 했다. 굳이 관우가 아니어도 형주 문제로 인한 촉한과 동오의 싸움은 피할 수 없는 문제였으며 그 자리에는 삼국지에서 가장 욕을 안먹기로 소문난 조운을 앉혀놔도 결과는 다를 게 없는 상황이었다.[56] 다만 유비로서는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 영토였기 때문에 가장 신뢰하는 사람을 앉힌 것일 뿐이였다.

손권의 형주 침략 전, 이미 형주 분쟁으로 유비와의 동맹이 거의 파탄에 이른 상황에서 손권의 혼인 제안은 꿍꿍이가 어떻든 겉으로나마 동맹 강화에 목적이 있었긴하다. 앞서 유비의 뒷통수와 손권의 손부인을 통한 납치 시도 그리고 익양대치를 통해 험악해질 때로 험악해진 두 가문 사이의 화친을 위한 목적일 수도 있지만 위의 손씨와 유씨 집안 사이의 문제도 있었고 관우를 손권이 동맹으로서 손부인이 유비 옆에서 군사와 관리를 거느리고 위협을 가하고 오라버니의 위세를 믿고 행패를 봤던걸 똑똑히 봤던 사람이라 혼인동맹이랍시고 손권이 무슨짓을 할 지 모르는데 결혼동맹을 마뜩치 않게 봤을 공산이 크다. 당장 손오동맹을 이끈 제갈량마저 법정과의 자리에서 손부인의 패악이 크다고 한마디 했을 정도였고.[57] 거기에 어쨌든 이런 혼사를 얘기할거면 관우의 주군 유비에게 먼저 얘기해야지 관우에게만 통보식으로 얘기하는건 안 그래도 형주에서 독자적인 군권을 지닌 관우를 떠보는 것과 동시에 주군 유비를 무시하는 행위인데 관우가 이를 순순히 받아들이는 것도 사실 무리밖에 되질 않는다.

형주 침탈은 멸망 때까지 오라는 국가의 방향을 결정지었던 사건으로 어제의 적도 오늘의 아군이 되는 난세에 이같이 중대한 결정을 단순히 손권이 관우에 대한 개인 감정 때문에 그런 일을 했다고 생각하는건 지나치게 단편적인 생각이다. 손권이 관우를 배신한 이유는 관우가 손권을 업신여겼던 탓도 있겠지만 여러가지 이유가 복합적으로 작용했다. 노숙의 대를 이어 군권을 잡은 여몽 또한 서주 라인보다는 장강을 포함하는 강릉 지역을 차지하는 것을 손권에게 권유하고 있었다. 손권은 여몽이 처음 노숙의 뒤를 이어 부임하자마자 손권에게 말한 것을 받아들인 것에서 볼 수 있 듯 형주를 공격할 생각을 품고 있었다. 손권 세력은 관우를 잠재적 위험 세력으로 보고 있었고, 손권이 합비에서 패배한 이후론 관우를 치자는 여론이 팽배해 있었다.

8.2. 미방 관련 해석

정사에서 관우가 평소 미방 등에 대해 업신여겼다는 서술이 분명히 있는 것 또한 사실이다. 그러나 미방의 경우는 명백하게 자기 자신이 군법에 연루될 죄를 지었던 것이고, 미축전에서도 미방이 평소 사적인 원인으로 관우와 사이가 틀어졌다고 언급할 만큼 처신이 좋지 못했던 것도 사실이었다. 이를 관우가 질책하는 데는 별다른 문제가 없다. 미방이 오와 내통한 시점은 관우의 북정 당시 관우가 '돌아와 죄를 묻겠다'고 하기 전에 남군의 물자를 태워먹은 중죄가 있어 관우가 크게 질책한 시점이다. 즉 관우가 적과 대치하기 이전 시점부터 미방은 배신할 마음을 품었던 것이다.

상급자로서의 관우가 그에 대해 처벌을 논하는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지만 그 과정에서 후방에 놔둔 두 사람에 대해서 군수물자를 제대로 대지 않은 것에 대해 죄를 물을것이라고 언급한 면이 존재한다.[58] 그렇기 때문에 미방과 사이가 틀어지면서 질책하여 불안감을 키웠다며 관우의 용인술을 지적하는 사람도 있다. 형주와 익주를 손에 넣은 이후 유비군은 법률인 촉과(蜀科)를 만들었으며, 이에 따른 명확한 일처리와 법률로서 행정력을 발휘할 수 있었고 처벌을 확실히 제시할 수도 있었을것이다. 더불어 미방은 형인 미축과 함께 과거 서주 호족 출신으로 벼슬을 버리고 유비를 따른 사람이며 한때 유비의 인척이기도 하였으니 오래 같이 지낸 동지였다. 비록 '공신 미축의 동생'이라는 것 외엔 유비군내에서도 존재감이 부족하고[59] 큰 실수를 여러번 했더라도 배려심을 가지고 좀 더 다독이고 정신적으로 위로할수도 있는 면이 분명 존재했다. 이는 인사상 관우의 실책인 부분이고, 높은 직책에 있던 이들에게는 냉정하고 오만하게 굴었던 관우의 성격적 결함으로 보는 것이 맞을것이다. 본디 관우는 원래 힘있고 빽있다고 그런거 봐주는 사람이 아니었다. 정사에도 나오지만 성정 자체가 일단 자기보다 아랫사람엔 너그럽고 온화한 사람이지만 높은 직위에 있는 사람에게는 강하게 나오는걸 서슴지 않은 사람이고 미방 입장에선 그래도 "내가 그래도 누군데 그렇게 법대로 처리해버리면..."하면서 불만이 있을수 있다. 관우는 애초에 그런 사정봐주고 하는거랑 거리가 먼 인물인 만큼 ("처벌을 받고 싶지 않다면 똑바로 하라."는 경고성 멘트의 성격도 있었겠지만) 이 부분에서 관우의 책임이 없다고 할 수는 없다.[60] 미방은 형과 함께 유비가 서주서 인생극장 찍던 시절에도 굳게 믿고 졸졸 따라다니면서 당양 장판의 그 험난한 여정까지 마친 사람이다. 출사년도 25년이고 조조 마다하고 굳이 목숨걸고 유비 따라서 유비 대성 이후 형주 최고 요충지를 세력 3인자로부터 이어받아 지키게 된, 창업자로부터도 신용받던 사람이 왜 세력이 다 잡히고 자기가 창업멤버 지위에 오른 그때, 그것도 자기가 배신한 관우가 이겼더라면 천하통일이 사정권에 들어오는 그때에 배신자로 전락했을까. 관우의 상사로서의 면모가 괜히 까이는 게 아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공안에서 처음부터 수비하려하고 오군의 항복 사자를 만나려고 하지도 않다가 내통자 미방으로 인해 미리 대비하기도 전에 오군에 완전히 포위되었다는 사실을 알고서야 눈물을 흘리며 마음에도 없는 항복을 하고 항복하고서도 미방과는 달리 '억지로 항복한 것이니 사인은 남군으로 끌고 가야한다.'라는 소리를 듣고 후에도 귀한 대접 같은 일을 받은바 없는 사인[61]의 예도 있다. 정말 신변에 위협을 느낄 정도로 질책했다면 미방과 달리 사인이 본인이 스스로 적극적으로 오와 내통하지 않고 자기 한계내에서 소임을 다하려고 했다는 게 설명되지 않는다. 여기에 미방이 남군성을 들어 바쳤을때 이 당시 유비세력이 과거와 달리 명확한 법처리가 이루어지고 있는 상황이라면 사람들이 관우의 처리가 사리에 맞지 않고 문제가 있다고 판단했을시 그 휘하 관원들도 거기에 의문을 제기하고 두려워했을것이고, 미방이 남군태수인 만큼 미방 휘하 남군성 중요 인원들이 미방의 편을 들 수도 있었거나 미방이 그들의 협조를 구하며 포섭할 수도 있었을것이다. 그러나 정작 항복 과정에선 미방 혼자 배신하여 누구도 미방의 배신사실을 알지 못했으며 오히려 남군측에서 여몽에게 역습을 가하려고 했다는 기록이 있다.[62] 당시 강릉의 전황을 보면 미방빼곤 아무도 항복할 생각이나 오나라가 처들어 온다는 생각을 안하고 있었다, 거의 미방의 독단적인 배신이었고, 여몽 상대로 반격을 준비하다가 우번의 진언으로 진압되기도 했다. 상황이 이 지경인건 미방빼고 다른 남군성 관리들이나 사람들이 미방이 관우가 관수물자를 태운 죄과를 처벌한다고 설마하니 오나라로 배신할 정도로 신변을 위협당할 처벌은 아니었다 생각했다는 증거가 된다. 그리고 합비 공방전 당시 서로 사이가 나빴던 장료, 악진, 이전은 손권이 처들어오자 불편한 감정은 일단 뒤로 미루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하물며 자신의 잘못한 일이 있음에도 관우가 질책한다며 내통을 계획한 미방의 일과 비교가 안 될 수가 없다.

관우가 부하들에게 친절하고 사대부에게 엄했다는 말이 있는데 막상 여몽이 형주를 먹고나서도 반란 가능성 높으니 바로 장악하라는 우번의 말과 엮어보면 형주 호족들이 관우랑 사이가 나빴다고 보기는 좀 모호하고 눈물흘리며 나왔다는 사인은 그냥 일때문에 욕먹은감이 있고 사실상 사이가 나빴던건 반준과 미방이 전부인데 이 둘은 물자담당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관우가 형주공방전으로 전선을 늘인감이 있긴하지만 롬멜처럼 위오에서 보급로를 끊었다는 말도 없는데 고질적 보급부족이였던건 애초에 일을 안했다고 보는 게 맞을 것이다. 특히 미방의 경우엔 사전에 손권과 내통하고 있었기에 (상관 쌀 탈취도 그렇고) 고의적으로 보급에 소홀했을 가능성이 높다.[63]

그러나 이 경우 관우를 옹호하는 사람들은 보급계통 종사자들이 일을 안 했다, 열심히 하지 않았다, 고의로 소홀히 하지 않았다고 말을 하는데, 갑자기 생긴 포로 수만명을 어떻게 먹여살려야 하는지는 생각해 봐야 한다. 고대는 지금처럼 먹고 살 식량이 풍족한 시대도 아닌데,갑자기 밥먹일 사람이 두배로 뻥튀겨졌다, 거기다 얘들은 딱히 밥준다고 우리편 될 애들도 아니다. 느닷없이 포로 3만명을 감시할 인원도 짜내야 하고 위랑 싸우기 전에 오나라에 3군을 준만큼 주변에 공출할 상황도 되지 않았을 것이라는 점을 감안할 필요가 있다. 관우를 좋아하는 사람은 관우가 형주 전체도 아니고 단 3개의 군만으로도 위세를 진동시켰다라고 하는데, 그 보급이 무너진 것은 총사령관인 관우 탓이 아니라 보급의 탓이 된다. 관우가 무리하게 공세를 취하고 보급한테 짜증냈는지도 알 수 없고, 더 나아가 3만이나 되는 포로를 안겨놓은 것은 사실 말도 안 되는 사건이다. 3개의 군이면 3만의 원정군을 운용하는 것도 힘든데 3만의 포로는 말도 안 된다.

그러나 정사 여몽전에 따르면 '당초 남군성 내에 실수로 불이 나 자못 많은 군사기물을 태웠다. 관우가 미방을 질책하자 미방이 내심 두려움을 품었는데 손권이 이 일을 듣고 그를 꾀자 미방이 몰래 서로 화합했다. 그러다 여몽이 (남군을) 공격하게 되자 쇠고기와 술을 지니고 성을 나와 항복했다'라고 되어 있다. 즉 미방은 본인이 담당하던 남군성에 불을 내서 많은 군사기물을 태우는 명백한 실수를 했고 그게 원인이 되어 관우에게 '당장은 아니어도 반드시 합당한 처벌을 내릴 것'이라는 말을 듣자 지레 겁먹고 배신한 것이다. 미방의 배신을 어떻게든 관우의 탓으로 만들고 싶은 사람들은 마치 미방에게 애초부터 불가능한 일이 맡겨졌고 이 때문에 배신했다고 주장하고 있는데, 관우가 미방을 질책한 것은 미방이 담당하던 지역에 화재로 많은 물자가 소실된 일 때문이다.

그리고 형주 호족들이 반란할 생각이 없었다고 해서 관우와 사이가 나빴다고 보기는 모호하다고 할 수 없다. 그냥 기록이 없기 때문에 관우와 사이가 나빴는지 아닌지 알 수 없다고 하면 모를까, 관우와 사이가 나쁘다고 해서 유비까지 배반한다는 것은 또 다른 얘기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형주에 기반이 있는 이 지방호족들이 관우와 사이가 나쁜 것만으로 모든 것을 걸고 반란을 하는 것도 쉽지 않은 일이다. 단지 그 모든 것을 걸고도 배반할 정도로 관우와 사이가 나빴던 것은 미방뿐이고, 다른 형주 호족들과 관우와의 사이는 잘 모르는 것이 맞다.

사실 형주의 한나라 소속 태수들 가운데 손권이 공격해오자 항복한 사람은 적지 않았다. 그 모든 사람들이 관우와 사이가 안 좋아서 손권에게 항복한 것은 아닐 것이며 오히려 손권에게 저항하거나 협력하지 않으려 하거나 촉으로 탈출하는 인사들도 있었다. 그러나 미방은 유비의 인척이고 오랜 시간 함께 했던 숙장이었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은 그가 손권과 내통하고 촉에 모반하여 항복한것에 의아해하며 분노했고, 또한 그 이유에 의문을 가졌을 것이다.

정사는 미방의 항복을 당대 관우의 관계에 주목해서 설명한 것이다. 정사 관우전만 보면 미방/부사인 간에 불화가 있었고 관우의 업신여김에 원한이 있던것은 사실이지만, 분명 일을 제대로 처리 못한 기록[64]이 남아 있고 오서쪽 기록을 보면 미방이 항복한 이유가 더 분명해지면서 단순히 관우의 오만한 성격을 견디지 못해서로만은 설명할 수 없기 때문이다. 애시당초 비슷한 불화를 겪은 사인이 처음엔 항복하지 않으려다가 항복한 이유도 공안이 고립되었으니 덧없는 저항은 그만두고 항복하라는 통보를 받았기 때문이었다. 정사를 종합해보자면 미방은 관우와 분명 사이가 별로였긴 했지만, 근본적으로는 본인이 잘못을 저질러 관우에게 처벌을 받게 되자 두려워하면서 오의 손권과 내통했다고 되어 있다. 사실 큰 처벌이 두려워서 적군에게 항복하는 일이 있을 수 없는 일은 아니다. 도의적으로는 비난을 받겠지만 말이다. 현대 국군에서 업무 관련으로 큰 실수를 저질러 상관에게 신나게 쪼인트 까이고 '무탈하게 군 생활 끝낼 생각일랑 하지마라'는 협박까지 받은 사람이 두려움과 불만을 품고 북한으로 튀는 일이 벌어진다면, 여론이 그 사람을 비웃을지언정 '아무리 그래도 북한으로 도망갈 생각을 하다니 제정신인가?'라는 생각 자체를 못하진 않을 것이다.

정사 기록을 보면 관우가 더 강하게 처벌을 하려고 했는지 어땠는지는 알 수 없는 일이다. 기록이 없으니까. 그렇지만 기록이 없다고 해서 관우가 약하게 처벌을 하려고 했을지, 강하게 처벌을 하려고 했을지는 그냥 알 수 없는 일이다. 강하게 처벌을 하려고 했을 것이라고 추측하는 이유는 미방이라는 사람이 배반했으니까 그런 것이다. 미방은 20년 넘도록 관우와 교류가 있었으며 2인자로 관우를 모신지도 꽤 오래 되었으니 관우에 대해서 잘 알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록이 없으니까 관우가 약하게 처벌하려고 했다고 주장할 수는 있고 강하게 처벌하려고 했다는 것이 추측이라고 말할 수는 있지만, 실제로 미방이 배반한 것을 보면 처벌이 강했을 거라는 추측 쪽이 더 확률이 높다.

물론 미방과 사인을 비교하면 보급에 소홀한 사인의 경우엔 적어도 항복에 대한 당위성은 미방보다 있었던 편이었고 최소한 이후 조롱을 당한 기록은 없다.[65] 적어도 개인적인 감정으로 사이가 틀어졌다고 사전에 치밀하게 계획을 짜서 내통해 형주 방어선을 무력화시킨 미방과는 비교가 불가능하다. 어찌보면 사인의 항복이 미방의 내통으로 인해 발생한 문제인만큼 동급으로 보는거 자체가 사인에게는 억울한 일일 것이다.

그리고 미방이 관우를 싫어해서인지 아니면 처벌이 두려워서인지도 사실 알 수 없는 일이다. 기록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처벌이 두려워서 그랬을 것이라고 본다면 앞서 말했듯이 출사년도 20년이 넘어가는 미방이 왜 진작 입지가 불안정하고 죽을 위기에도 처하는 유비 밑을 떠나지 않고 그 타이밍에 떠났느냐는 의문점은 풀 수가 없다. 미방의 살 길이 안정적인 조조 쪽으로 열려 있던 시점이 있었다는 아이러니를 관우를 옹호하는 사람들은 눈 감고 보지 않는다. 미방의 배신은 물론 미방의 잘못이지만, 직접 유비 밑에 있을 때는 죽음의 위기에도 유비를 따르던 미방이 관우 밑에 있을 때는 인생의 모든 업적을 내던지고 배반했다는 사실은 분명 시사점이 있다.

물론 그렇다고 둘 중 누가 더 잘못했느냐 미방이 잘못했느냐 관우가 잘못했느냐 하는 단순한 2분법적 논리로 따지면 미방이 더 크게 더 많이 잘못한 것은 맞다. 또한 잘못했다는 말을 애매하게 써서 마치 도덕적인 잘못인 것처럼 보이게 만들 때는 미방의 잘못도 맞다. 하지만 이 경우 관우가 잘못했다고 말하는 것은 주변 사람들과 화합해야 한다는 도덕적인 부분도 물론 있겠지만, 그런 도덕적인 부분보다는 배신하게 만든 관우의 정치력 혹은 내부 인사관리능력에 있다. 인간관계가 가장 힘들다는 말은 어딜 가나 통용되는 사실상의 격언이다. 관우가 싸움을 잘한다 못한다 이런 말을 할 때 잘못했니 어쨌니 하는 도덕적인 것과 관련이 없듯이, 미방의 이반에 있어서 관우의 책임도 물론 도덕적인 범주 내에서는 없다. 또한 가장 큰 책임자로서 미방에게 처벌을 내릴 수 있는 권한 등이 있고 그것을 활용하는 것도 당연하다. 그러나 유비조차도 믿고 맡겼었기에 오나라 내에서도 그 배반을 믿기 어려워했던 배반이 일어났다는 것은 관우의 뼈아픈 실책이다.

또한 미방이 관우와 사이가 나빠서가 아니라 관우의 처벌이 두려워서 배반한 것이라고 강변한다고 해도 도덕적인 문제가 아니라 형주의 최고 책임자로서의 관우에게 있어서 그것이 잘못인지 아닌지는 아무런 차이가 없다. 어떻게 보면 처벌이 두려워서 2인자가 배반하게 만든 것은 최고 책임자로서의 관우의 역량이 더 나쁘다고도 할 수 있다. 보통 이렇게 세력내 2인자에게 통수를 맞을 경우 최고책임자는 엄청난 비난 혹은 비웃음을 받을텐데[66] 이 대상이 관우가 되면 달라진다. 관우를 옹호하는 사람들은 관우의 엄청난 의리 등을 보고 좋아하는 것이기 때문에 관우가 옹졸하거나 속좁게 굴어서 미방과 사이가 나빠진 것보다는 그냥 관우가 일을 제대로 못하고 미방이 겁쟁이라서 배반한 것이 그들의 구미에는 더 맞기 때문이다. 미방이 처벌이 두려워서 배반한 것이 되면 관우의 일처리능력은 몰라도 성품은 손상되지 않고 보존되므로 관우를 좋아하는 이들의 구미에는 이쪽이 잘 들어맞는다.

물론 위와 같은 해석은 '관우의 역량 부족 때문에 미방이 배신했다'는 식으로 미방의 배신의 책임을 관우에게 묻는 시선이지, 객관적으로 입증된 해석은 아니다. 미방과 관우 사이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상세한 기록이 없고, 미방이 왜 배신했는지에 대한 기록이 없는 상황에서 '관우가 옹졸하고 속좁게 굴어서 미방과 사이가 나빠졌다'는 것 자체가 저렇게 보는 이들의 개인적인 해석에 불과한 것 뿐이다. 만약 위 문단의 논리를 그대로 적용하자면 '관우를 까는 사람들 입장에서는 미방이 본인의 잘못으로 인한 처벌을 두려워해서 배신했다기보다는 관우가 옹졸하거나 속좁게 굴어서 미방과 사이가 나빠진 것이 그들의 구미에 더 맞기 때문이다'라고 볼 수 있다. 즉 '관우 옹호' 혹은 '관우 안티'의 시선으로 몰기보다는 각자 해석이 다르다는 것을 인정하고 이런 해석도 있을 수 있다고 존중하는 것이 적합하다.

"미방, 사인은 군수물자를 공급했으나 그를 돕는데 전력을 다하지 않자 관우가 ‘돌아가면 응당 죄를 다스릴 것’이라 하니, 미방과 사인은 모두 두려움을 품고 불안해하여 이에 손권이 은밀히 미방과 사인을 꾀자 미방과 사인은 사람을 시켜 손권을 영접했다."
-> 이 부분까지가 팩트이며, 1) 전력을 다하지 않은 것이 정확히 무슨 의미인지 2) 관우가 어떤 규모의 처벌을 계획했는지 3) 미방과 부사인이 두려움을 품은 것이 본인 잘못에 대한 처벌 때문인지[67][68] 관우가 지나치게 엄하게 한 것 때문인지, 4) 평상시 관우와 이들 사이의 관계가 어땠는지는 해석의 영역이다. 이를 두고 누구의 해석이 절대적으로 옳다고 볼 수 없으며, 누가 누구를 옹호하느니 하는 식으로 하는 것은 공정한 서술이 아니다.

어쨌거나 미방과 관우 둘 사이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는 제대로 된 기록이 없으므로 알기 어려운 것이 사실이다. 또한 도덕적으로나 업무권한으로 보나 명분은 관우 쪽에 있다. 상관이 자기를 홀대하거나 못마땅해하는 것이 분할 수 있고, 부하를 그렇게 대하는것이 윗사람의 실책인 점도 분명히 존재하지만 그렇다고 배신을 때리는건 인간적으로나, 군사적 관점으로써나 미방이 노답이라고 밖에 볼 수 없다. 오죽하면 그의 형인 미축이 마음의 병을 얻어 죽었을까. 그리고 아마 미방이 보급 면에서 그렇게 유능하지 않았을 것도 사실일 것이다. 하지만 실제로 중대한 배반이 일어났으며 당시 형주에서 미방의 위에는 오직 관우밖에 없었다는 점으로 인해 관우의 책임, 둘 사이의 관계 등을 의심하게 하는 것이다. 그러나 기록이 없기 때문에 이를 두고 여러가지 해석이 있는 것이고, 각자 갖고 있는 생각이 다르므로 자신과 다른 해석에 대해서는 서로 존중하고 넘어가는 것이 옳다. 어쨌든 현대인들 입장에선 1800여년 전에 정확히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모르기 때문이다.

9. 말말말

천추의기(千秋義氣) 만고충심(萬古忠心)
서울 동관왕묘 현판
관우, 장비는 모두 만인지적(萬人之敵)이라 칭해진 당세의 호신(虎臣-범 같은 신하)이었다. 관우는 조공(曹公)에게 보효(報效-힘써 보답함)하고 장비는 의(義)로써 엄안(嚴顔)을 놓아주었으니 아울러 국사(國士)의 풍모가 있었다. 그러나 관우는 강이자긍(剛而自矜-굳세고 자부심이 강함)하고 장비는 폭이무은(暴而無恩-난폭하고 은혜롭지 않음)하여 자신의 단점으로써 패망하게 되었으니 이수(理數-도리,이치)의 상례로다.
진수
관우(關)와 장비(張)는 무용이 뛰어나며, 몸을 바쳐 세상을 바르게 하고, 주상을 봉대하였으며, 기세는 호랑이처럼 장렬하였다. 주상의 좌우를 지키며, 전쟁터로 번개처럼 달려나가 격투하여 주상의 곤란함을 구하고 대업을 도왔다. 한신(韓)경감(耿)과 공적을 비교하면 그들과 명성과 덕을 나란히 말할 만하다. 그렇지만 사람들과 교제하거나 대응함에 있어서는 무례하고, 아울러 흉악한 일을 초래하게 되었다. 그들의 얕은 생각과 몸을 훼손시키며 나라를 구한 태도를 애도한다.
양희, 계한보신찬. 관운장과 장익덕을 찬함(贊關雲長張益德)
관우가 국사가 된 까닭은, 그가 다만 왕실을 생각해서 일뿐이다. 만약 그가 말을 채찍질 해 안량(顔良)을 많은 무리 안에서 찌름이, 관우가 국사가 된 까닭이라면, 어찌 특별히 여기에 있겠는가! 또한 그가 조조에게 보답하고, 유비의 땅에 돌아감을 바르게 여기는 것이지, 만약 단지 조조에게 보답함을 관우의 의가 드러남이라 여기는 것은, 미처 관우의 뜻을 알지 못한 것으로, 이러한 찬사는 자못 불만족스러우며 부합하지 않는 것이다. 즉 장환후(張桓侯, 장비)의 찬미도, 또한 엄안을 풀어준 한 가지 일로 이에 해당됨은 적당하지 않다.
왕명성(王鳴盛, 십칠사상각의 저자)

[1] 한수이란 강이름이 아닌 지금의 현재의 중화인민공화국 후난 성 창더 시 한서우 현를 말한다.[2] 서황, 만총, 악진, 문빙[3] 다만 이 발언 자체는 관우를 고평가함과 동시에 촉나라 전체를 저평가하는 발언임은 감안해야 한다. 아래에도 나오듯 오히려 위나라 책사들은 관우와 촉을 둘 다 고평가하는데 유독 유엽만 저평가다. 게다가 그런 작은 나라에게 조조가 한중에서 어떤 굴욕을 당했는지 생각해보면 이 발언이 합당한지는 다소 논란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이점은 저런식으로 대놓고 폄훼한 유엽도 관우만큼은 까지 못했다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4] 요립은 익양대치 당시 장사태수로서 싸우지도 않고 성문을 열고 도망가 장사를 어이없게 잃게 만든 원흉으로 오히려 관우가 그를 책망해야 하는 위치였다. 그러나 요립은 적반하장격으로 상관이던 관우는 물론이고, 자기가 아니꼽게 여긴 사람들은 온갖 트집을 잡아서 씹었다. 이를 보다못한 제갈량이 작정하고 요립을 지탄하며 좌천시켰지만, 뉘우치기보다 '나처럼 대단한 사람은 결국 복직시킬거다'라는 근자감을 내세웠다. 하지만 제갈량은 죽을 때까지 그를 복직시키지 않아 요립은 내가 이렇게 쫓겨난 상태로 말년을 보낸다며 한탄했다. 참고로 이 글을 쓸때 요립은 표를 받아볼 황제 유선의 아버지인 유비까지 디스했다. 즉 황제한테 황제의 아버지까지 폄훼할 정도로 독이 잔뜩 올라한 소리들이란 것.[5] 평생을 어지간한 일엔 두려움 없이 전략/전술적으로 판단한 조조지만 관우만 보면 대놓고 매우 겁에 질린 형세를 취한다. 관우의 무용을 이미 알고 있는 조조였기에 조조는 손권과 밀약을 맺고 관우 하나에 천도까지 고민하며 손권과의 국경선에 있던 모든 역량을 쏟아 부었다. 만일 이때 손권이 조조를 역배신해 합비로 나아갔다면 조조는 순식간에 한중 및 기산쪽의 유비군, 형주의 관우군, 장강을 넘어선 손권군에게 위기를 맞는 것이 뻔한데도 말이다. 한마디로 당시의 조조는 손권이 배신해 삼면전선을 마주할 위협보다 관우 한 사람이 조인을 뚫고 양양으로 진격하는 것을 더 두려워했다는 것이다.[6] 사실 삼군이라고 보기에도 민망한 수준인데 강릉이라는 지명으로 유명한 남군은 몰라도 무릉과 영릉은 이민족 정리가 채 끝나지 않고 개발도 많이 되지 않은 변방이었다. 사실상 강릉 하나에서 나오는 군사만으로 한 나라가 자기가 가진 거의 모든 역량을 쏟아붓게 만든 것.[7] 군량 때문에 항복병들을 그냥 생매장하거나 죽이는 일도 적지 않게 발생하는데 그래도 관우는 약자에게 부드러운 사람이어서 우금의 항복병들을 받아준 탓에 군량 압박을 받았다. 어찌보면 관우가 인정이 많아서 일을 망친 거라고도 볼 수 있는 셈이다.[8] 그나마 배신을 안하고 능력 또한 검증된 인물하면 장비나 조운, 제갈량 정도이다. 문제는 장비의 경우는 일전에도 조표를 위시로 한 서주의 호족들과 갈등을 일으키다가 여포에게 서주를 홀랑 내준 적이 있었고, 조운은 친위대장이나 기병대장이면 모를까 수륙병진을 구사하는 사령관급이라기엔 검증된 바가 없었다. 제갈량은 내치라면 모를까 당시까지는 군사적으로 두각을 드러내는 상태가 아니었다.[9] 예비대를 파견한 정도가 아니라 오와 밀약을 맺고 합비 인근에 주둔하던 주둔군까지 끌어다 쓸 준비를 마쳤다.[10] 물론 3만 명의 포로를 잡아 그들을 먹여살려야 했다는 점도 있었지만 미방의 경우 전쟁 이전에도 본인이 관리하는 남군성의 군수물자를 태운 화재에 책임이 있었고 손권, 여몽과 내통까지 저지르고 있었다. 관우전에도 남군의 미방과 공안의 사인이 애당초 관우를 돕는 데 전력을 다하지 않았다고 나온다.[11] 굳이 찾아보면 2년 연속으로 대촉 전선용으로 준비된 정예 기병대가 포함된 정촉호군을 경보병으로 개박살내고 연이어 옹주군의 씨를 말려 죽인자만 수만 명이 넘고 옹양주를 함락 직전까지 몰고갔다는 강유나 노성전투에까지 이르기까지 연전연승으로 미친듯이 위군의 대촉 에이스들과 최고 사령관 사마의까지 연이어 격파한 3~4차 북벌의 제갈량 정도밖에 없다.[12] 자치통감에서는 효활(驍猾), 즉 용맹하고 교활하다고 했다.[13] 자치통감에서 온회의 장맛비로 강물이 불어나는데 아무것도 대비한 게 없다고 말하는것 봐선 원래 없었을 가능성도 있어보이긴 한다.(...)[14] 또 무제기에 언급되듯이 조인은 당초 관우를 먼저 토벌하기 위해 번성에 주둔했는데 조인전과 다른 기전을 살피면 조조가 마초를 처음 토벌할때 조인이 소백(蘇伯), 전은(田銀)을 행(行) 효기장군으로서 토벌한 다음에 조인이 행(行) 정남장군으로 임명되어 후음의 반란을 진압하기 전까지 번성에 지속적으로 주둔했고 후음의 반란이 진압된 뒤에도 정남장군으로서 번성에 주둔했으므로 조인이 효기장군이었던 213년(조조 위공 즉위)이후 어느시점부터 219년까지 계속 번성에 주둔하면서 관우를 토벌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는 얘기인것이다. 후일 조비의 남정때 강릉을 공격하면서 수군을 동원했듯, 조인이 강릉의 관우를 토벌하기 위해선 수군이 필요했을 것이라는 걸 위나라 수뇌부도 알았을 것이다. 후일 정남장군(征南將軍), 가절도독형예제군사(假節都督荊豫諸軍事)로 부임한 왕창이 승리와 수비를 위해서 주둔하던 완에서 신야로 관서로 옮기고 배가 선지(宣池)에 있어 급한 일이 있어도 달려가기에 충분하지 못하니 형주와 예주에서 수군을 훈련시켜야 한다고 했듯이 말이다. 후일의 일이지만 오나라와의 마찰이 없었을 당시에 부임한 왕창이 북형주에 수비를 위해 달려가기 위해 쓰이는 배가 있다고 증언한 것도 그렇거니와 조인이 번성에 있을 당시엔 관우를 토벌하기 위한 공격을 위해서든 수비를 위해서든 위나라 소속 북형주에 수군이 왕창 때보다도 더욱 더 필요했을 텐데 이 당시 위나라 수군 관련 기록이 없는건 미스터리다.[15] 이러한 과정이 전부 생략되고 "관우가 서황에게 털렸다"는 식으로 인식이 남기도 하는데, 관우는 연의에서처럼 서황과 단기접전을 해서 밀린 것이 절대 아니다. 관우의 병력이 위나라 주요 장수 중 하나인 조인을 몰아세우는 와중에 위나라가 온갖 명장과 병력을 끌어오고 오나라 측까지 끌어들인 상태에서 서황의 병력이 그를 요격할 수 있었던 것이다. 현실은 소설이 아니며, 저 정도 병력들이 싸우는데 (심지어 당시 60이 넘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지휘관들의 1대1 싸움으로 승부가 갈릴리는 만무하다.[16] 비슷한 케이스로 항우가 있는데 항우가 야전 사령관을 넘어서서 군인으로도 (지휘력이라는 측면에서만 보면) 초 1류라는 사실은 누구도 부정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항우의 평가가 깎이는 것은 믿을 수 없을 정도로 형편없는 정치력과 인사관리(대우) 문제였다. 이와 비슷하게 관우도 군인으로는 초 1류지만 항우처럼 다른 쪽으로 문제가 있어서 패배했다는 것으로 해석하는 것이 옳다.[17] 상대적인 평가를 본다면 연의의 관우 쪽이 너프라고 볼 수 있을 정도이다.[18] 한 명의 장수가 개인의 무력만으로 적진을 돌파해 적 사령관을 단숨에 살해하고 돌아온 일화도 흔치 않은데, 심지어 상대방이 선봉이나 잡장이 아닌 상장이었다는 점에서 특히 더 강조되는 것이다. 이러한 사례는 삼국지 내에서도 유일하다.[19] 이 부분 때문에 관해는 코에이 삼국지에서 무력이 높게 책정되었다.[20] 이 일화를 적극적으로 묘사한 것은 최훈의 삼국전투기창천항로가 있다. 삼국전투기에서는 방덕이 이마를 향해 날린 화살을 반사적으로 쳐내, 이마가 찢어지는 수준으로 끝났지만, 창천항로에서는 정말 화살이 이마에 맞았는데 그 상태에서 방덕을 베었다. 다행히 깊숙히 박히지는 않아 화살을 뽑고 술로 이마를 씻어내며 요화에게 상처를 꿰매라고 명한다.[21] 연의에서는 화타로 각색되었다.[22] 물론 무예와 직결되는 것은 아니지만, 대군 사이에서 안량을 요격하고 추격을 따돌리고 왔다는 기록을 고려해보면 전장에서의 맹활약에 그의 담력이 도움이 됐을 가능성은 충분하다. 애초에 충분한 능력이 있음에도 용기가 없어서 제 능력을 전부 발휘하지 못한 채 죽은 사람은 역사에서 수도 없이 많다.[23] 정확히 말하면 육손전에 써있는 여몽의 평가이다.[24] 이후 조익은 남북조 시대의 용맹한 장수들이 관장지용이라고 불렸던 사례를 든다.[25] 그리고 관우로서는 여몽이 물러나고 후방 전투만 맡던 육손이 나서서 공손한 태도로 편지를 썼다는 것은 오가 형주를 호시탐탐 노리는 것을 어느 정도 포기하거나 반려했다고 생각할 만하다.[26] 연의에서는 거의 대부분 제갈량한테 물먹는 역할에 영 미덥지 못한 느낌으로 각색되었지만 실제로는 문무를 겸비한데다 꽤나 달변가이다.[27] 관우가 오군의 지원을 요청했다면 형주에 들여보낸다는데 그냥 원조군 입장에서 형주에 들어가면 되는데 굳이 몰래 숨어서 은밀히 들어와 기습을 할 필요가 없지 않겠냐는 뜻.[28] 고대 중국 역사 기록에서 같은 침상을 썼다는 말은 말그대로 '이 사람에겐 내 목숨을 내줘도 상관없다.'는 최고의 신뢰를 뜻하는 표현이다. 살아남기 위해 온갖 더러운 수도 마다하지 않고 뻑하면 자객을 보내 밤중에 암살시켜버리는 게 일상이던 고대 중국에서 가족도 아닌 생판 남과 같은 침상을 쓸 정도라면 그 사람을 전적으로 신뢰하고 있다는 말 밖에 되지 않기 때문. 당장 조조만 해도 (연의에서) 진궁과 같이 도망갔을 때 자기들 멋대로 오해해서 여백사 일가를 모조리 죽이고도 냉혹하게 '내가 천하를 저버릴 지언정 천하가 날 저버리게 할 순 없다.'고 반응한 것에 실망한 진궁에게 잠든 사이에 죽을 뻔했지만, 진궁이 그냥 도망가서 목숨을 건졌다.[29] 정사에선 안량을 죽이고 조조가 후한 상을 베풀자 그 상을 모두 봉해놓고 작별을 고하는 서신만 남긴 채 원소군으로 달아났다. 연의에서는 이야기가 확장됐는데, 문추까지 덤으로 처리한 후 밤중에 몰래 자신을 찾아온 손건이 유비의 밀서를 보내자 체면도 내려놓고 '제가 형님이 계신 곳을 몰라서 부득이하게 조조의 밑에 있었지 언제 부귀영화를 탐내 도원에서의 맹세를 저버렸겠습니까!'라며 아이처럼 통곡한 뒤 정사와 마찬가지로 조조가 베푼 모든 상을 내려놓고 유비의 부인들만 데리고 달아났다.[30] 말 그대로 신격화. 중국민간신앙에서 관우는 신이며 이를 모시는 사당이 관제묘에서 조촐한 제삿상에 이르기까지 엄청나게 많다.[31] 예를 들어 위나라를 다시 배신한 맹달의 경우 그를 총애하던 조비나 친하게 지내던 하후상(하후연의 조카이자 조비가 총애했으나 조비의 삽질로 어처구니없는 최후를 맞는다)이 죽어서 입지가 불안해졌고, 촉한의 군세가 위협적일 때 배신했다. 관우는 이와 모든 게 정반대로 자신을 총애하는 조조가 건재하고, 안량을 베는 등 관도대전에서 활약으로 입지가 올라가고, 유비는 근거지도 없이 완전히 망한 상태에서 뒤도 돌아보지 않고 찾아나선 것이다.[32] 관우가 만약 조조 휘하에 있었다면 최소한 장료와 비슷하거나 더 높은 대접을 받았을 가능성이 높다. 장료는 여포가 패망한 이후 조조에게 투항하고 중랑장에 임명받았고, 이후 관도대전에서 전공을 세운 이후에야 비장군에 올랐다. 한편 관우는 투항한 직후에 편장군에 임명되었다. 편장군과 비장군은 기본적으로 둘 다 5품 상설장군이며 그중 비장군이 최하위 장군직으로 여겨진다. 어쨌거나 관도대전 발발 이전에 이미 편장군이었던 관우가 당시 중랑장이었던 장료보다 더 늦게 합류했음에도 더 높은 벼슬에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게다가 관우는 정사에 '당초 조조가 관우의 사람됨을 크게 여겼다'는 언급이 있고, 관우가 '공을 세워 당신을 떠날것'이라고 했음에도 조조가 의롭게 여기고 중용했다는 것을 보면 조조는 그 이전부터 관우를 계속 탐내왔던 것을 알 수 있다. 참고로 조조 휘하에서 장료는 정동장군 겸 가절, 조비 즉위 이후 전장군 겸 가절이 되었다. 어쨌거나 확실한 건 조조의 휘하에 있을 때 관우의 입지가 장료보다 높았다는 것이다.[33] 관우는 분명 뛰어난 인물이지만 중국 역사 전체로 보면 그저 지방정권의 주요 장수 중 하나였을 뿐이다. 만인지적이라곤 하나 항우처럼 말도 안되는 수준의 군공을 세운 것도 아니고, 엄연히 유비의 부하인데다 정치나 행적, 문학 면에서 한 획을 그은 것도 아니다. 그런 관우가 특별한 것은 그 경이적인 충의와, 유비와 혈연 관계를 뛰어넘었던, 평생을 걸친 인간적 교류 때문이다. 관우의 성격적 결함이나 정치적 판단은 논란의 대상이 되고 심지어 군재조차도 과장된게 아니냐는 일부 시선도 있지만, 관우의 충의만큼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34] 정황상 못 데려갔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의형제인 유비와 장비의 생사도 모르는 상황에서 형수들을 데려갈 수 있을 리가 만무하다.[35] 당시 제갈량은 한중을 지원하기 위해서 성도에서 계속 지원을 보내고 있었고 유비와 관우 생전에는 이 둘의 위치를 넘볼수 없었다. 관우의 생전에 관우는 제갈량조차 눈치를 봐야 할 정도로 명백한 2인자의 위치에 있었다.[36] 다만 이러한 말을 한건 유엽 뿐이고 대부분의 신료들은 전쟁을 일으키지 않으리라 에측했다. 그런데 실제로도 당시 촉은 전쟁하기 좋은 상황은 아니었으므로 달리 말하면 전쟁할 상황도 아닌데 무리해서 전쟁을 할 정도로 유비가 단단히 분노한 상태였다고 볼 수 있다.[37] # 위서 양부전에 실마리가 될 서술이 있는데 당시 유비는 번성 공방전에 호응해서 무도로의 북벌을 준비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설령 (비어있던) 무도에 도착했다고 하더라도 그 무렵 하필 형주가...[38] 막말로 이건 게임에서도 불가능하다. 수차례 북벌을 시도한 제갈량은 철저한 준비를 끝마친 후에야 시도했으며, 초반에 예상치못한 패배를 겪거나 진격이 막히면 포기했다. 번성과 거리가 절반밖에 안되는 상용에 주둔하고 있던 유봉과 맹달이 지원하는 것이 이상적이나 이들간의 분쟁이 일어나 그렇게 하지 못했다.[39] 관우의 북벌에 지원군이 필요없단 얘기가 아니다. 번성을 점령하는데 유비의 본군이 올 필요까진 당시 없었단 것. 유비군 없이 관우가 번성을 점령하는 것은 219년 10월 이전 기준으론 가능한 일이었다. 조조측의 사마의와 장제가 조조에게 손권을 이용하자고 건의했고, 서황이 관우를 패퇴시킨 적도 있지만 이것만으로 포위가 풀린 것이 절대 아니었다. 상용에서 지원군이 있었다면 충분히 번성을 손에 넣는 것이 가능했을 것이다. 게다가 조조는 허창과 번성이 가깝다는 것 때문에 도읍을 옮기는 것을 고려할 정도로 압박을 받는 상황이었기에, 관우가 상용의 지원을 받아 번성을 함락시켰다면 이미 많은 자원을 소모한 과정에서 포기할 가능성도 충분했다. 그러나 동맹이었던 손권의 적대, 상용에서 지원 미비 등 수많은 악조건이 작용하면서 패한 것. 즉 219년 10월만 해도 어려운 싸움을 얼마 전에 끝낸 유비가 한중에서 먼 양양까지 급하게 군대를 끌고 올만한 이유가 없었다.[40] 오해를 피하기 위해 첨언하면 "번성 따위는 본군 없이도 점령할 수 있었다" 이딴 얘기가 아니다. 조조 입장에서 번성을 점령당하면 완이 지척인데, 완이 떨어지면 낙양과 장안, 허도까지 바로 노려볼 수 있기 때문에 에이스 조인과 우금, 서황 등 저렇게 많은 자원을 투입하면서까지 필사적으로 지킨 것이다. 번성 점령이 '가능'하다는 것이지, 당연하단 얘기가 아니며 패배 가능성도 충분히 높았다. 여기서 이 얘기는 유비가 먼 한중이나 익주에서부터 본군을 이끌고 출정하는 무리를 할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불과 몇달 전 한중왕에 오른 유비의 세력은 약소국이고, 익주와 한중을 차지한지도 얼마되지 않아 안정화시킬 필요가 있었다. 이 상황에서 곧장 무리하게 병력과 자원을 긁어모아 먼 번성까지 원정을 떠난다면 사실상 민중을 수탈하는 방식으로 보급을 했어야 했을 것이고, 병력의 부재로 치안도 불안해지게 된다. 당연히 유비가 한중을 먹은 것 자체가 북벌을 염두에 둔 것이긴 하지만, 게임처럼 성 하나 먹었다고 바로 다음 목표를 칠 수 있는 것이 아니란 것이다. 만약 관우가 기댈 곳이 아무데도 없었다면 무리해서라도 그렇게 했지만, 본인의 양자인 유봉이 (실제 지원이 가능한) 상용에서 주둔하고 있기 때문에 익주/형주로 세력이 나뉘어있는 상황에서 형주 쪽의 세력으로 공격하는 게 맞다. 그리고 만약 손권이 적극 공격해서 둘러싸인 형태가 되지 않았더라면 설령 관우가 패해도 퇴로가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손권의 동맹 파기, 결정적으로 유봉/맹달의 지원 부재란 변수 때문에 패주하고 그대로 관우가 죽어버린 것이다.[41] 지도를 보면 이 점을 알 수 있다. 번성에서 한중까지 거리는 번성에서 기주의 업까지 거리와 비슷하다. (실제로 관우의 공세에 부담을 느낀 조조가 업에 가고, 왕필에게 허도의 사무를 맡겼다는 기록이 있다.) 한반도로 치면 부산에서 평양 거리와 비슷하다. 번성에서 한중까지 미친듯이 말을 타고 달린다고 쳐도 열흘 가까이 걸릴만한 거리인데, 미리 준비했다면 모를까 지원을 할 수 있을 만한 거리가 아니다. 또한 저건 거리만 보면 저렇다는 거지, 한중은 산에 둘러쌓여있는 분지 지역이기 때문에 실제 소식이 전해지기까지 소요되는 시간은 더 걸렸을 것이다. 게다가 당시 관우는 훨씬 가까운 상용에 있는 유봉과 맹달에게 계속해서 구원군을 요청하고 있었고, 상식적으로 여기서 지원하는 것이 맞다. 실시간으로 정보를 알 수 없는 상황에서 당연히 유비 입장에서는 유봉과 맹달 측이 지원을 하고 있으리라 생각하고 있었을 것인데, 그 지원군이 안 와서 순식간에 관우가 패하고 만 것이다.[42] 관우가 죽으면 형주 쪽에서 중요한 거점을 모두 잃게 되고 사실상 중원으로 진출하는 길이 거의 막히게 된다. 아예 극단적으로 유비나 제갈량이 관우를 죽이고 싶어한다고 가정하더라도, 관우 하나 죽이겠다고 형주를 태운다는 건 그냥 말이 안 되는 선택이다. 즉 구원을 안한 게 아니라 못했다고 보는 게 타당하다.[43] 유비 입장에서 가장 중요한 부하 중 하나이자 의동생이 새파란 애송이(손권)에게 원통한 죽임을 당한 상황인데, 유비 성격에 그 애송이를 박살내는 것이 먼저겠는가 아니면 이미 죽은 동생에게 작위를 내리는 게 먼저겠는가? 연의에서 유약한 이미지와 달리 유비는 성격도 있었고, 전쟁터에서 잔뼈가 굵은 인물이었다. 또한 애초에 시호 따위야 언제라도 내릴 수 있고 어쩌다 생전에 못내리게 되면 제갈량이나 자기 아들에게 유언해서 내리라고 말할 수도 있는 노릇이지만 복수는 다르다. 타이밍도 타이밍이고 이 당시 유비 나이가 60대라서 좋은 때를 기다릴 수도 없고 그렇다고 제갈량 같은 이들이 자신을 대신해서 적극적으로 복수해줄 사람도 아니다. 그러니 시호니 뭐니 하는건 나중이고 복수가 먼저일 수 밖에... 애초에 그 이릉대전도 조운이나 제갈량 같은 이들도 강하게 반대한걸 감안하면 유비가 밀어붙이니까 추진할 수 있었지 유비가 없다면 혹은 유비에게 의사가 없다면 일어날 리가 없는 전투였다고 봄이 옳다. 실제로도 유비 사후 두 나라는 국교를 회복하는데 이는 위나라라는 공동의 적도 있거니와 이에 맞서야 하는 양국의 공감대가 작용했으며 촉나라에서는 이릉대전의 악연보다 이것이 더 중요하다는 의식이 널리 퍼져있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44] 게다가 조운은 유선을 두번이나 구해줬던 사람이며(그 유명한 장판과 손부인의 유선 납치 시도), 별전에 보면 유선은 조운이 자신을 아기였을때 구해줬다는 이유로 시호에 대해 논하도록 했다고 한다. 또한 조운은 유선의 재위 초기에 촉한에서 가장 중요한 장수였다. 정사에서도 능력이건 인품이건 조운에 대한 부정적인 평은 아예 없으며(진수는 관우나 장비 등의 인품에 대해서도 깔 것은 갔다), 조운이 유선의 신임을 잃었다는 기록도 전혀 없다. 훌륭한 장수이며 유선 본인의 개인적인 은인이기까지 한 조운도 죽은지 수십년이 지나서야 시호를 내렸다는 것이다.[45] 다만 유비와의 불화설은 터무니없더라도 그의 아들 유선이 그를 어떻게 봤는지는 불명이다. 유선 대에 관우에게 내려진 시호 장목 중 목(繆)은 '명성과 실제가 부합하지 않음'을 뜻하기 때문. 시호를 내리는 게 급하게 할 일은 아니라 할지라도, 제갈량 이후 재상들의 활약으로 비교적 안정적인 통치를 했던 유선이 개국공신들의 시호를 유독 늦게 내린 것은 그가 이들의 높은 인기를 견제했기 때문일 가능성도 있다. 촉한의 건국황제인 유비야 신하들과 백성들의 절대적인 충성을 받는 인물이라고 해도, 별 성과도 없던 2대 황제 유선 입장에선 개국공신들을 지나치게 띄워주는 것에 거부감을 느꼈을 수도 있다. 실제로 유선은 자신의 가장 중요한 신하였던 제갈량의 사당을 짓는 것을 금지한 적도 있어 오랫동안 백성들이 자발적으로 제갈량의 제사를 지난바 있다.[46] 관우가 처음부터 기득권층을 싫어했는지 불분명하나 유비가 평원령일 때 기득권층 중에 유비를 달갑지 않게 여겨 암살을 시도한 적이 있고, 서주 시절에는 여포와 내통해 유비의 뒤통수를 친 조표를 비롯한 호족들 때문에 고생했던 일들이 있으니 관우에게 있어 높으신 분들은 직속 상관 유비를 제외하면 못 믿을 놈들이라고 선을 그었을 가능성이 높다.[47] 조선왕조실록연산군일기에서 이 일화를 논한 장면이 나온다. 경연 중에 연산군이 "관우가 화를 낸 것이 옳은가?"라고 묻자, 신하들이 "잘못되었습니다. 신하로서는 군주(유비)의 명을 따라야 하고 재능에 따라 관직에 임용해야 하는 법인데 관우는 어진 장수지만 이 때는 잘못했습니다."라고 답하는 장면이다. 참고로 이후에 허유조조의 이야기도 나온다. 관도대전 이후 허유가 조조에게 "내가 아니면 업성에 들어갈 수나 있었겠냐."라며 거드름을 피운 일화인 듯하다. 해당 내용[48] 대표적으로 관우를 어떻게든 포섭하려던 조조 역시 점점 오만해졌으며, 관우 토벌에 종군했던 반장도 능력은 있지만 인성이 더러워서 손권은 그를 중용하면서도 일정 이상의 관직은 주지 않았다.[49] 함께 사방장군에 임명된 마초도 패륜 논란으로 집중 포화를 받지만 마초의 원수인 조조와 마초의 가족을 속이고 죽여버린 조앙과 왕이 부부 역시 패륜을 저질렀음에도 (마초가 아버지를 죽게 만들었다면 조조는 아들과 조카, 조앙과 왕이 부부는 자식을 죽게 내버렸다.) 지적받는 일이 별로 없는 것과 비슷한 면이 있다.[50] 관우의 성격은 위연의 상위호환에 속한다. 위연은 유비 시절 기대주 위치에 올랐고, 제갈량의 북벌 시절 촉군에서 몇 손가락에 꼽히는 핵심 인재였다. 그리고 관우와 마찬가지로 성품이 오만하다는 비판을 들었는데, 차이라면 관우는 유비와 장비는 물론 수십년 후 들어온 20년 이상의 나이차를 가진 제갈량과 시간이 지나자 친하게 지냈고, 비시가 자기의 태도에 대해 지적하자 곧바로 마음을 고쳐먹는 등 말귀를 알아먹는 사람이었지만 위연은 말귀를 알아먹으려고 하지 않는 건 기본에 나 혼자 잘났다면서 진상을 부리다보니 왕따인지라 제갈량은 어떻게든 써먹으려고 감싸주느라 고생했다.[51] 유비가 한중왕에 오를 당시 관우는 명실공히 유비 세력의 오른팔이었으며, 사방장군 중에서도 단연 으뜸인 위치였다. 직위로나 공적으로나 실력으로나 저 상황에서 강짜를 부려도 되는 위치였고, 실제로 제갈량이 이를 우려하자 누구보다도 그 사실을 아는 유비가 직접 설득하겠다고 나설 정도였다. 그런데 관직을 전달하러 간 비시의 설득을 듣고 잘못을 깨달은 것이다. 게다가 관우와 황충이 직접 싸우며 서로 인정한 것은 연의의 픽션이고, 관우는 입촉 당시 황충이 크게 활약하는 것을 보지 못한 상태였다. 평생을 섬긴 주군이자 형님같은 존재가 자신을 웬 항장과 같은 위치에 있게 했으니 서운했을 법도 하다. 또한 비시가 그를 설득한 논리도 "한중왕은 당신과 한몸처럼 희비를 함께 하니 관직이나 봉록같은 게 중요한 게 아니다"였으니, 사실상 형님의 애정이 덜해졌을까 싶어 삐졌던 것이고, 그게 아니란 걸 알자 마음을 푼 것에 가깝다. 즉 오만하기보단 지극히 인간적인 성격이다. 문제는 체면이나 명분을 중시하던 시절에 이걸 숨기지 않고 가감없이 표현했던 것.[52] 게다가 황충에겐 같이 사방장군에 오른 항장 출신 마초처럼 군벌급 위상이 있었던 것도 아닌데, 그의 당시 관직은 중랑장이었다. 이는 관우가 조조 휘하에 있을 때 받은 편장군(5품 상설장군)보다도 약간 낮은 직위였다. 현대적으로 비유하자면 관우는 스타트업 기업의 창립멤버이자 사장과 친형제처럼 지내며 가장 큰 공을 세운 인물이며, 회사가 잠깐 망했을 때 국내에서 1,2위를 다투는 대기업 회장(조조)이 스카웃해 부장자리(편장군+한수정후)에 주요 프로젝트(관도대전)에서 중용하며 보너스도 듬뿍 줬음에도 형님이 다시 시작한다니까 뒤도 돌아보지 않고 돌아간 사람이다. 그런데 온갖 고생 끝에 겨우 회사가 건실한 중견기업이 되어 부사장이 됐는데, 인수합병 과정에서 다른 기업의 과장 내지 부장이었던 사람한테 갑자기 이사직을 준다는 소식을 들은 꼴이다. 이 상황에서 서운하지 않을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53] 한편으로 현대 한국의 독자들에게는 "연의에서와 달리 정사에서는 의외로 패배가 많았다."는 점과 "관우가 만인지적이란 것은 연의의 미화 때문이다."+연의 기준으론 관우만큼 무예를 뽐낸 장수가 꽤 있다는 점에서 관푸치노(=거품이 많다.)는 멸칭으로 불리는 등 폄훼가 심하다. 그러나 위에 설명되었다시피 관우의 무예나 군사적 능력은 정사에서도 높이 인정받는 부분이며 만인지적이란 표현 역시 정사에 나오는 기록이다. 현대에 오면서 정사를 어설프게 인용하는 이들로 인해 상당히 많은 폄훼를 당한 인물인데, 관우가 능력이 뛰어난 인물이란 점은 당대에서나 후대 역사가들이나 누구도 부인하지 않는다. 당장 당대에 관우를 상대하거나 기용해본 인물 모두가 능력 면에선 최고 수준으로 고평가 하기 바쁘니, 이를 평가절하하면 관우와 연관된 삼국지 인물 대부분의 수준이 단체로 떨어지는 일 밖에 되지 않는다. 그리고 카푸치노 밈은 발음이 더욱 비슷한 + 칭찬받는 기록은 많은데 정작 무슨 공적을 세웠다는 말은 거의 없는 곽가가 더 꽉 잡았다[54] 관우가 독화살에 맞은 왼팔을 치료하는 과정에서 의원이 팔을 가르고 뼈를 깎아 독을 제거하는 무시무시한 치료를 받는 동안 고기를 자르고 술을 마시면서 태연하게 담소를 나눈 것은 정사에 있는 기록이다. 이문열은 이 치료 자체가 연의의 창작이라 주장했지만, 연의가 창작한 부분은 그 의원이 화타란 것 뿐이다. 즉, 관우는 초인적인 정신력과 용기를 가진 인물이었지만, 오랜 친구가 갑자기 적대적으로 나오자 당황하고 두려운 모습을 있는 그대로 표현할 정도로 솔직한 인물이기도 했다는 것.[55] 반면 실존인물 장비는 냉철하고 인간적인 면이 부족했다. 술 먹고 홧김에 부하들을 패는 사람이 아니라 멀쩡한 제정신으로 능력 없다고 갈구고 욕하면서 죽어라 돌리는 냉혈한이다.[56] 조운은 손부인이 손권의 권세를 믿고 행패를 부리는 것을 견제하는 역할을 맡은 적이 있다.[57] 주유 사후 대도독이자 비둘기파인 노숙이 양측의 동맹의 중요성을 알고 행동했지만 익양 대치 때 유비쪽을 깔보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는데 강경파들은 어떨지 뻔한 거 아닌가.[58] 물론 그렇다고 죽인다, 극형에 처하겠다는 식으로 말한바는 없다.[59] 조조가 유비의 세력을 와해시키기 위해 유비의 신하들에게 벼슬을 주며 중앙에 미축 형제를 천거했을때도 형 미축의 능력과 덕행만을 내세우지 미방 개인은 언급하지 않았다. 또 형 미축은 유비에게 여러가지로 물자적 지원을 아끼지 않았고 유비가 여남에 있을때 손건과 함께 외교를 담당했으며 좌장군 종사중랑으로 두고 계속 그 능력을 중히 썼으나 이 사이 유비가 미방에게 맡긴 직책은 없다. 유비가 익주로 떠난 이후에도 관우가 청니, 익양에서 위군, 오군과 대치했을때도 형주의 일은 거의 관우가 혼자 처리하는 모습이 보인다.[60] 굳이 따지면 관우의 실수는 위에서도 지적했듯이 이런 정치적인 세심함의 문제지 책임을 묻는거 자체는 잘못이라고 할 수 없다. 제갈량 역시 과도하게 욕심을 부리는 공신이자 같은 탁고대신인 이엄을 참고 용인해주면서 대우해줬지만 4차 북벌 당시 보급의 군령을 받아놓은 상태에서 문제를 일으켜놓고 사실왜곡까지 하는걸 보고 더 이상은 참지 못하고 돌아오자마자 온갖 증거와 대신들의 지지를 받아서 사정없이 책임을 묻고 아주 그동안 참았던것 까지 합쳐서 (제갈량이 더 정치적으로 세련되게 처리하긴 했지만) 그야말로 개박살낸 적이 있다. 이 부분은 위에서 언급된 관우의 성격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미방은 분명히 잘못을 했기 때문에 처벌을 하는 것이 맞다. 그러나 제갈량은 이엄의 위치와 역할을 감안해 타이밍을 맞춰서 그가 반격하지 못할 상황에서 사정없이 조지는 정치적인 감각이 있었지만, 기면 기고 아니면 아니라고 하는 관우의 성격상 '슬슬 구슬리다가 적절한 타이밍에 엄벌하는' 것 자체가 무리였던 것이다.[61] 심지어 사인은 유주 출신으로 서주 출신인 미방보다 더 오래 유비를 섬겼을 가능성이 있다.[62] 결국 미방은 오군에 항복하고 나서도 떳떳한 항복이 아니라는 식으로 계속 조롱을 당하고도 별다른 말을 하지 못하고 피해 다녀야 했다. 그것도 여몽 옆에서 종군하면서 그 사정을 훤히 알고 있던 우번에게 말이다.[63] 반준의 경우 관우랑 화목하지 못했단걸로 업무태만이라는 의심을 받고 있다. 그나마 미방은 남군태수였으니 실질적으로 실무엔 이 사람이 더 가까웠을텐데 보급은 어디갔는지 모를정도고 형주 함락되자 손권이랑 말 한마디하고 바로 태세전환한 사람이다.[64] 근본적으로 미방의 경우엔 단순 보급차질을 떠내서 남군성 군수물자를 홀라당 태워서 전쟁에 지장 생기게 만들고 그걸 질책하니 개인적 감정으로 보급에 소홀했는데 관우가 참다 못해서 돌아가면 처벌하겠다라고 하는 게 한도인 수준이었다. 한국에 정사가 처음 국역되어 퍼졌던 2000년대 당시 일부에선 관우가 미방을 죽이겠다고 협박하고 핍박했다는 소리까지 왜곡되어 퍼지기도 했다.[65] 그야 사인과 미방의 유비군 내에서의 입지는 비교가 안 되고 항복해도 그냥 그 시대에 여기저기 널려 있는 평범한 항복이니까.[66] 예를 들자면 이 사건에 가장 가까운 인물들로는 이미 한 번 유장을 등졌던 맹달을 다시 배반하게 만든 유봉이 있다.[67] 자꾸 미방의 배신을 두고 '실제로 일어날 수 없는 배신'이라며 관우의 탓이 아니라면 말도 안된다는 해석을 강요하는 서술이 있는데, 위에 언급했다시피 자기가 맡은 지역에 불을 내서 수많은 물자를 날린 사람이 처벌이 두려워 도망치는 경우는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이다. 심지어 이건 전쟁 중에 일어난 일이다. 보급 때문에 승패가 결정되는 전쟁도 있는판에 자기 담당지역 물자를 대량으로 날려버렸다면 엄청난 중죄가 맞다. 이걸 처벌하겠다고 하는건 지극히 당연한 조치이다.[68] 보급 책임자가 자신의 실책으로 인한 추궁을 두려워 하여 배신을 선택한 것은 큰 잘못이긴 하지만, 이 배신이 장판파에서의 고난을 포함 유비를 20년 넘게 따라다닌 사람으로부터 나왔다는 점, 관우와의 관계가 원만하지 못했다는 점에서 의문이 계속해서 붙고 있는 것이다. 너무나 극적인 배신이라 다른 이유 역시 있지 않았을까 하는 추측이 생기는 것. 다만 사람의 가치관이나 성격 역시 세월과 환경에 따라 바뀌기도 하기 때문에 당시 미방의 사고방식이 유비를 계속 따라다니던 시절과 같지 않았을 수도 있다. 사실 당시 내부에서의 미방에 대한 평가나 인식이 어떠했는지조차도 자세히 알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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