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0-25 05:43:39

김련희

1. 개요2. 생애, 탈북3. 탈북 이후4. 국가보안법 위반5. 지속적인 송환 요구와 현황6. 김련희의 통화 관련 의혹7. 북한 당국의 문제8. 통일부의 입장과 반박9. 시사점10. 관련 기사
“저는 대한민국 국민이 아니에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공민입니다. 김일성 주석님은 제 친부모 같으신 분, 저의 육체와 영혼과 같은 분입니다. 제가 비록 지금은 남한에 억류돼 살지만 조국으로 돌아가는 날만 기다리며 살고 있습니다.”

1969년 ~ ([age(1969-01-01)]세)

1. 개요

2019년의 모습

김련희는 북한에서 대한민국으로 온 북한이탈주민이며,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유죄 판결을 받은 안보사범이다. 본인의 대한민국행이 본인의 의사와 관계 없이 이루어진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으며, 합법적인 북한으로의 송환을 요구하고 있다. 2017년 이전까지 한국에 넘어온 북한이탈주민 중 유일하게 북한 송환을 요구한 인물이었다.[1]

그런 이유로 남북관계가 화해무드로 전환된 이후에는 한국의 일부 진보 세력이 본인의 의사를 존중한 송환을 지지하고 있지만 한국 법률상 송환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이 문제로 대한민국 정부, 국가정보원과 마찰을 빚고 있다.

본 문서는 김련희 본인의 주장을 기본으로 하여 작성되었다. 또한 그녀의 이러한 행적은 유튜브를 통해 여러 번 공개되었고 2021년 10월 27일 이승준 감독의 다큐멘터리 영화 <그림자꽃>이 개봉했다. 이 영화는 제12회 타이완 국제다큐멘터리 영화제 아시안 비젼 경쟁 부문 대상, 제11회 DMZ국제다큐멘터리 영화제 한국 경쟁 부문 최우수한국다큐멘터리상, 개봉지원상, 9회 들꽃영화상 다큐멘터리 감독상을 수상하고, 2020년 핫독스 국제다큐멘터리 영화제 월드 쇼케이스 프로그램에 초청되어 호평을 받았다.

2. 생애, 탈북

김련희는 북한 평양에서 1969년 삼남매 중 장녀로 태어났다. 김책공업대학 양복사로 일하다가 1993년 김책공업대학 의사인 남편 이아무개와 결혼해 딸(당시 20세)을 하나 두고 평양 기준 평범한 중산층 가정의 주부로 살아왔다. 비교적 부족한 것 없이 행복하게 살았다고 한다.

2010년 말부터 복수(간질환의 일종으로 복부에 물이 차는 것) 증상으로 김책공대 병원에 6개월을 입원해 치료를 받았지만[2] 완치가 되지 않았다. 그러다 2011년 5월 20일 중국 산둥성 웨이하이시로 친척 방문 여행을 나왔다. 친척이 중국에 있으면 심사를 거쳐 허가증을 받을 수 있기 때문. 아무래도 중국 병원은 북한보다는 나을 거라 생각해서 치료도 받을 겸 친척도 볼 겸 해서 중국으로 나왔다고 한다. 큰아버지는 조선족 중국인이었고 김련희는 큰아버지 가족 방문 목적의 두달짜리 여권을 받았다. 난생 첫 외국 여행이었다.

첫달은 친척집에 머무르며 병 치료를 받으려 했지만 북한과 달리 중국은 치료비가 너무 비쌌다. 생각보다 병원비가 만만치 않아 치료를 포기했다고 한다. 웨이하이의 친척 언니 집에 한달여를 머물다 치료를 포기하고 평양으로 돌아간다고 말한 뒤 집을 나왔다. 이후에는 선양으로 이동해 나머지 한달을 식당에서 일하기로 마음먹었다. 중국에서 한달 일해 번 돈도 북으로 돌아가면 큰돈이 되기 때문이다. 조선족 사장이 경영하는 북한 국영식당에서 서빙 등의 일을 하던 중 우연히 ‘탈북 브로커’를 만나게 됐다.

브로커는 "뭐하러 중국에서 돈을 버느냐, 남조선(남한)에 가서 몇 달이면 더 큰돈을 벌 수 있다. 자신이 데려다줄 테니 남조선으로 가라. 남조선에서 여섯달만 머무르면 여권이 나온다"며 김련희를 꼬드겼고 그녀는 탈북자 그룹에 합류하게 된다. 남한에서 몇 달 일해 목돈 들고 북한으로 돌아갈 생각이었다고 스스로 밝혔다. 남한으로 가는 건 불법이라는 걸 알았지만 '몰래 건너갔다 몇 달 뒤 중국으로 다시 나와 북한으로 돌아가면 괜찮겠지?'라고 생각했다는 것이다. 일부 북한 주민들이 중국 국경을 통해 몰래 탈북 후 중국에 장기간 취업해 돈을 벌고 재입북하는 사례가 있기 때문에 김련희는 무려 남한에 가는 것을 고작 그 정도 수준의 일로 가볍게 생각한 것으로 보인다.(...) 북한 국경지대가 원체 법치가 안 되고 밀입국이 잦기 때문이다. 즉, 졸지에 가족과 생이별해 이산가족이 되어버린 처지가 인간적으로 안타깝긴 하지만 김련희는 명백한 본인의 의지와 선택으로 한국에 들어온 것이 맞다. 중국에 가는 것과 남한에 가는 것은 차원이 다른 일이라는 것을 인지하지 못한 것.
술 한 잔 먹으면서 물었지. 한국 가서 두세 달 일하고 돌아갈 수 있다는 거, 진짜 그렇게 생각했어요? 하고. 그런데 그게 말도 안 되는 생각이라는 건 모두 우리 기준이더라. 북한은 우리와는 정보량이 다르다. 특히 김련희 씨는 평양에서 남 부러울 것 없이 살았기 때문에 세상 물정을 잘 모른다고 봐야 한다. 우리로 치면 부촌에 살면서 정치에는 관심 없고 갤러리를 다니며 주변 사람들과 어울리는 아줌마 같은 거다. 김련희 씨는 남편이 의사고, 친어머니도 의사셨다. 아버지는 은퇴하셨지만 TV 공장에서 높은 직급이셨다. 본인도 그런 얘기를 하더라. 고난의 행군 시절에도 그렇게까지 어렵게 살지는 않았다고. 아마 함경도 어딘가에 살았으면 탈북자 관련 소식이 많이 돌기 때문에 상황을 알았을 수 있었지만, 김련희 씨는 (그런 정보와는 단절된 곳에 살다가) 중국에서 브로커를 만나고 (그제야) 탈북자들의 존재를 알게 된 거다. 남한에서 두세 달 있다가 북한으로 돌아갈 거라고 하니 (탈북하기 위해 모여 있던 사람들이) 웃었다고 한다. 그건 불가능하다면서. 그때야 뭔가 이상한 걸 알았지만 뒤늦게 중국 공안에 잡히거나 말도 안 통하는 태국에서 범죄인 취급을 받느니 그래도 한민족인 남쪽에서 사정을 얘기하면 되지 않을까 싶었다고 한다. 가족이 북에 있고, 내가 무슨 해를 끼친 것도 아니니 돌려보내 달라고 하면 되지 않을까 했다는 거다. 나도 처음에는 ‘무슨 그런 순진한 생각을…’ 싶었지만, 북한 사람들이 그런 면이 있다. 순하고, 순진하다.
- <그림자꽃>감독 인터뷰
하지만 대한민국행 의사가 크지 않아 뒤늦게 탈북자 그룹에서의 이탈을 요구했지만, 탈북 브로커는 해당 탈북자 그룹이 피해를 입는 것을 두려워해 이탈을 막았으며, 결국 어쩔 수 없이 라오스타이를 거쳐 2011년 9월 16일 인천공항을 통해 대한민국에 들어왔다는 것이 그녀의 주장이다.

그리고 모든 북한이탈주민이 필수적으로 받아야 하는 정부합동신문센터의 조사에서 '본인은 탈북의사가 없고 탈북자 그룹에서 이탈하지 못해 어쩔 수 없이 대한민국으로 왔다'고 진술하고, 북한으로의 재송환을 요구하였다. 하지만 국정원은 합동신문센터에 들어온 탈북자를 북송시킨 전례가 없고 북에 돌아가면 죽임당할 게 뻔한데 그걸 알면서도 보내줄 순 없다 거절했다고 한다. 김련희는 본인이 상관없으니 보내달라고 하기도 하고, 남조선도 공화국에 공작원 보내는 길이 있을 거 아니냐, 거기로 보내만 주면 입 딱 다물겠다는 황당한 소리를 하며 떼를 써보기도 하고[3] 단식투쟁도 해보고 독방에서 한달 동안 안 나가겠다고 버텨보기도 했지만 이루어질 수 없는 소망이었다. 국정원은 김련희씨에게 ‘보호동의서’(대한민국 국민 자격을 부여받고 탈북자 정착 지원을 받겠다는 내용의 각서)를 쓰지 않으면 하나원(남한 정착 교육시설)에 갈 수 없고 북송도 안 되고 합동신문센터에 계속 머물러야 한다고 설명했다.[4] 결국 계속되는 조사 끝에 북한이탈주민으로서 대한민국 국적을 얻는 것에 동의하고 3개월만에 국정원에서 나오게 되었다고 한다.

3. 탈북 이후

2012년 1월 26일 김련희는 하나원을 나왔다.[5] 경북 경산시의 임대아파트 입주권을 받았다. 평양에서 양복사로 일했기 때문에 섬유산업이 발달된 대구 인근으로 가는 게 좋겠다고 국정원이 추천했다고 한다. 하지만 여전히 대한민국에 정착하고자 하는 의사는 없었으며, 대한민국 여권을 받아 중국으로 다시 돌아간 후, 거기서 북한으로 돌아가고자 하였다. 하지만 국가정보원은 합동신문센터에서 본인이 북송을 요청했던 것 때문에 여권을 발급해 주면 나중에라도 북한으로 도망갈 우려가 있어(진짜로 그녀가 그럴 생각을 갖고 있기도 했다) 신원 특이자로 분류하였으며, 그로 인해 여권 발급이 거절되었다. 시간이 흐르면서 2018년, 탈북 7년 만에 여권을 받기는 했지만 현행법 계류 중이라는 이유로 지속적으로 출국 금지 상태라 유명무실하다. 한 달에 한 번씩 법무부의 '출국 금지 연장 통지서'를 꼬박꼬박 받았다. 언론을 통해 문제를 제기하자 6개월당 한 번 발송으로 바뀌었을 뿐이다.

바로 이 점이 중국을 통해서 북한으로 간 전혜성과는 달리 그녀가 재입북하지 못하고 있는 가장 큰 이유다. 만일 김련희가 합동신문센터에서 거짓말로라도 순순히 남한 정착 의사를 밝혔다면, 얼마간의 시간이 흘러 당국의 관심에서 멀어질 때 쯤 여권을 발급받아 월북할 수 있었을 것이다. 실제로도 그런 사례는 충분히 있을법하다. 결과적으로 탈북을 이민쯤으로 가볍게 생각한 것에 이어 또 패착을 범한 셈.

4. 국가보안법 위반

김련희는 재입북의 구체적인 실행을 위해 중국 선양에 있는 북한대사관과 지속적으로 접촉하였다. 2012년 8월과 2013년 6월 5일, 2013년 6월 7일 등 다섯차례 북한영사관과 통화를 했다. “제가 탈북자인데 남한으로 잘못 오게 되었다. 정말 죄송하다. 날 좀 구출해달라”고 말했다. 어떤 통화는 3분 이내로 짧았고, 어떤 통화는 20분 이상 길었다. 영사는 ‘조국의 배려를 받아 사는 국민이 이렇게 죄를 지으면 어떡하나. 중국까지만 오라. 그러면 공화국으로 보내주겠다’고 했지만 그녀가 알아서 중국으로 와야만 한다고 할 뿐 남한에서는 도와줄 수 있는 방법이 없다고 말했다. 하지만 여권이 없는 김련희는 중국으로 갈 방법이 없었다. 말은 저렇게 했어도 북한 측에서 대한민국과 어떠한 실질적인 접촉도 진행하지 않았으니 그저 말뿐이었다.

이에 밀항을 알아봤다. 2012년 말 경산에서 알고 지내던 사람에게 중국 밀항을 문의했지만 비용으로 2천만원을 요구받았고, 그런 목돈은 없었기에 결국 시도도 못해보고 포기했다. 속된 말로 별짓을 다 했지만 모든 노력이 수포로 돌아가게 되자 혹시 '간첩이 되면 강제 추방이라도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가졌다.[6]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공민으로서의 애국심’도 발동했다고. 하지만 실제 북한의 지령을 받아 움직인 간첩은 아니고 어디까지나 행세일 뿐이었다고 한다. 김련희는 탈북자들의 개인정보를 수집하기 시작해 17차례 탈북자들의 집주소와 사진 등을 수집했다. 본인과 친분이 있는 18인의 북한이탈주민 정보를 본인의 휴대폰에 입력하고 경북지방경찰청 보안수사대에 자수함으로써 간첩죄로 체포되었다.

여기서 상황이 좀 복잡하게 꼬였다. 그리고 본인 입장에선 억울한 것도 있다고 한다. 2013년 7월 21일, 동아시안컵 축구대회에 북한 선수들이 참가한다는 소식을 접하고, 고향과 가족이 너무도 그리운 마음에 고향에서 온 사람들이라도 먼발치에서라도 보고 싶어 상암동 월드컵경기장을 찾아가 경기를 관람한 것, 그뿐인데 어느새 간첩이 되어 있었다고. 어느새 선양 영사관과의 전화 통화에서 '북한의 지령을 받은' 것이 되어있었고, 상암 월드컵경기장에서는 '신원 미상의 북쪽 정보원을 만나 탈북자 정보가 담긴 USB를 건넨' 것이 되어있었다.

물론 실제 ‘반국가단체’인 북한영사관에 전화해 ‘탈출’ 방법을 문의했고, 17명의 탈북자 정보도 수집하고 다녔기 때문에 국가보안법 위반을 부인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경찰이 ‘수사에 협조하지 않으면 징역 10년 이상의 형벌을 받고 범행을 자백하면 선처해주는 길이 있다’고 계속 설득해 간첩이라고 허위자백했다는 게 본인의 주장이다.

또한 대구구치소 등에서 다섯차례 자살 기도를 했지만 언론에 보도된 것과 달리 간첩인 게 드러나서가 아니라, 고향으로 돌아갈 수 없는 처지를 비관해 자살을 기도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사실 간첩 혐의로 구속되기 전인 2014년 봄에도 그녀는 수차례 자살 기도를 했다. 경산중앙병원 정신과에서 이미 중증의 우울병 에피소드와 적응 장애,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를 앓고 있다고 진단받았다. 자살 기도를 할 때마다 경찰에 발견돼 다행히 목숨은 건졌다. 어쨌든 징역 2년에 집행유예 3년을 받고 석방되었다. 2심 재판부는, 김련희가 자발적인 이적행위가 아닌 가족에 대한 강압으로 인해 해당 행위를 하게 되었다고 판단하여 김련희에게 징역 1년에 집행유예 2년을 판결한다.
피고인이 당국으로부터 재입북을 위한 제도적 장치가 마련되어 있지 않아 북송 요청을 받아들일 수 없다는 답변을 들었다.
피고인의 입국 경위와 범행에 이르게 된 동기를 살펴보면 통상의 간첩 행위자와 다른 특별한 사정이 있다
대구고법 판결문

이렇게 풀려났지만 보호관찰 때문에 생활에 큰 불편에 시달렸다. 법무부 보호관찰관은 일주일에 1~2번씩 업무 시간에 그를 불렀다. 매번 조퇴해야 하니 눈치가 보일 수밖에. 결국 '간첩 혐의로 구속된 사람'이라는 점이 공장에 알려져 따돌림도 당했다.
 

5. 지속적인 송환 요구와 현황

김련희는 천주교 마산교구 민족화해협력범국민협의회 등을 통해 지속적으로 북으로의 송환을 요구하고 있으며, 이후 신은미의 도움으로 페이스북을 통해서 북한의 가족들과 간접적으로 연락을 주고받기도 했다.

2016년에는 주한베트남대사관에 뛰어들어 인권보호요청서를 내며 망명을 요청했다. 베트남 측에서는 매우 당혹해하면서 김련희에게 그가 한국 사회에서 어떤 핍박을 받고 있는지에 대해서 원칙상 질문했고 김련희가 자신의 사정에 대해 설명하자 잠시 기다리라고 했다. 이에 김련희는 드디어 자신이 북한에 돌아갈 수 있다고 기뻐했으나 한시간 후에 베트남 측은 '베트남은 남북한과 모두 외교관계를 가지고 있으므로 이 문제가 민감하다'면서 집에 가서 답변을 기다리라고 요구하며 사실상 거절했다. 이에 김련희는 베트남 대사관에 머물게 해달라고 요청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베트남 대사관은 대사관측 보안요원과 한국 경찰을 불러 김련희를 쫓아냈다. 이 사건 때문에 2020년 국가보안법상 잠입, 탈출 혐의로 기소되었다. 대사관의 퇴거 요구에 응하지 않았다며 공동퇴거불응죄도 적용했다.

2018년 2월 12일, 북한 예술단이 북한으로 돌아가는 경기도 파주 도라산 남북출입사무소(CIQ)에 돌연 나타났다. 김련희는 북한 예술단을 태운 버스가 이날 오전 10시 30분께 도라산 CIQ에 도착하자 나타나 한반도기를 흔들며 예술단 쪽으로 달려들었다. 김씨는 남한 측 관계자에게 끌려나오면서 "집에 빨리 보내달라"고 저항했다. 이에 한 예술단원은 우리 취재진에게 격앙된 얼굴로 "김련희씨가 북으로 가고 싶다는데 보내줘야 하는 거 아닙니까?"라고 말하기도 했다. 탈북자 김련희 北예술단 귀환 현장 난입··· 정부 "경위 파악 중"

이후로도 지속적으로 칼럼 또는 강의를 통해 송환을 요구하고 있는데 북한에 있는 친어머니가 그녀의 일로 인한 충격으로 실명했다고 한다. 남북분단이라는 현실을 막연하게 생각한 본인의 선택으로 인해 가족에게까지 피해를 준 셈.

그리고 유튜브 채널을 개설하였는데 채널명은 '왈가왈북'. 북한을 '악마화'하는 '가짜뉴스' 검증이 새로운 통일운동이라는 취지로 운영하는 중이라고 하는데, # 북한에 대한 부정적인 내용들이 다 남한 정보기관·보수언론(특히 종편), 그리고 일부 탈북자들의 '가짜뉴스'라고 주장하며 북한을 이상향으로 미화하는 내용의 영상과[7] 여러 탈북민들[8]을 저격(?)하는 영상 위주로 올리고 있다. 기사 링크에서 봐도 알 수 있듯 "일부 보수언론이 북에서 남한 영화를 보면 처형된다고 보도하고 있지만, 그게 사실이라면 현재 북한 주민들은 모두 살아 있지 않을 것"[9]이라며 북한에서 한국 영화 보면 처형된다는 것이 거짓말이라고 주장하고 있다.[10] 사실 김련희는 아직도 '나는 북한 사람'이라고 생각하며 살고 있으니 종북 수준으로 북한을 미화하는 것도 어찌 보면 필연적인 일일 수밖에 없다.[11]

자신의 처지를 세월호 참사 유가족에 비유한 바 있다.
세월호 참사를 겪은 부모님이 투사나 운동가가 아니잖나. 그저 자식을 잃은 엄마 아빠잖나. 그게 제 심정인 거지. 얼마나 막막할까. 저였으면 못 견딜 것 같다. 지금도 세월호 하면 항상 마음이 그렇다. 누구도 대신 감당 못할 비극이다.출처
노란 리본도 달고 다니고, 이런 모습이 영화 그림자꽃에 나오기도 한다.

6. 김련희의 통화 관련 의혹

언론에서 김련희를 취재하는 과정에서 김련희가 북의 가족과 직접 통화하는 장면이 노출되었다. 단순한 전화통화로 볼 수 있지만, 국제전화가 엄격히 금지되고, 더군다나 정부의 감시를 받을 수밖에 없는 탈북자가 아무런 감시 없이 북에 있는 가족과 전화를 할 수 있다고 보기는 어렵다는 의견이 있다.

그러나 보통 사람들의 생각과는 다르게 북한에 휴대전화는 생각보다 널리 퍼져 있으며 탈북자가 북한에 남은 가족들과 전화연락하는 일은 2000년대 후반부터 지속적으로 이루어져 왔다. # 돈만 내면 위성전화 또는 국경지대에서 ZTE, 화웨이, BBK, Lenovo등의 중국제 휴대폰을 통해 대한민국과 전화 통화를 할 수 있으며 탈북자 출신인 동아일보 기자 주성하 역시 상당부분 많이 대중화가 되었다고 증언한 바 있다.

7. 북한 당국의 문제

분명히 본인의 의사에 반하는 준 억류 상태(여권 발급 거절)를 지속하고 있는 대한민국의 처사도 다소 비판을 받을 수 있지만, 북한의 외교 라인도 이 사건에서 분명한 문제적 행동을 보여주었다.

김련희는 재중국 선양대사관을 통해 본인의 처지를 알리고 도와줄 것을 요청했다. 남북관계가 경색된 상태라도 적십자나 민화협을 통해서 실무적인 접촉은 분명히 할 수 있고, 더군다나 본인이 자신은 억류되어있다고 강하게 주장하고 있기 때문에 이를 근거로 대한민국 정부에 송환을 요청할 수 있지만, 김련희가 자살을 시도할 때까지 북한 당국은 아무런 액션이 없다가 BBC, CNN을 통한 송환 주장이 나온 다음에야 어영부영 가족들을 카메라 앞에 세워 송환을 요청했을 뿐이다. 외교의 가장 중요한 역할이 분명 자국민의 안전 보장임에도 불구하고, 자국민에 대한 송환 요청조차 하고 있지 않은 것이다. 다른 탈북자 문제에서는 자기네 국민들을 남조선이 납치했다고 고래고래 떠들던 모습을 생각했을 때 이번 경우는 확실히 예외적이다.

2017년이 돼서야 UN에 서한을 보내 송환을 요청하긴 했는데 여전히 남한 측에 직접적인 요청은 없다. 애초에 북한은 국민을 중요하게 여기는 나라가 아니어서사람 목숨을 소중히 여겼다면 김씨왕조가 사치하고 무기 만드는데 돈 쏟느라 나라를 그렇게 파탄내지 않았겠지 김련희의 귀향보다 "역시 남조선 정보 기관이 우리 인민을 납치하고 있었다."라는 주장을 세계에 선전하는 게 더 중요하기 때문이다. <그림자꽃> 촬영 당시 김련희의 가족들을 취재[12] 할 수 있게 허락한 것도 이런 이유다. ‘남한에 자기네 국민이 억류돼 있다’고 말할 수 있는 내용이니 촬영을 반대할 이유가 없는 거다.

즉 북한 정권 입장에서는 김련희를 '납치 피해자'로 세계에 선전하는 편이 유리하기 때문에, 될 수 있는 한 그녀가 남한에 그대로 머물며 못 돌아와야 더 좋고 그렇기에 방치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케이스들에 대한 전 탈북자 학교 교사의 글

8. 통일부의 입장과 반박

통일부는 김련희가 합동신문센터에서 대한민국으로의 이주와 보호 요청 의사를 분명히 밝혔고, 이를 뒤집을 만한 증거가 없다고 주장하고 있다. 따라서 송환은 불가능하다는 입장을 고수하고 있다. 국정원도 “한국 사회에 정착하겠다는 취지의 자술서를 직접 작성했다. 합동신문센터가 김씨의 북송 요구를 거절하고, 원하지 않는데도 남한 국적을 부여했다는 주장은 전혀 사실이 아니다”라고 밝혔다.

하지만 대구고등법원 제11형사부는 판결문에서 통일부와 국정원의 주장을 인정하지 않고 김련희의 손을 들어주었다. 판결문에서는 그녀가 '정부합동신문센터에서 자유의사에 따른 탈북이 아니라며 본국 송환을 요구했다'고 명시하고 있다.

‘북한이탈주민의 보호 및 정착지원에 관한 법률’에는 북송을 요청한 탈북자를 어떻게 처리할 것인지에 대한 규정이 없다. 해상을 통해 남한으로 표류해온 북한 주민에 대해선 ‘남북해운합의서’ 등 법적 절차를 밟아 판문점을 통해 북송해왔다. 그러나 김련희 같은 사례는 전례가 없어 당시 국정원은 그녀의 신병처리를 두고 무척 고민했던 것으로 전해졌다. 국정원은 김련희와 같은 사례가 발생했을 때 관계기관으로 구성된 ‘북한이탈주민대책협의회’에서 논의해 결정하는 방안을 고민하고 있다. 장경욱 변호사(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는 “북한 어선이 잘못 떠내려와 남쪽으로 오게 된 경우 국정원은 조사 뒤 북송시키고 있다. 북송을 주장하는 탈북자는 인도주의적 관례에 따라 보내주는 것이 맞다”고 주장했다.

9. 시사점

  • 북한이탈주민은 대한민국 국적을 받는 것과 동시에, 통일 전까지는 북한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점을 실질적으로 확인한 최초의 사례이다. 대한민국 여권을 가진 탈북자들이 국경을 넘어가며 탈북과 같은 루트로 재입북한 사례는 간간히 존재하지만 공식적으로 이러한 사실이 확인된 것은 최초이다. 또한 만약 남한 국민이 김련희처럼 자유의사에 의해 월북한 게 아니고 남한에 가고 싶다고 해도 북한에서도 안보낼 명분이 생겼다.
  • 게다가 한국 정부는 문재인 정부 하에서도 북한 주민의 지위에 대해 딱히 변화를 검토하지 않았다. 참고로 이준석이 주장하던 것은 '개성에서 파주까지 직통열차를 놓아 파주에 출퇴근 시키자'는 것인데, 이는 남한에 보호를 요청한 사람이 변심하는 문제를 다루는 것이 아니기에 김련희 같이 비자발적으로 한국에 도착했다는 것과 무관한 말이다.
  • 김련희의 주장이 사실이라 해도 한국 정부 입장에선 이북 땅에서 목숨 걸고 넘어온 탈북자들의 위치를 위험에 빠트릴 수 있는 중대한 사안이기 때문에 나쁜 전례를 만들 수 없는 입장이다.
    • 사실 탈북자들이라고 하여 다 같은 탈북자가 아니다. 북한에서도 탈북해서 중국에 가서 머무는 것과 한국행 기도는 처벌 수위가 다르다. 한국행이 발각되면 가족들은 함경북도 내륙 산골오지로 추방된다.
    • 그래서 탈북자 가족들은 현지에서 대부분 탈북자에 대해 행방불명이나 가족들 몰래 중국으로 간 걸로 해 놓고, 확인이 안 된다는 것을 이용하여 보위부에 뇌물 먹이고 눈감아달라고 하는 경우가 많다. 그런데 재입북자가 하나원 동기들을 기억해 내서 신상을 발설하는 순간 관련 북한의 가족들은 탈북자 가족으로 낙인찍히게 되며 모든 재산을 몰수당하고 산골오지로 추방되어 적대계층으로 평생을 각종 사회적 불이익을 받으며 살아야 한다. 그 외에도 탈북 및 한국 입국 과정에서 하나원의 조사 방법, 신문사항, 그 위치 및 구조, 입소부터 퇴소까지 과정, 이후로도 한국 생활 중 알게 된 다른 탈북자들과 신변보호담당경찰관의 신원 등 김련희가 알게 된 것은 매우 많다. 자발적으로 발설하지 않겠다고 결심하더라도 재입북 후 보위부에서 조사받으면 모든 걸 털어놓을 수밖에 없다.
  • 한편 김련희의 존재는 북한의 탈북자 납치 주장을 뒷받침하는 근거가 되고 한국 탈북자들의 정당성을 흔들고 있다. 그동안 북한은 제3국을 통해 남한으로 탈출한 탈북자들이 자의가 아니라 남한 정보기관의 공작에 의해 속아서 납치당한 것이라고 주장해왔는데 김련희 사건 자체가 북한의 이런 주장을 뒷받침하기 딱 좋은 소재다.
  • 김련희와 같은 문제 있는 인물을 걸러내지 못하고 현행법의 한계를 이유로 데리고 들어왔다는 건 명백히 귀순 의사를 밝힌 다른 탈북자들의 진정성에 흠을 낼 뿐만 아니라 북측의 억지 주장에 근거를 더해주는 결과가 됐고, 상술됐듯이 탈북자들의 안위에 악영향을 끼칠 불씨까지 안고 들어온 결과가 되고 말았다. 아무리 현행법상 한계가 있다지만 그 동안 바다나 하천을 통해 북한에서 남한으로 표류해온 북한 주민이 북송 의사를 밝히면 인도적인 차원에 돌려보냈던 것도 사실이기 때문에 귀순 의사를 묻는 초기 단계에서 얼마든지 북송하여 문제 요소를 제거할 기회는 있었다. 하지만 이제 와서는 탈북자들의 안전 문제와, 코로나19 영향으로 북한이 국경을 봉쇄했기 때문에 김련희의 의사대로 돌려 보내기도 어려워진 상황이다. 다만 재입북자들의 사례를 보면 물리적으로 불가능하지는 않다.
  • 태영호 국민의힘 의원은 2022년 4월 김련희 같은 북송을 원하는 인물과 국군포로를 교환하는 법안을 추진하기도 했다. 김영삼 정부비전향 장기수 등의 사례를 감안하고, 그도 남북관계 개선은 필요하다고 여기기에 이런 법안을 추진하는 모양이다. 하필 국군포로를 '교환'하는 이유는 인권개선의 목적도 있고, 김련희 같은 인물에 따른 북한의 체제 선전도 결론적으로는 큰 효과가 없으리라는 계산이 깔린 것으로 보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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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그러다 2017년 권철남이라는 인물이 추가로 북송을 요구하면서 유일하지 않게 되었다. 권철남의 경우에는 브로커가 꾀여서 데려온 것까진 맞지만 한국에 가는 줄 모르고 속아서 온 게 아니라 남한에 가면 먹고 살기 좋다는 말만 믿고 왔다가 브로커에게 상당한 돈을 빼앗기고 막노동을 하면서 어렵게 살게 되자 실망해서 돌아가려는 경우다. 2016년에 체포됐는데, 본인은 '자신이 간첩이면 포상금 많이 받을 수 있다'고 농담한 것이 빌미가 되어 체포되었다고 주장하지만 법원은 국보법 위반으로 징역 1년, 집행유예 2년을 선고했다. 농담만 했다면 나올 수 없는 형량.[2] 김련희는 어릴 때부터 만성적으로 간염을 앓고 있었다.[3] 북파공작원 자체는 실제로 있지만 상식적으로 그걸 가르쳐줄 리가 없다.(...)[4] 본인은 협박 같았다고 표현한다. "너 간첩 임무 받고 내려왔지. 대한민국 국민으로 살겠다는 서약서만 써라. 쓰지 않으면 죽을 때까지 여기서 나갈 수 없다. 네가 국정원에서 죽더라도 그걸 알 사람은 세상에 단 한 사람도 없을 것이다."라는 식이었다는 것이 그녀의 주장.[5] 참고로 그가 하나원에 있던 시기에 김정일이 죽었다.[6] 여기에서도 그녀의 무지를 볼 수 있는데, 이미 합동신문센터를 거쳐 보호 처분을 받은 사람을 북한으로 추방시키는 일은 절대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진짜 간첩인 비전향 장기수들도 못 가고 있는 판에....[7] 심지어 아웅산 묘소 테러가 남한의 자작극이라는 영상을 대놓고 올렸다![8] 대표적으로 주성하, 강철환, 지성호, 김길선, 강명도, 박상학, 정성산, 안찬일(탈북민 1호 박사다) 등이 있다.[9] 아이러니하게도 이 발언은 북한에 한류가 걷잡을 수 없이 퍼졌다는 것을 가장 완벽히 증명한 발언이 되었다.[10] 사실 '보기만 하면' 감옥에 끌려가는 정도(?)에 그치며 공개처형은 유포하는 경우에 한해(?) 집행된다. 다만 이 기사가 반동사상문화배격법 제정 1년 전인 2019년 기사라는 것은 감안해야 한다[11] 그리고 김련희는 종북이라 할 수도 없다. 종북은 남한 사람이 북한을 빠는 것을 말하는데 김련희는 북한 사람의 정체성을 가지고 북한을 미화, 두둔하는 것이기 때문. 간단히 말해 해외에 거주하는 미국 사람이 미국을 찬미하는 활동을 하는 것과 같은 셈이다.[12] 2016년 겨울, 2017년 가을 여전히 평양에 살고 있는 가족을 실제 촬영했다. 우리나라 국적자는 북한에 들어갈 수 없고 촬영도 불가능하므로 이승준 감독이 직접 갈 수는 없었고, 영화제를 돌아다니다가 친해진 지인인 핀란드인 미카 마틸라 감독이 부탁을 받고 방북했다. 그는 이미 금강산을 촬영 간 적 있던 방북 경험자이기도 하다. 촬영 허가는 또다른 지인인 친북한 성향의 재미교포 노길남을 통해 도움을 받았다. 꼬박 1년이 걸렸다고. 이 사연은 상당히 민감한 사안이라 그가 2020년 사망하고 나서야 알려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