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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학(1951)

김종학의 주요 수훈 및 수상 이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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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V부문 연출상
제20회
(1984년)
제21회
(1985년)
제22회
(1986년)
고석만
(간난이)
김종학
(동토의 왕국)
김홍종
(광장)
제27회
(1991년)
제28회
(1992년)
제29회
(1993년)
고석만
(제2공화국)
김종학
(여명의 눈동자)
곽영범
(어디로 가나)
제30회
(1994년)
제31회
(1995년)
제32회
(1996년)
박철
(엄마의 바다)
김종학
(모래시계)
장수봉
(까레이스키)
김충길
(김구)
성준기
(옥이 이모)
제38회
(2002년)
제39회
(2003년)
제40회
(2004년)
윤석호
(겨울연가)
김종학
(대망)
이병훈
(대장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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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김종학(金鍾學)
출생 1951년 11월 5일
충청북도 제천군(현 제천시)
사망 2013년 7월 23일 (향년 61세)
경기도 성남시 분당구
학력 휘문고등학교 (졸업 / 61회)
경희대학교 정경대학 (신문방송학 / 학사)
소속 MBC(1977~1991)
김종학프로덕션(1995~2009)

1. 개요2. 활동3. 금기에 도전하는 연출자4. 김종학 사단5. 배임, 횡령 문제 등6. 주요 연출작7. 수상 경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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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의 드라마 PD이자 영화 감독.

2. 활동

1977년 MBC에 입사하고 1981년 드라마 수사반장을 통해서 첫 데뷔를 하였고[1] 이후 조선왕조 5백년 회천문, 영웅시대[2] 동토의 왕국, 북으로 간 여배우 등의 굵직굵직한 사극과 우리동네등의 소품등의 연출로 스타급 PD에 다가서게 되었으며 1991년 여명의 눈동자를 통해서 드라마 흥행에 기여하고 이후 SBS로 이적[3]해서 드라마 모래시계를 통해서 일약 스타급 PD로 자리에 오르게 된다.

후술할 송지나와 달리 조선왕조 오백년이나 그 이후 시대극들은 신봉승 선생과 작업한 경우가 많았다. 80년대 시청자들이 기억하는 김종학의 걸작들은 모두 신봉승의 필력이 뒷받침 한 것이다.

신봉승 이후 파트너로 알려진 작가 송지나와 함께 모래시계를 통해서 스타급 PD에 올라서 꾸준한 흥행을 이끌어냈고 1995년 독립회사 제이콤을 설립하여 초대 사장이 되었다. 1999년 김종학프로덕션을 설립하여 2009년까지 초대 사장을 지냈었다.

물론 다 성공한 건 아니라서 1998년 엄청난 제작비를 들인 백야 3.98이 쫄딱 망했으며, 인샬라산부인과같은 영화도 제작했지만 모두 흥행들과 비평들은 그다지 좋지 못했다.

2013년에 배우들에게 지급해야 할 출연료 미지급 문제와 배임혐의 및 횡령 등으로 경찰에 조사를 받게 될 예정이었으나 7월 23일 연탄가스 자살로 사망하였다. 향년 만 61세.

일명 '김종학 사단' 드라마에 출연했던 배우들이 조문을 오면서 애도를 표하였으며 작가 송지나도 파트너를 잃게 되는 비극을 겪었다. 김종학프로덕션은 고인의 사망과 관계없이 드라마 촬영 및 제작은 현행대로 갈 것이라고 밝혔다.

2012년 SBS에서 방영했던 드라마 신의가 그의 생전 마지막 참여작품이자 유작이 되었다.

3. 금기에 도전하는 연출자

MBC 시절 김종학 PD는 당시 정치적, 사회적, 문화적 금기에 도전하는 연출자였다. 최초의 만화 원작 TV드라마 퇴역전선, 극단적인 반공사상 매카시즘이 횡행하던 시절에 좌익계 독립운동과 빨치산, 제주 4.3을 다룬 여명의 눈동자조폭과 권력의 밀착과 운동권을 소재로 한 모래시계 같은 걸작을 만들었다. 당시 뻔한 사랑 타령과 비현실적인 신데렐라 스토리에 지쳐있던 대중들에게 당시 민주화 분위기와 맞물려서 김종학PD의 연출은 대단히 신선했다.금기 깬 독기가 만든 드라마 최초의 키스신 김종학 PD의 전설로 남을 드라마 베스트5

그러나 이후 독립해서 최초로 제작한 백야 3.98부터는 이런 도전 정신이 사라지고, 기존 드라마의 흥행 공식을 따라가는 상투적인 구성이 되고 만다. 그래서 그런지 백야 3.98도 망했다.

4. 김종학 사단

초기에 김종학 사단은 연극계에서는 어느 정도 이름을 얻거나 데뷔한지 얼마 안되었지만 나름 싹이 보이는 신인들 위주로 이야기를 끌고 나갔었다. 당시로서는 생무명이라고 할수 있는 듣보잡 연극배우 이희도를 조선왕조 5백년 회천문에서 광해군으로 캐스팅한 것이나[4][5], 무명의 신인탤런트 박상원인간시장의 장총찬으로 캐스팅해서 일약 스타로 만든 것이 대표적이다.

이후 여명의 눈동자에서 중고 신인이자 한물간 하이틴 배우정도로 여겨진 채시라최재성을 전격 캐스팅하고 무명 연기자였다가 인간시장 작업부터 인연이 있던 박상원을 주연으로 하였다. 그리고 이런 신인들을 뒷받침 해주기 위해서 장항선, 정성모 등의 경험이 풍부한 중견 배우들과 박근형, 김흥기 등의 연기파 원로들을 조연으로 적절히 배치하였다. 이런 방식은 이후 모래시계에서도 충실히 계승된다. 한편 극후반에 배종옥의 대타로 들어온 고현정발연기라고 줄기차게 까였음에도 김종학 감독이 미래의 가능성을 보고 캐스팅한 것으로 이후 <모래시계>에서 그 잠재력을 꽃피우게 된다.

그러나 MBC에서 독립해서 제작자로 나서면서 부터는 김종학 사단의 긍정적인 도전정신은 모두 사라지고, 알려진 한류 스타 위주의 캐스팅에 상투적인 대본으로 일관하면서 계속 흥행에 실패하게 된다. 이에 대해서 여러 투자자들에게 자금을 유치하면서 이런저런 간섭을 받게 된 것이라는 추측이 있다.

5. 배임, 횡령 문제 등

우선 이야기는 태왕사신기 때까지 올라간다. 무리하게 예산을 소비했던 태왕사신기는 광고판매율이 좋았음에도 제작비가 너무 많이 들어 배보다 배꼽이 컸었다. 사실 방송사는 별다른 피해가 없었고, 배용준도 개런티를 꾸준히 챙기며 손해를 보지는 않았지만, 제작사인 김종학 프로덕션은 엄청난 적자에 직면했다.

또한 주요 배우들의 개런티는 챙기면서 조연급 배우, 엑스트라, 스탭들에게는 임금조차 챙기지 않는 모습을 보였다. 심지어는 태왕사신기에 출연한 장항선도 제대로 출연료를 받지 못하였다. 제빵왕 김탁구의 인기로 모 여성지에서 인터뷰한 바에 의하면 이때 출연료 받을 것을 생각해서 투자한 농장이 출연료 미지급으로 큰 손해를 보고 접게 되었다고 한다.

장항선은 직접적인 언급이야 안 했다지만, 서운함을 감추지 않았는데 문제는 방송계의 원로이자 10년 넘게 같이 일한 김종학 사단 배우이며 극에서의 비중이 높은 주연이나 조연 배우들도 이럴 정도니 무명 배우들은 그저 말할 필요도 없었을 것이다. 이러한 고질적인 악습으로 제작에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하는 스탭들의 임금은 재능기부를 빙자한 착취 수준으로 최저임금에도 못 미치면서 엄청난 노동량으로 악명이 높았다.

김종학 역시 이에 따라 스탭들 챙기는 것은 안중에도 없었고 한 동안 지급 문제에 대해 무시했다. 스탭들은 먹고사는 생계와 관련된 문제이기 때문에 소송까지 걸었지만 언론에 반짝했다가 금세 무관심해졌다. 스탭들 임금은 체불하면서 본인은 벤츠나 끌고 다니냐는 비판이 나왔을 정도다. 그래서 영화계에는 심형래, 방송계에는 김종학이라는 불명예도 그를 따라다녔다.[6](물론 심형래 같이 대놓고 강원랜드 간다거나 하는 일을 없었지만) 그러는 와중에 신의를 제작했지만 지급관련 문제는 나아지지 않았다.[7]

재정 압박이 심각해지면서 주연 배우의 출연료까지 제대로 지급하지 못하는 상황이 되자 본격적으로 검찰이 수사에 착수해서, 출국 금지에 불구속 입건이 되었다. 여기서 알 수 있는 서글픈 현실은 공권력은 스탭, 엑스트라, 조연 배우 임금이 체불될 때는 외면하다가 주연 배우 출연료가 한번 밀리자 득달같이 달려들었다는 것이다. 정작 어려운 사람은 임금이 한번만 밀려도 생계가 위태로운 엑스트라와 스탭들인데 방송사가 드라마가 망했을 경우 자신들의 피해를 최소화하는, 외주 제작사에 모든 것을 떠넘기는 착취 구조에서 발생한 비극이라고 할 수 있겠다. 하지만 김종학 본인 역시 스탭들 임금 지급에 대해 큰 신경을 쓰지 않았고, 동시에 태왕사신기로 한번 쓴맛을 본 상황에서도 무리하게 예산을 쏟아부은 드라마를 만든 점 때문에 무조건적인 약자이자 피해자는 아니다.

당장 김종학의 자살로 임금을 받을 길이 아예 사라져버린 스탭들만 하더라도 일부 언론에서는 방송사라는 갑의 횡포에 김종학이라는 을이 피해를 입은 양 보도하는데, 아주 틀린 얘기는 아니지만 김종학 또한 스텝이나 단역배우들에게 갑의 위치도 겸했기 때문에 핀트가 좀 어긋나는 보도라 할 수 있다. 다만 방송사가 외주제작사를 착취한 일은 꽤나 심해서 2012년도에 채널A가 제작사와 협의없이 무단 종영을 하거나 제작비를 지급하지 않아, 외주제작사가 이에 항의했다는 보도가 나온바 있다.

6. 주요 연출작

7. 수상 경력

  • 1984년 한국방송대상 연출상, 작품상 - 인간의 문, 동토의 왕국
  • 1984년 제20회 백상예술대상 TV부문 연출상 - 동토의 왕국
  • 1992년 제28회 백상예술대상 TV부문 연출상 - 여명의 눈동자
  • 1992년 한국방송대상 작품상 - 여명의 눈동자
  • 1995년 제31회 백상예술대상 TV부문 연출상, 드라마작품상 - 모래시계
  • 2002년 경실련/시청자가 뽑은 올해의 드라마 - 대망
  • 2003년 제39회 백상예술대상 TV부문 연출상 - 대망
  • 2003년 PD연합회대상 작품상 - 대망
  • 2006년 경희언론 문화인상
  • 2007년 MBC 연기대상 공로상 - 태왕사신기
  • 2014년 제26회 한국PD대상 공로상

[1] 물론 수사반장 자체가 각 회마다 따로 진행되는 형식의 드라마였기때문에 전체 에피소드 연출은 아니다. 이병훈 PD등 MBC 유명 연출가들은 여러 에피소드를 연출했고 이 작품의 연출은 유능한 신인들의 작업장이기도 했다.[2] 최불암과 유동근이 나온 기업드라마가 아닌 이문열 원작의 한국전쟁 시대극, 현석과 김용림이 주연을 맡았다.[3] 정확히는 프리랜서 선언 후 SBS와 연출 계약이다. 참고로 그가 KBS, MBC 소속 드라마 PD 중 최초의 프리랜서는 아니다.(1호는 MBC 김한영 PD.)[4] 단 이희도의 첫 출연은 이 작품이 아닌 북으로 간 여배우에서 김일성으로 잠깐 나와서 문예봉과 악수하는 부분이다. 역시 김종학의 추천.[5] 이희도가 여성잡지와 인터뷰한 바에 의하면 자신도 광해군으로 캐스팅 될지 몰랐고 당시 유명 연기자들이 노렸던 이 역을 무명의 연극배우에게 넘긴 일로 김종학 감독은 시말서를 썼다고 한다.[6] 여명의 눈동자 제작 당시 인터뷰를 보면 심 감독의 헛소리를 능가할 만큼의 자부심이 철철 넘친다. 사실 SBS 개국의 문제로 MBC에서 묻지마 투자를 한 것이지 보통 같았으면 조트망 수준으로 갈뻔한 이야기다.[7] 당시 기사들은 자살 문제를 신의 때문인 것처럼 몰아갔었지만, 디스패치 기사 보면 알 수 있듯이 태왕사신기로 엄청난 빚을 졌고 그것때문에 돌려막기 등 여러가지로 힘들었다. 신의는 해외 수출도 많이 했고 광고도 완판되어 알려진 것과 다르게 돈 많이 벌어다 준 작품이며 오히려 태왕사신기 빚을 신의에서 막는다고 퀄리티가 떨어지는 피해를 봤다. 직접 드라마 보면 알겠지만 신의는 몇백억 들어간 대작 퀄리티가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