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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고은(高銀), 본명 고은태(高銀泰) |
국적 | 대한민국 파일:대한민국 국기.png |
출생 | 1933년 8월 1일 ([age(1933-08-01)]세) |
출생지 | 전라북도 옥구군 미면 미룡리 |
첫 작품 | 폐결핵 (1958) |
최근작 | 무제 시편 (2013) |
종교 | 불교(법명 : 일초) |
제3회 만해문학상 수상 | ||||
천승세 (1975) | → | 고은 만인보 (1988) | → | 황석영 (1989) |
대한민국 은관문화훈장 수상 |
1. 소개
高銀.본명은 고은태(高銀泰). 1933년 8월 1일, 전라북도 군산부에서 출생.
한국의 시인이자 성추행 파문으로 논란을 빚고 있는 피의자. 단국대학교에서 명예 문학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2008년부터는 문예창작과 석좌교수로 재직중이다. #
1974년 대한민국 최초의 진보 문인 단체인 '자유실천문인협의회'를 창설, 현재 우리 문학계의 주류를 차지하고 있는 진보 성향 문학인들의 대부 역할을 해오고 있다. 뿐만 아니라 1987년 음악, 미술, 공연, 문학 등 진보 예술계 전체를 아우른 '민예총'을 창설하여 초대 공동의장을 맡으며 예술계의 반미 운동을 앞장서서 진두 지휘해왔다.
그러나 연이어 터지는 성폭력 추문으로 이미지가 크게 실추되었다. 일각에서는 교과서에서 제외해야한다는 논의가 있을 정도.[1]
대부분의 시민들은, 최영미 시인의 고발이 있기 전까지 고은의 엽색행각을 전혀 짐작조차 하지 못했고, 그를 '노벨상 후보' '한국 문단의 존경받는 원로' 로 매우 존경하는 사람이 많았다. 분명 그의 필력은 북유럽 등에서 인정받았긴 했었으나, 아래의 사건사고로 인해 이러한 실력과 그에 걸맞은 인성을 갖추지 못했다는 평이 있다.
2. 생애
군산 미룡동 용둔마을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을 보냈다. 일제시대 때 창씨개명 이름은 '다카바야시 도라스게(高林虎助)'였다. 훗날 고은 시인은 경향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창씨개명을 하지 않은 사람은 존경받아야겠어요. 우리가 아는 그 시절의 작가들이 대부분 조선 이름을 썼던 게 아닌가 하는데요?”라는 질문을 받자 발끈하며 최남선, 이광수의 예를 들며 반박한 적이 있다.군산고등보통학교(군산고등학교)에 다닐 때인 1950년 6.25 전쟁이 발발했다. 6.25때 고은의 일가친척들은 좌익 활동을 했다. 특히 고은의 당숙은 인민위원장이었다. 친가뿐만 아니라 외가도 좌익이었다. 그의 외삼촌도 당직을 맡고 있었다. 고은 일가는 6.25 당시 용둔리 일대의 민간인 학살을 자행했다. 이후 전세가 역전되어 국군과 UN군이 반격하고 인민군이 퇴각하자 고은은 아버지와 함께 마을에서 도망쳤다. 때문에 고은의 최종학력은 군산고등보통학교 4학년 중퇴가 되어버렸으며, 공식적으로는 초졸(미룡초등학교 졸업)이다.
이때 학살당한 유가족들의 반대로 고은은 이후에도 군산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있다. 70년대에 한번 고향에 내려왔다가 고향 사람들에게 발각되어 간첩으로 신고되는 바람에 14시간 동안 조사를 받고 풀려난 적이 있다고 밝힌 적도 있었다.# 고은은 1991년 어머니 팔순 잔치 때가 되어서야 처음으로 공개적으로 고향 군산을 방문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후에도 학살의 피해를 입은 지역 주민들의 반대 여론 때문에 군산에 있는 고은 생가는 복원되지 못하고 방치되어 있는 상태라고 한다.2006년 오마이뉴스 기사에 따르면 고은 생가는 2006년까지만 해도 남아 있었으나, 이후에도 끝내 복원되지 못하고 완전 철거되어 현재 그의 생가 터에는 방문객들을 위해 시 한 편과 문패만 걸려 있다고 한다. 그러나 고은 시인의 과거는 고향에서도 서서히 잊혀져 갔고 2000년대 중반 이후 노벨문학상 후보로 계속 거론되자 최근 군산시에서는 고은의 공적을 기리는 시단위 사업이 추진 중이고 기념물도 설치되었다. 그러나 2018년 성폭력 폭로 이후 기념 사업이 모두 중단된 상태이며 철거하라는 시민들의 민원이 이어지고 있고 한다. 2018년 3월 2일 네이버-KBS뉴스9 ‘고은 성추행’에 고향 군산 충격…기념사업 모두 보류
인천상륙작전 이후 인민군이 퇴각하자 고은은 군산에서 도피하여 선유도로 피신했다. 이후 중공군이 참전하여 1.4 후퇴로 국군과 UN군이 밀려나자 선유도에서 나와 군산으로 돌아왔다. 당시 무성영화의 변사(당시의 성우 및 나레이터)를 하려고 했으나 처음 상영회에서 너무 떨어서 잘린 적도 있다고 한다. 또 인맥을 통해 군산북중학교에서 잠깐 교사 활동을 했다고 한다. 그러나 국군과 UN군이 다시 재반격을 시작하여 치고 올라가자 다시 도피 생활을 시작했다. 1951년 봄에는 두 차례 자살을 시도하기도 했다고 한다.[2] 그러다가 1951년[3] 입산하여 승려가 된다.
6.25 전쟁 중인 1951년 일본 조동종[4] 동국사에 들어가 승려가 되었다. 이후 10년간 승려 생활을 하면서 참선과 수양을 거듭했다고 한다.[5] 그러나 한편으로 그는 승려 신분임에도 불구하고 폭음을 일삼았다고 거리낌없이 말하기도 했다. 1953년에는 경남 통영 미륵섬 미래사를 찾아가 당시 불교계에서 가장 명성이 높은 고승인 효봉 스님의 제자가 되었다. 그의 법명으로 알려진 일초(一超)는 이때 효봉 스님에게 다시 받은 법명이다. 1957년 효봉 스님이 초대 조계종 총무원장으로 추대되자 스승을 따라 서울로 올라왔다. 이후 〈불교신문〉을 창간하고 주필이 되었다. 이문열의 소설 사로잡힌 악령[6] 에 따르면 고은은 문단에 데뷔한 후 자칭 효봉 스님의 상좌(수제자)라고 말하는 등 효봉 스님의 명성을 이용하여 문화예술계의 고위 인사들과 쉽게 교류할 수 있었다고 한다. 소설에서는 명사 사냥꾼으로 표현되어 있는데, 한 예로 말 몇 번 섞어본 것이, 몇 년 뒤에는 아주 잘 아는 사이로, 또 몇 년 뒤에는 죽마고우로 포장되어 사람들을 현혹했다는 대목이다.
1958년 11월 〈현대시〉에 조지훈의 추천으로 〈폐결핵〉이, 서정주의 추천으로〈천은사운〉 〈봄밤의 말씀〉, 〈눈길〉을 발표하며 등단했다. 1960년 첫 시집 〈피안감성〉(彼岸感性)을 냈다.
1962년 종단의 징계를 받아 승복을 벗고 환속했다. 징계 사유는 알려지지 않았으나 당시에 한창 나돌던 고은의 성추문과 관련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 그러나 훗날 고은 본인은 승단의 개혁을 주장했다가 종단의 정치보복성 징계를 받은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당시 신문 기사에도 나와 있듯이 고은의 환속은 성추문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또한 종단의 최고 어른이 자신의 스승이었던 효봉 스님이었기 때문에 고은이 정치적인 이유로 징계를 받았다는 주장은 그리 설득력이 높지 않다. 1963년 봄 목포에서 제주도로 가는 배에서 뛰어내려 그의 생애에서 세 번째 자살 시도를 했으나 실패했다.
1968년 수필집 〈인간은 슬프려고 태어났다〉를 냈는데, 수필집에서 자기 스스로를 '성(聖) 고은'이라고 신격화하여 사회적 이목을 끌었다. 1970년 짧은 시집 〈세노야〉를 펴낸 뒤, 한동안 작품을 내지 않고 번역가로 활동했다. 등단 이후 1970년까지 발표된 그의 시들은 허무의 정서, 생에 대한 절망, 죽음에 대한 심미적인 탐닉이 주를 이루고 있다. 당시 그를 두고 흔히 허무의 시인이라고 불렀다.
그러나 1974년부터 그의 시는 경향이 크게 달라지게 된다. 고은은 1974년 저항시집 <문의 마을에 가서>을 발표한 이후 시대상황에 대한 비판과 현실에 대한 투쟁의지를 적극적으로 담는 저항시를 발표하기 시작한다. 70년대 중반부터 갑자기 성향이 완전히 바뀐 것에 대해 고은 시인 본인은 "이쪽으로 흐르던 물이 다른 쪽으로 급격하게 돌아서 흐르기 시작한 것"에 비유했다. 이후 그는 70년대 최고의 저항시인으로 꼽히게 되었다. 또한 반독재 및 반미 투쟁에도 적극적으로 나서게 되었다. (자세한 내용은 아래 항목 참조)
1983년 중앙대학교 영어과 이상화 교수와 결혼한 뒤 부인의 직장이 있는 중앙대학교 안성캠퍼스에서 멀지 않은 안성 대림동산 전원주택 단지에서 살았다. 2013년 수원시의 구애로 안성을 떠나 수원 광교산 자락으로 이주했다. 그러나 광교산 일대 주민들이 특혜 및 혈세 낭비라는 이유로 시위를 하며 논란이 되고 있다. 아마 본인들 거주지 주변의 개발제한구역 해제를 위해 애먼 고은 시인을 타겟으로 삼은 듯 한데 성격 상 수원을 떠날지도 모르는 상황이라 수원시 측에선 난감했었었다. 그리고 실제로 떠나게 되면서 주민들은 욕을 엄청 먹는 중이었다. 참고로 저 구역은 장안구 상,하 광교동으로 영통구에 속한 광교신도시와는 전혀 관련이 없다.
그러나 후술한 성추행 파문으로 인하여 주민들은 다른 의미로 재평가를 받고 있다.
3. 정치적 행보
1958년 등단 이후 고은은 1970년대 초반까지 쭉 순수문학만을 지향해왔다. 그러다가 1974년을 기점으로 저항시인으로 변모하여 반독재 및 반미 투쟁에 앞장 서게 된다. 일부 문헌에는 1971년 3선 개헌 반대 때부터 고은이 반독재 운동에 앞장섰다고 쓰여져 있지만 이는 사실과 다르다. 이에 대해 고은 본인은 훗날 3선 개헌 당시 자신은 '무각성적'이었다고 말한 바 있다.1974년 저항시인으로 변모한 이후 고은 시인의 행적을 보면 반미, 친북 활동에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으며, 정작 업적으로 내세우고 있는 민주화, 반독재 활동은 생각보다 비중이 크지 않다. 사실 고은 시인의 민주화, 반독재 활동이라고 내세우는 업적들은 반미, 친북, 친미성향 정부에 대한 반정부 활동과 연관된 경우가 많다. 고은은 독재자인 카다피, 김정일에게 찬사를 보낸 바 있기 때문에 반독재, 민주화 운동가라고 이름 붙이기에도 난감한 인물이다.
3.1. 명사 사냥꾼
힘이 없는 악은 의미가 없다. 악이 악다워지려면 힘이 있어야 한다. 그것이 권력이든 물리적 폭력이든 재력이든, 지식이나 기술 혹은 특수한 재능이든 상대를 강제하거나 마비시킬 수 있는 힘을 지녀야만 악은 악답게 자랄 수가 있다. 그의 악이 의지해 자란 힘은 말과 글을 다루는 재능이었다. 말의 재능은 그의 ‘명사 (名士) 사냥’ 시절에 이미 충분하게 발휘되었다.
사로잡힌 악령
사로잡힌 악령
고은은 젊은 나이에 출가하여 스님이 되는데, 당시 불교계 내외로 상당한 존경을 받고, 가장 유명한 고승이었던 효봉스님[7]의 상좌가 된다. 사로잡힌 악령은, 또 다른 효봉스님의 문도의 입을 빌려, 그가 무턱대고 계속해서 스승님을 찾아 어찌어찌 상좌가 된 것으로 묘사한 바, 시작부터 명사 사냥꾼의 기질을 다분히 보였음을 알 수 있다.
상좌의 직함을 단 그는 이후 법조계, 문화계, 예술계 여러 사람들과 교유하였는데 그의 타고난 말재주와 언변으로 유명 명사들이 쉬이 그를 함부로 대접하지 못하게 했고, 나중에 명사들이 타계하였을 무렵 고은의 자서전에서는 그가 '피를 나눈 것 처럼 절친한 사이' '둘 도 없던 벗'으로 포장되어 알려지기 마련이었다.
- 예: 효봉 스님의 상좌 → 문인들과 교류 → 문인들의 추천으로 등단 → 미당 서정주와의 교류 → 서정주 사후 그의 문단 위치를 물려받음
그의 명사 사냥은 이후 대통령으로까지 발전되어 김대중 대통령과는 각별한 사이로, 그의 사후 묘비에까지 시를 써 주게 되었고 노무현 대통령과도 친분이 있었다. 그의 막연한 민족주의 정서[8]는 북한에 대한 일방향적인 동경을 낳았고, 김정일을 지나치게 훌륭한 사람으로까지 평가하며 실제로 김정일을 만나게 된다. 그의 명사 사냥꾼의 자질은 한반도 내외에 걸쳐 끊임없이 발휘되었다.
3.2. 사회운동
고은은 1974년 저항시집 <문의 마을에 가서>을 발표한다. 이어 고은은 진보 문학인들을 결집하여 1974년 11월 18일 대한민국 최초의 진보 문인 단체인 '자유실천문인협의회'를 만들어 초대 대표에 취임했다. 이 '자유실천문인협의회'는 현재까지 두 차례 이름을 바꾸면서 진보계열 문인들을 대표하는 단체 역할을 해오고 있으며, 이후 고은 시인은 진보-좌익 계열 문인들의 구심점 역할을 해오고 있다. '자유실천문인협의회'는 민주화 열기가 한창이었던 1987년 9월 17일 '민족문학작가회의'로 확대 재창단되었다. 이후 '민족문학작가회의'는 2007년 12월 8일 '한국작가회의'로 명칭을 바꾸고 도종환을 신임 사무총장에 선출하면서 재창단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9]고은은 김지하구출위원회 부위원장(1974년), 민주청년협의회 고문(1978년), 한국인권운동협의회 초대 부회장(1978년)으로 활동했다.
1979년 6월 지미 카터 미국 대통령의 방한 반대운동을 주도하다가 '국가보위에 관한 특별조치법' 위반으로 투옥되어 1979년 말 석방되었다. 그동안 6.25때 우리나라를 도와 준 우방인 미국에 대해서 공개적으로 반대하는 운동이 없었기 때문에 매우 충격적인 사건이었다. 훗날 고은은 79년 카터 방한 반대운동이 국내 반미 운동의 효시가 된 사건이었다고 자평하면서 큰 의미를 부여했다.
1980년 김대중 내란음모 사건 연루 혐의로 다시 투옥되어 복역했다.[10] 그러나 평소 좋지 않았던 귀 건강이 악화되어[11] 옥중에서 귀 수술을 받고 얼마 후인 1982년 8·15 특사로 풀려났다.
1987년 9월 17일, 이미 1974년 자신이 창설했던 '자유실천문인협의회'를 확대 개편하여 '민족문학작가회의'로 재창단했다. 이후 고은은 이 단체에서 의장, 부회장 등을 지냈다.
고은의 이러한 변신은, 본인의 추악한 악령을 감추고 민주화 운동이라는 거대하고도 절대적인, 시대의 숙제이자 사명감이라는 타이틀 뒤에 숨어 더욱 악이 번성하게끔 하였다. 이 악은 절멸되지 않으며, 오히려 주위에 부역자, 동조자들로 인하여 엽색행각은 사소한 일, 대의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닌 일 정도로 묵과되었으며, 고은을 비난하는 것은 곧 민주화 정신의 문학계를 비판하는 것으로 걷잡을 수 없이 그 의미가 커져만 갔다.
1989년 1월 한겨레신문에 ‘무아마르 카다피 대령에게’라는 칼럼을 썼는데 이 칼럼 내용이 논란이 되었다. 이 칼럼에서 고은은 악명 높은 독재자 카다피를 옹호하고, 미국을 맹비난했다. 고은은 칼럼에서 리비아가 테러를 저지르는 것은 미국 탓이라는 기적의 논리를 펼쳤다. 더욱 놀라운 것은, 이러한 주장이 북한이 스스로를 변호하는 주장과 매우 유사하다는 점이다. 미국을 순수 악으로 상정하고, 그에 대항하는 국가들을 마치 혁명국가라고 단순하게 이분법적으로 접근했을 때 가능한 놀라운 사고방식인 것이다. 그는 미국이 ‘세계 경찰국가’의 못된 패권으로부터 그들 자신의 도덕을 회복해야 한다고 말했다. 또한 그는 한미 연합 군사훈련인 팀 스피리트 훈련이 동아시아 긴장완화에 크게 해로운 것이 되고 있다고 주장했다. 놀랍게도, 이 주장 모두가 현재 가장 세계평화를 위협하는 북한의 주장과 유사하다.
1989년 고은은 문익환 목사의 방북과 동시에 진보계열 문학인들의 방북을 추진했다. 고은은 남북작가회담 추진위원회 위원장을 맡아 3월 중순 북한의 조선작가동맹중앙위원회와 교섭하여 3월 27일 남북 작가 회의 회담을 주최하기로 합의했다. 그리하여 27일 고은은 '민족문학작가회의' 소속 대표단 5명을 데리고 판문점으로 향했으나 경찰에 발각되어 저지되고 말았다. 이에 고은, 신경림 등 '민족문학작가회의' 소속 회원 26명이 서울마포경찰서에서 조사를 받았다. 당시 뉴스 보도 화면. 당시 조사를 받은 26명 가운데 25명은 범법 사실이 발견되지 않아 조사 후 풀려났으나 고은은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4월 3일 구속 수감되었다. # 사로잡힌 악령에서는 이러한 대목을 신랄하게 비판하고 있으며, 방북을 선수치고 싶었으나 빼앗긴 것에 대한 분, 그러나 이러한 일로 또다시 추앙받게 되고 떠받들여받게 되어진 씁쓸한 현실에 대한 비난이 자세히 묘사되어 있다.
3.3. 민주화 이후의 행보
1988년 12월 23일 진보 예술단체를 총망라한 '한국민족예술인총연합(민예총)'을 창설하여 공동 의장에 취임했다. 출범 이후 '민예총'은 명실상부한 대표적 진보적 문예운동 연합체로 자리잡게 되었다. # 민예총은 창립 10년째인 1998년 회원이 만명 수준이었으나, 김대중 정부와 노무현 정부를 거치면서 급성장하여 2008년에는 회원이 10만명에 이르게 되었다. 2000년대 이후 '민예총'은 국가보안법 폐지, 미군 장갑차 사건 규탄, 부시 미국 대통령 방한 반대, 이라크 파병 반대, 한미 FTA 반대, 평택 미군기지 이전 건설 반대 및 주한미군 철수, 제주도 해군기지 건설 반대, 광우병 파동(미국산 쇠고기 수입 반대), 한미 을지훈련 반대 등에 적극적으로 앞장섰다. '민예총'은 노무현 정부 시절 5년 동안 규모가 네 배 가량 큰 보수 성향의 '한국예총'의 85% 수준에 이르는 지원금을 받는 특혜를 누렸다.[12]고은 시인과 김대중 전 대통령과의 관계는 상당히 각별했다. 1998년 2월 김대중 대통령 취임식에 초대되어 찬시를 헌정하기도 했다. 김대중 정권 취임식과 관련된 고은 시인의 기사. 고은은 김대중 정부의 정책이었던 햇볕정책을 적극 지지했으며, 1998년 7월에 통일문화연구소 방북조사단에 포함되어 북한을 방문했다. # 이어 2000년 남북 정상회담 때 특별수행원 자격으로 김대중 대통령과 함께 북한을 방문하기도 했다. 2009년 8월 김대중 전 대통령이 서거하자, 추모시 <당신은 우리입니다>를 썼다. 이 시는 서울 국립현충원의 김 전 대통령 묘지 곁에 세워진 비석에도 새겨져 있다.
2009년 9월 23일에는 노무현 재단 출범 당시 재단 고문으로 추대되었다.
4. 문학적 평가
4.1. 긍정적 평가
4.2. 부정적 평가
5. 노벨상 후보?
20여개국에 시가 번역되었고 오리엔탈리즘과 민주화 운동 경력같이 서양인들이 좋아할만한 요소가 많아서 노벨문학상 후보로 자주 거론되고 있는데, 매년 여러 나라에서 그를 초청을 하며, 2007년 영국 브리태니커 대백과사전에 이명박 대통령, 가수 비와 더불어, 그리고 한국 문인으로는 유일하게 이름이 올랐던 것이 그러한 점을 보여줬다.다만 노벨상 후보는 비공개가 원칙이기 때문에 실제 고은이 노벨상 후보에 올랐는지 여부에 대해서는 전혀 알 길이 없다. 노벨상은 후보를 선정해서 투표하는게 아니라 심사위원들이 올해는 누가 받을만하다고 생각되는 사람을 적어내는 방식이다. 그리고 매년 후보에 올랐다는 이야기는 노벨위원회에서 공식적으로 발표한 것이 아니라, 영국의 도박사이트 래드브록스에서 순위권에 들었다는 것이다. 즉 후보 운운하는 것부터가 어떻게 보면 김칫국. 그래도 래드브록스는 2006년 터키 소설가 오르한 파묵의 수상을 맞춘 이력이 있다.
고은 시인이 노벨문학상 후보로 자주 거론된 것은 2000년대부터인데, 마침 2000년 김대중 대통령의 노벨 평화상 수상 이후 또다른 노벨상 수상자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이때 인터넷의 전국적인 보급시기와 맞물려 오프라인에서 가장 많이 오르내리던 이름이 고은이었다. 이때부터 교과서나 모의고사에 출제되는 빈도가 늘었으며, 본인의 저서가 노벨문학상을 주관하는 북유럽쪽으로 번역되기 시작하였다. 또한 2000년 말 미당 서정주의 죽음과 맞물려 문학적 성취에선 비교가 되지 않음에도 그 자리를 대신하는 수준의 인지도를 갖게 되었다.
구체적으로는 2002년 외신에서 고은의 노벨상 수상 가능성을 처음으로 제기하였으나 그때는 별다른 반향이 없었으며 국내 언론은 ‘고은씨도 노벨문학상 물망에 올랐다’면서도 그 해는 여성작가의 차례가 올 것이라고 짧게 전달했을 뿐이었다.
2005년부터 고은의 노벨상 후보 이야기가 국내 언론의 큰 관심을 끌게 되었는데, 이는 로이터 통신이 한국의 고은 시인을 두 번째로 유력한 노벨문학상 수상자로 꼽았고, 노벨 문학상 수상자 발표가 당초 예상된 10월 6일보다 한 주 늦어진 13일로 바뀌면서 기대가 커진 것도 한몫했다.
이렇게 후보로 거론되는 까닭은 고은이 1990년대 이후 1년의 반을 국외에서 보낼 정도로 세계 각지의 문학회를 돌아다니면서 우리 문학 알리기, 시 낭송, 초빙 교수 등 활발한 국외 활동을 하여 국제적인 인지도를 높였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한편 이때 스스로를 노벨 문학상 후보라고 소개하며 셀프 홍보를 하고 다녔으며 이런 고은의 노벨상 셀프 홍보를 한겨레신문 등이 긍정적으로 보도하면서 그의 노벨상 후보설이 시작되었고 이것이 반복되다보니 마치 신빙성 있는 사실인양 확대되었다는 의견도 있다. 어찌되었건, 고은의 노벨상 후보 밀어주기는 일종의 꾸준한 홍보와 한국 문단을 대표한다는 거짓된 아이덴티티를 적극 어필하여 외신에 알리는 데에 대한 방법론적인 꾸준한 도전이었을 뿐, 그의 작품이 세계적으로 알려지거나 한국 문단에서 크게 인정받은 것도 아니었다.
북유럽에서는 여러 상을 수상한 바가 있다. 노르웨이에서는 자국의 노벨문학상 수상자 비에른스티에르네 비에른손을 기린 비에른손 훈장을 수여했고, 스웨덴에서도 자국 노벨문학상 수상자 하뤼 마르틴손을 기리는 상인 동시에 동아시아권 문학에 주는 상인 시카다(Cikada)상을 수여하였다.
그러나 그에 대한 한국 문단의 평가는 전반적으로 박하다. 원로라서 대접을 한다는 뉘앙스가 강하다. 문학적 담론이나 평론의 대상으로 활발하게 논의되지도 않을 뿐더러 일반 대중에게도 대표작으로[13] 기억될 만한 작품이 없다.[14] 학교 교과서나 참고서에는 간간히 나오는 작품이고 이에 따라 수업시간에 다루는 경우가 종종 있긴 하지만 노벨 문학상 수상 무렵에 나오는 뉴스기사 이외에 순수 문학작품으로 고은 시인을 접한 사람은 적은 편이다. 미당 서정주와 그 제자들이 주류인 한국 문학계에서 비주류로 밀려있다가 노벨 문학상 후보로 거론될 무렵부터 문단계의 원로로 자리매김했다는 억지주장이 있었지만 고은이 말년에야 미당과 멀어졌고 그 이전에는 미당과 친밀했으며 미당의 제자라는 말까지 불렸던 인물 중 한명이라는 점을 간과한 주장이다. 그러나 어디까지 미당과 대등하다는 말이 아닌 것이, 고은은 그의 특이한 경력과 말재주로 명사를 사냥한 인사였기에, 미당과 시적 세계를 나누며 교감한 문우가 아닌, 다만 수시로 그를 찾아 그의 명성을 빌리고 훔치려 했던 2류 시인에 불과했다. 실제로, 미당 사후, 고은은 미당을 혹평한다. 살아 생전에는 전혀 하지 않았던 일.
그의 시 세계는 이상처럼 기념비적인 것도 아니며, 이육사처럼 강렬하고 지조있는 세계를 구현하지도 않았다. 윤동주처럼 널리 애송되고 사랑받는 아름다운 시를 작시하지도 못하였으며, "한국어의 화신"으로까지 평가되는 미당의 시 세계에는 발끝에도 미치지 못한다. 다만 그는 허무주의와 탐미주의의 탈을 쓴 채로 의미 없는 텍스트를 생산하여 시집이랍시고 배설했으며, 불교시절 때 배운 선문답을 교묘히 이용하여 해석하기 아리송한, 막상 해석할 내용도 공허한 의미 없는 시 세계를 보여주었는데, 이를 한국 최고의 평론가였던 김현이 말하기를
"...자신의 삶에 대한 의식이 없는 의식, 자작농의 밋밋한 삶은 고양된 혹은 충전된 삶에 대한 감각이 마모되어 있어, 비장이나 장엄에 이르지 못하고 있으며, 그렇다고 사실의 정확한 전달이라는 묘사의 기능을 수행하고 있지도 못하다. 그것은 고은이라는 떠돌이의 의식이 자작농에 기탁한 가면 때문이다. 무의식적인 오문들, 달관의 제스처 섞인 선적 언어의 비-선적 남용, 지켜야 하는 것이 바람직한 것인지 아닌지 잘 알 수 없는 민족 정서들에 대한 집착 등, 비진정성이 진정성의 탈을 쓰고 있다."
김현의 행복한 책읽기, 31쪽
김현의 행복한 책읽기, 31쪽
라고 1990년 타계한 평론가 김현은, 고은의 문학적 위상에 대해 위와 같이 논한 바 있다. 이는 그의 실체를 명확하게 꿰뚫어 본 것인데, 일방적인 북한의 대한 옹호, 동경, 궤를 같이하여 미국 제국주의에 대한 끊임없는 증오성 발언은 바람직한 것인지 아닌지 잘 알 수 없는 민족 정서들에 대한 집착을 잘 보여준다고 하겠다.
지금까지 모든 노벨상 수상에서 계속 탈락한 데다가 2011년 수상자는 스웨덴의 시인인지라, 근 몇년간 시인이 해당되지 않아서 앞으로 시인 수상이 유력할 거라는 가능성도 점점 낮아지고 있는 상황이다. 돌려 말하면 가까운 해 안에는 시인이 수상할 가능성이 급격히 줄었다는 것과 일맥상통하는지라 추후 고은의 수상 확률은 더욱 줄어들고 있다. 2012년에도 또 후보에 올랐다고 했지만 수상자는 중국의 모옌(莫言)이었다.
2013년 수상을 앞두고 본인은 "노벨상에 대한 내 소감은 12년도 넘게 한번도 없다." 란 인터뷰를 남겼지만 지인들의 말에 따르면 말만 저렇지 신경을 굉장히 쓴다고 한다. 언론에 지속적인 관심을 받는다는 점에선 무라카미 하루키와 비슷하다. 물론 하루키는 세계적인 관심이고 고은은 국내 언론의 설레발에 가깝지만. 결국 2013년에는 캐나다 여성 작가 앨리스 먼로가 수상하였다.
일각에서는 김대중-노무현 정부 시기를 통틀어, 자신들과 정치-이념적으로 동질성이 높은 고은 시인의 노벨문학상 수상을 지원하려는 정책적 안배가 있었던 것 아니냐는 평을 받기도 한다.
그럼에도 이후 노벨 문학상은 줄곧 다른 이들이 수상했고, 성향이 반대되는 이명박 정부 이후론 몇년간 물먹은 것도 있고해서 이전보다는 노벨상에 대한 기사나 언급이 줄어든 편이다. 하지만 이미 벌려놓은 게 있는지라 지금까지도 매년 노벨상 수상 시즌이 되면 뉴스기사를 통해 꾸준히 수상 후보로 언급되며 고은 시인의 집앞에는 기자들이 많이 찾아와 북새통을 이룬다고 한다.
2016년 10월 노벨 문학상 수상 시즌이 돌아왔고, 래드브록스 등 배팅 사이트에서는 무라카미 하루키의 수상이 유력하다고 일컬어지는 와중에 일각에서는 고은 시인 또한 유력한 후보라고 발표해 또 다시 주목받았지만, 2016년에는 미국의 포크가수 밥 딜런이 선정되었다. 사실 하루키가 1위로 예측되던 레드브록스 사이트에서 고은 시인은 11위였기에 가망이 없어 보였다.
2017년 또한 노벨상 수상 시즌이 되면서 다시 언론을 통해 고은 시인의 수상 가능성을 예측하는 기사가 나오기 시작했다.# 고은 시인의 노벨 문학상 수상은 언론에 이야기가 나온 이후 매년 노벨상 수상 시즌이 되면 단골처럼 나오는 소재였으니... 참고로 2017년 래드브록스 사이트에서는 고은 시인은 4위로 예측했었다. 2017년에는 일본계 영국 작가 가즈오 이시구로가 받았다.
6. 기타
- 술을 굉장히 좋아하여 신년목표를 하루에 소주 100잔 마시기로 잡았는데 생각보다 너무 빨리 성공해서 하루에 200잔을 목표로 잡았다는 일화도 있다. 술 버릇이 좋지 못하다. #
- 특정한 것에 얽매이지 않는 자유분방한 성격이라고 한다. 일례로 예전에 한 대학에서 강의하던 고은이 강의 시간에 10분 지각한 일이 있었는데 그 이유를 밝히길 "술 한잔 하다가 늦었다!" 라고 당당하게 둘러대었다고 한다. 한 기자가 고은이 술약속이 있다고 해서 점심 때 인터뷰를 잡았는데, 이미 반주를 하고 있길래 "나중에 술 드신다면서..."라고 하자 "다음날 깼을 때 누구와, 언제까지, 얼만큼 마셨는지 기억나지 않아야 술을 마신 거다. 이건 그냥 곡차다."라고 선언했다고도.
- 20대에 고향을 등진 이후 문인으로 성공한 후에도 고향에 남아 어렵게 살아가고 있던 부모를 오랫동안 외면하고 찾지 않았다고 한다. 때문에 그의 고향 군산에서는 그의 좌익 활동과 더불어 불효자 이미지까지 겹쳐 그의 대한 인식이 좋지 않다고 한다. 세월이 흐르면서 그런 이미지도 희석되어 군산시에서 고은 시비도 세우고, 고은을 기리는 여러 기념 사업을 추진하고 있었는데 아래의 성범죄 논란으로 보류되게되었다. 2018년 3월 2일 네이버-KBS뉴스9 ‘고은 성추행’에 고향 군산 충격…기념사업 모두 보류
- 2010년 김연아에게 헌정하는 시 '오늘 너는 대한민국이었다'를 썼다. 그런데 이 시에 대한 평이 상당히 좋지 않았다. 2018년 미투 운동으로 고은 시인의 성추행 사건이 연이어 폭로된 후에는, '그 사람이 어떤 눈으로 연아양을 보고 있었을지 끔찍하다, 더럽다, 토할 것 같다'는 반응들이 나오고 있다. #
- kt wiz 야구단은 고은의 헌정시 '허공이 소리친다, 온몸으로 가자'를 2018년 kt의 캐치프레이즈로 확정했다고 발표했다. kt wiz는 "지상의 허공은 무언가 받아들이는 수동체다. 허공이 소리쳐 공을 부르고, 공은 날아갈 때 에너지를 남기지 않고 간다. 온 힘을 다해서 그렇게 우리도 온몸으로 가자"라고 시의 의미를 해석했다. #
- 시인 고은의 외동딸인 미술가 고차령씨의 작품이 2012년 광주 김대중컨벤션센터에서 열린 '아트광주12'에 전시되어 화제가 되었다.
- 2012년 당시 대선에 출마했던 문재인 후보를 '숫처녀'에 비유하여 구설수에 오른 적이 있다. 2018년 미투 운동 이후 윤단우 작가가 다시 한번 이를 거론하며 재발굴되었다. # 윤 작가는 "숫처녀를 칭찬으로 입에 올리는 인간이나 그걸 칭찬이라고 낼름 옮기는 인간(안도현)이나"라고 비판했다.
- 별세한 마광수 교수에게 호된 비판을 들은 일이 있다. “엄청난 권력을 갖고 있어서 문단정치, 문단권력이 나온다. 후배들이야 출세하려면 이들 눈치를 볼 수밖에 없다” 라며, 고은은 사실상 시인이 아니라 시인 흉내내는 정치꾼이라는 내용이었다. 당시에는 워낙 독설을 입에 달고 사는 마 교수라 큰 주목을 받지 못했지만, 고은의 엽기적 엽색 행각이 수면 위에 드러나며 재조명을 받고 있다.
- 3.1운동을 심각하게 폄훼하였다.[15] 고은은 만해 한용운이 개인적인 컴플렉스에서 3.1운동에 참여하게 되었다고 주장했고, 당시 민족대표 33인을 장래가 없는 사람들이라고 폄하한 바 있었다.
7. 수상
- 1974년 - 한국문학작가상
- 1988년 - 만해문학상 (시집 만인보)
- 1991년 - 중앙문화대상
- 2002년 - 은관문화훈장
- 2005년 - 노르웨이 국제문학제 비에른손 훈장
- 2006년 - 스웨덴 동아시아 문학상 시카다상
8. 작품
고은의 대표 작품으로는 교과서 등지에 실린 '그 꽃' '선제리 아낙네들' 머슴 대길이' '어떤 기쁨' 등이 있다. 개별적 작품 보다는 만인보 가 상대적으로 유명하다. 대중적으로는 김연아 헌정시 오늘 너는 대한민국이었다가 유명하다.8.1. 시집
<피안감성>(彼岸感性) (1960)
<해변의 운문집> (1964)
<신 언어의 마을> (1967)
<새노야> (1970)
<문의(文義) 마을에 가서> (1974)
<부활> (1975)
<제주도> (1976)
<입산> (1977)
<새벽 길> (1978)
<고은 시선집> (1983)
<조국의 별> (1984)
<지상의 너와 나> (1985)
<시여 날아가라> (1987)
<가야 할 사람> (1987)
<전원시편> (1987)
<너와 나의 황토> (1987)
<백두산> (1987)
<네 눈동자> (1988)
<대륙> (1988)
<잎은 피어 청산이 되네> (1988)
<그 날의 대행진> (1988)
<만인보(萬人譜)> (연작: 1986~2010): 1986년부터 2010년까지 집필된 30권 4001편으로 구성되어 있는 연작시로, 고은 시인의 대표작으로 꼽히고 있다. '만인보'는 만인의 삶에 대한 기록이라는 뜻으로 고은 시인은 "반만년의 한국사에 명멸한 인간 군상의 부침과 영욕을 담아냈다"고 말했다. 하지만 거창한 포부와는 다르게 평단의 평은 매우 좋지 않은데, '부족한 실력을 양으로 때웠다' 는 평가가 지배적이다.
<독도> (1995)
<해변의 운문집> (1964)
<신 언어의 마을> (1967)
<새노야> (1970)
<문의(文義) 마을에 가서> (1974)
<부활> (1975)
<제주도> (1976)
<입산> (1977)
<새벽 길> (1978)
<고은 시선집> (1983)
<조국의 별> (1984)
<지상의 너와 나> (1985)
<시여 날아가라> (1987)
<가야 할 사람> (1987)
<전원시편> (1987)
<너와 나의 황토> (1987)
<백두산> (1987)
<네 눈동자> (1988)
<대륙> (1988)
<잎은 피어 청산이 되네> (1988)
<그 날의 대행진> (1988)
<만인보(萬人譜)> (연작: 1986~2010): 1986년부터 2010년까지 집필된 30권 4001편으로 구성되어 있는 연작시로, 고은 시인의 대표작으로 꼽히고 있다. '만인보'는 만인의 삶에 대한 기록이라는 뜻으로 고은 시인은 "반만년의 한국사에 명멸한 인간 군상의 부침과 영욕을 담아냈다"고 말했다. 하지만 거창한 포부와는 다르게 평단의 평은 매우 좋지 않은데, '부족한 실력을 양으로 때웠다' 는 평가가 지배적이다.
<독도> (1995)
8.2. 소설집
<피안앵(彼岸櫻)> (1962)
<어린 나그네> (1974)
<일식(日食)> (1974)
<밤 주막> (1977)
<산산히 부서진 이름> (1977)
<떠도는 사람> (1978)
<산 넘어 산 넘어 벅찬 아픔이거라> (1980)
<어떤 소년> (1984)
<갠지스 강의 저녁노을> (1986)
<화엄경> (1991)
<어린 나그네> (1974)
<일식(日食)> (1974)
<밤 주막> (1977)
<산산히 부서진 이름> (1977)
<떠도는 사람> (1978)
<산 넘어 산 넘어 벅찬 아픔이거라> (1980)
<어떤 소년> (1984)
<갠지스 강의 저녁노을> (1986)
<화엄경> (1991)
9. 사건 사고
해당 문서 참조.나무위키:연습장/고은(시인)/사건사고를 참고
[1] 서울시는 2월 28일 고은을 기리기 위해 3억원을 들여 서울시청사에 조성한 만인의 방을 즉시 철거하기로 결정하였다고 보도하였다. http://news.donga.com/3/all/20180301/88909772/1[2] 이 때 귀에 청산가리를 부어 고막이 손상되었다고 한다.[3] 출가한 시기에 대해서 1952년이라는 기록도 있는데, 고은 본인의 인터뷰와 고은 시인의 최측근이었던 신경림 시인이 저술한 '고은 문학의 세계'에 1951년이라고 기록되어 있다.[4] 13세기 일본의 승려 도겐이 창시[5] 그러나 결국 참선과 수양은 공염불이 되었고 승려로서 자행한 일은 명사 사냥꾼이었다.[6] 월간조선에서 이 소설의 전문을 싣는 기사를 실었다.[7] 판사 출신으로 알려진 분으로, 그 당시 불교계 내외로 상당한 존경을 받았다.[8] 아랫문단 참조[9] 한편, 이문열 등은 70년대 초중반 고은의 성추문이 수면 위로 떠오르며 지탄을 받자 갑자기 그가 좌익 문인으로 돌변했다고 말하고 있다. 저항시인으로 변모한 후 고은은 당시 순수 문학계에 대해 현실 참여를 하지 않는 가짜 문인들이라고 비판했다. 참고로 70년대초 고은의 성폭력 문제를 거론했던 시인들이 주로 순수 문학계였다고 한다.[10] 옥살이하면서 감방에서 소일거리로 국어사전을 처음부터 끝까지 읽어서 나중에는 아예 국어사전을 달달 외우는 경지까지 올랐다는 일화가 유명하다.[11] 6.25 때 도피생활을 하면서 두 차례 자살 시도를 했는데, 그때 귀에 청산가리를 부어 귀가 손상되었다고 한다.[12] 2008년 기준 한국예총의 회원은 38만4150명이고 민예총의 회원은 10만701명으로 4배 가까이 차이가 나지만 2004~2008년 5년간 문예진흥기금에서 한국예총은 99억6000여만원을 지원받은 반면, 민예총은 84억3000여만원을 지원받았다.[13] 윤동주의 서시, 한용운의 님의 침묵, 이육사의 광야, 김소월의 진달래꽃, 서정주의 국화 앞에서 등.[14] 있다고 한다면 김연아 헌상시인 '오늘 너는 대한민국이었다.' 정도가 있다. 그러나 이도 꾸준히 여러 커뮤니티에서 회자되며 오글거리고 유치하며 까이는게 대부분이지, 애송되는 시는 결코 아니다.[15] 특히 의의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