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라미디 성채에서 바라본 시가지와 아크로나플리아
앞바다의 부르치 성채와 시가지 일대[1]
1. 개요
그리스어 Ναύπλιο이탈리아어 Nauplia
터키어 Anabolu
영어 Nafplio / Nauplio
그리스 동남부의 도시. 나플리온, 나우플리아, 나프플리오, 나브플리온 등으로도 표기된다. 펠로폰네소스 반도 동부 해안에 위치하며, 인구는 약 2만명이다. 중세 초반까지는 그저 아르고스의 항구였으나 15세기 베네치아 공화국령 요새 도시로 거듭났고, 1688년 ~ 1715년간 모레아 왕국의 수도였다. 19세기에는 오스만 제국에서 독립한 그리스의 첫 수도 (1827-34년)로써 그리스 민족주의의 산실이었다.
2. 역사
처음 도시가 형성된 아크로나플리아. 서북부는 고급 호텔 건설로 훼손되었다.
기원전 1700년 경부터 아크로나플리아 언덕에 마을이 형성되었다. 지명은 포세이돈의 아들 나우플리오스에서 유래되었다 하며, 기원전 14세기 이집트 신왕국의 파라오 아멘호테프 3세의 장례서에서 누플리자로 기록되었다. 지리가 파우사니아스에 따르면 주민들은 그리스 신화 속 리비아의 왕 다나오스가 데려온 이집트 인들이었다 한다. 학자들도 기존 미케네-그리스 폴리스들과 달리 해안으로 돌출된 바위 곶의 독특한 입지 조건을 주목하며 동쪽의 이주민들이 정착한 것으로 추정한다. 고대 나플리오는 칼라우레이아 섬에서 회담을 하는 해양 연맹에 속한 독립 시였으나, 기원전 7세기 중반 2차 메세니아 전쟁 당시 아르고스에게 점령되어 그 항구가 되었다. 스파르타는 메세니아의 메토니에서 축출된 주민들을 나플리오에 정착시켰고, 이들은 기원전 370년경 에파미논다스의 메세니아 해방 후 고향으로 돌아갔다. 이후 아르고스는 칼라우레이아 연맹에서 나플리오의 자리를 차지하며 본격적으로 지배에 나섰다. 기원전 4세기 아크로나플리아의 북쪽, 동쪽 면에는 미케네식 다각 공법으로 성벽이 둘러졌다. 다만 로마 제국 들어 아르고스가 쇠퇴하며 서기 2세기 무렵 나플리오는 거의 버려졌다. 파우사니아스는 포세이돈 신전, 성채, 헤라가 매년 세정을 통해 순결을 갱신했다고 한 카나토스 분수 등의 유적이 있다고 묘사했다.
2.1. 중세
동로마 제국 시기 들어서도 한동안 기록이 없던 도시는 583년경, 슬라브-아바르 인의 남하 시에 동로마 수비대가 저항한 것으로 역사에 재등장한다. 727년에는 헬라스 테마의 기병대장 아갈리아노스 콘토스켈리스가 레온 3세의 성상파괴주의에 맞서 반란을 일으켰을 때에 나플리오 역시 선박을 제공하며 동참했다. 9세기 말엽에는 코린토스 대주교구 산하 아르고스 & 나플리오 주교구가 세워졌다. 963년에는 크레타의 신앙 개혁가 니콘이 나플리오에 상륙한 후 모레아를 돌며 설교했다. 1031년, 지리 왕조로 추정되는 사라센 함대가 모레아 해안을 약탈하자 나플리오 함대 사령관 (스트라테고스) 니키포로스 카란테노스가 추격에 나서 적함 대부분을 파괴했다. 이를 통해 나플리오는 11세기 무렵 동로마 해군 기지가 되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아크로나플리아의 성벽이 보강되었고, 아르고스의 외항으로써 경제적으로 중시되어 11세기 말엽 알렉시오스 1세가 베네치아에 무역 특권을 부여한 금인칙서에도 등장한다. 12세기에는 '코린토스 & 아르고스 & 나플리오 호리온'이란 행정구역이 신설되었다.2.1.1. 스구로스 가문
동로마 시기 성벽이 남아있는 아크로나플리아의 서북벽
1180년, 마누일 1세는 부유한 현지 귀족 테오도로스 스구로스를 나플리오 영주로 봉했다. 1189년 테오도로스는 이사키오스 2세를 설득해 아르고스 & 나플리오 주교구를 자치적인 대주교구로 승격시켰다. 1199년 알렉시오스 3세는 테오도로스에게 중부와 남부 그리스를 해적에게서 보호할 함대 건조를 맡겼고, 이로써 그는 그리스와 키클라데스 제도에서 선박세를 거두며 경제력과 군사력을 겸비하게 되었다. 1200년경 테오도로스 사후 영주 직위를 이은 아들 레온은 1203-04년 동로마 제국이 쇠망을 틈타 아르고스와 코린토스를 점령했고, 대주교를 실명시킨 후 아크로나플리아 암벽에서 떨어뜨려 죽였다. 뒤이어 레온은 메가라에 상륙한 후 아테네도 공격했으나 아크로폴리스를 함락하지 못했다. 1205년 초, 그는 4차 십자군의 혼란을 틈타 테베와 라리사를 점령하는 등 보이오티아와 테살리아까지 진출했다. 테살로니카 왕국의 보니파초 1세가 남하하자 레온은 테르모필레에서 방어했으나 실패한 후 아크로코린트에서 농성했다. 보니파초는 얼마 후 본국의 반란으로 철수했다.
이후 프랑스 십자군이 코린토스, 아르고스, 나플리오를 포위했으나 에피로스 친왕국의 도움과 함께 주민들이 완강히 버텼다. 1207년 보니파초 1세, 이듬해 레온이 사망한 후에도[2] 이어지던 포위는 1210년에 코린토스가 함락되고, 같은해 4척의 베네치아 함대가 항구를 봉쇄한 나플리오가 항복했으며 1212년에 마침내 아르고스도 점령되며 종식되었다. 30여년에 그치긴 했지만 스구로스 가문의 지배 하에서 나플리오는 여러 성당과 수도원이 세워지는 등 발전했다. 이후 나플리오와 아르고스 일대는 아카이아 공국령이 되었으나, 공작 조프루아 1세가 자신의 즉위를 도운 아테네 공국의 오토 1세 드 라 로셰에게 영지로 하사하며 후자가 아카이아 공작의 봉신으로써 두 도시를 영지로 받았다.[3] 한편 항복 협상에 따라 십자군 세력은 아크로나플리아의 동쪽 언덕에 정착했고, 주민들은 보다 더 취약한 서쪽 언덕에서 거주했다.
2.1.2. 아르고스 & 나플리오 영주령
아크로나플리아의 라틴 시기 성벽 유적
프랑코크라티아 (라틴 지배) 하에서도 주민들은 그리스 정교도로 남았고, 로마와 라틴 구역은 성벽으로 분리되었다. 라틴 구역에는 관저와 저수조 등이 세워졌고, 동로마 시기 원형 성탑을 다각 형태로 개조했다. 1230년경 오토의 사후 두 아들 기 1세와 오토 2세가 각각 아테네 공국과 아르고스 & 나플리오 영주령을 상속받았다가, 1251년 4월에 오토 2세가 1만 5천 히페르피라 및 프랑스의 영지 소유권을 대가로 기 1세에게 매각하며 후자가 모두 소유하게 되었다.[4] 1224년 테살로니카 왕국의 멸망 후 그리스의 맹주가 된 아카이아 공국은 1256-58년의 에우보이아 계승전쟁으로 아테네 공국을 복속시켰다. 하지만 1259년 펠라고니아 전투에서 공작 기욤 2세가 니케아 제국의 포로가 되었고, 석방을 대가로 아카이아 고국은 남부 모레아를 할양해야 했다. 이때 니케아 제국은 아르고스와 나플리오도 요구했으나 거절되었다. 1261년 니케아 제국이 라틴 제국을 멸하며 동로마 제국으로 개편되자, 아카이아 공국은 완전히 독립했다. 다만 1270년대에는 동로마의 라틴계 제독 리카리오가 아르고스 만을 습격했고, 1278년 기욤 2세의 사후 아카이아 공국은 나폴리 왕국과 빌라르두앵 가문 간의 권력 다툼으로 쇠퇴했다.
1290년 아카이아 공국은 동로마와 휴전을 맺었고, 이를 기리기 위해 동서 교회의 상징들을 비잔틴 프레스코화로 장식한 '평화의 문'이 세워졌다.[5] 1311년, 현지 영주 겸 아테네 공작 고티에 1세 드 브리엔이 카탈루냐 용병대에 패하고 전사하며 상황이 더욱 복잡해졌다. 이듬해 카탈루냐 용병대는 아테네 공국을 정복했고, 고티에 1세의 과부 조아나는 프랑스 장군인 부친 고셔 드 샤티용을 바일리 (대리인)로 둔 채로 이탈리아에서 도움을 모색했다. 그동안 프슈홀르 가문의 고티에, 프랑수아 형제가 아르고스 & 나플리오 영지를 관리하며 아테네 수복을 위한 물자를 비축했다.[6] 다만 카탈루냐 용병대의 습격을 막아내느라 조아나는 큰 빚을 지게 되었고, 1321년 성인이 된 조아나의 아들 고티에 2세는 7천 리브르를 납부한 후에야 권리를 이어받을 수 있었다. 교황청은 아라곤 십자군의 일환으로 카탈루냐 용병대를 파문하고 로도스 기사단에게도 함대를 보내 고티에 2세를 돕게 했다. 하지만 베네치아 공화국이 협조를 거부하며 회복 원정은 지연되었고, 1328년 고티에 2세는 카탈루냐 용병대와 휴전을 맺기도 했다.
마침내 1331년 8월, 고티에 2세는 나폴리 왕국의 도움으로 에피로스 친왕국을 지나 아티카로 진격했으나 카탈루냐 용병대의 방어를 뚫지 못하고 이듬해 여름에 철수했다. 그는 막대한 빚을 지게 되었고, 케팔로니아 백국에게서 점령한 레프카다와 보니차도 1343년 베네치아에 매각했다. 1332년 에게 해 건너편의 튀르크계 아이든 왕조의 우무르 베이가 아르고스 만을 습격했고, 이 무렵 기근이 지속되며 나플리오 주민들은 이탈리아에서의 식량 수입에 의존했다. 또한 동로마 제국이 펠로폰네소스 반도 상당부를 석권하며 위협하자 고티에 2세는 나플리오의 만 건너편에 키베리 성채, 이드라 섬 맞은편에 테르미시 요새를 세웠다. 1356년 고티에 2세가 후사 없이 푸아티에 전투에서 전사하자, 여동생 이사벨라와 고티에 드 앙기엥 부부가 계승했다.
그후 부부의 장남 소이에가 브리엔 백작령 & 아테네 상속권, 차남 앙젤베르가 아르고스 & 나플리오 영지를,[7] 삼남 기가 프랑스 라메륍트 영지를 상속받았다. 다만 그리스 영지를 방허할 자신이 없던 앙젤베르는 동생과 봉토를 바꿨고, 이로써 기 드 앙기엥이 '아르고스 & 나프리아 및 키베리' 영주가 되었다. 1357년 기는 지난 20여년간 영지를 관리하던 니콜 드 프슈홀르 대신 메디치 가문의 피에르 탄테네스를 바일리에 봉했고, 1360년에는 아라르도 (아베라르도) 디 메디치로 교체했다. 다만 1360년 아라르도가 무화과 및 건포도에 세금을 인상하자 주민들이 봉기를 일으켰고, 프랑스 군인들을 성채로 몰아넣었다. 이에 1363년 기가 직접 나플리오로 와서 상황을 진정시켰고, 현지 유력자의 두 딸과 결혼했다. 한편 오스만 제국에 맞서기 위해 이미 1362년 7월에 베네치아 시민권을 취득한 기는 베네치아와 협력하며 안정적으로 통치했다.
14세기 후반 아르고스 & 나플리오 영주령은 농업과 목축업 및 염전업이 발달하여 건포도, 캐럽, 수지, 리넨 및 면화 옷감, 도토리 염료 등을 수출했다. 1370년에는 아카이아 공작 필리포 3세가 타란토에 머물며 기의 동생 루이를 모레아의 바일리로 파견했다. 동시에 또다른 동생인 레체 백작 장 (조반니)이 막 내전을 겪은 아테네 공국을 노리자, 기 역시 모레아 전제군주국과 휴전하며 원정을 준비했다. 이번에도 베네치아가 도움을 거절한 상태에서 1371년에 형제는 아티카에 상륙했으나 아테네 아크로폴리스 함락에 실패해 철수했고, 8월에 카탈루냐 용병대와 휴전을 맺었다.[8] 그후 오스만 제국에 맞서기 위해 교황청이 카탈루냐 용병대를 지원하기 시작하고, 1374년에는 네리오 1세 아차이올리가 메가라를 점령하며 앙기엥 가문의 아테네 공국 수복은 요원하게 되었다. 1376년 10월 기가 사망하자 미성년인 딸 마리아가 계승했고, 기의 동생 루이가 섭정했다.
이듬해 마리아는 베네치아인 귀족 피에트로 코르나로와 결혼했는데, 그 역시 어렸기에 부친 페데리고[9]가 섭정했다. 1382년 페데리고의 사후 피에트로는 직접 나플리오로 향해 부친이 마련해 둔 함대라 해적을 물리쳤다. 다만 1388년 피에트로가 요절하자, 그해 12월 마리아는 매년 7백 두카트의 연금을 대가로 아르고스 & 나플리오 영지를 베네치아에 매각했다. 베네치아가 일대를 접수하기 전에 모레아의 데스포티스 테오도로스 1세 팔레올로고스와 그의 장인인 아테네 공작 네리오 1세가 오스만 장군 에브레노스의 도움을 받아 점령했다. 다만 1389년 나플리오 주민들이 베네치아에 항복했고, 아르고스 역시 1394년 6월에 베네치아에 양도되었다. 1393년 마리아의 사후에는 앙젤베르가 계승권을 주장하기도 했으나, 베네치아가 계약서를 제시하며 구매액 화급 및 방어 비용 마련이 가능하다면 양도하겠다고 엄포를 놓자 철회했다.
2.2. 1차 베네치아 지배 (1389-1540)
1471년부터 북쪽 근해의 테오도리 섬에 세워진 부르치 성채
15세기 말에 세워진 아크로나플리아의 3중 성벽
나플리오는 아드리아 해와 소아시아 및 흑해 사이의 기착지로써 베네치아에게 중요한 거점이었고, 1397년 5월 오스만 군에게 파괴된 아르고스와 달리 험준한 지형 덕에 평화를 유지했다. 1460년 오스만 대재상 마흐무트 파샤가 나플리오를 공격했으나 격퇴되었다. 다만 1463년 아르고스, 1470년 칼키스를 점령한 오스만 제국은 1463년부터 1479년까지 도시를 육상 봉쇄했다. 위기를 느낀 베네치아는 1471년 비토레 파스쿠알리고를 나플리오의 포데스타 (총독)로 보내며 베르가모 출신 건축가 안토니오 감벨로를 동행시켰고, 후자는 아크로나플리아의 기슭에 3번째 성벽을 건설함과 함께 항구의 방어를 위해 테오도리 섬에 부르치 성채를 건설했다. 동시에 베네치아 기술자들이 고향에서처럼 목재 기둥과 흙으로 아크로나폴리 북쪽 해안을 매립했고, 현재의 구도심이 형성되었다. 관공서와 상업 활동도 새 시가지로 이전되었고, 상하수도 역시 건설되는 등 나플리오는 선진 도시로 발전했다. 1470년대 후반 베네치아는 나플리오 총독의 직함을 포데스타에서 프로베디토레로 격상했다.
1493년 베네치아는 메도니, 코로니처럼 나플리오에도 렉토르와 카피탄의 두 행정 / 군정 총독을 두었으나 여러 문제가 새기자 곧 철폐하고 바일로와 카피탄 및 2명의 보좌관을 두었다. 또한 도시에 7년 이상 산 주민은 자동으로 베네치아 시민권이 부여되는 특권이 주어졌다. 1500-03년에 오스만 군이 재차 공격한 후에는 도시를 두르는 성벽이 보강되었고, 매립되지 않은 바다를 이용한 해자와 함께 현존하는 동쪽 성벽의 성탑이 건설되었다. 항구 옆에는 포대가 세워졌다. 부르치 성채도 남서부가 증축되었고, 그곳에서부터 항구의 등대까지 사슬을 연결해 적함의 진입을 막았다. 이러한 요새화 덕에 1537-39년에는 카슴 파샤가 동쪽 팔라미디 언덕에 포대를 두어 아크로나플리아에 포격을 가했음에도 함락되지 않았다. 하지만 베네치아가 프레베자 해전 등 패전을 거듭하며 1540년에 휴전을 체결했을 때에, 나플리오는 오스만 제국에 양도되었다. 따라서 요새도시 나플리오는 전투 없이 점령되었다.
2.3. 1차 오스만 지배 (1540-1686)
1579년 나플리오 전경
1600년 경에 세워진 에스키 자미 (트리아논 모스크)
오스만 시기 도시는 베네치아 인들이 부르던 로마니아[10]의 나폴리 (Napoli di Romania)가 변형된 모라 예니셰히르 (Mora Yenişehir), 즉 '모레아의 새 도시'로 지칭했다. 이는 나플리오 혹은 나플리아 지명이 서방에 와전된 나폴리가 네아폴리스, 즉 새 도시를 뜻하는 것에서 유래한 훈차라 볼 수 있다. 오스만 제국 하에서도 도시는 중시되어 모라 예니셰히르 산작의 치소가 되었고, 수비대가 배치되었다. 이때 기독교도들과 빈곤한 주민들이 칼레라 불린 아크로나플리오에 살았고, 부유층 및 관리들은 평지의 새 시가지에 거주했다. 새 시가지에는 에스크 자미, 즉 트리아논 모스크가 세워졌다. 또한 반도 북서쪽에 바다로 돌출된 원형 포대가 세워졌고, 베네치아의 알메르게티 대포 5문이 배치되어 '다섯 형제'라 불렸다. 1668년 나플리오를 방문한 여행가 에블리야 첼레비는 많은 주택이 있고, 아크로나플리오 상단에 기존 성 안드레아 성당을 개조한 파티흐 모스크가 있다고 기록했다. 한세기 가량 무역 도시로써 안정을 누리던 나플리오는 대튀르크 전쟁기인 1686년에 베네치아에게 점령되었다.
2.4. 2차 베네치아 지배 (1686-1715)
1711-14년에 세워진 팔라미디 성채
파일:나플리오 4.jpg
재건된 아크로나플리아의 사자의 문
대튀르크 전쟁 당시 신성동맹의 일원으로 오스만 제국을 공격한 베네치아는 1684년에 레프카다, 프레베자를 점령한 데에 이어 1685년 여름부터 모레아를 침공했다. 베네치아 군이 코로니를 포위하자 나플리오와 칼라마타의 오스만 함대가 구원에 나섰으나 격퇴되었고, 결국 함락되었다. 1686년 여름, 나바리노와 메토니를 함락하며 서부 모레아를 석권한 베네치아 제독 모로시니는 독일인 장군 오토 빌헬름 쾨니히스마르크 휘하 3천 병력을 아르고스 만의 가장 안쪽인 톨로에 상륙시켰다. 8월 초엽, 쾨니히스마르크는 우선 제대로 방어되지 않은 팔라미디 산을 점령하며 나플리오를 포위했다. 나플리오 총독 무스타파 파샤는 주민들과 함께 아크로나플리아로 올라 농성하며 모레아 세라스케르 (사령관) 이스마일 파샤에게 도움을 청했다. 이스마일 파샤는 베네치아 군이 모두 하선하기 전에 3천 보병 및 4천 기병과 접근했으나, 쾨니히스마르크에게 격퇴되어 아르고스를 뺏긴 채 코린토스로 철수했다. 그후 이스마일 파샤와 무스타파 파샤는 각각 포위군을 양면으로 습격했고, 포위 진영은 역병까지 돌며 사기가 저하되었다. 3천여 병력 중 절반 가까이가 전투 불가 상태일 정도가 되자 8월 29일에 이스마일 파샤는 총공세에 나섰다. 하지만 마침 모로시니가 그의 측면에 2천 원군과 함께 상륙하자 패퇴했고, 그날 무스타파 파샤가 항복했다. 다음날 모로시니는 나플리오에 입성했고, 수비대를 포함한 7천여 무슬림들은 오스만령 테네도스로 운송되었다.
모로시니는 또한 아크로나플리아의 주민들을 소개시키고 모든 건물들을 파괴한 후 군사 용도로 국한시켰다. 이후 나플리오의 시가지는 평지로 고정되었다. 이후 베네치아 군은 1687년 파트라스와 코린토스, 1690년 모넴바시아를 점령하며 모레아를 평정했다. 1688년 베네치아는 점령지에 모레아 왕국을 세웠고, 나플리아를 그 수도로 정했다. 모레아 왕국에는 부왕 급인 프로베디토레로 게네랄레가 파견되었고, 도시의 요새화가 계속되었다. 우선 사자의 문이 재건되었고 그리마니 (산 안토니오), 돌핀 (산 바르코), 모체니고 (산 세바스티아노) 포대 등이 세워졌다. 1699년에는 부르치 성채에 성탑이 추가되었고, 1711-14년에는 나플리오를 내려다 보는 팔라미디 산에 성채가 세워져 아크로나플리아의 부담을 줄여주었다. 1713년에는 시가지와 아크로나플리아를 직접 이어주는 시그레도 문이 세워졌고, 그 아래의 신타그마 광장에 무기고 (현 고고학 박물관)가 건설되었다.
2.5. 2차 오스만 지배 (1715-1822)
오스만 시기에 발전한 구도심의 중심부인 신티그마 광장
아가 파샤 (라깁 파샤) 모스크
태후의 내탕금 대부분을 조달하던 모레아 상실을 뼈아프게 여기던 오스만 제국은 18세기 들어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과 함께 신성동맹이 해체되자, 1811년에 러시아를 격파한 후 그리스 전선을 준비했다. 7차 오스만-베네치아 전쟁 시기인 1715년 6월, 오스만 대재상 실라다르 다마트 알리 파샤는 7만 대군과 함께 아티카에서 남하했다. 코린토스 수비대의 항복 후[11] 7월 12일에 오스만 군은 우선 프랑스 장교 라 살의 도움과 함께 팔라미디 성채를 공격, 7월 20일에 땅굴 폭파로 성벽에 틈이 생기자 돌격해 점령했다.
이후 베네치아 수비대가 혼비백산하여 철수했고, 오스만 군은 불과 80여 수비대가 배치된 시가지를 손쉽게 점령했다. 병력 2천여와 많은 주민들은 학살되거나 포로가 되었고, 나플리오 점령 후 오스만 군은 불과 2달만에 모레아를 재정복한다. 오스만 군은 9일간의 나플리오 공성전에서 8천여 병력을 잃었으나, 제해권을 유지한 덕에 화기와 식량 운반이 원활하여 다른 도시들은 거의 무혈 점령했다. 전후 1718년에 나플리오는 모레아 산작의 치소가 되었고, 인구 6만에 달하는 큰 도시였다.
1730년 시내에 아가 파샤 (라깁 파샤) 모스크가 세워졌고, 1779년 하산 제자이를리 파샤는 오를로프 반란 후 모레아를 약탈하던 알바니아 민병대들을 잡아 팔라미디 산에서 떨어뜨려 죽이는 것으로 질서를 확립했다. 이후 나플리오의 동남쪽 해변은 아르바니티아라 불렸다. 18세기 후반 들어 나플리오는 해상 무역의 감소와 함께 쇠퇴했고, 1786년 모레아 산작의 치소도 트리폴리스로 이전되었다. 한때 6만이던 인구는 1799년의 역병 후 인구는 크게 줄어 7천에 불과했고, 대부분 무슬림이었다.
2.5.1. 나플리오 공방전 (1821-22)
팔라미디 성채에서 내려다 본 아크로나플리아와 시가지
독립군이 점령해 도시 봉쇄에 활용한 부르치 성채
1821년 그리스 독립 전쟁 발발 후 2백의 독립군이 부르치 성채를 점령, 도시를 포격하고 인근을 지니던 영국 선박의 수비대 보급을 차단했다. 그해 9월 트리폴리스 함락 및 학살 시에 일부 기병대가 나플리오로 피신했다. 1822년 7월에는 신임 모레아 총독 마흐무드 드라말리 파샤가 2만 대군과 함께 남하, 아르고스에 당도한 후 기병대를 보내 나플리오를 구원했다. 하지만 다음달 드라말리 파샤가 데르베나키 전투에서 패배해 철수하자 나플리오는 완전히 고립되었고, 9월 중순 무렵 84척의 오스만 함대가 해상 봉쇄를 뚫으려 했으나 화공선 공격으로 1척을 잃은 것으로도 철수해버렸다. 11월 30일 밤에는 스타이코스 스타이코풀로스의 그리스 독립군이 팔라미디 요새를 점령한 후 아크로나플리아를 포격하며 압박을 가했다. 악조건 속에서 드라말리 파샤가 코린토스에서 급사했다는 비보까지 당도하자, 나플리오 수비대는 12월 3일에 그리스 장군 테오도로스 콜로코트로니스에게 항복했다.
2.6. 독립 그리스의 수도
그리스 독립 후 근대식 건물들이 들어선 신티그마 광장
테오도로스는 스페체스 출신의 아나스타시오스 쿠트룸피스를 나플리오 수비대장에 임명했다. 하지만 1823년 들어 그리스 임시정부 총리 알렉산드로스 마브로코르다토스가 나플리오를 제2차 국민의회 개회지로 정하며 도시 소유권을 요구했으나, 테오도로스가 소유권 이전 없이도 개회가 가능하다고 맞서며 그리스 독립군 내부 갈등이 점화되었다. 대신 아스트로스에서 열린 국민의회에서 부총리로 선출된 테오도로스가 알렉산드로스의 입법원장 취임을 막자 의회는 테오도로스를 탄핵했다. 뒤이어 벌어진 내전에서 테오도로스는 트리폴리스를 상실, 나플리오로 물러났다. 다만 이후로도 나플리오 반환을 두고 분쟁이 이어지며 내분의 불씨로 남았고, 임시정부가 나플리오에 들어서긴 했지만 1824년 5월에 해상의 부르치 성채로 피신할 정도로 불안정이 이어졌다. 그리고 같은해 10월의 선거 결과에 불복한 테오도로스가 봉기하며 2차 내전으로 이어졌다. 다만 이번에는 정부군이 신속히 대처하며 진압했고, 1825년 1월에 사로잡힌 테오도로스는 팔라미디 성채에 감금되었다가 4달 후 이집트가 개입하자 풀려났다.
2번째 임시정부 의회가 열리고, 그리스 의회의 첫 의사당 (1825년 가을 ~ 1826년 봄)으로 기능한 아가 파샤 모스크
1825년 6월, 나플리오에서 출정한 그리스 군을 격파하고 트리폴리스를 무혈 점령한 이집트 장군 이브라힘 파샤는 나플리오 점령을 위해 나아갔다. 그는 우선 나플리오의 식량 창고인 레르나 제분소를 공격했으나, 격퇴된 후 철수했다. 마침 인근 영국 함대 역시 그리스 독립군을 도우려는 듯한 모습을 보였다. 같은해 9월, 그리스 임시정부는 나플리오의 아가 파샤 모스크를 국회의사당으로 개조해 불레프티콘이라 칭했다. 1826년 4월, 메솔롱기 함락 소식이 전해지자 의사당은 비통함 속에 1시간 가량 침묵에 빠졌다. 그나마 이브라힘 파샤가 마니 반도로 관심을 돌리며 나플리오는 위기에서 벗어났고, 그해 가을 아라호바 전투에서 승리한 요르요스 카라이스카키스가 오스만 병사들의 귀를 전리품으로 보내오기도 했다. 1827년 여름, 아테네의 함락으로 본토의 그리스 독립군은 나플리오 및 마니 반도 일대에 국한되며 7월에 또다시 임시정부가 부르치 성채로 피신하는 등 궁지에 몰렸으나 나바리노 해전으로 구원되었다. 1828년 1월 28일에는 요안니스 카포디스트리아스가 나플리오에 당도하여 헬라스 국의 국가수반이 되었다.
임시정부가 두 차례 피신한 부르치 성채
요안니스는 외교관 출신의 경험을 살려 열강들을 설득해 마침내 1829년 아드리아노플 조약에서 처음 독립 인정을 받았고, 이는 1830년 런던의정서에서 확정되었다. 그는 또한 나플리오에 첫 근대적 교육 기관인 에벨피데스 학교를 세웠고, 1829년에는 성벽을 재건하며 아크로나플리아 서북부에 큰 병영과 군사병원을 세웠다. 하지만 신생 그리스의 체제를 놓고 갈등이 이어지던 1831년, 요안니스는 전 총리이자 독립 영웅인 페트로스 마브로미할리스가 중앙 집권 정부에 반대해 봉기를 조직한 혐의로 체포해 구금했다. 그해 10월 9일 아침, 요안니스는 나플리오의 성 스피리돈 성당의 문 앞에서 페트롯의 동생 콘스탄티노스와 기오르기오스에 의해 암살되었다.[12] 이미 그리스 왕으로 내정되어 있던 바이에른 왕자 오톤은 1833년 2월 1일, 나플리오에 당도했다. 이후로도 나플리오는 그리스 왕국의 수도로 유지되다가, 1834년 9월 18일에 오톤이 역사성과 상징성을 이유로 아테네 천도를 단행하며 10여년간 이어온 독립 그리스의 중심지 역할을 상실하게 되었다.
2.7. 근현대
현대의 아크로나플리아 일대. 우측 동로마 시기 성벽 위에 빌라 단지가 보인다.
더 내륙 쪽으로 뻗어나간 현대 시가지
비록 수도 지위는 잃었지만 도시의 발전은 계속되었고, 비군사화가 벌어졌다. 1865년에 국왕 요르요스 1세는 부르치 성채의 주둔군을 철수시키고 단두대를 이용한 사형장으로 변모시켰다. 1867년에는 시가지를 두르던 해안 성벽이 철거되고 아말리아 대로가 조성되었다. 1894-95년에는 해자가 메워졌고, 매립지에는 기차역이 들어섰다. 19세기 말엽 아크로나플리아에는 큰 보병 병영, 군사감옥, 지하 저수조 등이 세워졌고 펠로폰네소스 반도의 중심 군사기지가 되었다.
1926년에는 악명 높던 팔라미디 감옥이 폐지되고 아크로나플리아의 카포디스트리아스 병영이 감옥으로 개조되었다. (나플리오 교도소) 1929년에는 기존에 무기고 및 무기 공장으로 쓰이던 시가지 북쪽의 포대들이 철거되고 초등 및 고등학교가 세워졌다. 1930년대에는 부르치 성채가 정비 후 12개 객실을 둔 호텔과 식당으로 개조되어 1960년대까지 유지되었다. 1937년 실권자인 총리 요안니스 메탁사스는 나플리오 교도소를 정치범 용도로 지정했고, 이는 1960년 경까지 이어졌다.
2차 대전 시기 아크로나플리아의 정상부에는 대공포대가 설치되었고, 그 과정에서 고대 유적지가 크게 파괴되었다. 1960년 당국은 아크로나플리아의 관광지 개발을 결정, 이듬해 옛 병영 자리에 헤니아 호텔을 세웠다. 1971년에는 옛 교도소 자리에 헤니아 팔라스 호텔이 세워졌고, 그 과정에서 동로마 시기 성벽 유적이 크게 훼손되었다. 두 호텔 중 현재는 후자만 운영 중이다. 비록 나플리오는 공업이 발달하지는 않았지만 관광, 농업, 휴양 도시로써 많은 이들이 방문하고 있다.
3. 볼거리
- 아크로나플리아 (Ακροναυπλία)
아크로폴리스, 아크로코린트처럼 바위 언덕 위의 성채이다. 상고대부터 중세 베네치아 시기까지 나플리오 그 자체였고, 따라서 시대별로 각기 다른 방법으로 여러 겹의 성벽이 쌓여 요새화되어 있다. 본래 내부에는 많은 유적이 있었으나 여러 전란과 1688년 모로시니의 파괴, 1940년대 대공포대 설치, 1960년대 호텔 건설 등으로 인해 대부분 훼손되었다. 근현대에는 군사기지, 병영, 감옥 등으로 쓰이다 현재는 공원으로 개발되어 있다.
- 부르치 성채 (Μπούρτζι)
파일:나플리오 6.jpg
- 팔라미디 성채 (Παλαμήδι)
2차 베네치아 지배기에 도시 동북쪽을 방어하고, 고지대에서 시가지를 포격하는 것을 막기 위해 세워졌다. 1715년과 1822년의 포위 모두 팔라미디의 점령은 곧 나플리오의 점령으로 이어질 정도로 중요한 요충지였다. 또한 이는 베네치아 공화국이 세운 마지막 대규모 건축물이었다. 산 아래의 도시 성벽과 이어지는 계단도 일부는 실내로 만들어 적에게 노출되지 않게 했다. 근대에는 감옥으로도 쓰였다. 현재는 나플리오 전경을 찍기 위한 전망대로 인기가 있다.
[1] 좌측이 팔라미디 성채, 우측이 아크로나플리오[2] 일설에 따르면 아크로코린트 절벽에서 말과 함께 투신 자살했다고.[3] 여기에 코린토스에서도 매년 4백 히페르피라의 세폐를 받았다[4] 물론, 이전처럼 아르고스 & 나플리오 영주령은 아카이아 공작의 봉신으로써 소유한 것[5] 그 경비는 아테네 공국의 섭정 위그 드 브리엔이 지불[6] 1324년 고티에의 사후에는 조카 니콜이 바일리 계승[7] 후자는 또한 고티에 가문의 킾로스 영지도 받았다[8] 다만 약속했던 혼인 동맹은 이루어지지 않음[9] 당시 베네치아 최대 갑부로 유명[10] 동로마 지역[11] 다마트 알리 파샤의 제지에도 병사들이 학살 자행해 2백여명만 코르푸 생환[12] 콘스탄티노스가 머스킷 총, 기오르기오스가 단검을 사용해 공격함. 전자는 사살되고 후자는 프랑스 대사관에 피신했다가 인도되어 처형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