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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 | 틀:역대 남조 군주 | |
행정구역 | 태화성→양저미성 | |
민족 | 이족 | 바이족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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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봉민 大封民 | |
존속 기간 | 738년 ~ 902년 |
공식 명칭 | 大蒙 → 南詔 → 大禮 → 大封民[1] |
이칭 | 남조(南詔), 학척(鶴拓), 량위(འཇང་ཡུལ), 장(ལྗང) |
위치 | 윈난 성 일대와 미얀마, 라오스 일부 지역 |
수도 | 태화성 → 양저미성[2] |
정치 체제 | 군주제 |
국가원수 | 왕(조)(詔) → 황제 |
주요 군주 | 경장제 세륭 |
언어 | 이어, 바이어 |
종족 | 이족, 바이족 |
종교 | 밀교 계열 아자리교[3] |
성립 이전 | 육조(六詔)[4] |
멸망 이후 | 대장화, 대천흥, 대의녕[5] → 대리국 |
현재 국가 | 중국, 미얀마, 라오스, 베트남, 태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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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중국의 남서쪽 운남성 지역에 한족이 아닌 이족과 백족(白族)이 세운 왕국이다. 천혜의 요새 태화성에 중심을 두고 강력한 군사력과 찬란한 불교문화를 이룩한 왕국으로 한때는 당나라의 청두까지 위협하였고 9세기에는 미얀마, 라오스, 베트남까지 세력을 넓혔던 강성한 왕국이었다.2. 역사
2.1. 남조의 건국과 성립
남조의 역사는 몽사(蒙舍)가 근본이라 할 수 있다. 당시 운남성에는 육조가 자리잡고 있었는데 몽사와 더불어 몽수(蒙嶲), 월석(越析), 시랑(施浪), 등섬(邆賧), 낭궁(浪穹) 등의 부락이 그것이다. 몽사는 이들 중에서 가장 남쪽에 있었다고 하여 남조라 불렸다.649년, 몽사조의 군장 세노라가 대몽(大蒙)을 건국하고[6] 당나라와 독자적으로 수교를 맺었다. 당 제국은 토번을 견제할 수 있는 국가에 대한 외교적 필요성에 따라 남조가 5조를 통일하도록 지원하였다.
덕분에 737년, 피라각은 석화성과 석교성을 공격해 남만 25부락을 통합했다. 이어서 738년에는 국호를 대몽에서 남조로 개원했다. 남조는 나라의 풍수를 위해 739년, 도읍을 외산(巍山)에서 태화성(太和城)으로 천도하였다. 이로써 남조의 중앙집권체제가 완벽히 확립하였다. 당 조정에서는 조서를 내려 피라각을 귀의왕(歸義王)으로 책봉하고 남조와 더욱더 친선을 유지했다.
748년, 피라각이 붕어하고 신무왕 각라봉이 즉위했다. 이때 당 제국은 얼하이 호에 안녕성(安寧城)을 축성해 당과 남조의 경계를 무너뜨리고 있었다. 또한, 각라봉이 즉위함과 동시에 당은 반간계를 써서 남조에서 내분이 일어나도록 했다. 각라봉은 이런 당의 태도에 불만을 품었다. 결국, 749년, 남조는 운남태수 장건타를 죽이고, 요주(姚州) 등 마을 32개를 점령했다.[7][8] 검남절도사 선우중통은 곧바로 군사를 이끌고 남조를 공격했으나 패배했고[9], 이에 양국충이 서천절도사를 겸하였다. 752년, 양국충은 이복에게 군사를 내주어 재차 남조를 공격했으나 패배하였고, 753년에 남조를 공격하나 또 다시 패했다. 그러나 양국충은 패전보를 올리지 않고 승전보로 허위 보고한다. 754년, 당 조정은 7만의 군대를 다시 보내 남조를 토벌하게 했으나 역시 패배했다(당-남조 전쟁). 양국충의 삽질로 남조는 이때부터 당 제국과 소원해졌고, 안록산의 난이 터졌을 때도 남조는 당의 변방을 자주 침공했다.
2.2. 남조의 전성기
779년, 남조에서 각라봉이 죽고 효항왕 이모심이 즉위했다. 곧이어 도읍을 태화성에서 양저미성(羊苴咩城)으로 천도했다. 이모심은 토번의 첸포 치송데첸과 연합해 무릇 20만의 군사를 발동해 당의 변경을 침탈했다. 그러나, 결정적으로 남조가 이 전투에서 당군에 패배하자 토번은 책임을 남조에 전가시켰고 군신관계를 요구했다. 이모심은 토번의 위압적인 태도에 불만을 갖게 되었다. 이러한 사정을 알고 있었던 당의 관리 정회는 이모심을 설득하였다. 정회는 “중국은 예의가 있어서 강제로 요구하는 것이 적습니다. 토번이 탐욕스럽고 모질기가 끝이 없는 것과는 같지 않습니다. 지금 그들을 버리고 다시 당에 귀의한다면, 멀리 변방수비에 병력을 제공하는 수고가 없을 것이니, 이보다 이로운 것은 없을 것입니다.”라고 말하였다. 결국 이모심은 당에 내부하기로 결정했다.793년, 남조는 비공식적으로 당에 내부하였고, 토번은 이 사실을 몰랐다. 그런데 때마침 토번은 위구르 제국과 서역의 패권을 두고 대립하고 있었다. 토번은 남조에게 차출할 군사를 요구했다. 이모심은 군사를 보냈지만, 산천에서 토번군의 후미를 공격해 대파시키고, 토번의 속국왕 5명을 사로잡았다. 남조의 태도가 돌변하자 토번은 반격을 가해야만 했다. 하지만 당시 토번은 내분으로 동아시아의 패권 중심을 잃어가고 있었다. 795년, 치송데첸의 아들 무르크 첸포가 재상의 아들을 살해한 것이 발단이었다. 2년 뒤 치송데첸이 붕어하자마자 바로 즉위 문제로 내분이 일어났다. 따라서 남조는 토번의 영향력에서 완전히 벗어나게 되었고, 당 제국에게서 귀부한 대가로 하사품을 받으며 남조의 전성기를 이룩하였다.
소성왕 권풍우가 붕어하고, 경장제 세륭(世隆)이 집권하면서 남조의 전성기를 이어갔다. 세륭은 더 이상 남조가 당의 속국이 아님을 대내외적으로 표방하기 위하여 국호를 대례(大禮), 연호를 건극(建極)이라 칭하였다. 또한, 안남도호부(安南都護府)와 수주 등 당의 변경을 침공하였다. 당시 당은 세계제국으로서의 질서가 무너지고 있었기 때문에 남조의 팽창을 막을 수 없었고, 남조는 여세를 몰아 촉의 성도성까지 진격했다.
877년, 세륭이 붕어하고 뒤이어 성명문무제 융순(隆舜)이 즉위했다. 융순은 일찍이 당과 친교를 맺기 위하여 사신 양기굉(楊奇肱)을 당에 파견하여 혼사를 성사시키려 했다. 당 제국은 당시 황소의 난이 평정되지 않았기 때문에 혼사를 뒤로 미뤘고, 희종이 환도를 했으나 공주의 혼사는 중지되었다.[10]
2.3. 남조의 멸망, 대리국으로의 승계 과정
그러나, 순화정 때 이르러 남조는 왕권이 크게 추락했다. 여러 부락의 힘이 더욱 커져 정(鄭)씨, 조(趙)씨, 양(楊)씨에게 권력을 빼앗겼고, 결국 902년, 한족인 정매사(鄭買嗣)가 반란을 일으켜 순화정을 시해하고, 대장화(大長和)을 건국했다. 그러다가 927년, 검천절도사 양간정(梁干貞)이 군사를 일으켜 대장화를 멸망시키고, 대천흥(大天興)을 건국했다. 양간정은 임시로 청평관 조선정(趙善政)을 추대했다가 929년, 조선정을 몰아내고 자신이 왕위에 등극하고, 국호를 대의녕(大義寧)으로 바꾸었다. 그러다가 937년, 통해절도사 단사평(段思平)이 양간정을 몰아내고, 대리국(大理國)을 세웠다.3. 정치
남조의 정치체제는 당나라와 유사했다. 이를테면 당의 재상직에 해당되는 청평관(淸平官)이 있었다.3.1. 행정구역
※ 검(瞼)은 주(州)와 같다.- 대화(大和) 지금의 대리시 태화에 위치
- 양저미(陽苴咩) 지금의 대리고성에 위치
- 대리검(大釐瞼) 지금의 대리시 희주(喜洲)에 위치
- 등천검(邆川瞼) 지금의 대리시 등주(鄧洲)에 위치
- 몽사검(蒙舍瞼) 지금의 대리주 외산현(巍山縣)에 위치
- 백애검(白崖瞼) 지금의 대리주 미도현(彌渡縣)에 위치
- 운남검(雲南瞼) 지금의 대리주 상운현(祥雲縣)에 위치
- 품담검(品澹瞼) 지금의 대리주 상운현(祥雲縣)에 위치
- 몽진검(蒙秦瞼) 지금의 대리주 양비현(漾濞縣)에 위치
- 의화검(矣和瞼) 지금의 대리주 이원현(洱源縣)에 위치
- 조천검(趙川瞼) 지금의 대리시 봉의(鳳儀)에 위치
4. 군사
대체로 군사가 출병할 때는 망저자(望苴子)가 선봉에 서고, 청평관의 자제들이 우의(羽儀)가 되었다. 왕의 좌우에는 우의장(羽儀長) 8인이 있는데, 청평관이 왕을 알현할 때는 칼을 찰 수가 없는데, 오직 우의장만이 칼을 차니 가장 믿음직한 집단이었다. 6명의 조장(曹長)이 있는데, 조장이 공이 있으면 대군장(大軍將)으로 보임된다. 대군장은 12명인데, 청평관과 동일한 지위로 매일 왕이 머무는 곳에서 정사를 의논한다. 외진으로 나가 군벽(軍壁)을 다스릴 때는 절도(節度)를 칭하고, 그 다음으로 청평관에 보임된다. 내산관(內算官)이 있는데 왕을 대신하여 업무를 처리하고, 외산관(外算官)은 왕의 처분을 기록하여 6조(曹)에 송부한다. 외진에는 6절도(節度)가 있다.
『신당서』 「남만전」 상
『신당서』 「남만전」 상
- 8절도(8節度) : 운남(雲南), 자동(拓東), 영창(永昌), 영북(寧北), 진서(鎮西), 개남(開南), 은생(銀生), 철교(鐵橋)
- 6절도(6節度) : 능동(弄棟), 영창(永昌), 은생(銀生), 검천(劍川), 자동(拓東), 여수(麗水)
- 2도독(2都督) : 회천(會川), 통해(通海)
- 그밖에 남조의 군사와 무기 및 주변 이민족들에 관한 자료가 알고 싶다면, 옆의 링크를 참조해 볼 것.#
5. 문화
남조는 불교문화를 꽃 피웠다. 당과 토번 사이에 위치했던 남조는 이전부터 표국과 교류를 맺으면서 자연스레 천축국에서 불교 영향을 받았고 중국에서 동북아 문명을 받아들였다. 또한, 당에서는 주로 대량의 경전이 전해왔는데 남조가 이전에 받아들였던 천축의 불교와 당에서 들여온 중원의 불교 문화가 복합되어 아자리(阿吒力)교가 새로 창조되었다.법계통령명도승탑(法界通靈明道乘塔)
현재 운남성에서 가장 유명한 문화재는 바로 이 법계통령명도승탑이다. 남조의 권풍우(勸豊祐) 시기(823 ~ 859)에 건축되었는데 높이 69m로 현재 중국 남방 지구에서 가장 오래되고 웅장한 문화재 중 하나로 손꼽힌다. 또한 권풍우 시기에는 작은 사찰부터 큰 사찰까지 약 4000여의 사찰이 있었다고 하니 남조가 얼마나 불교에 애착이 강했는지 짐작해 볼 수 있다.
6. 토산물
아래는 각 지역마다 생산되는 토산물이다.- 대화(大和)와 기선(祁鮮) - 솜[綿]
- 남검(覽瞼) - 소금[鹽]
- 곤명성(昆明城) - 소금[鹽]
- 영창(永昌) - 뽕나무[11]
- 장천(長川) - 금(金)
- 여수(麗水) - 사금(沙金)
- 월섬(越睒) - 말[馬]
7. 역사적 의의
남조가 동남아 지역에 끼친 영향력이 상당하다. 남조의 발흥으로 버마족이 오늘날의 미얀마(버마) 지역으로 이동하기 시작했고 남조의 계속된 침입으로 오늘날 미얀마 중부에 존재하던 퓨족의 고대 도시국가들이 쇠퇴했다. 태국이나 라오스도 남조의 침략으로 이동을 시작하여 이후 본격적으로 동남아로 이주를 한 타이족과 라오족들이 세운 국가이다. 또한 남조-당의 전쟁으로 당시 중국의 통치 하에 있었던 베트남인 역시 이후 분리 독립하여 자립하게 될 계기를 마련하였다.[12] 그야말로 지금의 동남아를 만든 왕국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8. 역대 군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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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명문무제 | 효애제 | 도혜왕 |
남조왕출행도(南詔王出行圖)
남조는 특이하게 아버지의 이름의 끝 자를 아들 이름의 첫 자에 붙이는 부자연명(父子連名)의 전통이 있었다.
대수 | 묘호 | 시호 | 휘 | 연호 | 재위 기간 |
대몽(大蒙) | |||||
1대 | 고조(高祖) | 기가왕(奇嘉王) | 세노라(細奴邏) | 653 ~ 674 | |
2대 | 세종(世宗) | 흥종왕(興宗王) | 나성염(邏盛炎) | 674 ~ 712 | |
3대 | 염각(炎閣) | 712 | |||
4대 | 태종(太宗) | 위성왕(威成王) | 성라피(盛邏皮) | 712 ~ 728 | |
남조(南詔) | |||||
5대 | 귀의왕(歸義王) | 피라각(皮羅閣) | 728 ~ 748 | ||
6대 | 신무왕(神武王) | 각라봉(閣羅鳳) | 찬보종(贊普鍾) 장수(長壽) | 748 ~ 779 | |
추존 | 도혜왕(悼惠王) | 봉가이(鳳伽異) | 추존 | ||
7대 | 효항왕(孝恆王) | 이모심(異牟尋) | 견룡(見龍) 상원(上元) 원봉(元封) | 779 ~ 808 | |
8대 | 효혜왕(孝惠王) | 심각권(尋閣勸) | 응도(應道) | 808 ~ 809 | |
9대 | 유왕(幽王) | 권룡성(勸巖晟) | 용흥(龍興) | 809 ~ 816 | |
10대 | 정왕(靖王) | 권리성(勸利晟) | 전의(全義) 대풍(大豊) | 816 ~ 823 | |
11대 | 소성왕(昭成王) | 권풍우(勸豊祐) | 보화(保和) 천계(天啓) | 823 ~ 859 | |
대례(大禮) | |||||
12대 | 경장제(景莊帝) | 세륭(世隆) | 건극(建極) 법요(法堯) | 859 ~ 877 | |
대봉민(大封民) | |||||
13대 | 성명문무제(聖明文武帝) | 융순(隆舜) | 정명(貞明) 승지(承智) 대동(大同) 차야(嵯耶) | 877 ~ 897 | |
14대 | 효애제(孝哀帝) | 순화정(舜化貞) | 중흥(中興) | 897 ~ 902 |
[1] 860년 경장제 세륭이 국호를 대례(大禮)로 바꾸어 칭제하였는데, 878년에 성명문무제 융순이 대봉민(大封民)으로 다시 개칭하였다.[2] 779년 천도.[3] 阿咤力敎. 대흑천(大黑天)이라 불리는 마하칼라(महाकाल) 신을 섬겼는데 이 신은 힌두교의 시바에서 차용한 것이다. 관세음보살 역시 주요 신앙의 대상이었다.[4] 몽사, 몽수, 월석, 시랑, 등섬, 낭궁[5] 짧은 기간 동안 세 왕조가 교체되었다고 해서 후삼조(後三朝)라고 부른다.[6] 참고로 남조의 건국 주체는 백만(白蠻)이지만 왕실의 종족은 오만(烏蠻)이다. 이들은 현재 미얀마인과 가까운 이족(彝族)의 선조라고 할 수 있다.[7] 중국 측 사서에서는 장건타의 수탈 때문에 각라봉이 분노했다고 나오지만 남조덕화비에는 그 내막이 자세히 나타나 있다.[8] 이는 현종 이융기가 흑수말갈에 흑수도독부를 설치해, 발해를 와해시키려 하였으나 결국 무왕 대무예가 분노하여 등주를 공격해 자사 위준을 죽였다는 사실과 유사하다.[9] 선우중통은 이를 승전으로 허위 보고하나 나중에 그 사실이 밝혀져 실각하고 755년 사망한다.[10] 오로지 자치통감에서만 혼사가 이뤄졌다고 나오는데 신오대사와 신당서에는 장안 수복 뒤에도 혼사 문제는 중지됐다고 나온다.[11] 활을 제작할 때 필요한 나무[12] 엄밀히 말해 이건 연결고리가 미약하다. 아무리 당나라가 맛이 갔어도 당나라가 존재하던 시기에는 베트남 지역도 남들이 다 그랬듯 절도사의 지배를 받을지언정 독립국은 아니었고 오대십국시대에도 초기에는 그 기조가 이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