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6-10 11:53:23

조지프 니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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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생애3. 업적 및 영향4. 비판5. 관련 문서

1. 개요

Joseph Needham (1900. 12. 09. ~ 1995. 03. 24.)

생화학자이자 중국 과학사에 대한 엄청난 연구로 명성을 떨친 역사학자.

2. 생애

조지프 니덤은 의사 아버지와 음악가 어머니 사이에서 외아들로 런던에서 출생하였다.

니덤의 아버지는 옥스퍼드 운동의 주요 인물이었으나, 퀘이커 신비주의에 빠져 철학적 신학으로 기운 사람이었다. 그는 아들을 교회에 보내어 반스 주교의 설교를 듣게 하였는데, 이 설교는 영지주의, 마니교, 대승 불교, 18세기 이신론에 관한 내용이었다.

니덤은 아운들 공립학교를 졸업했으며, 의사가 되기 위해 케임브리지 대학교의 의학과 신학의 명문 곤빌 앤 키스 컬리지에 들어갔다. 그러나 그는 프레더릭 홉킨스의 영향을 받아 의사가 되기를 단념하고, 그와 같이 생화학자의 길을 걸었다. 대학 졸업 후에 22년 동안, 홉킨스가 소장으로 있는 단 생화학연구소에서 근무하였다. 이후 35세에 생화학 윌리엄 단 부교수가 되었다.

그가 근무했던 생화학연구소는 좌익 분위기가 만연하던 곳이었다. 소장 홉킨스는 과학연구자협회의 회장을 잠시 지낸 적이 있으며 니덤 역시 회원이었다. 이처럼 그가 사회주의자가 되게 된 이유는 그의 과거에서 찾아볼 수 있다.

13세에 아버지와 프랑스를 여행하던 중 철도원의 오두막집에 머무르게 되었는데, 유족한 생활을 했던 그가 노동계급의 사람들을 보게 되면서 충격을 받았다. 그 후 중학 시절에는 기관사들과 사귀면서 그들의 생활을 알게 되었으며, 러시아 혁명이 터진 1917년엔 볼셰비키 혁명을 좋은 것이라고 말해 아버지를 놀라게 한 일도 있었다. 그가 비록 카를 마르크스의 저작을 읽어보진 못하였으나, 조지 버나드 쇼의 영향을 받아 사회주의자가 되었다. 그러나 그는 사회주의에 대해 철학적이고 신학적인 관심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대학시절엔 정치토론에 말려들지 않기 위해 좌익단체에 가입하지 않았다. 젊었을 당시에 그는 막연히 진보적인 입장을 취하였으나, 1925년 랩킨을 통해서 마르크스의 고전들을 읽으면서 사상적 변화를 겪었다. 이 무렵에 니덤 부부가 에식스에 있는 색스티드 교회에 나갔는데, 이 교회는 지상천국을 실현하자는 기독교 사회주의로 유명한 곳이었다. 니덤은 그 영향을 받아 기독교 사회주의자가 되었으며 존 루이스와 함께 기독교와 사회혁명을 편집하기도 하였다.

1931년 총선거에서 그는 노동당 대학 및 지역 지부에서 일하였으며, 1935년에는 노동당 산하의 사회주의연맹의 지부장이 되기도 하였다. 케임브리지 과학자 반전그룹에 참가한 적도 있으며, 과학연구자협회의 활성화를 위해 적극적으로 노력하기도 하였다. 스페인 내전 때에는 바스크 피난민들을 위한 모금운동과 공화군에 대한 의료지원을 벌였으며, 연설과 집필을 통해 인민전선을 위해 일하였다.

1931년 여름에 그는 찰스 싱어의 권유로 랜슬롯 호그븐과 함께 제2회 국제과학기술사회의에 참석하였는데, 충격적인 일을 목격하였다. 니콜라이 부하린을 단장으로 한 소련대표단이 들어닥치고, 이어 물리학자 보리스 게슨은 '뉴턴의 프린키피아의 사회·경제적 근원'이라는 논문을 읽었다. 이 논문은 부르주아가 산업을 발전시키기 위해 과학이 필요하였고 이에 따라 과학은 부르주아의 번영에 따라 발전하기 시작하였는데, 상업자본주의의 등장으로 교통, 공업, 산업 등의 여러 문제의 해결이 필요하자 신흥 부르주아의 대표자인 아이작 뉴턴이 이러한 해결을 위해서 프린키피아를 저술했다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이러한 단순주의적 경제결정론은 러시아 혁명에 인상을 받은 젊은 좌익 과학자들에게 영향을 주었는데, 조지프 니덤 역시 그 중 한 명이었다.

그러나 니덤은 정통적 마르크스주의와는 거리가 먼 비정통주의적 사회주의자였다. 카를 마르크스종교는 인민의 아편이다라고 한 말에 대해선 동의하지 않았으며, 그는 정치적 실천이 아니라 과학을 위해 변증법을 받아들였다. 또한 변증법이 다른 형태의 인간 오성을 무시하는 것을 거부하였다. 또한 기독교와 마르크스주의가 양립가능하다고 생각하였다.

1937년 그의 인생에 전환점이 된 사건이 있었다. 그가 있었던 생화학연구소에 중국인 연구생들이 왔던 것이었다. 그는 이들에게 독일어를 가르치다가 중국어를 배우게 되었고, 중국이라는 신세계를 발견하고 중국 문명에 대해 관심을 기울이게 되었다.

그는 1941년 왕립학회의 회원이 되었는데, 1942년에 왕립학회 대표로 중국에 가서 강의를 하고 중국 과학자들을 격려해 달라는 요청을 하였다. 중국에 관심이 많았던 니덤에게 좋은 기회였다. 그는 충칭에서 중영과학협력관 되었으며 4년 동안 제약을 받지 않고 중국 곳곳을 돌아다니며, 기술자들에게 도움을 주며 중국문화를 이해하게 되었다. 그는 중국에 머무르는 동안 중국의 과학자들과 저우언라이 등의 정치인들과 사귀고 중국과학에 대한 자료를 수집하였다. 1946년 유네스코가 창립되고 줄리언 헉슬리가 사무총장이 되면서, 중국에 있던 니덤에게 자연과학부를 맡아달라는 요청을 하자 그는 파리에서 근무하기 시작하였으나, 이적행위에 대한 혐의가 짙어짐에 따라 니덤은 1948년에 사임하고 키스 콜리지로 돌아갔다.

키스 콜리지로 돌아간 니덤은 그가 중국에서 수집하였던 중국과학에 대한 자료들을 토대로 중국과학사를 쓰는 작업을 시작하였다. 이 결과물은 그의 대작이라 할 수 있는 중국의 과학과 문명이었다. 그러나 그의 작업이 처음부터 호평을 받은 것은 아니었다.

1952년 중국은 6.25 전쟁에서 미군이 북부중국과 북한에서 세균전을 했다고 비난하였다. 세계평화회의의 국제과학위원회의 일원으로 중국을 다시 방문한 조지프 니덤은 중국뿐만 아니라 북한에도 찾아가서 중국의 비난의 근거들을 찾아보았다. 그는 생물학적 증거는 빈약하지만 중국의 세균전 비난이 허황된 이야기는 아니다라는 보고를 내렸다.[1] 하지만 이를 가려서 봐야할 필요가 있는데 당시 소련에서 미군이 벌인 세균전은 중국의 증거조작과 프로파간다로 인한 정보라는 결론을 내리고 중국의 중단할 것을 요구했다는 점, 해당 근거가 중국이 일방적으로 제시하는 증거와 심문당한 포로의 증언으로만 이루어져 조사단이 현장에서 사실관계를 제대로 확인하지 하지 못했다는 점 그리고 당시 중국인민지원군의 위생부장을 지낸 고위인사가 아군 사이에서 벌어진 질병을 미군의 생물학 공격으로 뒤집어 씌우고 그에 맞추어 조작했다가 소련이 이를 비난하자 곧바로 철회한 사건이라는 회고록까지 있다. 1 2

니덤은 비록 중국 과학자사회에 대한 우정으로 여기에 참여했다고 변명하였으나, 당시에 열풍이 불었던 매카시즘에 '공산주의의 선전에 잘 속는 얼간이' 등의 많은 조롱과 비판을 받았다. 그로 인해 그는 케임브리지 대학에 적을 많이 만들었으며, 심지어는 미국 CIA의 블랙리스트에 올라가 비자를 받지 못하는 곤욕을 치르기도 하였다. 이런 상황에서 1954년 중국의 과학과 문명의 1권을 내놓았으며 많은 비난을 받았다. 특히 2권 과학사상사는 중국학계와 과학사학계의 혹독한 비판을 받았다. 그러나 그의 연구가 진행되면서 니덤에 대한 거부감과 비난은 존경심으로 바뀌었으며, 중국의 과학과 문명은 대작으로 칭송받게 되었다.

모교 키스 콜리지는 1965년에 그를 학장으로 선출하였으며, 1968년에는 조지 사튼 메달을 받았으며, 1971년에는 인문학계의 최고 영예인 영국아카데미 회원을 차지하기도 하였다. 또한 국제과학사·과학철학연합의 회장으로 선출되었으며, 중국과학원의 중국사회과학원의 종신 명예교수를 지냈고, 일본 후쿠오카문화상을 받기도 하였다. 1992년 명예훈장(Order of the companions of honour)의 회원에 지명되어 엘리자베스 2세에게 회원증을 받았다.

말년에 관절염과 파킨슨병으로 고생하였으며, 1995년 3월 23일 저녁에 뇌마비로 사망하였다.

3. 업적 및 영향

조지프 니덤의 과학사적 업적은 명저 중국의 과학과 문명으로 설명가능하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그는 중국의 과학과 기술 모든 분야를 망라한, 방대한 양의 정보를 바탕으로 중국과학사를 연구하였으며, 이는 후대의 중국과학사가들에게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

중국의 과학과 문명에 일관되게 나오는 내용은 중국이 고대서부터 12, 13세기에 이르기까지 과학기술분야에서 서양보다는 같은 수준이거나 오히려 앞선다는 주장을 하였으나 서양학자는 물론 동양계 학자조차 고문서 짜집기하고 멋대로 허위 주장한다고 그를 저격하고 있다.

니덤은 중국의 전통과학이 서양의 근대과학과는 다르게 종합적·유기론적·비결정론적·비인과율적 성격이 강하다는 것을 통해, 중국의 전통과학이 서양의 근대과학과는 근본적으로 달랐다는 것을 강조한다. 또한 이런 중국의 전통과학이 현대 물리학의 성격과 비슷함을 강조하면서, 서양의 근대과학을 거치지 않고 현대 과학으로 가는 또 하나의 길이 있었다고 주장한다.

그렇다면 왜 중국의 전통과학은 그러한 발전을 할 수 없었는가?라고 하는 질문, 니덤 문제라고 부르는 그것에 대한 답변을 그의 저서를 통해서 풀어내고자 하였다. 이 과정에서 중국 과학에 대한 여러 오해들, 수학의 미발전이나 실험의 부재, 논리적 추론의 전통의 부재, 또 중국어 때문에 논리적 추론에 방해받았다는 주장들을 여러가지 자료들을 통해서 반박하였다. 니덤 문제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해당 항목 참고.

중국의 전통과학이 현대과학으로 나아간다는 생각에 기초하여 중국의 과학과 문명의 목차 역시 현대 과학의 분야들에 맞추어 중국의 전통과학을 이해하려고 하였다.

4. 비판

중국의 과학기술을 정도가 심할 정도로 과대평가하여 수많은 비판을 받았다. 재밌는 점은 중국의 과학기술이 원시적이고 조잡하다고 본인 스스로 밝히면서도 출처가 불명확한 문서들을 조합해서 마치 중국이 대단한 과학기술이 있는 것처럼 주장하는 등 모순적인 태도를 보였다는 것이다. 친중파인 그의 사적 행보와도 맞물려서 그의 주장을 그대로 수용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지나치게 단순화하고 아전인수격으로 해석하는 점은 비판받는 점이다. 현대 과학의 분야들에 맞추어 중국의 전통과학을 이해하려한 시도 역시 중국의 전통과학을 제대로 이해하는 데에 방해요소가 된다는 비판도 제기되었다.[2]

특히 한국의 과학사는 니덤의 피상적인 이해를 잘 드러낸다고 박성래 교수는 지적한다. 니덤이 당시로서는 이례적으로 동아시아 과학에서 한국의 위치를 높게 평가한 것은 사실이나, 정작 인명표기에 있어서 오기가 많은 편이고 앙부일구가 중국에서 만들어져 조선으로 수입된 것이라고 기술하는 등 한국과학사를 높이 평가하면서 그에 대한 이해가 떨어진다는 모순적인 모습을 보여준다는 점도 비판의 대상이 된다.[3]

또한 한문 문장 역시 전문 연구자치고는 능숙하지 못하다는 비판 역시 있으며, 중국을 지나치게 높이 평가한다는 점, 중국의 입장에서 다른 나라들의 과학발전을 바라본다는 점도 니덤이 비판받는 점이다.

다른 각도로는 그가 해당분야에서 선구자적 인물이다 보니, 그에 대한 건전한 비판이 부족하고 그의 주장을 일방적으로 인정하려는 경향에 대한 학문의 원론적인 성격의 비판도 존재하나 사실 그의 주장을 맹목적으로 받아들이는 집단은 중국의 국수주의 학자들 외에는 없다. 대표적으로 조지프 니덤이 정크선에 대해 연구하면서 정크선의 수밀격벽 구조를 중국인들이 고대에 대나무 뗏목을 사용하면서 대나무 내부의 마디에 착안해 수밀격벽을 만들었을 것이며 수밀격벽 역시 오래 전부터 사용되었을 것이라고 주장했지만, 이 주장이 제대로 비판받은 것은 상당히 최근의 일이다.[4] 또한 정크선에 대해 연구하면서 정크선의 혁신적인 부분을 강조하는데 집중한 나머지, 군함으로서의 발달이 미흡하여 서양식 배에 중국인들이 많은 관심을 가진 사실을 간과했다.[5]

5. 관련 문서


[1] 여담으로 니덤의 미국의 세균전 시도 주장과 관련해서 최근 니덤을 단장으로 하는 국제과학자협회 공식조사단이 1952년 작성한 보고서가 발견돼서 공개되었다. 내용을 요약하면 600페이지가 넘는 이 보고서에는 전쟁 당시 미국이 중국과 북한일대에 뿌린 벼룩의 사진이나 세균을 뿌리다 잡힌 병사의 수기진술서(대놓고 민간인 대상과 관련된 증언이 담겨있다.), 세균배포경로 비행지도(!) 등이 담겨 있다고 했다.[2] 대표적인 적이 중국의학(특히 양생술). 주술적/정신적인 측면도 모두 현대 의학기술에 기초해 해석하려다 보니 해석에 여러 가지 문제를 낳았고, 그 중 하나가 소녀경의 성교시 음양의 조절을 단순히 남성이 외부사정을 피하고 방광 내 사정하는 것으로 괴악하게 해석하는 등의 문제를 드러냈다.[3] 사실 비단 한국뿐만 아니라, 아시아 과학사 전체를 중국 기준으로 해석하고 있다.[4] 물론 고고학적인 근거가 부족해서 늦게 비판받은 것도 있다. 그 이전에는 중국 학자들이 '우리가 그런 원시적인 배에 목매달고 살았다고?'하면서 화내던 정도다.[5] 이 부분을 비판한 서적이 국내에 번역 발간된'대포, 범선, 제국'(카를로 치폴라 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