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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미야 겐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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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Tamiya_Kenjirou.jpg
이름 타미야 겐지로(田宮 謙次郎)
출생 1928년 2월 11일
사망 2010년 5월 5일 (향년 82세)
국적
[[일본|]][[틀:국기|]][[틀:국기|]]
출생지 이바라키현 시모다테시[1]
투타 좌투좌타
포지션 투수, 외야수
학력 구제 이바라키현립 시모다테 상업학교- 니혼대학(중퇴)
프로경력 오사카 타이거스(1949~1958)
다이마이 오리온즈(1959~1963)
지도자 경력 주니치 드래곤즈 타격 코치(1968~1969)
토에이 플라이어즈 수석 코치(1970)
토에이/닛타쿠홈 플라이어즈 감독(1970~1973)[2]
한신 타이거스 수석 코치(1988)
웨이취안 드래곤스 감독(1994~1995)
1958년 퍼시픽 리그 타격왕
요나미네 카나메
(요미우리 자이언츠)
0.343
타미야 겐지로
(오사카 타이거스)
0.320
나가시마 시게오
(요미우리 자이언츠)
0.334
토에이/닛타쿠홈 플라이어즈 역대 감독
마츠키 켄지로
(1969~1970)[3]
타미야 겐지로
(1970~1973)[4]
도바시 마사유키
(1973)[5]

1. 개요2. 학창 시절3. 프로선수 시절4. 은퇴 이후5. 여담

1. 개요

일본프로야구 선수, 지도자, 해설가이자 정치인.

2. 학창 시절

구제 시모다테 상업학교 졸업 후 니혼대학에 진학하여 투타 겸업으로 플레이 했다. 우승 경력은 없지만 1947년 도토 대학야구 리그 추계 대회에서 타율 0.427로 수위 타자를 차지했고, 네모토 리쿠오와 배터리를 이루면서 에이스 투수로 활약했다. 한편으로 타미야는 유도 선수로 뛰면서 2단을 따기도 했다.

1949년 오사카 타이거스의 스카웃 제의에 대학을 중퇴하고 프로에 입문했다. 당시 요미우리 자이언츠도 타미야를 영입하고자 미하라 오사무 감독이 직접 찾아오기도 했지만, 타미야는 생각을 바꾸지 않고 오사카 유니폼을 입었다.

3. 프로선수 시절

3.1. 오사카 타이거스

당초 타미야는 투수로 뛰며 데뷔 시즌인 1949년에 11승 7패, 평균자책 4.56으로 제법 괜찮은 성적을 거두었다. 1950년 3월 16일 고쿠데츠 스왈로즈와의 경기에 선발 등판한 타미야는 9회말 투 아웃까지 단 한명의 주자도 허용하지 않으며 퍼펙트 게임이 눈 앞에 다가왔지만 나카무라 사카에가 때린 땅볼이 3루수 후지무라 후미오의 판단 미스로 내야 안타가 되면서 일본프로야구 사상 최초의 퍼펙트 게임은 커녕 노히트 노런까지 놓치는 아쉬움을 남겼다.[6] 이후 타미야는 고질적인 어깨 통증으로 인하여 외야수로 전향하면서 그 승리는 투수로서의 생애 마지막 승리로 남았다.

1952년 시즌 타미야는 우익수로 출장했고, 1954년 풀 타임 중견수로 자리잡으며 규정타석 진입은 물론 타율 0.300, 도루 30개로 좋은 활약을 보였다. 1955년엔 타율 0.288를 기록하며 데뷔 후 처음으로 올스타전에 출장했으며 1956~1958년 3시즌 연속 3할을 기록했고 1958년 타율 0.320으로 타격왕을 차지하며 괴물 신인 나가시마 시게오의 3관왕을 저지하였다. 타선에서는 주로 5번 타자로 기용되었지만 후지무라 후미오가 부진할 때에는 4번을 맡기도 했다.

1958년 시즌을 마친 후 타미야는 10년 선수 제도[7]에 따라 재계약금 수령 권리를 행사하려고 했지만 오사카 구단은 타미야와의 재계약에 대해 미온적인 반응을 보였고, 결국 타미야는 자유계약으로 다이마이 오리온즈에 이적했다.

3.2. 다이마이 오리온즈

파일:Tamiya_Daimai.jpg

타미야는 다이마이 에서도 주로 3번, 5번 타자로 뛰면서 1960년 시즌 타율 0.317로 그 해 타격왕 에노모토 키하치(0.344) 뒤를 잇는 타격 2위를 마크했고, 야마우치 카즈히로도 0.313를 기록하며 그 해 타격 1~3위를 다이마이 타자들이 독점하는 진풍경을 만들기도 했다.[8] 타미야는 이른바 다이마이 미사일 타선의 한 축으로 팀의 1960년 퍼시픽 리그 제패에 공을 세웠고 다이요 훼일즈와의 일본시리즈에 4번 중견수로 출장하여 비록 다이마이는 준우승에 그쳤지만 14타수 5안타 1타점으로 분투하며 감투상을 수상했다.[9]

그 후 타미야는 1961년 자신의 생애 시즌 최고 타율인 0.328로 타격 3위에 랭크되었고 1962년에도 0.308로 3년 연속 3할을 기록했지만, 1963년 시즌 다이마이 감독으로 취임한 혼도 야스지와 불화를 일으키며 선발 출장 기회가 확 줄어들었고 결국 그 해를 마지막으로 타미야는 현역에서 은퇴했다.

타미야는 15시즌 통산 1488경기 출전, 1427안타, 106홈런, 597타점, 190도루, 타율 0.297를 기록했으며 투수로서는 50경기 등판, 12승 12패, 평균자책 4.85를 마크했다.

4. 은퇴 이후

1964년부터 1967년 까지 TBS 해설가로 활동한 타미야는 1968~1969년 주니치 드래곤즈 1군 타격 코치를 거쳐 1970년 토에이 플라이어즈 수석 코치로 취임했지만 그 해 7월 감독인 마츠키 켄지로가 중도 사퇴하면서 토에이의 감독으로 임명되었다.

파일:Tamiya_Toei.jpg

하지만 감독으로서의 수완은 전혀 발휘하지 못하고 팀 성적은 전부 B클래스(4위 이하)에 그치며 팀명이 닛타쿠홈 플라이어즈로 바뀐 1973년 전기리그를 끝으로 감독 자리에서 해임당했다. 당시 플라이어즈의 중심 타자이던 장훈은 "T감독(타미야)은 승부에 대해 냉철하지 못했고, 4회에 기용했던 대타를 8회에 다시 기용하려 한 적도 있다" 라며 그를 평하기도 했다.

현장을 떠난 타미야는 1974~1987년 까지 TBS 해설가를 맡으면서 자비를 들여 미국 코치 연수를 갔다 왔으며 1984년 부터 18년간 한신 타이거스 OB회 회장을 역임했는데, 1999년 한신 감독으로 취임한 노무라 카츠야와 충돌하면서 노무라는 OB회 참석을 거부하는 사태가 벌어지기도 했다. 1988년 시즌 무라야마 미노루 감독의 요청으로 친정팀 한신 타이거스 수석 코치를 맡았지만, 불과 몇 달만인 5월 6일에 코치직을 내려놓고 구단 프런트로 전향했다.

파일:Tamiya_Dragons.jpg

1994~1995년 대만프로야구 웨이취안 드래곤스 감독을 마지막으로 타미야는 현장에서 물러났고, 2000년 고향인 시모다테시 의회 의원으로 당선되어 정치인으로 활동하기도 했다. 2002년 1월에는 시민 영예상을 수상하고 야구 전당에 헌액되었다. 타미야는 남은 생애를 아마추어 야구 발전에 힘쓰면서 동향 후배인 이가와 케이의 후견인으로 그를 지원했다.

2010년 5월 5일 오전 10시 42분, 타미야는 이바라키현 소재 병원에서 뇌출혈로 사망했다. 향년 82세.

5. 여담

  • 하얀거탑 등으로 유명한 배우 타미야 지로의 본명은 시바타 고로(柴田吾郎) 였지만 다이에이 영화사 대표이자 다이마이 오리온즈의 구단주인 나가타 마사이치가 "우리 팀의 타미야 겐지로 만큼 스타가 되어라" 라는 의미로 그의 예명을 타미야의 이름에서 본떠 타미야 지로라고 강제로 지어 주었다고 한다. 이후 타미야가 토에이 플라이어즈 감독에 취임했을 때 주간 베이스볼 특집으로 타미야 지로와 대담을 갖기도 했다.


[1] 현재의 츠쿠바시.[2] 1970년은 감독 대행.[3] 성적 부진으로 1970년 시즌 도중 사퇴.[4] 성적 부진으로 1973년 시즌 도중 사퇴.[5] 그 해 후기리그만 감독으로 재임.[6] 공교롭게도 그 해 6월 28일, 교진군후지모토 히데오가 최초로 퍼펙트 게임을 달성했다.[7] FA 제도 도입 이전, 1947년부터 1975년까지 실시된 한 팀에서만 10년을 뛴 선수들을 대상으로 자유계약 또는 재계약금 수령 중 하나를 선택할 수 있는 권리를 주고, 여러 팀을 거치며 10년을 채운 선수에게는 재계약금 수령 권리만 주는 제도였다. 이 제도의 대표적인 수혜자가 카네다 마사이치 이다.[8] 같은 퍼시픽 리그 라이벌 팀인 토에이 플라이어즈장훈2년차 징크스 없이 신인 시절(.275)보다 더 향상된 타력으로 데뷔 후 첫 3할(.302)을 기록했으며 1961년에 타율 .336으로 생애 첫 리그 수위타자의 자리에 등극했다. 1960년 시즌 난카이 호크스노무라 카츠야는 타율 .291을 기록했다.[9] 덧붙이자면 정규시즌 그렇게 뜨거웠던 다이마이 타선이 시리즈 들어 확 식어버리는 바람에 4경기를 내리 다이요에게 1점차로 패하고, 그 때문에 니시모토 유키오 감독이 구단주 나가타 마사이치에게 바카야로 라는 폭언을 듣고 격분하여 1시즌 만에 감독 자리를 내놓는 해프닝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