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0-25 22:20:09

나시다 마사타카

[[오사카 긴테쓰 버팔로즈|오사카 킨테츠 버팔로즈]] 역대 감독
사사키 쿄스케
(1996~1999)
나시다 마사타카
(2000~2004)
팀 해체
오릭스 블루웨이브에 흡수합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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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대 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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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초대
요코자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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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6)
2대
가리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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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7~1948)
3대
이노카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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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9~19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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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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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1)
5대
이노카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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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대
미즈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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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8)
10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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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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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에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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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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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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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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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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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역 시절.

파일:external/www.asahicom.jp/AS20151008002878_comm.jpg
2015년 10월 8일 도호쿠 라쿠텐 골든이글스 감독 취임회견 때.
이름 나시다 마사타카 (梨田昌孝)[1]
생년월일 1953년 8월 4일 ([age(1953-08-04)]세)
국적
[[일본|]][[틀:국기|]][[틀:국기|]]
출생지 시마네현 하마다시
포지션 포수
투타 우투우타
학력 시마네현립 하마다 고등학교
프로입단 1971년 드래프트 2순위
소속팀 킨테츠 버팔로즈 (1972~1988)
지도자 킨테츠 버팔로즈 1군 작전·배터리코치 (1993~1995)
오사카 킨테츠 버팔로즈 2군 감독[2] (1996~1999)
오사카 킨테츠 버팔로즈 감독[3] (2000~2004)
홋카이도 닛폰햄 파이터즈 감독 (2008~2011)
도호쿠 라쿠텐 골든이글스 감독 (2016~2018.6.)

1. 개요2. 현역 시절3. 지도자 생활4. 기타

1. 개요

前 프로야구 선수로 킨테츠 버팔로즈프랜차이즈 스타 포수였다.

오사카 킨테츠 버팔로즈, 홋카이도 닛폰햄 파이터즈, 도호쿠 라쿠텐 골든이글스 감독. 그리고 오사카 킨테츠 버팔로즈 최후의 감독이기도 하다.

1983년까지의 본명의 한자 표기는 梨田昌崇였으며, 1984년에 현재의 표기인 梨田昌孝로 개명했다.

2. 현역 시절

시마네 현립 하마다 고등학교 시절인 3학년 때 춘계·하계 고시엔 대회에 연속으로 출전(제43회 선발 대회, 제53회 선수권 대회)했지만 모두 1차전에서 패했다. 그 뒤 1971년 드래프트 2순위로 킨테츠 버팔로즈에 입단했다.

입단 2년차인 1973년부터 1군 포수진 자리를 꿰차게 되었고, 이후 통산 .391에 5할을 2차례 기록할 정도의 뛰어난 도루저지율을 바탕으로 한 뛰어난 수비와 통산 113홈런을 기록한 나름의 장타력을 앞세워 주전포수로 활약하며 공수겸장의 포수로 인정받았다. 니시모토 유키오 감독의 지휘 아래 상승기에 있던 킨테츠의 주축 선수로서 스즈키 케이시 등과 함께 1979년 일본시리즈, 1980년 일본시리즈와 같은 큰 무대에서 뛰기도 했다.

전성기 땐 자신보다 1년 늦게 입단한 팀메이트 아리타 슈조와 주전포수 자리를 두고 동료이자 라이벌 관계를 형성하면서 아리나시 콤비라 불리기도 했는데, 아리타 역시 나시다처럼 통산 도루저지율 .340에 128홈런을 친 공수 모두 출중했던 선수였기 때문에 당시 다른 구단으로부터 "킨테츠에는 주전 포수가 두 명 있다."라는 부러움을 받았을 정도였다. 이 둘은 80년대 중반까지 함께 주전 포수로써 경쟁하며 활약을 이어갔지만 결국 아리타가 전담 포수로 자주 배터리를 짰던 스즈키 케이시가 은퇴함과 동시에 경쟁에서 밀려 1986년 요미우리 자이언츠로 트레이드되며 나시다가 최종적으로 경쟁에서 이기게 되었다.

다만 나시다도 직후 야마시타 카즈히코, 후루쿠보 켄지, 미츠야마 히데카즈 등의 젊은 포수 유망주들의 대두에 노쇠화까지 겹치며 백업으로 밀려났고, 결국 1988년을 끝으로 은퇴를 선언하며 킨테츠 버팔로즈프랜차이즈 스타로써 선수 커리어에 종지부를 찍었다.
파일:external/stat.ameba.jp/t02200165_0640048011557988784.jpg
현역 마지막 시합은 킨테츠의 역전 우승이 걸려있던[4] 1988년 10월 19일 더블헤더였는데, 1차전 때 9회 초 3:3 동점의 2사 2루 상황에서 대타로 나와 결승 적시타를 쳤고 이것이 마지막 타석이자 마지막 안타가 되었다. 여기서 안타를 치지 못하면 무승부 이하가 되어 그대로 팀의 우승이 좌절되었는데, 자신의 마지막 타석에서 극적인 적시타로 팀의 우승 가능성을 살린 것. 그러나 우승여부가 결정되는 2차전에서 요시이 마사토아와노 히데유키한블두를 시전한 데다 상대팀 롯데 오리온즈가 판정 항의로 시간을 끄는 바람에 결국 4시간이 지나면 지난 시점에서의 이닝까지 진행한다는 규정으로 인해 경기는 연장 10회 무승부로 끝나며 킨테츠는 우승에 실패했고, 그렇게 현역 마지막 경기를 아쉽게 끝마치며 선수생활을 마무리지었다.[5]

골든글러브 4회, 베스트나인 3회 수상을 기록했으며 1979년 기록한 도루저지율 .5362(32허용/37저지)퍼시픽리그 단일 시즌 최고 기록이다. 당시 함께 아리나시 콤비를 이뤘던 아리타 슈조가 1976년 기록한 도루저지율 .5360(45허용/52저지)을 2모 차이로 제치고 리그 신기록을 경신했다.

현역 시절엔 양팔을 구불구불하게 움직이는 폼인 일명 곤약 타법(コンニャク打法)으로도 유명했다.
파일:external/pbs.twimg.com/CLfmJi2UYAAn_xY.jpg
곤약 타법. 뭔가 부왘 같다

3. 지도자 생활

은퇴 후인 1989년 NHK에서 야구 해설위원이 되어 일하다가[6] 1993년 긴테츠 버팔로즈의 코치, 1996년 2군 감독을 거쳐 2000년 오사카 킨테츠 버팔로즈(1999년 연고지 오사카를 팀명에 도입)의 감독이 되었다.

파일:external/0db7e2b10147a85dfd104d559d3fe93c66157b283080c17a6bd0187124c7561f.jpg
오사카 킨테츠 버팔로즈의 최후의 감독.

감독 첫 해엔 전년도에 이어 2년 연속으로 퍼시픽 리그 최하위를 기록했으나, 이듬해인 2001년에 터피 로즈, 나카무라 노리히로 등이 포진한 막강타선의 폭발력과 선발진의 신예 이와쿠마 히사시의 분전으로 투수진의 집단 부진[7]을 땜질해가며 킨테츠의 4번째이자 마지막 리그 우승을 이루었다. 이 시즌 전에 키타가와 히로토시의 성장 가능성을 보고 한신 타이거스에서 데려왔는데, 키타가와는 그 유명한 리그 우승을 확정짓는 역전 끝내기 만루홈런을 기록하며 나시다의 선택에 제대로 보답했다. 그러나 일본시리즈에선 이시이 카즈히사, 다카쓰 신고 등의 투수진에게 강타자들이 꽁꽁 틀어막히면서 야쿠르트 스왈로즈에게 1승 4패로 패배하고 말았고, 후술하겠지만 이것이 킨테츠의 마지막 일본시리즈가 되면서 킨테츠는 끝내 55년간의 역사 동안 단 한 번도 일본시리즈 제패를 달성하지 못한 팀으로 남고 말았다.

그 뒤에도 감독직을 맡으며 2위-3위의 준수한 성적을 기록했으나, 2004년엔 초반부터 최하위로 추락하는 불안한 시작과 함께 하위권에 머물렀고 설상가상으로 시즌 도중 그동안의 막대한 적자를 감당하지 못한 모기업 킨키 일본 철도에 의해 팀이 오릭스 블루웨이브와 흡수합병하는 것이 결정되면서 생겨난 프로야구 재편문제와 이에 반발한 선수회의 파업 선언 등 내외적으로 진통에 시달리게 되었다. 이러한 시련 속에서도 이해부터 클라이맥스 시리즈와 유사한 방식으로 도입된 퍼시픽 리그 플레이오프 진출을 위해 마지막까지 분전했으나, 끝내 5위로 진출에 실패하며 그 해를 끝으로 킨테츠의 해체와 함께 감독직을 내려놓게 되었다.

그러나 나시다는 구단 역사의 마지막에 야구 역사상 불멸의 명언을 남겼다. 2004년 9월 27일, 시즌 최종전이자 킨테츠 버팔로즈 구단 역사상 마지막 경기를 치르기 전 날[8] 그는 선수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모두들 가슴을 펴고 플레이해라. 너희들이 달고 있는 등번호는, 모두 킨테츠 버팔로즈의 영구결번이다(みんな胸を張ってプレーしろ。お前たちが付けている背番号は、すべて近鉄バファローズの永久欠番だ).

비록 오사카 킨테츠 버팔로즈라는 팀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되지만 이 팀에서 마지막까지 뛰었던 선수들은 버팔로즈 최후의 선수로써 영원히 기억될 것이라는 의도에서 남긴 말로, 함께 해체의 아픔을 겪는 선수단과 팬들을 위로하는 말로써 야구 팬들에게 현재까지 유명한 명언으로 평가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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홋카이도 닛폰햄 파이터즈 감독 시절의 사진 (2010년)

시즌 종료 후엔 양 팀의 합병으로 탄생한 오릭스 버팔로즈의 수석 코치를 맡아달라는 요청을 받았으나 이를 거절한 채 그대로 야인이 되었고, 이후 다시 NHK 등에서 야구 해설가로 일하다가 2008년 홋카이도 닛폰햄 파이터즈 감독으로 취임했다. 닛폰햄 시절엔 4년 간 퍼시픽리그 3위-우승-4위-2위의 성적을 기록했고 2009년엔 시즌 도중 터진 팀 내 인플루엔자 감염이라는 악재 속에서도 팀을 퍼시픽리그 우승으로 이끌었으나, 일본시리즈에서 요미우리 자이언츠에게 2승 4패로 패하며 또 다시 고배를 마셨다.[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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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호쿠 라쿠텐 골든이글스 감독 시절의 사진 (2016년)

2011년을 끝으로 닛폰햄을 떠났고, 이후 또다시 야구 해설가 및 평론가로 일하다가 2015년 시즌의 성적 부진 책임을 지고 사임한 오쿠보 히로모토의 뒤를 이어 도호쿠 라쿠텐 골든이글스의 감독으로 부임하게 되었다. 라쿠텐이 킨테츠의 해산으로 인해 생기게 된 구단이란 점에서 어찌보면 구단 창단의 계기와 엮인 인물을 데려오게 된 것.[10]

부임 첫해에는 전임 감독인 오쿠보 히로모토가 말아먹은 팀을 추스리느라 5위에 그쳤다. 그러나 2년차에는 본인의 두번째 해 징크스를 재현이라도 하듯 시즌 초반부터 선두로 치고 나가면서 돌풍을 일으켰다. 한 때 승률 7할을 넘을 정도로 압도적 성적을 거두고 7월 말까지 선두자리를 유지하면서 도호쿠의 팬들에게 혹시나하는 기대를 가지게 했으나 시즌 초반 쌀쌀한 도호쿠 지역의 날씨를 고려해서 일정을 느슨하게 짰던 대가로 8월 이후의 과밀된 일정을 버티지 못하고 DTD를 시전하면서 3위로 추락했다. 그래도 우승 이후 3년동안 6-6-5를 찍었던 팀을 다시 포스트시즌으로 진출시켰으나 8월 이후의 DTD가 워낙 심했던 까닭에 지휘 능력에 의문을 품는 목소리들이 나오기 시작했고 심지어는 경질설까지 나오기도 했다. 이후 클라이맥스 시리즈에서 우승팀 후쿠오카 소프트뱅크 호크스를 상대로 분투했으나 끝내 패배하며 아쉽게 2017시즌을 끝냈다.

2018년에는 41경기까지 14승 26패를 기록하면서 퍼시픽리그 최하위를 벗어나지 못한 채 지난 시즌과는 너무나도 대비되는 행보를 보였다. 부임 이전부터 몇 년간 꾸준히 문제로 제기되었던 라쿠텐의 여러 가지 불안요소가 터졌다고 봐도 무방했을 정도로, 교류전에서도 퍼시픽리그의 다른 5팀이 상위권을 석권하는 동안 혼자만 최하위에 쳐져서 점점 격차가 벌어지는 모습을 보이다 6월 16일 한신 전에서 8회말까지 1대0으로 앞서고 있었으나 에이스 노리모토 다카히로를 무리하게 9회까지 끌고가다 역전패하면서 21승 41패로 승패마진이 -20까지 벌어졌다. 결국 이날 경기가 끝난 직후 라쿠텐 구단에 사임의사를 밝히며 팀을 떠나게 되면서[11] 결국 3번째로 감독을 맡은 팀에서도 일본시리즈 우승을 맛보지 못한 채 중도해임이란 씁쓸한 결말로 감독직을 끝내며 다시 야인으로 돌아가게 됐다.

퇴임 후 다시 2019년부터 NHK에서 야구 해설자를 역임하게 되었다.

4. 기타

  • 현역 시절엔 등번호 8번에 맞춰 에이트맨의 주제가를 응원가로 사용했다. 같은 등번호의 하라 타츠노리도 현역 초창기 시절 똑같이 에이트맨 주제가를 응원가로 썼었다.
  • 구단 OB 출신이 감독을 하면 팀이 막장화되거나 엄청난 흑역사를 기록하는 등의 기대에 못 미치는 모습을 보이는 징크스가 있는 한신 타이거스 팬들에게 가장 인기있는 감독후보이기도 했다. 킨테츠 소멸 후 해설가 생활을 하던 2000년대 후반 이후로 한신에서 감독 경질설만 나오면 가장 먼저 유력한 감독후보로 물망에 오르는 사람이 이 사람이었다. 포수 출신에 킨테츠와 닛폰햄의 두 팀을 리그 우승으로 이끈 실적과 지도력, 그리고 오사카에 본거지를 뒀던 간사이 지역 팀 출신인 점뿐만 아니라 무엇보다도 한신에 적을 둔 적이 없는 다른 팀 선수 출신이라는 점이 한신 팬들에게 가장 어필하는 요소였으나 끝내 나시다가 한신으로 오는 일 없이 현재까지 한신은 OB들이 계속해서 감독직을 이어받고 있다. 그리고 계속 우승을 못하는 중이다 그리고 드디어 우승했다
  • 2020년 3월 말에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 확진 판정을 받았는데, 중환자실에서 인공호흡기에 의존하고 있는 중증 상태였으나 다행히 호전되어 5월 20일 퇴원 후 자가격리를 거쳐 완치되었다.
  • 킨테츠에서 선수생활(1970~1983년), 1군 불펜/배터리코치(1993년~2004년)을 맡았던 송일수는 나시다와 아리타에게 밀려 내내 백업 포수 신세였다. 그러나 나시다 마사타카가 킨테츠 감독 시절 "투수 보는 안목은 이시야마(송일수) 코치가 최고" 라면서 송일수를 총애했고 투수 교체 등에서 송일수의 조언을 많이 귀담아 들었다고 한다.

[1] 1972~1983년까진 나시다 마사타카(梨田 昌崇) 란 이름을 사용. 발음은 같으나 한자가 다르다.[2] 팀명에 오사카가 붙은 건 1999년부터[3] 아래에 나오다시피 킨테츠 버팔로즈 최후의 감독이기도 하다.[4] 당시 더블헤더에서 킨테츠가 한 경기라도 무승부 이하로 놓칠 시엔 근소차로 1위를 지키던 세이부 라이온즈가 그대로 우승했다.[5] 참고로 9회말에 대수비로 들어왔고 타석이 돌아오지 않아서 타석은 1차전 9회 초의 타석이 마지막이었다.[6] 1989년 월드 시리즈를 중계하러 갔다가 그 때 갑자기 발생한 샌프란시스코 지진 때문에 졸지에 재난 취재 특파원이 된 일화도 있다. 우연일지 몰라도 감독 취임이나 퇴임한 해에 지진이 일어나는 징크스가 있었다.[7] 팀 방어율이 시즌 말까지 5점대에서 놀다가 시즌 막판 간신히 분전하며 겨우 4.98에 그쳤다. 2001년 당시 긴테츠 소속이었던 카도쿠라 켄도 8승 5패의 성적을 거뒀지만 6점대의 방어율을 기록하였다.[8] 공교롭게도 본인들을 흡수합병하게 될 오릭스 블루웨이브와의 야후 BB 스타디움 원정경기였다. 경기는 2:7로 패배했으며, 이 날 승리투수는 구대성이었다.[9] 일본시리즈 사상 초유의 더그아웃 시리즈가 열린 1981년 일본시리즈 이후 28년 만의 맞대결로, 닛폰햄 입장에선 당시 패배한 복수를 이룰 기회였으나 결국 그때와 똑같은 2승 4패로 패했다. 이 두 팀은 2012년 일본시리즈에서 다시 한 번 맞붙어 여기서도 요미우리가 이겼다.[10] 실제로 라쿠텐 감독으로의 취임이 결정되고 나서 한 인터뷰에서 "킨테츠 소멸 이후 라쿠텐을 킨테츠의 후신처럼 생각해 왔다"고 밝혔다. 다만 감독 취임 전 오릭스 버팔로즈에서 개최한 킨테츠 OB 행사에 참석한 전적도 있어서 이 발언은 립서비스가 어느 정도 섞여 있다고 봐야 할 듯.[11] 사임 직후 인터뷰에 의하면 승패마진 -20을 마지노선으로 생각하고 있었다고 한다.[12] 나카하타는 엄밀히는 1954년생이지만 빠른 생일이라 사실상 53년생으로 간주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