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9-23 13:33:06

대한민국 호국군

  • 한자: 護國軍

1. 개요2. 역사3. 운영4. 성격5. 조직 편성6. 간부 충원 방법7. 해체8. 구성9. 여담10. 같이 보기

1. 개요

1948년 11월 20일부터 1949년 8월 31일까지 존재했던 대한민국 국군예비군 제도이다.

2. 역사

1948년 11월 20일까지 대한민국 육군 정규군 창설이후에도 1949년이 되기 전까지는 지원병제를 실시하고 있었기 때문에, 예비병력 확보의 차원에서 조직되었다. 이는 국군조직법(법률 제9호) 제 12조에 근거하여 육군 총사령부[1] 예하 호국군무실[2]을 기원으로 한다. 세부규정은 1949년 1월 20일 공포한 호국군 병역에 관한 임시조치령(대통령령 제52호)으로 1949년 8월 31일부로 해체와 함께, 대한민국 국군에 합쳐지며 호국병으로 전환된 것으로 보인다. 그 후 한국 전쟁 발발 이후에, 정규군과 완전히 통합되었다. 하지만, 이후 징병제가 본격적으로 시행되기 전까지 호국군을 대신하여 민병 조직으로서 청년방위대를 창설했다.

3. 운영

1948년 조선경비대대한민국 육군으로 정규군 창설한 뒤에도 한국군은 지원병제를 유지했다. 인원 제한이나 장비 부족 등이 이유였다. 그 때문에 현역 대신 예비역 부대를 창설했다. 호국군은 대한민국 육군본부가 생기기 전에 최상급 기관이었던 육군총사령부 예하의 호국군무실(護國軍務室)에서 담당했다. 형태는 주방위군이나 일본의 즉응예비자위관에 가까웠다.

1949년 3월에는 육군총사령관을 지낸 송호성[3]이 호국군사령관이 되었다. 1949년 8월 31일에 해체되어 정규군과 통합되었다. 대신 민병대청년방위대가 일종의 예비군 역할을 했다.[4]

호국군은 시,군,면단위로 중대, 대대를 편성하고 그 조직을 현역에 준하는 편제 즉 3,4,4,4편제(연대 예하 3개 대대, 대대 예하 4개 중대, 중대 예하 4개 소대, 소대 예하 4개 분대)로 편성되었다. 사병들은 [병역임시조치령]에 따라 본인의 지원에 의해서 신검을 받은 후 합격자 중에서 본인의 희망에 따라 현역으로 갈 것이냐 호국군로 갈 것이냐를 결정 했다. 하지만 예비군이라고 하더라도 연대와 대대 내에 인사 정보 작전 의무 수송 군수 심지어는 특별 참모까지 있을 정도로 사실상 현역에 준하는 편제였고 연대장과 대대장은 주로 군사 경력자들로 임명되었다.

4. 성격

위에 기술했듯이 그 당시만해도 대한민국 국군은 지원병제였기 때문에 처음부터 예비역인 호국군으로 입대가 가능했다. 따라서 오늘날의 예비군과는 달리 미군예비역 제도와 유사한 부대였다.[5] 그러나 1949년 8월부터 서서히 해체에 들어가는 단계였지만 1950년 한국 전쟁이 터지면서 결국 1년만에 역사속으로 사라져버렸다. 군대와 사회를 왕래한다는 점에서 어찌보면 방위병의 아버지뻘, 상근예비역의 할아버지뻘 되는 병역제도. 다만 이쪽은 징병제로 호국군은 평상시에는 사회생활을 하다가 특정 기간에 소집되어 일정 기간동안 훈련을 받는 제도였다. 당시 재정이 열악했기 때문에 호국군을 무장시킬 무기도 충분하지 않아서 죽창으로 무장시킨 사진들을 볼 수가 있다. 만일 대한민국 국군모병제가 된다면 상근예비역 제도를 호국군으로 다시 되돌려놓을 것으로 추측된다. 호국군 창설 이전에도 대동청년단, 대한청년단, 서북청년단과 같은 일종의 준군사조직이 활동했었는데 이를 정규군화 시킨것이라는 평가도 있다.

5. 조직 편성

기본적으로 육군 정규군을 보조하는 역할로서, 전투부대와 특수부대로 나뉘었고, 필요에 따라서 정규군(현역)으로 편입할 수 있었다. 장병들은 예비역 신분으로 본인 거주지에 주둔하는 연대에 소속되어 생업에 종사하며 필요한 훈련을 받았다. 이는 미합중국군의 주방위군과 비슷하다.

호국군의 창설과 더불어서 1948년 11월 20일에 육군본부에는 호국군 군무실(초대 실장 신응균 중령)이 설치되고 이후에 이 군무실은 호군국으로 확대 개편된다. 이와 동시에 현역 10개 연대 예하에 호국군 고무부를 두어 예비군 편성에 착수 하였는데 이를 통해서 1948년 말까지 호국군의 편성은 거의 완료가 되고, 1949년 1월 7일 4개 여단장을 그해 1월 1일부로 졸업한 육사 제8기 특별 1반 출신으로 임명하였다.

1949년 1월 10일 현재 호국군 제101(서울), 102(대전), 103(부산), 106(청주) 여단 등 4개 여단, 10개 연대를 창설하였다. 4월 1일 육군본부 호국군은 육군총참모장의 직할 호국군사령부로 개편되어 완전한 독립예비군이 되었다. 초대사령관은 송호성 준장이었다. 1949년 4월 22일 제105여단이 창설되었고, 7월 16일 2개여단(107·108여단), 8개 연대가 증설되어 총 7개여단, 18개 연대로 증편되었다.

부대 편성이 완료되자 육본은 호국군무실을 호군국으로 승격시키고 49년 3월4일에는 호국군간부훈련소를 이태원에 설치했다. 그러다가 나중에는 호군국을 없애버리고 육군총참모총장 직속에 호국군 사령부를 설치한다. 이와 동시에 7월 16일 호국군간부훈련소는 호국군사관학교로 개칭된다.

6. 간부 충원 방법

정규군 장교와 비슷하게 특별임관과 일반임관으로 나뉘었다. 간부후보생은 대대장급 60세, 중대장급 50세, 소대장급 40세의 연령 상한을 정해 놓고 모집하였다. 선발자는 현역 정규군 연대에서 기본 군사 훈련을 마친 후, 호국군사관학교에서 6주간의 교육을 마친 후 장교로 임관했다. 이후, 1949년 3월 4일 호국군간부훈련소를 육본 직할로 이태원에 설치해 4월 1일 육군 호국군간부학교로, 다시 7월 10일 육군 호국군사관학교로 개칭, 운영하다 호국군의 해체에 앞서 8월 15일 폐교했다. 졸업생은 4개 기 1080명을 배출해 이 가운데 640명이 현역 장교로 편입됐다. 이들 640명 중 1명이 대장까지 진급[6]했고, 이들의 임관 구분을 예비역에서 현역으로 편입했다고 해서 예현(豫現)[7]이라고 한다.

7. 해체

1949년 징병제로 전환하기로 결정되면서 모병제하에서의 예비군이었던 호국군은 해체가 결정된다. 후신은 청년방위대

호국군사령부는 49년 8월 6일 병력법의 공표와 함께 8월 31일 해체되어버린다. 호국군 사관학교도 동월 16일날 문을 닫는다. 호국군이 해체되기 시작하면서 각 연대본부 근무자들의 일부는 49년 9월 1일 창설되기 시작한 각도의 병사구사령부 기간요원으로 편입되고, 10월 17일까지 총 290명이 현역으로 전환 편입된다. 또 호국군 장교들은 1080명중 640명이 현역으로 편입된다. 참고로 호국군 출신으로 장군이 된 사람은 총 11명.

호국군사령부가 해체된 후에도 후신인 청년방위대의 편성이 늦어지면서 하부조직은 625까지 유지되었고 이 호국군출신들은 모두 정규군으로 동원되어서 초기전투에서 괴멸당한 국군을 재건하는데 큰 역할을 했다.길가는 성인남자를 납치하다시피 끌어오고 학도병까지 동원할 정도로 급박한 상황에서 기초훈련을 받았고 사격을 할 줄 아는 호국군 출신들은 가뭄의 단비와 같은 존재였다.

8. 구성

  • 호국군 사령부(초대 사령관 송호성 준장): 1949년 4월 1일 창설
    • 군수처, 교육처, 정보처, 인사처
    • 제101여단(서울): 1949년 1월 11일 창설
    • 제102여단(대전): 1949년 1월 11일 창설
    • 제103여단(부산): 1949년 1월 11일 창설
    • 제106여단(청주): 1949년 1월 11일 창설
    • 제105여단: 1949년 4월 22일 창설
    • 제107여단: 1949년 7월 16일 창설
    • 제108여단: 1949년 7월 16일 창설
      • 각 여단 예하 18개 연대

9. 여담

  • 10만의 정규군과 20만명의 예비군을 확보한다는 최초계획에 따라 호국군의 병력으로 총20만명을 목표로 삼았으나 해체때까지 5만명을 확보하는데 그쳤다.
  • 호국군의 편성은 국민들의 원성을 자아냈다. 개인자격의 응모라고 하였으나, 반 강제적 입대 강요가 있었고, 또한 기존에 강제적으로 기부 받던 경찰후원회비, 대한청년단 비에 더해 호국군 단비까지도 일반인들에게 강제 징수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 빨치산 토벌대장으로 유명한 차일혁이 호국군 제103연대 제2대대장으로 근무했었다.

10. 같이 보기



[1] 대한민국 육군본부의 전신[2] 초대 실장 신응균 소장[3] 한국광복군에서 지대장을 지낸 인물로 당시 참모장이범석과 사이가 좋지 않았다고. 이범석이 초대 국방장관이 되자 육사 훈화 연설 등에서 모욕을 당하기도 했다. 김구의 측근이었는데 김구가 암살당하자 급격히 몰락했고 전쟁 중에 납북되었다.[4] 예비군이 부활한 것은 1968년의 일이다.[5] 미군은 처음부터 현역이 아니라 예비군으로도 입대가 가능하다.[6] 박노영(예현 2차) 한미연합사 부사령관[7] 군사영어학교 출신은 군영, 육군사관학교 출신은 육사, 갑종장교갑종, 현지임관 장교들은 현임과 같은 방식으로 장교의 임관 구분을 2글자로 축약해서 표현하고는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