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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라트비아/역사 (Latvia/History) 문서는 라트비아(Latvia)의 역사에 대해 다루고 있다.8분만에 보는 라트비아의 역사.
2. 문전
신생대 제4기 플라이스토세 중기(Middle Pleistocene) 이오니아절(Ionian Stage) 빙하기(Ice Age/Glacial Period) ~ 홀로세 초기(Early Holocene)문전 시대는 문해 이전 시대이다.
라트비아에서의 빙하기는 약 만 사천 년 전에서 만 이천 년 전 사이에 끝났으며, 다른 북유럽 지역에서의 빙하기는 약 만 천 년 전 무렵에 비로서 거의 끝을 맺게 되어, 라트비아를 포함한 북유럽 지역들의 본격적인 역사가 첫발을 떼게 된다.
2.1. 석기
2.1.1. 구석기
~ 약 11,000년 전쯤구석기 시대(Paleolithic Age)인 약 만 이천 년 전에서 만 천 년 전 사이의 기간 동안에 최초의 인간 정착자들이 여기 이곳에 도착한 것으로 추정된다. 그들은 강들과 발트 얼음 호수(Baltic Ice Lake)의 기슭을 따라 진영을 차려 옮겨다니며 순록 무리를 쫓아다니던 사냥꾼들이었다.
발트 해(Baltic Sea)의 해안선에 나타는 것들의 지질학(Geology)에 의하면, 그들은 그 이후에 더 먼 내륙쪽에 이르렀다.
구석기 시대 후기(Late Paleolithic Age)인 약 만 이천 년 전의 초기의 석기 도구들이 오늘날의 라트비아 비제메(Vidzeme) 살라스필스(Salaspils) 근처에서 발견되었고, 그들은 쉬더리앤 문화(Swiderian Culture)에 속해 있었다.
이것은 그들이 다음 시대로의 본격적인 진입을 시작했다고 볼 수 있다.
2.1.2. 중석기
약 11,000년 전쯤 ~ 7,400년 전쯤중석기 시대(Meosolithic Age)인 약 만 천 년 전에서 칠천 사백 년 전쯤의 기간 동안에 수렵채집인들의 영구적인 정착지들이 형성되었다.
그들은 강가와 호수가들 기슭 근처에 움막을 짓고 사냥과 낚시를 했다.[1] 이들은 쿤다 문화(Kunda culture)로부터 비롯되어, 부싯돌(flint)과, 가지진 뿔(antler), 뼈, 나무 등의 재료로 무기와 도구들을 만들었다.
이것도 그들이 다음 시대로의 본격적인 진입을 시작했다고 볼 수 있다.
2.1.3. 신석기
약 7,000년 전쯤 ~ 5,500년 전쯤신석기 시대(Neolithic Age) 초기인 약 칠천 사백 년 전에서 삼천 팔백 년 전에 도자기 제작과 축산(animal husbandry), 농사의 개시가 두르러지고 있었다.
신석기 시대 중기(Middle Neolithic Age)인 약 육천 백 년 전에서 사천 구백 년 전 사이의 기간 동안에 지역 문화인 나르바 문화(Narva Culure)가 그 지역 안에서 발전했다. 이 시기의 사람들은 오늘날의 에스토니아인(Estonians)들과 핀란드인(Finns)에 가까운 친연 관계가 있는 리보니아인(Livonians)의 선조들인 핀-우그르계(Finno-Ugric)의 리브족(Livs)으로, 빗살무늬 토기 문화(Pit–Comb Ware Culture)에 속해 있었다.
신석기 시대 후기(Late Neolithic Age)가 시작할 무렵에 도착한 사람들은 매듭무늬 토기 문화(Corded Ware culture)에 속해 있었다. 그들은 약 오천 년 전부터 대부분의 라트비아 영토에 거주했던 라트비아인(Latvians)의 선조들인 레트족(Letts)이라 불리는 발트족(Balts)이었다.
또한, 그들은 지금까지도 원시 인도-유럽어족(Proto-Indo-European language)과 관련된 많은 것들을 보유하고 있는 유럽(Europe) 안에서 가장 오래된 어파인 원시 발트어파(Proto-Baltic languages)를 구사했다.
2.2. 금속
약 통시전[* 공통 시대 이전[B. C. E(Before Common Era).] 3,500년 ~ 통시후 1,200년 경=== ===
약 통시전
라트비아 지역에는 동기나 청동기 시대가 없었다.
그 이유는, 라트비아에는 광범위하고 다양한 장식구들을 만드는데 사용되는 구리(copper)나 주석(tin)의 절대량이 극히 부족하여 없다시피 했기 때문에 청동기(Bronze)는 외국인들로부터 미량이나마 거래되다시피 하였다.
2.2.1. 철기
약 5세기 ~철기 시대(Iron Age) 초기인 통시전 500년에서 통시후 1세기 동안에 철기 도구의 도입과 함께, 농업은 굉장히 향상되었고 주요한 경제적인 활동이 나타났다. 발트 부족들은 결국 쿠로니아족과 세미갈리아족, 라트갈레족, 셀로니아족으로 민족이 형성된 나타난 반면에, 핀-우그르계 민족들은 리보니아족과 에스토니아족, 벤드족이 되어 초창기적 계급 사회와 더불어 지역의 우두머리가 나타났다.
철기 시대 중기(Middle Iron Age)가 시작된 때인 통시후 사백 년에서 팔백 년 사이의 기간 동안에 지역 거주자들은 거리있는 개별적인 독자적인 민족적 정체성과 지역적인 정체성을 형성하기 시작했다.
통시후의 시대가 시작되었을 때, 오늘날의 라트비아로 알려진 영토는 유명한 무역 교차로가 되었다.
바랑기아인(Varangians)부터 그리스인(Greeks)까지 고대의 연대기에서 언급한 유명한 무역 노선은 스칸디나비아를 지나서 라트비아 영토를 거쳐 다우가바(Daugava)에서 고대 키예프 대공국(Kievan Rus')과 비잔티움 제국(Byzantine Empire)으로 이어져있었다.
고대의 발트족은 무역망에 활동적으로 동참했다.
유럽을 가로지르는 라트비아의 해안은 호박을 얻기 위한 장소로서 알려져있고 라트비아는 때때로 아직까지도 드진타르제메(Dzintarzeme)[(암베르랜드)(Amberland)]로 불리어진다.
중세 시대 속으로 이르기까지, 많은 지역들에서 호박은 무려 금보다도 더 가치있었고 귀중했다.
라트비아의 호박은 먼 고대의 그리스(Ancient Greece)와 로마 제국(Roman Empire)에도 알려져있었고, 앰버 로드[호박 길(Amber Road)]은 유럽의 남부로 호박의 수송 운송 이송을 위해 집중적으로 이용되었다.
벤델 시대(Vendel Period) 동안에 스칸디나비아 반도(Scandinavian Peninsula)의 서쪽에 있는 섬인 고틀란트(Gotland)로부터 왔다고 여겨지는 사람들에 의해 스칸디나비아인의 정착지인 그로비냐(Grobina)의 마을이 형성되었다.
약간 백여명 정도의 사람들이 이 식민지에 통시후 육백 오십 년에서 팔백 오십 년까지 존재했다.
다수의 연대기들은 쿠로니아족이 스웨덴 왕들에게 경의를 표했다고 언급한다.
(추가 예정)
3. 문후
홀로세 중기(Middle Holocene) ~(추가 예정)
3.1. 고대
3.2. 중세
중세 시대(Medieval period) 초기, 라트비아 지역의 사람들은 기독교화(Christianisation)에 맞서 저항했고 북방 십자군들의 공격 대상이 되었다.1201년, 라트비아의 수도인 리가(Riga)는 다우가바 부근에 독일인들에 의해 세워졌고, 리보니아 검의 형제기사단(Livonian Brothers of the Sword)에 의한 그 지역의 정복으로 교황청 체제(Papally-sanctioned) 안에서 전략적인 기지가 되었다.
리가는 발트 남부에서의 최초로 대도시가 되었고, 1282년, 한자동맹(Hanseatic League)에서 중요한 무역 중심지가 되었다.
3.3. 근대
16세기 ~ 20세기 초16세기, 테라 마리아나(Terra Mariana) 안에 발트의 독일 권세는 점차 다른 세력들에 의해 바뀌어갔다.
라트비아의 전략적인 지역이자 번영하는 무역 도시인 리가 때문에, 라트비아의 영토들은 빈번한 대립과 갈등의 중심지였고 대립 튜튼 기사단(Teutonic Order)과 폴란드-리투아니아 연합(Polish–Lithuanian Commonwealth), 스웨덴 제국(Sweden Empire), 러시아 제국(Russian Empire)으로 대표되는 네 개의 주요한 세력들이 정복했다.
1710년, 마지막 외세의 패권 시대가 시작했다.
대북방 전쟁(Great Northern War) 기간 동안에 리가와 오늘날의 라트비아 지역들은 스웨덴에서 러시아로 지배권이 넘어갔다.
러시아 지배 하에, 라트비아는 산업화의 전초기지였고 농노제의 폐지로, 19세기 말, 러시아 제국(Russian Empire)의 가장 발전된 지역들 중 하나가 되었었다.
사회적인 문제들이 증가하고 불만이 상승하여 리가 또한 1905년 러시아 혁명(Russian Revolution) 안에 주요한 임무를 한 의미를 야기했다.
1850년대, 최초로 라트비아의 국가적인 각성(First Latvian National Awakening)이 시작되었고, 계속해서 라트비아 독립 전쟁(Latvian War of Independence)으로 이년간의 투쟁이 제1차 세계 대전(World War I) 이후에 결실을 맺게 되어 마침내 라트비아는 주권을 얻어 독립하는데 성공하게 되었다.
1920년, 소련(Soviet)에 의해 독립을 인정받았다.
1921년, 국제적인 공동체(international Community)에 의해 독립을 인정받았다.
1922년, 라트비아의 헌법(Constitution of Latvia)이 채택되었다.
1934년 5월 15일, 정치적인 불안정과 대공황(Great Depression)의 영향들은 국무 총리 카를리스 울마니스(Kārlis Ulmanis)에 의한 쿠테타(Coup d'état)를 야기시켰다.
1940년 6월 ~ 7월, 라트비아는 소련 연방(Soviet Union)에 점령되었고 연방 안으로 병합되어 라트비아의 독립은 중단되었다.
1941년, 나치 독일(Nazi Germany)에 의해 침략 당하고 점령되었다.
1944 ~ 1945년, 라트비아는 소련 연방에 의해 재정복되었다.
3.4. 현대
20세기 중 ~1940년대 중반부터, 라트비아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Latvian Soviet Socialist Republic)은 소련 연방의 경제적인 지배에 종속되어졌고 사람들의 상당한 러시아화(Russification)가 보이게 되었다.
하지만, 라트비아의 문화와 인프라(infrastructures)는 살아남았고, 미하일 고르바초브(Mikhail Gorbachev) 하의 소련 자유화(Soviet liberalisation)의 시대 동안, 라트비아는 독립으로 향하는 길을 다시 한번 잡아, 결국엔 1991년 8월에 성공하여 그 다음 달에 러시아로부터 인정받았다.
이후로 독립을 회복한 뒤, 라트비아는 국제 연합(Uited Nations)의 구성원이 되었고, 북대서양 조약 기구(North Atlantic Treaty Organization)에 가입함은 물론 유럽 연합(Europe Union)에 동참하였다.
대불황(Great Recession) 시기 동안에 라트비아의 경제는 매우 고통을 받아, 2008년 라트비아 경제 위기(2008 Latvian financial crisis)를 야기했다.
악화되는 경제 정황들과 서유럽(Western Europe) 안에서의 더 나은 직업 기회들은 거대한 라트비아인의 이민을 야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