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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일보/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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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1920년 창간 ~ 1936년2. 1937년 ~ 1940년3. 1945년 광복 이후

1. 1920년 창간 ~ 1936년

파일:일본 제국 국기.svg일제강점기의 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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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9년에 일어난 3.1 운동에 놀란 일제는 조선의 통치 방식을 문화통치로 바꾸기로 했고 이 일환으로 민간 신문들을 허가하게 되었다. 민간 신문이 허가될 거라는 소문에 민족계 신문을 창간하려는 움직임이 일어났고 최두선[1]김성수에게 이런 움직임을 전하면서 민족계 신문 창간을 맡아달라는 요청을 했다. 당시 김성수는 중앙학교를 인수하여 운영하고 있던 중이었다. 최두선이 "학교도 급하지만 이것은 당장 급한 일이다. 또 마침 일본 관헌이 민간신문을 한두 개 허락한다니 이 틈에 애국진영, 민족진영에서 하나 해야 되지 않겠느냐"고 하자 김성수는 처음에는 "내가 신문에 생소하고, 그러자고 할 것 같으면 여러 가지 준비가 있어야 될 텐데 간단하지 않다."며 사양했다. 그러나 유근[2]이상협[3]도 창간을 권유하자 김성수는 마침내 이를 수락했다.

당시 조선총독부에는 10여건의 신문 창간 신청서가 접수되었다. 김성수는 정치적 역학 관계를 고려하여 일제가 우호적으로 생각하는 박영효를 사장으로 내세웠다. 유근이 "동아일보"라는 이름을 제안하여 그대로 정하고 1919년 10월 9일에 총독부에 신청서를 냈다. 그 후 김성수는 주식회사의 형태로 동아일보를 차리기로 결정하고 동아일보의 창간 취지를 설명하며 전국에서 주주 모집에 나섰다. 영어 명칭 역시 Dong-A Ilbo로 표기하기로 했는데, 자사명을 고유명사로 보았기 때문이기도 했고 조선어 발음을 반영해 표기함으로써 민족 정체성을 나타내기 위함도 있었다.[4]

1920년 1월 6일 총독부는 동아일보, 조선일보, 시사신문의 창간을 허가했다. 3.1 운동을 본 총독부는 조선인들의 표출 창구 없이 계속 틀어막기만 하다가는 언젠가 폭발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당시 조선총독이던 사이토 마코토는 동아일보 창간에 항의하는 일본인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동아일보는 조선민족의 뱃속에서 끓어오르는 가스를 배출하는 굴뚝이다. 가스는 배출하지 않으면 쌓이고 쌓여서 끝내는 폭발한다.
그리고 일제가 조선을 차별 없이 통치하고 있다고 국내외에 선전할 명분으로 삼을 의도도 있었다. 그리하여 총독부는 민족주의 진영의 신문으로서 동아일보 창간을 허가해 주는 한편 일제를 대변할 신문 2개(친일단체인 대정실업친목회의 조선일보,[5] 역시 친일단체인 국민협회의 시사신문) 이렇게 총 3개 신문의 창간을 허가한 것이었다.

원래는 3.1 운동 1주년에 맞춰 1920년 3월 1일에 창간할 계획이었으나, 사옥 마련과 설비 마련에 시간이 부족하여 1달 뒤인 4월 1일에 창간호를 냈다. 발행인 겸 편집인에 이상협, 인쇄인 이용문, 주식회사 발기인 대표 김성수, 사장 박영효, 편집감독 유근, 양기탁, 주간 장덕수, 편집국장 이상협, 영업국장 이운이었고 기자 16명이 있었다. "주지를 밝히노라"라는 제목으로 시작하는 창간사는 장덕수가 썼다.[6] 창간 당시는 석간 신문이었다.
파일:동아일보_창간호.jpg
창간호 1면
창간 당시 기자였던 김동수는 이렇게 회고했다.
동아일보에 모인 사람들은 그때 3.1 만세 직후여서 누구나 애국심에 불타고 있었다. 직장으로 동아일보를 택했다기보다 "남은 감옥에 가서 고생도 하는데 이렇게 편안히 앉아 문필보국을 한다. 그런데 뭐가 괴로우냐."는 심정이었던 것이다.

1920년 4월 11일부터 3차례에 걸쳐 "조선인의 교육용어를 일본어로 강제함을 폐지하라"는 사설을 실었다.

1920년 4월 15일에 평양에서 만세 소요가 일어났고 수십명이 체포당했다는 사실을 보도하여 총독부로부터 첫 발매 금지를 당했고 이후로도 계속해서 수시로 발매 금지와 기사 삭제를 당했다.

5월 8일에는 조선의 유림들이 중국만 빨아대는 사대주의에 빠져있다고 비판한 "가명인두상에 일봉"[7]이라는 논설(##)로 인해 유림들의 엄청난 반발을 사게 되어 해명 사설을 냈으나, 그래도 진정되지 않았다. 그래서 박영효가 사과문을 게재할 것을 지시했지만 사원 회의에서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박영효는 자리에만 앉아있는 이런 바지사장을 하고 있을 이유가 없다며 사장 자리에서 사임했다. 그 뒤 창업주 김성수가 2대 사장에 올랐다.

도쿄유학생들 모임인 학우회가 동아일보의 지원을 받아 전국을 순회하며 강연회를 하던 중 서울집회에서 "조선산업의 장래에 대하여"라는 강연을 하다가 '불온한 언사'라며 경찰에 의해 강연이 강제 중단되었다. 동아일보는 1920년 7월 22일자 신문에서 이를 비판했다가 다시 발매 금지를 당했다.

1920년 9월 24일 장덕수가 쓴 "제사 문제를 재론하노라"라는 사설에서 텐노의 상징인 삼종신기를 조롱했다는 이유로 첫번째 무기 정간을 당했다. 당시 제사 문제를 놓고 기독교계와 유학계에서 논쟁이 벌어졌는데 이 때 동아일보가 저 사설에서 조상을 기념하는 것과 우상숭배의 구별에 대해서 논하면서 "설령 사람의 형태를 본떠 만든 우상은 없을지라도 혹은 거울로, 혹은 주옥으로, 혹은 칼로, 그밖에 어떤 모양으로든 물건의 형태를 만들어 어떤 곳에 받들어 모신 뒤 '신이 여기에 있다', 혹은 '영혼이 여기에 있다'하며 이를 숭배하고 기도하는 것은 모두 우상숭배라 할 것이다."라는 내용을 썼는데 여기서 '거울', '주옥', '칼'이 바로 텐노의 삼종신기를 말하는 것이었다. 1921년 1월에 정간이 해제되었으나, 정간의 타격으로 인해 자금사정이 좋지 않아 바로 속간 하지 못하고 한달 뒤인 2월 21일에서야 속간했다.

1920년 10월에 일본군이 북간도 일대의 조선인 2200여 명을 무차별 학살했다는 소식을 듣고 장덕준이 룽징으로 가서 일본 영사관과 토벌군사령부에 대해 취재를 하다가 여관에서 11월 초에 행방불명됐다. 한국 언론사 최초의 순직 기자였다. 당시 여러 정황과 현지인, 가족 등의 증언에 의하면 일본군에 의해 사살된 것으로 추정된다.

1921년 4월 23일엔 대한독립단이 친일행각을 하는 조선인을 포살할 것을 선언했다는 보도를 했다가 압수당했다.

2차 주식 모집 후 1921년 9월에 동아일보는 비로소 주식회사가 되었다. 이후 김성수는 사장에서 이사진으로 물러나고 그의 절친한 동지인 송진우가 3대 사장에 올랐다.

1922년 2월 3일에는 "민립대학의 필요를 제창하노라"라는 사설을 실었다.

1923년 1월부터는 물산장려운동을 전폭적으로 지지했다. 2월에 경찰이 물산장려회의 시가행진을 금지하자 이를 비판하는 보도(#1 #2)를 했다가 발매 금지를 당했다.

1923년 1월 12일 김상옥이 종로경찰서에 폭탄을 투척하는 사건이 벌어졌으나, 총독부의 보도통제로 며칠지나서야 보도를 할 수 있었다. #1 #2

1923년 5월에는 1000호를 기념해 민족 지도자들에 대한 지지도를 알아보는 "현대인물 투표"를 기획했는데 총독부의 간섭으로 첫날만 시행하고 중단되었고 첫날 투표 결과는 총독부에게 검열되어 지워진 상태로 나갔다. 하얗게 검열된 모습 투표가 중단되었음을 알리는 기사 첫날 투표의 실제 결과는 이승만이 49표로 1위, 최린 25표, 안창호 22표, 최남선 18표, 서재필 17표, 이춘재 12표, 이상재 10표, 이동휘 7표, 여운형 강일성 각 6표, 이승훈 김원봉 윤상은 신흥우 각 4표, 김좌진 3표였다고 한다. #

1923년 6월 30일에는 여성의 지위 향상과 계몽을 위해 전조선여자정구대회라는 최초의 조선인 여자 스포츠 대회를 열었다.

1923년 9월 관동대학살이 일어나자 이상협이 급히 일본으로 가서 학살을 취재했으나 일본의 강력한 통제로 생존자 명단 정도 외에는 보도할 수가 없었다. 동아일보는 9월 8일에 이재조선인 구제회를 조직하여 일본에 보낼 구원금을 모금했는데 9월 10일 내보낸 "참화에 죽어가는 동포를 위하야"라는 기사에서 '다소 귀에 들리는 소식으로도 당국의 금지로 인하야 터지는 가슴을 부둥켜 안고 무릎 밑에 집어넣는 형편이라'는 부분에서 당시 상황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이 모금운동마저 총독부에 의해 금지되었다.

1924년 1월 2일 이광수가 쓴 "민족적 경륜"이라는 사설이 큰 논란을 일으켰다. 이 사설의 요지는 '정치적 결사, 산업적 결사, 교육적 결사를 조직해야 한다. 지금까지 해온 정치적 운동으로는 계속 비밀결사의 형태일 수밖에 없으며 새 활로를 모색하려면 조선 내에서 허용되는 합법적 테두리 내에서 정치 결사를 조직해야 장래 정치운동의 기초를 만들 수 있다'는 내용이었다. 이광수는 그 전해인 1923년 10월에 중국으로 가서 안창호를 만났는데 당시 안창호는 국내 산업개발과 교육 진흥을 강조하고 있었고 이 사설도 그런 노선에 영향을 받은 것이었다. 그러나 이 사설의 주장은 일제의 식민 통치를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것으로 여겨져 거센 공격을 받았다.

1924년 3월, 각파유지연맹이라는 단체가 한일병합은 합당하다는 선언문을 발표하자 동아일보는 이를 비판했다. 그 후 김성수송진우가 각파유지연맹의 이풍재에게 연락을 받고 식도원이라는 식당에서 그를 만났다. 그러자 옆방에 대기하던 각파유지연맹원들이 몰려와 총으로 위협하고 물건들을 깨부수고 구타하며 해당 기사를 취소하고 3000원을 내놓으라고 협박하였다. 결국 송진우는 "주의 주장은 반대하나 인신공격한 것은 온당하지 못한 줄로 증함"[8]이라는 쪽지를 적어 건네주었고 김성수는 3000원은 자기 개인 재산에서 주겠다고 얘기했다. 그 후 이 식도원 사건에 항의하기 위해 안재홍을 비롯한 수십 명이 언론탄압 반대 대규모 민중 집회를 조직했으나 총독부에 의해 강제 해산되었다. 총독부 기관지인 매일신보에서는 송진우가 건넨 그 쪽지를 서약서라고 대서특필하며 동아일보를 공격했다. 동아일보는 이런 행태를 강력하게 규탄하고 사건의 전말을 밝히는 기사를 1924년 4월 11일자로 내보냈다. 그러나 정작 동아일보 내부에서 내분이 일어났다. 이상협송진우를 비판하고 나선 것이다. 이상협은 결국 퇴사했고 여러 간부들도 이상협을 따라 회사를 떠났다. 송진우도 사장 자리에서 물러나고 1924년 5월 14일에 이승훈이 4대 사장에 올랐고 홍명희가 편집국장이 되었다.

1924년 10월부터는 다시 김성수가 사장을 맡았다.

1925년 1월에 한국 언론사 최초로 신춘문예를 열었다. 윤석중도 이 1회 동아일보 신춘문예 입상자였다.

1925년 3월 19일에 동아일보는 전국여자웅변대회를 열었다. 같은 해 허영숙이 신문사상 첫 여성 부장에 올랐다.

1926년 3월 5일에 소련 국제농민회본부가 조선 농민에게 보낸 "오늘 귀국민의 슬픈 기념일을 맞아 세계 40개국의 농민단체를 대표하여 가장 깊은 동지로의 동정을 농업국민인 조선동포에게 드린다. (중략) 자유를 위하여 죽은 이들에게 영광이 있을지어다. 감옥에 있는 여러 동지와 분투하는 여러 동지에게 형제적인 사랑의 문안을 드리노라."는 내용의 축전을 실었다가 두번째 무기 정간을 당했다.

1927년 1월 15일에 "조선이 조선의 것이 되길 바란다"는 간디의 메세지를 실으며 간디에 대해서도 간략히 소개했다.

1927년 10월에는 앞서 언급한 식도원 사건 이후 물러났었던 송진우가 다시 사장에 올랐다.

1928년 3월 16일에 동아일보는 창간 8주년인 4월 1일을 시작으로 전국적인 문맹 퇴치 운동을 할 것임을 발표했으나 총독부의 중단 명령으로 시작 3일전 무산되었다.

1929년 4월 2일에는 라빈드라나트 타고르가 전해준 "일찍이 아시아의 황금시기에 빛나던 등촉의 하나인 조선 그 등불 한번 다시 켜지는 날에 너는 동방의 밝은 빛이 되리라"라는 메세지를 실었다. 흔히 더 긴 버젼의 글이 타고르의 글이라며 알려져있는데 그건 누군가에 의해 짜깁기된 것이고 원문은 동아일보에 실린 저것이다. 다음날인 4월 3일에는 타고르의 영어 원문[9]실었다.

1930년 4월 1일 창간 10주년을 맞았다.
그 다음해인 1920년 4월 1일에 동아일보가 민주주의, 신문화 건설, 민중의 표현기관이라는 3대 강령을 걸고 탄생하얏다. 세계대전과 조선민족의식의 각성, 이것이 구체화된 것이 동아일보다. 그 때부터 조선과 조선인은 동아일보를 통하야 그 재생(再生) 과정의 의사와 감정을 표현하얏고 아울러 조선과 조선인의 역사를 기록하얏다. 동아일보의 10년은 곧 조선민족의 10년이엇다.
동아일보 1930년 4월 1일 창간 10주년 사설 중.#

1930년 4월 16일 미국 '네이션'지의 주필 빌라즈가 보내온 창간 10주년 기념 축사를 실었다가 불온하다는 이유로 삭제되고 세번째 무기 정간을 당했다. 해당 축사는 현 조선의 상황에서 동아일보의 사명이 중대하다는 것을 자신도 알고 있으며 조선민족과 그 사명을 위해서 분투하기 바란다는 요지의 내용이었다.

1931년부터 일어난 만주사변을 전후해 더욱 심해진 일제의 언론 탄압으로 동아일보를 포함한 민간 신문들은 극도로 위축되었고 동아일보는 문화운동 쪽으로 방향을 돌렸다.

그 일환으로 1931년 7월부터 제1회 브나로드 운동[10]을 시작으로 1933년까지 3회의 브나로드 운동을 전개했다. 또 지금은 없어진 박문사[11]에서 일제는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한 안중근을 단죄한다는 목적으로 안중근의 동생 안정근이 공개적으로 사과하는 쇼를 벌였는데 이 쇼를 일제강점기 유력 언론들 중에서 유일하게 보도하지 않았다.

1935년 ~ 1936년에 걸쳐 정인보의 "오천년간 조선의 얼"이 440회에 걸쳐 연재되었다. 이 연재는 후에 "조선사연구"라는 책으로 간행된다.

1936년 베를린 올림픽에서 손기정이 마라톤에서 금메달을 따자 이를 보도했는데 손기정의 유니폼에 달린 일장기를 흐릿하게 삭제한 사진을 내보냈다. 교과서에서도 등장하는 일장기 말소사건이다.[12] 사실 동아일보는 일장기를 지우고 보도하는 일이 기존에도 허다했다.[13] 1932 로스앤젤레스 올림픽에 출전한 김은배의 사진을 실을때도 일장기를 말소한 적이 있었는데 그땐 별 탈없이 넘어갔었지만 1936년 당시는 그 이전과는 상황이 달랐다. 당시 사장이던 송진우는 "성냥개비로 고루거각을 태워버렸다"고 말하며 역정을 냈다. 그리고 "새로 부임해 오는 미나미 총독이 폐간과 같은 극단적인 태도로 나오지는 않으리라고 생각하지만 일본 군벌은 미친 개여서 마음을 놓을 수 없다."고도 말했다. 결국 총독부는 8월 29일 동아일보에 대해 네번째 무기 정간을 시켰다.

이 사건으로 동아일보 10여명이 연행되었다. 일제는 현진건, 이길용, 신낙균, 서영호, 최승만에게 앞으로 언론기관에는 일절 참여하지 않는다는 서약서를 쓰게 하고 동아일보에서 쫓아냈다. 사장 송진우를 비롯하여 부사장 장덕수, 주필 김준연, 편집국장 설의식도 모두 쫓겨났다. 김성수는 갖고 있던 동아일보 주식을 모두 내놓아야 했다. 총독부 기록[14]에 의하면 "동아일보의 실권을 김성수송진우 일파의 수중에서 완전히 절리시켰다."고 나온다. 동아일보는 1945년 12월 복간된 후 이 때 쫓겨난 직원들 중 희망자들을 전원 복직시켰다.[15] 더 자세한 내용은 일장기 말소사건 문서를 참조바람.

2. 1937년 ~ 1940년

백관수를 사장에 앉히는 조건으로 1937년 6월 3일 속간된 이후부터 1940년 폐간전까지 이 3년간 동아일보는 완전히 총독부 영향력 하에 놓이게되면서 친일지로 전락하였다. 한겨레를 비롯한 진보진영에서는 동아일보 창간부터 이 시기 전까지 16년간의 민족지로서의 행적은 애써 숨긴채 이 기간의 행적만을 강조해 동아일보가 일제강점기 친일 어용지였다고 매도하곤 하지만 진영논리를 제거하고 보면 실제 동아일보는 오랜 기간 분명히 민족지였고 단지 중간에 이 3년의 짧은 암흑기를 거쳤다고 보는게 이성적이다.

속간 공지 중 원래는 "언론기관으로서의 공정한 사명을 기하려 하오니"라는 부분이 일제의 강요로 "대일본제국의 언론기관으로서 공정한 사명을 다하여 조선통치의 익찬을 기하려 하오니"라는 내용으로 변경되어 실렸다. 1938년 2월에는 총독부의 강요에 따라 동아일보를 포함한 모든 신문사는 조선춘추회라는 어용단체에 가입했다. 2월 10일부터는 기존에 제호 배경에 있던 한반도와 무궁화 그림도 삭제되었다. 남경함락을 축하한다는 삼하인단주식회사의 광고를 싣기도 했다.#
파일:external/www.mediaus.co.kr/7810_12751_4218.jpg
사옥에 내선일체, 보도보국이라는 간판이 걸려있기도 했다.
속간 이틀 후인 1937년 6월 5일에는 김일성보천보를 습격한 것을 보도했다.# 남북 교류가 활성화되며 분위기가 좋았던 1998년 당시 김병관 동아일보 사장이 김정일에게 보천보 전투를 호외보도한 기사를 새긴 금판을 기증하기도 했다.# 물론 이후에 남북 관계가 경색되자 언제 그랬냐는 듯 급정색했지만.

일제가 민족말살정책을 쓰기 시작하면서 1939년 11월 총독부는 동아일보의 폐간을 종용했다. 자진 폐간을 하면 총독부가 모든 직원들의 1년치 봉급을 지급하고 윤전기도 사들이겠다고 했다. 동아일보는 폐간을 거부하고 6개월을 버텼으나 총독부는 회계 부정을 구실로 경리부장을 구속하고 보성전문학교에 2만원을 빌려준 사실을 구실로 사장인 백관수와 고문 송진우, 상무 임정엽, 영업국장 국태일을 체포 구금했다. 그 후 임정엽의 명의로 폐간계가 제출되었고 1940년 8월 11일자 신문을 끝으로 동아일보는 폐간[16]되었다. 폐간 공지 폐간사

이 마지막 1940년 8월 11일자 신문에서 차마 직접적으로 외치지는 못하고 뜬금없이 포도송이 사진을 올려놓은 뒤 "포도송이처럼 서로 정답게 엉키라"라는 말로 간접적으로 민족의 단결을 외쳤다.# 복간된 뒤인 창간 30주년 1950년 4월 1일 신문에서 이를 언급하기도 했다.#

3. 1945년 광복 이후

1945년 12월 1일에 사장 송진우, 주간 설의식, 편집국장 고재욱 체재로 재정비하고 드디어 복간되었다. 중간사에서 창간 때의 "주지(主旨)를 선명(宣明)함"을 다시 쓰며 창간 정신을 되새겼다.#

1945년 12월 27일에 동아일보에서 신탁통치 오보사건이 일어났다.# 고의적인 오보는 아니었으나 이 사건은 한국 근현대사를 완전히 바꿔났다고 평가받을 정도로 대사건이었다. 이 사건으로 좌우익은 찬탁, 반탁으로 나뉘어져 싸우고 신탁통치 반대운동이 일어나게 하는 계기가 되었기 때문이다. 정작 당시 사장이었던 송진우는 이를 오보라고 시인하며 극렬한 반탁운동을 삼갈 것을 촉구하다가 반탁 세력에 의해 암살당했다. 그의 뒤를 이어 김성수가 다시 사장을 맡았다.

1950년대 이후로는 미군정과 6.25 전쟁을 거치며 살아남은 신문 중 경향신문과 함께 이승만 정권을 비판하는 대표적인 반(反)독재지로 자리매김한다.[17] 이 당시 동아일보는 '반(反)독재 민주화'를 내걸며 이승만 정권을 비판하게 되는데 특히 이러한 성향이 심화된 것은 김성수의 부통령 취임 이후였다. 6.25 전쟁 도중 국민방위군 사건에 실망한 이시영이 부통령을 사퇴하자, 국회에서 한국민주당을 비롯한 김성수에 우호적인 세력들이 제2대 부통령으로 김성수를 선출하였다. 하지만 이승만과 불편한 동거를 계속하던 김성수는 결정적으로 부산정치파동이 일어나자 반발하면서 부통령을 사퇴하고 반(反)이승만 노선을 걷게 된다. 당연히 동아일보도 이승만 독재를 공격하면서 김성수 계열이 주도한 민주당에 우호적이 된 것이다.

당시 동아일보에는 고바우 영감이라는 시사만화가 연재되고 있었는데 1958년 1월 23일자에 실린 만화경무대의 심기를 거슬리게했는지 정부는 '허위사실 유포'라는 혐의로 김성환 화백을 즉결심판에 처해 벌금을 먹였다. 이후 동아일보는 시사 풍자 만화를 가지고 허위보도라니 졸렬하다며 까는 기사들을 내보냈다.#1 #2 1960년 3월 대선을 앞두고 자유당의 부정선거 준비 실태를 보도하고 사설을 통해 부정선거와 정부를 규탄했다.# 그리고 시위대에 대한 경찰의 폭력적 진압을 보도하고, 정부가 마산 시위를 공산당의 소행으로 몰자 "마산 시민을 공산당으로 몰지 말라"는 사설을 냈다.

박정희 정권 때에는 이승만 정권보다 훨씬 더 교묘하고 치밀한 언론 탄압으로 인해 많은 어려움을 겪었는데 대표적인 탄압이 바로 1974년 동아일보 백지광고 사태였다. 김대중 납치사건 등에 반발한 동아일보 기자들이 자유언론실천선언을 내면서 투쟁하자 정권의 외압으로 동아일보 광고주들이 광고를 철회하기 시작했고, 이에 반발한 동아일보가 광고면을 아예 전면 백지로 내보내는 초유의 결단을 한 것. 당시 시민들이 기자들을 지지하며 동아일보에 개인 광고를 내주는 등 지원을 했으나 유신체제의 강력한 탄압으로 인해 결국 경영진이 굴복해 1975년에 일부 기자들이 해직되었다. 이때 해직된 기자들을 주축으로 13년 뒤인 1988년에 한겨레 신문이 창간되었다.

박정희가 암살당한 뒤 1980년 전두환의 신군부가 들어서고 정부는 또다시 언론 탄압과 통제에 나섰다. 5.18 민주화운동이 일어나자 동아일보는 다음날인 19일 이 사태에 대한 사설을 썼다. 당시는 계엄령 중이었기 때문에 모든 기사는 정권의 사전 검열을 거쳐야 했고 이 과정에서 사설의 중간중간이 뭉터기로 잘려나갔다. 이런식으로 잘려나간 사설을 싣는건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 생각한 동아일보는 항의의 의미로 19일부터 23일까지 아예 사설 없이 신문을 발행했다. 또한 언론통폐합으로 동아방송을 빼앗기기도 했다. 외압과는 관련 없지만 서울 지하철 1호선을 건설하면서 광화문 사옥이 헐릴 위기에 처하기도 했다.[18]

사진부의 이중현 기자가 1983년 10월 9일 미얀마에서 일어난 아웅산 묘소 폭탄 테러로 순직했다. 이 사건에서 유일하게 정부 인사가 아닌 민간인으로 순직한 한국인이다. 참고로 1966년 11월에는 베트남전을 종군 취재하던 백광남 기자가 월남 민간인 삼륜차와 충돌하여 순직한 바 있다. 베트남전에서 순직한 유일한 한국인 기자다. 사건 당시 백광남 기자는 화랑무공훈장을, 이중현 기자는 국민훈장동백장을 받고 두 기자 모두 국립묘지에 안장되었다.

1987년 1월 14일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이 일어났다. 경찰의 치안본부장이 기자회견을 열고 "책상을 탁치니 억하고 쓰러졌다"는 그 유명한 발언을 하였다. 동아일보는 1월 16일부터 부검의 오연상과 박종철의 삼촌인 박월길 등의 증언을 상세히 보도하며 단순 사망이 아님을 피력했다.#1 #2 그리고 1월 17일에는 김중배의 '하늘이여 땅이여 사람들이여'라는 칼럼을 실었다. 그리고 1월 19일에는 "물고문으로 질식사"를 1면 탑기사로 실으며 대서특필했다. 당시 상황에 대한 박종철 형의 인터뷰. 당시 이런 기사들을 보고 동아일보로 많은 시민들의 격려 전화가 왔다고 한다. 특히 동아일보의 이 보도는 6월 항쟁을 촉발한 결정적인 보도였다.

그 후 1987년 5월 18일 김승훈 신부가 명동성당에서 박종철 사건은 조작되었다고 주장했다. 이 사실은 일부 언론에서 '사제단이 이러이러하다고 주장했다'는 정도의 단편적인 보도만 나오고 제대로 보도되지 않다가 5월 22일 동아일보에서 경찰의 사건 은폐와 가담자 축소 사실의 구체적인 내용을 처음으로 대서특필하고 이후에도 관련 후속 보도를 이어나갔다. 이 보도들로 동아일보 취재팀[19]은 1987년에 한국기자상을 받았고 1988년에도 한국기자상[20]을 받았다.

1993년 4월 1일 완전 조간 발행으로 전환되었다.

1994년부터는 CTS를 도입하였다. 이 해 1월 1일자 신년호의 별쇄(別刷)를 CTS로 제작하기 시작하여 차츰 CTS 제작 지면을 늘려오다 창간 74주년 기념호인 이 해 4월 1일자를 시작으로 전지면을 CTS로 제작했다.

1998년 1월 1일자부터는 전지면을 가로쓰기로 제작했다.

동아일보는 원래는 김대중과 민주당의 주요 지지언론이었으나 2001년 김대중 정부의 세무조사 때 당시 동아일보 회장의 부인이 조사 과정에서 모욕감에 자살하는 사건이 생기면서 당시 여당인 새천년민주당과 관계가 완전히 틀어졌다.

이명박 정부 때는 동아일보 출신인 이동관이 청와대 홍보수석으로 들어가기도 했다. 박근혜 정부 때는 최순실 게이트와 탄핵 정국에서 그나마 채널A가 단독 보도를 많이 하며 체면치레를 했다. 문재인 정부 들어서는 탈북자 출신 주성하 기자가 독자 브랜드 구축에 성공했으며, 김순덕 대(大)기자는 반(反)문재인 정부 스탠스를 강고히 유지하면서 도널드 트럼프의 북미협상을 적극 반대하며 조 바이든을 일관되게 지지하는(!) 다소 특이한 스탠스를 견지했다.

2020년 4월 1일 창간 100주년을 맞이하였다.

2021년 8월 17일 추계 개편으로 외국어바둑 코너, 주식시세표 게재가 종료되었다.# 편성표는 OTT소개 코너를 신설하여 개편했다.#


[1] 독립운동가. 최남선의 동생.[2] 독립운동가. 한때 황성신문 사장이기도 했다.[3] 매일신보에서 일한 적이 있는 언론인이다. 이 당시에는 투옥된 최남선의 신문관에서 일하고 있었다.[4] 한동안은 외국인의 이해를 돕기 위해 Oriental Daily라는 의미 해설을 병기하기도 했으며, 이는 1946년까지 지속되었다.[5] 그러나 일제의 창간 의도와는 다르게 조선일보도 일선기자들의 항일 논조의 보도들로 인해 창간 직후부터 여러 차례 압수와 정간을 당했다.[6] 장덕수는 원래 독립운동을 했으나 일제강점기 말부터 친일로 변절한다.[7] '명나라 사람 행세를 하는 유림의 머리에 몽둥이 한 대'라는 뜻이다.[8] 니네가 했던 주장에는 반대하는데 니들을 인신공격한건 온당하지 못했다.[9] In the golden age of Asia Korea was one of its lamp-bearers, and that lamp is waiting to be lighted once again for the illumination in the East[10] 브나로드란 '민중 속으로' 정도의 뜻을 가진 러시아어다. narod는 영어로 치면 people정도의 의미로, 현 러시아의 유명 웹호스팅 서비스인 나로드 러시아(http://narod.ru)의 이름이기도 하다.[11] 博文寺. 현재 장충동 서울신라호텔 면세점 부지[12] 일각에서 여운형조선중앙일보가 먼저 했다고 주장하는 경우가 있으나 실제로는 동아일보가 먼저 한 것이 맞다. 일장기 말소 사건의 진실은?[13] 당시 동아일보 기자였던 이길용은 1948년 발행된 수기에서 이렇게 말했다. "지방이건 서울이건 신문지에 게재해야 할 무슨 건물의 낙성식이니, 무슨 공사의 준공식이니, 면소니 군청이니 또는 주재소니 등등의 사진에는 반드시 일장기를 정면에 교차해 다는데 이것을 지우고 싣기는 부지기수였다.", "세상이 알기는 백림(베를린) 올림픽 마라톤의 일장기 말살사건이 이길용의 짓으로 꾸며진 것만 알고 있다. 그러나 사내의 사시(社是)라고 할까. 전통이라고 할까. 방침이 일장기를 되도록은 아니 실었다. 우리는 도무지 싣지 않을 속셈이었던 것이다. 이것은 (총독부에서 일본 본토를 가리킬 때 쓰도록 강요한) 내지(內地)라는 글을 쓰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였다."#[14] 朝保秘 제1100호 동아일보 발행정지처분의 해제에 이르는 경과에 관한 건(1937년 6월 11일)[15] 이길용, 백운선, 설의식, 장덕수, 김준연, 임병철. 현진건은 1937년 6월 속간 때 복직.[16] 이 때문에 바로 9일 뒤에 일어나는 트로츠키 암살 사건은 다룰 수 없었고, 이는 뉴스 라이브러리로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17] 당시 경향신문은 가톨릭 계열이었다.[18] 그래서 나온 것이 그 유명한 종각 드리프트. 만약 원안대로 추진했으면 아예 철거되어 몇 년씩 정간당하는 사태가 생겼을 것이다. 당시 윤전기가 진동에 약했는데 지하철을 그대로 지으면 윤전기가 문제가 생길 수 있었다. 아무리 당시 정권이 저항을 용납하지 않았다고 해도, 이건 충분한 언론탄압으로 비춰질 수 있기 때문이었다.[19] 김차웅, 윤상삼, 임채청, 황열헌, 황호택[20] 정동우, 황호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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