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롯데 자이언츠/1999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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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승: 준우승 | : 포스트시즌 진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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롯데 자이언츠 시즌별 성적
1998 시즌 1999 시즌 2000 시즌
롯데 자이언츠 1999년 페넌트레이스 월별 진행 결과
4월 5월 6월 7월 8월 9~10월 포스트시즌
롯데 자이언츠 1999 시즌 성적
순위 승률 1위와의 승차
2[1] / 4 75 5 52 0.591 1.0
파일:external/db.kookje.co.kr/20070404.25016185217i4.jpg
▲ 1999년 플레이오프 7차전, 한국시리즈 진출 확정 순간

1. 개요2. 시즌 전
2.1. 팀 분위기 및 전망
3. 페넌트레이스4. 4월5. 5월6. 6월7. 7월8. 8월9. 9~10월10. 포스트시즌11. 각종 기록12. 시즌 최종 마감, 총평
12.1. 정규시즌 전적12.2. 총평
13. 여담

1. 개요

롯데 자이언츠의 1999 시즌을 정리한 문서.

2. 시즌 전

2.1. 팀 분위기 및 전망

처음으로 양대리그제로 치러진 해당 시즌에서 롯데는 두산 베어스, 현대 유니콘스, 해태 타이거즈와 함께 드림리그로 편성되었다. 시즌 전 예상은 다소 암울했던 편. 이미 2년 연속으로 꼴찌를 한 데다 뚜렷한 전력 강화 요인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실제로 지난 시즌 도중 롯데는 프랜차이즈 스타 출신인 김용희 감독을 경질할 정도였으며, 투수코치였던 김명성이 감독대행을 맡아 팀을 잘 추스린 덕택에 정식 감독으로 승격된 상황. 기대에 못미친 투수 차명주를 내주고 포수 최기문을 영입해 온 것과, 전년도 꼴찌를 한 탓에 펠릭스 호세라는 용병을 뽑아온것과 공익근무에서 소집해제된 박현승 외에는 딱히 눈에 띄지 않았다.[2]

이 시즌 롯데의 주장은 박정태로 선임되었다.

3. 페넌트레이스

4.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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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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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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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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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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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9~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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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포스트시즌

드림리그 1위 두산 베어스와 매직리그 2위 한화 이글스, 매직리그 1위 삼성 라이온즈와 드림리그 2위 롯데 자이언츠가 포스트시즌에 진출해서 각각 7전 4선승제의 플레이오프를 치렀다.

10.1. 플레이오프

1999년 플레이오프 2경기
롯데 자이언츠 VS 삼성 라이온즈
<rowcolor=#ffffff> 경기 일시 경기장 원정 경기 결과 중계방송사
1차전 10월 12일 (화) 18:00 대구시민운동장 야구장 X 롯데 4 : 5 삼성 O KBS위성2TV
2차전 10월 13일 (수) 18:00 X 롯데 2 : 6 삼성 O
3차전 10월 15일 (금) 18:00 사직 야구장 X 삼성 2 : 10 롯데 O MBC
4차전 10월 16일 (토) 14:00 O 삼성 9 : 6 롯데 X KBS2
5차전 10월 17일 (일) 14:00 X 삼성 5 : 6 롯데 O -
6차전 10월 19일 (화) 18:00 대구시민운동장 야구장 O 롯데 6 : 5 삼성 X KBS위성2TV
7차전 10월 19일 (수) 18:00 O 롯데 6 : 5 삼성 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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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2. 한국시리즈

1999년 한국시리즈
한화 이글스 VS 롯데 자이언츠
<rowcolor=#ffffff> 경기 일시 경기장 원정 경기 결과 중계방송사
1차전 10월 22일 (금) 18:00 사직 야구장 O 한화 6 : 3 롯데 X MBC
2차전 10월 23일 (토) 14:00 O 한화 4 : 3 롯데 X KBS2
3차전 10월 25일 (월) 18:00 한밭종합운동장 야구장 O 롯데 3 : 2 한화 X SBS, iTV
4차전 10월 26일 (화) 18:00 X 롯데 1 : 2 한화 O MBC
5차전 10월 29일 (금) 18:00 서울종합운동장 야구장 O 한화 4 : 3 롯데 X KBS2
파일:상세 내용 아이콘.svg   자세한 내용은 1999년 한국시리즈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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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각종 기록

12. 시즌 최종 마감, 총평

12.1. 정규시즌 전적

  • 이 표에서, 상대전적이 절대열세, 압살, 압도, 절대우세인 팀은 굵게 표시한다.
  • 승률, 승패마진, 우열은 해당 팀과의 경기가 완전히 종료되었을 때 기재한다.(상대전적 동률시, 득실마진도 함께 기재.)

(10월 8일 경기종료 기준)
롯데 자이언츠 1999년 팀별 상대 전적
상대팀 상대전적 승률 우열 승패마진 비고 잔여경기
현대 15승 5패 0.750 절대우세 +10 경기 완료
LG 8승 10패 0.444 열세 -2 경기 완료
삼성 6승 1무 11패 0.352 열세 -5 경기 완료
두산 12승 1무 7패 0.631 우세 +5 경기 완료
해태 12승 8패 0.600 우세 +4 경기 완료
쌍방울 12승 2무 4패 0.750 절대우세 +8 경기 완료
한화 10승 1무 7패 0.588 우세 +3 경기 완료
총합 75승 5무 52패 0.591 +23 순위: 2, 승차: 1.0 경기 완료
  • 분류 기준
    • 남색은 압도(승률 ≥ .800)를 뜻한다.
    • 청색은 절대우세(.650 ≤ 승률<.800)를 뜻한다.
    • 하늘색은 우세(.550 ≤ 승률<.650)를 뜻한다.
    • 녹색은 백중세(.450 ≤ 승률<.550)를 뜻한다.
    • 오렌지색은 열세(.350≤승률<.450)를 뜻한다.
    • 적색은 절대열세(.200≤ 승률<.350)를 뜻한다.
    • 갈색은 압살(승률<.200)을 뜻한다.

드림리그 팀간의 경기는 승패마진 +23 중 19개를 벌 정도로 상당히 강했다. 두산에 12승 1무 7패, 현대에 15승 5패, 해태에 12승 8패를 기록했다. 그러나 매직리그 팀에겐 꽤 고전을 면치 못했다. 한화에 10승 1무 7패, 쌍방울에 12승 2무 4패를 기록했지만 삼성에 6승 1무 11패, LG에 8승 10패에 그쳤다. 특히 LG는 중요한 상황마다 롯데의 발목을 잡았는데 개막 6연승이 끊어진 것도 LG전, 5월초 마산에서 9회 연속 뒤집기로 역전패한 것도 LG전, 후반기 9연패의 시작도 사직 LG전, 드림리그 1위 확정을 무산시킨 것도 LG전이었다. 반면 두산은 드림리그 팀들을 상대로 승패마진 1에 그쳤으나 매직리그의 LG를 13승 5패, 쌍방울을 16승 1무 1패로 학살하며 승패마진을 벌었다. 잠실 이웃 두산에 무기력했던 LG는 두산 2중대라도 되듯 고비마다 롯데의 발목을 잡으니 더 얄미울수밖에..

12.2. 총평

2년 연속 꼴찌를 차지해 올해도 꼴찌를 할 것이라는 예상이 우세였다. 그러나 웬걸. 정작 시즌에 돌입하자마자 롯데는 개막전부터 6연승을 질주하며 승승장구했고, 리그 1위는 물론 8개구단 전체승률 1위를 질주하기 시작했다.

2년 연속 꼴찌에서 용병 하나 추가된 것 말고는 딱히 전력강화의 요인이 없었음에도 엄청난 성적이 난 것은 전력의 불안요소들이 모조리 상수로 터져준 탓. 특히 선발진이 굉장히 강력했는데, 지난 시즌부터 발동이 걸린 문동환이 확고부동한 1선발로 각성했다. 문동환의 99년 성적은 189이닝 17승 4패로 승률왕을 차지했으며 평균자책점 3.28에 sWAR 6.38로 리그 3위에 해당하는 [3] 엄청난 성적인데, 1999년이 유례없는 타고투저임을 감안하면 3.28이라는 ERA는 실로 대단한 것이며, 실제로 99년 투수들 중 문동환 보다 낮은 평균자책점을 기록한 투수는 정민태임창용밖에 없었다. 2선발 주형광도 190이닝을 투구하며 13승 12패, ERA 3.98에 sWAR 5.69[4]로 리그 6위의 기록을 세우며 강력한 원투펀치를 이뤘다. 게다가 삼성에서 영입한 이후 딱히 눈에 띄는 활약을 해주지 못했던 박석진이 이 시즌 각성하여 148이닝을 투구하며 11승 3패 2세이브에 ERA 3.58로 든든한 3선발로 맹활약했다.[5] 이 밖에도 중진급 투수로 올라선 염종석이 87이닝을 투구하며 준수한 성적으로 선발진에서 힘을 보탰고, 후반기부터는 입단후 늘 유망주에만 머물렀던 포크볼러 박보현이 팀의 5선발로 맹활약했으며, 무려 한국시리즈 1차전에 선발 등판했을 정도로 입지를 다졌다.

중간계투에선 대졸신인 정원욱이 전반기에 엄청난 활약을 해줬다. 처음 추격조로 몇 차례 등판을 하다가 공이 좋아 승리조로 뛰기 시작했는데 롯데가 이기는 경기마다 등판해서 좋은 공을 던져주며 위력을 뽐냈다. 시즌 초반 포스는 가히 신인왕감이었으나 당시 김명성 감독이 이례적일 정도로 정원욱을 마구잡이로 굴려대는 바람에, 당시 PC통신 야구동호회의 롯데팬들은 정원욱 그만좀 갈아넣으라고 김명성에 대한 원성이 자자했을 정도였다.[6] 다만 박동희 이후 수 년간 무주공산이었던 마무리 투수에 대한 문제는 해결하지 못했는데, 당초 마무리 투수감으로 뽑아온 용병 마이클 길포일이 제구력이 형편없다는 게 드러난 후 시즌 초반 일찌감치 퇴출된 탓. 그 탓에 시즌 초반엔 고정된 마무리가 없었으나 시즌 중반부터 근래 2년간 선발로 부진한 성적을 내고 있던 강상수에게 맡겼고, 강상수는 19세이브에 2점대 평균자책점을 기록하며 나름 준수한 모습을 보였다.

게다가 길포일이 퇴출되고 대체 용병으로 데려온 에밀리아노 기론마저 완벽하게 터져줬다. 호세의 말동무로 데려왔다는 우스개소리가 나올 정도로 구단으로서도 팬들로서도 기대하지 않은 영입이었으나, 기론은 당시로선 생소했던 서클 체인지업이라는 구질을 바탕으로 선발과 중간계투에서 기대 이상의 활약을 해줬다. 특히 포스트시즌에선 롯데의 에이스로 맹활약했다.[7]

타선은 1번부터 9번까지 그야말로 쉬어갈 데가 없는 막강 화력을 자랑했고, 이는 롯데가 선두를 질주하는데 있어서 가장 큰 원동력이었다. 우선 지난 2년간 부진한 성적으로 한물 갔다는 평을 듣던 김응국을 지명타자로만 기용하며 1번 타순을 맡겼는데 생각보다 효과가 좋았다. 수비 부담에서 해방되어 타격에만 집중했던 김응국은 .294의 타율과 141개의 안타로 공격의 첨병으로서의 역할을 준수하게 수행해주었다. [8] 특히 박정태, 펠릭스 호세, 마해영으로 이어진 3-4-5 클린업트리오는 가히 8개구단 최강의 화력을 자랑했다. 영원한 3할타자로 불렸던 박정태는 늘 그랬듯이 제 몫을 해줬고, 호세는 KBO 역사상 최고의 용병이라고 불릴 정도로 기록적인 시즌을 보냈으며, 그간 공갈포의 이미지가 강했던 마해영 또한 .372의 타율로 컨택에서 각성을 하며 타격왕을 차지하는 등 그야말로 이보다 더 좋을 수 없는 활약을 보여줬다. 이 클린업 트리오의 각 성적만 따로 살펴보면, 아래과 같은데

박정태: 타출장 0.329/0.409/0.452 11홈런 83타점 OPS 0.860 wRC+ 125.2 sWAR 4.37
호세 : 타출장 0.327/0.425/0.636 36홈런 122타점 OPS 1.061 wRC+ 164.4 sWAR 6.64
마해영: 타출장 0.372/0.442/0.672 35홈런 119타점 OPS 1.114 wRC+ 180.7 sWAR 7.18

99년이 아무리 극심한 타고투저라 해도 이 3/4/5번의 성적은 실로 엄청났으며, 롯데 역사상 이와 비견될 수 있는 클린업트리오는 2010년의 홍성흔, 이대호, 카림 가르시아 정도를 가져와야 할 정도로 엄청나게 강력했다.
비단 이뿐만 아니라, 조경환도 2할 8푼의 타율에 홈런을 19개 때려내며 wRC+ 116을 찍으며 톡톡히 활약해주었고, 최기문도 하위타선에서 공격력이 꽤 준수한 포수[9]로 좋은 모습을 보여주었다. 또한, 주전급들이 지칠 무렵인 후반기부터는 오랜 재활을 끝내고 복귀한 손민한과, 신인 임재철이 1군에 등록되어 팀에 활력을 불어넣어줬으며 두 선수 모두 한국시리즈 엔트리에 들 정도로 나름 소금같은 역할을 해 줬다.

팀 분위기에 있어서도 주장 박정태가 강력한 카리스마로 팀을 이끌어갔다. 대표적인 에피소드가 본인이 자진해서 유니폼의 양말을 무릎까지 끌어올리는 농군패션을 시작하면서 전 선수단에게 자신을 따르라고 지시했던 것. 그래서 이 당시 롯데 하이라이트를 찾아보면 용병과 일부 투수를 제외하면 선수들이 죄다 농군패션을 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당시 팀에는 박정태보다 선배인 선수들도 있었지만 어느 누구도 박정태의 말을 거역하지 못할 정도로 박정태의 팀내 위상과 카리스마는 후덜덜한 수준이었다. 박정태 본인으로서도 당시 신기록이자 현재도 단일시즌 기준으로는 최다인 31경기 연속안타를 기록하며 최고의 시즌을 보냈다. 특히 20경기 초반대에서 연속경기 안타 기록이 끝이 날 위기에 놓였을때도 후배들이 '정태형에게 한 타석 더 기회를 만들어주자'고 결의하고 타석에서 더욱 집중력을 발휘, 결국 9회에 박정태가 다시 한 번 타격할 수 있는 기회를 만들어주고 여기서 기어이 박정태가 안타를 쳐내 기록 연장을 할 수 있게끔 해 주는 등, 계속 1위를 질주하는 성적과 함께 좋은 팀 분위기임을 보여줬다.[10]

급기야 전반기 마지막 경기였던 당시 드림리그 2위 두산과의 더블헤더에서 2승을 싹슬이하며 두산과의 게임차를 6.5게임차로 벌렸고, 급기야 두산의 김인식 감독은 기자들과의 인터뷰에서 1위 롯데의 추격을 포기한다는 선언을 하기에 이른다. 그만큼 당시 롯데의 전력이 강하고 안정되어 있다는 반증.

좋은 팀 성적 탓에 다수의 선수가 올스타전에 선발되었으며, 박정태가 MVP를 차지해 2년 연속으로 미스터 올스타가 되었다. 현재도 2년 연속 수상은 박정태가 유일 무이.

그러나 승승장구하던 롯데가 후반기에 삐긋하기 시작하는데, 후반기 시작 후 얼마 뒤 사직 LG전 4연패를 시작으로 9연패의 수렁에 빠진다. 이 기간에 삼성전에서 이승엽의 프로야구 한시즌 최다 홈런을 허용하기도 했다. 전술했듯이 중간계투의 핵이었던 정원욱이 뻗어버렸고 투수진에 과부하가 걸리기 시작한 탓. 이 와중에 이승엽에게로부터 당시 한국프로야구 한시즌 최다 기록인 43호 홈런[11]을 얻어맞기도 했다. 9연패를 당했음에도 굳건하게 1위를 사수할 정도로 워낙 전반기에 많은 승수를 벌어놓긴 했지만, 후반기부터 힘을 낸 두산 베어스에 야금야금 따라잡히기 시작했다. 급기야 최약체 쌍방울전에서 스윕패를 당하며 1위자리를 내놓기도 했다. 그나마 박석진과 기론이 후반기에 유독 분전하며 버텨준 덕택에 다시 1위를 탈환하며 최종전 전까지 1위를 지켜나갔다. 그와 별개로 두산의 후반기 상승세가 굉장하기도 했다. 1위 추격을 포기한다는 선언은 훼이크였던 것이냐

10월 7일 131경기인 잠실 LG전에서 포스트시즌 실패가 확정된 LG에 4:5로 역전패하며 드림리그 1위 확정에 실패해 결국 시즌 마지막 경기인 132경기째를 10월 8일 두산 베어스와 잠실에서 드림리그 1위 겸 전체승률 1위 자리를 놓고 단두대매치를 벌였다. 131경기까지 치른 두 팀의 전적은 75승 51패 5무승부로 판박이처럼 똑같았다. 특히 롯데로서는 승리가 간절했는데 창단 이후 단 한번도 해보지 못한 정규리그 1위 자리도 그렇지만, 1위를 해야만 플레이오프에서 상대전적이 열세였던 삼성 라이온즈를 피할 수 있었기 때문.[12] 그러나 3:3으로 맞선 9회말 강혁에게 끝내기 안타를 맞고 패배. 결국 한 끗 차로 드림리그 2위의 성적을 받아들고 썩 내키지 않은 삼성과의 플레이오프를 치르게 되었다.

플레이오프에선 예상대로 4차전까지 삼성에 1승 3패로 몰리며 탈락 일보 직전까지 갔으나 5차전을 9회말 끝내기 역전 쓰리런 홈런으로 잡아낸데 힘입어, 6차전 7차전까지 모두 잡아내고 4승 3패로 한국시리즈에 진출했다. 비록 한국시리즈에서는 한화 이글스를 맞아 1승 4패에 그치며 준우승에 머물렀지만 플레이오프 때문에 선수단의 체력이 바닥난 채로 시리즈에 임했던지라 롯데로선 할 만큼 했다는 평가가 대부분이었고, 플레이오프 역사상 두고두고 회자될 명승부에서 승리를 쟁취했다는 것만으로도 유종의 미를 거둔 시즌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그리고 1999년은 2023년 현재까지도 롯데가 한국시리즈를 치러 본 가장 마지막 시즌으로 남아있으며, 2023년 롯데가 드디어 5월이 끝나는 시점에서도 승률 6할을 넘기며 승승장구하자, 99년 롯데가 언급될 정도로 롯데의 1999년은 비록 우승은 하지 못했지만 롯데 역사상 가장 강력했던 시즌 중 하나로 남아있다.

13. 여담

파일:external/cdn.mydaily.co.kr/201306261855562226_1.jpg
우승을 차지하지 못한 시즌 가운데선 롯데 팬들에게 가장 좋은 시즌[13]으로 남아있는 탓인지, 2013년 6월 26일 '응답하라 1999!'라는 테마로 당시 멤버들을 초청한 챔피언스 데이 행사를 가졌다.[14] 호세가 오랜만에 입국해서 시구를 해 많은 환호를 받았다. 이 시즌 기대에 못 미치는 성적과 화끈한 팀컬러의 실종으로 단 한 차례로 매진되지 않았던[15] 사직 야구장이 시즌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매진을 기록했다.

다만 IMF의 직격탄을 맞은 직후의 시즌이어서 그런지, 롯데구단 역사상 시즌 내내 1위를 질주했던 유일한 시즌이자 박정태의 연속경기안타 기록의 호재에도 불구하고 사직구장의 흥행은 기대에 못 미쳤다. 총 관중 77만명 수준으로 경기당 11,000명이 조금 넘는 수준. 심지어 플레이오프 3차전의 경우 무려 4년만의 가을야구 첫 홈경기임에도 불구하고 겨우 1만명이 넘는 관중들이 들어왔을 정도. 다만 플레이오프의 명승부 덕택인지 한국시리즈 1차전은 오랜만에 매진되었으며 2차전도 매진에 준하는 수준인 2만 8천명 수준이 들어왔다.[16]

여담으로 이 해, 부산 스포츠 팀들은 모두 준우승을 기록했다. 부산 기아 엔터프라이즈대전 현대 걸리버스에게 챔피언 결정전에서 패배했고, IMF로 해체되기 직전의 대우 로얄즈 역시 수원 삼성에게 패하면서 원조 준산이었던 셈이다.


[1] 드림리그 2위로 플레이오프에 직행했고, 한화 이글스에게 한국시리즈에서 패배하며 최종 순위도 동일하게 2위로 마무리했다.[2] 되려 팀의 선발진의 한 축이었던 박지철마저 부상으로 이 시즌 출장이 불가능한 상태였다.[3] kWAR은 5.11로 리그 4위[4] kWAR은 5.37로 리그 2위[5] 특히 박석진은 저 유명한 삼성과의 플레이오프에서 MVP에 등극했을 정도로 포스트시즌에서도 맹활약을 해 줬다.[6] 정원욱은 우려대로 결국 전반기를 마감할 시점에 허리 부상을 당하고 되고 그 이후 다시는 좋은 공을 던지지 못하고 몇년 후 은퇴하고 말았다. 짧은 감독경력이지만 덕장으로 소문난 김명성 감독의 유일한 흑역사라고 할 수 있는 선수.[7] 플레이오프와 한국시리즈를 거치며 위기상황에서 롱릴리프로 등판해 8경기 29.1이닝 평균자책점 0.92라는 어마어마한 성적을 기록했다. 당시 롯데 팬들은 기론의 고군분투에 눈물이 난다거나, 시리즈 결과와 상관없이 무조건 재계약해서 큰 돈을 안겨주자는 여론이 대세였다.[8] 다만, 전성기 시절의 기량만큼 터지지는 못했으며, 99년이 극심한 타고투저라 김응국의 wRC+는 스탯티즈 기준 105.8로, 평균보다 조금 잘한 정도에 불과했다[9] wRC+가 94로, 리그평균보다 약간 낮으며, 포수인걸 감안하면 충분히 제 역할을 다 해주었다[10] 다만 박정태 본인은 이당시 자신의 연속경기 안타 기록이 팀에 피해를 끼칠까봐 부담스러워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팀이 계속 1위를 유지하기 위해선 계속 이겨야 하는데 그보다 자신의 기록으로 포커스가 맞춰지고 있었기 때문. 심지어 김명성 감독마저 이당시 기록에 좀 더 신경쓰라는 얘기를 해 줬다고 했을 정도.[11] 그 당시 최다홈런 기록은 1998년 OB 베어스의 타이론 우즈가 세운 42개[12] 당시 플레이오프는 리그 1위팀이 상대리그 2위팀, 리그 1위팀은 반대로 상대리그 1위팀을 7전 4선승제로 상대해야 했다. 그래서 매직리그 1위인 삼성을 피하기 위해선 롯데가 드림리그 1위가 되어야 했다.[13] 사실 구단 역사상 가장 좋은 시즌이라 봐도 무방하다. 구단 역사상 유일하게 피타고리안 승률, 팀 WAR 총합이 1위였던 시즌이고 이 해 기록한 승률 0.591은 2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깨지지 않고 있다.[14] 돌아오지 않는 2루 주자는 애석하게도 초청되지 못했다.[15] 개막전에 만원 관중을 채우지 못했으며 어린이날 홈경기도 매진되지 않았다.[16] 당시 사직구장의 좌석수는 지금보다 더 많은 30,000석 이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