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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 잭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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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루이스 클라렌스 "루" 잭슨
Louis Clarence "Lou" Jackson
출생 1935년 7월 26일
루이지애나 주 리버턴
사망 1969년 5월 28일 (향년 33세)
국적 미국
체격 신장 174cm, 체중 80kg
포지션 외야수
투타 우투좌타
데뷔 1957년
소속팀 시카고 컵스(1958~1959)
볼티모어 오리올스(1964)
산케이 아톰즈/아톰즈[1](1966~1969)
1. 개요2. 현역 시절3. 사생활4. 사망5. 여담6. 관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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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미국 출신의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 일본프로야구 선수이다. 일본에서 플레이할 당시 팬들 사이에서 검은 번개, 갈색 탄환, 검은 아톰이라는 애칭으로 통했다.

2. 현역 시절

루이지애나 주 그램블링 주립대학을 졸업하고 1957년 시카고 컵스 마이너리그 팀에 입단하여 이듬해인 1958년 메이저리그로 승격했지만 첫 시즌 성적은 24경기 출장에 타율 0.171, 1홈런, 6타점으로 미미했고, 1959년 6경기에서 플레이한 뒤 마이너리그로 강등되었다. 1964년 볼티모어 오리올스 소속으로 메이저리그에 복귀했으나 4경기 출장에 그쳤다.

이후 1966년 산케이 아톰즈에 입단하면서 일본 프로야구에 발을 들였고, 체구는 작았지만 빠른 발과 강한 어깨를 강점으로 산케이의 주전 외야수 자리를 꿰차며 97경기 출장, 20홈런, 43타점, 11도루, 타율 0.254 라는 제법 괜찮은 성적을 마크했다. 다음 시즌인 1967년, 새로 입단한 파나마 출신의 강타자 데이브 로버츠[2]와 콤비를 이루어 허약한 아톰즈 타선을 강화하면서 맹활약을 보였고, 117경기에 출장하여 28홈런, 79타점, 13도루, 타율 0.296로 준수한 스탯을 세우면서 그 해 올스타전에 선발되기도 했다. 이듬해 1968년에는 115경기에 나와 20홈런에 59타점을 기록했으나 타율은 0.219로 급락했다.

잭슨은 당시 인종차별이 심각했던 미국에서 적지 않은 차별을 당했지만, 일본에서는 팀메이트나 팬들이 차별없는 애정과 관심을 보여주면서 잭슨은 특별한 부담 없이 그라운드를 누볐다고 한다.

여기까지만 보면 그냥 평범한 외국인 야구선수로 생각될수도 있다.

3. 사생활

그러나 평소 잭슨은 술을 굉장히 좋아하여 맥주샤워를 한다고 할 정도로 매일 마셨다. 더군다나 편식이 굉장히 심하여 좋아하는 음식만 골라먹고 싫어하는 것은 거들떠도 안 봤으며, 특히 처음 일본에 왔을 당시 팀 동료들에게 이끌려 간 이자카야에서 먹은 야키토리에 맛을 들이면서 잭슨은 스프링캠프 때 한 달 내내 다른 음식은 손도 안대고 맥주에 야키토리만 먹었다는 믿겨지지 않을 얘기도 전해지고 있다. 평소 친하게 지낸 동료 데이브 로버츠나 타카야마 타다카츠[3]는 "잭슨은 맥주를 안마시는 날이면 콜라닥터페퍼를 마시고 닭꼬치와 야키니쿠, 스테이크 같은 육류만 먹어댔다. 채소를 먹은 적은 한 번도 본 일이 없다"라고 그의 편식에 대해 입을 모아 증언하기도 했다.

게다가 일본에서 뛰는 것을 반대하는 아내를 미국에 남겨둔 채 일본으로 넘어온 잭슨이었지만 그 문제를 결국 해결하지 못하며 이혼까지 고려할 정도로 상황은 심각해졌고, 당시 두살배기인 사랑스러운 딸을 볼 수 없게 되면서 타국에서 외로움에 시달리던 잭슨은 더욱 더 술에 기대는 날이 늘어갔다. 이로 인하여 종종 전날의 숙취로 술냄새를 풍기며 타석에 들어서기도 했다.

거의 매일 술독에 빠져 편식만 일삼던 잭슨에게 아톰즈의 수뇌진은 눈쌀을 찌푸렸고,[4] 위에 설명한 대로 잭슨은 1967년 커리어 하이를 기록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퇴단까지 고려했지만 그를 대신할 만한 야수를 찾지 못하는 통에 마지못해 재계약했다고 한다.

4. 사망

일본 생활 4년차를 맞이한 1969년 3월 26일, 고라쿠엔 구장에서 열린 도에이 플라이어즈와의 시범경기에 출전한 잭슨은 이날 경기에서 3타수 무안타 1삼진에 그친 뒤 복통을 호소했고, 극심한 구토로 물도 못 마실 정도의 탈수 증세까지 나타난 잭슨의 상태가 심상치 않다고 판단한 아톰즈 프런트는 즉시 잭슨을 도쿄 도내 대학병원에 입원시켰다. 평소 80kg 정도이던 체중은 60kg 대로 급감해 있었고 피부도 윤기 하나없이 거칠어져 있을 정도로 쇠약해진 잭슨은 검사 결과 췌장염 진단을 받았다.[5]

평소 지나친 음주와 췌장염의 악화로 수술을 버텨낼 수 없는 몸 상태였던 잭슨은 한 달 뒤인 4월 26일에야 수술을 받고 투병했지만, 끝내 회복하지 못한 채 5월 28일 밤 0시 5분 경 췌장 괴사로 숨을 거두었다. 그 때 잭슨의 나이는 불과 33세였다.

잭슨의 장례식은 5월 28일 도쿄 도내의 교회에서 아톰즈 구단장으로 거행되었고 감독이던 벳쇼 다케히코가 "낙천적이던 루(잭슨), 멍청한 루..." 라는 내용의 조사(弔辞)를 읊자 조문객들은 모두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이날 구단 선수들과 코칭스태프, 프런트 모두 참석했음은 물론, 당시 한신 타이거스 소속이던 윌리 커클랜드[6]니시테츠 라이온즈칼 볼스, 전 한큐 브레이브스 출신 로베르토 바르본 등 외국인 선수들도 찾아와 잭슨의 명복을 빌었지만 정작 잭슨의 가족 중 장례식에 온 사람은 그의 장모님 뿐이었다. 장례식 후 잭슨의 유해는 요코타 공군기지를 거쳐 고향인 미국으로 옮겨졌다.

잭슨의 프로통산 성적은 메이저리그 3시즌 간 34게임 출장, 47타수 10안타, 1홈런, 7타점, 7득점, 타율 0.213, 일본 프로야구 3시즌 동안 329게임 출장, 1201타수 309안타, 68홈런, 181타점, 155득점, 타율 0.257 이다.

5. 여담

  • 일본 프로야구에서 현역 외국인 선수가 시즌 중 사망한 사례는 아직도 잭슨이 유일하다.
  • 살아생전 마지막으로 친 홈런은 1968년 9월 16일 진구 구장에서 열린 한신 타이거스와의 경기에서 날린 끝내기 만루홈런 이었다. 잭슨과 가장 친한 일본인 선수였던 다카야마 타다카츠는 그날 끝내기포를 쳐낸 잭슨에 대하여 "3시즌을 같이 뛰었지만 그다지 잘 웃는 편이 아니었다. 하지만 잭슨은 (홈런을 친)그 때만큼은 활짝 웃고 있었다. 그렇게 웃는 얼굴은 그 때가 처음이었고, 지금도 그 표정은 생생하게 기억난다" 라며 회고하기도 했다.

6. 관련 문서


[1] 1968년 시즌 후 모기업인 산케이신문이 실적 부진을 이유로 야구단 운영에서 손을 떼고 야쿠르트가 구단 경영권을 인수했는데, 1969년에 명목상으로는 산케이와 팀을 공동 경영한다는 뜻으로 구단명을 닉네임 뿐인 아톰즈로 시즌을 치렀다. 1970년 시즌부터 야쿠르트가 구단을 단독 경영하기로 확정한 뒤 비로소 팀명이 야쿠르트 아톰즈로 바뀌었고 1974년 현재의 이름인 야쿠르트 스왈로즈로 변경하여 오늘날에 이르고 있다. 어쨌든 모기업이나 지역명 없이 닉네임만 가진 팀은 1969년의 아톰즈가 유일하다.[2] 1933~2021. 풀 네임은 데이비드 레너드 로버츠(David Leonard Roberts). 일본에서 1967~1973년 산케이 아톰즈와 킨테츠 버팔로즈 소속으로 7시즌 동안 183홈런을 기록한 슬러거로, 로스앤젤레스 다저스 감독인 데이브 로버츠와는 다른 인물이다.[3] 1944년생의 외야수로 1963년 고쿠데츠 스왈로즈에 입단, 1971년 한신 타이거스로 이적할 때까지 줄곧 스왈로즈-아톰즈에서 활동했다. 그런데 다카야마는 도박빚에 시달리다가 1971년 시즌 도중 소속팀인 한신을 이탈하여 잠적해버리는 소동을 일으켰고, NPB는 다카야마를 무기한 실격선수로 공시하여 그 길로 은퇴하고 말았다. 그의 9시즌 통산 성적은 690경기, 369안타, 51홈런, 171타점, 타율 0.224 였고 이후 다카야마는 나가노 현에서 캬바레를 운영하다 1981년 사기 혐의로 체포당하는 등 순탄치 않은 삶을 살았다.[4] 추가로 여색을 밝히고 놀기 좋아하는 점까지 마이너스 요인이었다.[5] 위에 언급한 과음과 지나치게 육식으로 치우친 편식이 발병 원인이었다. 당시 잭슨을 진찰한 의사는 거의 췌장암 수준으로 심각한 괴사성 췌장염임을 밝혔다.[6] Willie Charles Kirkland(1934~ ). 메이저리그 에서 9년 간 148홈런을 기록한 만만치 않은 타자였고, 1968~1973년 시즌 한신의 4번 타자로 뛰면서 타율은 2할 4푼대로 높지는 않았지만 126홈런에 304타점을 뽑아내며 한신 타선의 기둥으로 활약한 바 있다. 스타디움 히어로 T팀의 타율 0.450의 대타요원 카쿠라(カークラ)의 모델이 바로 커클랜드 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