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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혁연 柳赫然 | |
본관 | 진주 류씨[1] |
출생 | 1616년 12월 19일 |
사망 | 1680년 5월 20일 (향년 63세) |
자 | 회이(晦爾) |
호 | 야당(野堂) |
시호 | 무민(武愍) |
부모 | 부친 - 류효걸(柳孝傑) 모친 - 의령 남씨 남이흥(南以興)의 딸 |
부인 | 전주 이씨(1617 ~ ?) - 이억(李繶)의 딸[2] |
붕당 | 남인, 탁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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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조선 후기의 무신. 남인 집권기 당시 병권의 상징이었다.2. 생애
1616년(광해군 8) 12월 19일 대대로 무반으로 출사한 집안에서 황해도 병마절도사·수군절도사 겸 황주목사를 지낸 아버지 류효걸(柳孝傑, 1594. 8. 18 ~ 1627. 8. 27)과 어머니 의령 남씨(1594. 10. 28 ~ 1645. 6. 4)[3] 사이의 4형제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어모장군(禦侮將軍)의 품계를 갖고 있다가, 1644년(인조 22) 정시(庭試) 무과에 병과 2위로 급제해 덕산현감, 선천도호부사 등에 제수되었다. 1653년 6월 황해도 병마절도사로 승진했고, 이듬해엔 수원부사를 역임했다.
효종이 서인, 특히 산당의 제어와 북벌론[4]을 실행하려 이완(李浣)과 함께 승지로 파격승진된 뒤 북벌론을 지원했다. 이후 충청병사, 삼도수군통제사, 공조참판, 어영대장, 형조참판, 한성좌윤 등을 지냈다.
2.1. 당쟁과 유혁연
남인 계열이라 송시열에게 미움을 샀고, 송시열의 제자이기도 한 김수항 등으로부터 탄핵을 받아 피혐한 뒤 한직 동지중추부사와 지중추부사를 지내기도 했다. 다만, 이때 어영대장직에선 물러나지 않았다. 1669년엔 어영대장의 직위를 제대로 수행하지 못했다하여 도제조 잠시 보직을 옮겼다 우포도대장으로 복귀했다.여기서 그의 능력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 있다. 훈련도감 소속 5,000명 군사들에게 쓰이는 운영비가 많이 들자, 그는 훈련별대를 분리시켰다. 급료병의 수는 줄어서 운영비는 덜 들고 군액은 그대로였다. 훈련별대는 금위영(禁衛營)으로 합쳐진다.
신채호의 조선상고사에는 현종 앞에서 현종이 조총의 길이를 묻자 손으로 조총 길이만큼 벌려서 "이만합니다"라고 했는데 그걸 옆에서 사관이 우물쭈물하면서 못 받아 적고 있는 것을 보고 사관을 욕하면서 '上問鳥銃之長於柳赫然. 然擧手尺餘, 以對曰如是'[5]라고 쓰면 되지 그걸 뭘 고민하고 앉았냐라고 일갈했다는 이야기를 적고 있다.
연려실기술에는 앞서 효종이 활 쏠 때 기존의 조선에서 쓰던 숫깍지 대신 만주족이 쓰는 암깍지를 사용할 것을 권장하면서[6] 만주족들이 하는 것처럼 깍지를 밤낮으로 끼고 다니면서 손에서 풀어 놓지 말라고 명하였는데, 숙종 6년에 유혁연이 김석주와 함께 암깍지 대신 숫깍지를 다시 쓸 것을 진언하면서 "지금 두어 겹으로 된 갑옷을 달아 놓고 쏘아 보니 혀가 있는 것(숫깍지)으로는 꿰뚫을 수 있는데 혀가 없는 것(암깍지)으로는 꿰뚫지 못한다"고 보고했다. 숙종은 일단 효종이 명한 것이라 함부로 고칠 수는 없지만 숫깍지도 암깍지랑 같이 사용할 것을 권했다고.
이로 인해 공조판서로 다시 중앙 정계에 발을 들였으나 또 문신들이 반발하여 잠시 중추부로 갔다가, 형조판서를 거쳐 다시 공조판서가 되었다. 이후 다시 훈련대장, 한성판윤, 포도대장 등 요직을 지낸 뒤 역임하고 본업인 훈련도감에 훈련대장으로 돌아왔다. 이때 윤휴의 북벌론에 '윤휴는 일을 맡아보지 못해서 쉽게 말을 하옵니다'[7]라고 여타 당시 대신들과 같이 반대 입장을 보였다.
2.2. 경신환국
허적의 연회 때, 숙종은 비가 오는 것을 보곤 유악과 차일을 가져가 주라고 했으나, 이미 가져간 것을 알고 류혁연, 김만기와 신여철을 패초(부름)한다. 여기서 유혁연의 훈련대장직은 김만기에게 넘어가며 유혁연은 관직에서 물러난 상태가 되고, 남인은 병권에서 물러나게 되었다.이때, 허적의 아들인 허견의 옥사가 시작된다. 허견과 인평대군의 삼남인 복선군은 김석주를 제거하기 위해 체찰부를 설치하고, 심지어는 숙종에게 후사가 없으니 복선군에게 왕위가 넘어갈 수 있다는 위험한 발언을 했다. 그후 고변자 정원로가 말하기를, 2,000명 정도의 군사들을 사적으로 훈련시켜 김석주를 제거하려 했다고 주장했고, 유혁연에게 책임이 갔다. 유혁연은 말도 안 되는 주장이라며 반박했고, 잠시 유배된다. 위리안치까지 갔고, 끝까지 혐의를 인정하지 않았으나 결국 사사된다.
정조 때 신원된다.
3. 가족관계
. *. 동생: 류탁연(柳卓然)( * 동생 : 류병연(柳炳然) 백부 : 류충걸(柳忠傑) 의 아들로 4촌지간)* 부인 : 전주 이씨 - 이억(李繶)의 딸* 손자 : 류득장(柳得章)* 외손부[10] : 복녕군의 딸* 백부 : 류충걸(柳忠傑)[11]* 숙부 : 류신걸 류예걸 류제걸 류지걸·류의걸
부인은 이억(李繶)의 딸 전주 이씨[12]이며, 아들은 누구고 몇 명이나 있었는지는 모르지만 최소 1남 1녀는 둔 듯하다. 조선왕조실록에 따르면, 해남현감 유득장이 류혁연의 손자인데, 더한 짓을 저질렀다며 국문하라는 기사와, 복녕군의 딸이 류혁연의 외손자와 혼례를 치렀다는 기사가 나온다.
[1] 이류계 북부령공파 22세 연(然) 항렬.[2] #[3] 남이흥(南以興)의 딸이다.[4] 다만 효종의 북벌론은 방어에 집중하고 있다.[5] 해석하면 "임금께서 조총의 길이를 유혁연에게 물으시니, 이에 손을 한 자 남짓으로 벌리고 이로써 대답하기를 이와 같나이다 하였다." 정도.[6] 숫깍지와 달리 암깍지는 튀어나온 부분이 없이 완전한 반지 형태를 띤다.[7] 한마디로 "군사 업무를 맡아본 적도 없으면서 입으로만 전쟁하는 인간"이라는 뜻이다.[8] 경원부사[9] 삼도수군통제사[10] 외손자의 아내[11] 주막 항목에 이 사람과 수원부사를 지내던 시절 류혁연에 관한 에피소드가 있다.[1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