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4-13 20:47:46

마리 앙투아네트(베르사이유의 장미)

베르사이유의 장미
주역
마리 앙투아네트 오스칼 프랑소와 드 자르제
한스 악셀 폰 페르젠 앙드레 그랑디에
조역
로잘리 라 몰리에르 알랭 드 수아송
기타 등장인물
마리 앙투아네트
マリー·アントワネット
(Marie Antoinette)[1]
파일:베르사이유의 장미.마리 앙투아네트.jpg
<colbgcolor=#ffffff><colcolor=#000000> 탄생 1755년 11월 2일
사망 1793년 10월 16일 (향년 37세)
성별 여성
국적 파일:신성 로마 제국 국기(후광 포함).svg 신성 로마 제국 -> 파일:프랑스 국기.svg 프랑스[2]
가족 아버지 프란츠 1세
어머니 마리아 테레지아
큰언니 마리아 안나
큰오빠 요제프 2세
둘째 언니 마리아 크리스티나
셋째 언니 마리아 엘리자베트[3]
둘째 오빠 카를 요제프[4]
넷째 언니 마리아 아말리아
셋째 오빠 레오폴트 2세
다섯째 언니 마리아 요제파[5]
여섯째 언니 마리아 카롤리나
넷째 오빠 페르디난트 카를[6]
동생 막시밀리안 프란츠[7]
남편 루이 16세
장녀 마리 테레즈
장남 루이 조제프
차남 루이 17세
외모 금발벽안[스포일러]
성우 파일:일본 국기.svg 우에다 미유키 (TVA)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문지현(대원 비디오판), 권희덕[9](KBS), 윤성혜(EBS) 박영희 (MBC 극장편집판)

1. 개요2. 작중 행적
2.1. 오스트리아의 공주2.2. 프랑스의 왕세자비2.3. 페르센과 사랑에 빠지다2.4. 사치와 낭비2.5. 각종 추문에 휩싸이다2.6. 다이아몬드 사건과 뒤늦은 변화2.7. 메울 수 없는 재정난 사태2.8. 프랑스 혁명2.9. 모두가 떠나다2.10. 바렌느 도주 사건2.11. 폐위와 남편의 처형2.12. 가족들과의 이별2.13. 국민 재판2.14. 최후
3. 평가4. 대인관계5. 기타6. 외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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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파일:베르사유의 장미.마리 앙투아네트.jpg
<colbgcolor=#d71a36><colcolor=#ffffff> 애니메이션판[10]

베르사이유의 장미의 등장인물이며, 실존인물인 마리 앙투아네트이다. 오스칼 프랑소와 드 자르제와 함께 양대 주인공이며, 오스칼이 픽션상의 주인공이라면 이쪽은 실화상의 주인공이다.

2. 작중 행적

2.1. 오스트리아의 공주

오스트리아의 여제 마리아 테레지아프란츠 1세의 막내딸로 첫 등장하며 오스칼페르젠과 비슷한 해에 태어났다. 다른 유럽의 왕실들과 달리 쓸데없는 허례허식을 배제하고 자유롭고 가정적인 분위기를 추구한 당시 오스트리아 왕실에서 자란 영향으로 악녀는 커녕 상냥하고 순진한 인품[11]을 가졌지만 동시에 당시 강대국인 오스트리아의 공주이자 여제 마리아 테레지아의 딸로서의 강한 자존심[12]을 가진 인물로 묘사된다.

하지만 성품과 별개로 어릴 때부터 워낙 놀기를 좋아하고 공부나 힘든 일과 깊게 생각하는 걸 싫어하다 못해 피하려 했다는게 큰 단점이었다. 이러다보니 공부 시간 내내 집중을 하지 못하는 걸 넘어 애교와 꾀를 피워 선생님들을 속여 수업을 피하곤 해서, 마리 앙투아네트를 가르친 선생님도 "마리 님은 뛰어난 자질을 가지고 있지만 열정이 없어서 걱정입니다" 라고 한탄했을 정도다. 심지어 오스트리아와 프랑스의 혼인 동맹이 체결되어 어린 나이에 프랑스의 왕세손비가 되는 것이 결정되었을 때조차 마리는 춤을 제외하면 왕족으로서의 기본 소양인 프랑스어, 역사, 정치를 비롯해 모든 면에서 일자무식 상황이었다.

결국 어머니 마리아 테레지아도 막내딸의 무식함에 경악하여 뒷목을 잡고 가장 좋은 선생님들을 데려와, 공부를 빡세게 시키고 오스트리아를 떠나기 전 몇주 동안 딸과 함께 지내며 직접 가르쳤다. 그래도 철부지 딸이 끝까지 걱정되었던 마리아 테레지아는 오스트리아를 떠나는 당일 자신이 직접 쓴 지침서를 마리 앙투아네트에게 읽어보라고 주고, 측근인 메르시 백작까지 프랑스로 함께 보내며 이후에도 딸의 일거수일투족을 보고 받으면서 온갖 노력[13]을 기울였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마리 앙투아네트는 그런 어머니의 당부를 끝내 이해하지 못했고 이는 그녀의 비극적인 최후에 일조하게 된다.

2.2. 프랑스의 왕세자비

이후 14살 때 오스트리아와 프랑스의 동맹을 위해 프랑스의 왕세손 루이와 혼인하여 프랑스로 오며, 우아한 프랑스의 사교계와 자신이 프랑스 내 가장 높은 신분의 여성[14]이란 자리에 도취되어 잠깐 이 상황을 즐기며 이때 루이 15세의 애첩 뒤바리 부인과 신경전을 벌이게 된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마음에도 없이 결혼한 루이 16세와의 어색한 부부관계와[15] 왕세자비라는 자리에서 오는 과중한 책무로 지쳐가고, 오스트리아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엄격한 에티켓[16]으로 가득차있는 프랑스 사교계에서 벗어나서 다른 여성들처럼 무도회, 연극, 오페라를 즐기고 어릴 때처럼 자유롭게 지내고 싶어했다.

2.3. 페르센과 사랑에 빠지다

그러다 왕세자비 시절 파리의 가면무도회에 신분을 숨기고 몰래 참석했다가 페르센과 만나 서로 첫눈에 반한다. 이후 페르센은 마리를 만나기 위해 궁에 자주 출입하기 시작하고 감정에 솔직한 마리는 페르센에 대한 마음을 숨기지 않다보니 두 사람에 관한 소문이 슬슬 생겨나기 시작했다. 설상가상으로 루이 15세가 천연두로 갑작스럽게 사망을 하면서 마리 앙투아네트는 아직 10대라는 어린 나이에 준비가 되지 않은 상태로 프랑스 왕비라는 무거운 자리에 오르게 된다.

결국 불륜 상대였던 페르센도 친구인 오스칼의 충고와 마리 앙투아네트를 곤란하게 만들지 않기 위해 프랑스를 잠시 떠나기로 한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마리는 이 둘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하고 페르젠이 떠난 마음의 빈자리와 왕비라는 직위의 부담감에서 오는 스트레스를 해소하고자 국고로 도박을 하고 디자이너인 로즈 배르탱을 개인 디자이너로 임명해서 각종 드레스와 장신구를 사재기하고 해마다 파티를 열고 틈만 나면 무도회와 연극을 즐기는 등 지나치게 사치[17][18]를 부리게 된다.

2.4. 사치와 낭비

거기다 너무 감정에 솔직한 면과 순진한 면모도 독이 되어 자신이 좋아하면 민중들도 좋아해줄 거라는 착각과 왕비라는 신분이 합쳐져 엄청난 악효과를 낳았다. 전술한 국고로 도박과 사치를 부리는 건 말할 것도 없었고 자신이 프랑스 왕비가 된 상황에 도취된 나머지 왕비 신분을 이용해 총애하는 사람들에게 벼슬과 각종 특혜[19]를 마음껏 퍼주었던 것도 문제였는데, 하필이면 겉보기엔 다정해보여도 실제론 음흉한 속내를 품고 있던 폴리냑 백작부인에게 호감을 가져 그녀와 그녀의 가족에게 온갖 특혜[20]를 주는 호구같은 짓을 벌였다.

그것도 모자라 힘든 왕비로서의 업무와 지나치게 에티켓을 중시하는 베르사유에서 벗어나고 싶다는 지극히 사적이고 어이없는 이유로 베르사이유 궁전을 떠나, 루이 16세가 선물로 준 개인 궁전인 프티 트리아농에 폴리냑 부인을 비롯한 자신의 측근들끼리 틀어 박혀 연극과 농가생활을 즐기며 국정을 멀리하는 일국의 왕비로서 최소한의 책임마저 내팽개치는 바보같은 짓을 한다.[21]

더 문제는 프티 트리아농의 출입 조차 마리 앙투아네트의 허락이 있어야 해서 알헌을 하러 온 백성들과 고위 귀족들은 물론 국왕 루이 16세도 허락을 받지 못하면 못 들어갔기에 백성들은 민생에 1도 관심을 안주는 왕비에게 실망하고 귀족들도 자신들을 무시하는 듯한 왕비의 태도에 큰 모욕감을 느껴 와달라고 해도 가지 않을거라고 대놓고 힐난을 할 정도로 마리에게 제대로 등을 돌려버린다.

최측근인 오스칼이 왕비님이 베르사유 궁전을 떠나는 무책임한 행동을 해선 안된다고 필사적으로 말렸고 어머니 마리아 테레지아도 딸의 어리석은 행동에 놀라 그만 쓰러지는 사태까지 벌어졌지만 마리는 자신에게 불리하게 돌아가는 현실에 눈과 귀를 막은체 자신이 만든 낙원 안에서 달콤한 독 같은 행복을 누리며 스스로를 파멸으로 몰아넣고 이는 그녀의 비극적인 최후에 한발짝 더 다가게 만들었다.

2.5. 각종 추문에 휩싸이다

더구나 소극적인 남편과 남편과의 애매한 사이로 인해 프랑스로 시집 온지 7년이 넘도록 후계자를 낳지 못해 여론은 더욱 안좋았다. 게다가 마리가 오랜만에 만난 패르젠에 대해 마음을 숨기지도 않고 대놓고 총애하는 행동을 보여서 주변 귀족들도 마리와 페르젠과의 관계에 의심을 가지고 아예 대놓고 조롱하는 사태까지 벌어졌다.

그나마 뒤늦게 첫딸인 마리 테레즈를 낳고 연달아 장남 루이 조제프와 차남 루이 사를을 낳으면서 마리도 안정을 찾고 주변 시선도 달라지는가 싶었지만 장남은 척추결핵(척추카리에스)으로 요절하고 차남 루이 17세는 아예 내연남이였던 페르센의 사생아라는 소문에 휩싸인다.

이후 이 후계자 문제는 훗날 루이 16세의 남동생들인 프로방스 백작 루이, 아르투아 백작 샤를과 먼 친척인 오를레앙 공작 루이필리프가 득세하여 왕실을 어지럽히고 마리 앙투아네트의 레즈비언 루머와 페르젠과의 염문설이 퍼져 마리가 프랑스 내 조롱거리이자 욕받이 대상으로 전락[22]하는 계기가 된다.

2.6. 다이아몬드 사건과 뒤늦은 변화

결국 전술한 요인들로 인해 마리 앙투아네트에 대한 불만이 갈수록 심해지던 중 로잘리 라 몰리에르의 언니 잔느 발로아 드 라 모트가 프랑스 왕실에 납품될 예정이었던[23] 다이아몬드 목걸이를 탐내 사기사건을 벌이고 이에 대해 마리 앙투아네트의 잘못된 대처[24]까지 겹치면서 다이아몬드 사건[25]이란 대형 사건이 터진다.

이후 사건의 진상이 드러나면서 마리 앙투아네트의 무고함이 밝혀졌는데도 재판에 회부된 잔느는 "마리가 자신을 시켜 다이아몬드 목걸이를 사라고 해놓고 이제와서 꼬리 자르기를 하는 것이다", "마리 앙투아네트 왕비는 레즈비언이고 여자들과 관계하는 것뿐만 아니라 여러 남자들을 침실에 끌어들이는 문란한 여자다"[26]라는 등의 온갖 위증을 한다. 물론 이런 말도 안되는 증언과는 별개로 명백한 증거들이 있었기에 잔느는 사기죄가 인정되어 수백 대의 채찍형을 얻어맞고 양 어깨에 도둑(Voleuse)을 뜻하는 머릿글자 V를 새겨서 살페트리에르 정신병자 수용 감옥의 무기징역을 선고받는다.

그러나 그렇게 선 형벌대에서마저 잔느는 간수를 물어뜯으며 발악했고 급기야 마리 앙투아네트를 적대하는 세력들의 도움을 받아 탈옥하여 해외로 망명한 뒤, 돈벌이 겸 복수로 앞서 위증한 레즈비언설부터 수많은 남자들과의 염문설에 살을 덧붙혀서 마리 앙투아네트를 마구잡이로 욕하는 가짜 소설을 팔기까지 한다. 더구나 이 사기극에 일조한 로앙 대주교는 무죄로 풀려나고 부르주아 혁명가들을 필두로 한 황색 언론도 잔느의 사기극을 대대적으로 알리다 못해 그녀를 민중 투사로 포장시켜버리고 만다.

하필이면 이때에는 앞서 말한 각종 사치와 무책임한 행태로 인한 비난과 페르젠과의 풍문으로 말이 많았던 시기였고 안그래도 마리 앙투아네트에게 안좋은 감정을 가지고 있던 민중들과 귀족들은 사기꾼인 잔느에게 동정을 표하고 로앙 대주교의 무죄에 환호하며 피해자인 마리 앙투아네트가 오히려 욕을 먹는 사태까지 치닫고 만다. 이에 마리 앙투아네트는 엄청난 수치심에 떨며 잔느의 말은 거짓이라고 호소하지만 평민과 귀족들 중 그 누구도 믿어주지 않는다.

결국 다이아몬드 목걸이 사건으로 뒤늦게서야 자신에 대한 여론이 안좋다는 걸 안 마리 앙투아네트는 정신을 차리고 페르젠의 조언을 받아 간신배인 폴리냑 부인과 그 측근들을 멀리하고, 오스칼과 메르시 백작을 가까이 하며 사치와 도박도 그만두고 국정에 관심을 가지면서 바뀌어 간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이미 때는 늦어 프랑스 내 마리 앙투아네트의 평가는 아무하고나 놀아나는 문란한 오스트리아 여자이자 나라를 망치는 악녀라고 불릴 정도로 나락으로 떨어진다.[27]

2.7. 메울 수 없는 재정난 사태

당시 프랑스는 연이은 흉년과 군인들의 식량소비로 파리와 파리 주변부는 식량부족사태가 빈번했으며 이미 루이 14세부터 축적된 왕실의 엄청난 빚과 미국 독립전쟁 참여, 미시시피 거품 등, 여러 실책으로 세금으로 이전 왕실이 지은 빚을 갚는데 대부분을 쓰일 정도로 재정난이 심각한 상황이었다. 게다가 그런 상황에서 프랑스 내 귀족들과 성직자들은 세금 면제란 특혜를 누리고 왕실은 면세 특권을 폐지하는 수단조차 거부하고[28] 백성들에게 세금을 지속적으로 부과하는 악수[29]를 둔다.

이러다보니 앞의 부조리한 상황과 식량난과 세금개혁 실패에 평민대표가 삼부회에서 큰 소리를 내고 이후 이런 평민 대표에 동조하는 제 1, 2신분의 귀족과 성직자[30]들도 나타나 테니스코트의 서약으로 국민의회가 성립된다. 이런 급격한 사회 변화에도 마리 앙투아네트는 민중들의 소리를 듣고 개선하긴 커녕 왕당파 귀족들과 함께 남편 루이 16세에게 귀족들의 면세특권 유지와 민중들을 반역자로 몰아 남편 루이 16세에게 "군대를 동원해 강경 진압하라"고 강요하는 시대착오적인 언행을 보이고 만다.

2.8. 프랑스 혁명

결국 이런 루이 16세와 마리 앙투아네트의 실책과 무능이 연이어 이어지자 민중들의 고통과 왕실을 향한 증오가 하늘을 찌른 끝에 마침내 유럽 최고의 절대왕정이었던 프랑스 왕실의 존폐 자체를 깨부수고 프랑스 공화국의 시초가 되는 프랑스 혁명이 터진다.

그후 분노한 민중들과 부녀자들이 베르사유의 궁전까지 처들어 오는 지경에 이르자 그들에게 가장 증오받았던 마리는 이때 시위대 앞으로 끌려가, 그들의 분풀이 대상이자 웃음거리로 전락할지도 모르는 사태까지 갈 뻔했지만 자신이 직접 베르사유 궁전까지 쳐들어온 분노한 민중들에게 고개를 숙이고 사과했다.[31] 이후 가족들과 쫒겨나다시피 베르사유를 떠나[32] 파리의 고성인 튈르리 궁전에 유폐된다.

2.9. 모두가 떠나다

비록 앞의 사건들로 루이 16세와 마리 앙투아네트는 실권을 하나둘 빼앗기고 있긴 했어도 매일 아침 문안 인사를 받고 어전회의에 참여하는 등 아직까지도 국왕와 왕비로서 국민 의회와 민중들에게 존중받고 있었다. 아울러 혁명의 유력 지도자 중 한 명인 미라보 백작은 영국식 입헌군주제를 추진하고 있었기 때문에 부르봉 왕정도 잘만 하면 최소 권위만은 인정받고 남은 여생을 보낼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주변 측근들의 부추김과 루이 16세의 우유부단한 행동, 철 지난 왕권신수설을 고수했던 마리의 시대착오적 행동, 미라보 백작의 갑작스러운 죽음 등으로 이 마저도 어그러지기 시작했고 결국 이런 꽉막힌 상황과 우유부단한 왕에게 질려버린 일부 귀족들은 살길을 도모하고자 프랑스와 왕실을 버리고 떠나기 시작해 마리는 외톨이 신세로 전락한다.

특히 루이 16세와 마리 앙투아네트의 곁에서 온갖 아첨을 일삼아 막대한 국비를 낭비하게 하였고 마리에게 귀족들의 면세특권 유지와 군대를 통한 강경진압을 주장하고 충언을 하는 오스칼을 모함하는 등, 자신들이 충신인 것처럼 굴던 간신들은 막상 루이 16세 부부가 위험에 처하자 바로 그들을 버리고 해외로 도주[33]해버리며 그나마 남은 왕당파들도 대다수가 무능하였기에 부르봉 왕가 수호에 도움이 되지 않았다.[34]

결국 마리 앙투아네트 곁에 유일하게 남은 건 시누이 엘리자베트, 페르젠, 자신에게 늘 충언을 아끼지 않았던 오스칼[35]의 아버지 자르제 백작 뿐이었다.

2.10. 바렌느 도주 사건

하지만 프랑스 혁명이 장기화되고 왕실에 대한 위협이 갈수록 거세지자 페르젠의 도움으로 가족들과 함께 바렌느를 거쳐 친정인 오스트리아로 도주하려고 시도한다. 그리고 이것이 마리 앙투아네트 자신의 목숨까지 앗아가게 된 최대최악의 실책이었다.

마리는 어전회의가 끝나자마자 아들 루이 샤를을 여장시키고 딸 마리 테레즈와 함께 가장 무도회에 간다고 안심시킨 뒤 두 자녀를 데리고 튈르리 궁을 나가 페르젠이 준비한 도주용 마차를 타고 출발한다. 그렇게 무사히 튈르리 궁에서 탈출해 왕당파 군대가 기다리고 있는 바렌느까지 가는데 성공하지만, 중간쯤 다다랐을 때 자신들과 엮일 시 피해를 볼 것을 우려한 루이 16세의 강건으로 페르젠을 먼저 벨기에로 보내게 되자 눈물을 흘리며 그와 헤어진다. 하지만 계획에 가담한 왕당파의 무능 때문에 계획이 자꾸 어그러지면서 안전한 도피는 물건너 갔고 우연의 우연이 겹친 끝에, 생트머누의 역참이자 자코뱅파의 일원인 장바티스트 드루에가 자신들을 보자마자 바로 국왕 일가임을 눈치채고 이를 국민 의회에게 알리면서 도주극은 실패로 끝난다.

당시 바렌느의 한 민가에 들러 휴식을 취하고 있던 루이 16세 일가는 들이닥친 혁명대를 보고 놀라 시치미를 떼고 필사적으로 도망치려고 했지만 드루에가 자신들의 정체를 완전히 확신하는 건 물론[36] 파리의 국민 의회로부터 국왕 일가가 튈르리 궁을 탈출하여, 국경으로 향하고 있으니 그들을 발견하는 즉시 붙잡아 파리로 돌려보내라는 전령까지 받아 읽으면서 나라를 버리고 도망치려고 했다는 것이 만천하에 드러나고 이 소식에 분노한 민중들에 의해 민가에 갇혀 옴짝달싹 못하게 되어버린다.

이렇게 된 바엔 남편인 루이 16세에게 틀림없이 푸이에 장군이 군대를 이끌고 도우러 올 것이니 1분이라도 더 시간을 끌어보라고 지시하며 어떻게든 상황을 모면해보려고 하지만 속셈을 눈치챈 드루에에게 바로 저지당하고, 분노한 시민들도 국왕의 몸으로 조국을 버리고 도망치려 하다니 비겁하다며 빨리 파리로 돌아가지 않으면 총으로 쏴 죽이겠다고까지 하고 우리들을 배반한 국왕따위 필요없다며 국왕과 왕비를 모조리 사형에 처하라고 위협한다. 결국 바렌느의 시장마저 어서 출발하지 않으면 생명의 안전조차 보장할 수 없다고 하자, 모든 것이 끝났음을 체념하고 먼저 떠난 페르젠만은 무사히 망명해서 자신의 몫까지 살아달라고 빈다.

이후 바렌느의 시민들 앞에 루이 16세와 함께 모습을 드러내지만 왕과 왕비가 외국으로 도주하여 군대를 이끌고 프랑스와 전쟁을 일으키려 했단 것에 분노한 시민들에게 "이 나쁜 년아! 이런 드레스로 치장한 매춘부! 어디 한번 당해봐라!"라는 난생 처음 들어보는 온갖 험한 욕설에 드레스가 찢어발겨지고 돌팔매질까지 당하며 온갖 치욕을 겪는다.[37] 만신창이가 된 채로 견딜 수 없는 조롱까지 들으며 고통스러워하면서도 어떻게든 정신을 추스려 공포에 질린 아들 루이 샤를을 챙겨 마차에 타려고 하지만, 이미 이성을 잃은 군중들은 루이 샤를에게마저 뭐가 왕세자냐며 넌 국왕의 아들이 아니라 페르젠의 사생아라고 하면서 마리 앙투아네트 일가를 모욕한다.[38] 이에 돌을 맞아 얼굴에 피까지 흘리면서도 자신에 대한 증오로 아무 죄없는 어린 아들까지 모욕해대는 시민들에게 분노하여 국민 누구 하나라도 용서할 수 없다며 프랑스의 왕비 마리 앙투아네트가 눈물을 보일 줄 아냐고 겨우 마음을 추스리며 아들을 달래준다.

그렇게 군중과 국민위병에게 둘러싸여 돌아오는 내내 국민들에게 온갖 모욕과 위협을 받으며 3일에 걸쳐 파리로 압송되어 다시 튈르리 궁으로 돌아오나 마리 앙투아네트는 이때 5일간의 도피와 3일간의 체포와 압송 중 겪은 공포 때문에 금발 머리가 노파와 같은 백발로 하얗게 세어버리고 말았다. 뒤늦게 바렌느에 도착한 푸이에 장군도 국왕 일가의 귀환 행렬을 보고 이미 늦었음을 깨달아 바로 퇴각하고, 미리 벨기에로 망명해있던 페르젠마저 이 소식을 듣고 운명은 끝내 우리들을 비웃는다며 모든 것이 파멸이라고 절망한다.[39]

결국 왕실 가족의 도피 사건이 프랑스 전체에 널리 퍼지면서 분노한 시민들이 자신들을 향해 조국을 버리고 도망치려한 국왕과 왕비는 사형에 처하고 왕정을 폐지하자고 소리칠 정도로[40] 왕실에 대한 국민들의 분위기는 험악해졌고, 혁명 정부 또한 국왕 일가가 자신들과의 공존은 커녕 협조할려는 마음조차 없음을 여실히 깨닫고 왕정제 폐지와 공화정 준비에 착수하면서 마리 앙투아네트와 루이 16세 일가는 완전히 몰락하고 그들의 운명도 사실상 이때 결정된다.[41]

2.11. 폐위와 남편의 처형

그렇게 범죄자 취급을 받으며 가족들과 튈르리 궁에 유폐 되었다가 자신을 만나러 온 페르젠과 감격의 재회를 하지만 자신들의 운명을 직감하고 그의 탈출 제안을 거절하고 영원히 이별하게 된다. 이후 프랑스 혁명의 영향력을 두려워 한 여러 유럽 국가들이 관여하고 설상가상으로 해외로 도피한 프로방스 백작 루이아르투아 백작 샤를의 부추김으로, 오스트리아와 프로이센을 필두로 한 연합국이 프랑스 혁명정부와 전쟁을 벌이게 되면서 누가 이기든 자신들은 무조건 프랑스 국민에 의해 처형당할 게 확실시된 위태로운 상태에 처한다.

이에 시누이 엘리자베트 공주가 프로방스 백작과 아르투아 백작에 대해 피를 나눈 형제이면서 자신들이 국민에게 살해당하길 바라다니, 지옥에나 떨어져야 마땅하다고 절규하자[42] 이성을 잃지 말고 의연하게 기다려보자며 최후까지 왕족으로서의 긍지를 잃지 말자고 위로한다. 그 모습을 본 루이 16세가 당신이 이 나라에 시집온 것이 이런 불행을 맛보기 위한 것은 아니었을 거라며 슬퍼하자, 자신도 프랑스의 국민들과 가족들은 물론 유럽 전역에게 버림받고[43] 죽기만을 기다리는 신세에 눈물을 흘린다.

이후 프로이센과 오스트리아 연합군과의 전쟁에 이어 자코뱅파와 지롱드파의 대립까지 일어나면서 튈르리 궁에서 계속 국민들의 습격을 받으며 위협당하다가 마침내 모든 권한을 박탈당하고 일가족과 함께 탕플 탑에 수감된다. 루이 16세에게 충성을 맹세하며 최후까지 남아있던 왕당파와 지지세력도 이때 모조리 수감되어 학살되면서[44] 완전히 고립무원의 처지가 된다. 이에 어린 자식들을 위로하면서도 프랑스군이 전쟁에서 패배하여 오스트리아와 프로이센 연합군이 빨리 파리로 침공해와 혁명따윈 박살을 내버렸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며 조국의 안위보다 자신들의 안위를 더 신경쓰는 왕비로서 최악의 모습을 보인다.

결국 1792년 9월 21일 프랑스가 정식으로 공화국이 된 것을 선언하고 이에 따라 부르봉 왕정의 폐지와 남편 루이 16세의 폐위를 통보하면서 자신도 프랑스 왕비에서 폐위된다.[45] 이후 국민공회에서 격렬한 토론 끝에 찬성 361표 대 반대 360표로 단 한표 차이에 의해 남편 루이 16세의 처형이 결정되자 절망한다.

처형 전날인 1793년 1월 20일에 격리되어있던 루이 16세와 마지막 작별 인사를 허락받자 남편의 품에 안겨 오열한다. 결국 다음날 1월 21일 감옥 안에서 엘리자베트 공주와 함께 루이 16세의 처형 소리를 들으며 절규한다. 이후 사랑이 없는 정략결혼이긴 했지만 아내와 남편으로서 20여 년간을 함께 사는 동안 루이가 보여준 깊은 애정과 성실함은 진실했고 격렬한 연애감정은 아니었지만 분명 남편을 사랑했다고 회고하면서 루이 16세의 죽음을 애도한다.

2.12. 가족들과의 이별

남편이 처형당하는 불행을 겪지만 탕플 탑 안에서 사랑하는 자녀들과 함께 지내는 순간만을 위안으로 삼으며 버텨내지만 그조차도 얼마 가지 않는다. 루이 16세를 처형한 국민 공회가 그의 아들 루이 샤를마저 마리 앙투아네트에게서 떼어놓기로 결정하면서[46] 아들과도 생이별하는 비극을 연이어 겪게 된 것이다.

당시 감옥에 혁명군들이 들이닥치자 마리는 아들을 필사적으로 품에 끌어안은 채 절대 안된다며 나가라고 완강하게 거부한다. 그러나 끝내 아들마저 혁명군에게 끌려나가는 걸 본 마리 앙투아네트는 주저앉아 처절하게 오열하며 아래와 같이
어째서 이렇게까지 하지 않으면 안 되는 거죠?! 당신들은 내게서 모든 것을 뺏어 갔어! 내 지위도, 내 남편도, 내 행복도...! 모든 것을 뺏어 갔어요! 그런데 이 아이까지 뺏으려는 것입니까?! 이제 아무 힘도 남아 있지 않은 나를...! 그저 죽기만을 기다리고 있는 나를...! 어째서 이렇게까지 괴롭히려고 하지?! 차라리 죽여다오! 지금 이 자리에서 나를 죽여다오! 너희도 한 아이의 부모가 아니더냐!
라고 절규한다.

하지만 이 말을 들은 혁명군은 마리 앙투아네트를 동정하긴 커녕 차분하지만 원한이 서린 듯 "물론 우리에게도 아들이 있었죠. 우리가 아들에게 먹일 우유도 없이 영양실조로 죽어가는 것을 그저 지켜볼 수밖에 없었을 때... 당신은 호화로운 궁전에서 보석을 몸에 걸친 채 웃고 있었죠."라며 일갈한다.[47][48] 이 말에 아무런 반박도 못하고 눈물만 흘리며 아들을 빼앗기고[49] 완전히 자포자기하여[50] 어서 빨리 자신을 죽여달라고 기도하는 지경에 이른다.

이후 딸 마리 테레즈 샤를로트와 시누이 엘리자베트와도 이별한 뒤[51] 콩시에르쥬리에 감옥에 수감되어, 죽을 날만 기다리는 사형수 신세가 된다. 그야말로 일국의 국모에서 바닥까지 떨어지는 비참한 신세였지만 다행히 시중을 든 로잘리[52]와 감옥 사람들의 배려[53] 덕분에 나름 편안하고 행복한 감옥 생활을 보낸다.

2.13. 국민 재판

국민 재판에 여러 번 회부되어 혁명 정부측이 그동안 자신이 저지른 실책부터 하지않은 짓까지 모조리 유죄로 몰아가는 것[54]에 반박하는 과정에서 몸도 마음도 지쳐가지만 끝까지 침착함을 잃지 않고 프랑스의 왕비로서 위엄을 유지하고자 노력한다. 이때 로잘리의 도움으로 자신을 찾아온 자르제 백작에게 탈출 제안을 듣지만 자녀들까지는 함께 데리고 갈 수 없다는 걸 알고 탈출을 포기하며 자르제 백작에게 마지막까지 애써줘서 고맙다는 작별 인사를 나눈다.[55]

그렇게 지리멸렬한 싸움을 반복하던 중 급기야 자신을 확실하게 처형시키기 위해 에베르가 자신을 아들 루이 샤를과의 근친상간이라는 말도 안되는 혐의로 고발하고, 장래에 루이 샤를이 국왕이 되었을 때 자기 마음대로 조종하기 위한 음모가 틀림없다는 어이없는 이유까지 갖다 붙히며 매도하기에까지 이른다. 이때 아들이 자신에게 강간당했다고 거짓 증언한 것에[56] 마리 앙투아네트는 잠시 경악하지만 다른 건 몰라도 아들과의 근친상간만큼은 모든 어머니와 여성에 대한 부끄러운 모욕이고, 적어도 어머니에게 가해지는 이런 비열한 고발에 대답하는 것을 거부한다며 마지막까지 왕비로서 위엄을 잃지 않고 당당하게 대응하면서 근거도 없는 누명까지 씌우려는 국민의회에게 한방 먹인다.[57]

2.14. 최후

하지만 결과는 이미 정해진 채로 진행되는 재판이었기에 결국 사형을 선고받지만 이미 여러 가지 일로 지쳐있던 마리는 이걸로 괴로움에서 해방된다고 안도하며 죽음을 받아들인다.

처형 전날 밤 시누이 엘리자베트에게 보내는 마지막 편지[58]를 쓰고 모든 걸 포기하였으나 로잘리의 도움으로 겨우 기운을 차린다. 처형 당일인 1793년 10월 16일에 처형장으로 떠나기 직전 자신의 리본를 로잘리에게 준 후 고마움을 표한다.[59]
파일:베르사이유의 장미.마리 앙투아네트.처형.jpg
<colbgcolor=#d71a36><colcolor=#ffffff> 마리 앙투아네트의 최후
자아, 봐라! 마리아 테레지아의 딸이 죽는 모습을... 이 목이 떨어지고 피가 방울져 떨어져도, 나는 영원히 눈을 뜨고... 조국 프랑스의 장래를 지켜보련다. 잘 봐두어라! 이것이 프랑스 왕비의 죽는 모습이다!
안녕, 페르젠! 언제까지나 나를 잊지 마세요. 최후의 이 순간까지 끌려가듯 나는 당신을 사랑합니다. 언젠가 천국에서 만나겠죠. 신이여! 이제... 갑니다.

원작 8권 中 마리 앙투아네트의 마지막 유언
이후 남편과 다르게 초라하고 굴욕적인 모습[60]으로 대중들의 야유를 받으며 처형장에 당도하지만, 마지막까지 침착함을 잃지 않고 과거의 주마등과 페르젠을 떠올리며 당당하게 죽음을 받아들이면서 단두대에서 목이 잘린다.

3. 평가

이때 마리 앙투아네트가 당시의 감동을 잊지 않았다면 그녀는 비참한 최후를 맞지 않았을 거다.
원작 1권 中 왕세손비 시절 처음 파리에 방문했을 때 자신에게 환호를 보내는 프랑스 시민들에게 감동한 마리 앙투아네트의 모습에 달린 각주
역사의 수레바퀴를 거꾸로 회전시키려 하는 자는 반드시 멸망한다는 진리를 앙투아네트는 끝내 이해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원작 7권 中 부녀자들의 베르사유 궁전 습격이 일단락되고 가족들과 함께 파리로 끌려가 튈르리 궁에 유폐된 후에도 여전히 철지난 왕권신수설을 주장하며 혁명을 인정하려 하지 않는 마리 앙투아네트의 모습에 달린 각주
물론 우리에게도 아들이 있었죠. 우리가 아들에게 먹일 우유도 없이 영양실조로 죽어가는 것을 그저 지켜볼 수밖에 없었을 때... 당신은 호화로운 궁전에서 보석을 몸에 걸친 채 웃고 있었죠.
원작 8권 中 아들 루이 샤를을 강제로 데려가려고 하자 당신들도 부모가 아니냐고 절규하는 마리 앙투아네트에게 혁명군이 한 대사

본인이 한 짓에 비해 지나치게 가혹한 최후를 맞이했고 신분을 막론하고 누구에게나 친절하고 상냥하게 대하고 자신의 잘못을 반성하며 이를 고치려고 노력하는 등의 장점이 없었던 것도 아니었다. 그러나 개인적인 면모로 해결하기엔 당시 프랑스의 문제는 너무나 심각했고 시대가 원한 것도 전형적인 왕정 시대의 왕비가 아니었다는 게 마리 앙투아네트에게 있어 큰 비극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절대 무고한 인물은 아니며 개인으로서는 좋은 사람이었을지 몰라도 왕비로서는 최악인 인물이었다.[61] 남편 루이 16세와 마찬가지로 일국의 왕비로서 책무보단[62][63] 자신의 감정을 더 중시해서[64] 자신의 위치나 시대의 흐름을 제대로 보지 않고 가볍게 행동해 인망을 망치고 실책을 연달아 저지르는 등 한계가 뚜렷했던 것도 사실이었다. 게다가 정략결혼으로 희생당한 피해자라고 두둔할 수도 없는게 마리는 남편 루이 16세가 아내를 배려하고 한눈도 팔지않는 남자여서 행복한 가정을 꾸렸고, 무엇보다 체면 때문에 페르젠과의 사랑을 포기한 부분만 제외하면 작중 내내 프랑스의 왕비로서 피해는 커녕 온갖 특혜란 특혜[65]는 다 누리고 다녔다.

한마디로 왕비로서의 권리와 특혜는 있는대로 다 누려놓고 그 대가로 자신에게 주어진 의무는 책임지기 싫어하며 나라의 안위도 신경쓰지 않는 왕비로서 매우 무능하고 무책임하게 굴다가, 남편의 처형과 자식들과의 생이별로 그동안 저지른 실책의 응보를 처절하게 돌려받자 반성은 커녕 어떻게 이렇게까지 할 수 있냐고 떼를 쓰는 냉정히 말해 철부지에 내로남불이나 다름 없다.[66] 차라리 격동기의 프랑스 혁명의 연관자가 될 일이 아예 생기지 않게 루이 16세와 결혼하지 않고[67] 오스트리아의 공주로만 남았다면, 혹은 혁명에 직접적인 영향을 받지 않은 다른 나라의 왕비 혹은 고위 귀족과 결혼해 평범한 귀부인으로 살았다면 본인도 국민도 모두 행복했을 여인이었을 것이다.[68]

결론적으로 개인적으로는 착하고 순진해도 정치적인 자리에서 중요한 입지를 차지한 사람이 민중과 정치판의 심정과 동향을 헤아리지 못하고 이해하려 들지도 않으면 무슨 꼴이 나는지 제대로 보여주는 인간상이다. 또한 비슷하게 페르젠에 대한 연심과 여성으로서 누릴 행복을 포기한 것에 괴로워 했지만 이를 극복하는 동시 자신이 지금까지 누려온 특권에 의문을 품고 조국과 백성을 지키는 길을 선택하여 혁명에 투신하는 길을 선택해 성별과 신분을 뛰어 넘어 주체적인 한 사람으로 사는 삶을 선택한 오스칼의 안티체제라고 할 수 있다.

4. 대인관계

4.1. 오스칼 프랑소와 드 자르제

작중 오스칼과의 관계는 대체적으로 원만한 주종관계로 그려진다. 마리가 처음 프랑스로 시집왔을 때 오스칼이 호위를 맡게 되고 마리도 처음부터 오스칼에게 호의를 품고 여러가지로 호의를 표하거나 편의[69]를 봐줬다. 물론 오스칼 역시 페르젠과의 불륜 셔틀, 목숨걸고 낙마할 때 구하는 등 마리를 도우면서 동시에 마리 앙투아네트의 호의[70]를 딱잘라 거절하며 간신인 폴리냑 부인을 멀리하고 프랑스의 국모로서 책임감을 가지라고 간언을 하는 등 마리 앙투아네트의 충신으로 있었다. 그러나 자신의 간언을 무시하고 시대착오적인 모습을 보인 마리에게 실망한 오스칼이 평민들의 편에 서기로 결심하면서 마리와 오스칼은 영원히 결별하게 된다.

사실 이전에도 오스칼은 여러 경험들을 통해, 귀족인 자신이 모르는 곳에서 국민의 대다수인 평민들이 엄연히 소수인 귀족과 왕족을 떠받치느라 가혹한 착취에 시달리고, 그저 신분이 더 낮다는 이유로 벌어지는 인권유린 문제[71]들도 알고 있었다. 또한 위병대에서의 생활을 통하여, 비귀족(+ 몰락귀족) 출신 군인들이 총까지 몰래 팔아치워야 할 정도로 형편이 어렵다는 것도 목격하며 오스칼은 (마리의 일을 제외하고도) 프랑스 사회에 문제가 많으며 변화가 필요하다는 걸 몸소 실감[72]하고 있었다. 그래도 오스칼은 마리를 비롯한 왕실에 어느 정도 희망을 걸고 있었으나, 왕족들에게 결국 가망이 보이지 않게 되자 왕족들을 등지고 혁명 노선을 택한다.[73]

한가지 의미심장한 부분이라면, 오스칼은 루이 16세와 마리 앙투아네트의 처형이 결정되기 전에 바스티유 감옥 습격사건에서 한참 뛰다가 사망했다는 점이다. 프랑스 혁명에 더해 바렌 사건까지 더해져서 프랑스의 마지막 왕조인 부르봉 왕조가 완전히 끌어내려진 뒤에도 혁명파벌 내에선 루이 16세의 사형 여부에 대해 치열한 투표공방이 있었고, 겨우 1표 차이로 사형 지지 측이 승리해, 그 결과 루이 16세는 사형당했으며 마리 앙투아네트도 그 뒤를 따랐다.[74] 오스칼이 죽은 후, 마리 앙투아네트는 감옥에 갇히는 처지가 된다. 이때 시중을 들던 로잘리가 마리에게 오스칼의 이야기를 들려주자, 마리는 '오스칼을 생각하면 언제나 마음이 편안해진다'라며 그녀를 그리워했다. 서로 단순한 주종관계를 떠나 친구로서 우정과 신뢰를 쌓았음을 알 수 있다.

4.2. 루이 16세

남편인 루이 16세와는 왕비로서 함께 행동하고 인간적으론 싫어하진 않으나 진심으로 사랑한 건 페르젠이였다.[75]

그러나 루이 16세 역시 아내인 마리 앙투아네트와 마찬가지로 당대 프랑스의 실상을 바로 보지 못하고 무능하고 유약하게만 행동하다가, 프랑스 혁명의 단초를 제공했으며 끝내 바렌 사건이라는 최악의 실책을 저지르면서 모두에게 버림받아 가족들과 함께 폐위되어 처형당한다.

그래도 둘 다 어릴 때 결혼하여 온갖 고난을 함께한 애정은 분명해서 루이 16세바렌 사건 이후 탕플 탑에 갇혀 온갖 모욕과 고초를 겪는 마리를 보고 당신이 이 나라에 시집온 것이 이런 불행을 맛보기 위한 것은 아니었을 거라며 미안해했고, 마리 역시 국민투표로 루이 16세의 처형이 결정되자 혁명군들이 보든 말든 품위와 체면 전부 다 갖다 버리고 루이의 품에 안겨 미친듯이 오열했고 끝내 감옥 안에서 남편이 처형당하는 소리를 듣고 시누이 엘리자베트 공주와 함께 절규하면서 슬퍼한다.

이후 마리는 루이 16세와의 관계에 대해 사랑이 없는 정략결혼이긴 했지만 아내와 남편으로서 20여년 간을 함께 살며, 자신에게 보여준 루이의 깊은 애정과 성실함은 진실했고 자신 역시 격렬한 연애 감정은 아니었지만 루이를 분명 사랑했다고 회고한다.

4.3. 페르젠

처음이자 평생동안 진심으로 사랑한 사람.

왕세자빈 시절 파리를 방문했을 때 오스칼만 데리고 신분을 숨기고 참석한 가면무도회에서 처음 만났고 서로 첫눈에 반한다. 사랑도 모르는 어린 나이에 정략 결혼을 온 자신의 처지와 소극적인 남편에게 제대로 된 사랑을 받지 못한 외로워하던 마리는 매력적인 페르젠에게 바로 빠졌으며, 진짜 신분(프랑스의 왕비/스웨덴의 귀족)을 알게 된 뒤에도 페르젠이 알현을 핑계로 매일같이 프랑스 궁정을 드나들며 자주 만남을 가지면서 이 둘은 지고지순하게 사랑을 키워왔다.

그러나 결국 불륜은 불륜이었고 가뜩이나 프랑스에서 오랜 적국인 오스트리아 출신의 외국여자라는 편견이 박힌 상황에서 페르젠과의 추문까지 나돌자, 마리 앙투아네트는 자신을 성적으로 조롱하는 팜플렛까지 돌아다니며 조롱당하고 왕비로서의 권위도 떨어지는 지경에 이르게 된다. 이 상황을 보다 못한 오스칼의 조언으로 페르젠이 프랑스를 떠나지만 문제는 여기서 마리 앙투아네트가 페르젠의 부재에 대한 공허함과 외로움 때문에, 폴리냑 부인 등의 간신들의 부추김에 넘어가 국정을 멀리하고 패션과 도박에 빠져 사치하면서 가뜩이나 위기에 처한 자신의 평판을 스스로 깎아 먹고 만다.

거기다가 루이 16세의 무능과 아내의 잘못된 행동을 방임하는 우유부단함이 겹치면서 마리의 평판은 걷잡을 수 없이 떨어졌고, 결국 다이아몬드 목걸이 사기 사건이란 대형 사고가 터지면서 마리는 나라를 망치는 악녀이자 욕받이로 낙인찍히고 만다. 이후 마리 앙투아네트는 정신을 차리고 페르젠의 조언대로 간신들을 멀리하지만, 이미 때는 늦어서 왕실을 향한 프랑스의 여론은 떨어질대로 떨어지고 결국 프랑스 혁명이 일어난다.

그래도 다른 왕족과 귀족들이 자신들을 버리고 외국으로 도피하는 반면, 페르젠만은 끝까지 자신과 루이 16세의 곁을 지켜주자 그에게 더욱 의지한다. 이후 페르젠의 적극적인 도움으로 가족들과 함께 바렌을 거쳐 친정인 오스트리아로 도주를 시도하지만 중간에 루이 16세의 강권으로 헤어지게 되자 눈물을 흘린다. 그러다가 바렌으로 도주하는데 실패하고 파리로 끌려가 튈르리 궁에 유폐된 자신을 페르젠이 목숨을 걸고 변장한 채로 찾아오면서 감격스러운 재회를 하지만, 이미 루이 16세와 자신의 최후는 정해져있었고 살아남을 거라고 생각치 않으니 차라리 왕비로서 아름답게 최후를 맞이하겠다며 페르젠과의 도피를 거절하면서 영원히 헤어지고 만다. 결국 마리 앙투아네트는 단두대에서 참수당하고 페르젠 역시 그녀의 사후 국민들에게 가혹한 정치가로 돌변하여, 원한을 산 스웨덴 국민들에게 살해당하면서 두 연인은 하나같이 모두 비참한 최후를 맞는다.

일단 장본인들은 진정한 사랑이라 생각했고 어린 나이에 시집간 타국에서 힘들어 한 마리 앙투아네트에게 페르젠과의 관계는 개인적으로 심적인 위로를 주었을지는 몰라도, 결국 본질적으로는 부도덕한 불륜 관계에 불과했고 마리 앙투아네트가 개인적인 감정에 치우쳐서 저지른 수많은 실책들과 마찬가지로 일국의 왕비로서도 해선 안될 짓이었다.[76] 결국 페르젠과의 불륜은 마리 앙투아네트에게 있어 평판을 떨어뜨리고[77] 후대에도 길이남을 이미지인 사치를 부리며 나라를 말아먹은 악녀로 낙인찍혀 단두대에서 처형당하는 원인이 된다. 게다가 두 사람의 사랑 아닌 불륜으로 애꿎은 아들 루이 샤를까지 페르젠의 사생아라는 루머에 시달리며, 온갖 뒷담화와 모욕을 당해야만 했으니[78] 마리 본인의 심적인 위로를 제외하고 그 어떤 것도 도움되지 않은 관계였다.[79]

5. 기타

당시 조국인 오스트리아를 통치하던 어머니 마리아 테레지아의 영향으로 왕족이나 신하들이 정부를 두거나 성적으로 문란한 것에 대해 부정적이었다. 이때문에 시할아버지 루이 15세정부뒤바리 부인도 싫어했으나 정작 자신은 남편을 냅두고 페르젠과 대놓고 불륜(...)을 저질렀다.[80] 물론 만화 내에서는 물론 실제 역사에서도 역사학자들의 추측에 의하면 페르젠과 마리 앙투아네트의 만남은 플라토닉한 관계로 그려지며, 마리도 장남인 루이 조제프가 척추결핵(척추카리에스)으로 사경을 헤매자 자신의 불륜행각 때문에 아들이 아프게 되면서 벌을 받는 게 아닌가 생각했을 정도로 깊이 반성했다.

외전인 브레게의 시계 에피소드 편에서 실제 역사처럼 브레게에게 가장 뛰어난 시계를 만들라고 부탁하는데 이때 자신의 운명을 직감한 듯한 모습을 보인다. 혁명 이후 콩시에르쥬리에 감옥에 갇혔을 때 필요한 물건을 물어본 국민의회에게 브레게의 시계를 원한다고 요청한다. 당시 브레게는 국민의회의 추적을 피해 스위스로 망명했지만 마리 앙투아네트는 다행히 로잘리에게 브레게의 시계를 받고 시간을 되새기면서 힘든 재판을 이겨나간다. 마리 앙투아네트의 사후 브레게와 그의 아들이 마리 앙투아네트의 시계를 완성하는 걸로 끝난다.

한참 뒤에 나오는 Fate/Grand Order마리 앙투아네트가 영향을 받았다는 말이 있다. 발랄하고 화려한 소녀틱한 외모에 더해 성격도 화사하고 발랄하나 왕족다운 면모가 있고 세간에 퍼진 편견과 달리 상냥한 성품이었다는게 고증된 점, 오스칼에서 많이 컨셉을 따온 듯한 슈발리에 데옹과 붙어다닌다는 점 등등. 다만 이쪽 마리는 금발인데 페그오 마리는 은발. 다만 엄연히 역사적인 마리 앙투아네트 왕비의 실책도 적나라하게 묘사된 베르사이유의 마리 앙투아네트와 달리,[81] 페그오의 마리는 그런 단점들이나 부정적인 면모는 보다 희석되었다.[82] 그러면서도 막간의 이야기에서는 마냥 긍정적인 면만 있지 않다는 것 또한 강조된다.

후속작인 오르페우스의 창에서도 마리 앙투아네트와 몇 가지 비슷한 부분이 있는 캐릭터인 안토니나 크리코프스카야가 등장한다. 둘 다 당대 최상위계층 출신[83], 귀족주의적인 사고방식, 화사하고 발랄한 인상을 지니고 공들여 치장하고 다니는 화려한 미인, 남편이 있는 와중에 불륜을 저지른 점, 자기중심적인 사고방식과 혁명을 지지하는 평민 계층이 그들의 몰락에 어느 정도 영향을 준 것 등등이 닮았다. 다만 순수하고 천진난만한 느낌이 있는 마리와 달리, 안토니나는 확실히 현실적이고 속물적인 구석도 있다. 둘 다 버젓히 남편이 있는데도 불륜을 저지르고, 그 불륜 상대에 대한 연애 감정 때문에 감정적으로 변하는 건 비슷하지만.

다카라즈카 가극단의 뮤지컬 버전에서는 원작과 다르게 마리 앙투아네트 그녀의 생애보다는 페르젠 백작과의 사랑을 좀더 강조했고, 남역 위주인 다카라즈카답게 페르젠을 자주 띄워주면서 비중도 조금 밀렸다. 다만 재연할수록 이게 좀 심해져서 원작의 주인공이라는 말과 무색하게 비중이 점점 반쯤 공기화 되어가며 쩌리 수준으로 떨어졌다.

6. 외모

작중 언급에 의하면 예쁜 금발[84]을 지닌 보는 사람마다 감탄할만큼 아름답고 매력적인 여인으로 묘사된다. 오스칼과 더불어 베르사이유의 장미 내 최고 미인. 다만 성숙하고 차가운 분위기의 냉미녀인 오스칼과 대조적으로 마리 앙투아네트는 발랄하고 순수한 소녀스러운 미녀로 등장한다. 이후 나이가 들고 정신적으로도 좀 성장한 뒤에는 보다 왕비답게 어른스러운 미인이 되며 헤어와 패션 스타일은 물론 애니메이션에서도 성우의 목소리 톤이 점점 성숙하게 바뀌는 걸 알 수 있다.

실제 역사에서 마리 앙투아네트는 순박하고 매력적인 외모이긴 했지만 좌중을 감탄시킬 정도의 엄청난 미녀[85]까진 아니었다고 한다. 그래도 동서양을 막론하고 미인의 기준이었던 백옥같은 피부와 육식 위주의 식사와 과식으로 대부분 뚱뚱했던 당대 왕족들과 반대로 호리호리한 몸매, 왕족 특유의 타고난 우아함과 나긋나긋한 화술에 뛰어난 패션 센스까지 적극 활용하여 당대의 스타일 아이콘이자 미인으로 군림했다.


[1] 본명은 독일어로 마리아 안토니아 요제파 요하나 폰 외스터라이히로트링겐(Maria Antonia Josepha Johanna von Österreich-Lothringen).[2] 신성 로마 제국 황제 프란츠 1세와 오스트리아의 여대공 마리아 테레지아의 딸로서, 출생 당시의 국적은 신성 로마 제국이었지만 루이 16세와 결혼하면서 프랑스로 바뀌었다.[3] 결혼하지 않고 큰언니 마리아 안나처럼 수녀가 되어 인스브루크 수녀원의 원장이 되었고 평생 마리아 안나와 같이 살았다.[4] 1761년 천연두로 사망.[5] 1767년 천연두로 사망.[6] 에르콜레 3세 데스테의 딸 마리아 베아트리체와 결혼해 외스터라이히에스테 대공가를 개창했지만 1875년에 남계 후손이 단절되었다.[7] 쾰른 선제후 겸 대주교.[스포일러] 바렌 사건의 실패 후 시민들에게 온갖 위협과 조롱을 당하며 파리로 끌려간 충격 탓에 머리가 하얗게 세어버리면서 은발벽안이 되었다.[9] 2018년에 그녀가 세상을 떠나면서 KBS판의 오스칼 성우와 마리 앙투아네트 성우가 모두 고인이 되었다.[10] 프랑스의 왕세손비가 된 지 얼마 안된 소녀 시절이다.[11] 왕세자비 시절 앙드레의 실수로 타고 있던 말이 흥분하여 달려가는 낙마 사고가 벌어졌을때 오스칼과 페르젠을 도와 앙드레를 변호했고, 로잘리도 마리 앙투아네트를 소문대로 악녀라고 생각해 그녀를 꺼렸으나, 실제로 만난 마리가 소문과 달리 우아하고 다정한 것을 보고 당황했다.[12] 이 자존심은 시할아버지 루이 15세의 정부인 뒤바리 부인에게 절대 말을 걸지 않는 것(신분제였던 당시 프랑스 귀족 사회에서는 신분이 높은 귀부인이 먼저 말을 걸어주기 전에 신분 낮은 귀부인이 말을 걸 수가 없었다.)과 이후 메르시 백작의 설득으로 마지못해 말을 건 후 오스트리아공주이자 일국의 왕세자비인 자신이 천민 출신 애첩에게 졌다며 결국 뛰쳐나가 울었던 에피소드에서 잘 드러난다.[13] 실제 역사에서도 마리아 테레지아는 시집간지 7년 가까이 아이를 낳지 못하는 마리 앙투아네트에게 "대자연이 찾아왔다"라는 사생활까지 감독하는 편지를 받을 정도로 막내딸을 많이 신경썼다. 게다가 아들 요제프 2세처럼 프랑스의 불안한 현실을 직감해서 사돈인 루이 15세의 서거 소식을 듣자마자, 메르시 백작에게 마리를 지켜봐달라고 당부하고 동시에 내 딸의 행복한 나날은 이제 끝났을지도 모른다라는 불안한 예견을 남겼는데 이 예견은 최악으로 이뤄지고 말았다.[14] 마리 앙투아네트가 갓 시집을 올 당시 루이 15세의 왕비인 마리 레슈친스카와 왕세자비인 작센의 마리아 요제파는 이미 사망했고 당시 왕비 역할을 해오던 뒤바리 부인은 명목상 왕의 애첩 신분에 불과 했다.[15] 이 어색한 관계에는 마리가 첫 만남 때부터 아내 될 사람에게마저 낮을 가리는 루이 16세에게 실망한 것도 있지만 루이 16세는 소극적인데다 취미도 독서, 사냥, 자물쇠 만들기처럼 정적인 반면 마리는 활달하고 연극이나 무도회에서 사람들과 어울리며 노는 걸 좋아해서 성격부터가 정반대인 것도 한몫했다. 설상가상으로 루이는 그런 자신이 볼품없다고 생각해 마리에게 가까이 다가가지 못하고 그런 루이에게 마리는 실망하는 악순환의 연속이었다. 그나마 루이는 가정에 충실한데다 호색한도 아니어서 할아버지 루이 15세처럼 정부를 들이는 등의 바람은 피우지 않았다.[16] 예를 들어 프랑스 왕궁에는 매 시간마다 왕비나 왕세자비가 귀부인들 앞에서 공개적으로 옷을 갈아입는 일명 ‘투알레트’라는 의식이 있었다. 게다가 과정도 그냥 옷을 갈아입고 끝나는 게 아니라 담 다투르가 치마를 보여주면 담 도뇌르가 입히고 담 도뇌르가 속옷을 골라주면, 다음 귀족이 입히는 역할이 하나하나 정해져있고 만약 담 도뇌르보다 서열 높은 귀족이 들어오면 그녀에게 권한이 넘어가는 온갖 까다로운 절차가 있었다. 이렇다보니 왕비나 왕세자비는 30분이 넘도록 추위에 떨며 수행원들이 옷을 입혀주기를 기다려야 했다.[17] 작중뿐만 아닌 실제 역사에서도 왕비에 오른 후 화려하게 치장한 자신의 초상화를 어머니 마리아 테레지아에게 보내지만 마리아 테레지아는 "이건 프랑스 왕비의 초상화가 아니라 화려하게 치장한 여배우의 초상화"라고 날카롭게 비판하며 딸의 어리석은 행동에 한탄했다.[18] 이후 요절한 장남 루이 조제프의 장례식에 치룰 돈조차 없어서 궁정 내 은식기나 보석을 팔아 겨우 돈을 마련해야 할 정도로 악화된 프랑스의 재정 상태를 듣고 이제껏 자신이 부려온 사치에 대한 응보를 받았다고 크게 후회하며, 프랑스 혁명 재판 때 검사측이 사치를 부리느라 국민들의 세금을 낭비하지 않았냐고 추궁하자 마리 앙투아네트도 자신이 상상한 이상의 돈이 들어갔을 거라며 인정할 정도였다.[19] 마리 앙투아네트가 왕비 자리에 오르자 먼저 한일이 총애하는 오스칼을 근위연대장으로 승진시키고 막대한 봉급과 선물을 보낸 것이었다. 그러나 대쪽같은 오스칼은 봉급 인상과 선물을 거절하고 마리 앙투아네트의 순진한 면모를 걱정했다.[20] 폴리냑 백작 가는 몰락 귀족 가문이어서 백작 부인도 어쩌다 한번 베르사유 궁전에 올 정도로 비천한 신세였다. 그러나 폴리냑 백작 부인이 자신의 사정을 말한 걸 마리 앙투아네트가 솔직하다고 제대로 착각해 폴리냑 백작의 벼슬을 올려주고 폴리냑 가에 품위 유지비 지원, 궁정 거주 허락권 등 파격적인 대우를 해서 귀족들도 반감을 보였다.[21] 게다가 마리는 연극을 보고 즐기는 것에 그치지 않고 직접 연극을 계획하고 출연하는 것을 좋아했는데 문제는 연극 주제가 귀족들을 풍자하는 '세비야의 이발사' 였다는 것. 당연히 이 이야기를 들은 오스칼은 "이 연극을 들은 평민들이 왕가를 어떤 눈으로 볼지에 대해 아무도 생각을 안한 것이 기가 막힌 일이다"라고 분노를 참지 못했다.[22] 프랑스 내에 마리를 성희롱하는 팜플렛이 돌아다니고 이를 근위대인 오스칼까지 발견할 지경이었다.[23] 정확히는 루이 15세가 자신의 정부였던 뒤바리 부인에게 선물하려고 주문 제작한 목걸이였지만 루이 15세가 사망하여 흐지부지되었다. 그후 보석상이 마리 앙투아네트에게 이 목걸이를 사달라고 제안했지만 마리는 그 돈으로 최신 포대가 달린 전함을 두대 사겠다고 거절했다.[24] 보석상이 마리 앙투아네트에게 목걸이 대금을 지불해달라고 편지를 보내면서 사태를 제때 눈치채고 무마할 기회를 얻었지만 마리는 찌라시라고 여기며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고 그냥 편지를 태워버리는 경솔한 행동을 벌였다.[25] 작중에서는 잔느(실존인물이자 다이아몬드 목걸이 사기 사건의 범인이었던 라모트 백작부인이 모티브)는 마리에게 추근덕거리던 로앙 대주교를 속여내서 돈을 뜯어내기 위해 필체 위조자를 이용해 마리 앙투아네트를 사칭한 연애 편지를 보내고 심지어 마리와 얼굴이 쌍둥이 수준처럼 닮은 창녀(니콜 올리버)까지 데려왔다.[26] 물론 마지막 부분에 있어서는 마리 앙투아네트는 실제로 페르센과 불륜을 벌였으니 좀 찔리는 부분은 있겠지만 그래도 잔느의 말대로 늘상 문란하게 생활하는 인간과는 거리가 멀었다.[27] 삼부회 때 성직자, 귀족, 평민측의 모든 대표가 루이 16세를 환영한 것에 반해 마리 앙투아네트가 들어왔을 때 환영 인사는 고사하고 싸늘한 눈으로 처다보고 수군거리며 아무도 반기지 않는 반응을 드러낼 정도로 마리에 대한 평가는 최악이었다.[28] 실제 역사에서 마리 앙투아네트의 어머니이자 오스트리아의 여제 마리아 테레지아는 귀족과 성직자에게 세금을 거두는 제도를 만들었고 그녀의 아들들인 요제프 2세레오폴트 2세도 나름 진보적인 정책을 펼쳤다. 그래서인지 몰라도 오스트리아의 합스부르크 왕조1차 세계대전까지 살아남고 마지막 황제인 카를 1세는 가난과 실의에 빠져 요절했지만, 그의 아내인 치타 황후와 자식들은 무사히 살아남아 어느 정도 천수를 누렸고 카를 1세의 자손을 포함한 합스부르크 가문의 직계 후손들은 현재까지 이어져오고 있다.[29] 게다가 만화에서는 묘사되지 않았지만 당시 프랑스 왕실은 세금을 걷는 권리를 국가 공무원이 담당하는 게 아니라 그 직책을 산 사람들이 하는 일명 세금징수업자들이 했기에 상황을 더 악화되었다. 예를 들어 한 마을에 걷을 세금이 100만원이라고 상정하면 세금 징수업자는 평균 200~300만원을 걷는 식으로 백성들에게 통상 2~3배의 세금을 걷어갔던 것이다. 이렇다보니 세금징수업자들은 막대한 부를 누리는 동시에 백성들의 공공의 적이 되었고, 그 업보로 혁명 이후 대부분 잔혹하게 처형되었으며 앙투안 라부아지에도 이런 케이스다.[30] 대표적으로 미국 독립전쟁에 참여한 라파예트 후작, 시예에스 신부가 있었으며 미라보 백작은 귀족 신분에도 불구하고 평민대표로 삼부회에 참여한다.[31] 마리 앙투아네트가 강한 자존심을 지닌 인물이었음을 고려해보면 사태의 심각성이 얼마나 컸는지, 또 그녀 스스로 그걸 얼마나 잘 인지하고 있었는지 알 수 있다. 여하튼 사과에서 어느 정도 진정성이 보인 탓인지, 분노하여 마리 앙투아네트를 궁전에서 작정하고 끌어내려 했던 민중들도 잠시 조용해졌을 정도다.[32] 파리로 떠나는 루이 16세 일가의 행렬을 본 한 시민이 "국왕, 왕후, 왕자를 모두 생포했다!"라고 소리칠 정도. 마리 앙투아네트도 과거 처음 파리에 방문했을 당시 시민들이 자신에게 환호와 찬사를 보내던 걸 떠올리고, 지금은 그때와 정반대로 온갖 비난을 받으며 쫒겨나는 꼴로 전락한 자신들의 초라한 현실에 절망하며 눈물을 흘린다.[33] 이렇게 도망간 사람들 중에는 마리 앙투아네트를 이용해 여러 특권을 뜯어낸 폴리냑 일가와 루이 16세의 동생들인 루이 18세샤를 10세도 있었다.[34] 작중 오스칼과 대립하고 평민 출신들을 차별했던 푸이에 장군은 낭시에서 벌어진 반란을 제압할때 주동자들을 교수형에 처하는 가흑한 처분을 해서 국민들이 왕당파에 반감을 사게 만들었고, 바렌 사건 당시 일을 엉성하게 진행하여 국왕 부부가 시민군에 체포당하는 계기를 마련했다.[35] 사실 오래 전부터 프랑스의 부조리한 현실에 의문을 품고 위병대로 있으면서 평민계급의 비참한 실상과 그들의 분노를 경험한 오스칼은 마리 앙투아네트에게 "군대를 철수시키고, 민중들의 분노를 달래주셔야 합니다"라고 탄원하지만, 마리 앙투아네트는 오스칼의 말조차 거절한다. 결국 이런 왕실에 실망한 오스칼은 귀족 신분을 버리고 시민군에 합류해 바스티유 감옥 함락을 성공시키까지 이른다. 사실상 마리 앙투아네트는 스스로 부르봉 왕가의 마지막 충신을 내친 것.[36] 하인으로 변장한 루이 16세와 귀부인인 척한 자신, 여장한 왕세자 루이 샤를, 공주 마리 테레즈의 정체까지 알아낸다. 참고로 실제 역사에서 드루에는 이전에 마리 앙투아네트를 본 적이 있어서 바로 왕비임을 눈치챘고 화폐에 새겨진 왕의 초상화를 통해 마리 옆에 있는 남자가 루이 16세라는 것도 알아보면서 국왕 일가임을 눈치챘다고 한다.[37] 애니메이션에선 심의 기준을 고려해 루이 16세와 마리 앙투아네트가 탄 마차를 둘러싸고 "왕과 왕비라는 작자가 어떻게 나라를 버리고 도망칠 수 있느냐!" 수준의 욕만 하는 걸로 묘사되었다.[38] 물론 마리 앙투아네트가 여러 실책을 했고 나라를 버리고 도망친 것은 용서할 수 없는 일이지만 아무 잘못도 없는 아이들에게 화풀이를 한 것은 선을 넘는 행동이었다. 결국 이에 대한 응보인지 몰라도 프랑스 민중들은 혁명 이후 로베스피에르의 공포 정치와 프랑스 혁명 세력을 경계한 각국의 간섭으로 인한 전쟁으로 온갖 고생을 겪는다.[39] 이후 루이 16세와 마리 앙투아네트 모두 처형당하자 페르젠은 바렌느 도주 때 끝까지 마리 앙투아네트와 함께하지 않았던 걸 죽는 그 순간까지 후회한다.[40] 이러한 분노는 비단 일반 시민뿐만 아니라 국민 의회도 마찬가지였다. 파리에 돌아온 루이 16세에게 한 의원이 "멋진 여행을 하셨더군요. 국왕 폐하... 인권 선언을 인정한다고 말씀하신 당신이... 혁명을 배신하고 프랑스 국민을 배반하다니..."라고 차갑게 일갈할 정도였고 외전에서 알랭 드 수아송도 파리로 끌려가는 국왕 일가의 행렬을 보고 국왕부부가 어떻게 이런 돌이킬 수 없는 짓을 저지르냐며 이건 부르봉 왕실의 장례식이라고 한탄한다.[41] 일단 남편인 루이 16세부터가 국왕의 몸으로 직접 맹세한 인권 선언마저 저버리고 외국으로 도망치려 했고 왕비인 마리 앙투아네트도 이를 말리긴 커녕, 아예 적극적으로 동의했으니 사실상 국왕 일가 전체가 스스로 혁명정부와의 공존 가능성을 완전히 내다버린 셈이었다. 더구나 만약 루이 16세 일가가 무사히 탈출해서 오스트리아에게 혁명세력을 반역자로 때려잡아달라고 요청하고, 이를 받아들인 오스트리아가 군대를 파견해 프랑스를 침공했다면 어떤 일이 발생할지는 너무나 뻔했다. 여기서 왕실 일가가 무죄라면 혁명정부가 유죄라는 소린데 결국 혁명을 지지하는 사람 모두가 죽어 마땅한 대역죄인이 될 지도 모르는 상황이니 이걸 혁명정부측이 두고 볼 리가 없었다.[42] 기묘하게도 이에 대한 응보인지 몰라도 루이 18세샤를 10세 모두 혁명 이후 해외를 떠도는 비참한 신세가 되었다가 나폴레옹의 몰락 이후 노년이 되어서야 겨우 조국에 돌아왔다. 그나마 왕위에 올랐다가 천수를 누리고 간 루이 18세와 달리 샤를 10세는 또다시 혁명 세력에 쫓겨나 살아생전 조국으로 돌아오지 못한 채 타지에서 외롭게 죽고 시신조차 조국에 돌아오지 못한다. 게다가 루이 18세는 자녀없이 사망하면서 후손 자체를 남기지 못했고 샤를 10세 역시 마지막 남계 후손인 앙리 5세가 자녀없이 사망하면서 부르봉 왕조의 남성 직계는 완전히 끊어지고 만다.[43] 당시 페르젠이 유럽의 여러 나라를 돌아다니며 루이 16세 일가의 구출을 요청했지만 대부분의 국가들은 이를 거절했다. 심지어 마리 앙투아네트의 친정인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황실마저 그 어떤 도움도 주지 않으면서 사실상 손절했다. 그나마 마리 앙투아네트와 가장 친한 언니들이었던 마리아 카롤리나마리아 아말리아만이 겨우 연락을 주고 받을 뿐이었고 오빠 레오폴트 2세바렌느 도주 사건 이후 상황의 심각성을 눈치채고, 여동생을 구하려는 협상을 벌이려 했지만 중도에 사망했으며 레오폴트의 아들이자 뒤를 이은 마리 앙투아네트의 조카 프란츠 2세는 고모와 고모부 일가를 구해주려는 시도조차 하지 않고 철저히 외면했다. 마리 앙투아네트의 사형 이후를 다루는 외전과 실제 역사에서도 아예 오스트리아 황궁 내에서 마리 앙투아네트의 이름을 입에 올리는 것조차 엄중히 금지할 정도였다.[44] 재판도 받지 않은 왕당파 죄수들을 무작정 국민들이 끌고가 죽였기 때문에 처형이 아니라 학살이 맞다. 이때 만화에서 묘사되진 않았지만 마지막까지 마리 앙투아네트를 지켜주던 랑발 공비도 그저 왕당파란 이유로 끔찍하게 살해당했다.[45] 이때부터 프랑스의 왕비 폐하라는 공식 칭호도 전부 박탈당하고 마담 카페(카페 부인)라고 불리게 된다. 남편 루이 16세도 폐위된 이후 처형될 때까지 거추장스러운 칭호 다 빼고 루이 카페란 본명으로 불렸다.[46] 명분은 루이 샤를에게 자신이 왕위 계승자라는 사실을 잊게 하고 공화국의 한 시민으로 성장시키기 위한 것이었지만 실제로는 루이 16세의 마지막 남은 아들이자, 왕세자로서 왕당파의 마지막 희망이자 구심점이 될 수 있는 루이 샤를의 신변을 혁명정부측에서 먼저 확보하기 위해서인 것으로 추정된다.[47] 그나마 원작에서는 우리라고 좋아서 이런 짓을 하는 게 아니라고 양해를 구하며 루이 샤를을 데려가고 저 대사도 차분하게 말하지만, 애니메이션에서는 마리 앙투아네트의 절규에 기도 차지 않는다는 듯 분노하며 저 대사를 소리친 뒤 루이 샤를을 강제로 데려간다.[48] 이 장면은 마리 앙투아네트가 루이 16세와 마찬가지로 개인적인 성품은 선량했을지언정 백성들의 현실과 시대적 변화를 파악하지 못했으며 일국의 왕비로서도 실격인 인물이란 걸 잘 보여준다. 작가 이케다 리요코도 마리 앙투아네트가 왕세손비 시절 파리 방문 때 환영하는 인파에 감동하는 장면에 "이때 마리 앙투아네트가 당시의 감동을 잊지 않았다면 그녀는 비참한 최후를 맞지 않았을 거다" 라는 각주를 달았다.[49] 더 비극적인 건 이후 루이 샤를은 혁명군들에게 세뇌당하여 그들과 함께 혁명가를 부르며 자신의 어머니인 줄도 모른채 탑에 갇힌 마녀가 빨리 죽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등, 본래의 신분과 처한 상황부터 어머니와 가족들은 물론 자신이 누구였는지조차 완전히 잊어버리고 만다. 외전에서 포로 교환으로 오스트리아에 간 누나 마리 테레즈 샤를로트와 다르게 루이는 등장하지 않은 걸 보면 실제 역사대로 요절했거나 아예 평범한 아이로 자라게 된 듯.[50] 외전에서 딸 마리 테레즈의 언급에 따르면 유일하게 남은 딸의 존재도 위로가 되지 않을 정도로 절망에 빠져 있었고, 로잘리에 의하면 콩시에르쥬리 감옥에 갇힌 후에도 코르셋에 몰래 아들의 머리카락과 초상화를 숨겨 가져가서 이를 보며 계속 울었다고 한다.[51] 마리 앙투아네트는 이 두 사람과도 죽을 때까지 재회하지 못했으며 마리 앙투아네트의 처형 후 시누이 엘리자베트도 처형되고 홀로 남은 마리 테레즈는 포로 교환 전까지 탕플탑에서 감금된다.[52] 마리의 소식을 듣자마자 국민 의회 일원인 남편 베르날을 통해 마리 앙투아네트의 시중을 지원했다고 한다.[53] 마리를 악녀로 보는 대다수의 대중들과 달리 마리 앙투아네트를 안타깝게 여기고 있었다. 그래서 마리를 구경거리로 보는 사람들을 쫒아내고 마리의 치장을 돕는 로잘리에게 꽃을 선물하거나, 방 안을 따뜻하게 해주는 등 이모저모 도움을 줬다.[54] 폴리냑 부인 등을 비롯한 총신들과 사치를 부리며 국민의 세금을 낭비했다는 것과 자신의 불륜남과 내통하여 바렌느로 도주할려는 계획을 세웠다는 혐의는 마리 앙투아네트조차 변명을 못하고 인정했지만 명백한 모함이었던 다이아몬드 목걸이 사기 사건과 그외 다른 사건들까지 전부 마리의 죄로 몰아갔다.[55] 이때 마리 앙투아네트는 자르제 백작에게 자신의 유품을 페르젠에게 전해주고 당신은 무사히 탈출하라고 부탁했다. 또한 외전에선 로잘리가 자르제 백작에게 마리 앙투아네트가 브레게의 시계를 원한다고 말하자 이때 자르제 백작은 아내의 유품인 시계를 준다.[56] 실제 역사에서도 루이 17세는 어머니 마리 앙투아네트가 자신을 겁탈했다는 증언을 하면서 어머니의 처형에 결정적으로 기여했고, 누나 마리 테레즈 샤를로트도 루이 17세의 사칭자들을 두고 부모를 죽인 죄로 총살시켜야 된다고 할 정도로 남동생을 평생 용서하지 않았다고 한다. 하지만 진짜로 모자간의 근친상간이 있었던 건 아니고 당시 혁명정부측이 마리 앙투아네트를 확실히 처형시키기 위한 물증으로 가족들과 전부 떨어진 채, 독방에 수감되어 간수들에게 학대까지 받으면서 육체와 정신 상태가 매우 불안정해진 어린 루이 17세를 세뇌시켜 거짓 증언을 받아냈다는 것이 정설로 통한다. 결국 루이 17세 역시 부모와 고모의 처형 뒤에도 계속 탕플 감옥에 수감된 채, 열악한 환경에서 온갖 학대를 당하다가 부모님이 처형된 지 2년만인 1795년에 고작 10살의 나이로 요절한다.[57] 이때 법정에서 로베스피에르생쥐스트는 에베르 저 멍청이가 왕비에게 승리를 가져다 주었다고 조소하며 마리 앙투아네트를 극도로 증오하던 아낙네들마저 에베르에게 반발할 정도였다.[58] 안타깝게도 이 편지는 엘리자베트에게 전달되지 못하고 루이 16세, 마리 앙투아네트, 엘리자베트의 사후 반세기가 지난 후에야 드러난다. 더 비극적인 것은 마리 앙투아네트가 편지에서 자신의 아이들만은 복수심을 품지 않고 행복하게 지내길 바란다고 쓴 것과 정반대로 이미 가족들과 떨어져 온갖 학대를 받던 루이 17세는 요절하고, 유일하게 살아남은 딸 마리 테레즈는 나폴레옹 몰락 후 조국으로 돌아오나 오랜 감옥 생활과 가족들의 죽음으로 인한 트라우마 때문에 메마르고 차가운 성정이 되었고 평생 혁명 세력과 프랑스 민중을 증오했다. 결국 과거의 상처를 극복하지 못해 백색태러를 여러번 일으켜 자신에게 동정적인 민중들의 민심을 잃어버려 7월 혁명으로 오를레앙 왕조가 집권하면서 프랑스에서 쫒겨나 죽을 때까지 돌아오지 못했다.[59] 애니메이션에서는 원작 만화에서처럼 당당한 모습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자신의 실책을 부정하거나, 울며불며 난리를 치지않고 그저 서글프면서도 차분한 표정으로 아무말 없이 조용하게 처형을 받아들인다. 그뒤 감옥 안에서 직접 휴지로 만든 장미꽃을 건네주며 "평소 오스칼이 좋아하던 색으로 장미를 칠해달라"는 말을 남긴 채 처형장으로 가고 단두대에서 최후를 맞이한다. 나중에 로잘리는 알랭에게 이 이야기를 들려주면서 막상 자신은 오스칼이 생전에 무슨 색의 장미를 좋아했는지 모른다고 한다. 그래서 로잘리가 앙투아네트에게 받은 휴지 장미는 알랭 앞에 보여질 때까지 여전히 아무 색도 칠해지지 않은 흰색이었다.[60] 남편 루이 16세는 가장 좋은 의례용 옷을 입고 금장 마차를 타고 처형대로 향했고 그곳에서 처형 집행인도 나름 예의를 갖추었다. 하지만 마리 앙투아네트는 그런 예우따윈 없이 단두대에 목이 잘리기 쉽게 긴 머리카락도 단발로 잘리고 두손이 묶인 채 짐마차에 앉아 처형대로 끌려갔다. 게다가 가는 길 내내 루이 16세의 처형을 엄숙하게 지켜보던 시민들도 마리 앙투아네트에게만은 온갖 욕설과 저주를 퍼붓는다. 참고로 처형대로 가는 마리 앙투아네트의 초라한 모습을 그린 자크 루이 다비드의 크로키가 남아있다.[61] 작중에서 적국인 프랑스와의 혼인 동맹이 맺어져 각종 공부나 준비로 노심초사해도 뭐할 판에 힘든 생각은 하지 않겠다는 것에서 이미 조짐이 보였고, 결혼을 주선한 어머니 마리아 테레지아도 힘든 일을 싫어하고 생각이 짧은 막내딸에게 오히려 왕비라는 지위가 독이 되지 않을까라는 생각에 내내 불안을 내쳤을 정도였다.[62] 당장 그토록 충성을 다바쳤던 오스칼도 마리 앙투아네트는 날이 세도록 무도회나 연극에 참석하고자 수차례 파리와 베르사유를 드나들었지만 정작 파리에서 프랑스 국민들이 어떻게 사는지는 단 한번도 알려고 하지 않았다고 한탄했고, 왕비로 즉위한지 얼마 안됐을 때부터 매번 하는 백성들의 일반 알현을 자신이 번거롭다는 이유로 없애려는 것에서 백성들의 삶에 대한 관심이 1도 없다는 조짐이 보였다. 이런 마리 앙투아네트를 무책임하다고 바라보는 인식은 독자들뿐만 아니라 작중에서 오스칼과 어머니 마리아 테레지아, 위에 서술된 혁명군의 대사를 통해 평민들부터 귀족들까지 너나 할 것 없이 잘 알고 있었다는게 드러난다.[63] 그러나 마리는 본인의 실책과 사치로 국가 예산이 파탄지경에 이르고 백성들은 한끼 하나 챙기지 못할 정도로 굶주리고 있는 절망적인 상황에서 국민들이 세금을 내는 것은 의무라는 내로남불적인 망언만 내뱉고, 프랑스 혁명이 일어나 파리로 끌려가는 상황까지 왔는데도 정신을 차리긴 커녕 철지난 왕권신수설을 주장하며 혁명 따윈 절대 인정치 않는다는 시대착오적인 모습만 보였다. 급기야 본인들의 안위가 위태로워지자 나라를 버리고 도망치려고 하고 프랑스 혁명정부와 프로이센과 오스트리아 연합군과의 전쟁이 벌어지자 차라리 프랑스군이 져서, 프로이센과 오스트리아 연합군이 빨리 파리로 침공해와 혁명따윈 박살을 내버렸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면서 나라의 안위는 전혀 신경쓰지 않는 왕비로서 최악의 모습을 보인다.[64] 이 단점은 왕세자비 시절 뒤바리 부인과 신경전을 벌일 때부터 잘 드러났다. 어머니의 영향과 오스트리아의 공주로 귀하게 자란 마리에게 왕의 애첩인 뒤바리 부인이 좋게 보일리 없다지만, 뒤바리 부인은 공인된 지위를 가진 '메트레상티트르(maîteesse-en-titre)'이고 무엇보다 시할아버지 루이 15세가 측근인 노아이유 백작부인, 메르시 백작을 통해 경고를 줄 정도로 사태는 심각했다. 그러나 마리는 이 경고를 듣고도 위기감을 전혀 느끼지 않고 흘려들었으며 결국 보다 못한 메르시 백작과 어머니 마리아 테레지아까지 훈육을 해서 마리를 뜯어말려야 했다.[65] 당장 마리의 사치 비용과 노름빚은 모두 마리의 개인재산이 아니라 프랑스 국민들의 세금으로 지출되었고, 어머니 마리아 테레지아는 물론 작가도 마리는 자신만의 즐거움을 위해 얼마나 많은 세금이 쓰였는지 알고나 있는 거냐고 비판했다. 게다가 마리아 크리스티나를 제외한 나머지 자매들은 중소 왕국 내지 공국으로 시집가거나 수녀가 된 것에 반해 마리가 시집간 프랑스는 오스트리아와 함께 유럽대륙을 양분했던 강대국이자 주변 나라들은 물론 적국인 오스트리아도 모방할 정도로 당시 트렌드를 선도했던 문화 선진국이기도 했다.[66] 당장 실제 역사에서 조지 6세의 아내인 엘리자베스 보우스라이언은 요크 공작 부인으로 평범하게 잘 살고 있었지만, 시아주버님인 에드워드 8세의 무책임한 퇴위로 원치도 않은 왕비자리에 올라야 했다. 그래도 엘리자베스는 갑작스러운 즉위와 그 직후 제2차 세계대전이 터지는 대 혼란 속에서도 망명 제의를 거부하고 영국에 남아 남편 조지 6세를 내조하고 폭격으로 엉망이 된 런던을 시찰하여 국민들을 독려하는 등, 왕비이자 국모로서 책임(무책임하게 퇴위한 에드워드 8세와 그 계기가 된 월리스 심프슨은 2차 세계대전 내내 나치 부역 및 반역 논란이 일었던 것과 대조적)을 다했다. 결국 엘리자베스 왕비와 조지 6세의 모범적인 모습은 영국 국민들이 영국 왕실을 신뢰하는 계기가 되었고, 이후 그들의 딸을 거쳐 외손자가 즉위하면서 영국 왕실은 현재까지 엘리자베스의 후손으로 번창하고 있다. 반면 마리 앙투아네트는 본인의 어리석은 행동으로 국민들의 신뢰를 잃어버리고 아들 루이 샤를은 페르젠과의 사생아란 루머에 시달리게 만들고, 유일하게 살아남은 딸 마리 테레즈도 탕플 탑에 갇혀서 지옥같은 유폐생활을 하게 만들며 자식들의 인생마저 망치고 말았다.[67] 물론 루이 16세와의 혼인은 마리 앙투아네트의 의사는 반영되지 않은 정략결혼이었기 때문에 하기 싫다고 안할 수 있는 건 아니었다. 게다가 실제 역사에서 원래 루이 16세와 혼인할 사람은 열번째 언니인 마리아 카롤리나였지만 아홉째 언니인 마리아 요제파가 사망하여 혼인 순번이 당겨지면서 마리 앙투아네트가 프랑스로 시집가게 된 것이다.[68] 작중에서 마리 앙투아네트의 추문이 돌아다니는 걸 보다 못한 오스칼이 마리 앙투아네트를 걱정해 "프랑스의 왕비이자 국모로서 자신의 입장을 자각하셨으면 합니다"라고 조언을 하나, 마리는 오스칼의 충언을 받아들이기 보다는 한 사람의 여자로서 자신을 이해할 수 없냐며 반박하는 장면에서 이 점이 잘 드러난다. 물론 마리 앙투아네트의 사정도 안타깝긴 했지만 자기 마음의 빈자리를 채우겠다는 지극히 개인적인 이유로 국고를 탕진하고, 그 돈이 다 어디에서 나온지 생각하면 이때부터 마리는 프랑스의 국모이자 왕비로서 완전히 실격이었다.[69] 초반부 드 게메네 공작과의 결투처럼 노블레스 오블리주에 따른 행동, 후반부 국민대표를 무력 진압하라는 왕실 명령 거부처럼 노블레스 오블리주와 상관없이 평등하지 못한 사회에 대한 정의감에 따른 오스칼의 행동을 묵인해줬다.[70] 마리 앙투아네트가 왕비가 되자마마 오스칼의 승진과 함께 엄청난 상을 내리나 오스칼은 딱잘라 거절하며 마리 앙투아네트가 훌륭한 왕비가 되는게 제 유일한 소망이라고 말한다.[71] 초반에 드 게메네 공작이 평민 아이를 시덥잖은 이유로 쏴죽이고도 처벌받지 않은 것, 로잘리의 양모 니콜이 폴리냑 백작부인의 마차에 뺑소니 사고를 당해서 사망했으나 가해자인 폴리냑 부인은 책임지지도 않고 튄데다 처벌도 안 받는 것 등등.[72] 작중에서 금서로 불리던 루소의 서적을 몰래 읽고 있거나 팔레 투야알에 가서 로베스피에르를 포함한 여러 혁명가들과 모임을 가지는 등 프랑스를 개혁하기 위한 준비를 하고 있었다.[73] 이때 인사를 드리러 온 오스칼과 서로 마지막 만남임을 예감하면서도 둘이 똑같이 눈물을 흘리며 '또 만나요'라는 인사말을 남기고 헤어지는 모습이 인상적이다. 이후 마리 앙투아네트와 오스칼은 살아생전 두번 다시 만나지 못하고 각각 바스티유 감옥과 단두대에서 사망한다.[74] 그런데 오스칼은 이미 그 전에 죽었기에, 과연 이들의 사형 여부를 놓고 투표전쟁이 벌어질 때 어느 쪽을 지지했을지는 영영 알 수 없게 되었다.[75] 그래봤자 불륜이긴 해서 페르젠과의 풍문으로 시끌시끌했고, 두 사람에 대한 추문이 마리 앙투아네트의 평판을 더욱 떨어뜨리는데 한몫 했다. 루이 16세도 이를 알아채곤 있었지만 어린 나이에 시집와서 사랑하지도 않는 사람과 결혼한 마리의 연애에 차마 손대진 못했다.[76] 과거 절대 왕정시대에서 왕비의 불륜은 그냥 사생활적인 문제가 아니라 반역죄로 취급되었다. 내연남과의 사이에서 낳은 아이를 왕의 자식으로 속여서 후계자로 내세울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당장 캐서린 하워드, 캐롤라인 마틸다, 엘리자베트 크리스티네가 불륜 문제로 이혼당하거나 처형당한 왕비 및 왕세자비다.[77] 마리 앙투아네트가 본격적으로 평민과 귀족 할 것 없이 프랑스 백성들에게 많은 비난을 받게 된 이유는 폴리냑 백작부인같은 간신들에게 둘러싸여, 온갖 사치를 부리며 국민의 세금을 낭비하고 국정을 등한시했기 때문인데 그 계기가 바로 페르젠이 떠난 공허함을 메우려고 했기 때문이다. 물론 페르젠도 혼인을 거부하고 마리와 자주 만남을 가지는 등 자기 감정대로 행동했지만 오스칼의 조언과 사태의 심각성을 인지하고 프랑스를 떠나거나 미국 독립전쟁에 참전하는 등 나름대로 처신을 했다. 그러나 마리는 최소한의 의무조차 안 지려하고 대놓고 페르젠을 총애하는 잘못된 처신을 일삼았고 결국 마리를 이해하고자 한 오스칼조차 그녀에게 실망한다.[78] 더구나 루이 16세와 마리 앙투아네트의 장남 루이 조제프가 불치병에 걸려 루이 샤를이 차기 왕세자로 지목되자 안그래도 왕위를 노리던 프로방스 백작 루이아르투아 백작 샤를은 공식석상에서 루이 샤를의 정통성을 대놓고 조롱하고 나중엔 루이 16세에게마저 익명으로 루이 샤를은 페르젠의 아들이라고 고발하는 편지까지 올 정도로 루이 샤를의 정통성을 흠집내는 일들이 빈번하게 벌어졌다.[79] 왕실을 가장 지지해야할 귀족들도 마리를 공식석상에서 "부끄러움을 모르는 오스트리아 여자"라고 대놓고 비난했으며, 바렌 사건이 실패한 이후 분노한 시민들이 온갖 욕설을 퍼부으며 마리 앙투아네트의 아들 루이 샤를을 페르젠과의 사생아라고 조롱하거나, 루이 16세의 처형 이후 재판에 회부된 마리 앙투아네트에게 검사측이 바렌 사건을 지원해준 사람이 페르젠이라고 캐묻는 걸 보면 두 사람의 불륜은 프랑스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유명했다.[80] 심지어 남편 루이 16세는 이전의 프랑스 왕들과 달리 가정에 매우 충실해서 그 어떤 여자와도 바람피우지 않았다.[81] 작가인 이케다 리요코가 역사 관련으로는 고증을 뚜렷이 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 이러한 정확한 역사 고증은 후속작인 오르페우스의 창에서도 그대로 나온다.[82] 이는 Fgo의 마리가 단순히 마리 앙투아네트 본인이 아니라, 프랑스 왕실 그 자체를 대표하는 존재로서 등장했기에 이런 차이가 있는 걸로 보인다. Fate 시리즈 자체가 질 드 레크리스토퍼 콜럼버스처럼 대놓고 변명의 여지 없는 악인인 경우가 아니라면 왠만해서는 긍정적인 면을 강조하는 경향이 있기도 하고.[83] 마리는 오스트리아 여대공 마리아 테레지아의 친딸, 안토니나는 러시아 제국 차르(황제) 니콜라이 2세의 조카.[84] 뒤바리 부인이 마리 앙투아네트가 자기에게 인사를 하지 않는다고 그녀의 머리색을 깎아내리며 험담하자, 그 말을 들은 루이 15세는 오히려 "마리는 예쁜 금발"이라며 손자며느리의 머리색을 칭찬한다. 하지만 뒤바리 부인은 이에 반발하며 붉은색이라고 끝까지 깎아내린다. 그런데 사실 서양의 금발 중엔 마리처럼 확실히 노란색으로 보이는 '허니 블론드' 도 있고, 붉은색이 좀 감돌아 주황색에 가까운 '스트로베리 블론드' 나 '진저 블론드' 도 있긴 하다. 초상화는 정작 은발이던데? 그리고 뒤바리 부인이 까내린 것과 달리 만화, 애니 모두 마리의 금발이 가장 밝고 화사한 금발로 묘사된다. 뒤바리 부인도 금발이긴 한데 애니 기준으로 마리와 비교해보면 확실히 칙칙하다. 또한 실제 역사에서 마리 앙투아네트는 당대 사람들이 가장 아름답다고 생각하는 백금발스러운 맑은 금발이었다.[85] 아마도 친정인 합스부르크 가문 특유의 주걱턱 때문일지도 모른다. 마리 앙투아네트의 실제 초상화에서도 그 주걱턱이 어느 정도 보이고(…) 코도 살짝 매부리에 얼굴도 긴 편이었다. 다행히 아랫 입술의 치아가 살짝 삐뚤어진 것뿐이어서 치아교정과 부채로 가리고 다녔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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