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레이시아 - 싱가포르 - 브루나이의 역사 | |||||||||||||||||||
{{{#!wiki style="margin:0 -10px -5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6px -1px -11px" | 소왕국 들 | 랑카수카 왕국 | 파항 왕국 | 멜라유 왕국 | 스리위자야 | 싱하사리 왕조 | 마자파힛 제국 | 믈라카 술탄 | 슬랑오르 느그리슴빌란 페락 파항 | 말레이 연합주 | <colbgcolor=#000000> 일본령 말라야 | 말레이 영국군정부 | 말라야 연합 | 말라야 연방 | 말라야 연방 | 말레이시아 | 말레이시아 | ||
조호르 트렝가누 클란탄 크다 프를리스 | 말레이 비연합주 | ||||||||||||||||||
부족국가시대 | 테마섹 | 포르투갈령 믈라카 | 네덜란드령 믈라카 | 해협식민지 | 영국령 피낭 | ||||||||||||||
영국령 믈라카 | |||||||||||||||||||
일본령 싱가포르 | 영국령 싱가포르 | 싱가포르 | |||||||||||||||||
비자야푸라 | 브루나이 술탄국 | 사라왁 왕국 | <colbgcolor=#000000> 일본령 북보르네오 | 사라왁 왕국 | 사라왁 식민지 | 말레이시아 | |||||||||||||
북보르네오 보호령 | 북보르네오 보호령 | 북보르네오 왕령식민지 | |||||||||||||||||
브루나이(영국 보호령) | 브루나이(영국 보호령) | 브루나이 |
말레이시아 공산반란 Communist insurgency in Malaysia Pemberontakan Komunis (1968-1989) 馬來亞共產黨叛亂 (1968年—1989年) மலேசியாவில் கம்யூனிச கிளர்ச்சி (1968 - 1989) | |||
냉전의 일부 | |||
날짜 | <colbgcolor=#fff,#191919>1968년 6월 17일 ~ 1989년 12월 2일 | ||
장소 | 말레이반도, 사라왁 | ||
결과 | 평화협정 체결 | ||
영향 | 말라야 공산당의 해산 | ||
교전국 | |||
말레이시아 싱가포르 태국 | 말라야 공산당 북칼리만탄 공산당 태국 공산당 | ||
지원국 | |||
지휘관 | |||
| |||
병력 | |||
| |||
피해 규모 | |||
|
|
[clearfix]
1. 개요
1968년과 1989년 사이에 말레이시아에서 중국의 지원을 받은 말라야 공산당에 의해 일어난 게릴라 전쟁으로, 제2차 말리야 비상사태로 불리기도 한다.2. 배경
1948년과 60년 사이에 일어난 말라야 비상사태 당시 말라야 공산당은 반란을 일으켰으나 실패했다. 1차 반란 이후 말라야 공산당은 새로운 게릴라전을 준비하며 군대를 재편성하고 재훈련을 실시했다. 또한 베트남 전쟁에서 게릴라전에 특화된 베트콩들의 게릴라 전술을 보고 새로운 기술을 개발하며 철저하게 반란을 준비했다.당시 중국은 말레이시아의 공산화를 이루기 위해 덩샤오핑을 통해 2번째 반란을 목적으로 말라야 공산당에게 10만 달러 지원을 약속했다.
3. 초기 공세
준비를 마친 말라야 공산당은 2차 반란을 일으켜 말레이시아 북부 지역에 매복하여 17명의 보안관을 살해했다. 이 사건은 2번째 반란이 시작되었다는 것을 알렸다. 또한 말라야 공산당의 대원 수는 1,600명으로 증가하였다. 중국은 여전히 몰래 은밀히 말라야 공산당을 포함한 공산당에게 지원을 했다.1969년 말레이시아 정부는 말라야 공산당의 반란에 대응하며 특수부대를 창설했고[1], 영국 SAS팀의 도움으로 104명의 병사를 훈련시켰고, 뉴질랜드의 도움으로 208명을 추가로 훈련시켰다.
4. 말라야 공산당의 내부 분열
1970년 초 말라야 공산당은 태국인 신병들 중 90%가 정부의 스파이라는 황당한 보고가 들어왔다. 당원들은 서로가 서로를 스파이라고 의심하기까지 시작했다. 또한 지도자들의 다툼으로 마르크스-레닌주의 공산당과 혁명파인 2개의 파벌로 분리되었다.그렇게 공산주의 운동은 3개의 다른 집단으로 분리되었는데, 이들은 각각 독자적인 군대를 가지고 있었다. 이후 게릴라들은 "말라야 민족해방군" 대신 "말레이시아 인민해방군"으로 개칭되었다. 1975년 사이에 여전히 공산당의 활동이 늘어난 것은 대중들에게 말레이시아-중국의 수교에도 불구하고 혁명 투쟁을 계속하겠다는 의지를 보여주는 것이였다.
5. 말레이시아 정부의 대응
말레이시아는 공산당의 반란과 테러를 퇴치하기 위해 보안 조치를 강력하게 강화했다. 1975년 말라야 공산당의 활동이 최고조에 달했을 때 말레이시아 정부는 민중의 공포를 악화시키지 않고 외국인의 투자가 줄어드는 것을 막기 위해 비상사태를 선포하지 않았다.말레이시아는 중국의 지도부에게 말라야 공산당의 무장해제를 촉구할 것을 요구했다. 1988년 말레이시아 북부 지역에 있던 말라야 공산당 지도부는 평화협상에 참여하자는 정부의 제안에 동의했다. 이유는 1980년대 당시 말라야 공산당은 동유럽의 공산국가들이 하나둘씩 무너지는 것을 보고 말레이시아에서 공산 정부를 구성할 기회가 없다는 사실을 받아들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