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3-12 15:09:01

맹모삼천지교

고사성어
맏 맹 어미 모 석 삼 옮길 천 어조사 지 가르칠 교

1. 개요2. 원문3. 실체4. 현대 사례5. 비판6. 기타

1. 개요

맹자의 어머니 급씨(伋氏)가 맹자의 교육을 위해 세 곳을 이사했다는 데에서 유래한 이야기. 전한 때 학자 유향(劉向)이 지은 열녀전(列女傳)에 등장한다. 맹자를 길러낸 맹모의 교육열을 잘 보여준다. 그래서 현대에 와서는 자식에게 극단적인 교육열을 내보이는 극성 부모들을 비판하거나 풍자하는 데도 주로 쓰이고 흉악범들의 열악한 성장배경을 보며 사람은 환경이 중요하다는 고사가 되었다.

2. 원문

鄒孟軻之母也 號孟母 其舍近墓
추현(鄒縣)의 맹가(孟軻)의 어머니는 '맹모(孟母)'라 불린다. 그의 집은 묘지 근처에 있었다.

孟子之少也 嬉遊為墓間之事 踴躍築埋
맹자가 어렸을 때, 묘지에서 벌어지는 일을 하면서 즐겁게 놀았는데, 그것은 춤추며 뛰며 다지며 묻는 일이었다.

孟母曰 此非吾所以居處子也
맹모가 말했다. "이곳은 내가 자식을 살게 할 곳이 아니다."

乃去舍市傍 其嬉戲為賈人衒賣之事
이에 떠나 집을 시장 근처로 이사했다. 그러자 맹자는 장사꾼이 파는 일을 하면서 즐겁게 놀았다.

孟母又曰 此非吾所以居處子也
맹모가 또 말했다. "이곳은 내가 자식을 살게 할 곳이 아니다."

復徙舍學宮之傍
다시 집을 학교 근처로 이사했다.

其嬉遊乃設俎豆揖讓進退
그러자 맹자는 조두(俎豆)[1]를 늘어놓고 읍양(揖讓)[2]하며 나아가고 물러나는 것을 하며 즐겁게 놀았다.

孟母曰 真可以居吾子矣 遂居及
맹모가 말했다. "참으로 나의 아들을 살게 할만한 곳이다." 마침내 살 곳에 도달했다.

孟子長 學六藝 卒成大儒之名
맹자가 성장하여 육예(六藝)[3]를 배우니 마침내 학식이 높은 선비로서의 명성을 이루었다.

君子謂孟母善以漸化
군자(君子)가 이르기를, "맹모는 좋은 것으로 점차 교화시켰다."고 했다.

詩云 彼姝者子 何以予之 此之謂也
시경(詩經)에 이르기를, "저 순박한 아이에게 무엇을 줄 것인가?" 라고 했는데, 그것은 이를 두고 한 말이다.
열녀전(列女傳) 모의전(母儀傳)

열녀전에 따르면 맹자의 집은 원래 공동묘지 근처에 있었다. 때문에 어린 맹자는 자라오면서 평소 보았던 대로 상여 옮기는 흉내와 곡하는 시늉을 하거나 상여꾼이 부르는 노래를 부르면서 놀았는데, 맹자의 어머니 맹모가 이를 보고 아이의 교육에 좋지 않다고 걱정하여 시장으로 이사를 가니 이번에는 맹자가 친구들과 상인 흉내만 실컷 내며 놀았다.[4] 맹모는 이 역시 아이의 교육에 올바르지 않은 환경 탓이라고 생각하여 마지막으로 공자를 모시는 문묘 근처[5]로 이사를 갔다. 그러자 마침내 맹자가 관원들의 예절을 따라하고 제례를 지내는 시늉을 하며 놀았으며 글월을 외는 공부에도 관심을 가졌다. 맹모는 그제서야 만족하여 그 곳에 계속 거주하였으며 이후 맹자는 맹모의 맹모단기지교의 가르침을 거쳐 대학자가 된다.

3. 실체

이 이야기는 사실은 역사적 근거가 별로 없다. 원래 열녀전이 쓰여진 시기는 맹자의 시대보다 몇백년이나 뒤이며, 그 사이의 기록에는 딱히 비슷한 일화가 나오지 않는다. 춘추전국시대의 문헌에는 이런 이야기가 거의 보이지 않으며, 그저 세간에 떠도는 전설이거나 유향의 창작이라고 봐야 할 것이다. 맹자는 자신의 학문 경력에 대해서 '사숙(私淑, 사적으로 혼자 배웠다)했다'고 간단히 언급했을 뿐이다.

게다가 이 일화에 나오는 문화는 춘추전국시대보다는 전한 시대의 생활상을 반영한 것으로 보인다. 춘추전국시대 유가에서 장례식을 흉내내는 것은 딱히 이상하거나 해괴할 것이 없다. 원래 춘추전국시대 유가의 사회적 업무는 "관혼상제의 전문가"였다. 오히려 공자는 이런 관혼상제 의식을 어릴 때부터 흉내내서 놀이로 삼았으니 그야말로 '예'를 아는 성인다운 일이었다는 식의 일화가 전해진다. 심지어 공자는 자신이 여러 재주를 가진 이유가 유년 시절에는 천한 신분이라 갖은 일을 많이 했기 때문[6]이라는 발언도 했다.

무엇보다도 맹자는 성선설을 주장하면서 배우지 않아도 인간의 본래 마음을 잘 살핀다면 충분히 군자가 될 수 있다고 보았는데, 해당 고사에서는 공부 환경 때문에 이사를 가는 것이 매우 이상해 보인다. 즉, 고사의 얘기는 환경이 중요하다는 것인데 사람은 환경에 영향을 받기 때문에 환경이 중요하다는 것은 다름 아닌 고자의 주장으로, 이는 맹자가 심하게 비판했던 것이었다.

물론 맹모와 맹자는 다르지 않냐고 말할 수 있는데, 어찌 되었든 맹자의 주장이 맹모의 행동을 공격한 셈이 되어서 효(孝)를 중시했던 맹자 본인의 입으로 전승되기에는 힘든 얘기임에는 틀림없다. 그래서 유향이 창작할 때 맹자의 서사에 섣불리 공자와 닮은 점을 부여하려고 하다가 유향이 공자와 맹자의 차이를 간과해 버린 것이 아니냐는 의견이 보이기도 한다.

4. 현대 사례

오늘날의 대한민국에 적용하자면 이리저리 이사 다니다가 결국 강남 8학군, 과천시, 목동 같은 곳에 아파트를 분양받아서 이사가는 것을 예로 들 수 있다. 몇 번의 전학, 이사 끝에 강남 8학군에 입성하여, 서울대 의대를 나와서 의사가 되었더라 정도로 생각하면 이해가 빠를 것이다.

더 극단적인 사례를 들자면 자녀 교육을 위해서 해외 이민을 가는 경우도 있다. 다른 의미에서 바라보자면 학부모가 교육을 위해 더 나은 학군으로 이사를 가서 자녀를 진학시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이런 일은 자녀가 초등학생 때 이뤄지는 것이 보통이지만 고등학교에 진학할 때 거주 지역의 제한을 받는 학교 배정제를 우회하여 유명 학군, 자사고, 특목고에 입학하기 위해 시도하기도 한다. 정치인, 특히 장관 후보자의 자녀 진학을 목적으로 한 위장 전입 전력이 발각되기도 한다.중국 교육열 관련 포스트

멕시코, 브라질과 같이 나라의 발전 가능성은 무궁무진한데 치안이 매우 불안한 곳도 맹모삼천지교의 영향을 받을 수 밖에 없다. 이런 곳들은 불량 학생 외에는 학생의 인격 형성에 위협을 줄 만한 요소가 없기 때문에 주변 환경이 나쁠 경우 그대로 자녀에게 영향을 미친다고 보면 된다. 멕시코와 브라질 같은 곳은 나라 자체는 어느 정도 건실하지만 불량 학생들이 강도 같은 행동을 하고 다니고 그 불량 학생들의 가정을 보면 문제가 많기 때문에 고려 사항이 되기도 한다. 다만 서양의 국가들은 치안 같은 요소도 중요하게 고려되지만 한국이나 중화권은 유독 맹모의 일화처럼 학군을 강조하는 경향이 강하다.

5. 비판

통념과는 달리 실제로는 맹자의 집안은 마을에서 손꼽히는 부자였다. 재력이 있으니 오히려 저런 시행착오도 가능했던 것이다.

결국에는 좋은 학군으로 전학, 이사가는데는 돈이 상당히 많이 든다. 뭐가 되었든 이 이야기의 결론은 돈 많이 벌어서 보다 좋은 학군으로 전학, 이사를 가라는 것이다.

게다가 오늘날에 이 이야기를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이기에는 시대가 변해도 너무 변했다. 아이가 서비스업이나 상업에 재능이 있는데도 그 적성을 무시하고 부정적으로 취급한다는 문제도 있을 수 있다. 후술하듯 여불위와 같은 이야기는 이미 과거에도 이런 주장에 들어맞지 않는 사례가 있었다는 것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또한 막대한 이사 비용과 양도소득세를 어떻게 감당하려고 저렇게 하느냐고 불가능한 일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다.

6. 기타

맹꽁이 서당 13권에서는 한 학동이 이를 두고 3천번이나 이사를 다녔다는 드립을 쳐서 훈장님이 3번이라고 혼내는 내용이 나왔다. 주석으로 삼천의 천은 '일천 천(千)'이 아니라 '옮길 천(遷)'[7]임을 표기하였다.

맹자 어머니의 가르침은 여기서 끝나지 않고 맹모단기지교로 이어졌다.

한국에는 제목만 패러디한 '맹부삼천지교'라는 영화도 있다. 여기서는 아버지의 눈물 겨운 강남 분투기를 그려냈다.

맹자가 두 번째로 이사한 곳이었던 시장에서 맹자가 상인을 따라하는 것을 보고 오히려 여기에 터를 잡았으면 맹자가 거상이 되지 않았겠냐는 의견도 있다. 맹자보다 조금 후대에 살았던 여불위도 다름아닌 거상으로 시작해서 권력자의 반열에 오른 인물이었다. 물론 그런 여불위도 최후는 비참했지만


[1] 제사 지낼 때 쓰는 그릇[2] 읍하는 동작과 사양하는 동작[3] 과거 중국의 여섯 가지 교육과목. 禮, 樂, 射, 御, 書, 數로서 각각 예법, 음악, 궁술, 승마 및 마차, 글쓰기, 수학을 뜻한다. 서와 수를 지, 예와 악을 덕, 사와 수를 체로 묶어 지덕체 전인교육을 목표로 했다.[4] 판본에 따라 어린이용 위인전에서는 시장 바닥에서 상인들의 흉내를 내며 놀다가 그만 그 곳을 지나가던 모친에게 들켜서 (어머니의) 손에 이끌려 집으로 끌려가서 회초리종아리를 맞았고, 맹자는 흐느껴 울면서 다시는 안 그러겠다고 용서를 비는 내용도 나온다.[5] 판본에 따라서는 서당 혹은 학교라고 나오기도 하는데, 학교가 옛날로 치면 서당이므로 학교라는 표현도 틀린 표현은 아니다.[6] 이런저런 일을 하다 보니 이런저런 기술을 많이 알고 있다.[7] 국부천대(國府臺) 또는 천도의 그 "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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