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4-14 17:15:41

메나헴 베긴

<colcolor=#29499d>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ECECEC, #FFF 20%, #FFF 80%, #ECECEC)"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6px -1px -11px"
초대 제2대 초대* 제3대
다비드 벤구리온 모셰 샤레트 다비드 벤구리온 레비 에슈콜
제4대 제5대 제6대 제7대
골다 메이어 이츠하크 라빈 메나헴 베긴 이츠하크 샤미르
제8대 제7대* 제5대* 제8대*
시몬 페레스 이츠하크 샤미르 이츠하크 라빈 시몬 페레스
제9대 제10대 제11대 제12대
베냐민 네타냐후 에후드 바라크 아리엘 샤론 에후드 올메르트
제9대* 제13대 제14대 제9대*
베냐민 네타냐후 나프탈리 베네트 야이르 라피드 베냐민 네타냐후
* 이스라엘 총리는 임기가 단절되었다가 다시 집권해도 처음 집권했을 당시의 대수를 유지한다.
}}}}}}}}}}}}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Nobel_Prize.png
노벨평화상 수상자
{{{#!wiki style="margin: 0 -10px -5px"
{{{#cd9f51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555555,#aaaaaa
<rowcolor=#cd9f51> 1901 1902
파일:스위스 국기.svg 파일:프랑스 국기(1794-1815, 1830-1958).svg 파일:스위스 국기.svg 파일:스위스 국기.svg
앙리 뒤낭 프레데리크 파시 엘리 뒤코묑 샤를 알베르 고바
<rowcolor=#cd9f51> 1903 1904 1905 1906
파일:영국 국기.svg - 파일: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국기.svg 파일:미국 국기(1896-1908).svg
윌리엄 크리머 국제법학회 베르타 폰 주트너 시어도어 루스벨트
<rowcolor=#cd9f51> 1907 1908
파일:이탈리아 왕국 국기.svg 파일:프랑스 국기(1794-1815, 1830-1958).svg 파일:스웨덴 국기.svg 파일:덴마크 국기.svg
에르네스토 모네타 루이 르노 클라스 아르놀드손 프레데리크 바예르
<rowcolor=#cd9f51> 1909 1910 1911
파일:프랑스 국기(1794-1815, 1830-1958).svg 파일:벨기에 국기.svg - 파일: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국기.svg
데스투르넬 드 콩스탕 오귀스트 베르나르트 국제평화국 알프레트 프리트
<rowcolor=#cd9f51> 1911 1912 1913 1917
파일:네덜란드 국기.svg 파일:미국 국기(1912-1959).svg 파일:벨기에 국기.svg 파일:적십자 기.svg
토비야스 아서르 일라이휴 루트 앙리 라퐁텐 국제적십자위원회
<rowcolor=#cd9f51> 1919 1920 1921
파일:미국 국기(1912-1959).svg 파일:프랑스 국기(1794-1815, 1830-1958).svg 파일:스웨덴 국기.svg 파일:노르웨이 국기.svg
우드로 윌슨 레옹 부르주아 얄마르 브란팅 크리스티안 랑에
<rowcolor=#cd9f51> 1922 1925 1926
파일:노르웨이 국기.svg 파일:영국 국기.svg 파일:미국 국기(1912-1959).svg 파일:프랑스 국기(1794-1815, 1830-1958).svg
프리드쇼프 난센 오스틴 체임벌린 찰스 G. 도스 아리스티드 브리앙
<rowcolor=#cd9f51> 1926 1927 1929
파일:독일 국기(3:2 비율).svg 파일:프랑스 국기(1794-1815, 1830-1958).svg 파일:독일 국기(3:2 비율).svg 파일:미국 국기(1912-1959).svg
구스타프 슈트레제만 페르뒤낭 뷔숑 루트비히 크비데 프랭크 켈로그
<rowcolor=#cd9f51> 1930 1931 1933
파일:스웨덴 국기.svg 파일:미국 국기(1912-1959).svg 파일:미국 국기(1912-1959).svg 파일:영국 국기.svg
나탄 쇠데르블룸 제인 애덤스 니콜라스 버틀러 노먼 엔젤
<rowcolor=#cd9f51> 1934 1935 1936 1937
파일:영국 국기.svg 파일:나치 독일 국기.svg 파일:아르헨티나 국기.svg 파일:영국 국기.svg
아서 헨더슨 카를 폰 오시에츠키 카를로스 라마스 로버트 세실
<rowcolor=#cd9f51> 1938 1944 1945 1946
파일:국제연맹기(1939).svg 파일:적십자 기.svg 파일:미국 국기(1912-1959).svg 파일:미국 국기.svg
난센 국제난민 사무국 국제적십자위원회 코델 헐 에밀리 발치
<rowcolor=#cd9f51> 1946 1947 1949 1950
파일:미국 국기(1912-1959).svg 파일:Quaker_star-T.svg 파일:영국 국기.svg 파일:미국 국기(1912-1959).svg
존 모트 퀘이커 봉사협회 보이드 오어 랠프 번치
<rowcolor=#cd9f51> 1951 1952 1953 1954
파일:프랑스 국기(1794-1815, 1830-1958).svg 파일:프랑스 국기(1794-1815, 1830-1958).svg 파일:미국 국기(1912-1959).svg 파일:UN기.svg
레옹 주오 알베르트 슈바이처 조지 마셜 난민고등판무관사무소
<rowcolor=#cd9f51> 1957 1958 1959 1960
파일:캐나다 자치령 국기.svg 파일:벨기에 국기.svg 파일:영국 국기.svg 파일:남아프리카 연방 국기.svg
레스터 피어슨 도미니크 피르 필립 베이커 앨버트 루툴리
<rowcolor=#cd9f51> 1961 1962 1963 1964
파일:스웨덴 국기.svg 파일:미국 국기.svg 파일:적십자 기.svg 파일:미국 국기.svg
다그 함마르셸드 라이너스 폴링 국제적십자위원회 마틴 루터 킹
<rowcolor=#cd9f51> 1965 1968 1969 1970
파일:유니세프 로고.svg 파일:프랑스 국기(1794-1815, 1830-1958).svg 파일:국제노동기구 로고.svg 파일:미국 국기.svg
유니세프 르네 카생 국제 노동 기구 노먼 볼로그
<rowcolor=#cd9f51> 1971 1973 1974
파일:독일 국기.svg 파일:미국 국기.svg 파일:베트남 국기.svg 파일:일본 제국 국기.svg
빌리 브란트 헨리 키신저 레득토 사토 에이사쿠
<rowcolor=#cd9f51> 1974 1975 1976
파일:아일랜드 국기.svg 파일:소련 국기(1955-1980).svg 파일:영국 국기.svg 파일:영국 국기.svg
숀 맥브라이드 안드레이 사하로프 베티 윌리엄스 메어리드 코리건
<rowcolor=#cd9f51> 1977 1978 1979
파일:국제앰네스티 로고.svg 파일:이집트 국기(1972-1984).svg 파일:이스라엘 국기.svg 파일:인도 국기.svg
국제사면위원회 안와르 사다트 메나헴 베긴 마더 테레사
<rowcolor=#cd9f51> 1980 1981 1982
파일:아르헨티나 국기.svg 파일:UN기.svg 파일:스웨덴 국기.svg 파일:멕시코 국기.svg
아돌포 에스키벨 난민고등판무관사무소 알바 뮈르달 알폰소 가르시아
<rowcolor=#cd9f51> 1983 1984 1985 1986
파일:폴란드 국기(1928–1980).svg 파일:남아프리카 연방 국기.svg - 파일:미국 국기.svg
레흐 바웬사 데즈먼드 투투 핵전쟁방지국제의사회 엘리 비젤
<rowcolor=#cd9f51> 1987 1988 1989 1990
파일:코스타리카 국기.svg 파일:UN기.svg 파일:티베트 국기.svg 파일:소련 국기.svg
오스카르 아리아스 유엔 평화유지군 달라이 라마 14세 미하일 고르바초프
<rowcolor=#cd9f51> 1991 1992 1993
파일:미얀마 국기(1974-2010).svg 파일:과테말라 국기.svg 파일:남아프리카 연방 국기.svg 파일:남아프리카 연방 국기.svg
아웅산 수치 리고베르타 멘추 넬슨 만델라 프레데리크 빌럼 데 클레르크
<rowcolor=#cd9f51> 1994 1995
파일:이스라엘 국기.svg 파일:이스라엘 국기.svg 파일:팔레스타인 국기.svg 파일:폴란드 국기.svg
이츠하크 라빈 시몬 페레스 야세르 아라파트 조지프 로트블랫
<rowcolor=#cd9f51> 1995 1996 1997
파일:캐나다 국기.svg 파일:인도네시아 국기.svg 파일:인도네시아 국기.svg 파일:미국 국기.svg
퍼그워시 회의 카를로스 벨로 조제 하무스오르타 조디 윌리엄스
<rowcolor=#cd9f51> 1997 1998 1999
- 파일:아일랜드 국기.svg 파일:영국 국기.svg 파일:국경없는의사회의 로고.svg
지뢰금지국제운동 존 흄 데이비드 트림블 국경없는의사회
<rowcolor=#cd9f51> 2000 2001 2002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파일:UN기.svg 파일:가나 국기.svg 파일:미국 국기.svg
김대중 유엔 코피 아난 지미 카터
<rowcolor=#cd9f51> 2003 2004 2005
파일:이란 국기.svg 파일:케냐 국기.svg 파일:국제원자력기구 깃발.svg 파일:이집트 국기.svg
시린 에바디 왕가리 마타이 국제원자력기구 무함마드 엘바라데이
<rowcolor=#cd9f51> 2006 2007
파일:방글라데시 국기.svg 파일:방글라데시 국기.svg 파일:미국 국기.svg -
무함마드 유누스 그라민 은행 앨 고어 기후 변화에 관한 정부 패널
<rowcolor=#cd9f51> 2008 2009 2010 2011
파일:핀란드 국기.svg 파일:미국 국기.svg 파일:중국 국기.svg 파일:라이베리아 국기.svg
마르티 아티사리 버락 오바마 류샤오보 엘런 존슨 설리프
<rowcolor=#cd9f51> 2011 2012 2013
파일:라이베리아 국기.svg 파일:예멘 국기.svg 파일:유럽 연합 깃발.svg 파일:화학무기금지기구 로고.svg
리마 보위 타우왁쿨 카르만 유럽연합 화학무기금지기구
<rowcolor=#cd9f51> 2014 2015 2016
파일:파키스탄 국기.svg 파일:인도 국기.svg 파일:튀니지 국기.svg 파일:콜롬비아 국기.svg
말랄라 유사프자이 카일라시 사티아르티 튀니지 국민4자대화기구 후안 마누엘 산토스
<rowcolor=#cd9f51> 2017 2018 2019
- 파일:콩고민주공화국 국기.svg 파일:이라크 국기.svg 파일:에티오피아 국기.svg
핵무기 폐기 국제 운동 드니 무퀘게 나디아 무라드 아비 아머드
<rowcolor=#cd9f51> 2020 2021 2022
파일:UN기.svg 파일:필리핀 국기.svg 파일:러시아 국기.svg 파일:러시아 국기.svg
세계식량계획 마리아 레사 드미트리 무라토프 메모리알
<rowcolor=#cd9f51> 2022 2023
파일:우크라이나 국기.svg 파일:벨라루스 국기.svg 파일:이란 국기.svg
시민자유센터 알레스 발랴츠키 나르게스 모하마디 }}}}}}}}}}}}}}}
이스라엘 제6대 총리
메나헴 베긴
מנחם בגין|Menachem Begin
파일:מנחם בגין.jpg
이름 메나헴 베긴
מנחם בגין|Menachem Begin
출생 1913년 8월 16일
러시아 제국 브레스트[1]
사망 1992년 3월 9일 (향년 78세)
이스라엘 텔아비브
학력 바르샤바 대학교
직업 정치인
정당 헤루트(1948-1988)

(1988-1992)
배우자 알리자 베긴
자녀 슬하 3명
서명 파일:메냐헴 베긴 서명.svg
이스라엘 제6대 총리
임기1977년 6월 21일 ~ 1983년 10월 10일
파일:다비드의 별.svg
1. 개요2. 생애3. 정치 활동4. 총리 시절
4.1. 사회 정책4.2. 이스라엘-이집트 평화 협정
5. 퇴임과 사망6. 평가7. 저서8. 둘러보기

[clearfix]

1. 개요

이스라엘의 정치인이자 제6대 총리. 보수우익정당인 국민자유운동(리쿠드)의 창당주이며, 동시에 이스라엘-이집트 간의 평화에 기여한 공로로 노벨평화상을 수상했다.

2. 생애

1913년 당시에는 러시아 제국령이던 벨라루스 브레스트폴란드 유대인 집안에서 태어났다. 출생 당시 이름은 폴란드어로 미에치스와프 비에군(Mieczysław Biegun). 놀랍게도 출생 당시 조산사가 훗날 이스라엘의 총리가 되는 아리엘 샤론의 할머니이다.[2]

테오도르 헤르츨을 존경하던 열렬한 시오니스트인 부친의 영향을 받아 본인 또한 시오니스트가 되었다. 폴란드바르샤바 대학교에서 수학하면서 시오니즘 운동에 참여하였으며, 졸업 후에도 계속되었다. 그러나 1939년 폴란드가 독일에 의해 점령당하면서 베긴은 리투아니아로 이주해야 했는데, 리투아니아도 얼마 못 가 소련에게 점령당했다. 이때 베긴은 소련 당국에 의해 구속되어 모진 고문을 당했는데, 원인은 "대영제국의 간첩이 되려고 작정했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이후 정치범수용소에서 수감 생활을 했으나, 1942년 석방되었다.

석방 직후, 독일은 이미 소련의 유럽 지역을 상당 부분 점령했기 때문에 자유 폴란드군에 참여했는데[3], 이는 훗날 베긴이 이스라엘에 가게 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왜냐하면 베긴이 가담한 브와디스와프 안데르스 장군의 안데르스 부대가 당시 영국령 팔레스타인으로 보내진 뒤 대부분의 유대계 병력이 팔레스타인에 남았기 때문이다.[4]

팔레스타인으로 온 베긴은 곧바로 이르군이라는 시오니스트 테러 단체에 참여했다. 베긴은 테러 활동을 벌이면서도, 동시에 각종 전쟁을 거쳐 영국으로부터 독립을 시도한 아일랜드인도의 사례를 공부하며 이스라엘도 비슷한 방법으로 독립시키려는 방법을 강구했다. 당연히 영국의 팔레스타인 총독부가 가만 둘 리가 없었고, 베긴은 이르군의 구성원들과 더불어 용의선상에 올랐다.

3. 정치 활동

1948년 이스라엘은 영국으로부터 독립을 쟁취했고, 베긴은 이르군의 구성원들과 더불어 해방당(헤루트)을 창당했다. 이때 시온주의 수정주의자들의 반대에 직면했는데, 해방당은 이들과의 갈등을 피하지 못했다.

1965년 해방당은 자유당과 연합하여 해방자유연합(가할)이라는 연대를 결성했다. 이는 총선을 앞두고 분열된 보수우파진영의 연대와 승리를 위한 전략이었다. 베긴은 곧바로 이 연대의 주도권을 쥐었는데, 만약에 해방자유연합이 승리했더라면 이때 베긴은 총리가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노동당에 밀려 참패하면서 첫판부터 리더십이 흔들리기 시작했고, 주변인들의 사퇴가 잇따르면서 앞날이 캄캄해졌다.

다만 위안거리가 하나 있자면, 1967년 레비 에슈콜 총리(노동당 소속)에 의해 등용되면서 처음으로 내각에 입각했다는 점이다. 물론 당시 전쟁 중이었기 때문에 국민통합 차원에서 그랬을 뿐, 에슈콜의 총애를 받았던 것은 전혀 아니다.

하지만 보수우파진영의 분열은 여전했고, 이대로 가다가는 노동당/조정당에 밀릴 것이 뻔했다. 마침 1973년 총선이 다가오면서, 보수우파들로서도 연대 및 확대개편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늘어났다. 이에 해방자유연합을 확대개편하여, 오늘날의 국민자유운동(리쿠드)을 결성했다. 비록 골다 메이어 당시 총리가 이끌던 조정당의 51석에 한참 밀려 39석밖에 얻지 못했지만, 그래도 1969년 당시의 26석보다 13석이나 더 얻은 것만으로도 큰 의미였다. 이 시점부터 베긴의 리더십은 주변인들로부터 더 높은 신뢰를 받는다.

1977년 총선이 다가오면서, 국민자유운동으로서는 매우 긴장 상태에 놓였다. 일단 보수우파정당들을 모아놓은 연대 상태였고, 만약에 총선에서 승리하면 연대를 넘어 단일 정당의 통합으로 이어지는 지름길이 되었겠으나, 아니라면 내분이 벌어질 것이 뻔했다. 이때 베긴은 조정당을 "권위주의적, 극단적"이라고 강하게 비판했고, 본인은 "겸손한 인물"임을 강조했다. 덕분에 조정당의 인기를 떨어뜨리는 데 일정 부분 기여했으며, 마침내 국민자유운동이 43석을 얻으면서, 32석으로 추락한 조정당을 밀어내고 집권당이 되는 데 성공했다. 베긴은 이를 바탕으로 총리가 되었다.

이라크의 핵무장을 저지하기 위해 단행된 1981년의 오시라크 원자로 공습도 베긴의 총리 재임 시절에 이루어졌다.

4. 총리 시절

4.1. 사회 정책

총리직에 오른 베긴은 각종 사회 문제를 해결하는 데 전념했다. 일단 교육 개혁에 나섰는데, 의무 교육을 10학년까지 확대하는 한편 당시 유료였던 중등교육을 무상으로 전환했다. 이는 이스라엘 본토의 문해율을 높이는 한편으로 국민의 교육 수준을 향상하는데 큰 역할을 했다. 또한 장기간병보험제와 국민소득지원제를 도입하는 한편, 그간 "사회적 평등"을 빌미로 보류되었던 컬러 텔레비전의 도입 또한 이 시기에 이루어졌다. 때문에 이스라엘은 컬러 텔레비전을 상대적으로 늦게 도입한 나라로 기록되었는데, 대한민국도 비슷한 시기에 도입되었으며 그간 "사회적 불평등 조장"을 빌미로 거절했다는 점을 보면 크게 이상할 것이 없다. 운전면허 취득 연령 또한 17세로 낮춰졌다.

당시 이스라엘은 오랫동안 지속한 총력전의 여파로 사회간접자본 투자를 최소한으로 실행했고, 전국민의 의식주는 프랑코 시절의 스페인과 다를 바가 없었다. 이에 베긴 내각은 도시재정비촉진사업을 실행하면서 빈민촌에 대한 지원 및 재정비를 대대적으로 추진했다. 참고로 이는 베긴 본인이 직접 다 했으며, 1981년부터 주택부로 이관했다. 도시재정비촉진사업의 일환으로서 빈민촌들이 대거 철거되었고, 도로신호등상수도하수도를 포함한 사회간접자본에 대대적으로 투자했으며, 전국 방방곡곡에서 지역 주민들의 의식주도 빠르게 개선되었다. 특히 어린이들과 노약자들을 위한 복지시설, 경로당, 놀이터를 이 시기에 집중적으로 건설했다. 1983년 베긴이 퇴임할 무렵, 약 45만 명이 이 제도의 혜택을 받았는데, 오늘날에도 도시재정비촉진사업은 진행중이다.

보수우파로서 자본주의적인 요소를 강화한 것도 덤. 미국의 영향으로 이스라엘이 친미우익적인 국가로 인식되는 경향이 강하지만, 1970년대까지는 철저하게 틀린 얘기였고, 이스라엘에서 우익이 강세를 보인것은 아무리 짧아도 1970년대 말부터였다. 참고로 오랫동안 (이스라엘 기준으로) 진보에 속하던 노동당이나 조정당이 장기집권했고, 이러한 사회주의적인 정책으로 1950년대와 60년대에는 매년 두자릿수대의 경제성장률을 기록하며 큰 효과를 보기도 했다. 그러나 1973년에 있던 전쟁으로 막대한 인력손실이 있었고 또한 1974년 이래로 석유값이 폭등하면서 비산유국인 이스라엘의 물가와 실업률도 급속히 올라가기 시작하여 사회주의적 정책은 한계점에 도달하였다. 본격적으로 우파가 집권하면서 그 대안으로 민영화 정책등을 입안하기 시작되었는데, 베긴은 심하 에를리히를 재무부 장관으로 임명해 경제 체계의 우경화를 진행했다. 환율 조정에 있어서 국가의 개입을 최소화하는 대신 시장에 맡기고, 각종 소비재에 꼭 붙던 보조금제를 폐지했으며, 환전 자율화를 추진했다. 관광세를 폐지하는 대신 부가가치세가 상향되었다.

이러한 정책이 마냥 나쁜 것은 아니었고, 베긴 본인도 이를 바탕으로 민생이 개선될 것이라고 생각했으나, 오일 쇼크로 물가가 나날히 폭등하던 상황속에서 큰 실효는 없었다. 1983년 베긴이 사퇴한 직후, 이스라엘 경제는 위기를 맞이했다.

4.2. 이스라엘-이집트 평화 협정

베긴을 대표하는 업적은 무엇보다도 이스라엘과 이집트 간의 평화 협정을 맺은 것이다.

이스라엘의 건국은 아랍인, 무슬림 중심의 중동인들로부터 수많은 반대에 직면했으며, 건국 이후 중동 국가들은 이스라엘을 대표적인 주적으로 삼았다. 그나마 이스라엘이 지중해를 바라보고 있었다고는 하지만, 중동의 지형상 고립을 면치 못했다. 특히 1973년 제4차 중동전쟁에서 핵무기 사용까지 고려할 정도로 패전 직전까지 몰리는 상황을 경험한 후, 이스라엘 여론은 더이상의 아랍 국가들과 전면전은 안된다는 여론이 강해졌다. 그래서 베긴은 그동안 최대의 적이었던 이집트와 평화 협정을 맺고자 했으며, 마침 친미 노선으로 갈아타려던 이집트 대통령 사다트도 이에 호응했다.

1977년 11월 19일, 사다트는 이스라엘 수도 예루살렘을 방문하여 베긴과 첫 이집트-이스라엘 정상회담을 갖고 이스라엘 국회에서 평화를 촉구하는 연설을 하여 전 세계를 놀라게 했다. 이후 1979년 3월 26일, 베긴과 이집트 대통령 안와르 사다트는 미국 카터 대통령의 중재 하에 워싱턴 D.C.에서 평화 협정에 서명했다. 이는 매우 역사적인 순간으로 남았으며, 이를 바탕으로 그간 중동 국가들로부터 주적으로 규정되어 고립되어왔던 이스라엘로서는 이집트라는 아랍계 우호국이 생긴 셈이었다. 덕분에 베긴은 노벨평화상을 수상했다.

5. 퇴임과 사망

그러나 1982년, 미국에 잠깐 체류하던 중 아내의 사망 소식을 접했다. 베긴으로서는 충격이 매우 컸고, 무엇보다도 나이도 고령이어서 더이상 총리직을 맡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1983년 8월, 베긴은 동료들에게 "더는 못 하겠다"는 말을 남기고, 이츠하크 샤미르에게 총리직을 이양하고 퇴임했다. 이후에는 예루살렘 숲 부근의 아파트에서 여생을 보냈으며 베냐민 네타냐후를 비롯해서[5] 가자 지구와 서안지대의 동화가 불가능하며, 오슬로 협정을 국제협약으로 준수해야 한다고 본 리쿠드당의 온건파들이 이스라엘을 팔아먹는 매국노들이라고 혐오감을 감추지 못하는 행보를 보였다. 이후 1992년 3월 3일 그곳에서 심장마비로 타계했다. 향년 78세.

6. 평가

이스라엘 사회에 있어 현대화를 주도하고, 이집트와의 평화 협정으로 역사에 한 획을 그은 것은 긍정적인 평가를 받았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총리로서 비판도 만만치 않은데, 일단 무엇보다도 베긴은 리쿠드당의 창당주이다. 때문에 팔레스타인과 주변 아랍 국가들에 비해 강경한 노선을 견지했다. 젊은 시절이었던 이스라엘의 건국 초기에 과격 무장단체 이르군을 이끈 인물이었고,[6] 수상 재임 시절에는 이라크 오시라크 원자로 공습, 레바논 침공 등을 자행했다. 그나마 같은 리쿠드당 소속의 후임 총리들인 아리엘 샤론, 베냐민 네타냐후 등의 행적에 비하면 온건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베긴은 재임 중 내전이 한창중인 레바논을 침공했다. 이는 베긴에게 있어 매우 큰 과오로 남았다. 이집트와는 평화 협정을 맺었으면서, 정작 같은 아랍권 국가인 레바논의 내부 문제에 무력 개입하는 모순적인 태도를 보였기 때문. 이것은 훗날 베긴이 사임하는 원인 중 하나가 되었다.

7. 저서

  • The Revolt - 이르군에 대해 다룬 책이다.
  • White Nights - 베긴의 자서전. 소련에 수감되어 있던 시절의 삶을 기록했다.

8. 둘러보기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7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003399, #003399 20%, #003399 80%, #003399)"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0 0; color: #fff; min-height: 31px"
{{{#gold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6px -1px -11px"
{{{#181818,#e5e5e5
초대 제2대 초대 제3대
다비드 벤구리온 핀하스 라본 다비드 벤구리온 레비 에슈콜
제4대 제5대 제6대 제7대
모셰 다얀 시몬 페레스 에제르 바이츠만 메나헴 베긴
제8대 제7대 제9대 제10대
아리엘 샤론 메나헴 베긴 모셰 아렌스 이츠하크 라빈
제11대 제9대 제10대 제5대
이츠하크 샤미르 모셰 아렌스 이츠하크 라빈 시몬 페레스
제12대 제9대 제13대 제14대
이츠하크 모르데하이 모셰 아렌스 에후드 바라크 비냐민 벤엘리자르
제15대 제16대 제13대 제17대
샤울 모파즈 아미르 페레츠 에후드 바라크 모셰 얄론
권한대행 제18대 제19대 제20대
베냐민 네타냐후 아비그도르 리베르만 베냐민 네타냐후 나프탈리 베네트
제21대 제22대
베니 간츠 요아브 갈란트
}}}}}}}}}}}}}}}}}}



[1]벨라루스[2] 샤론 본인은 팔레스타인 출생이지만 샤론의 아버지는 브레스트 출신이었다. 어머니는 모길료프 출신.[3] 독일령이 된 고향에 남아있던 일가족들은 결국 희생당했다.[4] 안데르스를 따라간 나머지 병력들은 이후 서부전선에 투입된다.[5] 2023년 현재 이스라엘 총리 하는 그 양반 맞다. 놀랍게도 네타냐후는 샤론, 올메르트와 함께 90년대부터 부상한 리쿠드당 온건파 출신이다.[6] 제1차 중동전쟁을 전후로 하여 팔레스타인 지역에 거주하던 팔레스타인인들을 조직적으로 학살한 테러 조직이다. 당시 사용하던 방식은 군대가 포위한 다음에 집을 버리고 항복할 시간을 15분 동안 주고 그 뒤에 모든 사람들을 강간 살해, 노부부를 집안에 가두고 집을 폭파, 갓난아이를 업은 아랍인 여성을 불러서 강간한 다음에 일이 끝나고 퇴각하는 과정에서 아이와 여성을 모조리 살해, 사프사프 지역에서는 50여 명의 남자들은 우물에 던져넣고 총을 쏴서 죽이고 14세 여아를 포함한 적어도 4건의 강간살해, 사사에서는 백기를 확인하고도 1000여 명이 죽고 남은 인원은 마을에서 추방, 살라하에서는 94명이 폭사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