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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ရိုဟင်ဂျာﺭُﺍَࣺﻳﻨڠَ (Ruáingga)
Rohingya people
미얀마 서부 라카인주의 북부 지역에 주로 거주하는 소수민족. 전 세계적으로 약 250만 명이 살고 있다. 이들은 방글라데시에서 건너온 인도아리아 계통의 사람들이며 주로 이슬람을 믿고 방글라데시와 국경을 맞대고 있는 미얀마의 마웅다우, 부티다웅, 아캬브, 라테다웅, 캬우크타우를 중심으로 거주하고 있다. 미얀마 외에 방글라데시, 사우디아라비아, 파키스탄, 인도, 인도네시아, 말레이시아, 태국, 중국에도 존재하며 일본, 미국, 유럽[1]에도 이주한 극소수의 로힝야족이 거주한다.
UN 난민 기구 고등판무관을 역임하는 등 난민과 소수민족 문제에 정통하다고 알려져 있는 현임 안토니우 구테흐스 UN 사무총장은 로힝야를 가리켜 현재 세계에서 가장 박해받는 민족이라고 표현했다. 물론 미얀마인들 대부분, 즉 주류 민족인 버마족은 물론이고 카렌족, 샨족, 카친족, 몬족, 아라칸족[2] 등 여타 소수민족마저 이런 의견에 대해 매우 다른 견해를 갖고 있다. 후술하겠지만 버마족과 사이가 그리 좋지 않은 미얀마의 소수민족들도 로힝야족 앞에서는 하나가 되어 이들을 탄압하거나[3] 다른 미얀마의 소수민족들과는 동맹을 맺어도 로힝야와 손을 잡지 않는 모습을 보인다.
다만 미얀마 내전 과정에서 로힝야 세력을 이용하기 위해 반군이나 정부가 로힝야에게 당근을 제시한 사례들도 있으며, 로힝야도 모두가 적이나 마찬가지인 이런 상황에 저항하는 과정에서 마냥 피해자로만 남지는 않게 되어서, 미얀마의 로힝야 문제는 여러 민족들의 입장과 이해타산이 매우 복잡하게 얽히는 중이다.
2. 이름에 관하여
영어 | Rohingya (로힝야) |
스페인어 | Rohinyá (로인야) |
일본어 | ロヒンギャ (로힌갸) |
한국어 | 로힝야 |
태국어 | โรฮีนจา (로힌짜) |
러시아어 | Рохинджа (로힌자) |
그리스어 | Ροχίνγκια (로힌기아) |
Rohingya라는 표기는 미얀마어 이름 ရိုဟင်ဂျာ [ɹò.hɪ̀ɴ.ʥà]를 전사한 것이다. 영어 발음은 로인자, 로힌자, 로잉야 3가지인데, 이 중 원어에 가까운 발음은 로힌자다. 버마어 철자를 흉내낸 로마자 표기에서 ky, (h)ky, gy로 적는 음들은 현대 버마어에서 ㅉ, ㅊ, ㅈ와 비슷한 파찰음으로 발음되기 때문이다. 로힝야는 Ro-hing-ya로 잘못 끊어 읽은 발음이다.
한편, 그들 자신이 쓰는 로힝야어(=치타공어)로는 루아잉가라고 발음한다.
3. 기원
로힝야는 1799년 프랜시스 뷰캐넌해밀턴(Francis Buchanan-Hamilton)의 저서에 루잉아(rooinga)라는 이름으로 처음 등장한다. 로힝야의 기원에 대해서는 오랫동안 아라칸 왕국에 영향을 미쳤다거나 미얀마로 들어온 무슬림 아랍인 선원들의 후손이라는 설이 있으나 널리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 이들의 주장은 14세기 무슬림 탐험가인 이븐 바투타의 기록과 대조해보면 어떤 부분에서는 맞지만 상반되는 내용도 적지 않다."우리는 정크선을 타고 15일간 항해한 끝에 바라흐나카르[4] 지방에 도착하였다. 이곳 사람들의 입은 흡사 개의 입같이 생겼다. 그들은 미개인으로서 힌두교건 다른 어떠한 종교건 믿지 않으며 해변가에 갈대를 세우고 풀로 이엉을 얹은 집에서 살고 있다. 남자는 아무것도 가리지 않은 벌거숭이다. 그러나 간혹 한두 사람은 음경과 고환을 감싼 갈대 주머니를 허리에 차고 있다. 그들과 함께 벵골이나 자바섬에서 온 일군의 무슬림들이 특정 구역에 살고 있다."
외모가 아랍인이 아니라 전형적인 방글라데시인이다. 아라칸 지역에 소수의 파르시나 무슬림이 전근대부터 소수 방문하거나 거주해온 것은 사실이지만, 오늘날 대다수 로힝야의 선조는 영국의 미얀마 진출과 함께 벵골에서 건너온 것으로 추정된다.[5]
영국의 기록에 따르면 1872년 기준으로 5만 8천 명이던 무슬림의 수는 1911년에 3배 이상 증가했다. 다만 이 숫자 대부분은 일감을 따라 벵골과 미얀마를 오가는 사람들로 기록에서는 이들을 거주민으로 보지 않고 있다. 영국 식민지 시절 이후에도 1970년대까지 당시 동파키스탄(현 방글라데시)으로부터 미얀마로 벵골족의 이주가 계속되었다. (1차 엑소더스) 1990년대 초반에 다시 미얀마로 25만여 명에 이르는 2차 엑소더스가 있었다. 현재 로힝야족의 인구는 약 250만 명으로 추정된다.
후술할 내용대로 로힝야족이 자신들의 언어를 아랍 문자 내지는 아랍 문자에서 파생된 하니피 로힝야 문자로 표기하긴 하지만 이는 과거에 로힝야족이 영국 치하에서 서면 통신을 할 때 우르두어를 썼던 것의 영향이지, 아랍권에서 직접적으로 영향을 받은 것은 아니다. 미얀마로 들어온 중동계·중앙아시아계 무슬림의 후손들은 미얀마 현지에 동화되어 상좌부 불교 신자가 되었든, 종교만큼은 그대로 이슬람교이든 간에 인종적으로는 황인화된 상태다.[6] 또한 전근대 미얀마는 생산성이 매우 낮은 낙후된 지역이었으며 주요 도시들도 해안 지대보다는 내륙에 위치한 상황이었다.
로힝야족, 로힝야어라는 별개의 명칭을 통해[7] 전혀 다른 혈통과 언어를 가지고 있다고 보이게끔 하고 있지만, 이는 일개 모험가의 일대기에 나온 단어를 토대로 20세기 초 로힝야족이 자신들에 대한 민족주의를 대두시키면서 발굴한 단어다. 1990년대 초만 해도 항상 벵골족이라 불렸으며 치타공인이라고도 불렸다.
이들은 인종적으로는 확연한 벵골인[8]에, 언어도 벵골어의 남부 방언인 치타공어이다. 사진으로만 봐도 동남아시아 계통의 미얀마인과, 인도 계통의 벵골인 사이의 차이가 너무나 뚜렷하다. 로힝야어라고 명명은 해주지만, 실상은 치타공어와 단어 몇 개, 그리고 사용하는 문자가 다른 수준일 뿐 억양마저 동일하다. 그나마 표준 벵골어와는 같은 벵골어 맞나 싶을 정도로 엄청나게 다르지만 이는 로힝야어와 방글라데시 치타공어 모두 해당하기 때문에 사실상 무의미한 비교다. 당연히 미얀마어와는 전혀 관계가 없어서, 미얀마인과는 서로 의사소통이 되지 않는다.
미얀마에 3세대, 100년이 넘는 기간이나 살면서 로힝야어와 치타공어가 차이가 없고, 미얀마어와 기초적인 의사소통도 안 되는 것은 미얀마 정부의 책임이 큰데 미얀마 정부가 로힝야족에게 시민권을 주지 않고 교육도 전혀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미얀마 정부가 로힝야족에게 미얀마어를 가르칠 생각을 하지 않다보니, 로힝야족의 입장에서 배워야 할 필요도 없어 로힝야족이 독자 언어로 토착화가 이루어질 만큼 오랜 세월이 흐르지도 않았기 때문이기도 하다. 이런 언어의 변화는 보수적이고 불과 수십 년의 단절만으로는 언어가 고유 언어가 될 만큼 바뀌지는 않는다. 만약 미얀마 정부가 로힝야족에게 미얀마어를 적극적으로 가르쳤다면 로힝야어는 미얀마어 차용어가 유입되어 치타공어 및 표준 벵골어와는 더욱 많은 차이가 생겨났을 것이다.
언론 기사에서 종종 다루는 바와 같이, 로힝야 난민과 방글라데시의 사람들은 입으로는 자유롭게 의사소통할 수 있다. 허나 서로 간에 필담은 불가능한데, 방글라데시에서 벵골어를 동부 나가리 문자로 표기하는 반면 로힝야족은 자신들의 언어를 아랍 문자나 하니피 로힝야 문자로 표기하기 때문이다.[9] 로힝야에 대해 관심이 있는 사람들도 이 부분은 모르는 사람이 많은데, 로힝야는 혼혈되지도 않은 벵골인이고, 억양마저 똑같은 언어를 구사한다는 점을 각국 언론이 잘 보도하지 않는다.
방글라데시가 난민 캠프의 출입을 차단해도 로힝야가 도시로 몰래 들어가서 취직해서 일하고 섞이는 것을 방글라데시 경찰이 단속을 하는 게 사실상 불가능한 이유도 이것 때문이다. 방글라데시에서 계속 살아온 치타공인과 미얀마에서 온 로힝야족을 구별하려면 글을 써보라고 하면 되지만(치타공어/로힝야어를 동부 나가리 문자로 표기하면 방글라데시 치타공인, 아랍 문자나 하니피 로힝야 문자로 표기하면 로힝야족), 본인이 "나는 글 쓸줄 모른다"라고 하면 그만인데다가[10] 이런 방식의 단속을 일일이 하는 것도 큰 어려움과 번거로움이 따르며, 변수에 따라서는 오히려 방글라데시 치타공인이 아랍어·페르시아어·우르두어 등 아랍 문자로 표기되는 외국어를 공부하면서 각 언어의 단어나 문장을 아랍 문자로 쓰다가 그 모습을 본 누군가에게 로힝야족으로 오해받는 불상사가 일어날 수도 있다. 따라서 본인이 방글라데시 치타공인인지 로힝야족인지 직접 자기 입으로 말하지 않는 한 사실상 난민 캠프를 몰래 탈출한 로힝야족이 방글라데시 사회에 동화되도록 놔둘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로힝야족의 전통음악과 전통춤 또한 방글라데시나 인도 서벵골 주의 것과 큰 차이가 없으며, 특히 방글라데시 본토 치타공인들의 전통음악과 전통춤이 로힝야족의 것과 매우 똑같다. 로힝야족 자신들이 조상들의 고향이라고 주장하는 아랍권의 전통음악·전통춤과 비교하면 이질감이 매우 심하다.
다시 말해 로힝야나 로힝야어라는 단어는 인류학, 문화학, 언어학적인 학문적 의미를 가진 단어라기보다는 근래에 생긴 정치적인 단어이고, 그렇기에 미얀마인들은 '로힝야'라는 단어 자체를 부정한다. 미얀마인들은 로힝야인, 로힝야어를 부정하고 일관되게 벵골인, 벵골어로 칭한다. 그러나 정작 방글라데시나 인도의 벵골인들은 로힝야족을 같은 벵골인으로 취급하지도 않는 경우가 많으니 로힝야족의 입장에선 그야말로 진퇴양난의 상황인 셈이다. 물론 반대로 방글라데시나 인도의 벵골인들을 자신들과 같은 민족으로 취급하지도 않는 로힝야족들 또한 적지 않은 편이다. 로힝야족들이 공식적으로 자신들이 벵골인의 지파임을 인정하면, 이들이 스스로를 아랍계 후손으로 여기는 이상 로힝야 민족주의에 엄청난 타격을 입히는 꼴이 되니 말이다.
4. 역사
로힝야족은 자신들의 주장대로 아랍인 무역상들의 후손도 아니고, 그렇다고 미얀마 측의 주장대로 불법 이민자들의 후손도 아니다. 근세 아라칸의 왕국들은 벵골 술탄국들과 밀접한 관계를 맺었는데, 근세 당시에는 갠지스 강 하류 지역이 세계에서 가장 부유한 지역이었던 반면 아직 미얀마는 매우 낙후된 상황이었고, 아라칸 지역의 불교 왕국에서는 불교를 믿는 왕이 벵골 술탄국에게 조공을 바치고, 무굴 제국의 통치자나 벵골 나와브를 모방하는 일이 많았다. 15세기 아라칸의 므락 유 왕국에서는 한 쪽에는 버마 문자, 한쪽에는 페르시아 문자[11]를 새긴 주화를 주조한 것도 이와 같은 맥락에서였다. 물론 아라칸인들은 벵골 술탄국 측에 순순히 조공만 바친 것이 아니라, 정기적으로 다카와 치타공을 침공하고 약탈하면서 포로들을 붙잡아오곤 했다. 전근대 열대 밀림지대는 땅을 개간하기 힘든 데다가 수인성 질병 등의 이유로 노동력이 항상 부족하였고, 이들에게 있어서 치타공 등에서 잡아온 벵골인 포로들은 중요한 노동력이었다. 이 외에도 상당수의 무슬림 군인이나 기술자들이 아라칸의 불교 왕국에서 용병 혹은 가신으로 봉사하였다.아라칸인들은 고아를 중심으로 활동하던 포르투갈인들을 끌어들여 벵골 해안지대에서 해적 행위를 벌였다. 무굴 제국의 주요 세입원 중 하나인 동벵골 지역이 계속해서 공격을 받자 무굴 제국의 아우랑제브는 6천여 명의 군대와 288척의 배를 보내 치타공 지역을 다시 점령한 후 군대를 주둔시켰다.[12] 약 1백 년 후 1785년 버마의 꼰바웅 왕조가 아라칸을 정복하자 라카인 지역 주민 중 35,000여 명이 난민이 되어 치타공 지역으로 몰려왔다.[13] 당시 벵골 지역은 플라시 전투 이후 영국 동인도회사가 관할하던 구역이었고, 영국은 버마를 주시하기 시작했다. 꼰바웅 왕조의 군대가 다카를 공격하자 영국군은 벵골 세포이를 동원하여 버마의 꼰바웅 왕조를 멸망시키고 자국 식민지에 편입시켰다.
과거 벵골인 인구가 아라칸 지역에 일부 몰려있었다면, 영국이 미얀마를 식민지로 통치하던 시절 영국인들이 미얀마에 플랜테이션을 설치한 것을 계기로 미얀마 각지에 벵골인 인구가 급증하기 시작했다. 영국 식민당국은 미얀마를 프랑스령 인도차이나와 비슷한 쌀 생산 기지로 만들고 싶어했다. 1826년 전쟁으로 버마로부터 아라칸을 할양받은 영국총독은 '라카인족들이 반항적인 데다가 비생산적이고 마약에 쩔어 살고 있다'라는 보고서를 남기고 그 대안으로 순응적인 인도인들을 이주시킬 것을 제안한다. 노동생산성이 전혀 없는 원주민들을 축출하고 통제 가능한 노동력을 투입시킬 목적이었던 것이다.
미얀마는 프랑스령 인도차이나나 네덜란드령 동인도, 미국령 필리핀보다 정글이 더 우거진 지역이라 베트남이나 캄보디아, 라오스, 인도네시아, 필리핀 등 프랑스와 네덜란드, 미국의 식민지였던 여타 동남아시아 국가들보다 농경 기술의 발달이 전반적으로 늦어졌고, 부족 중심의 원시 사회도 다수 존재하므로 이들을 착취의 대상으로 볼만한 노동력이라고 보기 어려웠다. 그래서 영국인들은 아라칸인들의 화전을 짓던 자리에 인도인들을 이주시키고 농장을 짓기 시작했다. 이 정책은 이후 수차례 미얀마와 전쟁을 거치며 범위가 확대되었고, 미얀마를 완전히 정복한 시점에는 그 대상이 미얀마 전토가 되었다.
쌀을 주식으로 삼는 문화, 이모작이 가능한 지리적 요건, 영국의 식민 지배의 영향으로 미얀마는 한때 아시아 최대 쌀 수출국이었다. 네 윈이 쿠데타로 집권하기 전까진.
영국인들은 이이제이 방식으로 미얀마를 식민통치하며 농장을 경영했다. 그들은 이주시킨 인도인들에게 작황과 관련없이 고정된 세금을 내는 조건으로 소유권도 넘겨주었다. 땅의 소유권을 가질 수 있다는건 벵골에서 농경지를 가지고 있지 못하던 가난한 소작인들에게 매우 매력적인 유인이 되었다.[14] 그렇게 현지에서 인력을 모은 후 이들을 대규모로 미얀마로 이주시켜 경영을 맡기게 되었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로힝야는 미얀마의 모든 소수 민족과 버마족의 공공의 적이 되었다. 이들이 영국으로부터 불하받은 농장은 미얀마인에게서 빼앗은 농경지였기 때문이다.
게다가 영국 당국의 농장은 미얀마 전역에 산재해 있었다. 따라서 미얀마에 거주하는 주류 버마족과 다른 135개 소수민족은 규모의 차이는 있지만 벵골인에게 농토를 빼앗기게 되었다. 전 세계 어디서나 그렇지만, 농민의 입장에서 농토를 빼앗기는 것은 그야말로 피눈물 나는 일이며 "불구대천의 원수"가 되기에도 충분한 조건이다. 이들은 이렇게 미얀마인들에게 증오받으면서 미얀마에 정착했다. 그리고 인종과 종교가 다른 점 때문에 그 이후에도 화해하지 못하고 주변 민족들과 지속적으로 갈등을 일으키게 되었다.
영국은 인도에서 농경지를 차와 면화 농장으로 바꾼 뒤 미얀마에서 쌀을 공출해서 플랜테이션을 유지함으로써 상당한 이익을 보았다. 덕분에 로힝야는 지속적으로 식민 당국의 보호를 받았다. 이 과정에서 미얀마인들의 벵골인들에 대한 분노는 커져 갔다. 태평양 전쟁이 시작되자 미얀마인들은 영국으로부터의 해방을 기대하고 일본군에게 협조적으로 대했다. 영국에 의해 땅을 빼앗기고 벵골인과도 차별받던 처지가 나아질 것이라 기대했기 때문이었다. 당시 귀축영미의 침략으로부터 아시아를 해방하고 대동아공영권을 이루겠다는 선전을 하던 일본군은 이들에게 땅을 돌려주겠다고 약속하고 점령지 내 벵골인들의 농장을 해체하여 땅을 다시 미얀마인들에게 돌려주었다.
사실 미얀마가 영국의 식민지이던 시절 로힝야 외에도 상당수의 인도인들이 미얀마로 이주하였다. 영국은 미얀마를 점령한 이후 새로 양곤 시를 개발하면서 이웃한 마니푸르 지역에서 힌두교도 상인들을, 동벵골 지역에서 무슬림들을 데려와 이주시켰다. 마니푸르에서 온 힌두교도들은 브라흐민이나 크샤트리야 같은 상층 카스트가 많았는데 이들은 버마 현지인들이 마니푸르 지방의 불가촉천민과 외양이 비슷하다는 이유로 불가촉천민 취급을 하며 통혼은커녕 사람 취급도 하지 않았다. 버마가 영국 식민지이던 시절 인도인은 2등 국민 미얀마 현지인은 3등 국민 취급을 받던 상황이라 이들은 현지인들을 대놓고 개무시했다. 인도 무슬림들은 힌두교도들만큼 현지인들을 무시하지는 않았지만 대신 버마 현지인 여자들을 현지처나 첩으로 삼는 경우가 많았는데[15][16], 버마인들 입장에서는 힌두교도들보다 무슬림들이 현지 버마인들을 더 심각하게 모욕한다고 여기게 되었다. 영국의 식민지가 되기 이전 버마인들은 명목상으로는 불교 국가였지만 청나라 및 태국 및 주변 여러 부족들과 잦은 전쟁을 벌이던 무척 호전적인 민족이기도 했다. 버마인 승려들과 민족주의자들은 모욕감과 위기 의식을 느끼고 "무슬림들을 전부 씨를 말려버려야 한다"고 벼르게 되었다.
제2차 세계 대전과 그 이후 미얀마가 독립하는 과정에서 상업에 종사하던 인도인들은 재산을 처분하고 인도로 피신하였지만, 농장을 일구던 로힝야족 입장에서는 순순히 자신들이 개간한 농장을 돌려줄 수 없는 상황이었다. 이에 이미 그 지역에서 거의 100년을 살아온 로힝야족도 자연히 일본과 미얀마인들에게 앙심을 품었다. 영국은 이런 분노를 대일항전에 써먹을 수 있겠다고 판단하여 로힝야족을 무장시켰다. 하지만 이런 영국의 의도와는 반대로 로힝야족은 일본군과 싸우는 데는 별 관심이 없었고, 농토를 돌려받은 미얀마인을 집중적으로 공격하여 1942년 아라칸 주에서만 아라칸인들을 무려 2만 명이나 죽였다. 이에 분노한 아라칸인들이 일본군에 지원을 요청하자 일본군 역시 아라칸인에게 무기를 지원하였고 라카인족들과 레드 카렌족은 로힝야 5,000명을 죽였다. 로힝야는 평소부터 마음에 들지 않았던 불교 절을 부수고 승려를 학살하는 등의 종교 갈등을 일으켰다.
그렇기에 미얀마의 독립을 앞둔 영국인들은 로힝야의 말로를 충분히 예상할 수 있었다. 그래서 영국은 독립의 조건으로 로힝야의 처우를 보장하고, 내각과 의회에도 로힝야가 다수 참여할 수 있도록 조치를 취한 다음 미얀마에서 물러났다. 그래서 초기 미얀마 정부에는 로힝야의 세력이 무시 못할 정도로 컸다. 그러나 이것은 버마족과 135개 소수민족들의 분노를 사게 된 또 하나의 원인이 되었고, 결국 마오주의의 영향을 받은 네 윈 장군이 쿠테타로 정부를 뒤엎으며 서방 세계와의 모든 조약을 무효화했다. 비교하자면 베트남의 호치민의 경우 해외 이런저런 나라들을 돌아다니며 자신이 직접 인종차별의 모순을 경험한 사람으로서, 그리고 자신의 독재를 위해 소수민족과의 과거사를 잊도록 강요했다. 그리고 이게 가능했던 것은 중국이라는 거대 제국이 옆에 있었기 때문에, 중국에게 명분을 줄 경우 위험하다는 실리적인 이유도 있었다. 중국이 소수민족 보호를 명분으로 쳐들어오면… 답이 없었다.
그에 비해 동남아시아에 있었던 미얀마는, 베트남보다 좀 더 지역강국의 위협에서 벗어나 있었기에, 네 윈은 자신의 통치를 위해 자국민들이 소수민족에게 가진 원한을 풀어줄 수 있었다. 애초에 땅 빼앗고 점령군에 붙어 온갖 파렴치한 짓을 한 소수민족에게 어떠한 벌도 없이 그들이 가진 재산과 거주권을 인정해 주는 건, 국민정서상 말이 안 되는 일이었다. 네 윈이 집권하자마자 모든 약속은 당연히 무효가 되었고, 로힝야는 시민권을 잃게 되었으며, 거주지에서 쫓겨나 방글라데시로 추방하기 쉽도록 방글라데시와 인접한 라카인 주 일대로 강제 이주되었다.
미얀마 전역에 있던 벵골인들을 모으니 벵골인들은 미얀마인에 비하면 2% 미만의 비중을 차지했던 것에 비해 라카인 주[17]에 한해서는 30% 이상을 차지했다. 현재는 전체 인구의 약 40% 넘게 차지하여 절반을 살짝 넘기는 아라칸족의 뒤를 바짝 쫓고 있는 모양새다. 특히 방글라데시 국경지역은 인구의 96%가 로힝야족으로 전부 로힝야족이라고 해도 무방하다. 미얀마의 다른 민족과의 분쟁으로 100만여 명의 로힝야족이 방글라데시로 도망친 가운데 도망친 이들까지 포함하면 라카인 주 인구의 60% 넘게 차지하는 최대민족이 된다. 참고로 이 수치는 미얀마 정부가 로힝야족에 대해서만 1가구 2자녀라는 산아제한정책을 실시했는데도 이렇다.
더 나아가 같은 이슬람 및 벵골계인 동파키스탄에 1946년과 1948년 2차례에 걸쳐 아라칸 합병을 청원하기까지 하면서 미얀마의 모든 민족들에게 큰 원한을 사게 되었다.[18] 이에 라카인 주에 살고 있었던 원주민인 아라칸족과 카미족이 로힝야에 매우 강경하면서도 버마족과 다른 소수민족들에게 '우리에게 짐더미를 떠넘겼다'고 원망하고 있고, 버마족과 다른 소수민족들은 이런 원망에 일정부분 책임감을 가지고 있기도 하다. 이런 측면 때문에 소수민족들끼리 연대하여 버마족을 경계하는 미얀마의 정치상황에도[19] 불구하고 로힝야족은 공공의 적으로 모든 소수민족 + 버마족의 혐오와 경멸을 사고 있다.
기원이 기원이다 보니 타협이라고는 모르고 서로 잡아먹을 듯 싸우기만 하는 미얀마 정계에서 단 하나 만장일치로 결정하는 것이 로힝야족에 대한 탄압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모든 미얀마인의 미움을 한몸에 받는 종족이다. 현재 로힝야족들은 과거 조상들의 제국주의 앞잡이로서의 인식과 현재 자신들의 폭력적 대응[20]으로 미얀마의 모든 민족한테서 미움을 받고 있다. 미얀마에는 로힝야 외에도 일부 다른 무슬림 집단들이 살고 있으나, 다른 미얀마인들과 고립되어 살고 있는 로힝야족과 다르게 버마인 혼혈 무슬림들은 다른 미얀마인들과 섞여 사는 처지라서 이들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다. 로힝야족 내에서도 까툰족은 다른 로힝야족들을 공격하면서 미얀마 정부에 충성 맹세를 한 상황이다.
현재도 영국은 로힝야 문제에 관해 관심을 가지고 있으며 최근 안보리에 로힝야 문제를 상정하였다지만 그뿐이다. 문제는 자신들이 저지른 로힝야족 문제를 영국으로 데려가는 것은 생각하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미얀마는 방글라데시나 영국이 로힝야족을 모두 데려가기를 원하지만, 이주민에 대한 거부감으로 브렉시트까지 결정한 영국이 로힝야 100만명을 데려가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며 그럴 의지도 없다. 당장 포르투갈이 마카오 시민들에게 포르투갈 국적을 부여한 것과 달리 영국은 홍콩 반환 당시 홍콩 시민들에게 영국 시민권을 주지 않은 사례도 그렇다. 그나마도 자기들이 이민을 받아준 것도 아니고 캐나다 등 영연방 국가들에 떠넘겨 버렸다. 냉정한 사실이지만 최소한 고학력자라도 많고 영어도 구사하는 홍콩 시민들과 다르게 로힝야족은 절대다수가 무학자인 데다가 사우디아라비아발 근본주의까지 주입받은 상황이라서 부담만 될 뿐 아무 도움이 되지 않는다.
결국 로힝야족이 심리적으로 기댈 곳이자 이들을 받아들여줄 만한 곳은 방글라데시뿐이지만, 정작 방글라데시도 이들을 달가워하지 않는다. 잘 알려지지는 않은 사실이지만 방글라데시의 경우 독립 이후 민족주의가 부흥하며 이슬람 근본주의 정당의 세가 많이 약화된 상황인데, 이슬람 극단주의 성향이 강한 로힝야족이 반가울 리가 없다. 난민촌을 유지하다가는 방글라데시의 이슬람 극단주의 세력이 확산돼 자칫 내전이 일어날 것을 우려하는 등[21] 난색을 표하고 있는 상황이다. 물론 방글라데시의 정치인들도 동족인 이들의 처지를 심정적으로는 이해하지만 방글라데시는 고작 대한민국의 1.5배만 한 땅에 2억에 가까운 엄청난 인구가 밀집한 빈곤 국가이다. 특히 방글라데시는 자국 내의 인구와 실업자가 넘쳐 이민이 전혀 필요없는 상황이다. 그래서 전 세계의 누구도 이들을 받아들이려고 하지 않고 있기도 하다. 참으로 전 세계에서 가장 탄압받는 민족이라는 타이틀에 손색이 없는 민족이다.
미얀마 강제송환의 위험성이 높은 방글라데시를 피해 땅이 넓어서 정부의 규제가 비교적 허술한 인도로 가는 로힝야 난민도 있다고 한다. 인도는 방글라데시보다는 영토 면적이 큰 데다 최근의 경제성장으로 경제력과 나라 사정은 남아시아의 국가들 중 그나마 좀 나은 편이지만 인구가 넘치는 터라 이들을 대거 수용하려 들 리가 없고[22] 인도 역시 종교적으로 힌두교도와 무슬림 사이에 종교 갈등이 있으며, 파키스탄은 종교적으로 무슬림들이 다수인 이슬람 국가이지만 거리도 멀고 벵골인들과 언어, 인종적인 차이도 나며, 경제 사정이 좋지 않은데다 무엇보다 1950, 60년대 방글라데시가 동파키스탄이었을 당시 방글라데시를 탄압하다 1971년 전쟁을 일으켜 인도의 지원으로 파키스탄에서 분리독립하는 등 방글라데시, 인도와는 역사적으로 앙숙 관계이다.
5. 로힝야족 난민 사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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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하십시오.6. 로힝야 분리주의
해외의 한 네티즌이 그린 로힝야족 가상 독립 국가의 지도. 지도에 나온 Rahmanland란 단어는 아랍어로 자비를 뜻하는 라흐만(Rahman)에서 따 온 말이다.
로힝야족의 분리주의 움직임도 있다. 사실 일부 반미얀마 성향의 로힝야족 망명 세력들과 무장 저항 단체 세력들 중에는 더 이상은 미얀마와 한 나라로 더 이상은 공존이 불가능하다며 미얀마의 지배로부터 분리 독립해 떨어져나가서 로힝야 독립국을 수립하자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다.
이 때문에 일각에서는 유고슬라비아 전쟁 당시 세르비아에게 학살과 탄압을 겪다가 NATO와 유엔의 군사 개입으로 세르비아에게 박탈당한 자치주의 지위를 다시 회복했다가 2008년 세르비아로부터 독립한 코소보나 2002년 인도네시아로부터 분리독립한 동티모르, 1988년 이후부터 이스라엘과 이집트, 요르단 등에 접해있었던 팔레스타인의 자치지구들(가자지구와 서안지구)에 자치 정부가 되어 2012년 유엔에서 대부분 독립이 인정되어 2013년 자치 지구에 절반은 독립된 상황인 팔레스타인처럼 로힝야족이 살고 있는 방글라데시 국경 지역의 미얀마 서남부 영토 일부 지역을 분리독립시켜 독립국가를 세우게 해주거나 방글라데시에 편입시키자는 의견도 있다. 라카인 주 북부쪽에서는 로힝야가 인구의 다수를 차지하기는 한다. 그래서 라카인 북부를 떼서 로힝야족들의 독립국가를 만들거나 방글라데시에 편입하여야 한다는 주장이 로힝야족에게서 나온다.
카친족이나 카렌족 등 미얀마의 통치에서 분리독립하려는 미얀마 내 소수민족들의 분리 운동을 아주 강경하게 탄압해오던 미얀마로서는 로힝야의 분리 독립을 좌시할 가능성은 절대 없다. 적어도 카친족이나 카렌족은 역사적으로 미얀마의 토착민족임에도 불구하고 강경하게 진압되었는데, 로힝야족의 일부는 토착민이지만 대부분은 1850년대 식민지 시대에 들어온 인구 + 독립 이후 강제이주된 인구이기 때문에 미얀마 정부는 이들에게 국적을 인정하지 않고 있다. 게다가 동티모르와 코소보, 팔레스타인은 독립할 당시 호주와 미국, 유엔, NATO, 알바니아, 말레이시아, 아랍같이 분리 독립을 지지했고 강요와 압력을 넣었던 외세들이 존재했지만, 로힝야는 미얀마에게 분리를 강요할만한 외세와 명분이 없다. 물론 방글라데시가 있긴 하나 방글라데시 역시 편입은커녕 로힝야의 분리 독립조차도 로힝야와 같은 민족인 방글라데시가 영향력을 뻗친다는 오명만 괜히 뒤집어 쓸 수 있기에 원치 않는 바이다.
라카인 주의 문제가 동티모르와 코소보와 다른 점은 인구 구성비 그 자체에 있다. 인도네시아로부터 독립한 동티모르에는 독자적인 민족(의식)이 있었고, 동티모르를 떠나 티모르섬 전체에서 기독교 교인의 비중이 99%였으며, 코소보는 코소보 지역 안의 이슬람 계통인 알바니아계의 비중이 90%가 넘었기에 분리독립이 가능했다.[23] 팔레스타인 역시 각지의 유대인 정착촌에도 불구하고 아랍계 팔레스타인인들이 다수를 차지했고, 팔레스타인 자치 정부가 지금도 있기에 국제사회 대다수로부터 독립이 인정되어 팔레스타인의 자치지구 안에서 팔레스타인으로 독립이 될 수 있었다. 이에 반해 로힝야족은 자치 정부가 있었던 상황도 아니고, 로힝야족의 숫자가 가장 많은 라카인 주에서조차 30% 정도에 불과하며, 라카인주에서도 다수민족이 아니다. '라카인족'을 비롯해 카미족, 친족등 다른 황인종 소수민족들이 더 많다. 로힝야족을 분리 독립시키기 전에 카미족이나 아라칸족, 친족도 나라 만들어줘야 할 판이며[24] 마찬가지로 분리주의를 주장하는 카친족이나 카렌족등 다른 미얀마의 소수민족들도 독립시켜야 할 판이다.[25] 그렇게 되면 미얀마는 특정 민족 단위의 여러 군소국가들로 분열될 가능성이 크다.
로힝야족 인구는 영국 식민지배기를 거쳐 북부지역에서 비중이 다소 늘어났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라칸족과 카미족, 산악부족인 친족의 부락과 어지럽게 섞여 있다. 이렇게 섞여 있는 이유는, 원래 동남아 지역이 잡거 경향이 강해서 그렇다. 정글지역은 다른 지역과 다르게 거주지역 사이에 불모지의 정글이 자리잡고 있어 안정적인 교류가 있을 수 없었다. 그래서 전쟁이 발생한다해도 타지역과 부족지를 점거한다기보다 노동력이 되는 사람들만 납치해오는 형태의 전쟁을 했으며 덕분에 민족들이 구별되어 살지 않고있는 것이다. J.G. 스콧의 <상부 버마와 샨주의 관보>에서의 "부족들은 개별적으로 분리되어 살아가지 않고 무차별적으로 섞여 있다. 더욱이 그들(카친족)의 마을들에서 팔라웅족, '라족', 와족, 중국인, 몇 명의 샨족을 발견할 수 있다."라는 언급은 그 사실을 잘 보여준다. 그래서 부락들이 마구 뒤섞여있어 분쟁은 극심해지고 지역별로 분할하기도 힘들다.
다른 토착 소수민족들 입장에서도 아라칸에 난민수용소를 설치한 버마족이 중심이 되는 미얀마 정부가 원망스러운 판에, 라카인 북부를 로힝야의 독립국가로 분리 독립시키라는 주장은 도무지 들어줄 수가 없다. 차라리 로힝야족을 절멸하고, 로힝야의 분리 독립을 주장하는 세력에게 적대하고 자신의 생존권을 두고 신생 독립국 로힝야와 내전을 벌이면 벌일 가능성이 높다면 높지. 원래부터 살아오던 아라칸 지역을 버리고 다른 미얀마 지역으로 이주하려고 들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로힝야가 독립 이후에도 로힝야족과 라카인, 카미족 등 타 종족 세력들끼리 내전이 일어나거나 학살 없이 카미족, 라카인족 등 로힝야 신생국 내 토착 소수 민족의 거주지 영토들이 로힝야에 귀속되지 않고 로힝야 국가 내부의 미얀마령 월경지가 되거나 국경 재조정으로 문제가 되는 일부 카미족, 라카인족의 거주지 영토들이 미얀마령으로 남을 가능성도 있다. 이 경우 카미족, 라카인족 부락 지역이 로힝야 독립국에 갇힌 고립형 내륙 월경지가 될 가능성도 없지만은 않다. 하지만 현재 미얀마 라카인 주 북부 지방의 로힝야족의 거주 지역과 라카인족과 친족, 카미족, 버마족의 거주지가 완전히 겹치기 때문에 본국과 이격된 역외 영토로 분할하기 어렵다는 문제가 있다. 이렇게 될 경우 라카인 북부 해안 저지대 지역은 로힝야가 차지하고 나머지 내륙 산간 지역은 토착 소수 민족이 차지하여 미얀마로 넘어가며 영토 조정이 이뤄질 가능성도 있으나 이도 현실적으로 양측이 수용하려고 할지는 미지수다. 당장에 로힝야 독립국 내에 월경지인 미얀마 땅으로 남는 것도 친족과 카미족, 라카인족 집단들이 받아들일 가능성이 희박한 것이 원수인 로힝야족들에게 포위된 채로 살아가라는 소리와 다를 바 없기 때문이다. 로힝야족 또한 완전한 독립국가의 영토를 요구할 가능성이 높기에 사실상 신생 독립국가의 영내에 카미족이나 라카인족 집단의 거주지역이 미얀마에 잔류하여 적대국가인 미얀마의 월경지가 생기는 것을 좌시할 가능성 또한 낮다.
라카인족과 카미족이 로힝야 국가에 잔류하되 자치권을 허용하거나 로힝야와 미얀마의 복수국적을 부여하는 방안도 고려해 볼 수 있다. 그러나 라카인족, 카미족이 지배층이 된 로힝야족의 통치를 받아들이며 신생국의 주민으로 분쟁 없이 평화적으로 동화, 편입되거나 양보할 가능성이 아예 희박하다는 것이 문제다. 하다못해 종교적으로 배타적인 이슬람을 믿는 로힝야가 독립에 성공해서 국가를 세워 온건한 유화정책을 펼치며 신생국가 내부의 라카인족이나 카미족들을 용서하고 자기 나라의 국민으로 잘 포용할수 있을 지도 의문이다.
방글라데시와 국경을 접한 나프 강 유역 이남 지역의 라카인 북부 영토 일부만이라도 로힝야 독립국으로 독립할 가능성은 희박하지만 조금이나마 있어 보인다. 그리고 로힝야 독립국의 수도가 될 도시들 또한 로힝야족들 사이에서도 논란인데 로힝야족의 일부 분리독립론자들은 만일 로힝야족이 독립한다면 라카인 주의 주도이자 라카인 북부 최대 도시인 시트웨를 신생 독립국가의 수도로 삼아야 한다고 주장하지만 시트웨는 미얀마로서도 지정학적 가치가 있는 항만 도시인데다 도시 시민 구성원들 상당수가 라카인 주의 토착민족인 아라칸족이 더 많기 때문에 로힝야가 신생국의 수도로 삼는다고 가정할 경우 다른 땅 일부는 내주더래도 시트웨와 나머지 라카인 북부 영토들만큼은 유지하겠다고 필사적으로 미얀마가 반대할 공산이 크기 때문에 가능성은 높지 않다. 로힝야 인구가 많은 라카인 북부 내륙 도시인 부티타웅과 마웅다우 또한 독립국의 수도로 유력하긴 하지만 여기는 경제적인 기반조차 없는 소도시라는 것이 문제다.
당장에 로힝야족이 독립한다고 해도 국제사회의 국가들이 독립한 로힝야를 정식국가로 승인하고 수교관계를 맺어주고 신생국이 된 로힝야의 유엔 가입을 허락해 줄지가 가장 큰 문제이다. 그렇긴 하지만 미승인국으로 독립하는 것조차 로힝야족에게는 꿈같은 목표다. 스페인 카탈루냐와 바스크, 인도네시아 아체, 인도 시킴 주의 예처럼 몇 단계나 낮은 목표인 미얀마내 로힝야 자치구나 자치주의 획득 등 자치 부여도 미얀마 내 정서와 환경상 거론 자체도 힘들다. 방글라데시가 난민의 안전한 귀환을 위한 비무장지대를 주장한 바도 있지만 이런 정도의 주장에 대해서도 미얀마 국토에 대해 미얀마군이 접근하지 못하게 하려는 방글라데시의 영토할양 요구로 받아들여져 미얀마 정부는 단호히 거부하고 미얀마인들은 분노에 떠는 상황이기 때문이다.
이만큼 미얀마는 라카인 주에 대해 단호한 소유 의사가 있고 실효적으로 지배하고 있는 상황에서 로힝야족의 입장에서 어떠한 시나리오로라도 고작 유엔에만 가입하지 못하는 미승인국이라도 될 수 있다면 정말 무엇이든지 하겠지만 소수민족의 자치나 독립 요구에 대한 미얀마의 강경한 태도와 말로만 미얀마의 로힝야 탄압을 비판하고 로힝야족에 대한 별다른 관심이 없는 미국 등 서방 세계, 국제 사회, UN에서 강대한 힘을 발휘하는 중국과 러시아가 미얀마를 적극적으로 지지한다는 점 등을 고려한다면, 로힝야족에 대해 우호적인 국가는 자신들의 국경 외부에 별다른 영향력을 끼치지 못하는 이슬람 국가들뿐이다.[26] 이들이라고 소수민족 문제가 없는 게 아니라 로힝야 독립에 대해서는 언급하기 힘든 경우도 있는데 대표적으로 인도네시아의 서파푸아 탄압이나 아랍권의 베르베르계를 비롯한 소수민족 차별이나 억압 등이 있다. 물론 로힝야의 탄압이나 학살을 중지하라는 주장 정도만 가능하지만, 이와는 별도로 독립에 대하여 주장을 쉽게 꺼내기도 어려운 상황이기도 하다. 따라서 로힝야족 스스로가 미승인국을 추구한다는 발설만으로도 미얀마인의 반발을 불러서 더 끔찍한 재난을 불러들일 수 있다. 서방 입장에서도 원론적인 입장에서 미얀마에 대한 경제제재를 가할 뿐이고, 로힝야 분리독립운동이 IS 등 이슬람 근본주의와 직접 연계되어 있기 때문에[27] 자칫 도와주었다가 동남아시아에 반서방 성향의 이슬람 극단주의 국가를 탄생시키는 악영향을 초래할 수 있다. 물론 로힝야가 튀르키예나 튀니지처럼 이슬람 극단주의 사상을 배격하는 세속적 이슬람 국가로의 분리 독립을 주장한다면 또 모르겠지만 미얀마 군부의 극심한 박해로 제대로 된 공교육조차 배우지 못하고 이슬람 교육기관인 마드라사의 이슬람식 교육에만 의존했던 로힝야족의 상황에서 이런 점은 요원하다.
그런 점 때문에 로힝야족 역시 분리 독립을 주장하긴 하지만 대체적으로는 미얀마 정부의 차별 중단과 시민권 획득을 요구하는 수준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분리주의 여론이 점점 힘을 얻고 있다.
로힝야 분리독립은 라카인 주의 실효지배국인 미얀마의 격한 반발을 비롯하여 태국, 라오스, 캄보디아, 싱가포르,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 베트남 등 동남아시아 국가들이나[28] 거의 전 세계에서 나쁜 이미지를 굳힐 가능성도 무시할 수 없다. 분리독립이 나쁘다는 건 아니지만 이와는 별도로 국제 사회로부터 좋은 이미지를 얻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1] 특히 미국과 유럽의 로힝야족은 탄압을 피해 망명한 사람들이 주류이다.[2] 라카인 주 원주민[3] 특히 로힝야 인구가 꽤 많은 미얀마 라카인 주 지역의 아라칸족과 카미족이 그렇다.[4] al-Barahnakar. 미얀마 네그라이스(Negrais) 곶 부근의 아라칸 지방으로 비정됨[5] 벵골과 미얀마 모두 대영제국에 의해 같은 "인도 제국" 영토로 지배받았다.[6] 이 말고도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 브루나이의 중동계·중앙아시아계 무슬림 이주민들의 후손들 역시 오랜 혼혈화로 현지 말레이인이나 자바인 등 현지 주류 민족들과 매우 비슷하게 생겼을 정도로 동화되고 혼혈화되었다. 설령 로힝야족이 자신들의 주장대로 진짜 아랍계 후손이라고 해도 이미 언어·문화적으로 벵골화되었다고 보는 게 맞을 것이다. 당장 옛 무굴 제국 북부 지역이었던 북인도, 파키스탄, 방글라데시에 남아있는 무굴 제국 튀르크인·페르시아인 지배층의 후손들도 언어·문화·인종적으로는 현지 토착민에 거의 동화되어 이슬람교 신앙만 겨우 지켜낸 상황이다.[7] 문자 또한 아랍 문자 및 아랍 문자에서 파생된 하니피 로힝야 문자이다 보니 입으로 하는 말을 듣지 않고 문자만 봐서는 로힝야어가 벵골어와 별개의 언어로 느껴지기 쉽다. 인도아리아어군에 속하는 다른 언어들 중에도 힌디어와 우르두어, 인도 펀자브어와 파키스탄 펀자브어의 경우처럼 비슷한 케이스가 존재하는데, 여기서 예시한 사례들은 모두 후자의 문자가 아랍 문자다.[8] 미얀마인 문서의 사진을 보면 알겠지만 햇볕에 타서 그렇지 인종적으로도 전형적인 몽골리안이라 흑발, 직모, 피부색, 이목구비 등으로 다른 동남아 국가의 인종과 구분이 불가능하거나 가능하다 해도 경계선에 있는 사람이 많다. 그렇지만 벵골인은 흑백혼혈(정확히는 코카소이드와 네그리토 혼혈)이라 곱슬, 피부색, 안와상융기 등 생김새부터가 달라서 구분을 못하는 게 이상한 수준이다.[9] 이는 몽골어(몽골 문자, 키릴 문자), 타타르어(아랍 문자, 라틴 문자, 키릴 문자), 세르보크로아트어(라틴 문자, 키릴 문자) 등 국가에 따라 다른 문자로 표기되는 언어들의 특징이기도 하다.[10] 방글라데시의 문맹률도 대단히 높기 때문에 충분한 변명거리가 된다.[11] 아케메네스 왕조·파르티아·사산 왕조에서 쓰인 고대 페르시아 문자가 아니라, 아랍 문자를 페르시아어 등 이란어군 언어에 맞게 개량한 현대 페르시아 문자다.[12] 여담으로 아우랑제브와 황위 계승 전쟁을 벌이다 패배한 샤 슈자가 아라칸으로 피신한 적이 있는데, 망명을 받아주기로 약속한 아라칸 왕국 측에서 갑자기 샤 슈자 가솔들의 재산을 약탈하면서 충돌이 일어났고, 샤 슈자의 가신들은 죽거나 아니면 포로가 되어 아라칸 왕국의 군인이 되었다.[13] 이렇게 피난해온 사람들 중 상당수는 오늘날 방글라데시의 불교를 믿는 산악 소수민족인 줌머족에 편입되었다.[14] 이와 비슷한 일들이 대부분의 식민 제국에서 일어난다. 일제강점기의 가난한 조선인들에게 만주/연해주로 이주해 개간할 경우 땅을 준다는 일본 제국의 부추김에 응해 이주한 조선인들이 현지인들의 땅을 빼앗자, 중국인, 만주족 등 현지 주민들과의 갈등이 생겼고 이 때 일본은 대부분 조선인 편을 들었다. 토착민족과 다르게 서로 침입자로서 한 배를 탄 듯한 상황인 데다 자신들에게 세금을 내기 때문이다. 일단 부추긴 것은 자기네이니 어떻게든 책임을 져야 했기도 했고.[15] 힌두교에서는 외국인과의 통혼을 금기시하는 반면 이슬람에서는 무슬림 남성과 비무슬림 여성과의 결혼을 권장하는 편이다. 그리고 원래 이슬람에서는 무슬림 남성과 기독교인, 유대교인 여성과의 통혼은 권장하는 반면 무슬림 남성과 불교, 힌두교도 여성과의 통혼은 허용하지 않는다. 양곤 시에 정착한 무슬림 상인 상당수는 정식 결혼을 올린 것이 아니라 몰래 애인삼아서 현지처를 둔 것이었다.[16] 현재 로힝야를 제외한, 미얀마의 무슬림 인구 대부분은 무슬림 남성과 버마 현지인 비무슬림 여성의 혼혈을 조상으로 두고 있다.[17] 벵골 바로 옆에 있으며 미얀마 영토 중 가장 먼저 영국의 식민지로 편입된 곳이기에 벵골인들이 많이 정착했다.[18] 해당 제안은 당시 파키스탄 자치령 총독이었던 무함마드 알리 진나에 의해 거절당했다. 만약 아라칸이 동파키스탄에 합병되었다면 동파키스탄의 후신인 방글라데시는 라카인족 등 아라칸의 다른 민족들이 방글라데시로부터의 독립을 요구하여 소수민족 문제가 심각해졌을 것이다. 지금도 자국 내의 소수민족들인 줌머족들의 분리독립, 자치권 요구 투쟁으로 매우 골치 아픈 나라가 방글라데시다.[19] 특히 미얀마는 군부가 정치를 장악하고 있기에, 소수민족에 대한 차별이 심하며 개선될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20] 2012년 폭동의 발단도 세 명의 로힝야 남자들이 라카인 여자 한 명을 강도 후 살인한 사건이다. 강간까지 저질렀다는 설이 있으나 반대 주장이 있어 강간은 확실치는 않다.[21] 실제로 방글라데시에서는 미얀마와 아무 관계가 없는 자국의 불교, 힌두교도들이 이슬람 근본주의자들에게 테러와 증오범죄를 당할까봐 정부에서 그들에 대한 경호를 하고 있다.[22] 물론 일부는 받아주기는 했기 때문에 인도에 로힝야족이 40,000명 정도 살고 있다.[23] 심지어 이들 중에서도 동티모르는 포르투갈로부터 독립한 지 10일도 안 되어 인도네시아로부터 다시 강점당한 거라 로힝야와는 결이 완전히 다르다.[24] 아라칸족과 친족 역시 로힝야족과는 별도로 미얀마로부터의 분리독립을 주장하는 세력들이 있다.[25] 대략 카렌이나 카친족이 로힝야족의 분리독립을 근거로 '왜 로힝야는 시켜주면서 우리는 왜 안 되냐?'라고 분리주의를 더 강하게 주장할 가능성이 있다.[26] 물론 이슬람권 국가들도 튀르키예, 인도네시아, 이집트, 알제리, 이란처럼 지역 강국급 레벨에 드는 국가들도 없지만은 않으나 로힝야와 관계없는 머나먼 나라들이다.[27] 비교하자면 위구르 독립운동이 경우 튀르키예의 지원에 주로 의지하고, 세계 위구르 회의 등등의 단체에서 아예 사우디아라비아나 카타르 같은 아랍 이슬람 원리주의 국가들의 지원 대신 서방의 지원을 촉구하는 것과는 별개로 로힝야는 봉기군 핵심세력이 ISIS에 공개적으로 충성 맹세를 한 적이 있다.[28] 당장에 미얀마의 로힝야 탄압을 외교적으로 비판하는 동남아시아의 이슬람권 국가들인 인도네시아와 말레이시아도, 만일 로힝야가 미얀마로부터 분리 독립해서 독립국가를 세우겠다고 강하게 나선다면 반대 입장을 보일 가능성이 높다. 특히 인도네시아와 말레이시아는 아체나 서파푸아, 말루쿠, 사바, 사라왁 같은 분리독립 국가 수립을 주장하는 자국 내 소수민족이나 지역들도 강경하게 탄압하거나 억누를 정도로 분리주의에 극도로 민감한 나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