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3-29 23:34:05

미하엘 초르크

미하엘 초어크에서 넘어옴
미하엘 초르크의 역임 직책
{{{#!folding ▼
보루시아 도르트문트 주장
프랑크 밀
(1984~1988)
미하엘 초르크
(1988~1998)
슈테판 로이터
(1998~2003)
}}} ||
독일의 축구인
파일:989341897-borussia-dortmund-nuernberg-ZFPPv0wa7.jpg
<colbgcolor=#eeeeee> 이름 미하엘 초르크
Michael Zorc[1][2]
출생 1962년 8월 25일 ([age(1962-08-25)]세)
서독 노르트라인베스트팔렌도르트문트
국적
[[독일|]][[틀:국기|]][[틀:국기|]]
신체 183cm / 체중 73kg[3]
주발 오른발
직업 축구 선수 (수비형 미드필더 / 은퇴)
축구 행정가 (단장 / 은퇴)
소속 <colbgcolor=#eeeeee> 유소년 에빙 린덴호르스트 (1969~1978)
보루시아 도르트문트 (1978~1981)
선수 보루시아 도르트문트 (1981~1998)
행정 보루시아 도르트문트 (1998~2022 / 단장)
국가대표 7경기 (독일 / 1992~1993)
정보 더 보기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colbgcolor=#ffffff><colcolor=#1b2e33> 등번호 <colbgcolor=#fff,#191919>8번 (보루시아 도르트문트)
2번, 8번 (독일 대표팀)
가족 아버지 디터 초르크
아내 욜라 초르크
슬하 자식 3명
손주 2명
}}}}}}}}} ||
1. 개요2. 선수 경력
2.1. 보루시아 도르트문트
2.1.1. 도르트문트에서 뛰는 꿈을 꾸다.2.1.2. 마침내 꿈의 구단에서 데뷔하다.2.1.3. 강등 위기의 도르트문트, 그리고 위기에서 팀을 구하는 초르크.2.1.4. 팀의 전성기를 이끌기 시작하는 초르크.2.1.5. 마침내 구단에서 첫 리그 우승, 그리고 리그 2연패를 달성하다.2.1.6. 챔피언스리그 결승전에서 승리하여 구단의 첫 빅 이어를 들다.2.1.7. 은퇴
2.2. 독일 축구 국가대표팀
3. 행정가 경력
3.1. 보루시아 도르트문트 단장
3.1.1. BVB에서 화려했던 선수 경력을 마치고 이제는 행정가로 재시작하다.3.1.2. 파산 위기를 겪고 암흑기에 돌입하는 보루시아 도르트문트.3.1.3. 몰락하는 명가를 끝내 부활시키다.3.1.4. 은퇴
4. 플레이 스타일5. 기록
5.1. 대회 기록
6. 여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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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독일의 축구 선수 출신 행정가. 보루시아 도르트문트로컬 보이, 원클럽맨이자 구단 역사상 최다 출장자이며 은퇴 이후 20여 년간 BVB의 단장직을 수행한 전설이다. 선수 시절 초년에는 장발 헤어스타일을 하고 다녔던 탓에 "수지"(SusiSuzy)라는 별칭으로 불렸었다.

초르크는 오직 보루시아 도르트문트에서만 활약했고 총 17 시즌 동안 572경기를 출전했다. 1985년부터 등번호로 8번을 사용하였고 13시즌 동안 8번의 주인은 오직 초르크뿐이었다. 때문에 보루시아 도르트문트의 8번이라 하면 초르크의 상징 번호가 되었다. 도르트문트의 성골로써는 유일한 프랜차이즈 선수였으며 중하위권을 맴돌던 팀에서 묵묵히 뒤를 받쳐주다가 주장에 임명되고 나서부터는 팀도 상승세를 타기 시작했다. 그 결과 주장으로 뛴 10년동안 초르크는 주장으로서 맞이한 첫 시즌이었던 1988-89 시즌에 24년 만의 DFB-포칼 우승을 기점으로 1991-92 시즌에는 UEFA컵 준우승, 1994-95 시즌에는 도르트문트 최초의 분데스리가 우승과 1995-96 시즌 분데스리가 2연패, 1996-97시즌에는 UEFA 챔피언스 리그 우승[4]을 경험하였다. 1997년 인터컨티넨탈컵에서도 35세의 나이에 선발로 출전하여 우승을 거두었다.

1998년, 선수에서 은퇴를 한 그는 바로 보루시아 도르트문트의 단장이 되었다. 이 후, 2000년대의 암흑기를 거쳐가면서 위르겐 클롭과 함께 보루시아 도르트문트의 부활을 이끈다. 도르트문트에서 태어나 그곳에서만 자랐으며, 보루시아 도르트문트 입단 이후 소속팀을 떠나는 일 없이 한 구단에서 선수와 경영인으로서만 44년이라는 세월을 헌신한 초르크는 현대 축구에서는 쉽게 볼 수 없는 유형의 인물이다. 때문에 경기장 안팎에서 성공을 거둔 초르크를 두고 미국의 한 축구 블로거가 그를 역대 BVB 선수 탑10중 한 명으로 선정할때나, 골닷컴에서 다룬 보루시아 도르트문트의 역대 베스트 일레븐의 멤버로 평가 받을때 코멘트들을 보면 항상 선수로서의 업적뿐만 아니라 은퇴 이후 행정가로서의 업적도 함께 호평받고 있다.

2. 선수 경력

파일:DIFrfuYXsAEw40b.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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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s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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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보루시아 도르트문트

2.1.1. 도르트문트에서 뛰는 꿈을 꾸다.

1962년 8월 25일, 미하엘 초르크는 도르트문트에서 출생했다. 그의 아버지 디터 초르크[5]는 뤼넨[6] 출신의 아마추어 축구선수였다. 초르크가 태어나고 시작된 1962-63 시즌은 보루시아 도르트문트가 마지막으로 독일 챔피언십을 우승한것과, 처음으로 DFB-포칼 결승에 올랐던 시즌이었다. 초르크가 2살때 그의 아버지 디터는 에빙 린덴호르스트에 입단하였고 초르크도 자연스레 아버지를 따라 7살때부터 축구를 배우게 되었다. 에빙 린덴호르스트에서 축구를 시작한 이후 초르크는 그 지역에서 가장 촉망받는 선수로 떠오르게 되었다. 그러자 초르크는 그당시 도르트문트에서 제일 큰 축구팀인 BVB의 레이더망에 걸려 스카웃되었고, 그렇게 초르크는 1978년, 16세의 나이에 에빙 린덴호르스트를 떠나 보루시아 도르트문트 유스 클럽으로 이적하였다.

2.1.2. 마침내 꿈의 구단에서 데뷔하다.

초르크는 어린 시절부터 BVB를 응원하던 소년이었다.[7] 그런데 BVB에 입단함으로써 어린 시절 내내 보루시아 도르트문트를 응원했던 지역 아이에게 꿈이 실현된 것이었다. 유스 팀에 합류한 이후로도 초르크는 입단 동기였던 랄프 로제[8]와 함께 하인츠 케프만의 지휘 아래 U-23 팀에서 일찌감치 두각을 나타내었다. 보루시아 도르트문트의 큰 기대를 받는 유망주 초르크와 로제는 순조롭게 월반하였고, 이 둘은 청소년 국대에도 소집되었다. 이후, 초르크가 18살의 나이에 노르트라인베스트팔렌에서 열린 1981 유럽 청소년 선수권 대회를 우승하였고, 그로부터 5개월 뒤에 열린 1981 U-20 월드컵에도 참가하여 우승을 차지하였다. 그 결과로 초르크는 실버볼, 로제는 실버슈까지 수상하면서 BVB의 감독인 브란코 제베츠에게 눈도장을 찍었고, 그렇게 둘은 BVB 1군으로 콜업되었다.
파일:1982-83 시즌 초르크.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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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2-83 시즌의 초르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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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부르크 선수와 악수를 나누는 초르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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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르크의 첫 리그 경기이자 성인 팀 데뷔 경기는 1981년 10월 24일에 열린 11라운드 SV 베르더 브레멘 원정 경기였다. 이때는 초르크가 호주 U-18 월드컵에서 우승을 달성하고 돌아온지 고작 6일이 지난 뒤였는데, 서브 명단에 초르크의 이름을 올려졌다. 그리고 팀이 0-2로 끌려가던 후반 15분에 초르크는 베른트 클로츠와 교체되어 처음으로 리그 경기장을 누볐다. 비록 승부를 뒤집진 못했으나 초르크는 브란코 제베츠 감독에게 인상을 주는 것에 성공했다.

이후 후반기가 시작되자 바로 18라운드 1. FC 쾰른전에서 선발로 출전하였다. 초르크는 BVB 서포터들의 열렬한 응원을 배경으로 베스트팔렌슈타디온 데뷔를 현실로 이루어냈다. 초르크가 어릴 적 부터 그토록 고대 해왔던 꿈이 드디어 이뤄진 것이었다. 초르크는 브레멘전을 포함해서 측면과 중앙 미드필드 지역을 안가리며 선발로 출전하였다. 그 결과, 데뷔 시즌에 9경기를 뛸 수 있었는데, 데뷔전을 제외한 나머지 8경기를 전부 선발 출전으로 나서는 고무적인 성과를 달성해냈다.[9] 그리고 시즌중에 초르크는 고등학교를 졸업함과 동시에 도르트문트 대학에 진학하여 경영학을 배우기도 하였다.[10]

뿐만 아니라 초르크는 독일연방군 체육진흥부대에서 군복무를 시작하였다.[11] 비록 초르크는 군복무에 학업까지 수행하고 있었던 유망주였다지만 그래도 전 시즌 보여준 폼때문인지 1982-83 시즌부터 제베츠의 후임 감독인 카를하인츠 펠트캄프에 의해 본 포지션인 수비형 미드필더뿐만 아니라 측면과 중앙까지 기용되면서 초르크는 사실상 미드필더 위치를 안가리는 주전이 되었다.

초르크의 컵 데뷔전은 1982년 8월 28일, DFB-포칼 1라운드 로트바이스 에센전이었다. 포칼에서도 3경기를 출장해서 전부 승리를 거두었으나, 초르크가 결장한 준결승전에서 보루시아 도르트문트는 SC 포르투나 쾰른에게 5-0으로 패하며 탈락하였다. 유럽대항전에서도 데뷔전을 치뤘는데, 초르크는 UEFA컵에서 레인저스 FC를 상대로 선발로 출전하였다. 다만 홈에서 무승부를 거두고 원정에서 2-0으로 패하는 바람에 보루시아 도르트문트는 1라운드만에 탈락하였다.

그외에도 초르크는 주전이 올라섰던 1982-83 시즌부터 공격포인트를 달성하는것에 성공했다. 분데스리가의 경우 리그 12라운드에서 DSC 아르미니아 빌레펠트를 상대로 11-1이라는 점수도 크게 승리했을 때, 초르크는 교체로 출전하여 첫 어시스트도 달성하였고, 18라운드에서는 VfB 슈투트가르트전에서 동점골을 터뜨리며 커리어 첫 득점을 기록하였으나 팀은 후반에 실점을 허용하여 결국 패하였다. 하지만 그 다음 경기인 헤르타 BSC전에서는 정규 시간 4분을 남기고 극적인 결승골을 넣으며 동료들로부터 칭찬을 받았다. 다만 팀 성적은 그닥 좋지 못해서 초르크를 주전으로 기용했던 펠트캄프 감독이 경질되고 헬무트 비테가 감독 대행으로 나서자 초르크는 리그 막바지에야 2경기를 출전할수 있었다. 그래도 20살에 불과한 어린 선수가 주전까지 꿰차는 활약을 했기 때문에 좋은 인상을 남길 수 있었다. 그래서 인지 이 무렵, 초르크는 '수지'((Susi)라는 애칭을 얻었다.[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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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3-84 시즌 쾰른과 경기 중인 초르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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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만 초르크가 주전으로 뛰는동안에 구단은 암흑기에 돌입하고 있었다. 1982년 9월, 보루시아 도르트문트의 라우발 회장이 사임하고 이사회에 공백이 생기며 830만 마르크의 빚을 지는 재정적인 위기를 겪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보루시아 도르트문트의 감독들[13]은 좋지 못한 성적을 거두게 되면 가차없이 경질되었고, 더욱더 팀의 부진을 초래하게 되었다. 이로 인해 초르크는 첫 시즌에 30경기 5골이라는 활약을 했음에도 보루시아 도르트문트는 최종 순위에서 13위를 기록하며 좋지 못한 성적을 낸 채 시즌을 마감해야 했다.

와중에 초르크는 포지션의 변화를 겪기도 했었다. 시즌 전반기에는 본래 포지션인 수비형 미드필더로 출전했었지만, 시즌 중에 감독이 바뀌고 나서 출전한 15라운드 1.FC 쾰른과의 경기부터는 센터백이나 스위퍼로 경기를 뛰기도 하였다. 호르스트 프란츠 감독이 초르크를 보고 무슨 판단을 해서인지 랄프 로제가 본래 뛰던 포지션이던 스위퍼 자리에 초르크를 넣고 로제와 스위칭한 것이었다. 그래도 초르크는 수비수로 경기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후반기에서 3골을 넣는 활약을 보여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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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4-85 시즌 베르더 브레멘 경기에서의 초르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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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4-85 시즌에는 초르크가 30경기 8골을 넣었다. 저번 시즌때와 똑같이 새감독인 티모 코니츠카도 초르크를 랄프 로제와 함께 미드필더와 수비수로 번갈아 출전 시켰고, 부진을 거듭하자 경질되며 라인하르트 자프티히가 임시 감독으로 팀을 재정비한 후 다시 에리히 리베크가 새 감독으로 부임하여 보루시아 도르트문트는 최종전에서 우승에 도전했던 SV 베르더 브레멘에 2-0 승리를 거두며 가까스로 14위로 분데스리가에 잔류했다.[14] 여담으로 에리히 리베크 감독은 초르크와 로제를 지휘하면서 이 둘이 팀의 미래를 이끌 유망한 선수라고 칭찬하였다.

2.1.3. 강등 위기의 도르트문트, 그리고 위기에서 팀을 구하는 초르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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팀의 핵심으로 성장한 초르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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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5-86 시즌에는 초르크가 처음으로 34경기를 뛰며 분데스리가 전 경기 출전을 달성하였다. 재정적으로 불안한 보루시아 도르트문트는 전력 보강을 할 수 없었기에 그 사이에 초르크와 로제가 아예 팀의 핵심으로 우뚝 선것이었다. 체르너이 팔 감독의 깊은 신뢰를 받은 초르크는 먼저 초반 13라운드까지는 스위퍼라는 포지션으로 1골을 넣었지만, 14라운드인 FC 바이에른 뮌헨과의 경기에서부터는 측면 미드필더로 출전하였다. 그 후에는 측면 또는 홀딩에 위치하면서도 20경기 9골을 넣는 맹활약을 펼쳤고 종합 34경기 10골로 시즌을 마치며 개인으로서는 아주 좋은 활약을 펼쳤으나, 보루시아 도르트문트는 전 시즌보다 더욱 부진했고 급기야 VfB 슈투트가르트 원정에서 4-0으로 참패하며 체르너이 팔 감독이 경질되었고, 라인하르트 자프티히 코치가 다시 감독 대행으로 팀을 이끌어야 했다. 남은 2경기에서 레비어 더비를 무승부로, 하노버 96 원정에서 4-1로 승리를 거두었으나, 최종 순위는 변함없이 16위로 마치며 보루시아 도르트문트는 결국 SC 포르투나 쾰른과 강등 플레이오프를 치르게 되었다.

강등이 걸린 외나무다리에서 포르투나 쾰른을 만난 보루시아 도르트문트는 1차전을 포르투나 쾰른 원정으로 시작해야 했다. 44,000 명의 포르투나 쾰른 팬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보루시아 도르트문트는 맥없이 0-2 패배를 당하고 말았다. 본래 랄프 로제가 이 시즌 수비의 핵이었으나 심각한 부진에 시달리던 시기라서 자프티히 감독 대행은 그를 기용하지 않았으나, 포르투나 쾰른 원정에서 간만에 랄프 로제 카드를 사용했다가 패배를 당하고 말았다. 급해진 자프티히 감독은 이후 홈에서 열린 2차전에서 결국 랄프 로제를 외면하였다. 하지만 보루시아 도르트문트의 선수들은 여전히 엄청난 압박감을 받고 있었다. 이로 인해 지나치게 긴장했었던 여파일까 결국 전반 14분, 포르투나 쾰른에게 선제골까지 실점 당하며 0-3으로 뒤지게 되었다. 이제는 3골을 못넣으면 그대로 강등직행에 놓여진 상황, 그러나 후반에 53분에 팀동료인 잉고 안더브루게가 상대 페널티 박스 진영에서 논란의 파울을 얻어내었고, 주심은 보루시아 도르트문트에게 PK를 선언하였고 이 페널티 킥을 초르크가 차게 되었다. 초르크는 감독, 코치, 팀동료들과 서포터들의 주목을 받으며 침착하게 공을 찼고 공은 빠른 속도로 날아가 골망의 오른쪽 구석을 흔들었다. 초크르가 득점에 성공하면서 추격의 발판을 마련하게 된것이었다. 순식간에 분위기는 바뀌었고 기세는 보루시아 도르트문트에게로 넘어왔다. 이후 후반에 1골을 더 넣는데는 성공 했으나 종료 직전까지 승부를 원점으로 돌릴 수 있는 득점은 아직 나오지 않아 조마조마했던 순간이였다. 그리고 정규시간이 끝났을 때 위르겐 베크만의 기적적인 추가시간 득점으로 스코어를 3-3으로 맞추며 간신히 재경기로 끌고 갔다.[15] 그리고 중립 구장에서 재경기가 치러졌다. 초르크는 멀티골을 넣고 1개의 도움을 성공시키면서 도르트문트의 8-0 대승에 공헌을 하였다. 그렇게 BVB는 강등 위기로부터 가까스로 생존에 성공했다.[16]
파일:1986-87 시즌 레비어 더비에서의 초르크.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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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금 돌풍을 일으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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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6-87 시즌은 라인하르트 자프티히가 보루시아 도르트문트의 정식 감독이 되었다. 초르크의 동기인 랄프 로제는 전 시즌에 보여준 최악의 폼으로 인해 자프티히의 눈밖에 나 자리를 잃었고, 결국 2부 리그에 있는 로트바이스 오버하우젠으로 이적하였다. 대신해서 보루시아 도르트문트는 프랑크 밀, 노르베르트 디켈, 토마스 헬메르를 영입하며 전력을 보강했다. 여기에 더해 초르크는 32경기 14골이라는 맹활약을 펼쳤는데, 공격수였던 밀과 디켈이 각각 20골, 17골을 기록한것에 대해 수비형 미드필더로만 뛰던 초르크가 3번째로 많은 득점을 했다는 점에서 그가 얼마나 대단한 활약인지를 알 수 있다. 이후 라인하르트 자프티히 감독 아래 전년도 16위에 강등에서 겨우 탈출했었던 팀은 초르크의 활약에 힘입어 분데스리가 4위로 시즌을 마치며 UEFA컵에 진출권을 획득했다.
파일:1987-88 시즌의 초르크.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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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르트문트 그 자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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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르크의 활약은 단발성이 아니었다. 그 다음 시즌인 1987-88 시즌에도 초르크는 분데스리가 23경기 13골[17]을 기록하며 하드캐리를 한 반면, 밀과 디켈은 전 시즌과 달리 부진하여 한자릿수 득점에 그치고 말았다. 초르크가 10라운드까지 10경기 4골을 넣었다가 부상으로 잠시 이탈했었는데, 그 사이에 도르트문트는 11경기동안 겨우 2승을 거두는 행보를 보였다. 그래서 초르크가 복귀하고 나서야 다시 팀은 반등했고 도르트문트는 리그 13위에 안착했다.

2.1.4. 팀의 전성기를 이끌기 시작하는 초르크.

파일:초르크의 첫 우승.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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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8-89 DFB-포칼 우승 후 트로피를 들어올리는 초르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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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8-89 시즌을 앞두고는 아인트라흐트 프랑크푸르트의 유망주 안드레아스 묄러, FC 바이에른 뮌헨미하엘 루메니게가 입단했다. 초르크의 활약은 그의 영향력을 확대시켰고, 그를 대단히 신임했던 자프티히 감독은 이때문에 시즌 초 주장 임명에 대해서 클럽 이사회와 불화를 겪었다. 이사회는 기존의 주장이였던 프랑크 밀의 유임을 선호했던 반면, 자프티히 감독은 미하엘 초르크가 주장이 되기를 선호했기 때문이었다. 의견이 좁혀지지 않아 자프티히 감독이 사임하여 호르스트 쾨펠이 감독이 되었다. 리그에서는 7위로 마무리했으나 DFB 포칼에서 초르크는 1라운드부터 준결승까지 4경기 연속으로 득점을 성공시키며 팀을 결승까지 견인하였다. 덕분에 쾨펠 감독에게도 신임을 받는 초르크를 보며 이사회도 시즌 중반이 돼서야 주장 승계를 수락하였고 마침내 초르크는 BVB의 주장으로 임명되었다. 그리고 결승전에서도 풀타임 출전하여 비록 득점은 하지 못했으나 BVB는 베르더 브레멘을 4-1로 꺾고 클럽 역사상 두 번째 DFB-포칼 우승을 차지하게 된다. 주장이자 팀내에서 유일하게 도르트문트 출신이였던 초르크가 가장 먼저 우승컵을 들어올렸다.

초르크는 이후 우승 축하 연회에서 매우 특별한 영광을 얻기도 했다. 보루시아 도르트문트의 레전드 선수인 헤르베르트 잔트만(Herbert Sandmann)으로부터 BVB 명예 반지를 건네받았는데, 잔트만은 초르크에게 이 반지를 주면서 "네가 가져가라. 너는 최선을 다했고, 너는 BVB의 미래다. "라는 말을 하자 그제서야 초르크는 이 우승의 중요성을 제대로 평가하고 이해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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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를스루어와의 경기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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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9-90 시즌 개막 직전 초르크는 보루시아 도르트문트의 주장 완장을 달고 분데스리가 챔피언인 FC 바이에른 뮌헨DFL-슈퍼컵 단판 승부를 벌였고, 난타전 끝에 도르트문트가 4-3으로 간신히 이기면서 초르크는 구단과 함께 사상 첫 슈퍼컵 우승과 더블을 달성하였다. 리그도 4위로 마치면서 UEFA컵 진출에는 성공했지만 DFB-포칼에서는 1라운드만에 탈락, 처음 참가한 UEFA 컵위너스컵에서도 해당 대회 우승팀인 UC 삼프도리아를 만나면서 패하여 탈락했다. 이것이 초르크의 마지막 컵위너스컵 대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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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대를 바라보는 초르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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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91 시즌 초르크의 최종 성적은 30경기 5골로 나쁘지 않았지만 팀은 다시 리그 10위로 내려앉았다. DFB-포칼 1라운드에서는 SpVgg 그로이터 퓌르트를 만나 동점골을 어시스트하였으나 팀은 3:1로 패하여 탈락했다.[18] 이어 UEFA컵에서는 1라운드 켐니처 FC와의 2차전부터 출전하였고 무난히 2-0으로 승리를 거둔 후에 2라운드로 진출하였다. 다음 상대는 루마니아의 CS 우니베르시타테아 크라이오바였고, 초르크는 1차전에서 선제 득점을 기록, 어시스트로 팀의 추가골을 도우며 3-0으로 승리하였고, 2차전에서도 초르크가 연속으로 득점하면서 종합 4-0으로 이기며 16강 진출에 성공하였으나, 16강 상대인 RSC 안데를레흐트 원정을 가서 1-0으로 패하였고, 2차전에서 초르크는 결장했으나 팀은 2-1 승리를 거두었다. 다만 원정 다득점으로 인해 도르트문트는 탈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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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판을 바라보는 초르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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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1-92 시즌부터 초르크의 입지에도 변화가 일어났다. 30대의 나이로 접어들기 시작한것도 있지만, 초르크를 중용하던 쾨펠 감독이 성적 부진의 책임을 지고 감독 자리에 물러났다. 쾨펠 감독의 후임은 스위스에서 온 오트마어 히츠펠트라는 감독이었다. 그는 그라스호퍼 클럽 취리히를 이끌며 더블을 달성하는등 떠오르는 감독으로 명성을 얻기 시작하자 보루시아 도르트문트에서 새 감독으로 내정하고 그를 데려오게 된 것이었다. 여기에 스테판 샤퓌자라는 스위스 특급 공격수도 합류하였다. 감독이 바뀌었으나, 히츠펠트 감독도 여타 전 감독들이 그랬듯 초르크를 크게 신뢰하였다. 그래서 초르크는 주장직을 유지 한 채 19경기에 출전하여 6골을 넣으며 좋은 활약을 선보이기도 하였다. 초르크는 보루시아 도르트문트에서 선수 생활을 하면서 처음으로 우승 경쟁을 경험하였다. 팀은 VfB 슈투트가르트에게 골득실에 뒤져 안타깝게도 분데스리가 준우승에 그치고 말았다. 하지만 구단은 점차 위닝 멘탈리티가 새겨지기 시작했으며, 초르크는 선수 생활 처음으로 A매치에 소집되는 기회를 부여 받았다.

1992-93 시즌, 초르크는 리그에서 10골 5도움을 기록하며 데뷔이래 가장 많은 공격 포인트를 쌓을 수 있었다. 덕분에 초르크의 보루시아 도르트문트는 리그에서 4위라는 좋은 성적을 거뒀다. 또한 전 시즌 리그 준우승 팀 자격으로 참가한 UEFA컵에서도 결승까지 진출했다. 여기서 초르크는 플로리아나 FC, 셀틱 FC, 레알 사라고사, AJ 오세르를 상대로 골을 넣으면서 활약을 하였고, 보루시아 도르트문트를 결승까지 이끌었다. 결승전 상대는 유벤투스 FC였는데, 이 팀에는 한때 초르크의 팀 동료였다가 유벤투스로 이적한 안드레아스 묄러가 있었다. 초르크는 묄러와 결승전에서 조우하며 호기롭게 대결을 하였지만 보루시아 도르트문트는 유벤투스에게 무참히 패배하였고, 초르크는 또 다시 준우승의 아픔을 삼켜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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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3-94 시즌의 초르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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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3-94 시즌에도 리그 7골을 기록하면서 초르크의 활약은 여전했다. 여기에 카를하인츠 리들레마티아스 자머의 합류로 한층 더 강력해진 도르트문트는 UEFA컵에서 준결승까지 진출하는데 성공했지만, 또 유벤투스 FC를 만나 탈락하고 말았다. 리그는 2연속 4위로 마감하였다. 하지만 시즌이 끝나고 안드레아스 묄러가 도르트문트로 복귀하면서 마침내 구단의 전성기가 도래하게 되었다.

2.1.5. 마침내 구단에서 첫 리그 우승, 그리고 리그 2연패를 달성하다.

파일:1994-95 시즌 우승을 확정짓고 눈물을 흘리는 안드레아스 묄러, 이브라힘 탄코, 미하엘 초르크.jpg
1994-95 시즌 우승을 확정하며 32년만의 우승에 감격하여 기쁨의 눈물을 흘리는 미하엘 초르크와 이브라힘 탄코, 안드레아스 묄러
파일:1995-96 시즌 2연패를 달성하고 마이스터샬레를 들고있는 미하엘 초르크.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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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5-96 시즌 리그 2연패를 달성하고 트로피를 들고있는 미하엘 초르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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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4-95 시즌과 1995-96 시즌, 보루시아 도르트문트는 분데스리가 2연패를 달성하였다. 이때 초르크는 각각 두 시즌 동안 가장 많은 득점을 기록하며 2연속으로 팀내 최다 득점자로써 우승에 큰 공헌을 하였는데, 자세히 살펴보자면 1994-95 시즌에는 초르크가 33경기를 출전하였고, 그중에 선발 30경기를 풀타임으로 뛰면서 15골 2도움을 기록하였다. 1995-96 시즌에는 전 시즌보다 출전 경기수가 3경기 적었던 30경기를 출전하였고, 그중에 선발은 27경기였으며 23경기를 풀타임, 3경기를 교체로 뛰면서 15골 3도움을 기록하였다.

이 활약에 대해서 특기 할 만한 점이 있다면, 당장 초르크의 포지션이 수비형 미드필더라는 포지션이었다. 그중에서 초르크는 홀딩 미드필더로 분류되는 선수였는데, 이 포지션은 경기장에서 주로 후방에 위치 해야 하는 특성을 가졌기 때문에 득점을 하더라도 1~2골에 그치거나 무득점으로 시즌을 마감하는게 일반적이다.[19] 그런데 초르크는 포메이션의 후방을 지키는 임무를 맡고도 팀내 공격수인 스테판 샤퓌자카를하인츠 리들레의 골을 합친 것보다 더 많은 득점을 기록한 것이다.[20] 물론 1994-95 시즌때는 페널티 킥 비중이 어느정도 있었지만 1995-96 시즌에는 15골중에 페널티 킥으로 득점한게 1개에 불과하며 우승 경쟁팀인 FC 바이에른 뮌헨을 상대로 쐐기골을 터뜨리거나 레비어 더비 라이벌인 FC 샬케 04와의 경기에서 역전골을 터뜨리는 등, 아주 순도 높은 활약도 하였다. 심지어 나이도 서른을 넘긴 선수인데 전체적인 양상을 보면 공격수들이 죄다 부진하고 오히려 후방에서 뛰는 전성기도 지난 선수가 득점을 터뜨리며 팀을 우승까지 견인 시킨 꼴이였다. 물론 이렇게 될 수 밖에 없었던 것이, 리그 우승을 차지 했던 이 두 시즌때는 하필 주축 공격수들이 장기간 부상을 당했었고, 라르스 리켄과 이브라힘 탄코같은 젊은 선수들도 있었지만 그다지 많은 득점을 기록하지 못하였다. 때문에 미하엘 초르크가 공격 가담을 넘어서 주도하는 작업을 수행해야 했으며, 그 결과로 초르크의 선수 생활 커리어 중에 가장 좋은 퍼포먼스를 펼칠 수 있었다.

1995-96 시즌에 처음 참가한 챔스에서도 조별 리그에서 도르트문트와 유벤투스가 재회하였고, UEFA컵에서 유벤투스에게 두 번이나 탈락했던 경험을 잊지 않았던 초르크는 유벤투스 원정에서 선제골을 넣으며 챔스 첫 득점으로 복수의 성공과 승리의 축포를 터뜨렸다.

2.1.6. 챔피언스리그 결승전에서 승리하여 구단의 첫 빅 이어를 들다.

1996-97 시즌을 앞두고 초르크와 동포지션 선수인 파울루 소자폴 램버트가 각각 유벤투스, 머더웰로부터 이적해왔다. 초르크는 이 젊은 선수들과 포지션 경쟁을 해야하는 상황에 놓였으나 문제는 초르크의 나이가 이미 34세로 접어들었고, 노쇠화의 영향으로 리그 선발 출전 횟수가 점차 줄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초르크는 자신이 선수 생활의 황혼기에 놓여있음에도 불구하고 출전 기회가 줄어든다는 것에 불만을 품었다. 게다가 그동안 염원했던 리그 우승은 이미 자신의 뛰어난 활약을 통해서 2연속으로 이뤄냈고, 이제 나이도 있는 지라 시즌 개막전에 함부르크 SV를 포함한 복수의 분데스리가 구단과 일본J리그에서 온 제안들을 생각해봤으나 초르크는 깊은 고민 끝에 결국 보루시아 도르트문트 잔류를 결정하였다. 그리하여 초르크는 보루시아 도르트문트에서 여전히 모습을 볼수 있었고, 이 시즌에 리그에서 7골을 넣으며 여전한 모습을 보여줬다. 1996-97 시즌에 참가한 챔스에서도 초르크는 조별리그 전경기에 선발 출전하였다. 다만 토너먼트 이후부터는 파울루 소자에게 주전을 내주며 주로 선발이 아닌 교체투입으로만 출전하였다. 그러던 와중에 보루시아 도르트문트는 마침내 결승전까지 진출하며 역사를 써내려가는 중이었다.

이에 관련하여 재밌는 일화가 있었다. 당시 오트마어 히츠펠트 감독은 챔피언스리그 결승전에서 유벤투스 FC를 상대할 선발 멤버로 여전히 초르크를 쓸 생각이 없었다. 물론 초르크의 폼이 안 좋은 것은 아니였지만, 노장인데다가 파울루 소자가 이미 제몫을 해주고 있기 때문이였다. 하지만 카를하인츠 리들레의 멀티골이 터졌고, 라르스 리켄가 쐐기골을 박으며 보루시아 도르트문트의 우승이 거의 직전에 다다르자 보루시아 도르트문트의 서포터는 초르크의 별명인 수지를 연호 하기 시작했다. 또한 초르크 대신 주장 완장을 차고 선발로 나섰던 마티아스 자머가 팀의 우승을 직감했는지 히츠펠트 감독에게 다가가 남은 시간만이라도 초르크를 결승전 무대에 뛰게 해 달라고 설득하였다. 물론 히츠펠트도 초르크의 헌신을 잘 알고 있었다. 때문에 팀의 역사를 함께할 자격이 있다는 걸 이해하고 있었지만 혹시 라도 방심은 금물이었기에 교체 투입을 가볍게 생각 할 수 없었다. 그런데 결승전에서 카를하인츠 리들레의 두번째 득점과 라르스 리켄의 쐐기 득점에 어시를 기록하며 크게 활약한 안드레아스 묄러까지도 자머의 의견에 힘을 보태며 마찬가지로 히츠펠트한테 본인을 빼서라도 초르크를 교체 투입 해 달라는 말까지 하였다. 이처럼 서포터와 선수들의 성화에 못이긴 히츠펠트는 결국 자의반 타의반으로 3-1로 리드하던 상황에서 정규 시간이 1분남은 후반 44분이 돼서야 초르크의 투입을 결정하였고, 마침내 결승전의 무대인 올림피아슈타디온 뮌헨에서 초르크가 보루시아 도르트문트의 챔피언스리그 유니폼을 입고 선수들의 격려와 함께 잔디를 밟으면서 서포터들에게 모습을 드러냈다. 이후 초르크가 뛰는 동안에는 다행히 더 이상의 실점은 없었으며, 얼마안가 경기 종료를 알리는 심판의 휘슬이 울리자 초르크는 선수 생활 처음으로 출전한 챔피언스리그 결승전에서 역사상 첫 챔스 우승을 달성했다는 것을 생생하게 온몸의 피부로 느끼기 시작했다.

초르크로서는 정말 감격스러운 순간이었다. 비록 초르크는 BVB가 챔스 결승전에 오기까지 본인이 선발로 출전한 횟수가 적었다해도 그동안 자신이 겪었던 수많은 경험 들을 바탕으로 팀을 하나로 단합하는 큰 공헌을 하였으며, 이것을 기점으로 팀 상승세의 원동력이 되었기에 이 챔스 우승에는 초르크의 지분도 매우 크다고 보면 된다. 과거, 10년전만에도 강등 탈출을 위해 사투를 벌였던 풋내기 유망주인 그가 이제는 BVB의 주장으로서 DFB-포칼, 마이스터샬레를 당당히 들어 올렸고, 선수 생활 막바지에 빅 이어까지 들게 되었으니, 마침내, 초르크는 선수 커리어의 정점을 찍으며 보답을 받게 되었던 것이다.
파일:빅 이어와 초르크.jpg 파일:빅 이어를 들고 웃는 정장차림의 초르크.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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챔스 우승을 달성한 초르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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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7. 은퇴

1997-98 시즌이 미하엘 초르크의 마지막 시즌이었으나 보루시아 도르트문트는 최악의 부진으로 스타트를 하게 되었다. 보드진은 히츠펠트 감독을 스포츠 디렉트로 올려보내며 사실상 실권을 빼앗았고, 네비오 스칼라를 선임했다. 문제는 네비오 스칼라가 3-5-2 포지션을 운용하는 감독이었는데, 이러면 홀딩 미드필더의 역할이 축소되기 때문에 초르크가 뛸 자리가 없게 된다. 그래서 초르크는 리그에서 겨우 22경기만을 출전하였고, 그중에서도 벤치에서 시작하거나 아예 명단에서 제외되는일이 부지기수였다. 결국 스칼라 감독이 똥볼만 찬 끝에 한때는 도르트문트가 강등권까지 몰리며 위기에 처했었지만 시즌이 중반을 지나갈때 쯤에야 다시 안정되었고 그렇게 도르트문트는 계속 중위권을 유지하였다.

이듬해에 챔피언스리그 우승 자격으로 참가한 인터컨티넨탈컵에서도 크루제이루 EC를 상대로 초르크가 선제골을 넣으며 도르트문트에게 우승[21]을 가져다 주었다. 보루시아 도르트문트는 1997-98 분데스리가 최종 순위 10위로 마쳤고 초르크의 마지막 시즌은 리그 22경기 출장으로 마무리 되었다. 챔피언스리그에서도 교체 출전으로나마 8경기를 뛰었고, 8강에서 FC 바이에른 뮌헨을 잡고 준결승 진출에 성공하였다. 비록 준결승전에서는 레알 마드리드 CF에게 2-0으로 패하며 2연속 우승에는 실패했지만 미하엘 초르크로서는 유종의 미를 거둘 수 있는 시즌이었다. 시즌이 끝나고 초르크는 현역 생활을 마무리 하였다.

1981년과 1998년 사이 보루시아 도르트문트 소속으로 463 분데스리가 경기에 출전, 특히 말년에 다다르고 나서야 우승커리어에 큰 성공을 거두었다. 그 기간동안 주장으로 활약하며 서포터의 큰 지지를 받았다. 초르크는 총 17시즌중에 7시즌을 후방에 뛰면서 두자릿 수 이상 득점하는 것에 성공하였다. 그가 가진 뛰어난 페널티 킥 실력과 중요할 때 터뜨리는 한방, 그리고 몰아치듯 터뜨리는 득점포 덕에 한때 클럽 역대 최다 득점자 명단에서 2위에 랭크된 적이 있었다.

14년이라는 세월을 구단에 있었고 그러는 동안 초르크가 거쳐간 감독은 13명이었다. 선배들은 이적하거나 은퇴했으며, 입단 동기가 BVB를 떠나는 동안에도 흔들리지 않는 바위처럼 긴 시간을 팀에게 바치며 암흑기를 묵묵히 버텼던 초르크가 끝내 구단의 전성기를 이룩했으니 가히 보루시아 도르트문트 레전드중의 레전드라 찬사 받을만한 인물이었다.

2.2. 독일 축구 국가대표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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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살의 초르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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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1981년 청소년 국대 시절의 랄프 로제(왼쪽)과 미하엘 초르크(오른쪽).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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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1년 청소년 국대 시절의 랄프 로제(왼쪽)과 미하엘 초르크(오른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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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르크는 18살의 나이로 청소년 국대에 소집되어 1981년 U-18 유럽 챔피언십에 참가한 것이 시작이었다. 비록 여기서는 벤치를 지켰지만 초르크의 도르트문트 유스 입단 동기인 랄프 로제와 함께 도르트문트에서 제일 촉망 받는 유망주였던 초르크는 1981년 세계 청소년 축구 선수권 대회에서 전경기를 출전하였고, 우승을 달성해냈다. 그러나 그가 도르트문트의 핵심 선수로 뛰었음에도 독일 축구 국가대표팀 소속으로 어느 국제 대회에도 출전하지 못하였다.
파일:1993년 국대에서의 초르크.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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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3년 국대에서의 초르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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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1990년 12월 19일 28세의 나이에 4-0으로 승리했던 스위스전에서 처음으로 국가대표에 소집되었으나, 출전하지 못했다. 1992년 12월 16일, 29세의 나이에 1-3으로 패했던 브라질전에서 후반 14분에 교체 투입하여 처음으로 출전하였다. 등번호는 2번이었다.
파일:공중볼 경합하는 초르크.jpg파일:우루과이전 첫 선발 출전하는 초르크.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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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루과이전 당시 초르크의 모습[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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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년 12월 20일[23]에 열린 우루과이전에서는 처음으로 선발로 나섰으며 풀타임 출전하여 4-1 승리에 일조하였다. 비록 본 포지션이 아닌 레프트백으로 뛰었지만 초르크는 익숙치 않은 포지션에서도 좋은 모습을 보여주었다. 다음해인 1993년 3월 24일에 열린 스코틀랜드전에서는 중앙 미드필더로 선발 출전하였다. 동년 4월 14일 가나전에서도 중앙 미드필더로 선발 출전했으며 이때부터 등번호를 2번에서 변경하여 8번을 달고 경기를 뛰었다. 특히 이 경기에서의 6번째골 장면때는 초르크의 킬패스를 기점으로 득점이 터지기도 하였다.

1992-93 시즌이 종료된 후에 미국에서 US컵이 개최되었다. 미국, 브라질, 잉글랜드, 독일이 참가했으며 여기서 초르크는 브라질과의 첫 경기에도 선발로 출전하였다. 그러나 독일이 브라질에게 선취점으로 3점이나 내준 이후로는 초르크는 후반 9분에 토마스 슈트룬츠와 교체되었다. 이 때문인지 미국전에서는 벤치를 지켰으며 잉글랜드와의 최종전에서는 후반 21분이 돼서야 교체로 출전하였다. US컵을 우승했다지만 초르크로서는 미래가 어두웠다. 이후 1993년 10월 13일, 5-0으로 이겼던 우루과이전을 마지막으로 더 이상 국대에 소집되지 못했다. 도르트문트에서는 많은 경기를 출전했지만 국가대표를 친선 7경기가 전부였으며 종합 386분만을 뛰었다.[24]

초르크가 국대에 자리 잡지 못한 이유로는 일단 첫번째로 1982년 월드컵 당시에는 1960년생 피에르 리트바르스키나 1961년생 로타어 마테우스같이 초특급 유망주가 아니고서는 1962년생인 초르크가 끼어들 자리가 없었다. 1984년 유로때는 같은 청소년 국대 동기인 랄프 팔켄마이어가 대회에 참가하였으나, 그도 1경기를 뛰지 못했고, 팔켄마이어를 제외한 나머지들은 아예 소집조차 되지못했다. 그러는 사이 토마스 베르톨트올라프 톤, 안드레아스 묄러, 토마스 헤슬러같은 후배들이 치고올라오니 중하위권을 전전하는 팀에서 고군분투하는 초르크가 국대에서 멀어지게 되는건 당연지사. 결국 도르트문트가 분데스리가에서 경쟁력이 있는 구단이 될 때서야 국가대표로 경기에 뛸 수 있었다. 그렇다고 레귤러 멤버로 소집되기에는 이미 초르크의 나이가 30세를 넘어 노쇠해졌으니, 초르크에게는 무척 아쉬운 커리어라고 볼 수 있다.[25]

3. 행정가 경력

3.1. 보루시아 도르트문트 단장

3.1.1. BVB에서 화려했던 선수 경력을 마치고 이제는 행정가로 재시작하다.

BVB에서만 572경기를 뛴 초르크는 은퇴 후 소속팀이었던 보루시아 도르트문트의 FC 바이에른 뮌헨의 감독으로 떠난 오트마어 히츠펠트의 빈자리를 대신하여 단장직을 곧바로 역임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일평생 축구만 해왔던 초르크에게 경영은 문외한이였다. 그도 그럴게, 선수 생활 동안 초르크는 도르트문트 대학에서 경제학을 4학기 배운게 전부였다. 때문에 처음 몇 년 동안은 초심자로서 맨땅에 헤딩하는식으로 단장직을 수행해야했다. 불과 두 달 전에 초르크와 함께 뛰었고, 타이틀을 축하하러 저녁에 나가서 같이 술마셨던 선수들을 이제는 보드진의 입장으로 상대해야하는 것이 여간 쉬운 일이 아니었다. 초르크는 미하엘 마이어 부회장 밑에서 천천히 경영일을 배우기 시작했다. 그러던중 도르트문트에게 부진의 시기가 닥쳐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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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를 지켜보는 우베 노이하우스, 스키베, 초르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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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이 스포츠 디렉터지 사실상 구단 경영은 게르트 니바움(Gerd Niebaum)과 미하엘 마이어(Michael Meier)에 의해 굴러갔고, 경력이 일천한 생신입과 다름없는 초르크는 실권이 없었다. 보드진은 네비오 스칼라를 경질시키고 1부 리그 경험이 전무한데다 나이가 33살에 불과한 2군 감독인 미하엘 스키베를 1군 감독으로 승격시켰고, 그를 보좌할 수석코치고 우베 노이하우스를 데려왔다. 세간의 우려가 있었지만 1999-2000 시즌 스키베 감독은 팀을 무사히 리그 4위에 안착시켰다. 하지만 문제는 그 다음 시즌이였다.

2000-01 시즌이 시작되고 클럽의 계속된 성공에 고무된 클럽 운영진들은 누구도 하지 않았던 일에 욕심을 내기 시작했는데, 바로 독일 축구 클럽들 가운데 최초로 주식 시장[26]에 상장을 시도한 것이다. 보다 투명한 클럽 운영을 위한 도전이었는데, 결과적으로 이 도전은 또 한 번 구단 경영 역사에 큰 오점을 남기고 말았다. 무리한 주식 상장으로 구단 재정에 또 한 번 흑풍이 불어 닥친 것이다. 성적이라도 잘 나왔으면 모를까 스키베의 도르트문트는 성적이 꼬라박다 못해 강등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결국 스키베를 경질하고 그 감독 대행도 부진을 막지못해서 경질하자 발등에 불이 떨어진 클럽 이사진들은 우도 라텍을 급히 데려오고 마티아스 자머는 은퇴를 선언한 후 바로 라텍을 보조해주는 수석 코치로 임명되었다. 그나마 강등은 면한 11위로 시즌을 마쳤고, 마티아스 자머가 감독이 된 2000-01 시즌부터 초르크는 토마시 로시츠키, 크리스토프 메첼더를 영입하여 자머를 지원하였고 이에 성적이 반등하여 리그 4위로 챔스 진출에 성공하였다.
파일:2001-02 시즌 도르트문트의 리그 우승을 다시 이끈 초르크.jpg파일:초르크와 마티아스 자머.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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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르크와 자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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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2001-02 시즌에 전 동료였던 초르크와 이번에 경영인과 감독의 입장으로서 손잡은 마티아스 자머는 도르트문트를 이끌고 다시 분데스리가 정상의 자리를 되찾았고, UEFA컵에서 결승에 진출했지만 페예노르트 로테르담에 3:2로 패하여 우승에 실패했다. 그 다음 시즌에도 최종전을 치르기 전까지 챔피언스리그 직행 티켓을 얻을 수 있는 2위를 지킨 상태라서 최종전 상대인 꼴찌 FC 에네르기 코트부스와의 홈경기에 이변만 없다면 도르트문트가 그대로 2위를 차지하는 것이 유력했으나 예상외로 경기 종반에 동점골을 헌납하며 1:1로 비기고 말았고 2위 자리를 마가트의 유치원 VfB 슈투트가르트에 내주며 챔피언스리그 예선을 치르게 되었다. 문제는 2003-04 시즌 챔피언스리그 예선에서 벨기에클뤼프 브뤼허 KV에게 승부차기 끝에 패하면서 중요한 수입원이었던 챔피언스 리그 수입이 끊겼고, 설상가상으로 독일 최대의 미디어 그룹이던 키르히 그룹이 파산하여 TV 중계권료도 끊기고 만다. 주식 상장으로 번 돈은 챔피언스 리그 하나만을 바라보고 선수 영입하는 데 쓴 상태에서 기껏 영입한 주전 선수들이 줄부상을 끊었으니, 미래는 불보듯 뻔했다. 주식 상장을 위한 무리한 투자는 커다란 적자라는 차가운 현실로 이어졌고, 이는 1990년대 팀의 돌풍을 이끌었던 주축 선수들이 다시 이탈하는 악순환으로 이어지고 말았다.

게다가 시즌 초반 주축 선수들이 대거 부상으로 신음 하며 제대로 베스트 라인업을 짜기 어려워 리저브팀과 유소년팀에서 선수를 끌어올려야 했다. 최악의 상황을 맞이한 가운데에서도 분전 하여 리그 6위로 끝마쳤음에도 불구하고 팬들사이에서도 자머는 대리석과 같다며 경직된 전술 구사에 비판이 끊이지 않았고 챔피언스리그 진출에도 실패하였기 때문에 여론은 자머에게 좋은 상황 만은 아니었다. 결국 2003-04 시즌을 끝으로 자머는 도르트문트 감독직에서 경질된다. 자머의 후임으로 2년 전 UEFA컵에서 준우승의 쓴맛을 안겼던 베르트 판마르베이크가 부임하였다.

초르크는 2003년 이후의 재정 위기 속에서 한 시즌 반 안에 구단의 예산을 반으로 줄이는 과제를 했다. 경기장은 여전히 꽉 차 있었고, 외부 사람들에게는 도르트문트가 아직은 강한 경쟁력을 갖고 있을 것이라 생각 했다. 하지만 도르트문트에게는 더 이상 최고 수준에서 충분히 경쟁할 좋은 선수들이 없었다.
이전에도 비슷한 경영난을 겪은 바 있는 도르트문트는 꽤 현명한 대처를 할 것으로 믿었지만 그렇지 못했다. 이번에는 문제의 심각성이 더했기 때문이다. 하향 나선은 점점 더 빠르게 회전했고 2004년 10월까지 클럽은 6,770만 유로의 손실을 발표했고 1억 1,880만 유로의 부채를 보고했다. 게르트 니움바움은 회장직에서 쫓겨났다. 이런 상황은 좀처럼 나아질 기미를 보이지 않았고, 결국 2005년에는 다시 한 번 구단 부도라는 최악의 상황을 감수해야 하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27] 베스트팔렌슈타디온이란 멋드러진 홈 경기장의 이름이 지역 보험 회사의 이름을 딴 지그날 이두나 파크로 바뀐 것도 막막한 구단의 경영난을 타파하기 위한 고육책이었다.

3.1.2. 파산 위기를 겪고 암흑기에 돌입하는 보루시아 도르트문트.

클럽은 2005년 파산위기를 맞이하고 11유로에 달했던 클럽의 주식 가치는 80% 가까이 폭락했고, 선수 연봉도 전원 20% 삭감해야 했다. 이것에 더해 재정난으로 2006년 팀내 최고 유망주 다비드 오동코어레알 베티스로, 핵심 선수인 토마시 로시츠키아스날 FC로 이적시켜야 했고 주포인 얀 콜레르AS 모나코 FC로 이적시켰으며, 2007년에는 핵심수비수 크리스토프 메첼더를 이적료 없이 레알 마드리드로 넘겨주었다. 대신 초르크는 어려운 재정속에서도 넬손 발데스라던가, 알렉산더 프라이같은 나름 유명한 선수들도 영입하였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로시츠키를 아스널로 보낸것을 비롯하여 팀의 주 득점원인 믈라덴 페트리치함부르크 SV로 이적시키고 모하메드 지단을 영입하는 스왑딜 때문에 초르크는 팬들로부터 퇴진 요구를 받기도 하였다. 하지만 한스요아힘 바츠케의 비호 아래 초르크는 영입 방침을 지킬 수 있었다.

이후 한동안 도르트문트에는 꿈도 희망도 없어 보이는 시즌의 연속이었다. 재정위기 속에서 2004-05시즌과 2005-06시즌 연속 7위를 기록하더니, 2006-07시즌에는 심지어 2부 리그로 추락할 위기[28]에 빠지기도 했으며, 미하엘 루메니게를 선임하려는 시도때문에 초르크는 도르트문트 언론으로부터 뭇매를 맞기도 하였다. 2007-08시즌에도 13위까지 순위가 떨어졌지만, 누리 샤힌이라는 대형 유망주를 지켜낸 초르크는 올라설 발판을 마련 할 수 있었다.

지금을 보면, 재정 문제가 보루시아 도르트문트의 과거만큼 심각하지 않았던 많은 다른 클럽들의 운명을 고려할 때, 그 이후로 단장의 역할을 맡고 있는 초르크가 해낸 도르트문트에서의 성과는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았다. 2004년부터 2008년은 초르크의 도르트문트 단장 생활중에서 가장 힘들었던 시기였다.

3.1.3. 몰락하는 명가를 끝내 부활시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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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르크와 위르겐 클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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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도르트문트의 재정 붕괴는 지속되지 않았고 다행히 위기를 피할수 있었다. 여전하게도 도르트문트 팬들은 열렬한 성원을 꾸준히 보내주었고 구단 역시 뼈를 깎는 재정 개선 노력을 진행했다.[29] 그런 노력이 계속되고 있던 와중, 재도약의 기회는 예상보다 빨리 찾아왔다. 도르트문트는 2007-08시즌 DFB-포칼 결승전에서 FC 바이에른 뮌헨과 격돌했는데, 아쉽게 패해 준우승에 머물렀지만 바이에른 뮌헨이 이미 UEFA 챔피언스리그 진출권을 획득한 상태라 운 좋게 UEFA컵 출전권을 따냈던 것이다. 오랜만에 UEFA컵 출전권을 손에 쥔 도르트문트는 회생의 실마리를 잡았고, 2008-09 시즌을 앞둔 초르크는 토마스 돌 감독의 후임으로 유망하지만 아직 40세에 불과했던 위르겐 클롭 감독을 선임하여 명가의 재건을 노렸다.
파일:마이스터샬레와 포칼 우승 트로피를 든 초르크와 클롭과 바츠케.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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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르크와 클롭, 바츠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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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르겐 클롭 부임 후 초르크는 네벤 수보티치, 마츠 후멜스, 우카시 피슈체크, 카가와 신지, 루카스 바리오스, 로베르트 레반도프스키 영입에 성공하였고, 초르크의 지원을 받은 클롭의 도르트문트는 2010-11 시즌, 2011-12 시즌 두 시즌 연속으로 리그 우승을 거두는 등 구단의 또 다른 전성기에 일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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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챔스 결승전에서 패한 다음날의 초르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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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니뭐니해도 초르크의 단장 인생중 가장 의미있던 일은 보루시아 도르트문트가 2012-13 시즌 챔스 결승전에 진출한 것이다. 1997년 우승 이후로 다시 나락을 가던 팀이 마침내 명가 부활의 신호탄을 올린것으로, 분데스리가의 거함 FC 바이에른 뮌헨빅 이어를 놓고 웸블리 스타디움에서 승부를 가리게 됨으로써 마침내 도르트문트의 자존심도 높아졌다. 레알 마드리드 CF를 상대로 4번을 겨뤄 2승 1무 1패라는 훌륭한 성적을 냈고 여기서 바이에른 뮌헨까지 이기고 우승을 차지한다면 통산 2번째 우승이 될 수 있었으나 더이상은 역부족이었는지 결국 뮌헨에게 1-2로 아쉽게 지며 우승의 꿈을 놓치게 되었다. 뮌헨이 트레블을 하게 되었고 도르트문트는 무관에 그치고 말았지만 챔피언스 리그 결승에 진출했다는것은 초르크의 영입들이 성공했다는 뜻과 마찬가지였기에 아쉽지만은 않은 시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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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17 시즌 초르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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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2018년 여름 토마스 딜레이니, 악셀 비첼, 압두 디알로, 아슈라프 하키미, 파코 알카세르를 영입하고 2019-20 시즌엔 니코 슐츠, 토르강 아자르, 율리안 브란트 등 퀄리티 높은 선수들을 적극적으로 영입하면서 좋은 평가를 받고 있다. 특히 19/20 시즌을 앞둔 여름 이적시장에서 단 3일만에 슐츠와 아자르, 브란트 영입 오피셜을 띄우면서 공격적인 영입으로 주목을 받았다.

2020년 여름, 제이든 산초에게 오퍼한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와의 협상에서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의 부회장 에드 우드워드에 비해 철저한 모습을 보였다. 초르크는 산초의 이적료로 120m 유로를 설정하고 맨유에게 8월 10일까지 이 조건에 합의해야만 산초를 보내주겠다고 했으나, 맨유는 산초의 계약 기간이 1년 남은 것으로 예상하고 도르트문트에서 제시한 데드라인이 임박할 때까지 도르트문트가 요구하는 조건을 수용하지 않았다. 그러자 초르크는 기존에 언급한 데드라인인 8월 10일까지 맨유가 비드를 넣지 않았다고 언급하고 인터뷰를 통해 사실 지난 여름에 산초의 연봉을 인상하며 계약 기간을 2023년까지 늘려서 재계약했다고 언급했다. 산초를 지켜냄으로서 초르크는 도르트문트 팬 모두한테 더더욱 찬양을 받고있다.

그런데, 산초의 폼이 이적 불발로 인한 멘탈 관리 실패와 뫼니에의 눈이 썩는 실력으로 나락을 가며, 맨유한테 사기칠 기회 놓치고 몸값이나 떨구게 생겼다는 소리를 듣고 있는 중... 계약 기간이 2년 남는 다음 여름에도 €120M을 고수(...)할 것이라고 한다.[30]

3.1.4. 은퇴

한편 키커, 루어 나흐리히텐 등 독일의 언론에서 초르크가 2022년에 단장직을 사임한다는 내용을 보도했다.키커지 기사 본인이 일선에서 물러나 휴식을 원한다고 했으며, 후임 단장으로는 현재 1군 선수단 고문직을 역임 중인 제바스티안 켈이 유력하다.

원래대로라면 20/21 시즌이 끝난 후 2021년 여름에 사임하기로 했으나 구단 내부 사정으로 인해 사임이 1년 미뤄진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2021년 6월 28일, 제바스티안 켈이 2022년 7월부터 2025년 6월 30일까지 구단의 단장직을 승계한다는 계약에 서명했다는 오피셜이 떴다. 따라서 초르크는 2022년 6월까지 단장직을 유지했고, 7월 1일부로 켈이 단장직을 승계하였다. 이로서 초르크의 마지막 영입 선수는 니코 슐로터베크니클라스 쥘레가 되었다.[31]
미하엘 초르크는 한 시대를 형성하는데 도움을 주었다. 아무도 초르크보다 더 BVB를 잘 알거나 이해하지 못한다. 그가 그저 단장인 것이 아닌, 매우 성공적인 선수였다. 더이상 클럽에 아무도 살지 않는다, 게다가 그는 굉장히 차분하고 유쾌한 사람이다. 그의 경험을 보면 알 수 있다. 우리는 분명히 그를 그리워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마르코 로제

4. 플레이 스타일

초르크는 183cm라는 적당히 큰 키에서 제법 호리호리한 체형을 바탕으로 빠른 주력을 자랑하였다. 그리고 통산 경기수를 보면 알 수 있듯이 부상을 잘 안당하는 강철몸이기도 하였다. 뿐만 아니라 90분 내내 경기장을 미친 듯이 뛸 수 있었던 놀라운 체력을 가지고 있었다. 여기에 더해 초르크는 게임을 읽는것에 뛰어났고 그것을 통해 상대 플레이를 무너뜨린 후 파괴적인 역습으로 전환 시키는 것에 능하였다. 그리고 포백을 보호하는 동시에 정확한 패스나 강력한 원거리 슛을 통해 공격적으로 기여할 수 있었다. 즉, 신체적으로나 기술적으로나 이미 수비형 미드필더로서 완성되었던, 뭐 하나 빠지지 않는 꽉 찬 육각형 미드필더였다고 보면 된다.

그리고 특기할만한 점이 하나 있었다. 비록 초르크가 득점을 기록하기 힘든 수비형 미드필더라는 포지션에서 뛰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커리어를 진행하는 동안 상당히 많은 득점을 기록하였다는 것이다. 특히 초르크는 페널티 킥 성공률이 높았는데, 리그에서 통산 57번의 페널티 킥을 차서 49번을 성공시켰다. 이 수치는 분데스리가 역사에서 탑3에 꼽히며, 그보다 높은 선수는 만프레트 칼츠게르트 뮐러가 있다. 물론 그렇다고 초르크의 득점이 PK에만 특화되었냐고 하면 또 그것은 아닌게, 필드골 비중은 훨씬 컸다. 왜냐하면 초르크가 단순히 상대의 공을 탈취해서 공격을 차단하여 역습으로 전환시키는 것에 그치기 보다는, 자기가 직접 공격을 주도하며 공을 재빨리 전개해서 페널티 박스 바깥 슈팅으로 득점을 하거나 루즈볼 상황에서 공을 놓치지 않고 적극적으로 순간적인 슈팅을 해서 득점을 하는것에도 뛰어났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온갖 포지션에서 땜빵을 뛰었던 경험으로 센터백이나 풀백 또는 공격형 미드필더로도 어느 정도 경기를 소화 할 수 있는 유틸리티도 갖추고 있었다. 그래서 초르크는 수비형 미드필더지만 한 포지션에 구애받지 않고 공격 진영, 미드필드 진영, 수비 진영을 전부 아우르는 플레이를 할 수 있었다. 덕분에 필요할 때면 초르크가 득점력을 발휘하여 팀이 위기에서 벗어나기도 하였다.

하지만 이중에서도 두드러지게 나타났던 초르크의 장점은 바로 팀이 지고 있는 상황이거나 어려운 상황에 처해 있을 때 발휘했던 리더십이였다. 초르크의 진가는 여기에 있었는데, 경기가 잘 풀리지 않아도 초르크는 무척 침착하고 투지 있게 대응하여 선수들을 다독이고 이끌었다. 차분하면서도 유쾌한 그의 성격과 부드러운 카리스마는 선수들에게 좋은 영향을 주었고, 덕분에 초르크를 구심점으로 선수단이 잘 단합되었다. 이런 데다가 감독들에게도 항상 성실하고 협조적이었기 때문에 보루시아 도르트문트에서 초르크를 지도했던 감독들은 전부 그를 중용했다.

5. 기록

5.1. 대회 기록

  • 서독 축구 국가대표팀

6. 여담

  • 초르크의 아버지, 디터 초르크는 VfL 보훔 (1971-1973) 에서 활약하였고, 독일 대표팀 일원으로도 활약했었다. 2007년말, 68번째 생일을 앞두고 별세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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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르크와 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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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초르크는 아내 욜라 초르크(Jola Zorc)와의 사이에서 자식을 3명두었는데 2023년 현재, 초르크는 손주를 벌써 2명이나 본 상태라고 한다.
  • 도르트문트에서 매우 뛰어난 활약을 펼쳤음에도 이상하리 만큼 국가대표팀과 인연이 없었다.

  • 분데스리가 첫 우승 25주년 기념 인터뷰

  • 초르크의 단장직 은퇴 인터뷰


[1] (/ˈmɪçaːʔeːl ˈt͡sɔʁk/).[2] 외래어 표기법 제3장 제2절 독일어의 표기 제1항의 2에 의거하여, Zorc는 /ˈt͡sɔʁk/(초크)로 발음되지만 공식적인 표기로 쓰자면 '초르크'가 맞다.[3] 월드풋볼넷 프로필[4] 아쉽게도 결승전에서는 선발 출전을 하지 못했고 후반 막판에야 교체 투입으로 결승전을 뛰었다. 그래서 결승전 주장 완장을 마티아스 자머에게 넘겨야 했다.[5] 1939년생[6] 도르트문트 북쪽에 위치한 도시[7] 초르크는 도르트문트 교외에 위치한 에핑(Eving)에서 자랐다. 그래서 언젠가 BVB를 위해 뛰는 것을 꿈꿨다고 한다.[8] 독일어로 Ralf Loose, 1963년 1월 5일생으로 리베로로 활동하던 선수였다. 초르크와 마찬가지로 도르트문트 출신 에다가 도르트문트의 지역 축구단인 도르트스펠터 SC 09에서 축구를 시작했다는 공통된 배경을 가지고 있었다. 랄프 로제 또한 또래들 사이에서 뛰어난 축구 실력을 가지고 있었기에 당시 보루시아 도르트문트의 청소년 팀 감독 하인츠 케프만의 눈에 띄었고, 그렇게 초르크와 함께 BVB에 입단하게 되었다. 여기에 더해 로제는 초르크와 더불어 청소년 국대 에서 소집된 유이한 BVB 선수였다. 심지어 1981년 U-18 유럽 챔피언십 때부터는 주장 완장을 달기도 하였다. 이후 호주에서 열린 U-20 월드컵에서도 참가하여 홀로 4골을 터뜨리며 조국을 우승으로 이끈 이력이 있었다. 랄프 로제는 190cm에 달하는 건장한 신체를 가졌었고, 당시 BVB의 감독이였던 에리히 리베크 감독으로부터 재능을 칭찬 받는등, 미래에 초르크와 함께 BVB를 이끌어갈 차세대 재목으로 평가되는 선수였다. 특히 로제는 초르크보다 더 높은 기대를 받았으나, 문제는 주력과 민첩성이 느리다는 단점이 컸다는 것 인데 결국 로제는 이를 극복하지 못하였고 성장이 정체되어 다섯 시즌 만에 보루시아 도르트문트를 떠나 하부 리그로 이적을 했었다가 포르투나 뒤셀도르프에서 다시 재기하여 분데스리가에서 3시즌을 뛴 후, 당시 3부 리그였던 FSV 프랑크푸르트로 이적하여 1시즌을 더 뛰고 30살이라는 이른 나이에 은퇴하였다.[9] 입단 동기인 랄프 로제보다 데뷔가 빨랐지만 로제는 이후 19경기를 출전하였다.[10] 다만 초르크는 4학기까지 마친 후 대학을 자퇴하였다.[11] 독일은 징병제 국가였기 때문에 축구 선수도 군복무를 해야했다.[12] 팀 동료였던 롤프 뤼스만에 의해 붙여졌다.[13] 카를하인츠 펠트캄프, 헬무트 비테, 한스디테르 티펜하우어[14] 최종전에서 비겼을 경우 16위는 DSC 아르미니아 빌레펠트가 아닌 도르트문트의 몫이었다. 빌레펠트는 그 해 플레이오프에서 1. FC 자르브뤼켄을 상대로 패하여 강등을 당했다.[15] 원정다득점 규정이 당시에는 적용되지 않은 점이 천만다행이었다.[16] 초르크는 2016년에 "만약 자신이 페널티 킥을 놓쳐 패했다면 우리는 아마도 강등되었을 것이고, 보루시아 도르트문트의 역사가 어떻게 되었을지 누가 알겠는가" 라고 당시를 회고하였다.[17] 바이어 05 위어딩겐을 상대로 4골을 넣기도 했다.[18] 심지어 퓌르트는 경기 시작 2분만에 수비수 한 명이 퇴장 당하며 수적으로 열세였음에도 도르트문트를 이겼다.[19] 물론 예외도 간혹 나온다. 초르크와 동갑인 프랑크 레이카르트가 대표적인 예시라고 볼 수 있다.[20] 샤퓌자는 1994-95 시즌 12골, 1995-96 시즌 3골을 넣었고 리들레는 1994-95 시즌 6골, 1995-96 시즌 7골을 넣음.[21] 2-0으로 BVB가 승리하였다.[22] 선발 멤버들 대다수가 국대 레귤러 멤버들이다. 뒷줄 왼쪽부터 시계 방향대로 위르겐 콜러, 안드레아스 쾨프케, 토마스 헬머, 기도 부흐발트, 초르크, 위르겐 클린스만, 로타어 마테우스, 안드레아스 묄러, 올라프 톤, 토마스 헤슬러, 토마스 돌[23] 마침 보루시아 도르트문트의 창단일과 하루 차이다.[24] 참고로 초르크가 출전한 7경기를 모두 뛴 선수로는 기도 부흐발트, 로타어 마테우스, 위르겐 클린스만 이 3명이 유일하다. 전부 1990 이탈리아 월드컵 우승 멤버면서 UEFA 챔피언스 리그 우승 경험이 없는 것이 특징.[25] 반면 초르크의 파트너였던 마테우스는 초르크가 첫 경기를 뛰던 시점에 이미 A매치를 109경기 뛰었었고, 초르크가 1993년 이후로 국가대표로 뽑히지 않을 때도 마테우스는 꾸준히 국대 경기에 호출되어 2000년에 은퇴할 때 까지 뛰었다. 이런 마테우스의 나이는 초르크보다 무려 1살이 더 많다는 걸 감안하면 정말 대단한 일.[26] DAX(프랑크푸르트 증권거래소)[27] 이때 FC 바이에른 뮌헨으로부터 200만 유로를 빌리기도 했다.[28] 베르트 판마르베이크 감독이 당초 시즌 후 떠날 예정이었고 메첼더와 켈 등 선수들이 부상으로 아웃된 상황에서도 5승7무5패 9위라는 중위권의 성적으로 전반기를 마감했음에도 불구하고 경질되었다. 후임 감독은 위르겐 뢰버였는데 감독 부임 후 첫 경기에서 바이에른을 3:2로 잡으며 쾌조의 스타트를 기록하는 듯 했으나 이후 7경기에서 6패를 당하며 17위까지 떨어지자 경질되었고, 얼마 전까지 함부르크의 감독이었던 토마스 돌이 강등위기의 팀을 수습하며 9위로 마감했다. 33라운드 홈에서 열린 샬케와의 더비경기에서 2:0 승리를 거두며 라이벌의 첫 분데스리가 우승을 가로막았다.[29] 재정 개선 + 꾸준한 성적으로 인해 2013년 현재 도르트문트의 수입은 세계 축구 구단중 10위이며(딜로이트 풋볼 머니 리그 기준) 주급제한을 풀고 유스에 대대적인 투자가 가능할 정도의 수준에 올라왔다. 이렇게 부활한 건 바츠케 회장이 돈을 잘 안 쓰고 쓸 곳에만 쓰며 아낀 것이 크다. 여담으로 2014-15시즌이 시작되기 전 챔스 진출에 실패했을 때를 대비해 챔스 보험을 들어놨다고 한다. 여기서도 그의 운영력과 예지력을 엿볼 수 있다.[30] 코로나 사태가 장기화되면서 결국 2021년 7월에 맨유로 €85+10m 에 이적했다.[31] 참고로 초르크의 첫 영입 선수는 데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