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3당 훈정과 당외 세력
당 자체가 독재 시기 민주화·독립파·대만민족주의 세력들이 모여 결성한 정당인 만큼 대만의 민주화 운동 및 타이완 독립운동의 역사와 함께한다.1986년 이전까지 중화민국은 국민당이 주도하는 일당 우위 정당제였으며 이외에도 중국 청년당, 중국 민주사회당이
중화민국 정계가 이렇게 막장이 된 가장 큰 이유 중 하나는 국공내전이었다. 중국공산당과 중국민주동맹은 중국국민당이 주도하는 헌법 제정을 맹렬하게 반대하여 내전에 돌입하였고, 중국국민당은 내전 승리를 위해서 '동원감란시기임시조관'을 제정한다. 이렇게 된 탓에 중화민국 헌법은 아주 큰 제약을 받게 되었다. 게다가 중국 청년당은 국민당을 강력하게 지지했으며, 중국 민주사회당은 중국 민주동맹을 탈퇴했고, 중국 청년당과 중국 민주사회당만 중화민국의 합법적인 야당으로 남았다. 곧이어 중화민국은 강력한 총통제[2]와 3개 정당의 연립내각을 결합하는 방식으로 형식적인 헌정(憲政)과 실질적인 훈정(訓政)을 동시에 추구하는 3당 훈정 체제로 가게 되었다.
사실 타이완 섬에서는 청년당과 민주사회당은 기반이 별로 없었다. 본토에서도 대형 야당이 아니었으니까 국민정부가 지배한 지 얼마 안 된 타이완 섬에서 기반이 제대로 잡혀 있었을 리가 없다. 그러나 장제스 정권이 반란 토벌을 명분으로 야당의 창당을 금지한 덕택에 역설적으로 기사회생한 중국 청년당과 중국 민주사회당은 1940년대부터 1970년대까지 지방선거에서 일부 당선자를 낼 수 있었고 1980년대까지도 명맥을 유지할 수 있었다. 하지만 중국 국민당이 계엄령을 바탕으로 국민대회, 입법원, 감찰원에서 절대다수의 의석을 차지하고 사회 대다수 분야를 통제하며 좌지우지하는 마당에 이들은 국민당에 찬동하는 관제야당에 불과했고, 이런 상황에서 중국 청년당과 중국 민주사회당이 제대로 된 활동을 하기는 어려웠다.
이런 상황에서 3당 훈정에 대하여 결사 반대를 표방하는 세력들이 한데 모아 만든 것이 민주진보당의 시초이다. 이들은 당시 당외(黨外, 당와이)라는 별칭으로 분류되었는데, 중국국민당과 중국 청년당과 중국 민주사회당이 독점하는 블록 정치의 바깥에서 존재하고 있다는 뜻이었다.
장제스 시절부터 이들은 계엄령 해제, 민주화 촉구를 외쳤지만 당연히 그때는 이런 소리를 하면 코로 훠궈를 듬뿍 먹었다. 그나마 1950년대에는 미국을 의식해서 후스와 자유중국지 등 온건 자유파 세력이 계엄령 해제와 민주화 추진을 주장했지만, 이들도 결국 자유중국 사건이라는 필화사건이 일어나면서 탄압받게 되었고, 후스가 사망한 이후로는 자유파 지식인들을 때려잡았다. 그러다 1975년 장제스가 사망하고 이후 부총통 옌자간과 행정원장 장징궈가 총통으로 취임하면서부터는 당외 세력에 대한 통제가 어느정도 풀어졌는데, 이때 당외 세력은 사실상 연합정당처럼 활동해서 1977년 지방선거에서 22명의 지방의원 당선자를 냈고 지자체장도 일부 낼 수 있었다. 하지만 국정선거는 여전히 언감생심이었다.
1979년 12월 메이리다오 사건 당시의 모습. |
군법재판에 회부된 메이리다오 사건의 주도 인사들. 훗날 민진당 창립을 이끌었다. |
1986년 9월 28일, 민진당의 창당 결의대회. |
2016년 창당 30주년을 맞아 민진당 창당 원년 멤버들이 밝힌 바에 따르면, 정부의 감시를 피하기 위해 당시 국민대회 대표인 저우칭위(周清玉[4])의 자택에서 몰래 창당 작업을 하고, 당 강령도 독일어로 작성했으며, 창당 결의대회를 열겠다는 본래의 목적을 숨기고 타이베이의 그랜드 호텔에 예약했다가 하루 전날 계획이 발각되었지만 예약 담당자가 묵인해서 무사히 창당 결의대회를 마칠 수가 있었다. 그 담당자는 징계를 먹었다고 한다.[5]
그러나 아버지 장제스와 다르게 성향이 유연한 편이었던 장징궈는 민진당의 존재를 묵인했다. 그는 워싱턴 포스트와의 인터뷰에서 '중화민국 헌법 준수', '반공정책 지지', '대만 독립 세력과의 연합 금지'를 지키기만 한다면 야당을 허용할 방침이라고 밝혀 1946년 이래 처음으로 제대로 된 야당이 탄생할 수 있었다. 물론 국민당과 정부의 몇몇 강경파 인사들은 메이리다오 사건 때처럼 무력을 동원해서라도 민진당을 박살내야 한다고 장징궈에게 건의했으나, 장징궈는 이를 무시했다.
민주진보당는 1986년 12월에 처음으로 국민대회 증원 선거와 입법원 증원 선거에 참가하여 각각 11석, 12석 확보에 성공해 새로운 야당으로 자리잡는다[6]. 초창기에는 계엄령 해제와 총통 직선제를 요구하며 시위를 많이 벌였던 탓에 "가두당(街頭黨)"이란 멸칭이 따라붙기도 했다.
2. 본격적인 제도권 진입
1987년 7월,1995년, 스밍더(施明德)가 당의 주석이 되면서 민진당은 변화를 맞는다. 당외(黨外) 시절부터 이어져 오던 과격성을 접고[7] 민진당이 집권해도 대만 독립을 당장 시행할 일은 없다고 하는 등 이전의 대만 독립 행보와는 다른 행보를 보였다. 이런 노선 변화 탓인지 1996년 총통 선거에서는 펑밍민(彭明敏)을 후보로 내세웠으나 중국의 위협 속에서도 두 개의 중국을 주창하며 강경하게 대응했던 리덩후이에게 표가 쏠리면서 21.1%의 득표율을 얻는 데 그쳐 참패했고 동시에 치러진 국민대회 선거에서도 개헌 저지선 확보에 실패하여(98/300 29.9%) 스밍더는 주석직을 사퇴한다.
이듬해에 열린 지방선거(시-현 단위 지방선거)에서 민진당이 압승을 거두면서 1996년 총통 선거에서의 참패를 만회했으나, 그 다음해인 1998년에 열린 직할시장 선거에서는 1994년 직할시장 선거에서 국민당이 차지했던 가오슝 시장 자리를 간발의 차이로 가져가는데 성공을 거두었지만 정작 타이베이 시장 선거에서 재선을 노린 천수이볜이 '청렴한 시장(?)'[8]이라는 구호를 내세웠지만 1994년 지방선거와는 다르게 국민당에게 표가 쏠리는 바람에 리덩후이가 내세운 신예 후보에게 패배했으니 그가 바로 10여 년 뒤 천수이볜 잡는 저승사자가 된 마잉주였다.(...) 그리고 같은 해 치러진 입법위원 선거에서도 의석을 늘리긴 했으나 국민당의 과반 확보 저지에 실패하고 득표율도 정체세를 보이며 부진했다.
3. 첫 집권
3.1. 천수이볜 정부 1기
1998년 양대 선거에서 부진함을 보인 민진당은 결국 2000년 총통 선거를 앞두고 "대만전도결의문"을 채택, '대만은 독립국가이지만 국호는 중화민국을 유지한다'라는 현상유지의 의지를 천명해 민진당을 불안하게 보던 중도층의 여론을 민진당 쪽으로 끌어왔다. 그리고 민진당의 스타 정치인인 천수이볜(陳水扁, 진수편)을 총통 후보로 내세워 선거를 치른 끝에 당선되면서 사상 처음으로 정권 교체에 성공했다.2000년 3월 총통 선거 승리 직후, 천수이볜과 뤼슈롄의 모습 |
그러나 처음으로 여당이 된 탓인지 천수이볜 정권은 난맥상을 드러냈다. 국민당 출신 인사를 행정원장에 임명하는 등의 행보를 보이기도 했으나,[9] 이내 정권 내 갈등이 고조되면서 천수이볜 정권은 흔들거렸다. 대표적인 경우가 국민당 출신 행정원장이 원자력 발전소 건설을 밀어붙이다가 경질된 후 이를 폐기하면서 벌어진 반핵 논쟁. 천수이볜은 원자력 발전소 건설을 다시 추진하는 걸로 무마하려 했으나 이는 민진당 내의 강한 반발을 불러왔다. 이런 정국 난맥을 타개하기 위해 대만단결연맹, 건국당과 연대하여 범록연맹으로 연정을 시행하기도 했다.
2004년 총통 선거는 천수이볜에게 불리했다. 이전 선거에서 보수표 분열로 패배했다고 여긴 국민당의 롄잔과 친민당의 쑹추위가 연대를 선언했던 것. 이렇게 국민당을 위시한 범람연맹의 후보가 단일화되면서 상황은 천수이볜에게 매우 불리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그러나 2.28 사건 기념일에 열린 인간사슬 캠페인으로 대만 자주의식이 고양되고, 선거 유세 도중에 의문스러운 천수이볜 암살 미수 사건이 터지면서 여론이 결집하기 시작했다. 결과적으로 불과 0.22%p라는 초박빙 표차로 천수이볜이 재선에 성공했다.
3.2. 천수이볜 정부 2기
재선에 성공한 천수이볜은 입법위원 선거에서 민진당의 압도적인 과반 의석 확보를 목표로 대만 신헌법 등의 정책을 밀어붙였으나 결과는 단 2석만이 늘어난 89석 확보에 그쳤다. 이에 책임을 지고 천수이볜은 민진당 주석직에서 사퇴했고 커젠밍의 임시주석 체제를 거쳐 2005년 1월 27일, 쑤전창이 새 주석으로 선출되었다. 쑤전창의 주석 취임으로 총통부와 민진당 중앙부는 화해를 모색해 2005년 2월에는 가오슝 시장 셰창팅이 행정원장으로 지명되기도 했다. 한편으로 천수이볜은 친민당의 쑹추위 주석과 회동을 가지고 양안관계, 대만의 안전 보장, 국가적 단결 등 10개 항에 합의하기도 했다.그러나 천수이볜 정권의 난맥상에 질린 대만 국민들은 마잉주가 이끄는 국민당으로 돌아서기 시작했고 2005년 국민대회 선거에서 투표율 저조로 압승을 거두었지만 통합지방선거에서 민진당은 대패한다. 특히 천수이볜의 정치적 기반이던 타이베이를 국민당에게 빼앗기면서 타격이 심각했다. 이에 책임을 지고 쑤전창이 주석직을 사퇴한 뒤 부총통 뤼슈롄이 주석이 되지만 뤼슈롄의 대만 방언 말투에 당내의 비토가 나오면서 다시 주석직을 사퇴, 2006년 1월 26일에 유시쿤을 주석으로 선출해 당내 결속을 다지려 애썼다. 이후 다시 천수이볜이 총통과 주석을 겸하지만 2008년 1월의 입법위원 선거에서 선거제를 소선거구제로 개편한 영향으로 주요 선거구를 국민당에게 대부분 내주면서 개헌 저지선에도 못미치는 27석에 그치는 참패를 당했고, 천수이볜은 주석직을 사임했다.
4. 다시 야당으로
이후 총통 후보가 된 셰창팅이 주석직을 이어받았으나 2008년 1월의 총통 선거에서 셰창팅은 마잉주에게 패배해 주석직을 사임했다.이렇게 민진당이 다시 야당으로 돌아간 후, 당의 회복을 위해 젊은 인사인 차이잉원이 여성 당대표로 선출되었다. 차이잉원은 입법위원 보궐선거에서 잇달아 승리하며 당의 세력을 차츰 회복시켜 나갔고 2009년 지방선거에서 선전하고 2010년 11월에 열린 5개 직할시 지방선거에서 민진당은 타이난과 가오슝 시장을 당선시켰다. 다만 차이잉원이 직접 후보로 나선 신베이 시장 선거에선 패배했다.
차이잉원은 2012년 총통 선거에 나서 마잉주를 위협할 정도로 접전을 벌였으나 결국 중국과의 관계를 우려한 보수 성향 국민들의 표결집으로 패배했다. 동시에 치러진 입법위원 선거에서도 기존 의석을 능가하는 40석을 확보했으나 국민당의 과반 저지에는 실패해 차이잉원은 주석직을 사임했다. 이후 가오슝 시장 천쥐가 대리 주석으로 재임하다가 2012년 5월 27일에 쑤전창 전 행정원장이 주석직에 재임했다가 2014년 5월에 차이잉원이 전당대회에서 승리하며 주석직에 복귀하였다.
2012년 총통선거에서 집권 국민당에게 패하였다. 국민당의 마잉주 총통은 2012년 1월 14일 펼쳐진 총통선거에서 민진당의 차이잉원 주석에 승리를 거두었으며, 총선에서도 역시 승리를 거두었다. 이 때문에 민진당 내에서 격론이 벌어지기도 했는데, 2014년 대만-중국간 무역서비스 협정 때문에 이는 다시 원점으로 돌아갔다.
2014년 11월 29일 펼쳐진 지방선거에서는 2014년 9월부터 장기간 지속된 홍콩 민주화 시위가 큰 변수로 떠올라 대만 내 반중 감정이 고조되면서 친중 노선을 펼쳐온 마잉주 정부에 대한 불만감이 가중된 결과, 민진당 계열이 6대 직할시 중 신베이 시장을 제외한 5곳을 건지는 대승을 기록했다.[10] 거기에다 신베이 시장 선거도 국민당 후보와 접전을 벌이며 선전했다. 시장과 현장 선거에서도 선전을 거두어 16곳 가운데 9곳을 확보하는 압승을 거두었고, 특히 펑후 현장 선거에서 승리하였다.
5. 재집권
5.1. 차이잉원 정부 1기
당선 확정 후 지지자들에게 답례하는 차이잉원 당선인 |
2018년 대만 지방공직인원 선거에서는 전국 22개 단체장 가운데 1/3에도 미달하는 6곳에서만 당선자를 내어 패배했다. 특히 직할시급의 주요 단체장 6곳에서는 불과 2곳(타이난, 타오위안)만을 건졌고, 20년간 지켜온 텃밭 가오슝조차 국민당 한궈위 후보에게 내어주는 굴욕을 당했다. 이런 결과가 나온 데는 동성결혼 합법화 등 취지는 좋으나 보수진영 입장에서 보면 다소 급진적인 드라이브를 건 정책들과 중국의 강한 압박으로 인한 대만의 외교적 고립 심화, 나아지지 않는 경제 상황 등이 원인으로 꼽혔다.
선거 직후 차이잉원 총통은 당 주석 사임을 선언했다. 약 2개월 후인 2019년 1월 줘룽타이 전 행정원 비서장이 당 주석으로 선출되었다.
이렇듯 차이잉원 정권에 대한 인기 하락으로 민진당은 차기 총통 선거 여론조사에서 계속 고전하며 중국국민당에게 정권을 내줄 것으로 예상되었지만 여기서 극적인 반전이 일어나는데, 바로 2019년 홍콩 민주화 운동의 여파로 인한 대만 내 반중 감정의 심화가 그것이다.
5.2. 차이잉원 정부 2기
재선에 성공한 차이잉원 총통 |
재선 직후 터진 중국발 코로나19 사태에서도 괜찮은 방역 성과를 거두며, 시사인만화에선 중화문명 유일의 민주체제가 존재감을 높이고 있다고 평가했다.#
2022년 11월 26일에 실시된 2022년 대만 지방공직인원 선거에서 민진당이 참패했다.## 대만 21개 현·시 가운데 민진당 후보가 승리한 곳은 5곳에 그쳤는데, 이는 1986년 창당 이래 가장 큰 패배라고 한다. 현지 언론은 민진당이 내세운 '반중 안보' 구호가 대만 내 여러 민생 이슈에 묻혔기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대만 중앙통신사는 “이번 선거에서 야당의 승리는 민진당의 ‘중국 공포’ 카드가 효과가 없었음을 보여준다”고 평했다. 결국 차이잉원 총통은 선거 패배의 책임을 지고 민진당 주석직에서 사퇴했다.# 제16대 대만 정부총통 선거를 약 14개월 앞둔 상황에서 이와 같은 결과가 나왔기에 차이잉원 정권이 레임덕에 빠질 수 있다는 전망도 나왔다.
5.3. 라이칭더 정부
당선 확정 후 지지자들에게 인사하는 라이칭더 당선인 |
선거 캠페인 중 '길 위에서'(在路上) 라는 광고#가 큰 반향을 이끌었다. 차이잉원 총통이 운전하는 차에서 조수석에 앉은 라이칭더 부총통과 함께 그동안의 국정운영에 대해 대만어와 표준중국어로 이야기를 나누다가 중간에서 차이잉원이 라이칭더에게 "당신은 나보다 잘할 것"이라고 말하며 운전대와 키를 넘겨준 뒤, 샤오메이친 부총통 후보가 조수석에 타서 운전석에 앉은 라이칭더 총통 후보와 앞으로의 국정운영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는 광고이다. 광고의 인기에 힘입어 중국어와 영어는 물론 일본어와 스페인어 자막까지 제공하고 있다.
6. 역대 당 주석
6.1. 1대 장펑젠(江鵬堅)
재임 : 1986년 11월 28일 ~ 1987년 11월 10일가오슝 사건의 변호인. 민진당의 결성 멤버.
6.2. 2대 야오자원(姚嘉文)
재임 : 1987년 11월 10일 ~ 1988년 10월 30일가오슝 사건으로 체포되었다가 1987년 석방. 천수이볜 집권기에 고시원 원장 재임.
6.3. 3~4대 황신제(黃信介)
재임 : 1988년 10월 30일 ~ 1991년 10월 13일가오슝 사건으로 체포되었다가 1987년 석방. 당대표 재임시에 총통직선제를 요구하는 대규모 시위를 조직, 1990년 6월에는 "민주 대헌장 초안", 1991년 8월에 "대만 헌법 초안"을 발표.
6.4. 5대 쉬신량(許信良)
재임 : 1991년 10월 13일 ~ 1993년 12월 4일중리 사건의 당사자로 중국 국민당의 부정선거에도 불구하고 무소속으로 타오위안 현장에 당선되었으며 가오슝 사건을 주도한 잡지 메이리다오의 사장. 가오슝 사건으로 인해 입국을 거부당하여[11] 1979년부터 미국에서 체류하다가 1989년 귀국. 이후 1999년 민진당을 탈당해 총통선거에 무소속으로 출마했다. 그러나 꼴랑 1%도 못얻는 바람에 처참하게 낙선했다. 천수이볜 집권기간에는 천수이볜과 대립한 나머지 국민당편을 들었던 적이 있었을 정도.
사실 이 사람은 민주운동가로 민진당 창당멤버였지만 친중공 좌파성향이 강해서 결국 민진당 주류세력과 불화하게 되었다.[12] 90년대 대표 재임시절에는 급진독립주장과 거리를 두고 현상유지를 주장하는 수준으로 친중공까지는 아니었지만 이후 민진당을 탈당하고 천수이볜을 비판하며 친중공으로 기울어졌다. 대만과 중국의 유럽연합식 연합을 주장했으며 일국양제 통일도 가능하다는 입장이다. 2008년에 민진당에 복당해서도 민진당의 독립강령을 삭제해야 된다고 주장했고 2015년에는 국민당 인사들처럼 중공 전승절 행사에 초청받았다. 민진당에서는 메이리다오 사건 관련 민주운동가이자 창당멤버라 그런지 제명까지는 하지 않고 있다.
6.5. 6대 스밍더(施明德)
재임 : 1994년 5월 1일 ~ 1996년 3월 27일1963년 반란모의로 체포되어 15년을 복역후 다시 1979년 가오슝 사건으로 10년을 복역했다. 대만독립 노선을 약화시켰다가 국민당의 리덩후이에게 총통선거에서 패배하여 사임.(그러나 리덩후이는 국민당 소속이긴 해도, 개인적으로는 대만 독립주의자이자 민진당 지지자였다.) 이후 2000년에 민진당을 탈당했고 천수이볜 사임 100만 국민 운동의 총 책임자를 맡기도 했다.
6.6. 7대 쉬신량(許信良)
재임 : 1996년 6월 15일 ~ 1998년 7월 18일당대표 재임중 원전 반대 연좌농성 주도.
6.7. 8대 린이슝(林義雄)
재임 : 1998년 7월 18일 ~ 2000년 4월 20일변호사 출신. 가오슝 사건으로 체포되었다가 1984년에 석방. 옥중에서 가족이 의문의 피살을 당하는 비극을 겪기도 했다.(린이슝 일가 피살 사건) 당대표 재임시 "대만전도결의문"을 발표했고 천수이볜이 총통에 당선. 그러나 2006년에 탈당했다.
6.8. 9대 셰창팅(謝長廷)
재임 : 2000년 4월 20일 ~ 2002년 7월 21일가오슝 사건의 변호인. 민진당의 창립 멤버. 가오슝 시장을 거쳐 천수이볜에 의해 행정원장으로 취임. 민진당 출신으로는 최초의 행정원장 취임이었다. 2008년 총통선거 후보로 나섰으나 마잉주에게 패배했다.
6.9. 10~11대 천수이볜(陳水扁)
재임 : 2002년 7월 21일 ~ 2004년 12월 11일가오슝 사건의 변호인. 민진당의 창립멤버. 타이페이 시장을 거쳐 민진당 최초의 총통 재임.
- (승계) 쑤전창(蘇貞昌) (재임 : 2005년 1월 15일 ~ 2005년 12월 3일)
- (승계) 유시쿤(游錫堃) (재임 : 2006년 1월 15일 ~ 2007년 9월 21일)
- (승계) 천수이볜(陳水扁) (재임 : 2007년 10월 15일 ~ 2008년 1월 12일)
6.10. 12~13대 차이잉원(蔡英文)
재임 : 2008년 5월 20일 ~ 2012년 2월 29일6.11. 14대 쑤전창(蘇貞昌)
재임 : 2012년 5월 30일 ~ 2014년 5월 26일6.12. 15대 차이잉원(蔡英文)
재임 : 2014년 5월 27일 ~ 2018년 11월 24일리덩후이 총통하에서 최초로 대만인 출신 행정원 대륙위원회 위원 재임. 천수이볜 총통하에서 행정원 대륙위원회 주임위원. 2004년 민진당 입당. 행정원 부원장 재임. 2012년 총통선거에서 후보로 나섰다가 마잉주에게 패배하여 한동안 칩거했지만 2014년 5월 다시 당대표로 복귀하였고, 2016년 1월 16일 제14대 총통 선거에선 대만 최초의 여성 총통으로 당선되었다.
6.13. 16대 줘룽타이(卓榮泰)
재임 : 2019년 1월 9일 ~ 2020년 5월 20일2018년 11월의 전국 지방자치 단체장 선거 패배로 차이잉원 총통이 당 주석을 사퇴한 지 2개월만인 2019년 1월에 후임 당 주석으로 공식 선출되었다. 이전까지는 행정원 비서장(한국의 총리실 비서실장격)을 역임했고, 차이잉원 총통과 비교적 가까운 당내 온건파로 분류된다.
당 주석 선거에서 70% 넘는 득표를 하면서 차이잉원 총통에 비판적인 싱크탱크 대만민의기금회(台灣民意基金會)의 유잉룽(游盈隆) 회장을 압도적인 표차로 누르고 당선했다.
공식적으로는 2020년 5월 말, 즉 차이잉원 총통의 임기 만료 시점까지 당 주석직을 수행할 예정이다. 차이잉원이 재선에 성공하면서 도중에 사퇴할 필요 없이 주석직 임기를 채웠다. 후임 당 주석에는 차이잉원 총통이 다시 올랐다.
6.14. 17대 차이잉원(蔡英文)
재임 : 2020년 5월 20일 ~ 2022년 11월 26일총통 2기 취임과 함께 다시 당 주석직에 올랐다. 2018년의 지방선거 패배로 당 주석직을 떠난지 1년 반만의 복귀다.
하지만 2년 후, 2022년 11월 지방선거의 패배로 다시 사임했다. 4년만에 같은 모습이 반복된 셈. 일단 후임 주석이 정해질 때까지 천치마이 가오슝시장이 권한대행을 맡았다.
6.15. 18대 라이칭더(賴清德)
재임 : 2023년 1월 18일 ~ 현재민주진보당 주석 선거에 단독으로 출마해서 99.65% 지지율으로 당선되어 2023년 1월 18일부터 주석직을 맡게 되었으며, 제16대 대만 정부총통 선거에서 당선됨에 따라 총통직과 당 주석직을 겸한다.
[1] 중화민국의 정당 목록에 각각 이 정당들이 1, 2, 3번으로 등록되어 있는 것도 이 때문이다. (창당일 순서대로 번호를 매긴다.) 그러나 현재는 국민당을 제외한 두 당은 거의 활동하고 있지 않다. 민주사회당은 2020년 해체되었고 그나마 청년당은 홈페이지를 운영하고 있긴 하다.[2] 원래 1947년에 공포한 중화민국 헌법 초안에 따르면 실질적인 행정부의 수반으로서의 직권은 행정원장이 행사하게 되어 있었다.[3] 혹은 가오슝 사건이라고도 불리며 당시 정부는 가오슝 폭력사건 반란안이라고 불렀다.[4] 국민대회 대표(보궐선거 당선)였지만 그의 남편은 제2대 민진당 주석인 야오자원으로 메이리다오 사건에 연루되어 수감된 상태였다. 저우칭위 역시 민진당 창당 이후 가입하여 계속 민진당에서 활동했다.[5] 원래 그랜드 호텔 자체가 국민당에서 외국 손님 접대하려고 만든 호텔이라 국민당 입김이 많이 작용했었다.[6] 이 때만 해도 정부의 민진당에 대한 입장은 어디까지나 '묵인'이었기 때문에, 민진당 인사들은 형식상 무소속으로 출마해 당선되었다. 민진당이 진짜로 자기 당 이름을 내걸고 출마한 선거는 1989년 12월 치러진 지방선거와 입법원 증액 선거가 처음이다.[7] 이는 국민당이 대만 세력과 대륙 세력간의 갈등으로 두 개의 정당(국민당과 신당)으로 분당되고 이에 따라 국민당 내에서 리덩후이의 영향력이 강해지는 바람에 더 이상 대만의 독립이라는 의제 하나만으로 선거에서 이기기 어려워졌기 때문이다.[8] 총통 퇴임 후 천수이볜이 어떤 일을 겪었는지를 아는 사람이라면 쓴웃음이 나오겠지만, 타이베이 시장 시절의 천수이볜은 분명히 청렴한 정치인이었다. 실제로 임기 4년 동안 불법 도박장/매춘업소/퇴폐 미용실 등의 어두운 뒷골목을 그야말로 싹 쓸어버렸으며, 이 과정에서 여러 단체로부터 뇌물 제의도 들어오고 심지어는 그들의 뒤를 봐주던 조폭들의 위협도 빗발쳤지만 천수이볜 시장은 눈 하나 깜짝 않고 밀어붙였다. 너네 민주화 운동하다가 감옥에 끌려가보고 주변 사람까지 테러당해봤어? 안 겪어봤으면 깝치지 말어! 그래서 천수이볜의 이미지가 좋았던 것이며, 1998년의 시장 낙선을 놓고 뒷골목 일당과 국민당의 내통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음모론이 정설로 받아들여지고 있다.[9] 다만 이는 다소 미묘한데, 해당 인물들은 죄다 대만 독립 지지 성향이었기 때문. 전임자인 리덩후이 역시 마찬가지 성향으로 12년의 집권 기간동안 자신의 계파 인사들을 곳곳에 심어놓았고 천수이볜 정권 하에서도 성향이 사실상 같아서 그대로 간 것이다.[10] 타이베이 시장은 무소속 후보가 당선되었으나 그 당선인이 천수이볜을 공개적으로 지지해온 대만대 의대 외과 교수 커원저(柯文哲)였다. 때문에 민진당은 자당 후보의 지지율이 낮게 나오자 아예 공천을 철회하고 커원저를 지지해 사실상 타이베이 시장을 친 민진당계 인물로 당선시킨 셈이 되었다.[11] 당시 그는 가족과 미국으로 휴가를 가 체포를 피했다.[12] 사실 쉬신량을 비롯한 미려도계(美麗島系)가 대체로 중국에 유화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