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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오로 6세/재위기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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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바오로 6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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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교황 선출3. 교회 개혁4. 순례자 교황5. 교회 일치 운동6. 생명 수호에 힘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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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바오로 6세의 재위기간에 대해 서술한 문서.

2. 교황 선출

교황 선출 이후 첫 번째 강복 영상



밀라노 대교구장으로 재직하던 1963년에 교황으로 선출되었다. 교황으로서 바오로 6세가 처음 한 일은 요한 23세가 사망함으로써 중지된 제2차 바티칸 공의회를 속개하라 명한 것이다. 이후 공의회가 폐막하자, 바오로 6세는 남은 재위기간 동안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성과를 실천에 옮기기 위해 부단히 노력을 기울였다.

첫 번째 노력은 전례 개혁 중 하나로서 바로 Novus Ordo(노부스 오르도) 반포이다. 기존의 트리엔트 미사의 외적 특성(라틴 말로만 거행, 회중이 참여할 수 있는 여지가 적음)은 미사의 회중이 손님으로 머무르기 쉬웠다. 바오로 6세는 트리엔트 미사의 기본 골격은 그대로 두되 많은 부분을 대대적으로 개정했으니, 이것이 Novus Ordo이다. 이 미사는 모국어 사용을 허용하고, 미사 중 평신도가 참여할 기회를 확대함으로써 가톨릭 교회의 으뜸 전례인 미사에 그간 손님으로 머물렀던 평신도의 적극적인 참여를 이끌어 냈다고 평가받는다. (예전 미사의 요소였던 라틴어와 벽 제대를 지금도 사용할 수 있는지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미사 문서의 라틴어 미사는 금지되었는가? 문단과 벽 제대는 트리엔트 미사만의 요소인가? 문단을 각각 보라.)

이때 영국 가톨릭 교회에서 반발이 일어났는데, 성공회의 탄압 속에서 트리엔트 미사는 국가의 탄압에 굴하지 않고 순교를 마다하지 않는 영국 가톨릭 교회의 상징이었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트리엔트 미사의 유지를 위해 영국의 가톨릭 저명인사들은 교황에게 전통 미사를 유지해 달라는 청원서를 냈다. 시큰둥한 반응으로 청원서를 읽어 내려가던 교황은 서명자 중에 영국 탐정소설가이자 극작가인 애거서 크리스티의 이름을 발견하고, "아, 애거서 크리스티!"라고 갑자기 외치더니 특전을 허가하는 교서에 서명을 했다고... 이건 그가 그녀의 추리소설의 광팬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1971년 잉글랜드와 웨일스 지역의 가톨릭 교구에서 트리엔트 미사가 예외적으로 실시될 수 있도록 특별히 내려진 이 특전을 애거서 크리스티 특전(特典)이라고 한다. 애거서 크리스티는 독실한 성공회 신자였지만 트리엔트 미사의 예외적인 예술 문화 유산에 주목했고, 많은 비가톨릭 유명인사들도 이 청원의 서명했다. 대표적으로 블라디미르 아슈케나지, 저명한 미술사학자 케네스 클라크, 작가 로버트 그레이브스, 예후디 메뉴인, 소프라노 조앤 서덜랜드 등이 있다. 또 성공회 주교들도 서명했다.

3. 교회 개혁

파일:external/img.asiatoday.co.kr/20141019002326583_1.jpg
1963년에는 천주교 서울대교구에서 경기도 남부를 분할하여 수원교구를 설정, 윤공희 빅토리노 신부를 초대 교구장 주교로 임명했다. 1965년에는 원주교구, 1969년에는 안동교구, 1977년에는 제주교구를 설정했다.

1966년에는 천주교 부산교구 서부를 분리하여 마산교구를 신설하고, 초대 교구장으로 대구대교구 김수환 스테파노 신부를 임명했다. 2년 뒤인 1968년에는 김수환 주교를 서울대교구장으로 임명했고, 1년 후인 1969년에는 김수환 대주교를 추기경으로 임명했다(한국인 최초의 추기경).[1]

콘클라베에 참여해 교황에 피선될 수 있는 추기경의 연령을 80세 미만으로 제한했고, 바티칸의 요직에 이탈리아인 이외에도 독일인, 아일랜드인, 미국인 등을 대거 등용하였다. 또한 검은 귀족[2]들이 구성한 귀족 근위대와 평신도 팔라딘을 해체시킨 것도 바오로 6세의 업적이다. 자세한 건 해당 문서 참조.

4. 순례자 교황

바오로 6세는 재위기간 동안 장거리 여행으로 외국을 순방하며 정력적으로 사목 활동에 전념해 '순례자 교황'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하지만 2대 뒤에 즉위한 교황이 이 기록을 가뿐하게 갈아치웠다(…). 교황은 예루살렘, 인도, 콜롬비아, 포르투갈, 프랑스, 필리핀 등지를 찾았으며 1965년에는 역대 교황 가운데서 처음으로 방미하기도 했다.

교황은 당시 린든 존슨 미국 대통령에 의해 말려들어 점차 확대되어 가던 베트남 전쟁을 염두에 두고, 유엔에서 평화를 주제로 한 연설문을 발표하였다.
더이상 전쟁은 안 됩니다. 두 번 다시 전쟁이 일어나서는 안 됩니다. 평화, 우리 인류의 운명을 이끌어야 하는 것은 바로 평화입니다.

1970년 11월 27일 필리핀 방문시에 신부복을 입은 볼리비아인 화가에게 칼로 피습당할 뻔했으나, 경호원들의 제지로 다치지 않았다.# 김수환 추기경은 교황이 필리핀을 방문할 때 우리나라에도 와주실 것을 청했지만, 바오로 6세는 "남북간의 첨예한 대립 때문에 오해를 살 여지가 있다"며 고사했다고 한다.

5. 교회 일치 운동

제2차 바티칸 공의회를 전후하여 바오로 6세는 교회 일치를 위한 대화에 박차를 가하였다. 우선 그는 다른 그리스도교 종파 지도자들을 ‘갈라진 형제’라고 부르며 공의회에 옵서버 자격으로 참석시켰다.

바오로 6세는 9세기 이래 교황으로서는 처음으로 자녀이자 자매 교회인 동방 교회들을 방문하였으며 수세기 이래 교황으로서는 최초로 동방 정교회의 여러 종교 지도자들과 만남을 가지기도 하였다.

파일:external/saltandlighttv.org/PAUL-19-001.jpg

특히 1964년 예루살렘에서 1054년 동서 대분열로 상호 파문한 이래 처음으로 콘스탄티노폴리스 세계 총대주교 아티나고라스(Ἀθηναγόρας, Athenagoras)와 만났고, 이를 바탕으로 가톨릭교회와 정교회 양측은 1965년 12월 7일 동서 대분열로 900여년간 이어온 상호 파문을 취소하는 공동선언을 발표하는 등 동서 교회 관계 회복에 힘썼다.

바오로 6세는 영국 성공회의 지도자인 캔터베리 대주교와 공적으로 만난 최초의 교황이기도 하다. 캔터베리 대주교 마이클 램지(Michael Ramsey)와 공식적인 면담을 가지고 가톨릭 교회와 성공회 간에 상호이해를 위한 길에 나서기로 합의하였다. 그러나 1975년과 1976년에 캔터베리 대주교 도널드 코건(Donald Coggan)과 교환한 4통의 서신에서 성공회가 여성을 성직자로 서품하는 것을 허용한 것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며 그러한 행위는 가톨릭 교회와 성공회 양자간의 화해를 위한 노력을 중대한 난관에 빠뜨릴지 모른다고 유감의 뜻을 표명하였다.

1965년, 바오로 6세는 세계 교회 협의회와 함께 상호간에 긴밀히 대화하고 협력하기로 하였다. 3년 후, 교황청과 세계교회협의회는 여덟 차례 모임을 가졌으며, 1월 18일부터 25일까지를 그리스도인 일치 주간으로 기념해 공동 기도회를 갖기로 결정하였다.

바오로 6세는 루터교회, 개혁교회[3], 성공회, 감리회와 각각 1964년 9월, 1968년, 1960년 12월 2일, 1965년 10월에 대화를 시작했다.

이 교회 일치 운동은 다소 이상한 방향의 역효과를 불러일으켰는데, 요한 23세 시절에 크게 개선되었던 교황청-소련 관계가 크게 악화되는 결과로 이어진 것이었다. 소련은 요한 23세의 가톨릭 개혁에 대해 긍정적으로 평가하면서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 러시아 정교회 대표들이 참가하는 것도 허용하였다. 그런데 바오로 6세의 적극적인 정교회와의 일치 운동은 소련 공산당 지도부에게 가톨릭 교회가 우크라이나와 발트 지역의 가톨릭 교회에 대한 영향력을 강화하고 더 나아가 정교회와 힘을 합쳐 공산주의를 몰아내려는 일종의 영적 전쟁으로 해석되었다. KGB 주석 안드로포프는 교황청에 대해 불편한 감정을 숨기지 않았고, 소련의 대교황청 적대감은 이후 사회주의 국가의 시민이었던 요한 바오로 2세 즉위 이후 폭발하게 된다.

6. 생명 수호에 힘쓰다

1968년 7월 25일에 교황의 상당히 유명한 회칙 중 하나인 '인간 생명(Humanae vitae)[4]'을 발표했다. 이 회칙은 사회적으로 비중있게 다뤄지기 시작한 산아제한 등의 문제에 대한 것으로, 인공적인 산아제한과 피임은 반생명적인 것이며 낙태는 야만적인 살인행위임을 주장하는 가톨릭 교회의 기존의 가르침을 고수하였다. 이 회칙이 반포되자마자 가톨릭 교회 안팎으로 비난여론이 들끓은 건 당연지사. 당시 반대론자들은 전근대적인 발상이라며 강하게 비난하였으며[5] 독일 주교들은 이 회칙이 무오류의 가르침이 아니며 각 개인은 자신의 양심을 따라야 한다고 지적하면서 “쾨니히스타인 선언”(Declaration of Konigstein)을 발표하여 피임법을 쓸 것인가 말 것인가를 평신도들 개인의 양심에 맡겼다.[6]

언론계의 인식은 크게 달라졌다. 그의 시복식과 세계 주교 시노드 임시총회 전까지만도 언론은 그를 '보수적이고 반동적인 인물'로 묘사해왔는데, 시노드 이후에는 동성애 & 이혼 인정 여론에 편승해서[7] '교회 개혁에 앞장선 진보주의자'로 내세우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바오로 6세가 교회 개혁에 힘쓴 것은 사실이지만 결코 교리 등을 바꾸려 한 것은 아니었고,[8] 오히려 윤리 도덕면에서는 전형적인 가톨릭의 입장을 그대로 계승하여 세속 여론의 질타를 받기까지 한 인물인데, 이제 와서는 되려 언론에서 개혁가로서의 면모만 부각시키니 아이러니. 물론 이러한 부분은 요한 바오로 2세 같은 인물의 경우에도 벌어진 일이었지만.


[1] 참고로 후대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1967년, 그 다음 교황 베네딕토 16세는 1977년에 추기경으로 서임되었다.[2] 이름만 들으면 무슨 악의 조직 같지만 당연히 아니고, 전통적으로 교황을 지지한 귀족 가문들을 말한다.[3] 장로회, 회중교회 등[4] 출처[5] 엄밀하게 말하면 현재도 이 교리를 받아들이지 않는 신자들이 상당수 존재한다. 참조[6] 관련 링크[7] 알다시피 시노드 동안 동성애를 수용하느냐 마느냐 등의 문제로 시끌벅적했다.[8] 그와 같이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역시 그런 오해를 흔히 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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