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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영희(승려)

<colbgcolor=#000000><colcolor=#ffffff> 박영희
朴暎熙
파일:박영희(승려).jpg
창씨명 아카다 켄유
赫田元雄
출생 1893년
전라남도 완도군
사망 1990년 2월 6일
전라남도 광주시 백화암
가족 배우자 이부숭
학력 신흥무관학교 (졸업)
종교 불교 (법명: 응송, 應松)
비고 친일인명사전 등재
서훈 대통령표창 수훈[1]
건국훈장 애국장 추서[2]

1. 개요2. 생애
2.1. 초기2.2. 독립운동2.3. 친일 행적2.4. 해방 이후
3. 사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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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의 승려. 한 때는 독립운동가였으나 1930년대 후반 이후 친일반민족행위자로 전락했다.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으나 2010년 서훈 취소되었다.

2. 생애

2.1. 초기

1893년경 전라남도 완도군에서 태어났다. 그의 조부는 아전인 호방을 지냈고, 부친은 농사꾼이었다고 한다. 그는 어렸을 때 백부가 운영하던 서당에서 한문을 배웠고, 14살 때 농사를 지으며 완도향교에서 선비 오남형에게 한학을 수학했다. 17살 무렵, 그는 정미의병을 일으켜 해남군에서 활동하다가 전사한 의병장 황두일을 이은 황준성을 완도향교에서 만나 가르침을 받았다. 박영희는 훗날 황준성이 일생동안 자신의 사표인 동시에 정신적 지주가 된 인물이었다고 회상했다.

1909년 7월 9일, 박영희는 황준성의 의병대에 가담하여 대홍사 심적암에서 거사를 준비했으나, 새벽 4시 30분에 일본군의 기습을 받아 의병 24명이 전사하고 8명이 체포되는 악재를 맞이했다. 의병대는 와해되었고, 그는 피난했다. 이후 1911년 1월 대흥사에 출가하여 승려가 되었다. 행자 생활을 마친 뒤 1931년 1월 정인담 스님을 은사로 삼아 사미계를 받았으며, 대흥사에서 세운 대흥학교에 다녔다.

1914년 졸업한 그는 사교과를 이수하며 불교학을 공부했다. 1915년 8월 대흥사 강원에서 원응계정에게 기신론 수료장을 전달받았는데, 이 증서는 현재까지 남아있다. 이후 대흥사의 첫번째 공비생 대상으로 선정되어 경성부로 가서 불교중앙학림에 입학해 불교 공부에 매진했으며, 1917년 3월 예과 수업 과목 모두를 우수한 성적으로 수료하고 교장 김구하의 포상을 받고 본과로 진급했다.

2.2. 독립운동

중앙학림 재학 중이던 1919년 3월 1일, 그는 탑골공원에서 기미독립선언서를 낭독한 후 광화문에서 정동으로 행진하는 시위대의 선두에서 나아가다 일제 헌병대의 총격으로 부상을 입었다. 그러나 그는 이에 개의치 않고 손가락을 잘라 혈서를 써서 만든 깃발을 내걸고 서대문에서 광화문으로 다시 행진하다 일본군 기마헌병과 충돌하였고, 다시 남대문으로 나아갔다.

이후 지하운동을 하다가 상부의 명령에 따라 대흥사와 화엄사 지역 청년들에게 독립선언서 전달해 만세시위를 벌이도록 했으며, 1920년 4월 만주로 망명하여 신흥무관학교에 입학하여 1개월 특별과정을 마치고 장교로 임관했다. 그러나 그해 가을 일본군의 공격으로 신흥무관학교는 기능을 상실했고, 박영희는 이 과정에서 부상을 입고 피신했다가 해남으로 귀환했다.

이 무렵, 그는 독립만세시위를 했을 때 부상을 입은 자신을 치료해준 배화학당 여학생 이부숭과 결혼했다. 이후 1920년 9월 대흥사에서 세운 장춘보통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쳤고, 1922년에는 완도의 금일면 사립학교에서 교사를 지냈고, 1925년에는 소안면 사립학교에서 교사를 맡았다. 1926년 1월 다시 대흥사 장춘보통학교로 돌아가 교직에 종사했다.

1928년 5월 중앙학림의 후신으로 개교한 서울 불교전수학교에 입학하여 불교 공부를 수행했고, 1930년 불교전수학교가 전문학교로 승격할 때 편입하여 1931년 제1회 졸업생으로 졸업했다. 1929년 3월 개운사에서 개최된 조선불교중앙교무원 제7회 평의원회에 참석하였고, 1930년 5월 항일 비밀결사 만당(卍黨)에 가입하였고, 만당의 강령에 따라 대흥사 주지가 되어 실권을 잡고 경제적 권한을 확보함으로써 장차 일제에 맞설 기반을 마련하려 했다.

1930년 6월 불교전문강원 대표를 맡아 조선학생회 집회에 참여했으며, 10월에는 조선불교청년회에 참여했다. 또한 1930년 3월에 조선불교청년총동맹 서기장으로 활동했으며, 1931년 3월 조선불교청년총동맹 중앙집행위원에 선림되었다. 1936년 3월 조선불교중앙교무원 이사로 활동했으며, 1937년 마침내 대흥사 주지가 되었고, 이후 1940년과 1943년에 연이어 주지를 맡았다.

2.3. 친일 행적

그러나 그는 막상 주지가 된 이후 친일로 기울어졌다. 조선 총독 우가키 가즈시게가 주창하여 조선 반도에 전개되고 있던 심전개발운동[3]에 참여한 그는 그해 5월 8차례에 걸쳐 대흥사 관할 구역인 해남, 강진, 영암, 장흥, 벌교, 능주읍, 화순읍, 목포부 등지에서 심전개발 순회강연을 했다. 또한 1937년 4월부터 전임포교사를 두고 심전개발 순회 강연을 실시했다.

1937년 7월 중일전쟁이 발발하자, 그는 대흥사에서 7월과 8월 2차례에 걸쳐 국위선양 무운장구 기원법요식을 개최했다. 또한 그해 11월 대흥사에서 응소(應召) 출정 군인과 유가족 위문금 110원 17전을 조선불교 중앙교무원에 납부했으며, 12월에는 대흥사, 선임사, 백양사, 봉선사 등 4개 본사, 말사에서 응소 출정 군인과 유가족 위문금으로 모금한 506원 6전을 조선불교 중앙교무원을 통해서 경성부 사회과에 헌납했다.

1937년 12월 조선불교 중앙교무원에서 북지황군위문단을 파견하자 경비 6,000원 중 대흥사 부담금을 납부했으며, 주지로서 북지황군위문단을 격려하고 축하하는 전문을 보냈다. 1938년 3월에 열린 조선불교 중앙교무원 평의원 회의에서 신임이사로 선출되었으며, 대흥사 본, 말사에서 1938년 4월까지 국방헌금 66원 95전과 위문금 248원 43전, 위문대 12개를 헌납했다. 같은 해 7월 이사회에서 재무이사로 선출되었으나 1달 만에 사직했다.

1938년 8월 당원 정모의 밀고로 만당 당원들이 검거되었을 때 그 역시 전라남도 경찰부에 연행되어 고등과에서 취조받다가 며칠 만에 훈방 조치되었다. 1942년 총본산에서 비행기 1대의 대금 5만 3,000원을 일본군에 헌납했는데, 대흥사 역시 비행기 대금을 분담했다. 그리고 조선불교 조계종에서 1944년 여름에 2번째로 일본군에게 군용 비행기 1대를 헌납하기로 결의하자, 대흥사 본, 말사에서 1,512원을 모아 1944년 7월 총본산 태고사에 납부했다.

1944년 11월 조선불교 조계종 제6회 중앙총회에서 이사에 재선했으며, 총회 회원 전원이 연성으로 일본 육군 대좌 가와사키와 경성제국대학 교수 사토의 시국 강연을 들을 때 함께 했다. 그리고 총본산 태고사 대웅전에서 일본군의 무운장구 기원 및 적국 항복 대기원 법회를 거행했다.

2.4. 해방 이후

8.15 광복 후인 1945년 9월 개최된 전국승려대회에서 중앙 감찰원장에 선출되었으며, 그해 12우러 서울에서 열린 조선독립촉성 종교단체 연합대회에서 기획부장에 선임되었다. 1954년 이승만 대통령의 특별 담화 이후 불교정학운동이 전개되자, 그는 종로경찰서에 구류된 대처승들을 위해 경찰서를 찾아가 석방을 호소했다. 이후 "대처승을 인정할 수 없다"는 비구승 측과 충돌하다가 검찰에 구속되었으나 재판 끝에 무죄로 석방되었다.

그 후 대흥사 주지를 사직하고 소장하고 있던 문헌들을 가지고 나온 그는 여러 사찰을 옮겨 다녔고, 대흥사 입구 일각에 초려 백화암을 마련하고 은둔하여 선도와 불교 연구에 매진했다. 낮에는 화초를 재배하고 밤에는 선도에 정진했으며, 누군가 찾아와서 선도의 의미를 물으면 선구로 대답하고, 불교의 진리를 물으면 도는 우리 일상생활의 주변에 있다는 노자의 설법으로 대답하기도 했다.

특히 이 시기에 음다 (飮茶)를 생활화하고 초의선사의 차를 집중 연구했다. 대흥사 인근이나 강진, 진도, 담양 등지에 서식하는 야생차를 찾아 찻잎을 따다가 초의선사의 제다법 대로 차를 만들었으며, 초의선사의 <동다송>, <다신전>을 탐구하여 차의 진면목을 파헤치고, <사변만어>를 살펴 선도의 본처를 연구하기도 했다. 이러한 그의 제다법과 다맥을 계승한 박동춘은 박영희의 <동다정통고>를 간행하여 초의선사에서 박영희로 이어지는 한국 차의 본류를 선양하기도 했다.

만년에는 선다일여의 생활화를 추구하며 은둔 생활을 하다 1990년 2월 6일 광주 극락암에서 입적했다.

3. 사후

대한민국 정부3.1 운동에 가담하고 신흥무관학교를 이수하여 일본군에 맞섰으며, 만당을 결성해 항일운동을 꾀한 점을 고려하여 1977년 박영희에게 대통령표창을 수여했고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수여했다. 그러나 친일 행적이 드러나면서 논란에 휩싸이다 2010년 서훈 취소되었고, 국립대전현충원에 안장되었던 그의 유해도 다른 곳으로 이장되었다.


[1] 건국훈장 서훈 취소와 함께 취소됐는지는 불명.[2] 친일 행적으로 인해 2010년 서훈 취소.[3] 국가신토에 대한 신앙심, 국가의식, 공동체의식의 함양을 추구하는 운동. 모든 종교단체들의 협력을 이끌어내어 조선인을 충성스런 황국신민이 되도록 유도하는 의도로 추진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