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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백제의 이름을 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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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 | 百濟
Baekje (Paekche)
[1]
기원전 18년[2] ~
삼국통일 이전 근대 이후
고구려 백제 연방 공화국
백제
신라
위치 한반도 서・중부
→ 한반도 서남부
→ 한반도 중남부[3]
→ 삼한[4] 전역 및 요서
역사[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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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57년 부여풍 귀국
660년 사비성 함락
663년 사비성 회복
664년 신라멸망전
666년 제3차 고구려-당 전쟁
669년 고구려 합병, 삼한통일
674년 제당 전쟁
이후~
수도 위례성웅진성[6]사비성위례성[7]
인구 90만 호 이상[8]
종족 삼한(韓)
언어 삼한어
문자 한글, 한자
종교 토착 신앙불교
정치 체제 전제군주제
국가원수 어라하
주요 군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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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조왕
고이왕
근초고왕
근구수왕
개로왕
무령왕
성왕
무왕
의자왕
태조(부여풍)
국성 부여(扶餘)
현재 국가 백제 연방 공화국[9]

1. 개요2. 역사
2.1. 부여풍의 귀국2.2. 나당연합군의 침공, 사비성 함락2.3. 부여풍의 백제부흥운동, 사비성 회복2.4. 신라멸망전2.5. 제3차 고구려-당 전쟁, 삼한통일2.6. 제당 전쟁2.7. 이후
3. 영토 및 행정구역4. 정치5. 외교6. 사회 및 생활상7. 군사8. 문화9. 기타

[clearfix]

1. 개요

백제의 이름을 잇다에 등장하는 백제. 부여풍에 빙의한 주인공이 당의 침공을 이겨내며 역사가 개변된 나라이다.

2. 역사

655년까진 기존과 동일하며, 부여풍에 빙의된 이후로도 사비강 적조 해결 건 등을 제외하면 사비성 멸망까진 원역사와 유사하게 흘러간다.

2.1. 부여풍의 귀국

실 역사와는 다르게 부여풍이 백제멸망전 이전인 657년에 귀국한다.

2.2. 나당연합군의 침공, 사비성 함락

2.3. 부여풍의 백제부흥운동[10], 사비성 회복

2.4. 신라멸망전

2.5. 제3차 고구려-당 전쟁, 삼한통일

2.6. 제당 전쟁

2.7. 이후

3. 영토 및 행정구역

660년 당 침공 직전의 백제 영토로 시작하여, 신라를 병합하고 고구려 왕위를 계승하며 삼한 전역을 확보했다. 이외에도 현 연해주 인근은 고구려가 그랬듯 간접지배하는 듯한 묘사가 있으며, 거란과 해족, 부활한 동돌궐에도 영향력을 투사하고 있다.[11]

당나라 장안 점령 후에는 연운16주에 담로를 설치하고, 삼한의 유력귀족 여럿을 분봉하여 봉신국으로 삼았다. 또한 본편 완결 직전(부여풍 말년)에는 아예 산동반도를 담로들과 협력하여 확보하고 담로의 군왕과 후작에게 수여했으나, 부여퐁 시점으로 오래 유지하긴 힘들 것이란 언급도 있었다.[12]

4. 정치

5. 외교

6. 사회 및 생활상

감자

7. 군사

8. 문화

9. 기타


[1] 작중 시점으로부터 과거의 사건 상당수는 생략[2] 다만 원역사속 백제의 건국년도에 대한 논의는 계속되고 있다.[3] 5세기 후반에 황해남도 동남부와 한강 유역, 영서 지역 등을 상실한다.[4] 작중 부여풍이 삼한과 삼한 통합을 강조함[a] 본편의 시작이자 원 역사의 백제부흥운동 시기부터 다룸.[6] 475년~538년[7] 단 부여풍은 고구려 장악후부턴 평양을 임시 도읍으로 삼아 활동하였고, 위례성 재건을 천천히 진행했기에 말년에야 일부 완성된 건물을 사용했다.[8] 부여풍이 계산한 삼한일통 후 백제의 인구. 유인궤와 당나라는 백제의 인구를 400만 호 이상으로 추산했다. 정황상 부여풍은 전쟁 이후 현 시점의 삼한 땅 인구수를, 당나라는 전쟁 이전의 삼한 땅 인구수를 계산한 것으로 보인다.[9] 근현대 시점에서 어라하가 공화파에게 정권이양을 함[10] 원 역사의 백제부흥운동이지만, 이 세계관에서는 의자왕이 무사히 몽진했고 더 나아가 국토 수복에도 성공했기 때문에 원 역사의 백제멸망전과 전개가 합쳐질 확률이 높다. 또한 백제멸망전 역시 백제가 멸망하지 않았기에 다른 명칭으로 불릴 것이다.[11] 이중 거란과 해족 등 소규모 유목민들은 중원에 흡수되지 않도록 한글을 전파하였다.[12] 에필로그 시점에서 산동은 언급되지 않았으나, 담로들은 몽골에게 멸망했다가 다시 재건되었다고 언급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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