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1-13 13:14:00

죽음의 철도

버마철도에서 넘어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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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POWs_Burma_Thai_RR.jpg

강제노동을 당한 오스트레일리아, 네덜란드 포로들. 아우슈비츠-비르케나우 절멸수용소에 비견될만 하다.

1. 개요2. 역사3. 복구 논의4. 미디어에서의 묘사

1. 개요

태국어 ทางรถไฟสายมรณะ
일본어 [ruby(死, ruby=し)]の[ruby(鉄道, ruby=てつどう)]
영어 Death Railway

건설기간 : 1942년 9월 16일 ~1943년 10월 17일[1]

"죽음의 철도"라는 이름으로도 불리며, 제2차 세계 대전 도중 일본 제국이 군대와 무기의 수송을 위해 건설한 길이 415km의 철도이다. 당시 태국방콕버마국양곤을 연결하고 있었으며, 일본 측에서 부르던 명칭은 태면연접철도([ruby(泰緬連接鉄道, ruby=たいめんれんせつてつどう)], 태국-미얀마 연접철도선)이다. 일본어 위키백과 제목은 泰緬鉄道로 되어 있다.

연합군 전쟁포로와 끌려온 민간인들의 피와 땀으로 부설했다는 게 과장이 아닐 정도로 많은 사상자를 내며 완공시켰다. 최대 약 25만명 정도로 추정되는 규모의 연합군 포로들은 건설 내내 강제노동에 시달렸으며, 철도부설 과정에서 발생한 사망자는 약 10만 명에 달하였다고 한다.

이를 증명하듯 당시 공사현장에서는 “枕木1本、死者1人(받침목 하나에 사망자 한 명)”이라는 말도 있었다고 한다.

착공시점인 1942년 9월 당시에는 버마방면군(緬甸方面軍)이 없었으므로 일본 육군 남방군이 지휘해 공사가 시작되었다. 그리고 공사중인 1943년 3월경 버마방면군이 창설되었는데, 당시 버마방면군 초대사령관은 가와베 마사카즈로서, 가와베 마사카즈는 이후 죽음의 철도 완공시까지 공사를 지휘하였다.

운행 구간은 태국의 농 플라 둑(Nong Pla Duk)역에서 버마국의 탄비류자얏(Thanbyuzayat)역까지였다.

2. 역사

지도를 보면 알겠지만 이 철도는 태국과 미얀마 사이에 위치한 험한 산지를 정면으로 돌파하기 때문에 난공사 구간이 많았다. 본래 이 구간을 지나는 철도 건설은 1880년대에 미얀마를 식민지배하던 영국이 검토하고 사전 조사를 한 적이 있었으나, 지형이 험해 공사가 어렵다는 판단이 나와 실제 공사가 진행되지는 못했다. 그러나 일본이 미얀마 방면으로 진격하면서 이 지역에 대한 보급의 필요성이 생겼는데, 말라카 해협을 거치는 항로를 통한 보급은 거리가 멀 뿐더러 영국 잠수함의 공격 위험이 있었기에 태국과 미얀마를 연결하는 육상 보급로를 구축할 필요성이 있다고 판단하여 철도 건설에 착수하였다.

일단은 일본의 설계 상으로는 이 철도는 궤간 1000mm의 미터 궤간에, 최소 곡선 반경이 200m 이며, 최대 구배는 20퍼밀로 상정하고, 기관차는 일본제 C56형 증기 기관차[2]를 사용하였다. 하지만 당시 일본 제국의 열악한 사정 때문에 설계에 따라 건설되기는커녕 최소한의 열차가 달릴 수 있을 정도로만 다급히 공사했기 때문에 최급구배 20퍼밀, 최소 곡선 반경 200m로 설계했던 철도가 막상 공사를 완료하고 보니 최급구배는 설계상의 2배인 40퍼밀을 찍지 않나, 최소 곡선반경 또한 설계상에서 더 줄어든 160m 로 부설되었다.

이렇게 굉장히 험한 곳을 지나는 철도였던 데다가 일본군 감독관들의 학대 때문에 그야말로 지옥도가 펼쳐졌는데, 전쟁 포로 6만여 명, 태국·인도네시아·미얀마·말레이시아 같은 아시아에서 끌려온 노동자 20만 명이 동원되었으며 이 중 11만 6천여 명이 질병·부상·영양실조·과로 등으로 사망했다.[3] 특히 가장 공사 난이도가 높았던 탐파이(Tampii)역과 힌 톡(Hin Tok)역 사이에 있던 암석질 언덕을 절개하여 선로를 낸 구간은 철도 부설 노역자들이 잠을 자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밤에도 모닥불을 피웠던 것에 유래하여 지옥불 구간(Hellfire Pass)이라는 명칭이 붙을 정도였다. 얼마나 악명이 높았으면 A급 전범으로 사형에 처해진 7명 중 1명인 버마 방면군 사령관 기무라 헤이타로는 학살에 직접적으로 연루되었다는 증거가 없음에도[4] 극동국제군사재판 당시에 죽음의 철도에 가까이 있으면서 강제노동 과정에서의 포로 학대에 대해 몰랐을 리가 없다는 책임만으로 '버마의 도살자'라는 별칭이 붙을 정도였다[5][6].

태평양 전쟁이 끝난 뒤에는 개보수 없이는 노선을 이용할 수 없을 정도로 망가져 있었다. 애초에 설계한 대로 공사되지 않았던 부실한 철도가 연합군의 폭격까지 맞았으니 더더욱 개판이 된 것.[7] 더군다나 전쟁이 끝나자 원래의 목적을 상실했기 때문에 대부분의 구간은 그대로 폐선되었다. 태국측 철도 중 방콕에 가까운 구간은 전쟁 이후 1957년에 복구되어 로컬 노선으로 활용 중이다. 현재 운행 중인 구간은 130km로 농 플라 둑(หนองปลาดุก)에서 남톡사이요크노이(น้ำตกไทรโยคน้อย)역까지의 구간이다. 원래는 남톡(น้ำตก)까지만 철도가 들어왔는데 인근에 있는 사이 요크 노이(Sai Yok Noi) 폭포가 관광지로 유명해지자 2003년에 기존 노반을 그대로 활용하여 추가로 연장한 것이다. 현재 태국국유철도에서 하루 4회, 왕복 2회 열차가 운행중이다.

3. 복구 논의

1987년에 버마 철도의 폐선 구간을 복구하고 증기 기관차를 달리게 관광 노선으로 부활하게 하려는 계획이 있던 적이 있다. 이 계획은 태국 정부가 일본에게 돈을 받아 복구하려고 했기 때문에 제2차 세계대전 때 포로로 버마 철도의 건설에 연행된 호주 재향 군인회와 네덜란드의 옛 포로들은 "버마 철도의 복구는 아우슈비츠를 유원지로 만드는 것과 같다!" 며 엄청나게 화냈다.

그 이후 태국과 미얀마 간 철도 연결을 위해 이 노선을 복구하는 방안이 가끔 거론되고는 있지만 21세기에 접어든 현재까지 딱히 가시적인 진전은 없다, 그나마 추진이 있는 곳은 2003년 완공된 남톡사이요크노이(น้ำตกไทรโยคน้อย)역까지의 연장 구간 뿐. 더군다나 폐선 이후 옛 노반 중 일부가 댐 건설로 수몰되었고, 해당 구간이 산악지대인 탓에 노선을 전면 복구하고자 할 경우 수몰 지역을 우회하기 위한 대규모의 토목공사가 필요하다는 문제가 있어 기술적으로도 복구가 쉽지 않다.

폐지 이후 미얀마와 태국을 잇는 철도는 연결되어 있지 않지만 2010년대 들어 중국의 일대일로 영향으로 태국 북부 치앙마이핏사눌록 중간쯤의 지점과 미얀마 양곤네피도 중간쯤의 지점을 연결하는 고속철도가 추진되고 있다. 기존 버마 철도가 방콕에서 직빵으로 산을 넘어 양곤으로 넘어갔던 것과 달리 훨씬 북쪽을 통하여 연결되는 셈. 2차 대전 당시 죽음의 위험한 산길 철도가 안전한 터널 고속철도로 계승되는 셈이다.

4. 미디어에서의 묘사

영화 콰이 강의 다리에서 그 모습이 나왔다. 하지만 실제에 비해 너무나 미화하고 일본군을 정상적으로 묘사했다. 원래 이 영화의 콘셉트 자체가 어떤 의미로는 꼭 닮은 영국군과 일본군의 멘탈 대결이었다. 또한 영화에서 나온 일본군 수용소장의 모델인 부소장 사이토 리사부로 중령은 실제로도 일본군치고는 적군 포로를 정상적으로 대해줬다.[8]

영화 《레일웨이 맨》(2013)에서도 다뤘다. 이 영화는 1995년 출간된 동명의 을 바탕으로 제작되었는데, 책에는 "침목 1개당 포로 목숨 1개"라는 말이 반복해서 나오며 당시 그 끔찍한 상황이 잘 묘사되어 있다. 저자는 영화 콰이 강의 다리 보고 엉터리라고 말했는데 이유는 "저렇게 살찐 포로가 어디있어?"라고...

탑기어 버마 스페셜에서 이 철도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당시 3MC들은 미얀마에 있는 영연방 장병들의 추모묘소를 들렀고, 중고트럭 3대를 구입해 강에다 대나무로 다리를 만드는 미션을 수행했다. 3MC가 이동할 때 너무 힘들었다고 말하자 담당PD가 "당신들이 고물트럭을 타고 이동할 때 죽음의 철도를 만들었던 영연방 병사들은 걸어서 이동하고 비교가 안 될 정도로 끔찍하게 혹사당했으니 닥치세요." 답했고 일순간 숙연한 분위기가 되었다.


[1] 원래는 1943년 12월로 준공일을 예상했으나 2개월 더 빨리 완공되었다.[2] 이 중 31호차는 개통식에서 사용되었다는 이유만으로 태국에서 퇴역한 이후 일본 야스쿠니 신사떡하니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3] 그래서 전임 사령관인 카와베도 이걸 염두에 두고 있었고 그것 때문에 공사 계획을 중간에 취소했다.[4] 사실상 한국 한정으로 유포되던 버마 민간인 100만 명 학살설은 사실이 아닌 것으로 드러났다.[5] 실제로 영미법계의 국가에서는 무거운 보호책임이 있는 사람이 고의 또는 부주의로 타인을 죽게 한 경우 모살·고살로 판결된다.[6] 참고로 기무라는 죽음의 철도 완공 에 버마에 부임해서 죽음의 철도와는 관련이 없으며, 이 때문에 이 혐의는 해당 지역 총사령관으로써 책임을 묻게 하는 상징적인 의미에 가까운 기소에 가까웠다고 한다. 다만 기무라는 이 외에도 많은 죄를 저질렀는데, 중일전쟁태평양전쟁의 개전에 모두 관여했으며, 버마에서는 겉으로만 포로 학대를 자제하라고 명령했으면서 실제로는 포로 학대를 묵인했고, 덤으로 도미나가 교지도 가볍게 능가하는 탈영 기록을 세우고는 뻔뻔하게 육군 대장으로까지 승진했다.[7] 종전 직후에는 폭격에 의해 전복되고 파손된 열차의 잔해들이 연선 곳곳에 널부러져 있었다고 한다.[8] 영국 런던에 있는 미대에 입학하고 전과하여 공대를 졸업한 사람으로 등장한다. 따라서 일본군치고는 말이 통하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