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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664b2f><colcolor=#fff> 3대 표어 | 신앙은 복음적이고 생명적이어라. 신학은 충분히 학문적이어라. 교회는 한국인 자신의 교회이어라. |
약칭 | 복음교단 |
국가 | [[대한민국| ]][[틀:국기| ]][[틀:국기| ]] |
설립 | 1935년 |
총회장 | 윤창섭 목사[2] |
교인 수 | 10,000명 (문화체육관광부, 2018년 한국의 종교 현황) |
위치 | 서울특별시 종로구 율곡로 264 (종로6가) [3] |
링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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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일제강점기인 1935년, 일본에서 유학했던 최태용(1897-1950)이 우치무라 간조(1861-1930)의 무교회주의의 영향을 받고, 이후 진보적 신학을 접하여 한국 개신교의 자립과 개혁을 도모하다가 배척받자 독자적인 행보를 감행했다. "신앙은 복음적이고 생명적이어라. 신학은 충분히 학문적이어라, 교회는 조선인 자신의 교회이어라"는 3대 표어를 주창하며 창립한 독특한 성격의 자생 토착교단이다.하지만 교회 조직, 신학, 직분을 부정하는 무교회주의 운동과는 다르게 교회 조직, 신학을 긍정[4][5]하며 민족주의를 강조하는 교단이다. 결과적으로 모토만 무교회주의에 영향을 받은 셈이다. 한국 개신교계에서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NCCK) 가맹교단으로 정통 교파임을 인정받고 있다. 대체로 진보적인 교단으로 분류되며, 한기총이나 한교연 등엔 가입하지 않았다. 아시아기독교교회협의회와 긴밀히 유대를 가진 시절도 있었는데, 세계교회협의회는 교회협의 인연으로 이어져 있을 뿐, 가입회원은 아니나 한국그리스도교 신앙과직제협의회를 통해 함께가고 있다.
비슷한 이름을 가진 "대한예수교복음교회"와는 전혀 무관하고, 대한예수교복음교회는 오순절교회 계통이다. 오순절교회 계통은 여의도순복음교회가 가입해 있는 "기독교대한하나님의성회(기하성)"를 포함하는 개념이다.
복음교단으로 축약하여 보통 불리는데, 내부에서 근본주의적인 복음주의 교파가 아닌 때문에, Evangelical '복음교회'라는 교단명에 대한 수정 요구가 있기도 하다. 대안으로 'BOGEUM'으로 표기하자는 소리도 있다.
민족주의를 중심으로 짜여진 특수한 교리 때문에 한국에만 있는 특수한 교파로 볼 수 있다. 한국에서의 다른 종교도 민족주의와 깊은 연관이 있고 항일투쟁과 독립운동 등에 관여한 역사가 있지만, 복음교회처럼 아예 교리가 민족주의 중심으로 짜여지지는 않았다. "우리는 조선인을 위해 파송된 선교사다" 라는 내재적 선교관을 표어를 통해 정립했다. .
2021년 현재는 전국 60여개 교회가 소속되어 있고, 서울특별시와 군산시에 총회교육원, 신학교육기관을 가지고 있다. 과거엔 연세대학교 신학 중심으로 성직 구성원들을 채워 나갔다가 한신대 출신 조용술 목사에 의해 자체 대안신학교(한국복음신학교, 서울총회신학원)를 세워 운영하기 시작, '신학은 충분히 학문적이어라'는 모토로 자유주의신학을 기반한다. 이곳에서 민족신학, 민중선교론을 통한 에큐메니칼 훈련을 지속해왔다.
2. 역사
최태용은, 연희전문(연세대 전신)을 거쳐 1921년부터 1923년까지 일본에서 신학을 공부하였다. 1923년, 조선에 돌아온 최태용은 한국 교회가 마포삼열(馬布三悅, Samuel A. Moffet, 1864~1939)의 영향 아래 장로교 위주의 근본주의화되어가는 모습을 보며, 개신교 개혁의 필요성을 부르짖었다. 그가 강조했던 개혁은 한국 개신교가 새로운 신학 [6]을 받아들이고, 일제 치하에서 고통받는 한국인을 위한 교회로 바뀌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개신교 개혁을 위하여 최태용이 한 일은 신앙잡지를 창간하고, 목사들을 설득해나가는 일이었다. 1926년부터 익산시 금마에서 본격적인 부흥집회를 열었고, 최태용을 따르는 목회자와 신도들이 늘어갔다.그러던 중, 1933년에 이들의 신학과 사상을 경계한 조선예수교장로회 경남노회[7]와 총회로부터 최태용을 지지하는 목회자들이 대거 면직당하는 일이 있었다.[8] 이에 실망한 최태용과 목사들은 1935년 10월 2일에 기독교조선복음교회 창립을 결의했고, 동년 12월 22일에 최태용이 목사 안수를 받고 초대 감독으로 취임한다. 교단에서 지금까지 사용하는 3대 표어도 교단 창설과 동시에 선포된 것이다. 교단 창립 이후에는 일제의 신사참배 요구를 강경하게 거부하였고, 그로 인해 많은 탄압을 받아 교단 해체 직전까지 갔었다. 일제에 대한 저항을 이어가던 중, 교단 설립자이자 초대 감독 최태용이 일제의 강압에 굴복하여 1942년 <동양지광>[9]에 친일 사설을 기고하는 흑역사를 만들기도 하였다. 그러나 2006년 1월 복음교단 정기총회에서 이에 대한 <죄책고백문>을 채택하여 반성했다.
해방 이후 최태용은 교단을 나가 사실상 정치인으로 전향했고, 6.25 전쟁 때 교단 감독을 포함해, 교단 창립동지들이 대거 인민군에게 납북 순교하는 일을 연달아 겪으며, 일제강점기 이후로 두 번째 교단 해체 위기를 맞이하기도 했으나, 부산으로 피난 온 교단 지도부의 노력으로 살아남을 수 있었다. 1966년에는 NCCK에 가입하여 정통교단으로 확실히 인정받았고, 1970년대와 1980년대에는 서울복음교회 오충일 당시 담임목사와 총회장 조용술 목사 등을 중심으로, 교단 전체가 탄압을 무릅쓰고 군사독재에 항거했다. 1990년에는 조용술 목사가 독일 베를린에서 열린 회의에 참석해 범민련의 창설에 간접적으로 도움을 주기도 하였다.
이런 역사 때문에 오늘날도 기독교대한복음교회는 민족주의와 사회참여를 강조하고 있으며, 교단의 취지에 동의하는 다른 개신교 교단 출신의 평신도와 목사도 적잖이 유입되는 추세를 보이고 있다.
3. 다른 교단과의 관계
창립자인 최태용 목사는 한때 무교회주의 운동의 후신으로써 기독교대한복음교회를 창립하고 활동했지만, 무교회주의에 한계를 느껴서 무교회주의를 폐기하고 민족주의를 바탕으로 신학과 목회를 하였다.그래서 1950년대에 이 교단을 두고 논란이 있었지만, 결과적으로 개신교의 기조 안에 포함된 정통교단이었기에 논란이 완전히 사그라들었다.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에 가입하였으며, 교회일치운동과 기독교 사회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있다. 또한, CBS에 이사를 파송하는 11개 교단 중 하나이다. 최근에는 세계교회협의회, 한국천주교회가 일치 기구로 만든 한국그리스도교 신앙과 직제협의회에 회원 교단으로 참여하여 교회 일치운동에 여러모로 활동하고 있다.
4. 인물
- 김인권: 배우.
- 김성만: 엠네스티 양심수. 구미유학생 간첩단 사건에 연류, 한때 사형수로 지냈다. 최태용의 외손주.
- 김정환: 전 스타크래프트1 프로게이머.
- 김창수(1949)
- 나한일: 배우
- 류승범: 배우.
- 류승완: 영화감독.
- 신예은: 배우
- 오충일: 서울복음교회 은퇴목사, 전 민주당 당대표 역임, 현 더불어민주당 상임고문. 민주화운동으로 옥고를 치룸.
- 위훈: 성우.
- 유상철: 대한민국의 전 축구선수이자 감독.
- 윤치병: 최태용 목사에게 목사 안수를 준 익산 금마복음교회 목사. 서예가로도 유명하다. 별세.
- 이선빈: 배우.
- 이엘: 배우.
- 이유영: 배우.
- 이지현: 성우.
- 이현우: 배우.
- 임의진: 작가. 복음교단 총무 목사(2024-). 월드뮤직 연구가. 경향신문 칼럼니스트. EBS 세계테마기행 '원색의 땅 멕시코'편, EBS 세계견문록 아틀라스 '중남미 음악여행', KBS FM, MBC 라디오 음악방송 등에 고정 출연했다. WCC 산하의 한국그리스도교신앙과직제협의회 에큐메니칼 문화예술제 운영위원장 겸 예술감독을 역임했다.
- 지관해: 목사. 지동식 박사의 자녀로 대학가요제를 통해 포크 운동을 전개했다. 서울복음교회를 거쳐 이후 미국에서 목회.
- 최창남: 작곡가. 복음교단 목사. 민중가요 '저 놀부 두손에 떡들고', '노동의 새벽(박노해)'등을 작곡했고(필명 김용수), 이후 은퇴.
- 장규리: 걸그룹 프로미스나인의 전 리드보컬. 현 배우.
5. 여담
- 서해대학이 폐교하기 전에 인가받은 고등교육기관이 없는 개신교 교단들에게 매각 제의를 했었다. 교육기관은 사유재산이 아닌 특성상 정확히 말하자면 서해대학의 빚을 변제해주는 조건으로 운영권을 넘기는 형식이다. 군산시에 신학교가 있는 복음교회에도 우회상장처럼 진행하는 매각 제의를 했지만, 복음교회는 자체적인 규모가 너무 작고 한국 토착 교파라서 매입을 도와줄 외국 교단이 없었기에 매입을 거절했다.[10] 사실 신학대학원을 개설할 수 있는 4년제 대학도 아니라서 굳이 매입할 필요가 없었다고.
- 토착화 개신교 교파라는 점에서, 아프리카나 중국의 토착화 기독교 종파와 비교되기도 한다. 그러나 교파와 종파의 차이에서 알 수 있듯, 이런 종파들은 개신교를 포함한 기독교 주류 종파들(칼케돈파)과 괴리가 매우 크지만, 복음교회는 그냥 민족주의를 강조하는 개신교 주류 교단이다.
- 유럽에서는 후스파가 비슷한 포지션을 갖는다고 내부에서 여기는 듯. 여기도 체코 민족주의를 강조하는 분파가 있긴 했으나 방향성은 다르다. 후스파는 가톨릭의 알레고리적 해석으로 확립된 성체성사와 교리에 맞서 성경의 문자적 해석을 강조한 개혁이었다. 기독교대한복음교회는 그와 반대로 성서의 문자적 해석을 약화하는 자유주의[11] 및 신정통주의 신학의 영향이었다. 거기에 후스파는 가톨릭 십자군에 맞서 싸운 얀 지주카가 있었지만, 기독교대한복음교회 측은 선교사들과는 다투었지만 총독부에는 순응하는 장로회 내부 일부 파벌들[12]이 장로회에서 나간 뒤 지금까지 살아남은 교단이다.[13] 후스파의 대부분은 장로회에서 분가한 복음교회와 반대로 칼뱅파(장로회)에게 흡수되어 칼뱅파의 종류 중 하나가 되었다.[14]
- 또한 민족주의를 강조하는 기독교 교파라는 점에서 필리핀의 필리핀 독립교회(아글리파이파)와도 비슷한 면이 있다. 이쪽은 가톨릭에서 갈라졌기에 전례와 교리에서 가톨릭적 요소가 많다는 차이점이 있으며, 현재는 성공회와 완전한 상통 관계를 이루었다.
- 국내 개신교 교단 중에서는 독립운동가인 김치선 목사가 세운 대한예수교장로회(대신)과 자주 비교된다. 여기도 역사성 때문에 애국과 사회참여를 강조한다. 다만 김치선 목사는 정통적인 장로회 신학과 민족주의적인 설교로 독립운동을 하였기에 최태용 목사와 신학 성향이 정반대였고, 예장 대신은 보수주의 노선을 타고 있는 교단이라서 서로 교류는 잘 하지 않는다.
- 연세대 신과대학 조교수이자, 연세대 신학대학원 원장이었던 지동식 목사를 통해 연세대와 오랫동안 유대를 맺어온 교단이다. 이후 이양호 연세대 신대원장도 복음교단 총회장을 지냈다. 그러나 연세대는 KAICAM과 인준을 맺고 있다. 지동식 목사는 최태용의 영향인 유니테리언 성향의 삼위일체론을 교정하고 신정통주의를 바로잡는 공헌을 했다.
- 감리교에서 파생된 독립교단인 예수교회를 설립한 이용도 목사와 최태용의 인연이 있었다. 이용도 목사는 중앙신학교, 현 강남대학교의 설립과정에 후원을 했기에 강남대학교의 교목실에 목회자를 파송 목회하기도 했다. 전 김영일 교수 등이 복음교단 출신이다. 그러나 지금은 강남대학교는 無교단 초교파를 표방하고 있어서 예수교회나 복음교회와 직접적으로 연계된 것은 아니다.
- 여러 대안 학교를 가진 교단이다. 제천 간디청소년학교의 양희창 교장(목사), 순천 관옥나무도서관 사랑어린학교(구 평화학교)의 김민해 교장(목사), 이매진도서관 순례자학교 & 시민자유대학(박구용 이사장) 협력기관(전연령층 평생학교)의 임의진 교장(목사) 등이 복음교단 소속 회원이다.
- 민중교회운동연합에 가입하여 민중선교에 헌신한 교회들이 여럿이다. 낙골교회(서울),봄샘교회(서울), 생활교회(부천), 남녘교회(강진, 광주 2곳), 마을교회(광주), 평강교회(진주), 거름교회(임실), 새봄교회(안양), 애빈교회(부산), 빈들교회(대구) 등이 도시빈민 밀집지역, 농어촌 등에서 민중교회를 지향해왔다.
[1] [15][2] 제62대 총회장, 금마복음교회 목사.교회협 NCCK 100주년 대표회장[3] 이곳에는 교단 본부와 함께, 교단이 세운 첫 교회인 서울복음교회의 예배당이 있다.[4] 역사 문단에도 서술되어 있지만 최태용 감독이 당시 장로교와 감리교의 영향을 받아 감독, 목사, 장로, 집사 직분과 지방회 구성이 모두 존재한다.[5] 국내에서 흔히 오해되는 부분이 있는데, 퀘이커는 무교회주의와는 별개인 급진적 개신교의 한 줄기이다. 물론 기존 교회의 위계적 제도와 질서를 부정한다는 점에서는 서로 공통분모가 없지는 않지만, 그 신학적, 사회정치적 배경은 전혀 다르다. 게다가 정통적인 퀘이커는 교회 공동체의 개념 자체를 부정하지 않으며, 무교회주의와는 다르게 그 내부를 들여다 보면 자신들 나름의 체계와 질서를 갖추고 있다. 다만 가톨릭, 정교회, 성공회 및 주류 개신교단들의 교회론적 관점에서 보면 워낙 판이하게 다른 요소들이 많은 것일 뿐이다.[6] 기독교대한복음교회에 신정통주의를 이식한 건 연세대학교 신학대학원장을 지낸 지동식 박사다. 이전 일제강점기 일본 유학파들의 신신학은 자유주의 신학을 뜻했고, 이는 일본에서 대세였다. 한국기독교장로회의 김재준, 송창근과 대한예수교 장로회 통합의 이종성은 미국 본토에 가서 신정통주의를 접한 사례다.[7] 오늘날의 대한예수교장로회(고신)의 전신이 되는 노회로 보는 인식이 있는데 사실은 오늘날의 기장, 통합, 합동이 고루 분포한 노회였다. 신사참배를 반대하던 시기 노회 임원들이 고신의 기원인 것은 맞다.[8] 이후에도 조선예수교장로회 지도부는 박형룡 목사 등을 중심으로 뭉쳐 김재준 등을 축출하는 데 성공했다.[9] 친일반민족행위자 박희도가 창간한 친일 잡지. 1939년 창간, 1945년 폐간.[10] 복음교회보다 국내 교세가 아주 조금 큰 수준인 루터교와 성공회가 인가받은 대학을 갖게 된 이유가 한국 교단을 도와줄 외국 교단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교육부도 각자 이들 교파가 주류 종교인 독일 및 북유럽권과 영연방권 국가들에게 호감을 살 수 있기에 인가해준 것도 있다. 애초에 한국에 개신교를 전래한 외국 선교사들도 외국 교단에서 파송한 것이기도 하고.[11] 최태용의 삼위일체 부정 등도 당시 자유주의내 유니테리언의 경향이 있다.[12] 외국인 선교사들의 정교분리 원칙 아래의 복음주의는 민족 교육을 위한 방패가 되었다. 이에 반해 조선 총독부는 일본 본토 자유주의 신학의 순응을 보고, 자유주의 신학을 익힌 일본 유학파들을 긍정적으로 보며 그들의 이탈과 독립을 지원했다. 그나마 조선기독교회와 달리 최태용의 복음교회는 신사참배 강요 시기까지는 민족적인 노선을 지키려 했다.[13] 이외에도 조선기독교회가 있었으나 여기는 자유주의 신학과 친일로 치닫다가 일제 패망과 북한의 공산화를 거치며 소멸했다.[14] 루터파가 된 이들과 독자적으로 남은 형제회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