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9-10 11:42:28

블라디미르 아슈케나지

블라디미르 아시케나지의 주요 수상 및 경력
[ 펼치기 · 접기 ]
그라모폰 명예의 전당 헌액자
{{{#!wiki style="margin:0 -10px -5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6px -1px -11px"
<tablebgcolor=#FFF,#1f2023>파일:D8FE539D-CCB2-44DA-9D5B-B6EEC0E8759F.png그라모폰 명예의 전당은 예술적 탁월함, 혁신, 혹은 상상력을 통해 클래식 음악 녹음에 기여한 예술가들을 기리기 위해 만들었다.
★는 첫 발표(2012년)때 헌액된 인물들이다.
☆는 두번째 발표(2013년)때 헌액된 인물들이다.
{{{#!wiki style="margin:0 -10px -5px"
{{{#!wiki style="display: inline-table; min-width:50%; min-height:2em"
{{{#!folding [ 지휘자 부문 헌액자 ]
{{{#!wiki style="margin:-5px 0 -5px"
아르투로 토스카니니 | 빌헬름 푸르트벵글러 |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 | 게오르그 솔티 | 클라우디오 아바도 | 존 바비롤리 | 다니엘 바렌보임 | 토머스 비첨 | 레너드 번스타인 | 피에르 불레즈 | 존 엘리엇 가디너 | 니콜라우스 아르농쿠르 | 카를로스 클라이버 | 오토 클렘페러 | 사이먼 래틀
카를 뵘 | 에이드리언 볼트 | 세르주 첼리비다케 | 콜린 데이비스 | 카를로 마리아 줄리니 | 베르나르트 하이팅크 | 마리스 얀손스 | 라파엘 쿠벨릭 | 제임스 리바인 | 찰스 매케러스 | 주빈 메타 | 조지 셀 | 브루노 발터 | 구스타보 두다멜
벤저민 브리튼 | 리카르도 샤이 | 크리스토퍼 호그우드 | 네빌 마리너 | 예브게니 므라빈스키 | 유진 오르만디 | 안토니오 파파노 | 트레버 피노크 | 프리츠 라이너 | 레오폴드 스토코프스키 | 마이클 틸슨 토머스 }}}}}}}}}{{{#!wiki style="display: inline-table; min-width:50%; min-height:2em"
{{{#!folding [ 성악가 부문 헌액자 ]
{{{#!wiki style="margin:-5px 0 -5px"
루치아노 파바로티 | 플라시도 도밍고 | 마리아 칼라스 | 유시 비욜링 | 자네트 베이커 | 안젤라 게오르기우 | 체칠리아 바르톨리 | 엔리코 카루소 | 디트리히 피셔 디스카우 | 비르기트 닐손 | 엘리자베트 슈바르츠코프 | 조안 서덜랜드 | 조이스 디도나토
몽세라 카바예 | 르네 플레밍 | 토머스 햄프슨 | 안나 네트렙코 | 레온타인 프라이스 | 브린 터펠 | 프리츠 분더리히
토머스 앨렌 | 빅토리아 데 로스 앙헬레스 | 호세 카레라스 | 표도르 샬리아핀 | 캐슬린 페리어 | 시르스텐 플라그스타 | 니콜라이 갸로프 | 티토 고비 | 마릴린 혼 | 한스 호터 | 드미트리 흐보로스톱스키 | 군둘라 야노비츠 | 요나스 카우프만 | 사이먼 킨리사이드 | 엠마 커크비 | 제시 노먼 | 안네 소피 폰 오터 | 레나타 테발디 | 키리 테 카나와 }}}}}}}}}{{{#!wiki style="display: inline-table; min-width:50%; min-height:2em"
{{{#!folding [ 피아니스트 & 오르가니스트 부문 헌액자 ]
{{{#!wiki style="margin:-5px 0 -5px"
글렌 굴드 | 마르타 아르헤리치 | 클라우디오 아라우 | 알프레드 브렌델 | 블라디미르 호로비츠 | 머리 페라이어 | 마우리치오 폴리니 | 스뱌토슬라프 리흐테르 | 아르투르 루빈스타인 | 다니엘 바렌보임
블라디미르 아슈케나지 | 에밀 길렐스 | 빌헬름 켐프 | 아르투로 베네데티 미켈란젤리 | 세르게이 라흐마니노프 | 그리고리 소콜로프 | 레이프 오베 안스네스
프리드리히 굴다 | 마르크 앙드레 아믈랭 | 안젤라 휴이트 | 스테판 허프 | 예브게니 키신 | 구스타프 레온하르트 | 디누 리파티 | 라두 루푸 | 안드라스 쉬프 | 아르투르 슈나벨 | 우치다 미츠코 | 랑랑 }}}}}}}}}{{{#!wiki style="display: inline-table; min-width:50%; min-height:2em"
{{{#!folding [ 현악기 & 관악기 부문 헌액자 ]
{{{#!wiki style="margin:-5px 0 -10px"
파블로 카잘스 | 자클린 뒤 프레 | 야샤 하이페츠 | 예후디 메뉴인 | 다비드 오이스트라흐 | 이작 펄만 | 므스티슬라프 로스트로포비치
모리스 앙드레 | 줄리안 브림 | 제임스 골웨이 | 하인츠 홀리거 | 스티븐 이설리스 | 요요마 | 윈튼 마살리스 | 알브레흐트 마이어 | 안네 소피 무터 | 엠마누엘 파후드 | 장 피에르 랑팔 | 조르디 사발 | 안드레스 세고비아
데니스 브레인 | 정경화 | 아르튀르 그뤼미오 | 프리츠 크라이슬러 | 기돈 크레머 | 나탄 밀스타인 | 존 윌리엄스 }}}}}}}}}
}}}
}}}}}}}}} ||

{{{#!wiki style="color: #000008B"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12px; margin-top: -6px; margin-bottom: -7px"
피아노 부문 우승자
제1회
(1958년)
제2회
(1962년)
제3회
(1966년)
제4회
(1970년)
제5회
(1974년)
반 클라이번
파일:미국 국기.svg
블라디미르 아슈케나지 파일:소련 국기.svg
존 오그던 파일:영국 국기.svg
그리고리 소콜로프
파일:소련 국기.svg
블라디미르 크레이네프 파일:소련 국기.svg
존 릴 파일:영국 국기.svg
안드레이 가브릴로프
파일:소련 국기.svg
제6회
(1978년)
제7회
(1982년)
제8회
(1986년)
제9회
(1990년)
제10회
(1994년)
미하일 플레트네프
파일:소련 국기.svg
공석 베리 더글라스
파일:영국 국기.svg
보리스 베레조프스키
파일:소련 국기.svg
공석
제11회
(1998년)
제12회
(2002년)
제13회
(2007년)
제14회
(2011년)
제15회
(2015년)
데니스 마추예프
파일:러시아 국기.svg
아야코 우에하라
파일:일본 국기.svg
공석 다닐 트리포노프
파일:러시아 국기.svg
드미트리 마슬레예프
파일:러시아 국기.svg
제16회
(2019년)
알렉상드르 캉토로프
파일:프랑스 국기.svg
}}}}}}}}}
<colbgcolor=#000><colcolor=#fff> 블라디미르 아시케나지
Влади́мир Ашкена́зи | Vladimir Ashkenazy
파일:Vladimir_Ashkenazy.jpg
본명 블라디미르 다비도비치 아시케나지[1]
Vladimir Davidovich Ashkenazy
Влади́мир Дави́дович Ашкена́зи
출생 1937년 7월 6일 ([age(1937-07-06)]세)
소련 러시아SFSR 고리키
국적
[[소련|]][[틀:국기|]][[틀:국기|]] →
[[아이슬란드|]][[틀:국기|]][[틀:국기|]]
직업 피아니스트, 지휘자
학력 모스크바 음악원
수상 [ruby(제2회,ruby=1962)] 차이콥스키 콩쿠르 피아노 1위
[ruby(제5회,ruby=1955)] 쇼팽 국제 피아노 콩쿠르 2위
퀸 엘리자베스 콩쿠르 피아노 1위(1956)
공식 사이트 파일:홈페이지 아이콘.svg

1. 개요2. 연주3. 여담

[clearfix]

1. 개요


소련 출생의 아이슬란드 피아니스트이자 지휘자.

1937년 구 소련의 고리키에서 태어났다. 모스크바 국립음악원 예비학교를 거쳐 모스크바 국립음악원에서 피아노를 전공하고 1955년에 바르샤바에서 개최된 쇼팽 콩쿠르에서 2위를 차지했다. 이듬해인 1956년에는 생애 최초로 공산권을 벗어나 벨기에의 퀸 엘리자베스 콩쿠르에 참가해서 우승을 차지한다. 이 때 보여준 연주실력 덕분에 아쉬케나이지의 이름이 서방에서도 본격 알려지게 된다.

1962년에는 차이코프스키 콩쿠르에서 우승을 차지했다.[2] 이듬해인 1963년에는 모스크바 음악원시절에 만난 아이슬란드의 피아니스트 토룬 요한스도티어(Thorunn Johannsdottir)와 결혼하였다. 원래 소련 국적이었던 아쉬케나지는 이 결혼으로 인해 1974년에 아이슬란드 국적을 취득하게 된다.

결혼후 아들을 낳은 아슈케나지는 공산국가였던 조국 소련을 떠나 주로 영국에서 활동했으며 영국으로 이주한 후 4명의 아이를 더 낳았다. 서방 세계에서 아쉬케나지는 연주회와 레코딩 양쪽에서 모두 주목받는 젊은 피아니스트로 각광을 받았으며 30살에 접어들면서 피아노 독주 연주자를 넘어 실내악 연주자로도 활발하게 활동했다.

한편 아쉬케나지는 1970년대부터는 지휘에도 관심을 갖기 시작했으며 1975년 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의 수석 객원지휘자로 본격 지휘자 경력을 시작한다. 이어 로열 필하모닉의 지휘자이자 음악감독, 클리브랜드 오케스트라와 독일 교향악단의 수석 객원지휘자, 베를린 심포니의 음악감독을 역임했다. 1987년에는 앙드레 프레빈의 뒤를 이어서 로열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지휘자 및 음악감독이 되었으며 이 때 러시아/소련 작곡가인 차이코프스키, 라흐마니노프, 쇼스타코비치, 프로코피예프 등에 대한 탁월한 해석을 보여주었다.[3] 하지만 로열 필이 재정난으로 휘청이자 1994년에 로열 필 지휘자(& 음악감독)를 사임하였으며, 1998년에는 체코 필의 수석지휘자로 취임해서 2003년까지 활동하였다.

이어 2004년부터 2007년까지 동경 NHK 심포니 오케스트라의 음악 감독직을 맡았으며 2009년부터는 호주 시드니 심포니 오케스트라의 상임 지휘자 겸 예술 고문직을 맡았다.

일반적인 피아니스트 출신 지휘자들이 대부분 지휘 활동에 전념하는 것에 반해 최근까지도 아쉬케나지는 앨범을 내는 등 피아니스트로의 활동도 멈추지 않고 있다. 그가 지휘한 피아노 협주곡 중에는 본인이 피아노 연주를 직접 담당하는 경우가 많다.

2020년 1월 나이와 건강 때문에 음악계에서 은퇴를 선언했다.

2. 연주

피아니스트 아슈케나지는 거장급 연주자 중에 가장 표준적인 연주 스타일을 갖고 있다.[4] 그의 연주를 두 가지 표현으로 요약하자면 규범적인 연주와 학구적인 연주'라고 할 수 있는데, 튀거나 자의적인 해석을 개입시키지 않고 작곡가의 의도를 최대한 존중하는 모범적인 연주로 정평이 나 있다. 기교나 감정표현 역시 과하지 않지만 그렇다고 부족하지도 않은, 말그대로 딱 균형이 잡힌 연주를 들려준다.

이런 음악성 덕분에 아슈케나지는 바로크 시기의 음악부터 현대 음악까지 폭넓은 연주 레퍼토리를 갖고 있으며, 어떤 작곡가의 어떤 음악을 연주해도 무난함 이상의 안정적인 연주를 보여준다. 어떤 곡을 누구의 연주로 들어볼까 고민이 될 때 아슈케나지의 연주를 선택하면 최소한 실망할 일은 없다. 그래서 피아노 지망생이나 피아노 연주에 관심이 많은 사람들이 아쉬케나지의 연주를 많이 참고한다고 한다.

이처럼 기복이 적은 안정적인 연주력 덕분에 아슈케나지는 여러 개의 전집 음반을 녹음했는데, 대표적으로 베토벤의 피아노 소나타 전집과 쇼팽, 라흐마니노프의 피아노곡 전집 등이 있으며 모두 좋은 평가를 받고 있다. 또한 연주 스타일이 협연이나 실내악에도 잘 어울리기 때문에 그가 참여한 실내악 음반 중에도 명반이 꽤 많다. 대표적인 것이 이츠하크 펄만(바이올린), 린 하렐(첼로)과 같이 녹음한 베토벤의 피아노 3중주 전곡 음반.

다만 이런 유형의 연주자가 항상 그렇듯이 연주 자체는 훌륭하지만 개성이 부족하다거나 청중을 열광시킬만한 임팩트가 부족하다는 지적을 받기도 한다. 하지만 기교적인 측면이건 음악성 측면이건 그의 연주를 넘어설 수 있는 연주자는 매우 드물다. 나온지 수십년이 지난 그의 음반들이 아직도 클래식 팬들에게 많은 관심을 받고 있는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바흐, 파르티타 BWV 829베토벤, 피아노 소나타 Op.13
쇼팽, 에튀드 Op.25 No.6쇼팽, 발라드 Op.23
리스트, 도깨비불차이콥스키, 뱃노래
라흐마니노프, 에튀드 Op.39 No.2쇼스타코비치, 전주곡과 푸가 Op.87 No.7

3. 여담


* 2022년 11월에 올라온 근황에 의하면 팔순이 넘은 고령임에도 불구하고 굉장히 정정하다.
  • 그가 존경한 스뱌토슬라프 리흐테르와의 일화다: 모스크바에서 리흐테르를 만난 아슈케나지가 용기를 내어 "제 연주 좀 들어주실 수 있나요?"라고 부탁했다. 그렇게 리흐테르의 집에 초대받아 연주를 끝내고 바짝 긴장하고 있었는데, 예상외로 리흐테르가 아무런 흠도 안잡고[5] "아주 잘했어"라고 말했다. 놀라서 조언을 부탁하니, "아니, 그냥 굉장히 잘했어."라고 대답했다. 이에 더욱 당황한 아슈케나지가 "하지만... 흠잡을 부분이 있을텐데요?"라고 하니까, "모르겠네. 지적할 부분이 있을지도 모르지만 너무 좋아서 아무 말도 하기 싫네. 자넨 아주 훌륭한 연주자야, 앞으로 행운을 비네."라고 대답했다. 이에 아슈케나지는 자신감을 얻었다고 한다.[6]
  • 키가 168cm 정도로 체격이 작은 편에 속한다. 이 때문에 손도 크지 않지만, 기교적으로 막히거나 힘들어 하는 경우가 없이 어떤 패시지도 무난하게 소화해 낸다.(엄지손가락은 엄청 크다.) 특히 손가락을 넓게 벌려야 하는 것으로 악명 높은 라흐마니노프의 곡도 매우 훌륭하게 연주한다.[7]
  • 한국과도 인연이 있는 연주자로 여러번 내한 연주를 했다. 피아노 연주자로 온 적도 있고 지휘자로 온 적도 있는데 2008년에는 EU 유스 오케스트라를 이끌고 내한해서 임동혁과 협연을 하기도 했다.[8]
  • 실력은 두 말 할것도 없고 인간성도 매우 훌륭한 연주자로 알려져 있으며 이 때문에 국내 팬들에게도 매우 인기가 높다. IMF 사태 시절에 내한했을 때 한국의 어려운 사정을 알고 개런티를 20%만 받아간 것은 유명한 일화.
  • 한편으로 이렇게 인격적이고 온화한 성격이 강력한 카리스마와 리더십이 필요한 지휘자에는 어울리지 않는다는 의견이 있었다. 하지만 아쉬케나지는 이런 우려를 불식하고 지휘자로서도 A급의 면모를 보여주었다.
  • 국내 피아노 조율 명장 이종열은 악기에 까탈스럽고 민감한 피아니스트 때문에 진땀을 뺄 때가 많았다. 아쉬케나지가 피아니스트인 아들과 내한했을 때 리허설을 마친 뒤, 이종열이 다시 무대 위 피아노를 점검하고 있었다. 아쉬케나지가 갑자기 무대로 걸어나오길래 또 무슨 엄청난 요구사항이 있겠구나 생각했지만, 아쉬케나지는 악수를 청하며 이렇게 좋은 피아노를 만들어줘서 고맙다고 하고 다시 들어갔다. 아쉬케나지는 피아노 타박을 안 하기로 유명한 피아니스트라고 한다.


[1] 종종 '아쉬케나지'나 '아슈케나지'로 표기되기도 하지만 러시아어 외래어 표기법에 따르면 '아시케나지'가 올바른 표기이다.[2] 차이코스프키 콩쿨은 공동 우승인데 이때 공동우승자는 영국 출신의 동갑내기 존 오그돈(John Ogdon).[3] 라흐마니노프 악흥의 순간 1번, A-B-A' 중 A' 부분 대부분의 타 피아니스트들이 여기서 작곡가의 의도를 파악하지 못하고 카덴차처럼 흘려버리는 파트를 아슈케나지는 메인 테마를 잘 살려서 연주했다. 루간스키와 비교해 보자.[4] 지휘자 아슈케나지 역시 이런 성향을 갖고 있다.[5] 리흐테르는 까다로운 성격만큼 무자비한 비평으로 유명했다.[6] (출처 인터뷰 영상) 피아노계에서 손꼽히는 거물인 그가 수십년전의 일화를 회상하면서 목소리까지 떨며 감격에 젖어 있다. 가히 클래식 피아노계의 정점이라고 칭송받는 거장한테 이런 찬사를 듣다니 그 어느 피아니스트가 감격하지 않을까. 특히 극렬한 악보원칙주의자였던 리흐테르에게 아슈케나지의 정석적인 스타일은 매우 취향에 맞았을 거라고 추정된다. 물론 스타일은 스타일이고 어디까지나 실력이 특출나서 칭찬받은 것은 자명하다.[7] 강철 타건과 큰 스케일로 유명했던 에밀 길렐스도 키가 170cm에 미치지 못했다. 다만 길렐스는 키에 비해 체격이 좋은 편이었고 손도 매우 큰 편이었다.[8] 이 때 차이코프스키의 피아노 협주곡 1번을 연주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