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3-01-11 16:32:22

송구용

파일:송구용.jpg
<colcolor=#fff><colbgcolor=#0047a0> 본관 은진 송씨[1]
출생 1884년 2월 11일
충청도 회덕현 외남면 연효리
(現 대전광역시 동구 성남동[2] 167-2번지)[3]
사망 1950년 6월 30일 (향년 66세)
충청남도 대전시
묘소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4묘역-103호
상훈 건국훈장 애족장 추서

1. 개요2. 생애3. 여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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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독립유공자. 2001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

독립유공자 임교재는 처남이다.

2. 생애

1884년 2월 11일 충청도 회덕현 외남면 연효리(現 대전광역시 동구 성남동 167-2번지)의 양반가에서 태어났다.

유년시절부터 한학을 수학하여 《대학》, 《중용》, 《논어》, 《주역》 등에 조예가 깊었다. 1910년 경술국치 후 줄곧 조선의 독립을 염원하며 한학 연구에 몰두했으며, 어느 날 《주역》 하도낙서(河圖洛書)에 표현된 오행의 '상극(相剋)'·'상생(相生)'의 이론에 의하여 가까운 장래에 조선은 반드시 독립할 운명에 있다고 단정하고 이러한 기회가 올 때 독립운동을 하기 위하여 동지들을 포섭하기로 결심했다. 이에 1928년 2월 처남 임교재에게 위 이치를 설명하면서 독립운동의 뜻을 밝혀 공감을 얻어냈고, 임교재, 송인용(宋麟用) 등과 함께 충청남도 대전군 대전면 본정(本町)[4]에 남일무역상회(南一貿易商會)[5]라는 곡물상을 경영했다. 그리고 1928년 9, 10월부터는 독립운동을 위한 비밀결사의 형태로 가게를 운영하면서 오석근(吳錫根)·서현근(徐鉉根) 등을 동지로 포섭했다.

이후 1929년 10월 가게의 영업실적이 부진하자 본정에 있던 사무실을 폐쇄하고 거처를 대전부 영정(榮町)[6]으로 옮긴 뒤 남일상회(南一商會)라는 이름으로 1932년까지 경영했다. 이 사이 1930년 5월, 동지들과 함께 《예기》에 나오는 '대도무명(大道無名)'이란 글귀를 인용하여 '무명(無名)'이라는 비밀결사를 조직해 엄영섭(嚴英燮)을 동지로 포섭했고, 자택에서 임교재 등과 만나며 독립운동 방안을 모색했다. 그러나 계속된 영업실적의 부진으로 1930년 8월부터는 미곡잡화상의 형태로 가게를 경영하면서 가게를 출입하는 고객들을 동지로 포섭하고 가게의 수익을 독립운동 자금으로 활용하기로 했다. 이때 임교재가 2,500원을 자금으로 쾌척하고 송구용 자신도 350원, 오석근이 50원 등을 각각 출자해 상회를 공동경영하는 한편, 김연화(金蓮華)·서정순(徐貞順)·우일모(禹一謨)·오하영(吳河泳)을 동지로 포섭해 비밀결사 '무명'에 가입하도록 했다. 그러나 장기적인 영업실적의 부진으로 1932년 6월 결국 남일상회를 폐쇄했다.

1932년 5월 말 임교재가 조선총독부의 지원을 받아 친일 유교 단체 대성원(大聖院)을 운영하던 김창한(金彰漢, 1870. 10. 28 ~ 1950. 10. 2)[7]과 협의하에 1932년 10월 19일 경기도 경성부 원동(現 서울특별시 종로구 원서동)에 있던 대성원 경성본원의 본부 서무부장 겸 시중월보사(時中月報社) 부사장에 취임하자, 이를 통해 대성원을 독립운동의 근거지로 활용하면서 동지를 포섭하고 독립운동 자금을 조성할 계획을 실행해 나갔다. 그해 12월 말에는 일전에 폐쇄한 남일상회 자리에 대성원 충남·대전총지원(總支院)을 설립했고, 대성원 경성본원 본부의 지원을 받으면서 비밀리에 동지를 모았다. 그러나 1933년 4월 김창한이 사기 혐의로 체포되자 비밀결사가 발각될 것을 우려해 그해 5월 중순 충남·대전총지원을 폐쇄했다.

1937년 7월 7일 루거우차오 사건(7.7 사변)으로 중일전쟁이 발발하자,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하면서 일제의 패망을 예견하고 주변 사람들에게 이를 선전했다.
가까운 장래에 상생의 세상이 되고 조선독립의 행운이 도래할 시기가 더욱 가까워질 것이다. 국제관계는 일본에 불리하게 되고 만주사변의 종국을 맞게 되어서는 일본은 소련과 개전하기에 이를 것이며, 병력·재력 모두 피곤해져 일본은 결국 패전하여 국내에 혁명이 발발하는 것은 필연의 귀결이다. 이 때는 우리 동지들이 봉기하여 조선의 독립이란 본 뜻을 관철할 절호의 호기로 삼아야 한다. 또 1938·1939년에 전쟁이 있고, 1940·1941년에 우리 동지가 궐기하여 조선독립을 위해 활동하고, 1942·1943년에 조선의 독립을 실현하여 조선민중은 행복한 생활을 경영할 수 있다.
이후 그는 7.7 사변을 비밀결사 '무명'의 목적을 달성할 절호의 기회로 여기고 활동을 이어 나갔으며, 1938년 5월에는 김창한과 협의하에 대성원의 본부를 충청남도 대전부로 옮기고 조선 각지에 총지부 7개소, 지부 20개소를 두었으며 7,000여 명의 회원을 확보하고 지하활동을 전개했다.

그러나 1938년 9월 6일 대전경찰서에 체포되었고, 1940년 10월 2일 대전지방법원에서 이른 바 치안유지법 위반 및 육군형법 위반, 해군형법 위반 혐의로 징역 1년형(재정통산 300일)을 선고받았다. 그러나 검사 측에서 공소하여 1941년 12월 22일 경성복심법원에서 검사 및 피고인 측의 공소가 이유가 있다는 판결을 받아 이른 바 치안유지법 위반 혐의에 대해서는 무죄를 선고받았으나, 육군형법 위반 및 해군형법 위반 혐의에 대해서는 금고 1년형(재정통산 300일, 법정통산 447일)을 선고받아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에는 은거하다가 1950년 6월 30일 충청남도 대전시에서 별세했다.

2001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독립운동 공적을 인정받아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그의 유해는 당초 문중 선영에 안장되었다가 2009년 7월 10일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4묘역에 이장되었다.

3. 여담


[1] 22세 용(用) 항렬.[2] 독립유공자 송병선·송병순 형제도 이 마을 출신이다.[3] 형사사건부[4] 현재 본정1정목은 대전광역시 동구 원동, 본정2정목은 대전광역시 동구 인동, 본정3정목은 대전광역시 동구 효동 등으로 각각 남아 있다.[5] 한국근현대회사조합자료에 의하면, 1929년 1월 25일 합자회사 남일무역(南一貿易)으로 설립되었는데, 곡물, 소금, 비료 등의 무역 및 위탁 매매가 그 설립 목적이었다. 본점은 충청남도 대전군 대전면 춘일정3정목(現 대전광역시 중구 선화동) 14번지에 있었고, 당시 사장은 임교재의 형 임도재(任道宰, 1887. 6. 12 ~ 1946. 3. 14)의 장남, 즉 장조카 임경순(任慶淳, 1907. 3. 6 ~ 1971. 2. 9)이었다. 임경순은 보성전문학교 법과를 졸업했고, 1952년 보은군 탄부면의회 의장, 1953년 탄부면장 등을 역임했다. 1931년 3월을 전후해 사장이 송인용(宋麟用)으로 바뀌었으며, 본점의 주소지가 대전군 대전읍 춘일정1정목(現 대전광역시 동구 중동) 87번지로 옮겨졌다. 이후 1937년 4월 1일을 전후해 본점의 주소지가 대전부 춘일정1정목(現 대전광역시 동구 중동) 88번지로 옮겨졌다.[6] 현재 영정1정목은 대전광역시 동구 정동, 영정2정목은 대전광역시 동구 삼성동, 영정3정목은 대전광역시 동구 성남동 등으로 각각 남아 있다.[7] 자는 성의(聖儀). 창씨명은 가네야마 마사이치(金山昌市), 안토 이치로(安東一郞).