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4-08 17:04:22

숭실대학교/역사·상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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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역사2. 상징
2.1. 교표2.2. 교화2.3. 상징물

1. 역사

모란봉이 다라오다 도라안즈며

대동강수 훌너나려 감도난곳에

백운 간에 소사잇는 층층한 집은


합셩 숭실 학교
- 합성 숭실대학 교가 1절 전문(全文)

1897년 10월 10일, 미국북장로회 선교사윌리엄 마튼 베어드(William Martyne Baird, 한국식 이름 '배위량(裵偉良)') 목사가 조선 평안남도 평양부에 위치한 자신의 집에서 숭실학당(崇實學堂)이라는 이름으로 학생들을 가르치던 것이 모체이다.

이때 쓰던 학교 자리는 2022년 기준 북한 주재 러시아 대사관이 차지하고 있다. 주변에 농장 부지와 교회 부지까지 포함하면 더 넓다. 기사(숭대시보)

교육이념은 개신교 정신에 바탕을 둔 '진리와 봉사'. 한국 최초의 고등교육기관으로 1938년 일제의 신사 참배 강요에 맞서 자진 폐교 후 1954년 서울에서 재건됐다.숭실대학교

대한제국 말기와 국권 병탄 직후에 '대학(大學)'이나 '대학부(大學部)'라는 명칭을 가진 여러 교육 기관들이 존재했다. 이런 명칭을 가졌던 현재의 일부 대학에서는 조선총독부가 대학과 대학부라는 명칭을 가진 학교를 인가한 사실을 들어, 자신들이 당시 대학 레벨의 고등 교육 기관이라고 주장하지만, 이러한 주장은 잘못된 것이다. 당시 총독부의 합성숭실대학, 경신학교 대학부(현 연세대학교), 이화학당 대학부(현 이화여자대학교)의 인가 내용을 보면, 전문학교급 인가였으며, 대한제국의 인가 사항을 연장하여 임시로 인가한 것에 불과했고 정식으로 전문학교령이 제정된 이후에는 모두 인가를 상실했다. 즉, 이 시기 일본의 교육 법제상 제국대학 이외의 대학은 설립ㆍ운영할 수가 없어 1918년에 대학령이 제정되기까지는 일본 본토에서도 제국대학 이외에는 대학의 설립과 운영이 원천적으로 불가능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조선총독부가 상기 학교의 대학이나 대학부라는 명칭을 진짜 대학으로 인가하지 않았다는 것은 법제상으로 명백한 사실이다. 애초에 숭실학당 대학부이나 다른 학당 대학부를 졸업한 이들은 학사 내지 학사 학위도 없었다. 이는 후에 생긴 전문학교들도 마찬가지이며 학위를 받기 위해선 구제대학 본과로 들어가거나 아예 대학을 입학해서 다시 시작하든 선교사의 추천서를 통해 1,2학년으로 편입하든 해야 했다. 따라서, 1926년 경성제국대학 본과의 수업이 시작될 때가 한반도에서 최초로 대학교육이 시작된 시점이며, 광복 이전까지 조선의 대학 기관은 경성제국대학(실질적 후신은 현 서울대학교) 하나뿐이었다.

한편, 숭실학당은 이듬해 학교 이름을 합성 숭실대학(合聖 崇實大學, Union Christian College)로 개칭하였다. 평양 숭실학당 시절에는 전국적으로 유명한 학교였으며, 그 덕분에 명사들을 많이 배출한 학교였다. 대표적으로 안익태, 조만식, 한경직, 김현승 등이 있다.

1925년조선총독부의 교육령에 따라서 모든 조선인 학교들은 고등 교육을 실시할 수 없게 되었고, 이에 따라 고등 교육 기관이 아닌 합성 숭실대학은 숭실전문학교(崇實專門學校)로 교명이 변경되었다. 그리고 1938년 3월, 일제의 탄압에 따른 신사참배 강요로 인해 종교적 신념을 저버릴 수 없었던 평양 숭실전문학교의 교직원과 학생들은 항거하는 의미에서 자진 폐교를 했다.[1][2] 서울 등의 다른 학교들이 모두 신사 참배에 굴복했음에 비해 숭실전문학교의 신사 참배 거부와 자진 폐교는 진정한 민족 자긍심의 발로로 평가되어야 할 것이다. 현재의 숭실대학교 재학생들은 종교 여부를 떠나 선배들의 의기를 충분히 자랑스러워할 만하다.

1954년 4월 15일, 광복이 된 후에 서울에서 숭실학당은 대학기관으로 승격하여 숭실대학(崇實大學)이라는 이름으로 재건된다.[3] 이때 당시에는 서울특별시 중구 저동 영락교회의 건물을 빌려서 학교를 운영했으며, 3년 뒤인 1957년 6월에 현재의 위치인 서울특별시 동작구 상도동(당시 영등포구 상도동)에 학교 건물을 세워 최종적으로 이전하였다.[4][5][6]

1970년에 전자계산학과(현재의 IT대학)를 국내에서 처음으로 세웠고 그 덕택에 현재까지 IT 분야에서 나름의 강세를 보이고 있다.

1971년에 대전대학과 합체하여 숭전대학교(崇田大學校)라는 종합대학으로 승격된 역사가 있다. 하지만 1982년에 문교부(현재의 교육부)의 승인을 받아 대전캠퍼스는 분리되어 한남대학교가 된다. 숭전대학교라는 이름은 1986년까지 유지하다가 그 이후에는 숭실대학교(崇實大學校)로 교명을 환원하였다.
1971년부터 1986년까지의 역사는 숭전대학교 문서를 참조.

1993년 중앙일보 대학평가에서 종합 9위를 했던 리즈 시절도 있었다. 하지만 2001년에 있었던 일명 어윤배 총장 사태[7]로 인해 입시 결과나 학교 이미지에 중대한 추락 현상을 보였다.

2005년 이효계 총장이 취임한 이래로 무보수 총장 선언, 숭실 2010 프로젝트, 캠퍼스 마스터플랜 등을 추진하면서, 입시 결과와 학교 이미지가 예전 수준 이상으로 회복되었다.[8]

2006년 광명시와 제2캠퍼스 설립을 위한 양해 각서까지 체결하고 부지까지 선정되었다가, 2010년에 토지 매입 비용 등의 문제로 인해 학교 측에서 협약을 해지하였다. 기사

2007년 이래로 새로운 건물이 많이 들어섰다. 조만식기념관과 웨스트민스터홀(2007년 2학기), 진리관(2008년 2학기), 레지던스홀(2010년 1학기), 학생회관(2012년 1학기) 등이 있다.

2017년에 창학 120주년을 맞이하였다.

2019년 3월 숭덕관(120주년 기념관 겸)이 완공되었다. 경상관이 철거되는 자리에 9월까지 광장이 조성될 예정이다.

2. 상징

2.1. 교표

파일:숭실대학교 심볼.svg
SOONGSIL SYMBOL MARK

대동강(평양숭실)과 한강(서울숭실)의 함께함을 의미.

숭실대학교의 영문 약자인 SSU를 모티브로 2개의 S라인을 통해 대동강한강의 함께함을 의미하며 평양에서 시작한 한국 최초의 대학임을 상징한다. 이것은 통일 후를 준비하는 대학교를 강조하면서 미래를 향한 큰 물결임을 내포하고 있다. 평양 숭실의 자세한 내용은 이 문서의 역사 부분 참조.

2.2. 교화

파일:external/www.ssu.ac.kr/intro_c_03_02_01.gif
목튤립

2.3. 상징물

파일:숭실대백마.jpg
백마
이 상징물은 캠퍼스 중앙 공원 한켠, 진리관 맞은편에 자리 잡고 있다. 뒤태를 보면 끊어진 부분이 있다. 끊어진 부분은 '자진 폐교로 단절된 16년의 숭실의 역사'를 뜻한다. 자세한 내용은 숭실대학교 특색있는 장소 부분 참조.


[1] 이때 폐교된 숭실전문학교의 시설은 대동학원이라는 곳에서 인수하여 대동공업전문학교로 탈바꿈하는데, 이후에 조선총독부 산하의 평양공업전문학교가 되었다가 북한 정권 수립 이후에는 김책공업종합대학이 된다.[2] 한편 평양 숭실전문은 현재의 인민문화궁전 자리라는 설과, 바로 김일성종합대학 캠퍼스 자리라는 설이 있었는데, 1946년 미군이 만든 지도를 보면 10(신양리) 부근에 Sungsil Middle School 및 College가 보인다. College 자리를 현재의 구글 지도나 구글 어스와 대조해보면 주조 로씨야 대사관이 나온다. 실제로 대사관 경내에서 숭실전문학교 식수 기념석이 발견되었다.[3] 현재의 숭실중고등학교인 숭실학당 중학부는 1948년에 이미 재건되었으며, 1954년에 재건된 것은 숭실학당 대학부이다. 한편 현재의 숭실중고등학교와 숭실대학교는 별개의 법인 소속으로서, 이 학교들을 세운 사람들은 폐교 이전의 건학 주체들이 아닌 평양 숭실학당의 교직원과 학생 중 일부이다.[4] '서울특별시청 관계자가 "원하는 땅 표시해라."고 말했을 때, 금방 평양에 돌아갈 줄 알았던 서울 숭실대학 관계자가 상도동 캠퍼스 자리에다가 작게 그렸다'는 이야기가 있다. 그러나 이는 도시전설일 것이다. 왜냐하면 그 일대에 국·공유지만 있는 게 아니고 사유지도 많은데 함부로 땅을 줄 리가 없다. 국립이었다면 공용 징수할 수 있지만 숭실대학교는 사립이다.[5] 학교 중문 앞에 위치한 4차선 도로 건너편 자리는 원래 학교 땅이었다고 한다. 다만 유신 시절 학교 한가운데로 도로가 뚫리면서 건너편 땅을 팔았다고 한다.[6] 1970~80년대에 정부 시책에 따라 강남 개발과 인구 분산을 목적으로 강북 도심에 있는 학교들을 강남으로 옮기기 훨씬 이전에, 자진해서 한강 이남으로 이전한 유일한 학교라는 점에서 역사적 의미가 크다.[7] 2000년 12월 학교법인 이사회가 도덕성 논란이 있던 어윤배 당시 총장의 연임을 강행하면서 발생한 학내 분규. 어 총장은 1997년 취임 이래로 쭉 도덕성 논란이 있었으며 임기 말인 2000년에는 '어윤배 총장 퇴진을 위한 공동투쟁위원회'까지 결성되기도 했다. 학교법인 이사회가 어 총장의 연임을 의결하자, 교수 협의회, 교직원 노동조합, 총학생회가 항거하여 반년 넘게 학교 운영이 마비되었다. 결국 어 총장은 9개월 만인 2001년 10월에 사퇴하여 사태가 마무리되었다. 하지만 학교 이미지가 폭망했다.[8] 현재는 1990년대 입시 수준을 뛰어넘었다는 평이 있다. 다만 주의해서 보아야 하는 것이 2007학년도 입시는 2+1전형으로 인문은 수리를, 자연은 언어를 반영하지 않는 방식이었으며, 2008~2009학년도 입시는 3+1전형이지만, 인문계의 경우 수리 반영 비율이 10%(인문계 중 상경대(경영, 경제 등)는 언수외 10%/30%/30% 반영), 자연계의 경우 언어 반영 비율이 10%라는 낮은 수치에 의한 것이 크다. 2010학년도 이후라고 해도 그 10%가 15% 정도로 조금 올라간 수준이다. 실제로 입결 평균도 소폭 하락했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