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25 시즌 구단별 홈구장 | ||||
{{{#!wiki style=" margin: 0 -10px -5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2px" {{{#555555,#aaaaaa | 스타디오 디에고 아르만도 마라도나 | 스타디오 올림피코 | 스타디오 비아 델 마레 | 스타디오 올림피코 |
U-파워 스타디움 | 스타디오 산 시로 | 스타디오 마르칸토니오 벤테고디 | 스타디오 피에르 루이지 펜초 | |
스타디오 레나토 달라라 | 게비스 스타디움 | 스타디오 카를로 카스텔라니 | 스타디오 프리울리 | |
알리안츠 스타디움 | 스타디오 주세페 메아차 | 스타디오 루이지 페라리스 | 우니폴 도무스 | |
스타디오 주세페 시니갈리아 | 스타디오 올림피코 그란데 토리노 | 스타디오 엔니오 타르디니 | 스타디오 아르테미오 프랑키 | |
▶ | ||||
라리가 | 프리미어리그 | 세리에 A | 분데스리가 리그 1 | 프리메이라 리가 | 에레디비시 | 프리미어리그 | 쉬페르리그 |
ACF 피오렌티나 관련 문서 | ||||
{{{#!wiki style="margin:0 -10px -5px" {{{#5a318c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6px -1px -11px" {{{#231F20,#FFF | <colbgcolor=#5a318c> 정보 | <colbgcolor=#fff> 산하 스포츠단 | ACF 피오렌티나 · ACF 피오렌티나 펨미닐레 · ACF 피오렌티나 프리마베라 | |
선수단 | ACF 피오렌티나 선수단 · ACF 피오렌티나 선수단 (간략) | |||
역사와 문화 | 역사 | 역사 · 유니폼 | ||
역대 시즌 | 2022-23 · 2023-24 (리그) · 2024-25 (리그) | |||
우승 기록 | 1부 : 2회 | 1955-56 · 1968-69 | ||
2부 : 3회 | 1930-31 · 1938-39 · 1993-94 | |||
코파 이탈리아 : 6회 | 1939-40 · 1960-61 · 1965-66 · 1974-75 · 1995-96 · 2000-01 | |||
수페르코파 이탈리아나 : 1회 | 1996 | |||
UEFA 컵위너스컵 : 1회 | 1960-61 | |||
미트로파컵 : 1회 | 1966 | |||
관련 인물 | ACF 피오렌티나 1대~50대 감독 · ACF 피오렌티나 51대~ 감독 ACF 피오렌티나 명예의 전당 | |||
응원가 | Canzone Viola | |||
구단 시설 | 홈 구장 | 스타디오 아르테미오 프랑키 | ||
훈련 시설 | 비올라 파크 | |||
기타 | 연고지 | 피렌체 |
ACF 피오렌티나 | |
스타디오 아르테미오 프랑키 Stadio Artemio Franchi | |
위치 | 이탈리아 토스카나주 피렌체 |
개장 | 1931년 9월 13일 |
보수 | 1990년, 2013년 |
표면 | 잔디 |
그라운드 크기 | 105m × 68m |
좌석 수 | 43,147석 |
설계자 | [[이탈리아| ]][[틀:국기| ]][[틀:국기| ]]피에를루이지 네르비 |
소유주 | 피렌체 시 의회 |
홈 구단 | ACF 피오렌티나 |
[clearfix]
1. 개요
이탈리아의 축구 경기장으로, 토스카나 주의 주도 피렌체 시 캄포 디마르테(Campo di Marte)지구에 위치해 있다.[1] 이곳 역시 여느 이탈리아의 경기장과 마찬가지로 구단이 아닌 시 지자체가 경기장을 소유하고 관리한다. 1931년에 개장하였는데 이는 마드리드의 산티아고 베르나베우, 바르셀로나의 캄 노우보다 더 오래된 경기장이다.2. 역사[2]
2.1. 건설
2.1.1. 부지 선정
20세기 초, 토스카나에 위치한 파르코 델레 카시네[3]의 퀘르치오네 초원에서는 여러 팀들이 축구 경기를 치렀다. 하지만 1917년부터 피렌체 시에서 이곳에서 축구하는 것을 금지했고 팀들은 새로운 경기 장소를 찾아야했다. 그 중, 클루브 스포르티보 피렌체는 인근의 벨로드롬으로 이전했고 리베르타스 클럽은 비아 파이시엘로(Via Paisiello)와 선로 사이에 위치했던 시설로 이전했다. 그러나 이 시설은 리베르타스 클럽의 팬들의 규모를 수용하기에 충분치 않아서 시 외곽의 비아 마랄리아노(Via Maragliano)와 비아 벨리니(Via Bellini)에 새로운 경기장을 짓게 되었다.1922년 4월 22일에 개장한 스타디오 벨로드롬 리베르타스는 클루브 스포르티보 피렌체와 리베르타스 클럽이 합병하여 1926년 설립된 ACF 피오렌티나의 필요를 충족하지 못해서 피오렌티나의 초대 회장인 루이지 리돌피 바이 다베라차노(Luigi Ridolfi Vay da Verrazzano)는 새로운 축구장의 건설을 생각하게 되었다. 이미 스포츠 시설이 있던 카시네 공원에 새로운 경기장을 건설하기 위한 첫 번째 프로젝트는 1920년 토스카나 대학교 건축과에 의해 추진되었다. 1929년에는 비아 타르티니(via Tartini) 근교의 익명의 회사에서 같은 프로젝트를 추진했다. 같은 해, 플로렌틴 포데스타(Florentine podestà)와 주세페 델라 게라르데사(Giuseppe Della Gherardesca)는 철근 콘크리트 스탠드가 있는 경기장의 건설을 위해 부지의 구입을 환영했다. 1930년 2월 7일, 구단 내부에서 부지에 대해 의논은 끝났지만 마지막 협상이 중단되어 다른 부지를 찾아야 하게 되었다. 그러다 파시스트 그룹 조반니 베르타의 요청으로 캄포 디마르테(Campo di Marte) 지역에 있는 쿠레(Cure)에 스포츠 경기장을 짓기로 최종 확정되었다.
2.1.2. 건설 과정
구장 건설 계획은 엔지니어 피에를루이지 네르비(Pierluigi Nervi)와 조아키노 루이지 멜루치(Gioacchino Luigi Mellucci)에 의해 1929년부터 시작되었다. 피오렌티나의 회장 리돌피는 네르비와 그 전부터 만나서 비알레 델콜리(Viale dei Colli)를 따라 아시 길리오 로소(Assi Giglio Rosso) 육상 경기장의 관중석 건설을 위임하기도 했다. 1930년 3월 16일, 네르비는 로마의 회사인 네르비 에 네비오지(Nervi e Nebbiosi)를 통해 리돌피와 합의한 프로젝트를 공식적으로 발표했고 같은 해 7월, 피렌체 시 당국은 이탈리아 왕국 국방부로부터 리돌피의 중재를 통해 캄포 디마르테(Campo di Marte) 지역의 광장 중 일부를 얻는 데에 성공했다. 리돌피가 제1차 세계 대전 당시 전쟁 영웅이었기에 가능했던 일이었다. 이 과정을 거쳐 국제 스포츠 연맹의 요구를 충족시키는 경기장이 피렌체에 건설될 수 있었고, 기차역이 근처에 있기 때문에 다른 후보지보다 더 많은 통신 시설을 제공하는 등 상당히 유리한 조건을 갖추고 있었다.처음 이 지역은 군사 지역들이 일부 기둥으로 나눠져 있었다. 그러나 리돌피는 피오렌티나 구단의 임원진들과 함께 구역을 넓히기 위해 밤에 그 지역을 여행한 것으로 추측된다. 이로 인해 그 구역은 피렌체 시에서 처음 할당받은 지역보다 더 넓어졌다. 1930년 10월 17일, 완전히 덮힌 콘크리트 스탠드 건설이 공식화되었고 5만 리라 이상의 비용이 들어갔다. 그러면서 작업 기간은 180일로 고정시켰는데 지연 시 하루당 500 리라의 벌금이 부과되는 조건이 있었다. 1931년 5월에서야 예산 내에서 건설이 시행되어야 한다는 조건하에 건물 배치 계약도 체결되었다.
정문은 건축가 알레산드로 준톨리(Alessandro Giuntoli)에 의해 설계되었으며 엔지니어 펠레스키(Pelleschi)가 감독한 팔라초 베키오(Palazzo Vecchio)의 기술 사무소에는 피오렌코 데레기(Fiorenzo De Reggi)가 일반적인 레이아웃을 담당했습니다. 두 개의 체육관이 있는 스탠드 중 하나의 넓이는 1400m²였으며 겨울철 달리기 훈련을 위한 레인을 가지고 있었고, 스포츠 의사, 탈의실, 화장실, 그리고 방과 거실이 있는 운동선수들을 위한 몇몇 집들도 있었다. 사무실, 탈의실, 화장실 및 선수들을 위한 침실과 거실이 있는 일부 공간의 계약은 1930년 12월에 서명되었으며 그 중 필수적인 부분은 지방 자치체의 기술 서비스국이 작성한 징계, 안정성 계산의 추출이 포함된 5개의 도면 테이블이었다. 규정에 따르면 작업에는 최대 깊이 2.5m의 지지 기둥 및 철근 콘크리트 구조물의 기초 굴착, 지붕의 기초 작업, 기둥, 계단, 코벨 및 지붕의 벽돌 슬래브, 다락방 등이 포함되었다.
건설 자금 확보의 어려움으로 인해 경기장은 1930년과 1932년 사이에 두 단계에 걸쳐 건설되었으며 모든 구조가 아직 완료되지 않은 경우 가능한 한 빨리 기능적인 시스템을 먼저 갖추도록 했다. 네르비와 네비오지(Nervi e Nebbiosi), 펠라가티(Pelagatti), 비뇰리(Vignoli)에 의해 진행된 초기 단계는 1930년 7월 25일의 기초 에세이와 1930년 12월 3일부터 1931년 6월 1일까지의 트리뷴 건설 작업을 보고했으며 동시에 접근 계단의 구조가 처리되었다. 특히 관람석의 나선형 계단의 주조는 1931년 2월에 기록되었다. 반면 펠라가티와 비뇰리 사는 땅을 파고 필드 배수 작업에 들어갔다. 같은 해 3월과 4월 사이에 지붕 기둥의 공사가 이루어졌고, 덮개 브래킷 설치 및 바닥 보강 작업이 진행되었다. 5월에는 명예 포럼의 철근 콘크리트 캐노피의 건축이 시작되었다. 같은 달, 네르비와 네비오지사는 지붕이 있는 관람석 앞에 길이 60미터의 팬을 위한 두 개의 다른 편의 시설 건설을 의뢰했으며, 그 중 나중에 마라토나 타워가 세워졌다. 마라토나 타워는 당초에는 계획이 없었지만 빠르게 건설이 진행되었다. 덮개가 있는 관람석은 1931년 6월 1일에 완공되었다고 선언되었으며, 그 아래에 2개의 층이 만들어졌는데 여기에는 선수와 대중을 위한 서비스 시설들과 함께 명예의 전당이 마련되었다. 7월 13일 네르비는 시에서 지불해야 할 금액을 지불하지 않을 경우 공사가 중단될 것이라고 위협하는 편지를 피렌체 시에 보내기도 했다. 마라토나의 탑과 덮개가 없는 관람석은 1931년 9월 19일에 완공되었으며, 그 날은 공사 완료 의사록이 작성된 날짜이기도 하다.
1931년 9월 11일에서 10월 24일 사이에 건설 관리자인 데레지(De Reggi)와 네르비의 입회하에 회사의 요청에 따라 500kg/m²의 테스트 하중으로 덮이지 않은 계단의 일부 구간에 대한 테스트가 수행되었다. 그리고 층의 마지막 부분, 중앙 나선형 계단 및 외팔보 선반에 대한 테스트는 1931년 11월 20일에서 1932년 1월 8일 사이에 수행되었다. 공개된 포럼의 테스트 테스트는 6월 11일까지 계속되었으며, 서쪽 구간에 대한 최종 테스트 인증서는 Eng. 토녜티에 의해 발급되었다. 이후에도 엔지니어는 경기장의 나머지 부분에서 작업을 계속했으며 1934년에야 경기장이 완공되었다.
220m의 직선을 포함한 500m 길이의 트랙은 이탈리아 육상 연맹의 규칙에 따라 승인되었고, 동시에 8.60m 높이로 계획된 파르테르 단을 2.65m 더 올려 계단 아래로의 순환 및 대중 접근이 가능하도록 했다. 피치 건설에는 2미터 이상의 높이에 아르노 강의 돌로 만든 이중층의 기초가 삽입되었고 잔디에도 신경을 써서 유럽 최적의 축구장으로 지금까지도 손꼽히고 있다. 그리고 마리오 모스키(Mario Moschi)의 동상이 경기장 입구에 있었는데 나중에 이 동상은 베를린 올림픽을 기념해 독일에 기증되었다.
경기장의 이름은 1921년의 피뇨니 충돌에서 공산주의자들에게 살해된 파시스트 투사 조반니 베르타로 명명되었다. 최대 45,000명의 관중을 수용할 수 있는 대형 프로젝트의 총 비용은 650만 달러를 넘어갔지만 피렌체 시측은 작업 완료에 필요한 자금 조달을 거절했고 이 비용은 리돌피가 개인적으로 충당하면서 공공 자금을 돌리는 방향으로 해결했다. 리돌피는 피렌체 키안티(Florentine Chianti)에 있는 베라자노(Verrazzano) 성과 비틸리아노(Vitigliano) 빌라를 당시 신문사 라나치오네(La Nazione)의 소유주였던 에지디오 파비(Egidio Favi)에게 매각함으로써 작품 자금을 조달했다.
2.2. 최초 경기의 기록
1931년, 경기장은 아직 공사중이었지만 ACF 피오렌티나는 오스트리아의 아드미라 빈과 경기를 치렀다. 피렌체의 곡예 조종사였던 바스코 마그리니(Vasco Magrini)가 비행 중 피치에 공을 던지는 장면이 개막식의 하이라이트였고 페드로 페트로네의 결승골로 피오렌티나가 1대0 승리를 챙겼다.당시 이탈리아의 생활수준에 비해 경기장 표 값이 비쌌음에도 불구하고 경기당 평균 18,000명의 팬들이 경기장을 찾았다. 1932년 5월 7일에는 이탈리아 대표팀이 이곳에서 대표팀 경기를 가졌고 조반니 페라리와 안젤로 스키아비오의 골을 앞세워 체코슬로바키아를 2대0으로 꺾었다.
스타디오 조반니 베르타의 유럽 클럽 대항전 데뷔는 1935년 6월 23일의 미트로파 컵이었다. 당시 피오렌티나의 상대는 헝가리의 우이페슈트였고 경기는 피오렌티나의 4대3 승리로 끝났다. 그리고 1939-40 시즌에는 코파 이탈리아 결승전이 이 경기장에서 개최되었다. 경기는 피오렌티나 팬들의 바람대로 피오렌티나가 제노아 1893을 1대0으로 누르고 클럽 역사상 최초의 트로피를 들어올렸다.
2.3.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나고 파시즘이 몰락하면서 경기장의 이름은 스타디오 코무날레(Stadio Comunale)로 바뀌었다. 1940년대말, ACF 피오렌티나는 스타디오 코무날레를 8만명 수용이 가능한 대형 구장으로 증축할 계획을 세웠지만 재정적 문제로 무산되었다. 1950년대에는 그를 넘어 12만명 수용까지 넘봤지만 이 역시 실현은 되지 않았다. 대신 관람석은 작은 직각 곡선에 따라 두 배가 되었고 스탠드와 경기장 사이에 임시 스탠드가 설치되었으며 새로운 조명 시스템을 지원하는 타워를 세우는 일부 시설 변화를 수행했다.1952년 5월 18일, 이곳 스타디오 코무날레에서 열린 이탈리아와 잉글랜드간의 친선 경기에 사람들의 큰 관심이 집중되었고 시합은 1대1로 비겼다. 1950년대의 수용 인원 늘리기 경쟁에 편승해 이 구장 역시 7만 이상의 수용인원을 자랑했지만 안전 문제는 계속 제기되었다. 1957년 12월 15일, 유벤투스 FC와의 세리에 A 경기에서 관중들의 무게로 인해 관중석의 난간이 무너져 100여명의 부상자가 나오는 사고가 발생했지만 다행히 사망자는 없었다.
<colcolor=#fff> 1960년 당시의 경기장 모습 |
1960년 로마 올림픽 당시 축구 경기는 이탈리아 전역에서 분산 개최를 했는데 스타디오 코무날레도 축구 경기가 열린 경기장 중 하나가 되었다. 1961년에는 이곳에서 컵 위너스컵 결승과 코파 이탈리아 결승전이 열렸고 두 대회 모두 피오렌티나가 우승을 차지했다. 이탈리아에서 열린 1968년 유로에서는 유고슬라비아와 잉글랜드의 시합이 이 곳에서 열렸고 드라간 자이치의 활약으로 유고슬라비아가 결승에 진출했다.
스타디오 코무날레에 1970년에서 1971년 사이에 기존 철근 콘크리트 캐노피의 측면에 두 개의 철제 캐노피가 설치되었으며, 각 캐노피는 캔틸레버 중앙 구조와 달리 두 개의 기둥으로 지지되는 구조였다. 하지만 이 새로운 설치 과정에서 부분적으로 방해를 받았다.
1981년 6월 10일, 이곳에서 영국의 육상 선수 세바스찬 코는 1분 41초 73의 800m 세계 기록을 달성했고 칼 루이스는 100m 세계 기록을 세웠지만 기계 오작동으로 무효처리가 되기도 했다. 같은 해 11월 25일에 있었던 세리에 A 인테르전에선 58,271명이 모여 코무날레의 리그 최다 관중 기록을 세웠다.
2.4. 1990년 월드컵 대비 개보수
1984년, 1990년 월드컵의 이탈리아 개최가 확정되자 1988년부터 이탈리아 축구 협회의 주도로 스타디오 코무날레를 거의 새로 짓는 수준의 공사를 진행했다.스타디오 코무날레는 1983년 미술보호구역이자 국가기념물로 지정되었기 때문에 기존 관람석을 더 올리는 건 불가능했고 구조 개선을 위해 피치를 낮추고 육상 트랙을 없애기로 결정했다. 일단 기존 피치의 해발고도를 2.2m 낮추면서 최신 잔디 관리 기술을 투입했다. 그러면서 수용 인원도 4만 9천으로 조절하는 한편 계단을 포함해 눈에 띄진 않지만 안전한 관람과 기타 필요성이 있는 시설들 역시 보강했다. 캐노피의 지지대를 없애고 경기장 외부의 경계벽을 철제 펜스로 대체해 시야 방해를 줄였고 주차장 면적도 넓혔다. 하지만 경기장의 개보수를 비판하는 쪽에선 개보수의 총감독 이탈로 감베리니(Italo Gamberini)가 문화를 경멸했고 개보수는 피렌체와 이탈리아 지식인들의 완전한 무관심과 환경 및 건축 감독관의 안일한 동의로 자행한 냉소적 학살이라고 혹평하기도 했다.
1990년 월드컵 당시 스타디오 코무날레에선 총 4경기가 치러졌다.
2.5. 현재
1991년, 피렌체 출신의 전직 축구 행정가 아르테미오 프랑키[4]의 이름을 따서 현재의 명칭인 스타디오 아르테미오 프랑키로 경기장 이름을 바꾸었다. 현재 43,325명을 수용 가능한 이 경기장은 피렌체에서 가장 큰 스포츠 시설이며 이탈리아에서 다섯 번째로 수용 인원이 많은 경기장이다. 이탈리아 대표팀의 경기가 치러지기도 하며, 가끔 세계적인 유명 가수의 공연이 열리기도 한다.2007년에 안전 기준 미흡으로 29개의 이중 개찰구가 설치되었으며 58개의 티켓 및 시즌 티켓 판독기와 수많은 텔레비전 카메라가 설치되었다. 또한 모든 구역에 이동식 사전 여과 울타리가 생겼다. 2013년에 또 한번의 개보수를 거친 이 구장은 심각한 노후화 문제로 피오렌티나는 지속적으로 철거 후 재건축을 추진했다. 그러나 건축학적으로 아름답다는 평가를[5] 받기도 하고 경기장 자체가 유명한 건축가이자 건축공학자인 피에를루이지 네르비의 초기 대표작이라 세계 건축계의 반대가 극심해 번번이 무산되었다. 대신 피렌체 시당국에서 전면적인 보수와 리모델링 프로젝트를 국제 공모전으로 추진하였고 건축 그룹 ARUP의 제안이 채택되어 리모델링이 진행될 예정이다.
리모델링 시 골라인 근처에 스탠드를 신규 설치하고 기존 스탠드는 강연이나 콘서트가 가능한 공간으로 꾸밀 예정이며 주변 보조 경기장 및 야구장 일대를 재개발해 공원화 할 예정이다. 그 동안 피오렌티나는 길 건너의 럭비경기장을 임시경기장으로 개조해 사용할 계획을 세우고 있다.
<colcolor=#fff> ARUP의 아르테미오 프랑키 리모델링 계획 |
<colcolor=#fff> 리모델링 후의 아르테미오 프랑키(예상) |
3. 국가대표 경기
3.1. FIFA 월드컵
3.1.1. 1934 FIFA 월드컵 이탈리아
<rowcolor=#2d2f32> 경기일자 | 팀 1 | 결과 | 팀 2 | 라운드 | 관중 |
1934년 5월 27일 16:30 | 독일 | 5:2 | 벨기에 | 1라운드 | 8,000 |
1934년 5월 31일 16:30 | 이탈리아 | 1:1 | 스페인 | 8강 | 35,000 |
1934년 6월 1일 16:30 | 이탈리아 | 1:0 | 스페인 | 8강 재경기 | 42,000 |
3.1.2. 1990 FIFA 월드컵 이탈리아
<rowcolor=#2d2f32> 경기일자 | 팀 1 | 결과 | 팀 2 | 라운드 | 관중 |
1990년 6월 10일 17:00 | 미국 | 1:5 | 체코슬로바키아 | 조별 예선 A조 | 33,266 |
1990년 6월 15일 17:00 | 오스트리아 | 0:1 | 체코슬로바키아 | 조별 예선 A조 | 38,962 |
1990년 6월 19일 21:00 | 오스트리아 | 2:1 | 미국 | 조별 예선 A조 | 34,857 |
1990년 6월 30일 17:00 | 아르헨티나 | 0:0 PSO 3:2 | 유고슬라비아 | 8강 | 38,971 |
3.2. UEFA 유러피언 챔피언십
3.2.1. UEFA 유로 1968
<rowcolor=#2d2f32> 경기일자 | 팀 1 | 결과 | 팀 2 | 라운드 | 관중 |
1968년 6월 5일 21:15 | 유고슬라비아 | 1:0 | 잉글랜드 | 준결승 | 21,834 |
4. 콘서트
데이비드 보위, 듀란 듀란, 스팅, 마돈나, 브루스 스프링스틴 등이 이곳에서 콘서트를 개최했다.5. 뒷이야기
-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이곳은 사형 집행장이 되기도 했다. 징집 회피자들을 재판하기 위해 소집된 특별 법원은 1944년 3월 12일, 비키오(Vicchio)에서 체포된 7명 중 5명에 사형을 선고했다. 3월 22일에 5명의 젊은이는 이 경기장의 마라톤 타워에서 총살형으로 세상을 떠났다.
- 1954년 10월 27일, ACF 피오렌티나와 US 피스토이에세 1921의 경기 도중 UFO가 목격되기도 하였다. 경기장의 남북을 따라 2개의 비행 물체가 빠르게 이동하다가 사라졌다. 당시 사람들의 증언에 의하면 인체에 닿으면 분해되는 하얀 가루를 뿌리며 지나갔다고. 그리고 이듬해에 피오렌티나는 창단 첫 리그 우승을 거둘 수 있었으며 UFO는 피오렌티나에게 우승을 가져다 준 존재로서 피오렌티나 팬덤의 영웅이 되었다.
- 1986년에 요한 바오로 2세, 2015년에 프란치스코 교황이 사목 방문을 했다.
[1] 시에나에 연고를 둔 시에나 FC의 홈구장인 몬테파스키 아레나(Montepaschi Arena)의 이름도 스타디오 아르테미오 프랑키로 이곳과 같다. 하지만 규모나 팀의 명성 등에서 이 항목의 아르테미오 프랑키에 밀리므로 2007년부터 몬테파스키 아레나로 부르기도 한다.[2] 출처: 이탈리아어 위키피디아[3] Parco delle Cascine. 한국어로 번역하면 카시네 공원이다.[4] 프랑키는 이탈리아 축구 연맹 회장, FIFA 부회장, UEFA 회장직을 역임한 인물이다.[5] 특히나 나선형 계단과 마라톤 타워가 유명해 이탈리아 여권에도 들어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