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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란 1세 | 알렉산다르 1세 | 페타르 1세 | }}} }}}}}} |
<colbgcolor=#104172><colcolor=#fff> | |||
출생 | 1876년 8월 14일 | ||
세르비아 공국 베오그라드 | |||
사망 | 1903년 6월 11일 (향년 26세) | ||
세르비아 왕국 베오그라드 | |||
재위기간 | 세르비아 국왕 | ||
1889년 3월 6일 ~ 1903년 6월 11일 | |||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 <colbgcolor=#104172><colcolor=#fff> 가문 | 오브레노비치 가문 | |
이름 | 알렉산다르 오브레노비치 (Александар Обреновић / Aleksandar Obrenović) | ||
아버지 | 밀란 1세 | ||
어머니 | 나탈리야 오브레노비치 | ||
형제자매 | 세르게이(1878 ~ 1878, 요절) | ||
배우자 | 드라가 마신(1900년 결혼, 1903년 사망) | ||
자녀 | 없음 | }}}}}}}}} |
공식 초상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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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세르비아 왕국의 제2대 국왕.후대에 유고슬라비아 왕국의 알렉산다르 1세라는 동명의 국왕이 있으므로 유고슬라비아 이전 세르비아의 알렉산다르 1세로도 불린다.
겉으로는 유럽 중소왕국의 평범한 국왕처럼 보이는 이 국왕의 가장 흥미로운 점은 부모와 전국민의 수많은 반대에도 불구하고 부모를 추방시키면서까지 자기보다 신분이 낮은 여자, 그것도 어머니의 시녀였던 12살 연상의 과부와 결혼해서 결국 목숨까지 잃고 왕의 자리도 다른 가문에게 빼앗겼다는 것이다.
2. 생애
2.1. 초기 생애와 왕위 계승
세르비아 공국의 공작이었던 밀란 1세(1854~1901)와 나탈리 케쉬코(1859~1941)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바로 밑의 남동생 세르게이는 1878년 태어난 지 5일 만에 죽는 바람에 유일한 후계자가 되었다. 밀란 1세와 나탈리 케쉬코의 나이 상, 후계자를 무리 없이 가질 수 있는 나이였음에도 이 시점부터 부부 간의 불화가 심해졌기 때문에 더 이상의 자녀는 생기지 않았다. 이후 1882년 세르비아 공국이 세르비아 왕국이 되어 밀란 1세가 초대 국왕이 되자 알렉산다르는 왕세자가 되었다.아버지 밀란 1세가 세르비아 자유주의자들의 헌법 개정과 부부 불화로 왕위를 내놓고 프랑스 파리로 망명하면서 알렉산다르는 1889년, 불과 13세에 왕위에 올랐다. 초기에는 요반 리스티치를 필두로 하는 섭정위원회의 꼭두각시에 불과했으나 1893년 17세가 되어 성년이 가까워지자마자 친위 쿠데타를 일으켜 섭정단을 실각시키고 입헌군주제를 전제군주제로 되돌려놓고 프랑스로 망명갔던 아버지를 도로 귀국시켰다. 이 과정에서 몇몇 자유주의자들과 진보주의자들의 반발이 있었으나 당대까지만 해도 유럽에서도 전제군주국들이 많았고[1] 민주주의와 인권 의식이 서유럽에 비해 상대적으로 낮았던 발칸 유럽이기도 했고 반대파 탄압도 그럭저럭 잘 해서 그런지 여기까지는 불안정하긴 해도 특별히 본인의 왕위와 목숨을 위협받을 만한 큰 일은 없었지만...
2.2. 문제의 결혼
이 사람이 바로 드라가 마신.
문제는 왕의 결혼에서 터졌다. 알렉산다르가 좋아하던 여자는 하필 12살이나 연상인 1864년[2] 9월 11일생으로 어머니의 시녀이면서 과부[3]였던 드라기냐(애칭은 드라가) 마신이라는 여자였다. 이런 결혼은 귀천상혼이라서 원칙대로라면 윈저 공처럼 왕위에서 물러나든가 프란츠 페르디난트처럼 태어날 자식의 계승권을 포기했었어야 했다. 문제는 원래 한미한 가문이었던 오브레노비치 왕조는 윈저 왕조나 합스부르크 왕조와는 다르게 형제나 가까운 친척들이 전혀 없어서 그 다음에는 후계자 대타들이 없었다는 것이다.[4] 다시 말해 후계자가 없어서 왕조가 단절될 가능성이 높아졌다. 게다가 왕족들의 결혼정책은 영국 빅토리아 여왕의 사례처럼 외교관계에 큰 도움을 주는데, 약소국가이자 신생국가였던 세르비아 입장에서는 강대국과의 제대로 된 외교정책은 필수요소였다.
게다가 또다른 문제는 드라가 마신의 이성관계가 굉장히 문란했다는 것이다. 알렉산다르와 드라가의 결혼을 결사반대했던 내무부 장관 조르제 겐치치는 "폐하, 폐하께서는 드라가 마신과 결혼하실 수 없습니다. 그녀는 모두의 상간녀였습니다. 그리고 거기에는 저도 포함됩니다!" 라고 말했다가 알렉산다르에게 따귀까지 맞았다.[5] 그만큼 신분에서부터 여러 남자와 얽힌 문란한 생활, 평판 모든 면에서 왕비로는 진작에 광탈감인 여자와 결혼하겠다고 하니 세르비아 전체가 난리가 났다.
그러나 사랑에 눈이 먼 알렉산다르 국왕은 부모와 국민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기어코 24살인 1900년에 36살인 드라가 마신과 결혼하여 그녀를 왕비로 만들었다. 그 과정에서 기껏 귀국시킨 부모를 외국으로 도로 추방시키고 결혼에 반대하는 국민들을 탄압하면서 세르비아는 난장판이 되었다.
결혼 상대부터 그 과정까지 전부 막장이었으니 세르비아 내에서 당연히 국왕 부부의 평가는 개판이었다. 결혼 기간 내내 왕이 왕비를 실드치면 칠수록 평판만 계속 내려가는 꼴이 되어버렸다. 당장 유럽에서도 연상연하 커플에 대해 한국보다는 관대한 편이긴 했지만 그래도 나이 차이가 너무 많이 나면 평판이 나빴다.[8]
하지만 평판이 마이너스가 될 정도로 결정타를 먹인 것은 따로 있었다. 바로 드라가 왕비가 상상임신 사건을 일으켜서 국민들의 신뢰도를 제대로 깎아먹고 왕실의 체면마저 실추시킨 것이다. 게다가 나이가 많은 왕비가 자식을 보기 힘들 것 같다고 판단한[9] 알렉산다르는 기존의 왕위 계승의 법칙을 어기고, 왕비의 동생인 처남 니코디예 루녜비차를 자기 후계자로 지정하는 병크로 화려하게 자폭하면서 안 그래도 막장이던 세르비아 정세는 파국으로 치닫게 된다. 당연히 이 처남은 오브레노비치 왕가의 피가 한 방울도 안 섞인 일개 평민[10]에 이렇다 할 국가적 공헌도 없었기 때문에 왕위계승의 정당성 자체가 전무했다. 얘가 왕이 될 수 있다면 막말로 세르비아 국민 중 아무나 왕이 될 수 있다는 것인데,
게다가 알렉산다르는 나름대로 중립외교랍시고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과 화친했는데, 이것은 당시 범슬라브 민족주의가 한창이던 세르비아의 국민감정과는 완전히 어긋나는 것[11]이어서 더더욱 민심을 잃게 되었다.
2.3. 암살
세르비아군의 몇몇 장교들은 이 자식 안 되겠어 빨리 어떻게든 하지 않으면이라는 심정으로 비밀조직을 만들어 왕을 암살하는 쿠데타를 모의했다. 첫 번째 시도는 결혼한 지 불과 1년 만인 1901년에 왕비의 생일 파티장에서 시도했는데, 눈치를 채는 바람에 실패.2년 뒤인 1903년 6월 11일 밤중에 암살자들이 왕궁을 습격했는데, 이때 알렉산다르 왕은 비밀통로를 통해 탈출할 기회가 있었지만 하필 비밀통로가 왕비의 옷장에 가로막히는 바람에 탈출에 실패했고, 어쩔 수 없이 옷장에 숨어있다가 왕비가 도와달라고 소리치는 바람에 암살자들에게 들켜서 총을 맞고 끔살당했다. 이때 알렉산다르의 나이는 향년 26세, 드라가의 나이는 향년 38세. 왕과 왕비의 시체는 토막나서 내장이 드러난 채로 왕궁 비료더미에 던져졌다가 다음 날 낮에 시신이 수습되어 그나마 형식적인 장례는 치렀다.
알렉산다르를 암살한 그 비밀조직이 바로 제1차 세계 대전의 시발점이 되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프란츠 페르디난트 황태자[12]를 암살한 검은 손이다. 애당초 검은 손의 최초 창설 목적은 알렉산다르의 암살이었다.
세르비아 국민들은 국왕의 이해할 수 없는 평소 행보에 질릴 대로 질렸던 터라 국왕이 암살되었다는 소식을 듣고도 매우 기뻐했다. 그렇기 때문에 왕위가 오브레노비치 왕조에서 카라조르제비치 왕조로 넘어감에도 극소수를 제외하면 거의 누구도 이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13]
2.4. 암살 이후
그 후 검은 손은 오브레노비치 가문의 경쟁 가문인 카라조르제비치 가문의 페타르 카라조르제비치를 페타르 1세라는 이름의 왕으로 추대했다. 알렉산다르의 가문인 오브레노비치 가문은 알렉산다르의 암살로 대가 끊기고 사실상 멸문당했다. 물론 전임 왕 밀란이 다른 여자에게서 본 아들(알렉산다르의 이복동생)이 하나 있었지만 이쪽은 사생아라서 정통성이 약한 데다가 알렉산다르 오브레노비치가 워낙 실책을 한 바람에 왕위 계승을 할 엄두도 못 냈다.[14]당시 유럽은 군주제 체제가 많이 남아있는 상태였기 때문에 유럽 각국은 이 쿠데타에 대해 형식적으로는 비난의 목소리를 냈고, 결국 새로 즉위한 페타르 1세는 형식적으로나마 검은 손 단원들을 처벌하는 바람에 이후 검은 손은 지하조직이 되면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제위 계승자 프란츠 페르디난트 대공을 암살하고 완전히 해체당한다.[15]
[1] 사실 당대에는 그 유럽에서도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러시아 제국, 독일 제국 같은 말만 입헌군주제지 사실상 전제군주제인 국가들이 많았고 당대 치고는 입헌군주제가 잘 지켜진 당대의 영국이 당대 기준으로는 오히려 드문 것이었다. 다만 이런 전제군주국들과 알렉산다르 1세 치하의 전제군주제 세르비아는 상당히 큰 차이가 있는 것이, 이 나라들은 그래도 아무리 형식적인 의회라도 상시 열었고 대놓고 전제군주제가 당연했던 18세기까지와는 달리 프랑스 혁명의 영향으로 국민들의 눈치를 보게 되는 19~20세기 들어선 형식적으로나마 입헌군주제를 명시하며 군주 또한 아무리 전제군주제를 추구하는 군주여도 국회와 국민을 존중하는 스탠스는 반드시 취했기 때문이다. 후대의 유고슬라비아 알렉산다르 1세 또한 마찬가지였고 본인 나름대로는 전간기로 인한 유럽 전체의 혼란과 스체판 라디치 암살로 인한 유고슬라비아의 혼란상을 전제군주제로 자신에게 권력을 집중시켜 잠재우겠다는 명분이 있기는 했다. 그러나 알렉산다르는 그런 것도 없이 그냥 군주니까 자기 마음대로 해도 된다는 철저히 전근대적 논리를 19세기 말~20세기 초 유럽에 들고 온 것이다.[2] 허나 최근에는 실제로는 1866~67년생이었다는 얘기가 있다. 그렇다 쳐도 9~10살 연상.[3] 죽은 전남편은 스베토자르 마신(Svetozar Mašin)으로 그는 밀란 1세 시기에 왕실 의사였다.[4] 애초에 본인과 아버지에게 왕위가 돌아간 것도 건국자였던 큰증조부 밀로시 오브레노비치의 아들들이 전부 자손 없이 죽어서 원래였다면 왕위를 물려받을 수 없었던 방계임에도 왕위를 물려받은 것이었다. 게다가 세르비아의 왕위를 두고 카라조르제비치 가문과 경쟁하다가 승리했을 정도로 국내 기반도 약했다. 실제로 알렉산다르 오브레노비치의 뻘짓으로 왕위는 카라조르제비치 왕조가 이어버린다.[5] 결국 이 결혼이 성사되자 겐치치는 분노하여 암살 음모에 가담했다. 물론 알렉산다르의 판단력이 개판이었음을 감안하더라도 국왕 앞에서 (아무리 사실이라도) 그런 불경한 소리를 내뱉었으면 따귀를 맞는 수준에서 그친 것은 그나마 다행인 것이었다.[6] 취소선 치긴 했지만 동아시아에서 이와 비견될 만한 행동을 한 인물로 성화제가 있긴 하지만, 성화제는 자기 나라 안에서 권력이 절대적이었고 정통성이나 국가의 상황과 입지가 안정적인 상태였고, 태후나 대신들이 반대해도 '황후는 따로 뽑고 만귀비는 후궁으로 둔다'는 선택으로 타협도 가능,(사실 최소한의 눈치는 있는 인물인 만큼 타협할 수밖에 없는 입장이었다) 굳이 후사가 없으면 친동생에게 물려줄 수도 있었지만 알렉산다르 왕은 그 세 가지가 모두 없었다. 게다가 성화제는 적어도 이 사람보다는 훨씬 정치감각이 있고 평범한 인물이었다. 물론 이쪽도 만귀비에게 아첨하는 관료들이 득세하는 문제가 나타나기는 했지만.[7] 그러나 니콜라이 2세는 적어도 이전부터 러시아 황실과 여러 번 통혼한 유서깊은 통치가문인 헤센 대공국의 공녀이자, 결혼 시점에서 평판에도 아무런 흠결이 없었던 알릭스 공녀와 결혼하면서 알렉산드르와 드라가와 비교하는 게 모욕일 정도로 무난한 관계였다. 단지 서로의 종교적 차이와 개인적으로 독일을 싫어했던 부황 알렉산드르 3세의 반대 등이 그나마의 문제였을 뿐이었고, 알릭스의 언니이자 먼저 러시아로 시집와있던 옐리자베타 대공비의 설득과 니콜라이 2세가 알렉산드르 3세의 허락을 받는데 성공하여 이루어질 수 있었다. 알릭스 역시 러시아어를 공부하고 러시아 정교회로 개종도 하고 이름마저 러시아식인 알렉산드라로 개명할만큼 매우 노력해서, 러시아의 황후로 인정받았고 실제로 당대 러시아의 대신들이나 귀족들은 니콜라이 2세와 알릭스의 결혼을 딱히 반대하지는 않았다. 이렇게 같은 연애결혼이지만 니콜라이 2세는 말이 되는 결혼이었고 알렉산다르 1세는 말이 안 되는 결혼이었다.[8] 드라가 마신이 너무 나이가 많았기 때문에 당시 루머 중에 드라가 마신이 밤일로 왕을 유혹해서 결혼했다는 등의 섹드립이 널리 퍼졌다. 당시만 해도 유럽에서 나이 차이가 많이 나는 연상 여자와 결혼하면 이런 악성 루머가 퍼지는 경우는 흔했고 21세기에도 마찬가지이다. 해당 이슈의 주인공은 프랑스 대통령 에마뉘엘 마크롱이다. 참고로 역대 프랑스 대통령은 여자 관련 스캔들이 매우 빈번하고 국민들이 남자의 상대 여자 이슈에 대한 여론이 관대한 국가인데도 평판이 이 정도이다. 남자가 여자보다 12살이 많은 경우에는 그다지 비난의 대상이 되진 않았으므로 이것만 가지고는 평판이 일정 수준 이하로 떨어지지는 않는다.[9] 다만 드라가 왕비의 나이는 1900년 결혼 당시 36살로(43살에 영친왕을 출산한 동시대 인물인 순헌황귀비를 보면 알 수 있듯) 완전 출산이 불가능한 나이는 아니었는데도 일찌감치 처남을 후계자로 만들어 놓은 것이다. 아마도 당대에는 멀쩡하고 건강하던 여성도 아이를 낳다가 사망하는 사례가 제법 되었으니 아직 가임기이긴 하지만 그래도 나이가 좀 많은 왕비가 아이를 낳다가 사망할 가능성을 원천 차단하기 위해 아이를 안 갖고 처남을 후계자로 지명한 듯 하다. 드라가가 임신할 가능성이 거의 0에 가까운 40대 중반 즈음인 1900년대 후반으로 후계자 선정을 미뤘다면 이에 대해서도 납득하는 국민들이 약간은 더 있었을 것이다.[10] 물론 루녜비차 가문이 완전히 이름 없는 평민 가문은 아니었다. 애당초 그 정도로 한미한 신분이었으면 왕비의 시종으로 들어가지도 못한다. 드라가와 니코디예의 할아버지는 지역 유지이자 대상인으로 세르비아 공국 성립 과정(세르비아 봉기)에서 밀로시 오브레노비치의 측근이었으며 그 자손도 공직과 군에서 경력을 쌓은 바 있다.[11] 당대의 범슬라브 민족주의자들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영토였던 크로아티아, 슬로베니아, 보스니아 헤르체코비나를 해방시켜야 할 슬라브인의 땅이라고 생각해서 게르만족과 헝가리인들이 주류인 오헝제국을 증오했다.[12] 정확히는 황태자가 아니라 황위 제1계승자. 그가 암살당할 당시의 황제는 큰아버지 프란츠 요제프 1세였기 때문.[13] 알렉산다르 1세 이후 유고슬라비아 알렉산다르 1세가 그가 있었음에도 "2세"가 아닌 "1세"라는 왕호를 썼다는 점에서 알렉산다르를 왕으로 인정하지 않는다, 더 나아가 카라조르제비치 왕조는 오브레노비치 왕조를 승계하지 않는다는 상징이기도 하다. 사실 1세 2세 같은 왕호는 나라들마다 용례가 서로 달라서 왕가가 달라져도 넘버링을 이어가는 경우도 있고 왕가가 달라지면 넘버링을 리셋하고 새로 시작하는 경우도 있다. 같은 왕가이지만 중간에 국체가 바뀐 경우도 마찬가지.[14] 현재 오브레노비치 왕가의 후예로서 세르비아 왕위를 주장하는 가문은 (구) 몬테네그로 왕가다. 알렉산다르의 내재종여동생이 몬테네그로의 왕위 요구자 니콜라의 할머니이기 때문.[15] 그리고 페타르 1세는 비슷한 기능의 하얀 손이라는 단체를 지원했는데, 이쪽은 사실상 왕실 비밀 친위대 성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