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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센의 알릭스 공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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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러시아 황제 }}}}}}}}}

<colbgcolor=#fff0f5,#970032> 러시아 제국 니콜라이 2세의 황후
헤센의 알릭스 공녀
Prinzessin Alix von Hessen und bei Rhein
파일:Princess Alix of Hesse.jpg
출생 1872년 6월 6일
독일국 헤센 대공국 다름슈타트 신궁전
사망 1918년 7월 17일 (향년 46세)
러시아 SR[1] 페름현 예카테린부르크구 예카테린부르크 이파티예프 하우스[2]
(現 러시아 우랄 연방관구 스베르들롭스크주 예카테린부르크 피의 교회)
재위기간 전러시아의 황후
1894년 11월 26일 ~ 1917년 3월 15일
서명 파일:헤센의 알릭스 서명.sv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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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fff0f5,#970032><colcolor=#000> 가문 헤센다름슈타트 가문
이름 독일어 알릭스 빅토리아 헬레네 루이제 베아트릭스
(Alix Viktoria Helene Luise Beatrix)
러시아어 알렉산드라 표도로브나 로마노바
(Александра Фёдоровна Романова)
아버지 루트비히 4세
어머니 영국의 앨리스 공주
형제자매 빅토리아, 엘리자베트, 이레네, 에른스트 루트비히, 프리드리히, 마리
배우자 니콜라이 2세 (1894년 결혼)
자녀 올가, 타티아나, 마리야, 아나스타샤, 알렉세이
종교 루터교회러시아 정교회 }}}}}}}}}

1. 개요2. 작위3. 생애
3.1. 출생3.2. 어린 나이에 어머니를 잃다3.3. 연애결혼3.4. 러시아의 황후3.5. 그리고리 라스푸틴의 등장3.6. 러시아 혁명, 로마노프 왕조의 멸망3.7. 유배 생활과 비참한 죽음3.8. 둘째 언니 옐리자베타 대공비의 죽음3.9. 죽음 이후
4. 여담
4.1. 품성 논란
5. 가족관계
5.1. 조상5.2. 자녀

[clearfix]

1. 개요

헤센 대공국의 공녀이자 러시아 제국의 마지막 차르니콜라이 2세황후. 러시아 역사상 마지막 황후이기도 하다.

2. 작위

3. 생애

3.1. 출생

헤센 대공국루트비히 4세영국 빅토리아 여왕의 차녀 앨리스 공주 사이에서 2남 5녀 중 4녀(여섯째)로 태어났으며, 태어난 지 1달 만에 루터교회 세례를 받았다. 풀 네임은 '알릭스 빅토리아 헬레네 루이제 베아트릭스 폰 헤센 바이라인'이며 ‘알릭스’는 어머니의 이름을, 미들네임은 전부 이모들의 이름을 따서 지어졌다.

원래라면 알릭스가 아닌 '알리체'로 불려야 했지만, 알릭스의 어머니 앨리스 공주는 평소 이 발음이 촌스럽다고 생각하여 싫어했기 때문에[3], 딸에게는 예쁜 이름을 지어주고 싶어서 '알릭스'라는 이름을 지어주었다. 다만 어린 시절에는 외숙모이자 시이모였던 영국 왕비 덴마크의 알렉산드라 공주[4]가 알릭스라는 애칭으로 불리고 있었기 때문에, 주로 '알릭키(Alicky)'라고 불렸다.
파일:Princess_Alix_of_Hesse_as_a_young_girl.jpg
파일:519495-1424805328.jpg
어린 시절의 알릭스

어머니 앨리스 공주는 자신이 영국공주라는 사실에 큰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앨리스 대공비는 헤센 대공국에 시집와서도 거처를 영국식으로 꾸몄고, 7남매의 육아 및 교육 방식에 있어서도 영국 문화를 많이 따랐다. 이런 어머니의 교육 방침은 이후 알릭스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다. 알릭스는 언니들과 여동생 마리, 오빠와 함께 즐거운 나날을 보냈다.

3.2. 어린 나이에 어머니를 잃다

파일:Princess_Alix_of_Hesse_1881.jpg
1881년 당시의 알릭스
그러나 알릭스가 6살이던 1878년, 디프테리아라는 전염병이 유행하면서 행복했던 유년 시절도 끝나게 된다. 당시 친할머니 프로이센의 엘리자베트 곁에 있었던 둘째 언니 엘리자베트를 제외하고 알릭스의 가족들도 병을 피해 갈 수 없었으며, 이때 알릭스의 막내 여동생 마리도 디프테리아에 걸려 죽고 만다.[5] 특히 어머니 앨리스 공주는 병에 걸린 자녀들을 직접 돌보았기 때문에 더욱 위험했고, 결국 앨리스 대공비마저 디프테리아에 전염되어 병사하고 말았다. 본래 알릭스는 '써니'라는 애칭을 받을 정도로 밝고 활달했으나, 고작 6살에 어머니를 잃은 충격과 슬픔으로 침울하고 조용한 소녀가 되어버렸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 장녀 빅토리아[6]는 어머니를 대신하여 맏이로서 남은 동생들(엘리자베트, 이레네, 에른스트, 알릭스)을 돌보고 헤센 대공국에서 가장 높은 여성으로서 아버지를 보필하여 궁정을 이끌어야 했다. 당시 빅토리아는 외할머니인 영국 빅토리아 여왕에게 많이 의지했다. 빅토리아 여왕 또한 손녀 빅토리아와 지속적으로 편지를 주고받으며 여러 조언을 해주고, 시간이 나면 직접 독일로 와서 손자녀들이 어떻게 지내는지 보는 등, 많은 관심을 기울였다.

이러다 보니 알릭스를 포함한 외손녀들은 문화ㆍ정서적으로 독일인이라기보다는 영국인에 더 가까웠다. 다만 불행하게도 알릭스는 어머니, 외할머니로부터 혈우병 유전자도 물려 받는 바람에 귀한 아들에게 혈우병 유전자를 물려주었다. 이 혈우병은 알릭스의 가정 뿐 아니라, 러시아 제국 전체를 뒤흔들게 된다.

3.3. 연애결혼

이후 성인이 된 알릭스는 둘째 언니 엘리자베트 못지 않은 미인이 되었고, 헤센 대공국의 공녀였던 그녀에게도 많은 혼담이 들어왔다. 당시 빅토리아 여왕은 알릭스가 사촌 앨버트 빅터 왕세손과 결혼해서 영국의 차기 왕비가 되길 내심 기대했지만, 알릭스가 앨버트의 청혼을 거절하면서 이 계획은 무산되었다.

사실 알릭스는 이미 러시아 제국니콜라이 황태자와 사랑에 빠져 있었다. 두 사람은 혈연적으로도 가까운 사이였는데, 니콜라이 황태자의 어머니 덴마크의 다우마 공주는 알릭스의 대모였고, 외숙모인 영국의 알렉산드라 왕세자비의 여동생이었다. 또한 니콜라이 2세의 할머니 헤센의 마리 공녀는 알릭스의 할아버지 카를 공자의 여동생이니 6촌간이기도 하다. 한편 프로이센 국왕 프리드리히 빌헬름 2세 기준으로 하면 9촌이기도 하다. 니콜라이 2세는 프리드리히 빌헬름 2세의 장남 프리드리히 빌헬름 3세의 딸 샤를로테의 증손자, 알릭스는 프리드리히 빌헬름 2세의 4남 빌헬름 왕자의 딸 엘리자베트의 손녀다.

두 사람의 만남은 1884년, 20살이 된 둘째 언니 헤센의 엘리자베트 공녀러시아 제국세르게이 대공의 결혼식에서 시작되었다. 당시 12살인 알릭스는 언니의 결혼식에 참석했다가, 알렉산드르 3세의 아들이자 형부 세르게이 대공의 조카인 니콜라이 황태자와 처음으로 만났고, 어린 소년과 소녀는 서로 사랑에 빠졌다.

그후 10년이 지난 1894년 4월, 알릭스의 오빠인 에른스트 루트비히 대공이 빅토리아 여왕의 손녀이자 니콜라이 황태자의 사촌인 빅토리아 멜리타와 결혼식을 올리자, 온 유럽 왕족들이 독일의 코부르크에 모였다. 이 때 니콜라이 황태자 또한 코부르크로 향했고, 이때 첫사랑인 알릭스와 재회하게 되어 두 사람의 사랑은 더 커지게 되었다.

당시 종교적 이유와 독일을 싫어했던 알렉산드르 3세의 반대 등으로 이 둘의 결혼은 어려울 듯 보였다. 하지만 먼저 러시아 황실에 시집간 언니 옐리자베타 대공비가 지속적으로 설득했고, 아버지 알렉산드르 3세의 허락까지 받고 온 니콜라이 황태자가 끊임없이 구애했다. 또한 알릭스의 언니들은 모두 결혼해서 헤센 대공국을 떠난 지 오래였고, 오빠 에른스트의 결혼으로 올케인 빅토리아가 헤센 대공국의 새 안주인이 되었기에, 있을 곳이 거의 없어진 알릭스는 니콜라이의 청혼을 받아들인다.
파일:Engagement_official_picture_of_Alexandra_and_Nicholas.jpg
알릭스와 니콜라이 황태자의 공식 약혼사진

당시 러시아 제국으로 시집가기 위하여 알릭스는 러시아어를 공부했고, 종교루터회에서 정교회개종하고 결혼하면서 이름도 러시아식으로 '알렉산드라 표도로브나'로[7] 개명하는 등 사랑을 위해 많은 것을 감내하고 이모저모로 노력했다.

다만 모두가 축복하는 이 결혼식에서, 유일하게 외할머니인 빅토리아 여왕만이 알릭스가 정치적으로 불안정한 러시아 제국으로 시집가는 것을 걱정해서 반대했다. 여왕은 알릭스의 친정인 헤센 대공가의 공녀들 중 러시아로 시집간 사람들은 하나같이 신세가 망했다는 것을 강조하며 반대했는데, 외할머니의 이런 불안한 예상은 끝내 들어맞았다.

3.4. 러시아의 황후

결혼식을 올리기 전인 1894년 11월 1일, 니콜라이 황태자의 아버지 알렉산드르 3세가 사망했다. 니콜라이 황태자는 차기 러시아의 차르로 지목되었고, 11월 26일[8]에 예정되었던 결혼식을 그대로 진행하면서 알렉산드라는 바로 황후 자리에 오른다. 그러나 알렉산드르 3세가 사망한 지 채 1달도 되지 않아 결혼식을 치른 탓에, 군중들은 "새 황후가 불운을 가져오는 게 아니냐"며 수군댔다고 한다.
파일:Wedding_of_Nicholas_II_and_Alexandra_Feodorovna_by_Laurits_Tuxen_(1895,_Hermitage).jpg
1894년 11월 26일, 니콜라이 2세와 알렉산드라의 결혼식

3.4.1. 고부갈등과 고립된 황후

한편 결혼을 허락한 시아버지 알렉산드르 3세와 달리, 시어머니 마리아 표도로브나 황태후만은 맏며느리를 좋게 보지 않았다. 알렉산드라 황후 또한 그런 시어머니의 의중을 잘 알고 있어서, 둘의 사이는 늘 냉랭했다.

본래 마리아 황태후가 원했던 며느릿감은 루이필리프 1세의 증손녀 엘렌 도를레앙이었고 황태후의 친정, 즉 알렉산드라 황후의 시외가인 덴마크 왕실은 슐레스비히홀슈타인 전쟁으로 알렉산드라의 친정인 독일을 경멸하고 있었다. 게다가 니콜라이 2세를 포함해 여러 아들들을 둔 마리아와 달리 알렉산드라는 줄줄이 공주 4명을 낳았고, 겨우 어렵게 낳은 알렉세이 니콜라예비치 황태자는 모계로부터 혈우병 인자를 물려받아 병약하기까지 했다.

설상가상으로 성격적인 면에서도 황태후와 황후는 극과 극이었다. 본래부터 밝고 명랑한 성격의 소유자였고 이러한 성향을 잘 살려 러시아에 갓 시집왔을 때부터 러시아 사교계를 주도적으로 이끈 시어머니 마리아 황태후와 달리, 알렉산드라 황후는 내성적이고 예민한 성격에 사교계를 이끌기보다 자신이 아끼는 사람들끼리 조용히 지내고 종교나 점술에 심취하는 신비주의 성향이었다. 더구나 황태후로서 책임을 다하려 노력한 마리아와 달리, 알렉산드라는 황후로서 내우외환으로 무너지는 러시아 제국의 현실을 바로 보고 개선하려는 노력은 커녕, 타락한 요승 그리고리 라스푸틴에 심취하여 국정 개입과 추문 등을 만들어 러시아 황실의 평판까지 바닥을 치게 했다. 이러한 여러가지 요인들은 마리아 황태후를 몹시 실망시켰다.

한편 알렉산드라 황후도 화려하고 문란한 러시아 사교계에 적응하지 못했고, 한동안 아들을 못 낳아 눈총을 받았다. 이후로는 혈우병 환자인 아들 알렉세이를 보호한다는 이유로, 공식 행사를 제외하면 가족들과 일부 친한 사람들과만 지내는 고립된 삶을 보냈다. 니콜라이 2세도 이런 아내를 따라 사교를 멀리하게 되었다. 더구나 차르 부부가 너무 귀족 사회와 사교계를 등한시하고, 가정에서 자기들끼리만 뭉쳐지낸 탓에, 황자와 황녀들은 평소 애칭[9]으로 불리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고, 자신들의 공식 칭호(=황자, 황녀 전하)를 낯설어할 정도로 세상 물정을 모르게 되었다.[10]

개인적으로는 좋은 면모도 있었지만 황후의 성격과 행동이 이렇다보니, 음침하고 고지식하며 고집스러운 부분만이 더욱 드러나서 자연스럽게 러시아 황족들과 귀족들은 황후에게 실망을 한다. 황후는 러시아 황실에서 외톨이 신세였으며, 그나마 그녀를 위로해주는 사람은 남편 니콜라이 2세와 둘째 언니 엘리자베트 대공비, 막내 시누이 올가 알렉산드로브나 여대공[11] 뿐이었다.

3.4.2. 어렵게 낳은 아들혈우병

당시 문란했던 러시아 황실과 달리, 니콜라이 2세와 알렉산드라 표도로브나 황후 내외는 서로에게 충실하며 결혼생활 6년 동안 네 명의 딸을 낳을 정도로 금슬이 좋았다. 또한 당시 황족으로서는 드물게 알렉산드라 황후는 아이들에게 직접 모유 수유를 할 정도로 모정이 각별했다.

그러나 이런 금슬과 별개로 러시아 황실에서는 마냥 기뻐할 수만은 없었던 문제였는데, 러시아 제국에서는 남성만이 황위를 이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원래 러시아 제국에서는 여성의 황위 계승이 가능했으나, 마지막 여제 예카테리나 2세의 아들 파벨 1세가 법을 개정하여 여성이 황위를 잇는 것을 금지했다.[12]

다른 러시아 황족들과는 달리, 니콜라이 2세와 알렉산드라 부부는 첫딸인 올가 니콜라예브나 여대공이 태어났을 때까지만 하더라도 아들이 태어나지 않은 것에 크게 실망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후로도 줄줄이 딸들만 태어나는 바람에, 황후는 아들 생산에 대한 큰 압박과 스트레스를 받았다고 한다.[13][14]

결국 계속된 시도 끝에 알렉산드라 표도로브나 황후는 마침내 다섯째 아이를 낳았고, 이 아이가 바로 니콜라이 2세와 알렉산드라 부부의 외아들이자 러시아 제국의 황위를 이을 수 있는 알렉세이 니콜라예비치 황태자였다. 차르 부부는 물론 전 러시아의 황족들 및 고위급 인사들까지 알렉세이의 탄생을 매우 반겼다.

그러나 이토록 어렵게 태어난 알렉세이 황태자는 외외증조할머니 빅토리아 여왕에게서 물려받은 보인자로 인해 혈우병 환자로 태어났고, 알렉산드라 황후는 러시아 제국의 용하다는 모든 의사들을 불러 아들을 치료해 달라고 애원했으나 당시의 의학으로서는 혈우병은 고칠 수 없는 불치병이었다.[15] 알렉산드라 황후는 귀한 아들의 불치병과 '아들에게 병을 물려주었다'는 죄책감으로 신경쇠약까지 앓을 정도였고, 그녀의 마음은 병들어 버렸다. 결국 이는 의학으로 해결되지 않는 아들의 병을 종교나 주술의 힘을 빌려 치유하려는 선택까지 하게 되었으며, 이는 그녀와 러시아 황실과 제국에 커다란 비극을 가져왔다. 그나마 니콜라이 2세누구처럼 황실에 혈우병을 퍼뜨렸다며 비난을 퍼붓지는 않았다.

3.5. 그리고리 라스푸틴의 등장

그러던 중, 알렉산드라 표도로브나 황후는 친구인 안나 타네예바 비루보바의 소개로 시베리아의 떠돌이 수도자 그리고리 라스푸틴을 만나게 된다. 라스푸틴은 황태자의 병을 고치겠다며 접근하여 황궁을 들락거렸다.

자신 때문에 아들이 몹쓸 병을 가지고 태어났다는 자책 때문이었는지, 물에 빠진 사람이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이었는지 알렉산드라 황후는 그를 믿기 시작했다. 더구나 신기하게도 무슨 수를 썼는지 몰라도 라스푸친이 오면서 알렉세이의 상태가 호전되기 시작하자 알렉산드라 황후는 라스푸틴을 광적으로 신뢰하며 그를 가까이에 두었고 요승 라스푸틴은 그 배경에 힘입어 권력을 휘두르게 된다. 그러나 그리고리 라스푸틴의 전횡으로 안 그래도 위태로운 러시아 제국은 본격 붕괴하기 시작했다.

게다가 알렉산드라 황후가 주변 귀족들의 반감[16]을 사면서 라스푸틴을 지나치게 싸고돌다 보니 황후가 라스푸틴과 불륜 관계라거나 성관계를 맺었다는 근거 없는 소문들[17]이 생겨나면서 러시아 황실의 이미지는 갈수록 추락하기 시작했다.

보다 못한 러시아 제국 내 귀족들은 물론 시어머니 마리아 표도로브나 황태후, 시누이 올가 알렉산드로브나 여대공, 황후의 둘째 언니 옐리자베타 대공비까지 나서서 "라스푸틴을 멀리하라."며 충고했다. 하지만 알렉산드라 황후는 이런 인척들의 말도 귀담아 듣지 않아, 비정상적으로 고집스러운 이미지가 되었다.[18][19]

이런 상황에서 1차 대전이 발발하자 남편인 니콜라이 2세는 군사본부로 이동하여 홀로 남게 된 황후는 라스푸틴에게 더더욱 의존하게 되었다. 니콜라이 2세는 군사 업무에 집중하기 위해 아내인 알렉산드라 황후에게 모든 내치 업무의 결정권을 일임하였다. 그런데 남편이 떠나자 더더욱 불안감이 심해진 황후는 라스푸틴에게 의존하며 사실상 그가 러시아 제국의 국정을 좌지우지하게 되는 계기를 마련한다. 이는 피의 일요일 사건 이후로 끓던 민심을 폭발하게 하였고 전쟁으로 인한 생활수준 악화와 겹쳐 1917년 러시아 혁명이 발생하는데 일조하였다.

3.6. 러시아 혁명, 로마노프 왕조의 멸망

당시 러시아 제국은 오랫동안 전제정치와 농노제로 인한 병폐, 급속한 산업화로 인한 처참해진 민중들의 삶과 경제 파탄 등 여러 문제로 서서히 무너지고 있었다. 그러다 알렉산드라 표도로브나 황후의 지원을 등에 업고 자신의 사리사욕을 채우는 그리고리 라스푸틴으로 인하여 붕괴는 더더욱 가속화되고 말았다.

게다가 황제 니콜라이 2세와 알렉산드라 황후는 이런 백성들의 빈곤한 삶과 현실을 바로 보기는커녕 호화스러운 나날을 보내고, 항의하는 농민들에게는 총탄을 퍼붓고, 러일전쟁1차 세계대전에 참여해 백성들을 전쟁터에 몰아넣는 폭정을 저질렀다.

이런 비참한 상황에서 러시아 제국의 백성들은 차츰 독일(헤센 대공국) 출신의 황후, 더 나아가 러시아 황실에 점점 불만을 품게 된다. 결국 이를 보다못한 펠릭스 유수포프[20]를 중심으로 한 반대파들(황족&귀족)은 원흉인 라스푸틴을 암살하는 초강수를 쓴다.

그러나 여전히 정신을 못 차린 알렉산드라 황후는 둘째 언니 옐리자베타 대공비가 이 암살에 참여했다고 믿었다. 옐리자베타 대공비의 양아들인 드미트리 파블로비치 대공도 유스포프와 함께 라스푸틴 살해에 앞장섰기 때문이었다. 황후는 남편을 부추겨 언니의 양아들 드미트리 대공을 추방했고, 드미트리 대공은 프랑스로 망명했다.[21] 황후는 이런 실정을 거듭하며 옐리자베타 대공비와의 사이도 나빠졌고, 귀족들의 불만도 더욱 심해지게 만들었다.

그러나 그리고리 라스푸틴의 죽음만으로 무너진 러시아 제국을 돌리기에는 이미 늦었다. 1917년에 발생한 러시아 혁명으로, 니콜라이 2세차르 자리에서 폐위되었다. 황후, 공주들, 황태자도 모두 폐위되었다. 이로서 304년 역사[22]로마노프 왕조제정 러시아는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고, 공화국이 선포되었다.

3.7. 유배 생활과 비참한 죽음

파일:상세 내용 아이콘.svg   자세한 내용은 로마노프 왕가의 몰살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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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화국 선포 후 니콜라이 2세 일가족은 조그만 시골 마을로 이주하게 되었으나, 그래도 케렌스키 정부가 나름대로 배려를 해주었기에 불편함 없이 평화로운 나날을 보냈다.

그러나 이런 조그만 평화도, 볼셰비키 혁명으로 소련이 세워지면서 완전히 끝나게 된다. 니콜라이 2세 일가는 볼셰비키들의 감시 하에 여기저기 끌려다니며 하루아침에 나락으로 떨어졌다. 황후와 공주들은 음담패설성적인 욕설을 듣는 등, 온갖 굴욕적인 대우를 받아야 했다.

그리고 1918년 7월 16일 밤, 감시자들은 예카테린부르크의 이파티에프 하우스에 머물고 있던 차르 일가 7명을 모두 깨워 지하실로 데려갔다. 니콜라이 2세는 애써 별 일 아닐 거라며 아내와 아이들을 안심시키려 했지만, 그곳에서 차르 일가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총살이었다. 결국 알렉산드라 표도로브나는 남편과 아이들과 함께 총으로 난사당하며 처참한 죽음을 맞았고, 이들의 시신마저 제대로 된 장례도 못 치르고 매장되지 못한 채 불태워져 아무렇게나 방치되었다. 사망 당시 알렉산드라는 향년 46세였다.

3.8. 둘째 언니 옐리자베타 대공비의 죽음

한편 알렉산드라 표도로브나 황후가 살해된 후, 러시아 제국에 시집와 살고 있던 둘째 언니 옐리자베타 대공비도 다음 날인 7월 18일에 향년 53세의 나이로 살해되었다.

여동생처럼 사랑으로 결혼했지만, 정작 옐리자베타 대공비의 결혼생활은 행복하지 못했다. 남편 세르게이 대공과의 사이도 그닥 그랬고, (아마도 세르게이 때문에) 자녀도 가질 수 없어서 세르게이 대공의 조카들인 마리야 파블로브나드미트리 파블로비치를 양자로 데려와 길렀다. 옐리자베타 대공비는 아이들을 사랑하긴 했지만 조카 마리야와는 그다지 사이가 좋지 않았고, 남편 세르게이 대공은 시류를 무시한 정치 꼴통 행각에 앞장서다가 폭탄 테러로 살해당하고 시신마저 산산조각 나버리는 비극까지 겪었다.

이후 아이들이 모두 독립하자 옐리자베타 대공비는 자신의 집을 수녀원으로 개조하여 수녀원장이 되었고, 자선과 봉사에 전념하는 수도생활을 하며 살았다. 러시아 혁명으로 귀족들이 피난을 가는 와중에도 그녀는 끝까지 자기 의무에 충실했으나, 그저 황족이라는 이유로 여동생 일가와 마찬가지로 잔혹하게 살해되고 말았다.

3.9. 죽음 이후

이때 니콜라이 2세와 알렉산드라 황후의 막내딸인 아나스타시야 니콜라예브나 여대공이 죽지 않고 몰래 빠져나가 살아남았다는 이야기가 끊임없이 나왔다. 살아남은 아나스타샤 공주에 관한 이야기가 영화애니메이션으로도 많이 만들어졌고, 심지어 자신이 아나스타시야 공주라고 주장한 여성도 있었다. 또한 외동아들 알렉세이 니콜라예비치 황태자 역시 살아남았다는 가설이 제기되었고, 마찬가지로 자신이 알렉세이 황태자라고 주장한 남성도 있었다.

그러나 1991년 니콜라이 2세 일가의 시신이 모두 발굴되고, 유전자 검사가 이루어졌다. 이때 시신들의 신원 확인을 위한 DNA 검사 샘플로 유전자를 제출한 사람이 바로 필립 마운트배튼이다. 모계 유전으로 전달되는 미토콘드리아 특성상, 당시 살아있는 알렉산드라 황후의 여계 친척 중 혈통상으로 가장 가까운 사람이 알렉산드라의 큰언니 밀포든 헤이븐 후작부인 빅토리아의 외손자가 필립이었기 때문이다.

검사 결과 그 시신들이 전부 니콜라이 2세과 그 처자식들이 맞다는 게 밝혀지면서, 생존설 및 사칭은 모두 거짓임이 밝혀졌다. 이후 2001년 알렉산드라 표도로브나 황후는 남편 니콜라이 2세 및 5남매와 함께 정교회성인으로 시성되었다.

4. 여담

큰언니 헤센의 빅토리아 공녀가 알릭스에게 자신의 큰딸 바텐베르크의 앨리스 공녀의 결혼 문제에 대해 상의하는 편지를 보낸 적이 있다.

앨리스 공녀는 그리스 왕국 요르요스 1세의 4남 안드레아스 왕자와 혼인하기를 원했는데 앨리스의 신분은 귀천상혼한 가문의 방계 공녀로 결코 낮은 신분은 아니지만, 통치 가문인 왕실에 시집가기는 어려운 신분[23]이었기에 어머니 빅토리아는 많은 걱정을 했었다. 당시 큰언니의 편지를 받은 알릭스는 “아마 그 애도 우리처럼 행복할 거예요. 그럼 더 바랄 것이 없잖아요.”라는 답장을 보내며 조카의 결혼을 응원해 주었다.

하지만 앨리스가 시집간 그리스 왕실은 알릭스의 시가인 로마노프 황실처럼 몰락하였고, 앨리스는 가족들과도 뿔뿔이 흩어져 정신병원에 들어가는 불행한 말년을 보내게 된다. 물론 그리스의 글뤽스부르크 왕조는 러시아의 로마노프 왕조처럼 왕족들이 학살당하지는 않았다. 게다가 앨리스도 신경쇠약을 앓긴 했어도 제2차 세계 대전 때 그리스에 남아 유대인들을 돕고 구호물자를 지원하는 등 왕족으로서 책임을 다했으며, 이후 막내 외아들인 필립영국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의 부군이 된 덕에 편안한 말년을 보내다가 생을 마감했다.

4.1. 품성 논란

비슷하게 자기 나라의 백성들에게 살해당했지만 현대에서 여러모로 재평가를 받는 프랑스 왕비 마리 앙투아네트와 달리, 알릭스는 주변 인물들을 통해 "매우 고집스러웠으며 도덕적인 면에서도 유연하지 못한 성격이었다" 라는 게 일관된 평가다. 황후로서나, 개인적으로서나, 알릭스에 대한 평가는 당시에도 지금도 좋지 못하다.

알릭스는 어린 나이에 어머니와 형제들을 잃은 것을 제외하면, 빼어난 미모와 대공국공녀라는 신분으로 나름 남부럽지 않게 살았다. 게다가 성인이 되고 정략결혼이 아닌 연애결혼을 해서 남편 니콜라이 2세와의 금슬도 매우 좋았고 시집간 로마노프 왕조는 유럽 왕실들 중 제일 부유한 왕조[24]였다. 연애결혼을 한 남편 니콜라이도 당대에 그 흔한 정부도 안 만들고 알릭스와 아이들만 바라보며 충실하는 가정적인 남자였다.

한마디로 동시대를 살아간 여성들과 비교하면 평탄하고 안온한 인생을 보냈던 것이다.[25] 하지만 자기 마음대로 너무나 잘 풀리는 인생을 살아서인지 아니면 부유해서 고생을 해보지 않아서인지는 몰라도 굉장히 이기적이었고 현실을 바로 내다보는 눈과 책임감과 개념과 상식이 너무나도 없었다.

황후로서의 부적절한 행보는 전술한 행적에서 잘 드러났고 가정에서도 특유의 이기적이고 무책임한 성정은 여전했다. 슬하의 자녀들도 자신처럼 연애결혼하기를 원했는지 그 살 떨리던 불안정한 시기에 혼기가 찬 딸들을 하루라도 빨리 시집보낼 생각은 하지 않고 가족들과 함께 유유자적한 나날들을 보내고 있었다. 당장 결혼 적령기에 있던 공주들이 좀처럼 시집가지 않고 있었던 이유도 당시 적령기 남성들이 전쟁으로 나간 것도 있지만 무엇보다 부유하고 화목한 가정이 있는 모국을 정략결혼으로 떠날 이유가 없었기 때문이다.[26] 게다가 알릭스는 자신의 딸들인 황녀들이 문란한 러시아 사교계를 접해선 안된다는 이유로 고립된 환경 속에서 자라나게 했고, 결국 황녀들은 자신의 공식 칭호(=황녀 전하)도 낯설어 하고 측근들이 애기들처럼 논다고 걱정할 정도로 철부지로 자라나고 만다.[27]

결정적으로 병약한 아들을 위한답시고 그리고리 라스푸틴을 중용하는 바람에, 남편이 다스리던 러시아 제국은 물론 남편과 자녀들을 파멸로 몰고 갔다. 다른 사람도 아닌 평민 출신의 사이비종교인이 황후의 뒷배만 믿고 지나치게 국정에 간섭하고 이로 인해 나라 꼴이 엉망이 되자 러시아 귀족들은 물론 황족들까지 일제히 반발했다. 시어머니 마리야 표도로브나, 친언니 옐리자베타 대공비, 시누이 올가, 그외 기타 황족 일가가 모두 입을 모아 "라스푸틴을 멀리하라"라고 조언했지만 알릭스는 그런 친인척들의 조언조차 일절 듣지 않았다. 특유의 고집과 이상한 데서 굳은 의지로 라스푸틴을 편들고 남편을 부추기는 이런 행동은 결국 러시아 제국 멸망의 기폭제 중 하나가 되고 만다.[28]

더구나 자신과 가족들이 살수 있던 마지막 희망인 영국으로의 망명마저 알릭스의 혈통이 독일계인 탓에, 반독감정로 가득한 영국 내부의 사정[29]과 황후 시절의 실책으로 전부 무산되고 만다. 정리하자면 알릭스는 황후답지 못한 처신으로 백성들의 미움을 샀고, 결국 러시아인들이 우려하던 대로 적절치 못한 처신으로 러시아 제국을 멸망으로 몰고 갔고 알릭스는 러시아 제국을 멸망으로 몰고 간 대가로 가족들과 함께 비참하게 총살당하는 최후를 맞았다.

하지만 개인적으로는 장점도 많았다. 내성적이고 곱게 자란 공주님이라 고생도 해보지 않고 현실을 몰라 처세가 부족했지만 성격 자체는 선량하고 자선에 열중했다. 그러나 자유롭던 친정(헤센 대공국)이나 제약이 덜한 외가(영국)에서 자란 탓인지 엄한 예법과 믿기 힘든 사치에 옷차림부터 문란하다고 외치는 것 같은 러시아 궁정에 시집온 뒤로는 러시아식 대륙의 기상에 적응하기 어려워했다. 이런 성향 때문에 알릭스는 러시아 귀족들 앞에서 긴장하여 서툴게 대응하고 말수도 적어서 사람들은 그녀에 대해 '거만하다'거나 '싫은 곳에 억지로 끌려나와 우리를 싫어한다'는 인상만 받았다.

귀족들과는 어울리지 않아서 인심을 잃었고 그리고리 라스푸틴 때문에 국민들에게마저 이미지가 있는 대로 추락했지만, 실제로는 누구에게나 함부로 대하지 않았고 혁명 후 굴욕의 연속일 때도 자신들을 괴롭히는 경비병들을 잘 대해줬다. 이는 남편 니콜라이 2세도 똑같았다. 황제 구출 움직임의 본격화 전까지는 그들도 (니콜라이 2세는 호구로 봤지만) 황제 일가에게 박하지 않았고 어느 정도 친해지기도 했다.

아들을 애지중지 아꼈지만 그렇다고 딸들을 차별하지도 않아서 5남매 모두 우애가 좋았고, 차르 부부는 아이들이 도덕과 자선에 힘쓰도록 잘 가르쳤다. 또한 알릭스는 신비주의에 심취했는데 넷째를 임신했을 때 (득남을 위해) 수상한 주술사 등에 의지하다가 또 딸 아나스타시야를 낳았을 때도 그 신비주의 덕을 봤는지 상심하지 않고 해탈한 상태였다고.

거의 파탄난 나라를 물려받고 삽질만 하다 혁명기에 골로 간 프랑스 국왕 루이 16세를 선배(?)로 모시게 된 남편처럼, 그녀도 마리 앙투아네트와 일생에서 겹치는 부분이 많은 후배 격이다. 실제로 알릭스의 거처에 제일 눈에 띄게 걸어놓은 초상화는 바로 마리 앙투아네트였다고 한다. 나름 가족사적 인연도 있는 것이, 알릭스의 고조모였던 헤센 대공비 루이제는 마리 앙투아네트가 프랑스로 시집갈 때 수행단의 일원이었고, 마리 앙투아네트가 죽기 직전까지 서로 편지를 주고 받았을 만큼 평생 가깝게 지냈던 사이였다.

5. 가족관계

5.1. 조상

본인 부모 조부모 증조부모
헤센 대공국의 알릭스 대공녀
(Princess Alix of Hesse and by Rhine)
<colbgcolor=#fff3e4,#331c00> 헤센 대공국 대공 루트비히 4세
(Louis IV, Grand Duke of Hesse and by Rhine)
<colbgcolor=#ffffe4,#323300> 헤센 대공국의 카를 공자
(Prince Charles of Hesse and by Rhine)
헤센 대공국 대공 루트비히 2세
(Louis II, Grand Duke of Hesse and by Rhine)
바덴의 빌헬미네 공녀
(Princess Wilhelmine of Baden)
프로이센의 엘리자베트 공주
(Princess Elisabeth of Prussia)
프로이센의 빌헬름 왕자[30]
(Prince Wilhelm of Prussia)
헤센홈부르크의 마리아 안나 여방백
(Landgravine Maria Anna of Hesse-Homburg)
영국의 앨리스 공주
(Princess Alice
of the United Kingdom)
작센코부르크고타의 알베르트 공자
(Prince Albert of Saxe-Coburg and Gotha)
작센코부르크고타 공작 에른스트 1세
(Ernest I, Duke of Saxe-Coburg and Gotha)
작센고타알텐부르크의 루이제 공녀
(Princess Louise of Saxe-Gotha-Altenburg)
빅토리아 여왕
(Victoria)
켄트와 스트래선 공작 에드워드 왕자[31]
(Prince Edward,
Duke of Kent and Strathearn)
작센코부르크잘펠트의 빅토리아 공녀
(Princess Victoria of Saxe-Coburg-Saalfeld)

5.2. 자녀

자녀 이름 출생 사망
1녀 올가 니콜라예브나 여대공
(Grand Duchess Olga Nikolaevna)
1895년 11월 15일 1918년 7월 17일
2녀 타티야나 니콜라예브나 여대공
(Grand Duchess Tatiana Nikolaevna)
1897년 6월 10일 1918년 7월 17일
3녀 마리야 니콜라예브나 여대공
(Grand Duchess Maria Nikolaevna)
1899년 6월 26일 1918년 7월 17일
4녀 아나스타시야 니콜라예브나 여대공
(Grand Duchess Anastasia Nikolaevna)
1901년 6월 18일 1918년 7월 17일
1남 알렉세이 니콜라예비치 황태자
(Tsarevich Alexei Nikolaevich)
1904년 8월 12일 1918년 7월 17일


[1] 당시는 소련 성립 이전이었으며, 소비에트 러시아가 러시아 사회주의 연방 소비에트 공화국으로 국호를 바꾸기도 전이었다.[2] 우랄 혁명 분관과 반종교 혁명 박물관으로 사용되다가 1946년 교육센터로 용도가 변경, 후에 니콜라이 2세 탄생 110주년, 처형 60주년이던 1978년에 다가올 외신의 관심을 우려한 유리 안드로포프의 의견으로 1977년 9월 철거됐다.[3] 생전 독일인들이 자신의 이름인 앨리스를 알리체라고 부른다고 불만을 표했었다.[4] 시어머니 덴마크의 다우마 공주의 친언니이자 외삼촌 에드워드 7세의 부인이 알렉산드라 왕비다.[5] 이미 전염병이 발생하기 전인 1873년에 알릭스의 바로 위의 오빠인 프리드리히는 외할머니 빅토리아 여왕으로부터 물려받은 혈우병 때문에 부상으로 인한 출혈이 멈추지 않아서 3살에 요절하고 말았다.[6] 영국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의 남편인 필립 마운트배튼 공의 외할머니이다.(빅토리아의 장녀인 바텐베르크의 앨리스 공녀의 막내아들)[7] 본래 알릭스는 예카테리나를 선택하려고 했지만, 니콜라이의 제안으로 알렉산드라로 결정했다.[8] 공교롭게도 이때는 니콜라이 황태자의 어머니 덴마크의 다우마 공주의 생일이기도 했다.[9] 타티아나의 경우에는 '타티아나 니콜라예브나(= 니콜라이 2세의 딸 타티아나)' 로 불렸다고 한다[10] 결국 이를 보다못한 할머니 마리야 표도로브나 황태후와 고모할머니 작센코부르크고타 공작부인 마리아는, 사교계에 데뷔할 나이가 된 첫째 올가 공주와 둘째 타티야나 공주를 사교계에 적응시키려고 가장무도회에 끌고 갔다. 그러나 오랫동안 사교계와 먼 생활을 해왔던 자매는 아는 사람도 소개해줄 사람도 없어서, 또래 귀족들과 어울리지 못하고 어색하게 구경만 했다. 이 모습을 보고 작센코부르크고타 공작부인은 충격을 받아 "이건 황후가 딸들을 너무 싸고돌아 키운 탓" 라고 비판하는 편지를 쓰기도 했다.[11] 특히 올가는 니콜라이 2세의 형제들 중에서 대외관계가 막장이었던 차르 부부와 사이가 좋았던 몇 안 되는 사람들 중 하나였고, 조카들인 공주들도 잘 돌보아 주었다.[12] 정확하게는 정식으로 결혼한 남성 계승자가 1명도 없을 때에만 여성의 황위 승계가 가능했다.[13] 둘째 타티야나 니콜라예브나 여대공출산한 직후, 클로로포름 마취에서 깨어난 알렉산드라 황후가 가장 먼저 마주한 것은 황태자가 태어나지 않은 것에 상심하여 심란한 표정을 짓고 있던 사람들의 얼굴이었다. 그러나 황후는 이후 두 공주를 더 낳을 때까지, 이런 불안감이 넘치는 얼굴들을 계속 마주해야 했었다.[14] 외가인 영국 왕실과 마찬가지로 아들이 없으면 맏딸인 올가 니콜라예브나 여대공이 황위를 이을 수 있다고 생각했지만 아들만이 대를 이을 수 있다는 사실을 알고는 크게 당황했다는 이야기도 있는데, 전혀 근거가 없는 낭설이다. 해외의 어떤 포럼에도 이와 같은 내용이 알려져 있지 않은데다, 알렉산드라 황후는 살리카법이 강하게 적용되었던 독일계 공국 출신이었기에 남성만 계승권을 갖는다는 이야기를 미처 못 들어봤을 리가 없다. 또한 알렉산드라 황후의 시녀였던 안나 비루보바의 회고록에 따르면, 황후는 정치에 관심이 없고 신문을 전혀 읽지 않았던 언니들을 이해하지 못했을 정도로 자주 읽었기에, 세상 일에 그 정도로 무심하지 않았다.[15] 이는 지금도 마찬가지다. 응고 인자를 투여해 증상을 완화할 수는 있지만, 완전히 고칠 수는 없다.[16] 실제로 황녀들의 가정교사를 라스푸틴이 성추행하는 일이 벌어졌는데 알렉산드라 황후는 라스푸틴을 엄벌에 처하긴 커녕 성추행을 당한 가정교사를 해고하는 짓을 벌였다. 당시 황족 자녀들의 교육을 맡은 가정교사들은 못해도 고위 귀족인데 그런 귀족이 일개 평민 수도사에게 성추행 당한 걸 황후가 두둔했으니 귀족들의 반감이 엄청났다.[17] 정작 기록에 따르면, 황후가 라스푸틴과 불륜을 저질렀다는 증거는 없었다. 게다가 서로 마음에도 없는 정략결혼을 했다면 모를까 니콜라이 2세 부부는 당대 황족들과는 달리 몇 안 되는 연애결혼을 했고 금슬도 좋았기 때문에 불륜 같은 간 큰 짓을 실행했을 가능성은 더더욱 없다.[18] 참고로 "장녀 올가 니콜라예브나 여대공이 황후에게 '라스푸틴을 멀리하라'고 조언했다"는 루머가 있으나, 오히려 라스푸틴은 공주들과 친분이 있어서 공주들이 잠옷 바람으로 있는 방에 드나들 정도였고, 공주들도 그를 '남동생의 병을 고쳐준 착한 할아버지' 정도로 생각해서 싫어하지 않았다.( Massie, Robert K. (1967). Nicholas and Alexandra. New York: Dell Publishing Co. ISBN 0-440-16358-7 pp. 199–200.)[19] 아마 라스푸틴은 (알렉세이 황태자에게 그랬듯) 공주들에게도 일종의 상담을 통한 멘탈 케어를 해준 듯하다. 4명의 공주들이 혈우병 환자라는 기록(혈우병 환자는 대부분 남성이며, 여성은 드물다.)은 없지만, 막내딸 아나스타시야 니콜라예브나 여대공은 발가락 염증과 기관지염을 앓고 있었다. 게다가 부모님이 주변 사람들과 사이가 나쁘고, 귀족들과 국민들로부터 신망을 잃고, 막내 남동생의 병으로 걱정하는 등의 모습을 보며, 공주들도 마음이 불안했을 것이다.[20] 니콜라이 2세의 여동생 크세니야 알렉산드로브나 여대공의 장녀인 이리나의 남편이다.[21] 드미트리 대공은 프랑스에서 코코 샤넬과 친분 관계를 맺게 된다. 샤넬의 향수 대표작인 No.5를 제작한 조향사 에르네스트 보를 소개해준 것도 드미트리 대공이었다.[22] 러시아 제국은 1283년 모스크바 대공국부터 왕조 단절 없이 이어졌기에 같은 국가로 본다. 따라서 군주국 러시아의 총 역사는 634년으로도 볼수 있다.[23] 과거 유럽 왕족은 신분이 같은 왕족이나 공족끼리만 혼인했기 때문이다. 알릭스의 이종사촌이자 앨리스 공녀의 친사촌인 바텐베르크의 빅토리아 유지니 공녀알폰소 13세와 결혼할 때 시어머니인 오스트리아의 마리아 크리스티나가 '귀천상혼으로 생긴 한미한 가문 출신'이라는 이유로 반대했다.[24] 큰언니 빅토리아를 제외한 알릭스의 언니들도 일국의 왕족과 결혼했지만, 알릭스가 물려받을 러시아 황실의 사치스러운 보석 컬렉션을 부러워했다. 또한 러시아 혁명 이후 황제 일가가 떠난 텅 빈 겨울궁전을 점령한 혁명군도 그 자리에서 궁전의 사치스러움과 화려함을 보고 얼이 빠졌을 정도였다.[25] 다른 황족이나 귀족 가문의 딸들도 부유한 환경에서 편하게 자랐을지는 몰라도, 결혼만큼은 본인의 뜻대로 못하는 경우가 대다수였다. 특히나 20세기 초반까지 존재했던 귀천상혼의 영향으로 정략결혼이 일상화된 일국의 공주는 말할 것도 없다.[26] 심지어 장녀 올가에게 들어왔던 혼담 중 하나는 당시 영국의 왕세자였던 에드워드 8세와의 혼담으로, 알렉산드라 황후의 외가인 영국의 왕세자비 자리였다. 물론 올가가 시집을 가지 않은 이유는 병약한 남동생이 요절할 가능성을 생각하면 올가가 차기 왕위 계승자가 될 가능성도 있었기에 거절한 이유도 있었다.[27] 타티아나는 공식적인 자리에도 나가지 않고 늘 황실에 틀어박혀서 '타티아나 니콜라예브나(= 니콜라이의 딸 타티아나)' 라는 애칭으로 불리다가, 어느 날 공식적인 자리에서 갑자기 친한 귀족 시녀가 '황녀 전하' 라고 예를 갖춰 부르자 기겁해서 '갑자기 무슨 소리를 하는거냐' 라고 말하는 웃픈 상황도 있었다고 한다(...). 즉 타티아나는 황녀임에도 정식 호칭으로 불린 적이 없어서 갑자기 정식 호칭(= 황녀 전하) 라고 부르자 낯설어하며 놀란 것이다(...)[28] 다만 알릭스가 기폭제가 될 병크를 어마무시하게 터뜨린 것뿐이지 러시아 제국은 강력한 전제정과 반동 정치, 그리고 계속된 자유주의적 개혁의 실패로 이미 곪을대로 곪아있었다.[29] 당시 영국 왕실이 성씨를 윈저로 개명할 정도로 영국 내 반독 감정이 컸던 것도 있지만 피의 일요일 사건 등 폭군으로 낙인찍힌 니콜라이 2세의 시선도 컸다. 만일 첫째 올가 공주를 진즉 영국으로 시집보내 놓았더라면 그나마 망명이 가능했을지도 모른다.[30] 프리드리히 빌헬름 2세의 4남이다.[31] 조지 3세의 4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