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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나 윈투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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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나 윈투어
Dame Anna Wintour
CH, DBE
파일:anna-wintour-1110x1388.jpg
미국 Vogue 제7대 편집장
국적
[[영국|]][[틀:국기|]][[틀:국기|]] |
[[미국|]][[틀:국기|]][[틀:국기|]]
출생 1949년 11월 3일 ([age(1949-11-03)]세)
잉글랜드 런던 캠던 햄스테드
소속 Vogue US (1988~), 콘데 나스트
학력 North London Collegiate School
연봉 $2,000,000 (2005년)
경력 Harrods 인턴쉽 (1964)
Oz (1964)
Harper's & Queen 편집 보조 (1970~1975)
Harper's Bazaar 편집자 (1975)
Viva 편집자 (1975~1978)
New York 편집자 (1981~1983)
Vogue US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1983~1985)
Vogue UK 편집장 (1985~1987)
Vogue US 편집장 (1988~)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이사 (1995~)
Condé Nast CCO (2013~)
가족 1남 1녀 [1]
서명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Anna_Wintour_signature.png
1. 개요2. 행적3. 영향력4. 성격5. 매체6.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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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파일:external/67.media.tumblr.com/tumblr_ktlb5x25v21qa95dto1_1280.jpg
개인의 취향을 믿고 발전시키세요. 의견을 전달하는 데에 있어서 중요한 일입니다.

― 2015년, 옥스포드 대학교 연설 中

패션계의 교황으로 알려진 미국 유명 잡지 보그의 편집장이다.

영국에서 태어나 잡지 편집국장인 아버지 밑에서 성장했고, 런던의 상류층 학교인 퀸스 칼리지에 입학했다. 10대 시절부터 옷에 관심이 많아서 고졸 학력을 가지고 여러 잡지사에서 근무했다. 결국에 본인이 그토록 원하던 보그에 취직하고 편집장까지 올라갔다. 2013년에 승진하여 미국 보그를 소유하고 있는 콘데 나스트의 예술 부장(art director)으로도 일하고 있다.

영화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에 등장하는 깐깐한 상사 미란다 프리슬리의 모티브로도 유명하다. 특유의 뱅헤어를 수십 년째 유지하며 워낙 오래된 헤어라 거의 패션 아이콘의 경지에 이르렀고 안나 윈투어를 컨셉으로 한 패션 화보에서도 그대로 재현되었다.

2. 행적

안나는 타고난 추진력을 바탕으로 15세 때 학교를 그만두고 영국 간판 백화점인 Harrods에서 인턴으로 경력을 쌓았다. 당시 기자로 활동하던 남자 친구의 도움을 받아 Oz라는 잡지사에 취직하여 출판사의 대소사를 배우게 된다. 6년 뒤 이때의 경력을 이용해 영국판 Harper's 잡지에 편집 보조로 취직한다. 이곳에서 안나는 당대 최고의 패션 리더들을 만났고, 후에 패션과 잡지사에 지대한 영향을 끼칠 인물들과 교류하게 된다. 지인의 말에 따르면 안나는 이미 이때부터 미국 보그의 편집장을 목표로 삼고 있었다고 한다.

5년 뒤, 안나는 동료와의 마찰로 인해 뉴욕으로 떠나고 미국판 Harper's에 편집자로 취직했지만 곧 상사와의 마찰 때문에 짤린다. 하지만 상심하지 않고 Viva라는 패션 잡지로 바로 이적한다. 그러나 Viva는 3년 뒤 저조한 매출로 문을 닫았고, 안나는 잠시 일에서 손을 뗀다. Viva가 폐간되자 <Savvy>에 취직해 수준 높은 지면들을 완성했다. 그 후, 1981년에 뉴욕지의 패션부 편집장으로 취직했는데, 당시 뉴욕지 편집장은 안나의 재능을 높이 사서 안나가 회사 규칙을 어겨도 눈감아줬다고 한다.

1983년, 안나 윈투어는 마침내 미국 보그사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로 발탁이 되지만, 당시 보그 편집장 그레이스 미라벨라Grace Mirabella와의 마찰로 인해 영국으로 건너갔고, 보그 UK의 편집장이 된다. (안나는 미국 보그 면접 당시 편집장인 그레이스 앞에서 편집장이 되리라는 야망을 내비쳤다고 한다.) 이때 당시 안나의 영향으로 영국판 고유의 분위기가 사라지고 미국판처럼 변했다는 평가가 많다. 그후 1988년, 미국 보그에서 그레이스의 뒤를 이을 새로운 편집장으로 안나 윈투어가 임명됐다.

본인의 꿈이었던 보그 US 편집장이 됐지만, 안나는 안심할 수 없었다. 프랑스 패션 전문지인 ELLE에서 미국판을 출판하기 시작했고, 안나의 전임자였던 그레이스 미라벨라도 언론왕이라 불리는 루퍼트 머독의 도움을 받아 "미라벨라"라는 패션 잡지를 내놓았으며, 안나 본인이 과거에 일했던 Harper's Bazaar에서 보그를 압박하고 있었다. 설상가상으로 안나는 같은 회사에서 일하는 베니티 페어 편집장과도 경쟁했다. 이런 위기를 갈파하기 위해서라도 안나는 화려하게 데뷔할 필요가 있었고, 그러기 위해서는 빨리 움직여야 했다.

편집장으로 부임한 첫날, 안나는 기존에 일하던 스태프들을 정리하고 본인과 뜻이 맞는 스태프를 새로 고용했다. 경쟁사인 엘르의 에디터를 스카웃하기도 했다. 또한 이미 촬영했던 사진들도 모두 폐기처분하고 표지도 처음부터 다시 시작했는데, 전임자였던 그레이스와 다르게 유명한 모델을 사용하지 않고,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아마추어를 데려다 찍었다. 무엇보다 명품으로 도배하기보다는, 명품과 빈티지를 자연스럽게 섞어서 좀 더 많은 대중들에게 접근했다.

첫 작업이었던 1988년 11월호 보그 표지에는 이스라엘 모델인 미카엘라 베르쿠에게 1만 달러짜리의 값비싼 티셔츠에 50달러짜리인 청바지를 입혀 엄청난 변화를 가져왔다. 당시 보그의 표지에 청바지가 등장한 것은 전례가 없는 일이었다고 한다. 당시로써는 매우 획기적인 변화였기 때문에, 인쇄자가 여러 차례 전화해서 "이게 정말 이번 달 표지인가요?"라고 물었다고 한다. 또한 이전에 선호했던 고급스러운 이미지의 모델이 아닌 대중적인 모델들과 인기 있는 셀럽들을 표지에 올리기도 했다.

다행히도 독자들은 안나가 가져다준 변화를 받아들였고, 수많은 패션 전문가들도 안나의 노력을 높이 평가했다. 또한 톰 포드, 존 갈리아노, 마크 제이콥스와 같은 재능 있는 신인 디자이너들을 지원해 탑급 디자이너로 만들었다. 다양한 문화를 표현하기 위해 영국에서 온 스텔라 매카트니, 중국계 미국인 베라 왕과 같은 디자이너들을 지원하기도 했다.

그러나 2008년부터 안나 윈투어를 향한 비판이 늘고 있다. 패션 잡지인데도 불구하고 패션에 대한 내용은 적고 광고가 너무 많다는 것. 무엇보다 표지 모델도 단순해져서 점점 전임자였던 그레이스의 전철을 밟고 있다는 지적이 있다. 독자들 사이에서도 연예인 좀 그만 쓰고 전문 모델을 사용해 달라는 요청이 늘고 있다.

3. 영향력

패션계의 교황이라 불러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독보적이다. 말 한마디에 4대 패션위크(뉴욕, 런던, 밀라노, 파리)의 순서가 바뀌었으며, 이 사람이 현장에 도착하지 않는 이상 중요 패션쇼는 절대 시작조차 하지 않는다고 한다. 실제로 2011년에 안나가 아카데미 시상식에 참석하기 위해서 일부 패션위크에 참석할 수 없을 거라고 통보하자, 패션 업계에서 일정을 수정해 안나가 패션위크에 참석하게끔 조정했다. 이 영향력은 단지 패션계에만 머무르지 않는다. 인맥은 버락 오바마, 미셸 오바마, 힐러리 클린턴, 뉴욕시장 등의 정치적 대형거물에서부터 시에나 밀러, 사라 제시카 파커, 휴 잭맨, 니콜 키드먼, 케이트 블란쳇 등의 할리우드 배우 등등 모든 분야의 거물들과 연결되어 있다.

안나 윈투어의 영향력이 막강한 이유는 가세가 기울어 가던 미국 보그지를 살렸기 때문이다. 정확히 말하자면 안나가 오기 전에도 미국 보그는 잘 팔리고 있었다. 문제는 안나의 전임자였던 그레이스가 패션보다는 라이프 스타일에 초점을 맞추면서 패션계의 성경이라는 보그의 명성이 급속도로 추락하고 있었고, ELLE 미국판이 유입되면서 보그의 독보적인 위상이 위태로워지고 있었던 것이다.[2] 결국, 편집장으로 부임한 안나는 재빠르게 그레이스가 추진하던 계획을 모두 폐기하고 본인의 입맛에 맞게 잡지를 수정했다. 다행히 독자들은 이러한 변화를 받아들였고, 다수의 패션 전문가들도 안나의 첫 번째 보그 이슈를 입이 마르도록 칭찬했다. 이에 힘입은 안나 윈투어는 당시 유명한 디자이너들과 마찰을 일으켜서라도 본인의 취향에 맞게 패션을 주도하려고 했고, 본인과 뜻이 비슷한 디자이너를 지지해주기 시작했다. 당연히 안나의 이런 행동은 당시 이름을 날리던 디자이너들 사이에서 비판을 받았고, 이브 생 로랑은 안나가 본인의 런웨이에 참석하지 못하도록 지시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안나 윈투어의 결정은 옳았고, 안나의 도움을 받은 차세대 디자이너들이 명성을 얻자, 패션계에서 안나의 위상도 같이 높아졌다. 물론 세간에 알려진 것처럼 안나의 영향력이 절대적인 건 아니지만, 완전히 허무맹랑한 소리도 아니며 보그의 편집장이 되면서 하루아침에 생긴 것도 아니다.

2011년 인종차별 발언or 패드립을 한 크리스챤 디올 전 수석 디자이너 존 갈리아노의 업계 복귀에 결정적인 도움을 주기도 했다. 존 갈리아노는 카페 테이블에 앉아있는 이탈리아 여성들을 모욕하며 "나는 히틀러를 사랑한다"고 선언하고, "너 같은 사람들은 죽어야만 해. 너희 어머니들, 너희 조상들은 모두 빌어먹을 가스에 중독이 될 거야."라는 망언을 하여 패션업계에서 사실상 퇴출되었는데, 갈리아노는 안나 윈투어의 요청[3]으로 '오스카 드 라 렌타'의 2013년 2월 뉴욕패션위크 기간 동안 가을 기성복 컬렉션을 준비하기 위해 '오스카 드 라 렌타'의 디자인 스튜디오에서 잠시 동안 일을 도우라는 초대를 수락했다.

갈리아노는 '오스카 드 라 렌타' 쇼의 백스테이지에 머물러 있었는데 이 때문에 오스카 드 라 렌타의 후계자로서 갈리아노가 될 가능성이 있고, 파슨스 디자인 스쿨의 교직을 맡을 수도 있다는 등, 그의 미래에 대한 긍정적인 추측이 오가고 있었다. 이후 2013년 6월 12일 존 갈리아노가 크리스챤 디올에서 해임된 이후 첫 인터뷰가 미국 텔레비전을 통해 방송되었다. 그는 "나는 창조할 수 있다. 나는 창조할 준비가 되어있다. 속죄를 통해 나에게 두 번째 기회가 주어지길 바란다."라며 패션계로의 복귀를 원하는 듯한 발언을 표현했었다.

2014년 10월 6일, 이탈리아의 패션 그룹 OTB는 존 갈리아노가 메종 마르지엘라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를 맡는다고 발표하며 갈리아노의 복귀를 선언했다.

4. 성격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의 영향으로 대중들에게 차갑다고 알려져 있지만 다수의 패션 디자이너의 말에 의하면 차갑지는 않다고 한다. 그들의 증언에 따르면 런웨이가 시작하기 전에 항상 무대 뒤로 가서 디자이너한테 격려의 말을 전하고, 디자이너들이 곤경에 처하면 물심양면으로 도움을 준다고 한다. 단지 안나 윈투어 본인이 추진력이 워낙에 강하고 행동이 빨라서 같이 일하는 직원들한테도 본인과 똑같은 역량을 기대한다. 덕분에 평소에 잡담을 삼가고 본인의 의사를 명확하게 전달한다. 그렇다고 본인의 의견을 막무가내로 밀지는 않아서, 각 부서 직원들의 조언을 주의 깊게 듣고, 본인의 결정이 틀렸다고 생각하면 곧바로 수정한다. 특히,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로 일하고 있는 그레이스 코딩턴(Grace Coddington)의 능력은 평소에도 높게 평가해서 안나가 추진하는 계획은 대부분 허락하는 편이다.

다만 외모지상주의 성향이 강해서 직원들의 복장 규율을 정하고 비만을 싫어해 오프라 윈프리에게 보그의 표지 모델을 하고 싶다면 다이어트를 하라고 말했다고 한다. 패션업계 종사자 답게 호모포비아인종차별[4]로 문제가 된 적은 없지만 대신 선민사상이나 엘리트주의가 대단히 심한 것으로 비판받는다. 어느 정도냐면 그런지 패션을 끝장내버린 인물로 지목받을 정도. 디자이너들에게 그런지 요소를 빼지 않는다면 보그에 실어주지 않겠다고 직접적으로 이야기했을 정도다. 보그 역시 이런 취향이 반영되는 듯, 하이패션 잡지이기는 하지만 어느 시점부터는 아예 일반인의 삶과 완벽하게 유리되어 상류층의 생활만을 다루고 보여 준다는 비판에 직면해 있다.

5. 매체

6. 기타

올해 꼭 봐야 될 영화로 <기생충>을 강력 추천한다. <기생충>은 현재 시상식을 휩쓸고 있는 가장 핫한 영화이며, 감탄이 절로 나오는 작품이다.
- 보그(VOGUE) 편집장 안나 윈투어
* 영화 기생충에 대해 호의적으로 평가한 적이 있다.


[1] 전남편인 13살 연상의 외과의사 데이브드 셰퍼와의 자녀. 남편과는 1999년 안나 윈투어의 불륜 사건으로 이혼.#[2] 콘데 나스트에서 그레이스를 해고시킨 것도 콘데 나스트에는 이미 여자 전문 잡지와 라이프 매거진이 수두룩했기 때문이다. 당시 콘데 나스트한테 필요했던 건 돈보다는 패션계에 본인들의 위치를 확고히 할 수 있는 명성이었다.[3] 요청이라고 써두었지만 사실상 도움의 손길에 가깝다. 반유대주의 발언 사건 이후 갈리아노는 패션계에서 영원히 퇴출될뻔했으니 말이다(...).[4] 다만 선술했듯이 인종차별 발언 등을 한 존 갈리아노의 업계 복귀에 도움을 줬으며, 2021년 카멀라 해리스 사진의 화이트워싱 논란이 있다.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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