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1-03 17:35:53

애완동물/용어 논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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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용어 반려동물
2.1. 역사2.2. 용어 정의
3. 용어 논란
3.1. '반려동물'로 용어 변경을 주장하는 입장
3.1.1. 반려(伴侶)와 동물유기에 대해서3.1.2. 동물권/동물윤리철학과 연관하여3.1.3. 애완(愛玩)은 동물비하적인 의미가 있다3.1.4. 반려동물은 반려의 단어 정의에도 부합하는 개념이다3.1.5. 반려동물의 입양 및 정치적 올바름에 대하여
3.2. '반려동물' 용어 변경 주장을 비판하는 입장
3.2.1. 정말로 반려(伴侶)에 걸맞은 취급인가?3.2.2. 반려 호칭이 인간과 동물 사이의 권력관계를 은폐한다3.2.3. 동물의 자유의지 문제3.2.4. 한국의 상당수 동물 양육자들이 반려 개념을 수용하는 동기3.2.5. 애완(愛玩)에는 동물비하적인 의미가 없다3.2.6. 용어 중립성
4. 애완/반려 대신 사용할 만한 표현5. 관련 문서

1. 개요

본 문서는 애완동물과 반려동물이란 명칭을 둘러싼 논쟁을 다루고 있다.

2. 용어 반려동물

원래 반려라는 단어는 함께 하는 자신의 남은 반쪽을 의미하며, 사실상 부부가 상대방을 지칭할 때 사용한다. 그런데 애완동물 보유 세대의 급증과 동물단체들의 정치적 올바름 의제 선점이 맞물려 애완동물이란 명칭을 대체해야 한다는 캠페인이 등장하였고, 이 과정에서 한국에서 대안으로 선택한 용어가 바로 반려동물이다.

2.1. 역사

반려동물(伴侶動物, companion animal)[1]은 인간이 정서적으로 의지하고자 가까이 두고 기르는 동물을 말한다. 일반적으로 1983년 오스트리아의 'In The Human-Pet Relationship'에서 'companion animal'이라는 어휘가 처음으로 사용되었다라고 알려져 있으나, 사실은 근거가 없는 주장으로 구글에서 검색해 보면 1970년대 이미 광범위하게 comapnion animal이 쓰이고 있음을 알 수 있다.외국에서 말하는 companion animal은 친구동물이라는 의미이며, 개는 사람의 오래된 친구라는 의미로 오래전부터 사용해 온 단어였으며, 1983년 회의를 companion animal이라는 용어의 기원으로 주장이 실린 영어권 논문이 소개된 바는 없다. 이후 'pet'이라는 용어가 동물을 소유와 지배의 대상으로 여긴다는 주장이 제기되었으나, 이 주장도 곧바로 동물행동학자에 의해서 반박된 바가 있으며, 'companion animal'이 정치적 올바름을 호소하는 진영에서 가끔 사용하기는 하지만 외국에서는 여전히 'pet' 이라는 단어가 더 널리 사용된다.

정설에 가까운 것은 바로 프랑스어 'animal de compagnie'(아니말 드 콩파니)를 영어로 직역한 것이라 봐야 한다. 제2차 세계대전 이전까지 세계 공용어는 프랑스어였다는 점과 원래부터 프랑스어에 영어 'pet'과 같은 간결한 표현 자체가 없었다는 것이 그 근거이다. 상기한 동물보호론 진영의 주장은 그저 끼워맞추기에 불과하다.

이와 비슷하게 90년대 이후 대한민국 국내에서도 주로 동물단체를 중심으로 "애완동물의 '완(玩)'이 '완구(장난감)'처럼 '유희의 대상'이라는 뉘앙스를 가진다."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하지만 중국어를 아는 사람은 놀다는 단어에 완구처럼 장난감으로 생각한다는 의미가 없다고 주장한다. 뿐만 아니라 우리나라에서도 예를 들어 친구에게 놀자고 말할 때, 그것이 나는 너를 장난감으로 생각한다는 의미가 아니듯, 완에는 장난감이라는 의미가 없다. 2000년대 이후에는 용어 '반려동물'이 새로이 표준국어대사전에 등록되고 법령에서 공식적으로 사용하였으며, 일상적으로도 사용 빈도가 늘어나면서 언론 역시 '반려동물'이라는 표현을 사용하기 시작하였다.

반려동물이라는 단어의 유래를 알 수는 없지만, 아마도 일본에서 만들어진 '한료도부쓰'(伴侶動物)를 중역한 것이란 주장이 있다. 특히 아시아권에서 companion animal을 반려동물로 번역한 것은 한국과 일본밖에 없으며, 일본이 동물복지가 우리나라보다 먼저 발달했고, 일본은 이미 1980년대 말부터 반려동물이라는 단어를 사용했다는 점에서 이 용어는 일본에서 유래한 것으로 보인다.[2] 다만 일본에서도 '반려동물'이란 한자어가 정치적 논란을 불러일으키는지 혹은 단순히 언어적 간결성 때문인지 일상적인 구어에서는 영어 'pet'을 음차한 '펫토'(ペット)를 더 널리 사용한다. 일본어 위키피디아 표제어도 '펫토'이며 첫 설명부터 애완 목적으로 사육하는 동물이다."(愛玩を目的として飼育される動物である)라고 씌여 있다. 한마디로 '반려동물' 명칭은 일본에서도 일반적인 표현이라 보기 어렵다.

현행 동물보호법상 '반려동물'로 인정되는 동물은 고양이와 개, 고양이, 토끼, 페렛, 기니 피그 및 햄스터에 국한되어 있다. 법적인 용어와 실제 반려동물의 의미는 다를 수가 있으므로 일상 생활에서 반려동물은 이를 넘어서 다양한 동물에게 사용할 수 있다.

2.2. 용어 정의

표준국어대사전은 반려동물을
사람이 정서적으로 의지하고자 가까이 두고 기르는 동물. 개, 고양이, 새, 거북이 따위가 있다.
애완동물을
좋아하여 가까이 두고 귀여워하며 기르는 동물. 개, 고양이, 새, 금붕어 따위가 있다.
농림축산식품부령으로 정하는 반려동물은
개, 고양이, 토끼, 페럿, 기니피그 및 햄스터를 말한다.
라고 정의하고 있다.

한편 국립국어원에서는 '반려를 짝이 되는 동무(어떤 일을 짝이 되어 함께 하는 사람)로 뜻풀이하고 있으므로 반려동물은 의미적 호응이 부자연스럽지만, 현실적으로 반려동물이 쓰인다는 점을 고려할 때 반려의 확장적 쓰임으로 판단됩니다.'라고 한다. 출처 참고로, 현행법에서도 "애완동물"이라는 표현과 "반려동물"이라는 표현이 혼용되고 있다.

3. 용어 논란

애완동물(pet)의 '완'자가 '완구류'할 때의 완(玩), 즉 동물을 희롱한다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기에 반려동물이라고 불러야 한다는 주장과 그에 대한 반론이 있다. 2010년대 후반 이후 '반려동물' 사용빈도가 TV 매체나 인터넷 커뮤니티를 중심으로 크게 늘면서 두 단어가 애매하게 공존하고 있는 상황이다. 나무위키에서도 애완동물 문서의 표제어를 반려동물로 변경하려는 주제로 수차례 토론이 발제되었지만, 애완동물이 사용할 수 없는 단어임을 증명하지 못해 무산되었다.

3.1. '반려동물'로 용어 변경을 주장하는 입장

상기한 논란의 내용 중 분명히 반려동물을 기르는 보호자들이 생각해볼 만한 내용이 있는 것은 사실이고 동물과 인간의 관계가 반려란 단어에 어울릴 만큼 동등한 관계인가에 대해 약간 부족한 점이있는 것 역시 사실이다. 하지만 애완동물 고수자들이 간과하는 점 역시 상기한 논란의 내용들을 적극적으로 해결하고자 하는 주체가 다름아닌 반려동물 보호자들이란 사실이다. 일단 위에서 제시된 동물유기 및 학대, 지나치게 강압적인 훈련, 중성화수술, 과도한 미용 및 목욕 등은 이전부터 사회적인 문제가 되어왔으며 그에 대한 비판과 인식변화 역시 반려동물이란 용어를 주창함으로써 그 주창자들과 반려동물을 기르는 보호자들이 적극적으로 대처해온 문제들이다. ~물론 아직 갈 길이 먼 것 역시 사실이다.....~ 또 반려동물이란 용어와 동물권담론에 대해 많은 이들(특히 애완을 고수하는 이들)이 오해하는 부분이 있다. 대표적으로 동물권은 인권에서 파생된 개념이며 단순히 감성적인 면에만 의존한 철저히 인간중심적인 주장이라는 오해가 있는데, 동물권은 인권과 별개로 제시되고 발전되어 온 개념이며 무엇보다 단순히 감정적인 동정심에 의존하지 않는다. 또 애완동물이란 단어가 반려동물을 포함한 포괄적인 단어라고 하는 이들도 있는데 이 또한 잘못된 설명이다. 엄연히 반려동물은 애완동물을 대체하기 위해 주창된 단어이며 특히 한국의 경우 동물보호법에 개와 고양이를 비롯해서 몇몇 동물 종만을 명시했다는 점을 근거로 '애완>반려'라는 주장을 하지만 이것 역시 한국이 법규를 적용할 때 단순히 법조문을 문자적으로만 적용하는 것이 아니라 현실에서 해당 동물이 사람에게 가지는 실질적인 의미를 고려하여 적용하는 점을 간과하는 주장이다.

또한 애완/반려 혼용 여부, 목적에 따른 애완 혹은 반려 사용 등으로 논점을 나눌 수 있다고 주장을 하는 이들도 있지만 이는 명백히 반려동물이란 용어가 애완동물이라는 용어를 대체하기 위해 제시된 용어라는 계기를 간과했기 때문에 나오는 주장이며 상술했듯이 애완동물은 반려동물을 포함하는 포괄적인 개념이거나 목적에 따른 분류로 사용되는 단어도 아니다.[3] 애완옹호론자들이 주장하는 논점은 대체로 '반려동물이란 용어에 걸맞은 대우인가?', '애완은 동물을 비하하는 의미가 아니다.'[4] 이 두가지이며 반려동물 옹호 문단 역시 대체로 이 두가지 주장에 대해 반박하는 내용이다.

지금까지 동물을 인간을 위한 도구적 대상이 아닌 생명 그 자체, 나와 같이 사는 존재라는 인식의 큰 변화가 선행되었음에도 그 인식을 반영한 새로운 단어는 없었다. 그런 와중에 반려동물이란 단어가 퍼지자 급속도로 수용되고 표준어로까지 인정받게 됐다. 반려동물은 기존의 애완이란 단어에 담긴 뜻에 대한 공통된 인식, 동물에 대한 인식변화가 선행되었기에 널리 전파되고 수용되었다. 애완/애완동물의 뜻을 한자어에 익숙한 기성세대는 희롱할 완이라 훈독하면서 동물을 물건처럼 여기는 단어라고 모두가 공통적으로 인정했음에도[5] 오히려 1990년대 중후반~2000년대 초에 출생한 세대 중 일부가 갑자기 반려동물에 거부감을 드러내며 '한자어가 애완이라고 해서 진짜로 장난감/도구라고 해석하지 않는다.'[6][7]는 주장을 펼쳤고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궤변이다.[8] 역설적으로 '정말 반려에 걸맞은 대우인가?'[9]라는 윗 문단의 제목이 애완동물이 반려동물과 동의어가 아니라는 증거로 작용하고 있다. 정리하자면 '애완동물'이란 단어는 대대로 동물을 인간을 위한 도구적 대상으로 바라보는 관점이 담긴 단어로 받아들여졌고 유의미한 의미변화 역시 없었다. 그런 와중에 반려동물이란 용어가 수용되었고, 일부 반감을 가진 사람들이 반려동물 용어에 비판을 하게 된 것이 논쟁이 시작된 경위이다. 또 애완옹호측의 '애완동물을 장난감처럼 해석하지 않는다.'는 동물을 보는 인식변화지 단어에 대한 해석이 아니다.[10] 오히려 본인들의 그러한 인식 변화를 담은 용어가 '반려동물'이다.[11]

3.2 문단에 애완 용어의 사용을 옹호하면서 "반려동물이란 용어를 사용하되 애완동물이란 용어를 부정적인 것으로 매도하는 건 잘못된 것이다."라면서 반려동물 옹호측을 흑백논리만 내세운다는 식으로 몰고 있다. 심지어 애완옹호측이 내세우는 논점들 중에는 '반려동물을 사용해야 한다.' 혹은 '사용하지 말아야 한다.' 마찬가지로 '애완동물이란 용어를 사용해야 한다.' 또는 '사용하지 말아야 한다.'라는 4가지 주장이 혼재되어 있다고 하지만 이는 사실과 다르다. 애시당초 반려동물이란 용어에 대한 논란이 발생한 것은 반려동물이라는 용어에 대해 반대하는 의견 때문에 발생했다.[12] 때문에 반려동물이란 용어에 대한 논란은 '반려동물이란 표현을 쓰자' vs '애완동물이란 표현이 더 적합하다'로 논점이 맞추어진다. 무엇보다 이 문서의 반려에 비판하는 내용 역시 애완 옹호측이 사실상 반려동물이란 용어에 거부감을 느끼거나 반대하면서 애완이란 단어가 더 적합하다는 식으로 주장하고 있다. 그러므로 여러가지 논점으로 나뉜다는 말 자체가 애완옹호측 스스로의 논점을 흐리는 것이나 다름 없다.[13][14] 더군다나 반려동물 옹호론자들을 흑백논리자로 몰아가면서 반려동물 옹호자들이 애완에 부정적인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고 주장하나 3.1.3 문단에 자세하게 나와있듯 대한민국에 반려동물이란 용어가 도입 및 전파되기 이전부터 애완동물이란 단어가 동물을 인간을 위한 유희의 대상으로 보는 관점이 있는 단어라는 사실 자체는 부정하는 이가 거의 없었다.[15][16] 용어의 역사적 사용례와 실제 용어에 대한 대중의 인식이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사실을 외면한 채 애완 옹호론자들은 반려동물 옹호론자들이 애완에 없는 의미를 일부러 만들어서 부여한다는 주장을 하고 있으며 이는 엄연히 사실 왜곡이다.[17] 더군다나 야생동물의 활동 범위를 제시하기까지 하지만 반려동물 옹호 문단에 나와있듯 현재 반려동물로 일반적으로 길러지는 개와 고양이의 경우[18] 인간의 길들임과 더불어 생존의 편의성을 위해 같은 거주 공간에서 인간과의 공존을 종 차원에서 선택한 것임이 고고학적 증거로 기정사실화 되었다. 그리고 야생동물의 활동범위는 유동적이며 먹이가 풍부할 경우 활동범위/영역을 줄이기도 한다.[19][20][21] 이런저런 증거나 정황들로 보았을 때 현재 인간이 반려동물로 기르는 동물들은 더이상 과거[22]와 같은 야생동물이 아니며 오히려 자유롭게 해준다고 야생에 풀어놓으면 유기죄나 학대죄로 처벌 받을 것이다. 설령 애완 옹호론자들의 주장을 떠나 인간이 기르기로 정하고 역시 해당 동물이 인간과의 삶에 적응한 경우 인간에게 그 동물의 삶과 생명을 유지할 최소한의 책임이 있다.

애완론자들은 반려동물이어도 결국 인간의 도구로서 여기는 것 아니냐고 시니컬하고 진부한 주장을 펄치지만 인간이 반려동물에게 정서적으로 의지한다는 것은 일방적 관계가 아닌 상호관계적이라는 것을 간과한 주장일 뿐이다.[23]

3.1.1. 반려(伴侶)와 동물유기에 대해서

많은 반려동물들이 이런저런 이유로 버려지고 있는 현실은 지금도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는 너무나 가슴아프고 참담한 일이다. 동물유기자들은 무책임에 대해 비난받아 마땅하다. 이러한 현실에 대한 비판 역시 계속되어야만 한다. 그러나 동물이 유기되고 있다는 사실이 반려란 단어의 적절성을 검증하는 수단으로 여겨지는 것은 실태를 개선하는 노력과 무관하다고 생각된다. 동물과 인간사이에서든 인간 대 인간 사이에서든 학대, 유기 등의 가슴아픈 사건들이 끊임없이 일어나고 있다. 하지만 만약 한 아이의 어머니가 자신의 자식을 유기하거나 학대하는 행위를 적발했을 때 우리는 그 어머니의 무책임하고 비도덕적인 행위 자체만을 비난하고 대책을 마련하지 그러한 행위가 일어났다고 해서 '모성'이나 부모자식간의 관계자체가 일방적이고 위선적이라는 식의 논의는 절대 펼치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기르던 동물을 유기하는 행위를 비난하는 이유가 그저 반려란 단어에 회의감을 표시하기 위한 것이라면 그런 식의 논의는 실제 문제의 진정한 본질을 외면하는 탁상공론에 불과할 뿐이다. 또 2021년 기준으로 이제 한국에서도 동물유기는 형사처벌을 받도록 법이 개정되었다. 이러한 입법이 이루어지기까지 지속적으로 문제제기를 하고 노력해온 이들이 누구겠는가? 다름아닌 반려동물의 보호자들이다. 또 반려동물이란 용어와 유기문제에 대해 강원대 최훈 교수는 자신의 저서에서 용어에 대한 반박으로 유기문제를 제시하는 건 용어를 부정하는 근거가 될 수 없고 별개로 해결해야 할 문제라고 밝힌 바 있다.

3.1.2. 동물권/동물윤리철학과 연관하여

상기에 쓰인 비판 논지 중 동물의 자유권, 용어의 중립성, 인간과 동물의 권력관계 등의 대한 논의는 모두가 읽어보면서 곱씹어 볼만한 심도있는 내용이다. 그리고 동물권과 동물윤리철학은 그러한 논의에 답변하는 과정을 통해, 혹은 비판논의 자체가 동물윤리를 더 높은 수준으로 나아가는데 도움이 될 것이라 생각 된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해당논의가 이론적으로 도움이 됨에도 불구하고 어디까지나 이론적인 비판에 그친다는 아쉬움이 있다. 또 반려동물이란 용어를 받아들이는 동기가 동물에 대한 인식의 변화와 동물의 권리에 대한 이해에서 비롯함을 온전히 이해하지 못하는 듯한 부분도 보인다.

일단 반려동물이란 단어는 1983년 오스트리아 빈에서 '인간과 애완동물의 관계(The human-pet relationship)'대한 국제 심포지엄에서 최초로 창안되었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그 심포지움이 인간과 동물의 유대관계에 대한 심포지움인 것은 사실이지만, 콘라트 로렌츠 박사가 반려동물이라는 용어를 주장했다는 것을 명시한 논문이나 발표자료를 제공하지는 않고 있으므로 이 주장은 근거가 없다고 봐야 하며, 구글 검색만 해봐도 그 이전에 companion animal이라는 용어는 이미 1970년대에 널리 사용되었었다. 설사 콘라트 로렌츠 박사가 그런 말을 했을 수도 있지만, 이미 광범위하게 사용된 companion animal 이라는 용어를 재확인 한 것에 불과할 것이다. 또한 1964년 루스 해리슨의 '동물기계', 1975년 피터 싱어의 '동물해방', 1983년 톰 리건의 '동물권 옹호(The Case for animal rights)' 등의 저서가 널리 읽히고 윌 킴리카의 '동물권 정치론'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철학자들의 동물권에 대한 심도있는 논저와 주장들이 이론적 뒷받침이 되어주었고 실제로 현대인의 인식변화와 동물보호법 제정 등에 큰 영향을 미쳐왔다. 더군다나 2012년 영국에서 생물학자와 신경생리학자들이 참여하여 '동물 역시 인간처럼 의식적인 존재일 수도 있는 과학적인 증거들과 신경생리학적인 기질을 가진다'는 '케임브리지 선언'을 하기에 이르렀다.[24]

비판측의 주장대로 동물은 인간과 동일한 수준의 성장과 주체적인 2차적 관계설정의 가능성, 윤리적 반성능력을 가지지 못하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그러한 윤리적 능력이 없다는 것이 동물권을 부정하거나 인간과의 반려관계가 적절한가에 대한 비판으로서도 부족한 점이 있다. 많은 이들이 동물권이 인간의 천부인권의 파생으로 오해한다. 물론 동물권이 인권과 종종 비교되기는 하지만 근본적으로 인권은 인권대로 동물권은 동물권대로 제안되고 발전해왔다. 또 인간의 인권의 대부분의 내용은 인간의 성장가능성이나 윤리철학적 반성능력의 존재 때문이 아닌 그가 '인간 그 자체'라는 점으로 인해 그의 권리와 생명이 보장받고 보호되어야 함을 주장한다. 동물권 역시 마찬가지다. 인간이 인간이기 때문에 그들의 권리와 인권이 보장받아야 하듯이 동물 역시 고통을 느끼고 피하며 살아있는 생명체로서 삶을 영위할 의지와 권리를 가지기에 동물권이 보장받고 동물의 생명과 삶이 보호받아야 한다.

이러한 관점에서 상기의 비판측이 제시한 주장 중 인간의 입양과 파양문제와 비교해보자. 일단 동물의 입양자체는 인간의 영유아 입양과 관련하여 밑의 문단에서 논의했다. 그럼 인간의 파양과 학대 아동의 구조건에 대해 동물과 비교하여 얘기해보자. 우리가 인간아동이 학대당하고 있을 때 분명 그 아이가 윤리적 성장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그 아이를 구하는 것도 맞는 말이다. 하지만 우리가 오직 그 이유 때문에 피해아동을 구조하는가? 그보다 더 결정적이고 거의 100%의 비중을 차지하는 이유는 그 아이가 생명과 안정적인 삶을 영위할 권리를 가진 인간으로서 학대받지 않을 정당한 권리가 있기 때문이다. 동물도 그렇다. 동물도 부당하게 상해입지 않고 학대받지 않을 권리가 있는 생명이기 때문에 학대받는 동물에 대해 기존 양육자에게서 구조한다. 오히려 한국의 경우 동물보호법이 있음에도 민법상 재산으로 취급받는 이중적인 법리 때문에 그러한 동물의 생명권이 지켜지지 못하는 바가 크다. 그리고 이러한 현실에 대해 문제의식을 지니고 개선노력을 경주한 것이 다름아닌 반려동물을 기르는 양육자(보호자)들이다.[25] 또 상기의 비판문단에서 언어학과 인지신경과학의 발달로 지적장애인/자폐증 환자의 언어의사를 알 수 있다고 하는데 그런 주장 역시 동물에게도 똑같이 적용된다. 동물 역시 인간처럼 구강을 이용한 언어적 표현이 아닐 뿐 그들만의 의사표현 능력과 방식에 대해 과학적인 데이터가 축적되고 있고 그 과학적 성과를 통해 동물의 의사를 파악하고 긍정적이고 동물의 사회성을 위한 행동교정을 가능하게 만들었다.[26]

동물의 자유의지를 존중해주는가에 대한 비판도 받아들일 만한 내용도 있으며 적지않은 반려동물의 양육자들이 이렇다할 자각 없이 자신의 반려동물을 주종관계처럼 대하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이러한 비판 역시 반려동물 양육자들의 실제 태도 변화에 대한 적지않은 오해가 섞여있다. 종종 어떤 이들은 애초에 인간이 동물을 길들이는 것 자체가 그들의 자유를 침해하는 것 아니냐는 비판을 한다. 어느 정도 정당한 주장이며 몇몇 동물 종에 대해서는 특히 그러하다. 하지만 일반적으로 기르는 개와 고양이는 애초에 종 스스로가 인간의 거주 구역에 들어와서 자발적으로 공존을 선택했다는 것이 고고학적인 연구로 밝혀진지 오래며, 개의 경우 생물학적으로도 조상이자 친척인 늑대와 달리 사람과 교감하는 친화력을 유전자 차원에서의 특징으로도 갖고 있다. 실제로 한 연구에서 늑대와 달리 개는 자신이 해결할 수 없는 문제에 대해 인간에게 적극적으로 도움을 요청한다는 행동관찰결과를 보고하기도 했다.[27]

훈련 등의 문제에 관해서 종종 훈련을 시키는 것의 필요성을 인정하면서도 인간의 입맛대로 행동을 강제한다는 앞뒤가 안 맞는 비판을 가한다. 물론 과거에는 알파독 이론을 왜곡되게 이해해서 동물 특히 반려견의 행동을 억압적으로 강제하는 방식이 성행한 것이 사실이고, 훈련의 의도와는 달리 반려견의 스트레스를 심화시켜 결과적으로 반려동물의 삶의 질을 저하시킨 주원인이 되었다. 그리고 많은 훈련사들이 이에 대한 반성의 결과로 새롭게 부상한 것이 바로 카밍 시그널(calming signal)이라는 행동교정 방식이다.[28] 현대의 반려동물 양육자들은 기본적으로 자신이 기르는 반려동물 특유의 생물학적, 행동학적 지식을 쌓고자 노력하고 보다 많은 정보를 원하고 있으며 자신의 반려동물의 삶의 질을 향상시키기 위해 많은 노력을 쏟고 있다. 반려란 개념을 비판하는 어떤 이는 심지어 리드줄(흔히 말하는 목줄)을 채우는 것 자체가 동물을 억압하고 소유한다는 상징이라고 말하기까지 한다. 하지만 반려동물 양육자들은 알 것이다. 산책시 개에게 채우는 리드줄은 타인을 배려하기 위함도 있지만 일차적으로 보호자와 반려견의 의사소통 도구이자 자동차나 자전거 등 반려견에게 위험한 대상에게서 보호해주는 안전장치의 역할이 훨씬 더 크다는 사실을 말이다. 만약 반려견에게 리드줄을 채우지 않는다면 누군가는 타인을 배려하지 않는다고 비난하고, 리드줄을 차면 누군가는 반려견과의 관계가 위선적이라고 비난한다면 반려동물의 보호자들은 누구의 장단에 맞추어줘야만 하는가? 인간과 동물간의 권력관계를 은폐한다는 비판도 실제 반려인들이 가지고자하거나 반려인들이 요구받는 태도에 대해서도 이해가 부족함에서 나오는 비판이라는 반론도 가능할 것이다. 비판자들의 주장대로 어떠한 동물을 가정 내에서 기르고자하는 의사 판단은 사실상 인간의 일방적인 결정인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입양의 결정과정이 그렇다고 해서 동물을 기르는 사람들이 자신이 진정으로 동물 위에 군림한다는 생각은 가지지 않았으며 이러한 사고방식은 반려동물이란 용어가 나오기 전부터 확산되었고 반려동물이란 용어가 국내에 확산되기 시작한 무렵부터 더욱 확고해졌다. 특히 카밍 시그널에 대한 반려인들의 수용과 호응은 억압적이지 않은 방식으로 내 반려동물을 행복하게 만들고 원만한 행동교정을 원하는 반려인들의 요구와 필요를 충족시켜주었다. 그리고 현대에는 훈련이라는 핑계를 대며 주종관계식으로 무의미하게 동물을 억압하는 행위를 동물학대로 규정하며 학대자는 형사처벌을 받을 것이다.

용어와 그 중립성에 대해서도 얘기해보고자 한다. 한국에서 반려(伴侶)라는 단어는 주로 결혼한 상대방 즉 '배우자'에게 사용되어진 것이 사실이다. 아무런 혈연관계도 없는 두 사람이 가족이 되어 평생을 함께 할 것을 약속하는 아름다운 단어이다. 또 무엇보다 같이 삶을 살아간다는 의미가 강하다. 한국어로는 이러한 같이 살아간다는 의미를 강조하여 companion animal을 반려동물이라는 단어로 번역했고 실제 국립국어원도 의미의 확장의 사례로 여겨 문법적으로도 문제가 없다는 의견을 밝혔다. 하지만 상기의 비판론에 쓰인대로 반려란 단어가 다의성을 지니고 있다고 인정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국어 사전적 의미의 '평생을 함께 하기로 약속한 짝'에서 특히 '약속'과 '짝'이라는 의미 자체에 몰두하여 비판론을 제기하는 것은 비판론자들이 특정 의미에만 집착하고 있다고 볼 수 있지 않은가??

한가지 예를 들어보겠다. 반려동물 비판자인 당신이 길을 걷다가 어떤 사람이 소 한마리를 마구 때리며 학대하고 있는 광경을 목격했다. 소는 학대로 인해 심한 상처 투성이에 소의 몸에서 흐른 피가 땅바닥을 적실 정도이며 한눈에 봐도 소는 고통을 호소하고 있다. 당신은 당연히 이 상황을 지나치지 못하고 소를 학대하는 학대자를 바로 저지할 것이고 소를 이유 없이 고통스럽게 하는 게 옳은 일이냐며 따질 것이다. 그리고 그 학대자가 어차피 도축할 소인데 무슨 상관이냐고 뻔뻔하게 나온다면 그 학대자를 미친 사람/싸이코패스 취급하면서 주저하지 않고 경찰에 신고할 것이다. 반려란 용어의 적절성을 논하는 글에서 반려동물도 아닌 가축과 학대문제를 예로 드는 것이 의아할 것이다. 이러한 예를 드는 이유는 비록 동물권이 자체로도 부족한 점이 있는 것도 사실이고 소나 돼지 등 농가에서 식용으로 기르는 동물에게까지 완전히 미치지 못하는 것이 사실이지만 동물권과 동물윤리가 널리 받아들여지는 철학적 근거 위에서 성립되어있고 동시에 위의 예에서 든 것처럼 살아있는 생명체의 고통에 공감하는 인간의 도덕적 직관에도 의존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연유로 동물은 근본적이고 윤리철학적으로 인간의 소유물이거나 즐거움을 얻는 도구가 아닌 독자적인 생명체로 존중받을 가치가 있으며 현대에도 이어지고 있는 동물에게 행해지고 있는 부당한 대우나 학대가 큰 잘못이라는 인식을 공유하고 가정에서 기르는 동물을 삶을 같이 영위하는 '반려동물'로 인정하고 명명함으로써 동물에 대한 인간의 윤리적 책임을 새로이 인식하고자 함이다. 절대 막연하고 감상적인 의미에서 반려란 단어를 쓰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윤리철학적 관점에서뿐만 아니라 동물과 인간간의 관계에서 앞으로의 지향점까지 내포한 실천적 의미까지 담고 있는 용어라 할 수 있다.

당연하지만 반려동물 비판자들이 동물의 생명을 경시한다는 얘기가 아니다. 비판자들의 주장은 분명히 사색할 만한 가치가 있다. 동물권과 동물권이 근거로 삼는 공리주의 철학이 비판자들이 제시하는 계층적 윤리론을 충족시키지 못하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비판자들이 근거로 삼는 철학적 관점이 공리주의에 기반한 동물권/동물윤리를 부정하지는 못한다는 것 역시 분명한 사실이다.

3.1.3. 애완(愛玩)은 동물비하적인 의미[29]가 있다

사실상 완(玩)에 대한 해석이 어떠한가에 대한 논의가 반려동물이란 용어에 대한 논박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한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일단 애완동물 고수자들의 주장을 요약하자면(특히, 玩에 대해서) 이러한 주장을 하는 것 같다.
  1. 玩에 담긴 희롱하다는 의미는 단순히 논다는 의미일 뿐이다. 그리고 완에 담긴 놀다, 희롱하다라는 뜻은 중립적인 의미일 뿐이다.
  2. 기존에 애완동물이란 용어가 쓰이던 당시부터 지금처럼 반려동물을 대하는 것처럼 동물을 대했으니 애완은 반려를 포함하는 개념이다.
  3. 무엇보다 애완동물이라고 부른다고해서 진짜로 동물을 장난감처럼 생각하고 대하지는 않는다.
  4. 동물을 어떻게 부르냐에 집착하기보다 동물이 처한 현실을 바꾸는데 더 집중하자.
등등 대체로 큰 틀에서 상기의 주장을 하는 것으로 여겨진다.

이에 대한 반박에 앞서 애완동물 고수자들이 진짜로 동물을 도구처럼 여기거나 동물을 함부로 대하는 사람이라고 하는 것이 아님을 밝혀둔다.[30]

애완이라는 용어의 옹호자들은 한자와 한자어에 대한 개념정리를 먼저 제안했으나 그 개념 역시 말이 안 된다.

첫째로 한자는 중국의 문자이지만 모든 문자와 언어가 어순과 문법, 표기와 발음이 다를뿐 결국 인간의 감정이나 사고방식을 표현하기 위한 수단이라는 점에서는 동일하다. 우리 선조들이 한자라는 문자자체는 차용했지만 그 문자들에 담긴 '의미'까지 다르게 받아들인 것은 아니다. 그래서 한자 자체의 의미와 우리 선조들이 해석하여 붙인 의미가 동치하지않는다는 말은 심각하게 왜곡된 주장이다. 훈민정음에 적힌 한글창제의 의의를 설명하는 도입부가 '나랏말씀이 중국에 달라....'라는 건 문자의 해석의 차이를 의미하는게 아니다. 과거 우리 선조들은 중화제국의 사절과 필담(筆談)을 나누기도 했는데 우리와 중국이 같은 한자를 두고 다르게 해석했다는게 말이 되겠는가? 훈민정음에 적힌 문장은 문자의 해석이 아닌 한국어와 중국어의 문법, 어순, 발음 같은 언어차원에서의 근본적인 차이를 직시하고자 하는 것이다. 한자로는 한국어의 발음을 온전히 나타내기 어렵고 각각의 의미를 표현하는 문자가 전부 익히는게 거의 불가능할 정도로 많으니 이를 극복하기 위해 독자적인 문자를 창제한 것이다.[31]

둘째, 완(玩)의 해석을 위한 예시에 대해 반박을 하는 내용자체가 궤변이다. 한자라는 문자에 담긴 의미를 제대로 해석하고 이해하고자 실제 사용례를 들어 반박했더니 실제 사용사례가 '단순 참고자료에 불과할 뿐이다.'라는 건 무슨 논리인가? 오히려 그 참고자료에 불과할 뿐이라는 사용례를 들어 애완이라는 단어를 옹호해온 자신들의 주장을 외면하기라도 하겠다는 것인가? 애완 옹호측 말대로 한자는 문장마다 사용례와 해석이 달라지는 경우가 있는 건 사실이지만 우리가 논의하고자하는 완(玩)은 해당사항이 아니다. 오히려 그 다양하다는 완(玩)의 구체적인 사용례를 가져오지 못하면서 '요산요수'같이 논의와는 직접적으로 상관없는 문자의 사용례만 가져오면서 단순하게 '다양한 해석이 존재한다.'식의 두루뭉술한 주장은 제대로 된 근거가 될 수 없다.

애완동물 고수자들은 과거부터 이어져 온 용례를 들어 애완에 동물을 비하하는 의미가 없고 오히려 반려의 뜻을 내포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정말일까? 결론부터 말하면 애완동물 고수자들의 주장은 사실이 아니다. 특히 애완의 완은 장난감을 뜻하는 완구의 완과 똑같이 '희롱할 완'으로 해석해 온 것이 사실이다.[32][33] 고려시대와 조선시대의 기록을 보아도 애완은 완호[34]와 사실상 같은 뜻으로 쓰였으며 조선 성종 때 손비장은 아예 왕에게 대놓고 임금인 성종이 아끼던 원숭이를 향해 애완물(=노리개)로 칭했다. 우리 조상님들도 물론 동물을 아끼고 사랑하던 사람이야 많았겠지만 조선 같은[35] 국가에서 사실상 동물은 한낱 기호품으로 여기는 것이 사실이고 오히려 동물에 애정을 쏟는 것이 비난받는 사회였다. 이러한 사회 분위기에서 어떻게 애완에 반려의 뜻을 내포하고 있다 생각하겠는가? 애완동물 고수자들의 주장이 성립하려면 과거 동서양 전근대 국가들에서 그 당시 사람들이 동물을 현대인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여긴다는 증거들이 있어야 하는데 동물에 대한 과거 사회의 인식을 떠올려 볼 때 그런 증거가 있을 것을 기대하기 어렵다.

따라서 완(玩)이라는 한자의 뜻 중 '희롱하다'는 뜻이 있어 동물을 희롱한다는 의미로 해석해야 한다. 정확히는 장난감처럼 여기는 뉘앙스가 있어서 그렇다. '완구(玩具)'는 아이들이 가지고 노는 장난감이란 뜻인데, 일반적으로 그동안 애완의 玩은 완구에 쓰이는 완과 같은 뜻으로 해석해왔다. 이렇듯 일단 한자 자체가 '희롱할 완(玩)'이란 뜻이며 '장난하다, 업신여기다, 깔보다, 구경하다' 등, 유희의 대상이란 어감이 강하다.

그리고 벗으로 삼아 오래도록 술을 마신다는 뜻의 문장인 완월장취(玩月長醉)를 인용하며, 반려동물에 내포된 의미는 이미 '애완동물에 포함되어 있는 뜻'이다는 주장이 있는데 말도 안 되는 소리다. 애완은 어느 용례에서도 반려의 의미를 내포하지 않는다. 만약 애완이란 단어가 반려의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면 연인이나 부부 사이에서도 쓰지 못할 이유가 없다. 그리고 애시당초 '완월'을 진짜로 친구처럼 대한다는 해석 자체가 틀렸다. 그냥 달 구경한다는 뜻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애완 옹호 측의 텔레비전을 본다는 예시 역시 마찬가지다. 사람이 텔레비전을 유흥의 도구로 사용한다는 것이지 텔레비전을 가족이나 친구를 대하는 마음가짐으로 텔레비전을 보는 것이 아니지 않은가? 무엇보다 완월장취는 결국 최소한의 주체성이 없는 사물(달)을 유흥을 위한 도구적 대상으로 삼는다는 의미다. 처음부터 '벗을 삼아'라는 해석 자체가 근거가 없다. 그냥 문장 그대로 '달 구경한다(완월)'라는 뜻이다. 애시당초 애완을 옹호하기 위해 완월장취를 예시로 드는 것 자체가 매우 부적합하고 논거가 될 수 없는 예시일 뿐이다.[36][37] 처음부터 잘못된 해석을 내세워서 예시를 삼는 것은 그저 왜곡일 뿐이다.

완월장취에서 완의 훈독은 '희롱할 완'으로 벗으로의 의미도 아니고 사랑한다는 의미는 더더욱 아니다. 또 희롱할 완자에 '사랑하다'는 의미가 있다고 하지만 정작 사랑의 의미로 희롱할 완자를 쓴 사용례를 찾기 힘들 정도다. 만약 그 사랑의 의미가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사랑한다는 의미라면, '사랑하다'라는 의미로 쓰인 玩의 용례는 아예 없다. 한자라는 게 같은 글자에 여러가지 훈독이 가능하다고는 하지만 사실상 사회적으로 폭넓게 쓰이는 의미 한두가지로만 쓰이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희롱할 완'자를 인명용으로 쓸 경우 '보배 완'으로 훈독하기는 한다. 하지만 애완동물의 완자는 인명의 용례를 확장한 것도 아니고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사랑의 의미를 강조한 것도 아니다. 완구와 같은 의미의 완자에 불과할 뿐이다. 실제로 반려인들이 반려동물에게 가지는 감정이나 반려인들에게 요구되는 책임감이나 태도를 고려해볼 때 애완이라는 단어는 적합하지 않다. 단적으로 얘기해서 애완과 똑같은 의미의 '완'을 쓰는 완구에 책임감을 가질 것을 요구하는 경우는 없지 않은가?

이렇듯 비판란의 '애완(愛玩)이 동물비하적인가?' 항목의 '완월장취'에서의 '완월'에 대한 해석은 아예 날조이며, 애완에 반려의 의미가 내포돼있다는 것은 그냥 거짓말이다. 해당 문단에서 제기된 비판과는 달리 오히려 애완동물 고수자들이 대대로 쓰이던 '애완'이란 단어의 뜻을 곡해하고 날조하고 있다.

또, 애완동물이란 단어의 뜻이 나쁘게 알려진 것이 반려동물이란 단어가 부상하면서 시작돼었다고 하는데 이는 사실이 아니다. 실제로도 반려동물이란 용어가 알려지기 전인 한국사회에서 자신이 기르는 개와 고양이 등의 양육자들은 해당 동물에 대한 애정을 이렇게 표현하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바로 "이 녀석(들)[38]은 나에게(우리 가족에게)있어서 단순히 애완동물이 아닌 가족이었다."라는 식으로 말이다. 만약 애완동물 고수자들의 주장대로 기존에 쓰이던 애완이란 단어가 가족이라는 뜻을 내포하고 있다고 여겨졌다면 애완이 아닌 가족이라는 식으로 동물에 대한 애정을 표현하지는 않았을 것이다.[39]

기성세대가 애완이라는 단어에 대해 '애완에 담긴 뜻처럼 동물을 장난감처럼 여겨서는 안 된다'라고 얘기할 때마다 오히려 젊은 세대들이 '애완이라는 단어를 장난감처럼 여긴다고 해석해서는 안될 거 같다'라는 식으로 오히려 선후관계가 바뀐 듯한 주장을 펼치고 있는 모순적인 상황이다. 상식적으로 생각해보라. 오히려 기성세대들에겐 동물을 사랑하고 말고를 떠나서 동물은 대체로 인간을 위한, 혹은 인간의 재산처럼 여겨져왔고 그 사고방식이 '애완동물'이란 단어로 표현되어왔었다. 그러다가 동물에 대한 인식변화와 동물을 가족처럼 여기는 심리와 애정에 대한 공감대가 확산되었고, 예전에는 유별난 것으로 취급 받았던 '동물을 가족으로 여기던 감정'들이 이제는 너무나 당연한 것이 되어버렸다. '애완이라고 부른다고해서 진짜로 장난감처럼 대해도 된다고 해석하지는 않는다'는 주장이 기성세대에게도 있었던 건 사실이다. 그러한 주장은 오히려 기존에 가지던 '재산으로서의 동물'이 아닌 '생명을 지닌 주체로서의 동물', '가족구성원으로 여겨질 정도로 깊은 애정을 가진 동물'을 인정하는 변화된 인식이 담긴 것이므로 오히려 '반려동물'이라는 용어를 받아들이는 근거가 되었던 것이지 거부하는 근거가 아니라는 점이다. 심지어 애완 옹호자들은 애완이 결국 반려와 같거나 포괄하는 의미라고까지 주장하는데 이는 명백한 허위사실이다. 현재 국립국어원이 인증한 것처럼 가족이라는 포괄적인 의미로 반려동물이란 용어가 쓰이는 것처럼 과거에 애완동물이 가족과 같거나 거의 유사한 의미로 쓰이는 문장을 제시했으면 애시당초 반려동물 용어에 대한 논쟁이 일어날 것도 없었다. 하지만 애완이 가족, 친구, 부부간 등의 인간관계에 쓰이는 용례는 없다. 한마디로 애완이라는 단어를 대체할만한 단어가 뒤늦게 알려진 것이지, 특정단어를 퍼뜨리기 위해 기존 단어를 의도적으로 곡해한 것이 아니다.[40]

상술했듯이 玩이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사랑하다'로 쓰이는 용례도 거의 없다. 오히려 반려동물이란 용어가 어느 정도 퍼지면서 반려동물이란 단어에 거부감을 느끼던 사람들이 갑자기 '완에는 사랑한다는 의미도 있다'고 주장하기 시작했다.

이미 확인해 보았듯이 애완의 역사적 용례나 사전적 정의를 들춰봐도 '애완동물=반려동물'이란 주장은 견강부회나 다름없다.

또 '희롱'이나 '희롱하다'라는 동사에 서로 같이 노는 것을 의미하므로 玩의 '희롱하다'가 '같이 어울려 논다'는 의미로 해석되므로 이 단어가 중립적인 의미일 뿐이며 문제가 없다고 하기도 한다. 일단 듣기에는 그럴듯하게 들리며, 실제로 '희롱하다'는 그렇게 해석되기도 한다. 하지만 이는 좀 더 자세히 파보면 상술한 바와 같은 해석은 피상적인 접근이라고 할 수 있다. 한자의 뜻이나 단어의 실제 담긴 뜻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사전적으로 요약한 의미뿐만 아니라 그 문자, 단어가 쓰인 예문을 통해 어떠한 상황에서 어떠한 의미로 쓰이는지 역시 살펴보아야 한다. '희롱' 혹은 '희롱하다'가 '같이 어울려 놀다'라는 의미로 해석, 사용되는 경우는 바로 '남·녀간의 성적인 분위기를 풍기는' 상황에서 쓰이는 경우이다. '희롱하다'에 담긴 '같이 어울려논다'의 뜻은 절대 친구, 가족 및 친인척과 같은 사이 등 일반적인 교류관계에서 절대 쓰이지 않는다. 적지 않은 이들이 단어의 뜻을 잘못 알고있으면서 단어를 옹호하고 있는 상황이다.[41][42][43]

또 3.2.5 문단에서 玩이 담고있는 놀다란 의미가 중립적인 단어라고 설명했다. 물론 놀다란 말 자체가 중립적인 의미인 건 사실이나 비판 측이 간과한 중요한 사실이 있다. 바로 玩에 담긴 놀다란 의미가 도구적 의미의 놀다란 뜻이다. 애완동물 옹호 측은 거의 매번 완에 담긴 의미가 도구적 대상이라는 것을 놓친 채로 해당 단어를 옹호한다.[44] 애완동물 고수자들의 주장과는 달리 玩은 절대로 동등한 관계적 의미나 상대의 존재 그 자체를 존중하는 의미를 담은 사용례가 없다. 玩이 사람에게 쓰인 완인상덕의 경우도 있지만, 이 경우 역시 애완의 완처럼 사람을 인격의 주체가 아닌 도구적 존재로서 대하는 것을 비판하는 말이다. 따라서 玩에 담긴 의미가 인간에게는 사용하기 애매모호하다는 주장 역시 사실이 아니다. 무엇보다 적어도 현시대에서는 동물이 단순히 인간을 위한 도구가 아니라는 점만은 모두가 공감하지 않은가? 그렇기 때문에 희롱할 완자의 사용을 피하자는 것뿐이다. 희롱할 롱자의 존재와 쓰임이 완이란 한자의 도구적 의미를 희석시켜주지 않는다. 특히 애완에 쓰인 사랑 애자는 이 경우엔 그저 선호한다는 의미가 훨씬 강하다. 애용하다, 애마[45]에 쓰이는 것처럼 내가 즐겨 사용하고 좋아한다는 의미가 더 크다. 또 반려에 쓰이는 짝 려자가 승려라는 의미도 있다라고 설명하는데 이는 한 단어에 담긴 두가지의 다른 뜻이 용례에 맞춰 사용되는 것일 뿐 반려동물을 비판하는 적절한 예시가 되지 못한다. 이것이야말로 반려동물 비판 측의 어거지 주장일 뿐이다.

심지어 애완동물 옹호 측에서 개와 함께 산책하는 것, 간식을 나눠 먹고, 공을 던지고 노는 것 등의 행위가 '가지고 노는 것'이라며 결국 玩에 담긴 의미가 동물과 같이 살아가는 반려의 의미와 일맥상통하는 것처럼 얘기한다. 그러나 이러한 해석이야말로 원래 쓰이던 용어의 뜻을 왜곡시키면서까지 무리하게 자신들의 주장을 옹호하는 행위로밖에 볼 수 없다. 애시당초에 '가지고 논다'라는 문장을 같이 산책하는 행위 등을 떠올리며 해석하는 사람이 도대체 누가 있단 말인가? 애완동물 옹호 측의 주장과는 달리 玩은 사람과 사람 사이든 사람과 동물 사이든, 동물과 동물 사이든, 동등한 관계에서 쓰이는 용례가 전혀 없다. 만약 玩에 애완동물 옹호 측의 주장대로의 뜻이 있었다면 玩이란 단어가 사용된 가족, 군신, 남녀간 사이를 의미하는 한자어들이 수십개는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玩이 들어간 동등하거나 동등함에 준하는 관계를 나타내는 용어는 존재하지 않는다.[46]

정리하자면 애완동물 고수자들의 주장과는 달리 玩에 담긴 놀다/희롱하다 등의 뜻들은 전혀 중립적인 의미가 아니다. 거기다 반려동물 옹호자들이 완구에 쓰이는 갖출 구자에도 나쁜 뜻을 부여한다고 하는데 이는 상대가 든 예시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것이다. 완구와 애완에 같이 쓰이는 한자 玩이 같은 의미로 쓰인다는 것이지 갖출 구자는 언급하지도 않았다. 그리고 완구(玩具)에서 장난감이라는 뜻은 具 자가 가진다고 하는데 갖출 구 자는 그냥 도구라는 뜻일 뿐이지 그것이 어떤 성격의 도구인지는 앞선 한자가 결정한다. 즉 玩에 담긴 뜻은 완의 훈독 자체가 결정하지 具의 뜻을 끌여들어서 해석하고 있다는 애완동물 옹호 측의 주장은 애시당초 어불성설이다. 심지어 物을 근거로 동물이라는 것 자체가 물건으로 여긴다고 하는데, 해당 한자는 물건을 의미하기도 하지만 그 이전에 세상에 존재하는 거의 모든 것 즉, 만물(사물, 동물, 식물, 인간 등)을 의미하는 한자이기도 하다. 인물(人物), 물리학(物理學) 등의 한자어들을 생각해보면 物자는 알고 보면 굉장히 포괄적인 의미를 지닌 한자로, 단순히 이용하는 물건에서 그치는게 아니라 물리적 실체를 의미하는 한자이다. 동물이라는 한자어를 직역하면 움직이는 물체가 맞지만 그것은 그야말로 직역했을 때의 얘기지 동물이라는 단어는 과거부터 지금까지 생명을 가지되 식물이 아닌 존재를 의미할 뿐이다. 인간을 포함해서 말이다.

혹자는 사랑을 의미하는 愛자가 붙어있으니 문제시 할 이유가 없다고도 하지만 이 경우에 사용된 사랑 愛 자는 애마, 애용 등의 예시처럼 단순 선호의 의미가 더 강하다.[47] 누군가가 자신이 운전하는 차량을 '나의 애마(愛馬)'라고 표현했을 때, 당사자가 그 차량을 선호하고, 많이 아끼는 차량이라는 의미이지 진심으로 가족처럼 여겨서 사랑한다는 뜻은 아니다. 애완의 경우가 바로 이러한 경우이다. 혹자는 관우와 적토마의 사례를 들기도 하지만 과거 장수와 말의 교감은 현대의 반려동물과 인간의 관계처럼 깊은 정서적[48] 관계와는 결이 다르다. 엄밀히 말하면 말이란 동물 그 자체가 가지는 생명의 대상으로서가 아닌 인간에게 얼마나 유용한가의 기준, 특히 적토마의 사례처럼 주인을 따라 죽었다는 건 철저히 고대~중대, 근세 동아시아 사회가 강력하게 추구하던 가치관 중 하나인 忠을 강조하기 위함이다.[49] 그 외 역사적 인물과 관련된 말들이 해당 인물의 애마로 표현되어도 맥락을 따져보면 그냥 자주 즐겨타던 이동수단이라는 의미가 더 강한 것이 사실이다.[50]

또 애완 옹호 측은 지속적으로 玩에 놀다란 뜻이 있기 때문에 아무 문제가 없다고 지속적으로 주장하는데 이미 얘기했듯이 玩에 담긴 놀다란 뜻은 '도구로서 내가 가지고 논다'는 뜻이지 절대 동등한 관계로서 같이 어울려 논다는 뜻이 아니다. 애완 옹호 측이 주구장창 내세우는 완월은 그냥 풍경으로서 달을 구경한다는 뜻이지 달을 친구로 생각한다는 뜻이 아니며, 玩人喪德의 경우처럼 완인을 '사람을 가지고 놀거나 지나치게 빠진다(지나칠 정도로 마음을 빼앗긴다)'는 식으로 해석해서 경계할 것을 강조하는 내용이다.[51][52][53] 애완 옹호 측이 주장하는 교류의 개념인 놀다란 의미는 물론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사랑한다'라는 의미[54]조차 사실상 없다. 무엇보다 애완 옹호 측은 '애완동물이 곧 반려동물이나 다름 없다'라는 것을 증명하는 '애완(愛玩)'의 실제 사용례를 가져오지도, 심지어 玩에 담긴 놀다란 의미가 장난감을 가지고 노는 의미가 아닌 친구나 가족 등 일반적인 교류의 의미로 해석되면서 玩이 들어간 사람간의 관계를 담은 용례[55]를 가져오지 못하고 있다.

또한 애완이라는 단어가 동물을 희롱한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고 해도 실제로 그렇게 사용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는 주장이 있는데,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애완동물이란 단어의 사용을 지양하자는 것이다. 이전부터 적지않은 사람들이 믿어왔던 '언어가 사고를 결정한다'는 통념이 무리한 주장일 수도 있고, 실제로 논리적으로나 실증적인 연구에 의해 반박당하기도 한다. 그러나 대상에 대한 인식의 변화가 언어에 영향을 미침으로써 그 대상을 부르는 명칭의 의미가 이전과는 전혀 다른 의미가 되거나 아니면 아예 새로운 명칭으로 부르는 것은 인류의 언어 역사상 자주 일어나는 일이다.

우리나라에서 반려동물이란 용어가 2000년대 초반에 도입되었고 2010~2012년 사이에 조금씩 용어가 쓰이기 시작하였으며 2010년대 후반들어 본격적으로 사용된 것으로 여겨진다.[56] 만약 반려동물이란 단어가 국내에서 유통되기 전부터 애완동물에서 만큼은 완자를 '희롱할 완'이 아닌 '사랑할 완'으로 해석하자는 유의미한 여론이 형성되고 또 그 여론으로 인해 해당단어의 새로운 해석이 널리 받아들여졌으면 어쩌면 반려동물과 애완동물은 사실상 같은 뜻으로 여겨져 적어도 용어에 대한 논란 자체는 없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누가 보아도 그런 식의 새로운 언어변화는 일어나지 않았고 동물에 대해 계층적 윤리철학을 적용하여 '반려동물'이란 단어에 비판적인 철학자들조차 애완의 완이 '희롱할 완'으로 해석되어 왔음을 부정하지 않는다. 그리고 그러한 철학자들 조차도 동물이 인간의 소유물, 장난감이 되어야 한다는 주장 역시 동의하지 않는다. 상기의 문단에서 작성된 모 웹툰 작가의 같이 놀아주는 대상으로 해석한다는 주장은 어디까지나 지극히 개인적인 의견에 불과할 뿐이며, 심지어 단어의 실제 의미와 용례를 고려하지 않은 왜곡된 해석으로 보아도 무방하다.

그리고 동물 입장에선 애완이나 반려나 별반 상관이 없을 뿐이다는 의견도 있는데, 대상이 특정 단어를 접했을 때 느끼는 감정도 중요하지만 그 단어를 쓰는 집단이나 개인이 그 단어의 지칭 대상을 어떻게 여기는지에 대한 인식변화를 위해서 기존에 쓰이던 단어를 다른 단어로 대체하기도 한다. 예를 들면 복지분야에서 정박아를 지적장애인으로, 스포츠에서 용병을 외국인 선수로 바꿔 부르는 식으로 말이다.

애완동물 고수자들은 반려동물 옹호자들이 마치 단순한 말장난만 일삼는 것처럼 비난하지만 이것 역시 사실과 다르다. 인간의 사회와 언어의 역사에서 대상에 대한 지칭의 변화는 실제 그 대상에 지위와 안위에 관심이 크고 변화를 위해 노력하는 사람들에 의해서 촉발된다. 이는 반려동물이란 용어 역시 마찬가지이다. 몇가지 예시를 더 들자면 최근 치매를 정식 용어인 인지증으로 바꿔 부르고 치매 대신 인지증이란 표현을 쓸 것을 권한다. 그런데 이러한 권장 운동을 하는 이들은 바로 의료인과 인지증 환자 가족들이다. 장애인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예전에는 지적장애인을 정박아, 백치라는 식으로 부르고 시각장애인을 맹인, 언어장애인을 벙어리라는 식으로 불렀었다. 심지어 장애인을 비정상인이라고까지 하는 경우도 빈번했다. 하지만 장애인 당사자들의 호소와 장애인에 대한 이해 및 인식의 변화, 제도의 정비 등과 더불어 기존의 장애인에 대한 일상적이면서 비하성이 없다고 할 수 없는 명칭들까지 거의 사용되지 않게 되었다. 반려동물이란 용어의 확산 역시 마찬가지다. 용어의 변화 → 인식의 변화가 아니라 인식의 변화 → 용어의 변화다.

또 야생에서 살아가던 동물을 인간이 길들여서 기르는데 이러한 결과를 반려동물이라고 부르는 것은 인지부조화에 의한 위선이라고까지 주장하는 이들도 있다. 일단 많은 종류의 동물들이 인간의 필요에 의해 길들여지고 가축화 된 것은 분명히 사실이다. 특히 파충류나 어류에 대해서는 해당 주장이 적절할 지도 모른다.[57] 그러나 이전부터 시행되어온 수많은 동물학, 진화학 등의 학자들의 연구에 따르면 적지않은 동물 종, 특히 개와 고양이들은 전적으로 인간에 의해서만이 아닌 그들 스스로 생존을 위해 인간 사회(혹은 각각의 인간 가정)에 섞여 들어가서 살 것을 선택했다는 것이 고고학적으로도, 진화 및 인지학적으로도 정설로 밝혀진지 오래이다. 실제로 개와 고양이뿐만 아니라 조류, 말, 소 등의 동물들이 인간과 정서적으로 교감한다는 것이 전근대 시절부터 경험담으로 구전되어온 이야기들도 어렵지않게 찾아 볼 수 있으며, 현대에 들어서 아예 과학적으로 입증되기까지 했다. 실제로 어린 강아지들, 고양이들의 행동을 보면 그들은 사람에게 오히려 먼저 다가가서 무리의 일원이 되고자하는 것처럼 행동한다. 차라리 사람이 억지로 동물을 데려가려고 한다는 비판 보단 동물을 끝까지 책임지고 잘 키울 수 있는 사람인지에 대한 검증 시스템이 없는 것을 비판하는 것이 옳은 방향일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엄연히 다른 종인 사람에 대한 친근함을 표현할 사회성과 정서적 교감이 없었으면 애시당초 인간 사회에 섞일 수도 없다. 단순히 현 시점에서 뿐만 아니라 동물과 인간의 전체적인 자연사(史)라는 관점에서도 동물을 반려동물로 삼는데에는 인간의 의사뿐만 아니라 동물의 종 차원에서의 선택 역시 존재한다. 단, 여기서 선택이란 자연선택에서의 선택으로, 동물들이 어떤 의사를 가지고 종속화를 '선택'했다는 의미가 아니다.

어쩌면 애완 옹호 측은 인간의 경제적 능력, 양육 지식 등의 이유를 들어 결국 동물의 삶이 인간에게 종속적이지 않냐는 주장을 근거로 애완을 옹호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러한 비판은 동물뿐만이 아니라 인간에게도 적용되는 것이다. 어린 아이가 자신을 낳아준 부모의 경제력과 교육 수준에 의해 삶의 질은 물론 방향성까지 결정되다시피 하는 사례는 그야말로 동서고금에 차고 넘친다. 인간이 자신의 의지로 환경을 극복하는 가능성을 지닌 존재인 건 사실이지만 현실의 사례들을 비추어 봤을 때 대단히 어렵고 고생스러운 일이다. 또한 삶의 주체성 여부가 반려동물이란 개념에 대한 비판이 되기에는 초점이 다소 맞지 않은 점 역시 존재한다. 사람이 자신의 자녀(직접 낳은 아이든, 입양한 아이든)를 돌보는 책임을 지는 것은 그 아이가 삶의 주체성을 지녔느냐 아니냐 그 이전에 그 아이의 존재 자체가 책임과 애정의 대상이기 때문이며, 이는 반려동물 역시 마찬가지다. 인간이 생명과 삶에 대한 의지와 그들 나름의 주체성을 지닌 그들(반려동물들)을 기르기로 한 이상 그러한 삶을 유지시켜 줄 책임을 지닌다. 다시 말해 사람과 동물의 주종 관계는 부모-자식 간에도 적용된다. 부모는 자신이 원할 때 자녀를 갖기를 선택할 수 있지만, 자녀는 자신과 함께할 사람이 잘생겼건 못생겼건, 성격이 좋건 나쁘건 간에 고르지 못하며 싫든 좋든 일방적으로 선택당하는 입장이다. 어쩌면 자녀는 부모와 같이 사는 것 자체를 원하지 않을 수도 있다. 설령 부모과 같이 살길 원하는 자녀라 하더라도 그 많은 부모 중에서 당신과 같은 인간과 같이 살길 원하는지는 결코 알 수 없다. 물론 처음에 그 부모가 맘에 들었건 안 들었건 자녀는 결국 부모에게 복종하고 따르게 되어 있다. 이는 복종 훈련을 필수적으로 거치기 때문이다.

따라서 주체성 여부를 근거로 펼쳐지는 애완 옹호 측의 주장 역시 인간 또한 자신의 자녀를 반려 동물의 개념으로 여긴다는 점에서 충분히 반박 가능하다.

애완동물 고수자들이 동물을 함부로 대하는 사람들이라는 것이 해당문단이 주장하는 바가 아니다. 다만 애완 옹호자들의 기대/해석과는 달리 애완동물이란 단어가 아무 문제 없는 단어라고 여겨지진 않았었다. 애완동물 고수자들은 마치 아무 문제없던 용어에 부정적 의미를 부가한다는 식으로 반려동물 옹호자들에게 책임을 전가하듯이 말하지만 그들의 생각과는 달리 반려동물이란 용어가 알려지기 전에도 애완이란 단어가 장난감/사물/도구적 의미가 있는 단어라는 것을 거의 모든 사람들이 인지하고 있었다. 오히려 반려동물이란 용어가 퍼지자 거기에 반감을 가지던 사람들이 애완에 담긴 뜻을 무리하게 옹호하기 시작했다. 즉 애완이란 단어가 동물에 대한 현대인의 관점을 온전하게 표현하지 못하는 용어라는 인식을 거의 모든 사람들이 가지고 있었지만 정작 변화된 인식을 상당히 반영한 반려동물이란 용어가 전파되자 오히려 반감을 느끼며 기존에 쓰이던 애완동물이란 단어의 뜻을 어떻게든 좋게 포장하려는 움직임이 나타났다. 애완동물 고수자들은 반려동물 측이 증거를 제시하지 못한다고 하지만 용어의 역사적인 사용례들을 보더라도 오히려 애완동물 옹호 측이야말로 애완동물이 반려동물과 일맥상통한다는 증거를 제대로 제시하지 못하면서 단어와 용어에 대한 피상적인 해석과 접근으로 빈약한 근거를 제시하고 있다.

실제로 반려동물이란 용어가 들어오기 이전부터 애완(동물)이란 한자어를 해석할 때 결국 '동물을 인간의 유희를 위한 존재로 일컫는 말'로 쓰임을 거의 모든 사람들이 인정하고 있었으며[58] 비록 희롱할 완(玩)을 쓴다고 해서 '동물을 한자어의 해석처럼 인간의 재미만을 위한 도구나 소유물처럼 취급해선 안 된다'라는 주장과 정서가 지지를 얻고 있었고 그 결과로 반려동물이란 용어가 주창되어 전해졌다.

애완 옹호 측은 희롱할 완이라는 훈독뿐만 아니라 즐길 완이라는 훈독도 있다며 애완이 문제없다고 주장하지만 애완 옹호 측의 주장과는 달리 희롱할 완이라는 훈독이 더 보편적으로 쓰였으며 어느 훈독이 더 많이 쓰였나와는 상관없이 희롱할 완이나 즐길 완이나 그게 그 뜻이라는 게 핵심이다. '즐기다'라는 동사는 일반적으로 대상을 유희의 목적으로 여기고 사용한다는 의미[59]가 담긴 말이지 대상 그 자체를 존중하는 뜻이 아니다. 만약 즐길 완이 애완 옹호 측이 주장한대로 사랑하고 좋아하다의 의미가 담겨있다면 사람에게도 玩이란 한자를 붙이지 않을 이유가 없다. 그러나 사람에게 즐기다라는 동사를 쓰는 건 보통 '일가 친인척과 모처럼 함께 있는 시간을 즐겼다', '연인과의 데이트를 즐겼다'처럼 '함께 있는 시간을 즐긴다'라는 의미가 담긴 뜻이다. 심지어 경우에 따라서 '그녀와 즐겼다'처럼 성적인 분위기를 풍기는 표현도 가능하다. 그러나 이러한 경우에도 玩이라는 한자로 표현하지는 않는다. 덧붙여 상술했듯이 '놀다'라는 의미 역시 우리가 일반적으로 사용하는 '같이 어울려 논다'라는 의미는 玩이라는 한자에는 담겨있지 않다. 반려동물이라는 단어가 비판적으로 고찰될 수는 있으나 玩이라는 한자를 그 비판적 고찰의 근거로 삼는 건 무리로 여겨진다.

3.1.4. 반려동물은 반려의 단어 정의에도 부합하는 개념이다

반려는 배우자에게만 쓰이며 더불어 반려라는 단어의 기본 전제가 자신과 모든 것을 평생 함께 누리는 동등한 지위의 관계여야 한다는 주장이 있으나 반려는 사실 동료, 친구라는 뜻이다. 옛 한시나 고전 산문 등에서도 伴侶는 절친히 어울리는 벗, 길동무 정도로 쓰이고 배우자의 의미로 쓰이는 경우가 오히려 훨씬 드물다. 물론 시대에 따라 뜻이 변하는 경우는 흔하지만 현대 국어사전에도 '반려'는 여전히 '짝이 되는 동무'를 기본 의미로 둔다. 다만 현대에 들어서 대체로 결혼 상대자에게 주로 쓰이긴 하지만 아예 뜻이 과거와 다르게 변했다기 보단 의미가 확장되고 그 확장된 의미가 주로 쓰인다고 봐야할 것이다.[60] 물론 인간과 인간이 기르는 동물이 진정한 의미에서 반려(친구)일 수 있는지는 다른 차원의 문제므로 제쳐두고, 뜻이 통하여 깊이 어울리는 사람 대 사람의 관계는 모두 '반려'라고 할 수 있다.

3.1.5. 반려동물의 입양 및 정치적 올바름에 대하여

반려동물을 '입양'하는 문제의 경우 인간의 입양, 특히 영유아의 입양의 사례를 들어 반박할 수 있다.[61] 물론 인간의 입양문제의 경우 피입양자의 의사 역시 당연히 존중되나 입양의 절대적인 비중을 차지하는 영유아의 입양의 경우 사실상 피입양자의 참된 의사를 파악하는 것 역시 동물의 의사를 파악하는 것 만큼이나 어려운 일이다.[62] 또한 반려동물의 기본적인 습성과 인지능력의 정도를 파악해서 그들의 본능과 그들 나름대로의 사회성을 존중하고 발달시키고자 하는 훈련법과 양육방식이 전문가를 통해서 확산되어 가고 있다.[63] 중성화 수술은 찬반 논쟁이 치열하긴 하나 수의학적으로는 동물의 장기적인 건강에 명확한 이점이 있는 탓에 아직은 확실히 결론 짓기가 힘든 면이 있다.[64] 반려동물의 과도한 미용의 문제는 오히려 이전부터 반려동물의 보호자들이 크게 비판해온 문제이며 대부분의 보호자들은 그저 피부건강과 더위를 막아주기 위해 미용을 한다. 즉 비록 인위적이긴 하나 애시당초 반려동물의 건강이 목적이다.[65] 목욕 역시 마찬가지로 너무 자주 하지 않는다는 전제하에 그들의 건강을 위해 행하는 것이다. 동물도 나름의 위생관념이 있고 오히려 동물의 위생관념에 무지한 인간의 오해 때문에 미용이나 목욕문제에 대한 논란이 나온다.[66] 종합해보면 해당 문제에 대한 논란은 동물을 대하는 태도를 어떻게 할 것인가의 문제이지 애완이냐 반려냐 같은 용어의 문제를 먼저 결정짓는 것은 오히려 본질을 벗어난 비약이다. 동물의 삶과 습성, 인지능력에 대한 과학적 지식의 심화와 전파 및 동물권에 대한 철학적 담론의 심화와 반려동물을 기르고 그들에게 애정을 가지고 책임지는 문화의 확산 등이 맞물려가는 과정에서 그러한 과정과 사회의 인식변화를 반영하기 위해 반려동물이라는 용어가 주창됐다. 즉 용어가 정해져서 용어에 뜻에 맞게 대하는 것이 아니라 대상에 대한 인식 및 태도 변화를 반영하여 그에 맞는 새로운 용어가 만들어진다.

또 애완동물과 반려동물이 표현이 다를 뿐 곁에 두고 있다는 점에서 맥락이 같다라고 말하는 이도 있지만, 그닥 적절한 해석이 아니라고 생각된다. 오히려 곁에 두거나 같이 사는 외적 행태만 같을 뿐 어떠한 의미로 곁에 두고 대상을 어떻게 여기는지에 대해 맥락이 완전히 다르다고 해석하는 것이 더 적절해 보인다.

3.2. '반려동물' 용어 변경 주장을 비판하는 입장

다음 웹툰 개와 토끼의 주인 작가가 이 문제에 대해 "근래의 애견가들이 자신들 사이에서 쓰이는 반려동물이라는 신조어를 애완동물이라는 말을 쓰는 사람들에게 강요하면서 감정의 골을 만들고 있다"고 주장하는 내용을 그렸다가 '반려동물'이라는 말을 주장하는 이들과 만화 내용을 지지하는 이들 사이에 논란이 일어난 적이 있다.

참고로 상단의 만화에서 주된 주제로 삼은 내용은 본 문서에도 상기되어 있는 반려라는 단어에 대한 부적절함과, 반려동물이라는 말을 주장하는 사람들에 의해 애완동물이라는 말의 의미가 변질되었다는 주장이다. 작가는 본래 쓰이고 있는 '반려'라는 의미와는 달리 '인간에 의한 일방적인 관계'라는 점, 더해서 실제로 쓰이는 '반려'라는 의미와는 달리 관계의 성립이 너무나도 가볍다는 점을 언급하였으며, 애완은 가지고 논다는 말이 아니라 사랑하고 놀아주는 관계라는 말이라고 해석하고 있다고 썼다.

특히 반려동물이라는 용어가 본격적으로 부각된 시기와 애완동물이라는 단어에 대한 본격적인 비판이 나온 시기는 비슷한데, 이는 일부 동물단체에서 반려동물이라는 용어를 제시하자 일반 대중들이 '애완동물이라는 단어를 충분히 그러한 의미로 쓰고있는데 왜 굳이 반려동물이라는 단어를 바꿔서 써야하느냐'는 반응이 나오자 이에 대응하기 위해 '애완동물은 사실 동물을 희롱하는 부정적인 의미가 있었다'라고 부연한 것으로, 전형적인 Ad Hoc 논증에 해당한다. 이는 일부 래디컬 페미니즘 단체에서 아들 자(子)를 쓴 것이 여성은 포함하지 않는다며 '자궁'을 '포궁'으로 써야한다고 주장하고, 닫을 폐(閉)는 부정적인 의미라며 '폐경'을 '완경'으로 써야한다고 주장하며, 부모(父母)에서 아비 부(父)가 앞에 위치한 것이 여성차별이라며 '모부'로 불러야한다는 식의 주장과 궤를 같이한다.

이 논란에는 '반려동물 용어를 사용해야한다', '애완동물 용어를 사용하지 말아야한다', '반려동물 용어를 사용하지 말아야한다', '애완동물 용어를 사용해야한다'는 4개 주장이 혼재되어있다. 즉 반려동물 용어 사용은 찬성하나 애완동물 용어 사용금지에는 반대하는 입장일 수도,[67] 반대로 반려동물 용어 사용은 반대하나 애완동물 용어 사용금지에도 찬성하는 입장[68]도 있을 수 있다는 뜻이다.

"애완동물을 써야한다고 주장하는 쪽은 반려동물 사용을 왜 반대하는가?"라고 주장이 있는데, 이에 대해 "반려동물 용어를 사용하고싶으면 사용하되, 반려동물 사용을 독려하기 위해 오래 전부터 써오던 애완동물이라는 단어를 부정적으로 매도하는 행동이 잘못된 것이다."라고 받아친다면, 애완동물과 반려동물 모두 써도 된다는 주장으로 이를 반박하는 것이 된다. 하지만 그들은 이러한 논리를 모른 채 "그렇게 동물을 좋아한다면서 애완동물 용어 사용을 주장하고 반려동물 용어 사용을 극도로 거부하는 이유가 뭐냐"는 식으로 흑백논리를 펼친다. 또한 어차피 반려동물이니 애완동물이니 포장해봐야 결국 인간의 목적으로 동물을 철창이든 집안이든 가둬놓고 기르는 것일 뿐[69] 동물은 야생으로 자유롭게 돌아다녀야 온당하다는 주장을 한다면, 애완과 반려라는 개념을 모두 부정하고 오로지 '동물'로만 봐야한다는 주장도 말이 된다. 결국 그들이 하는 행동은 먹기 위해 기르는 것이냐 아니면 자신의 마음을 위로받기 위해 기르는 것이냐의 차이일 뿐, 결국 동물은 인간의 도구로써 다루는 존재들일 뿐이라는 의미다.

3.2.1. 정말로 반려(伴侶)에 걸맞은 취급인가?

동물자유연대의 ‘2010 반려동물 소유자 의식 온라인 설문조사’[70]에 따르면 2010년 현재 한국의 경우 개가 죽을 때까지 키우는 비율은 12% 정도에 불과하며, 88%가 도중에 개를 유기, 파양, 재분양했다. 이 같은 통계 수치에 따르면 ‘개는 반려동물’이라 불릴 수 있는 경우는 극소수인 12%에 불과하기 때문에, 모든 애완동물에게 반려동물이라는 용어를 사용하는 것은 가당치도 않은 것이 된다. 인류와 오랜 시간을 함께 해 왔고, 양육법이 많이 알려진 개도 이 정도인데 다른 동물들은 오죽하겠는가.

대다수의 반려동물은 늙거나, 병들거나, 직장·이사·휴가 등 생활이 바뀌어 키우기 어려워지거나, 귀찮아지거나, 싫증이 나서 버려진다. 특히 여름 휴가철에 많이 버려진다. 한국에서 애완동물의 수는 대략 200만을 넘는다고 추산하는데[71] 그중에서 버려지는 동물의 수는 한 해에 10만 마리가 훨씬 넘는다. 매년 5%가 넘는 비율이다.

게다가 위 수치는 동물보호소 등에 통계로 잡히는 수일 뿐이고 실제는 이보다 훨씬 더 많다. 개가 병들거나 실증나기 전 한창 어리고 귀여울 때는 가족이네, 반려동물이네 하지만 결국 대한민국 반려동물 중 열에 아홉은 버려지고 만다. 몇몇 동물들이 버려지는 게 아니라 대부분이 결국은 유기되니 한국의 반려동물의 지위는 반려자나 companion과는 한참 거리가 멀고 귀여울 때는 키우다가 낡으면 버리는 사실상 살아있는 장난감일 뿐이다. 애완동물, 반려동물이란 말은 그 대상이 되는 동물들뿐만이 아니라, 동물을 키우는 문화 전반을 칭하는 용어로도 사용되고 있는데, 현대 대한민국에서 동물을 키우는 문화의 현 실태를 보면 반려는 커녕 애완이라는 표현조차 과분하다.

동물들을 기왕이면 예쁘고 존중이 담긴 말로 표현하고, 나아가서는 그 말에 어울리는 대우를 받게 만들자는 의도는 좋다. 하지만 단어는 기본적으로 그러한 정치적 의도보다는 현실의 대상을 정확하게 지칭하기 위해 만들어져야 하는 것이고, 심지어는 용어만 바꾼다고 해서 그런 긍정적인 변화가 일어날 것이라는 보장마저 없다. 오히려 이런 현실과 동떨어진 용어의 사용이 우리들이 향유하는 동물 문화의 현주소에 대한 인식을 마비시킬 우려조차 존재한다.

2021년에 들어 동물유기가 형사처벌 대상이 된 일은 반려동물 용어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현실에서 자신의 동물을 애완동물이라고 부르며 사랑하고 키우는 사람들 역시 동물 유기율 감소와 동물의 권리를 위해 부던히 힘쓰는 것은 마찬가지이며, 결국 반려동물이라는 용어와는 상관 없이 동물을 진정으로 아끼고 행동까지 하는 사람은 언제나 소수였지 반려동물이라는 말이 보급되었다고 해서 딱히 더 늘어나지도 줄어들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이들은 당연히 반려동물이라는 말이 없었어도 노력했을 사람들이다. 옹호론에서는 반려동물이란 말을 사용하는 사람들이 특히 더 동물들을 아끼며 운동했을 것처럼 적혀있지만, 2015년대 이후부터 반려동물이라는 말이 주류적으로 보급되기 시작한 이후로도 애완동물 유기율은 유의미하게 줄지 않았었다. 즉 자기 동물을 반려동물이라고 표현하는 사람 10명 중 8명이 동물을 길거리에 내버리고 있었다는 말이다. 이 상황에 반려동물이라는 용어 사용을 옹호하기 위해 반려동물을 키운 사람들이 가장 노력했다 주장하는 것은 그냥 동물들을 위해 문제 제기를 한 사람들은 당연히 반려동물이라는 표현을 장려할 것이라는, 연관성이 전혀 증명되지 않은 주장에 불과하다.

실제로 반려동물이라는 말은 대한민국에서는 2010년대부터 쓰이기 시작해서 2015년 즈음에는 인터넷에서도 아주 빈번하게 사용되고 대부분의 공식 미디어에서는 애완동물보다 반려동물이라는 말이 사용될 정도로 정착되었으며, 2021년까지 그 사용빈도는 점점 높아졌다. 그러나 정작 애완동물 유기율은 2010부터 2015년까지는 다소 줄어들었다가, 2015년부터 2019년까지는 다시 수직상승하다가 2020년에야 조금 주춤했다. 뭣하면 2015년부터 2020년 사이에는 반려동물이라는 말의 보급률과 동물의 유기율이 정비례하여 올라가기도 했다. 즉, 반려동물이라는 용어의 사용빈도와 유기율은 줄곧 아예 따로 놀고 있었다. 유의미한 영향을 전혀 끼치지 못했다는 소리이며, 결론은 동물 유기에 대한 경각심의 부상을 동물을 사랑하는 사람들이라는 실체를 가진 개개인의 노력에 위한 것이지, 반려동물이라는 워딩의 순작용이라 보기는 어렵다.

3.2.2. 반려 호칭이 인간과 동물 사이의 권력관계를 은폐한다

이러한 '반려동물'이라는 단어에 거부감을 표시하는 사람도 많다. 짝이 되는 친구라는 뜻의 반려(동반자, 반려자)란 단어가 과연 사람과 동물의 권력관계를 공정하게 나타내는 용어냐는 의문이다. 언뜻 '미물이 인간의 반려자가 될 수 있겠냐'는 인간우월주의에서 나온 발언이라 착각할 수 있지만 오히려 정반대이다. 사람과 동물의 관계는 대개 사람이 동물을 고르고 돈을 주거나 분양받아서 시작하게 된다. 반대로 동물이 스스로 사람을 고르는 경우는 세상에 이런일이 등에서 자주 나오는 사례처럼, 동물이 모종의 이유로 사람의 집을 자주 드나들며 먹을 걸 얻어먹다가 그대로 집에 쭉 눌러앉아 살게 되는 등의 케이스다.[72] 동물의 의사는 거의 무시되는 이 관계를 '반려'라고 부르는 것이 오히려 인간 중심이며 관계 왜곡이라는 것이다. 동물의 입장에서 생각해 봐야 한다는 의미다.

견주들은 자신이 애견에게 가하는 모든 행동들이 다 애견을 위해서라고 말한다. 하지만 실상은 자기 자신을 위한 것에 불과하며 진정으로 애견들이 원하는 것은 거의 없다. 먹이를 주는 것과 함께 놀아주는 것을 제외하면 견주들이 하는 행동의 대부분은 개들이 싫어하는 것들이다. 대표적으로 견주들이 둘째 강아지를 데려올 때 한결같이 하는 말이 첫째가 혼자 있을 때 외로워 해서라고 말하는 것이다. 하지만 애견 전문가들은 개들은 혼자서 키워질 때 가장 행복하며 둘째가 새로 들어오면 극도로 스트레스를 받는다고 한다. 자신이 혼자 누리던 주인의 사랑과 집 공간에 갑자기 낯선 개가 들어오면 칩입자, 훼방꾼으로 여길 뿐이다. 첫째 개는 죽을(혹은 유기될) 때까지 언젠가는 둘째가 원래 자기 집으로 돌아갈 것을 염원하며 산다고 한다. 견주들은 첫째가 커가면서 외모가 못생겨지게 되자 더 귀여운 강아지를 키워보려는 욕구에서 둘째를 들이지만 이를 첫째의 외로움을 덜어주기 위해서라고 핑계대며 스스로를 합리한다고 애견 전문가들은 지적한다. 견주들의 이같은 위선은 강아지를 훈련시키고 규제시키는 거의 모든 행동에 녹아 있다.

가장 큰 문제가 되는 것은 사람과 동물의 '주종 관계'다. 사람은 자신이 원하는 외모와 성격을 지닌 동물을 직접 골라서 선택할 수 있지만, 동물은 자신과 함께할 사람이 잘생겼건 못생겼건, 성격이 좋건 나쁘건 간에 고르지 못하며 싫든 좋든 일방적으로 선택당하는 입장이다. 어쩌면 동물은 인간과 같이 사는 것 자체를 원하지 않을 수도 있다. 설령 인간과 같이 살길 원하는 동물이라 하더라도 그 많은 인간 중에서 당신과 같은 인간과 같이 살길 원하는지는 결코 알 수 없다. 물론 처음에 그 주인이 맘에 들었건 안 들었건 개는 결국 주인에게 복종하고 따르게 되어 있다. 이는 복종 훈련을 필수적으로 거치기 때문이다.

주인은 동물을 데려온 후 오랜 기간 동안 동물을 훈련시킨다. 특히 개의 경우 주인이 개보다 서열이 위라는 것을 확실히 인식시키기 위해서 엄격한 복종 훈련을 거친다. 그밖에도 인간의 편의를 위해 강제적인 배변 훈련, 짖음 방지 훈련, 입질 훈련 등을 거친다. 모두 동물의 자연스럽고 본능적인 행동을 억제하도록 강제하는 것들이다. 간혹 이러한 복종 훈련에 거부감을 느끼는 견주도 있지만 애견전문가들은 복종 훈련은 개를 사랑하기 때문에 반드시 필요한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이러한 일련의 훈련들은 전적으로 인간의, 인간에 의한, 인간을 위한 훈련일 뿐, 애견인들이 말하는 바와는 달리 개를 위한 것이 아니다. 개 자신을 위해서라면 이런 훈련은 필요없다. 개는 자신의 본능에 따라 행동할 뿐이고, 그런 행동들은 개의 입장에서는 전혀 나쁜 행동이 아니며 자연에서는 자신의 생존을 위해 발달시켜야 할 좋은 본능들이다. 다만 사람의 마음에 들지 않는 행동일 뿐이다.

물론 이러한 훈련을 통해 주변의 인간들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개가 되어야 비로소 그 개는 인간사회에 섞여살며 동물권을 보장받고 보호받으며 살 수 있기에, 그러한 관점에서 본다면 훈련은 개를 위한 것이라고 할 수 있지만[73], 이는 결국 견주의 만족을 위해 애완견을 사람 사회에서 살게 해야 한다는 전제 하에서 개를 보호할 수 있는 방법일 뿐이지, 애완동물과 인간의 관계 자체가, 동물이 야생에서 살아가는 상태보다 행복하게 만들어 준다고 말하기는 힘들다. 설령 개념있는 주인을 만나 애정어린 보살핌을 받고 야생에 비해 안락한 삶을 누리며 결과적으로 행복을 느낀다 하더라도 동등한 입장의 반려라는 표현은 어울리지 않다고 볼 수 있다.

또 주인은 자신의 편의에 따라 동물의 의사와 관계없이 중성화수술, 즉 성 기능 제거 수술을 행한다. 성은 인간을 비롯한 모든 동물의 삶에서 매우 중요한 부분을 차지한다. 종족 번식의 욕구는 개체 보존의 욕구와 더불어 모든 생물에게서 가장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본능이다. 특히 본능이 강하게 지배하는 동물에게 있어서 성은 삶 그 자체의 목적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며, 개체 보존보다 종족 번식이 우선하는 경우도 흔히 볼 수 있다. 곤충의 경우 성행위를 하고 나서 일생을 마치는 경우가 흔하다. 동물뿐만 아니라 인간에게도 성욕을 충족하는 과정은 가장 큰 쾌락과 즐거움 중 하나로 간주된다. 인간은 본인의 의사와 관계없이 성기를 제거당하는 것을 죽는 것 다음으로 수치스럽게 여긴다. 그러나 죽도록 수치스러운 행위를 자신의 소위 반려동물에게는 별 가책없이 행한다. 이렇게 강제로 성기능을 제거당하고 나면 대부분 성격과 행동 양식에 변화가 생긴다. 반려라고 부르면서도 애완동물의 주거환경을 위해 자신의 성기능을 제거하는 경우는 없을 것이다. 오히려 출산을 위해서 키우던 개나 고양이를 남에게 맡기거나 아예 내다버리는 경우는 흔하다.

중성화수술을 옹호하는 사람들은 오히려 반려동물을 위한 배려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주인이 짝을 지어줄 형편이 된다면야 굳이 중성화 수술을 시행하진 않으나, 대부분 형편이 여의치 않은 경우에 시행한다. 과거엔 정신지체나 중증의 장애인들에게는 이런 시술을 국가적 차원에서 행하던 시절도 있었으나, 결국 인권문제로 폐기되었단 걸 상기해보자. 그 동물이 애초 인간과 살고 싶어하는 지도 확실치 않은데, 자기 마음대로 쇼핑하듯 데려와서 강제 모태솔로로 만들어놓고 고통이라도 제거해주겠다고 중성화 수술까지 시킨다는 것은, 동물의 의사는 상관없이 인간들의 만족을 위한 '기쁨조'일 뿐, 동등한 반려관계는 아니다. 엄연히 '갑'은 인간이기에 맘에 안 들면 파양된다.

또 인간은 자신을 위해 동물의 발톱을 자르거나 목줄을 채우기도 한다. 동물에게 발톱은 야생에서 생존에 있어 결정적으로 중요한 수단 중 하나다. 때문에 동물들은 스스로 발톱을 가는 등 자신의 방식대로 관리하며 중시한다. 때문에 어린 시절 동물의 발톱을 자를 때 크게 반항하는 경우가 많은 것은 이런 이유 때문이다. 목은 당연히 동물에게 가장 약한 부분이다. 개는 본능적으로 이 사실을 잘 알기 때문에 사람이나 다른 동물을 공격할 때 본능적으로 항상 목을 공격한다. 목줄을 채운다는 것은 무척 불편할 뿐만 아니라 동물 입장에서도 매우 수치스럽게 느껴질 수 있다. 또 인간은 자신의 편의에 따라 제모나 염색을 시키기도 한다. 심지어 힘들다 싶으면 동물을 내치고 버리기도 한다.

키우는 동물을 자유롭게 놔두면 이웃에게 피해를 줄 수 있어 동물의 행동은 어쩔 수 없이 통제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런데 사람은 이웃에게 피해를 주는 것과 무관한 부분에서도 동물의 행동을 제한하고 동물이 싫어하는 행동을 강요하기도 한다. 대표적으로 개들이 생존을 위해 본능적으로 이곳저곳에 행하는 마킹(소변)을 금하는 것이 그러하다.

무엇보다 근본적인 사실은, 이러한 중성화, 훈련, 케어 등등은 동물들에게 필요하다고는 해도 어디까지나 동물들이 인간 사회에서 적응하고 살아가는데 필요한 것이며, 동물들을 인간 사회로 데려온 것은 오로지 인간들이 결정한 일이라는 것이다. 이렇게 사람은 동물의 신체와 자유를 사람의 사정과 편의에 따라 강제로 구속, 억압해왔다. 이런 강제성을 외면하고, 어디까지나 인간의 편의를 최우선한 다음에야 동물들을 돌보는 자신들의 문화를 반려자 문화 취급하는 행위는 위선이고 미화이다. '원했든 원치 않았든 동물을 편의에 따라 고르고 제어하지만 삶의 동반자로서 사랑하고 아낀다.'라는 모순이 발생하기 때문이다.

3.2.3. 동물의 자유의지 문제

다른 존재를 돈을 주거나 해서 구해 기르는 관계가 '반려'라고 할 수 있는지는 확실치 않다. 그렇기에 이 관계의 강제성을 인정하고 가책을 느끼는 사람들은 '반려동물'이라는 말을 거부한다. '애완동물'이란 표현에는 주종 관계의 의미가 들어 있다. 이는 사람이 동물을 아래에 두고 입맛에 맞게 다룬다는 것을 솔직하게 인정하는 표현이다.

대개 짝인 동물의 의지와는 관련없이 오로지 인간이 동물을 골라서 기른다. 동물이 자신의 입장을 파악하고 개입과 강요 없이 자유의지에 따라 사람과 삶을 함께하기로 결심했다면, 이를 이상적인 '반려동물'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동물이 언어를 쓸 줄 안다면 모를까 동물의 의사 확인은 현실적으로 어렵다. 이런 관계를 '반려 관계'라고 부른다면 반드시 논쟁의 꼬리표가 붙을 것이다. 반려는 엄연히 양측의 합의가 있어야 성립하는 표현이다.

또한 자신의 의사를 표현할 지적 능력도 언어적 수단도 보유하지 못하는 아동이 피입양자로 선발되는 입양 과정을 동물을 들이는 시스템과 동등하게 취급할 수 있는지에 대한 고민이 필요하다. 인간은 성장 가능성을 담보 받는다. 사리분별 능력이 완전히 결여된 특수한 극소수 사례를 제외한다면 일정 연령에 도달하면 자신이 맺고 있는 인간관계 일체를 자율적으로 성찰하는 능력을 발현시킬 수 있다. 즉 인간은 그 관계를 2차적으로 수용하거나, 아니면 관계를 거부하여 연을 끊어 버릴 수 있는 권한을 고유하게 부여 받는다.

지적·언어 장애, 혹은 입양자의 월권 행위로 인해 재정립을 실행하지 못하고 있는 피입양자들이 있다면, 외부에서 개입해 줘서 방해 요인을 제거한 후 거부권을 행사할지 여부를 확인할 수 있다. 지적, 언어 장애가 있다 하더라도 인지과학, 언어학의 발전으로 인해 이들의 인간다운 감정과 의지를 일반적인 인간의 언어로 상당량 변환할 수 있기에 해당 장애로 인한 기술적인 장벽도 최소화한 지 오래이다. 그에 반해 우리가 동물에게 2차적인 관계 재정립을 요청하여 양자에 의한 완연한 자율적 관계를 구축케 하는 상황을 기대할 수 있을까?

그리고 입양 행위는 아동들이 특수 사정으로 인해 일반적인 양육 환경, 즉 부모라는 양육 책임자에 의한 직접적인 보육이 이뤄지는 생활 공동체에서 벗어나 있는 상황을 복구하겠다는 목적을 갖는다. 따라서 우리는 아동이 입양되어 성장되어 갈 환경이 필시 인간이 인간으로서 자라기 위한 인간다운 사회적, 정서적, 지적, 물적 기초를 보장해야 함을 요구한다. 그 누구도 인간 피입양자를 야생의 늑대가 이상적으로 성장할 환경으로 몰아 넣어선 안 됨을 요구한다. 하지만 인간사회에 편입되는 동물은 어떻게든 인간사회의 패턴을 자신에 각인시켜야 한다.

물론 종에 걸맞은 생활 환경은 인간에 의해 보장될 수도 있지만, 그럼에도 이것도 어디까지나 인위적인 주입 수준을 넘어설 수 없다. 무엇보다 한번 인간사회에 편입되어 평생을 그 바운더리에서 생존해야 한다면, 종에 걸맞은 패턴 보장도 인간사회의 법도를 넘지 않는 선에서 조절되어야 한다. 종족 번식 및 성생활 욕구는 모든 동물에게 고유하기에 해당 행위를 어떻게 실행할지에 대한 권한도 보장되어야 함에도, 왜 선진적인 동물 권리를 주창하는 이들마저 중성화 수술이 화두가 되면 찬반양론으로 나뉘는가? 왜냐하면 동물이란 존재는 인간사회에 속박되어 건강 및 수명까지도 컨트롤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동물이 스스로 종족 번식 및 성생활을 실행하지 못하도록 그들의 행동 범위를 인간이 어느 정도 제한해야만 한다.

3.2.4. 한국의 상당수 동물 양육자들이 반려 개념을 수용하는 동기

반려 개념을 수용하는 상당수 대중들은 자신들이 동물에 느끼는 감정적인 가까움을 과감히 드러내거나 자신의 동물이 매우 소중한 존재라는 점을 어필하기 위해 기꺼이 '반려'라는 단어를 받아들이고 있다. 그리고 이들 중엔 반려동물 개념을 수용하면서 꼭 자율의지 및 해당 동물들에 고유한 사회성에 관한 문제의식을 공유하지 않는 케이스가 상당히 많다. 실제로 이들이 자신의 동물을 가족처럼, 반려자처럼 사랑하는 과정에서 취하는 수단, 방법들이 해당 동물의 자유의사 및 종족 본능과 배치되는 경향이 있을 수 있다.

예컨대 개에게 의복은 몇몇 예외 상황을 제외한다면 별다른 필요성이 없는 물건에 불과하다. 하지만 이런 동물들을 '감정적인 교감이 가능할 정도로 가까운 존재'로 이해하는 이들의 입장에선 자신의 동물을 향한 사랑을 의복을 통해 표현할 수도 있다. 더군다나 "우리 강아지는 잘만 입고 있는데요? 옷을 입으면 좋아하는 거 같기도 하고요"라고 적극적으로 항변하는 케이스도 많다. 옷을 입으니 주인이 이뻐해 주거나 특수한 보상을 해줘서 개가 옷을 입히는 행위를 기꺼이 받아들일 수도 있다. 그렇다면 개의 저런 행동은 개주인과 사랑을 확인하고 나누는 과정에서 전적으로 배제해야 마땅한가? 오히려 동물이 주인으로부터 받은 자극을 수용함으로써 서로가 품는 유대감이 더욱 깊어지는 효과를 기대할 수 있지 않을까?

현대 사회에서 동물을 기르는 사람과 공동 생활을 하기 위해 자연스레 주인의 특정 행동을 묵인하거나 그에 동조하겠다는 동물의 선택은 결과적으로 사랑하는 관계를 돈독히 하는 효과를 낳을 수도 있다. 그럼에도 이런 태도를 비판적으로 인식해야 한다면, 이들이 '반려'라는 단어를 취사, 유포하고 고착화시키는 패턴도 재검토해야만 한다. '반려' 개념을 "정치적으로 올바르게" 바로세우고 싶다면, 반려동물이란 용어를 왜곡되게 수용하는 사람들에 대한 비판 과정이 필히 수반되어야 한다.

게다가 반려동물이란 단어 사용 비판에 유독 민감하게 반응하는 사람들은 인간과 동물 사이의 감성적 교감을 인격을 가진 존재들의 교류로 치환하고 있을 가능성이 크다. 당장 개고기를 반대하는 상당수는 "반려동물로 분류되는 특정 생명체를 먹는 이들은 식인종과 똑같은 야만인이다."라고 전제한다. 이는 개와 같은 특정 생명체를 천부인권을 부여받은, 즉 인격을 지닌 존재로 격상시키기에 가능한 귀결이다. 더군다나 이들은 애완동물 체계 및 극소수의 애완동물들에 대한 특별 대우를 보편적인 절대선으로 단정해서 이를 모든 사회에다 관철시키겠다는 감성 이데올로기로 무장하고 있는 경우가 많다. 그렇기에 애완동물 제도 자체에 대한 비판을 미개함으로 취급해 이를 미리 봉쇄하거나, 자신들의 감수성을 충족시키는 '반려동물'이란 단어 사용을 다른 사람에게도 강제하는 경향이 생긴다는 것이다.[74] 게다가 이런 감성 이데올로기를 공유하는 집단이 애완동물 분양률의 급속한 증가에 맞물려 거대해지고 있으며, 자신의 감성 이데올로기를 충족시키고자 적극적으로 정치적 개입을 꾀하고 있다.

3.2.5. 애완(愛玩)에는 동물비하적인 의미가 없다

본격적으로 들어가기에 앞서 두 가지 확실히 해야할 개념이 있다.

첫 번째로, 희롱할 완(玩)에 대해 '희롱하다'라는 해설이 어떻게 붙었는지 알 필요가 있다. 한자식 외래어는 엄연히 한국어의 일부를 구성하고 있지만 글자는 엄연히 중국의 글자인 한자에 속하며, 이는 한국어와 한자가 완전히 동치가 되지 않을 수 있음을 의미한다. 훈민정음 언해본에서 한글의 창제 이유로 '나랏말이 중국과 달라 문자가 서로 맞지 않다'로 시작하는 부분에서 알 수 있다. 즉, 우리가 玩이라는 글자를 보고 '희롱할 완'이라고 쓰는 것은, 玩의 뜻과 음을 최대한 한국어로 직관적으로 설명하기 위해 '희롱하다'라는 한국어와 '완'이라는 한글을 붙여서 설명한 것이며 그러한 한국어 풀이가 실제 한자의 뜻과 음이 완전히 동치가 아닐 수 있음을 의미한다.

두 번째로, 완(玩)의 의미를 설명하기 위해 다른 예시를 드는 것은 애완(愛玩)의 뜻을 해석하는 것에 있어서 참고자료만 된다는 것이다. 그것이 완월장취(玩月長醉)든 완구(玩具)든 어떤 단어에서 어떤 글자로 쓰였든 간에, 우리는 애완(愛玩)의 뜻을 해석하기 위해 애완이라는 단어 자체에 집중할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한자는 글자마다 폭넓고 다양한 의미로 쓰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모든 한자에 적용되는 개념으로, 많이 쓰이는 글자라고 해서 다양한 의미로 쓰이고 적게 쓰이는 글자라고 해서 한정된 의미로 쓰이는 것도 아니며, 많이 쓰이는 의미가 있다해서 그것을 다른 사례에 곧바로 적용할 수 없다. 예를 들어, 논어에는 樂山樂水[75]라는 말이 나오는데, '낙산낙수'로 읽는 사람도 있겠지만 '요산요수'라고 읽는 것이 정확하다. 樂이라는 한자가 '락' 또는 '낙'이라고 많이 읽히고 '요'라고 읽히는 경우는 요산요수가 거의 유일하지만, 다른 곳에서 무수히 '락' 또는 '낙'이라고 읽는다고 해서 요산요수를 낙산낙수라고 주장할 수는 없는 것이다. 완(玩) 또한 단순히 희롱하다는 의미로 쓰이는 경우도 있지만 그렇지 않은 의미로 쓰이는 경우도 분명히 있다. 이를 종합해서 보면 완(玩)이라는 글자에는 단순히 희롱한다는 의미를 넘어 단어와 문장에 따라 노는 것, 즐기는 것 등 보다 다양한 의미를 담을 수 있다고 보는 것이 맞다. 한자의 형성과 관련하여 육서를 참고하면 좋을 것이다.

위의 두 가지 개념을 확실히 한다면, 우리는 '애완(愛玩)이 부정적인 뜻이 있다'는 주장을 들여다보기 위해서는 애완(愛玩)이라는 단어에만 집중해야하며, 애완(愛玩)에서 완(玩)이라는 글자가 실제 희롱하는지 어떤지도 애완(愛玩)이라는 글자 안에서만 봐야한다는 결론이 나온다. 바꿔 말하자면 애완(愛玩)이라는 단어의 쓰임새를 집중적으로 봐야하는 것이다.

한국어에서는 이미 애견(愛犬)이나 애묘(愛猫)라는 말을 이전부터 써왔고 여기에는 완(玩)이라는 글자가 없기 때문에 논란 없이 사랑 애(愛)의 의미만 담겼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한국어에서는 애견, 애묘와 동시에 애완견(愛玩犬)이나 애완묘(愛玩猫)라는 말도 써왔다. 만약 한국어에서 '애'와 '애완'의 의미가 어떠한 형태로든 의미가 달랐다면, 애견≠애완견이 되어야하고 애묘≠애완묘가 되어야한다. 만약 이 단어들의 차이가 없다면, '애완'의 의미에 동물비하적인 의미가 있다는 주장은 간단히 논박할 수 있다. 만약 그러한 의도가 없더라도 완(玩)이 들어갔으니 암시적으로 동물비하적인 의미를 쓴 것이라는 주장을 하겠다면, 위의 첫 번째와 두 번째 개념을 다시 확인해보길 바란다.

영어에서 -man이 붙은 단어들[76]에 대해 그 뜻이 남자뿐만 아니라 사람이라는 뜻이 있음에도 남성 중심적이라는 이유로 단어를 대체해서 쓰는 경우가 있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이러한 단어들은 20세기 전까지만 해도 정말로 남성 위주의 직업이었기에 이러한 명칭으로 불린 면이 있으며 이후 여성의 사회 진출이 활발해지면서 문제가 제기된 것이기에 역사적인 근거가 분명히 있다. 이와 비슷한 논리도 동물도 과거에 천대했음을 근거로 완(玩)을 썼음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지만 정말로 동물을 천대할 목적으로 완(玩)을 썼다면 과거의 표현에서는 애견≠애완견이고 애묘≠애완묘였음을 입증해야 할 필요가 있다. 적어도 사랑하면서도 증오한다는 뜻인 애증(愛憎)의 경우처럼 애완(愛玩)이 애(愛)와 비교했을 때 정확히 어떠한 의미 차이가 있는지 설명할 수 있어야 설득력을 가지는 주장이라는 것이다.

애초에 애완의 의미를 부정적인 뜻이 있다고 주장하게 된 계기가 동물단체들이 반려동물이라는 단어를 내세우면서 시작되었다. 이들의 주장에 따르면 대중들이 애완동물의 부정적인 뜻을 알고 이제야 반려동물이라는 단어로 바꿔부르기 시작했다는 식으로 성과를 내세우지만, 그 이면에는 동물단체들이 애완동물이라는 단어를 쓰는 기업이나 매체 등에 집단으로 항의하거나 부정적인 의견을 제시했고, 이들을 상대로 장사하는 기업은 이들의 반발을 사지 않기 위해 반려동물이라는 단어를 쓰기 시작했으며 방송 매체에서도 논란을 피하기 위해 반려동물이라는 표현을 쓰기 시작해 반강제적으로 정착된 것이다.

그래도 단어를 바꿈으로서 사람들의 인식을 바꿀 수 있지 않냐는 주장도 있다. 하지만 명확한 근거가 부족한 상태에서 다른 단어로의 전용(轉用)을 주장하는 것은, 그 이면에 다른 의도가 있다고 볼 수밖에 없다. 실제로 이후 동물단체들은 도둑고양이라는 단어를 길고양이로 바꾸자고 주장했고 도둑이라는 의미는 명확히 부정적으로 볼 수 있기에 대중들의 인정을 받아 빠르게 길고양이로 바꿔 쓰이기 시작했지만, 이후 길고양이의 문제점이 사회적으로 대두되기 시작하고 길고양이라는 단어 자체가 부정적으로 변해가자 이번에는 '동네고양이'로 바꿔쓰자는 주장을 새로 하고 있다. 캣맘이라는 단어 또한 동물단체들이 영어로 고양이를 뜻하는 캣(cat)에 친근하고 소중하다는 이미지를 주는 엄마라는 뜻을 가진 을 붙여서 만든 단어이지만, 이후 캣맘 문제가 사회적으로 대두되면서 캣맘이라는 단어 자체가 부정적으로 변해가자[77] '케어테이커', '가디언' 등 다른 단어로 바꿔쓰자는 주장을 새로 하기 시작했다. 즉, 이러한 동물단체의 목적은 단어에 내재한 문제를 지적해서 바꾸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실제 그 단어로 지목하는 대상이 문제점을 드러내며 사회적으로 부정적인 인식이 쌓이고 단어가 부정적인 의미로 오염되기 시작하자 본질을 긍정적인 방향으로 개선하는 것이 아니라 단어만 새롭고 긍정적인 단어로 교체함으로써 이미지 세탁을 하려는 의도로 보인다.

3.2.6. 용어 중립성

애완동물을 '반려'라는 단어로 대체하려는 행위는 친구나 동료 사이보다 단계가 높은 유대관계를 전제로 한다. 비슷한 뉘앙스로 종종 소환되는 단어가 바로 '가족'이라는 점이 이를 뒷받침한다. 하지만 이러한 관계 설정에 부담을 느끼는 인식도 엄연히 존재하고 있고, 더불어 반려자란 단어에서 필시 '인격을 지닌 존재들의 동등한 관계(짝) 맺음'이란 개념을 떠올리는 사람들이 많다는 점 역시 부정할 수 없다. 따라서 태초부터 상반된 반응들을 이끌어 내기 마련인 '반려'보다는 되도록 갈등이 생길 여지를 줄여주는 단어를 쓰는 편이 현명하다는 주장이 제기되고 있다.

천부인권 개념의 시혜적 속성, 즉 일정 수준에 도달하였다는 가정 하에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침해 당하지 않을 권리를 부여하는 특성으로 인하여, 자기 결정권이 결여되었다고 간주되는 극소수 인격체에게는 천부인권 보장을 축소해서 적용하는 관행이 등장하곤 한다. 이와 같은 천부인권 논쟁과 반려동물 논쟁을 결부시키면 어떻게 될까? 해당 논점은 아래와 같다.

- 동물들 중에 언어 능력, 2차적 반성 능력, 지적 능력 등 인간을 구성하는 본연적인 조건들을 상당 부분 충족시키는, 인간의 반려자로서 어울릴 만한 집단이 존재하는가?
- 인격적 동물 집단은 어느 선까지 인간이 누리는 자율권을 보장 받아야 하는가?
- 그런 집단이 존재한다면, 그런 능력치에 도달하지 못하는 여타 동물들에겐 반려자가 누려야 할 권리를 보장하지 않아도 정당한가?

이에 대해, 반려 개념을 적용한다고 인간과 완전히 동일하다는 전제를 깔지 않는다고 반론을 넣을 수 있다. 단지 반려라는 명칭을 통해, 자신과 깊은 정서적 교감을 공유하는 동물에게 옳은 명칭을 줄 수 있거나, 혹은 동물의 지위 상승을 기대할 수 있다고 주장할 수도 있다. 그럼에도 '반려'란 단어가 함축하는 다의성으로 인해 용어 논쟁은 필연적으로 발생할 수밖에 없었다. 반려자란 단어에서 '인격을 지닌 존재들의 동등한 관계 맺음'이란 개념을 떠올리는 입장에선 펫 시스템에 고유한 인간과 동물 사이의 비대칭 권력 관계에 민감히 반응할 수밖에 없게 된다. 그리고 이러한 비대칭성을 가능케 하는 인간과 동물의 차이에 주목하게 된다. 또한 반려동물 개념을 수용하는 사람들 중 상당수가 개고기 문제를 포함하는 동물권 논쟁 과정에서 보이는 모습에서 특정 동물군만 차별적으로 우대하는, 불편부당하지 않은 가치관을 발견하게 된다.

4. 애완/반려 대신 사용할 만한 표현

애완동물이라는 표현이 동물을 비하하는 가치관을 옹호한다고 판단하거나, 반려동물이라는 표현이 인간과 동물의 관계를 기만하고 위선을 조장한다고 보아 둘 다 피하자는 주장이다. 그 경우 다음과 같은 제3의 선택지를 생각해 볼 수 있다.
  • 동거동물: '자신과 함께 살고 있는 동물'의 의미만을 담고 있다. 동물과 인간이 동등한 반려자 관계라는 의미는 포함돼 있지 않으며, 동거에 상호 동의가 있었는지 없었는지를 논할 필요가 없는 표현이다.
  • 집동물: '거의 집 안에 있는 동물'의 의미를 담음으로써 야생동물과 구분할 수 있고, '축(畜)' 표현을 쓰지 않았으므로 인간이 고기를 얻기 위해 키우는 '가축(家畜)'과도 구별된다. 그리고 애완동물, 반려동물 등은 4음절인 반면 이쪽은 3음절이어서 더 경제적이다. 프랑스어 명칭을 직역한 '반려동물'과 반대로 '집동물'이란 명칭은 독일어 명칭 Heimtier(하임티어)를 직역한 것으로 보인다.
  • 애견/애묘 등 애(愛)+동물을 의미하는 한자: 논란이 되는 한자 완(玩)이 들어가지 않고, 단순히 사랑하는 개, 사랑하는 고양이 등 긍정적인 표현만 있으므로 무난하게 사용할 수 있다. 다만 종을 넘어서 펫으로 키우는 동물이라는 포괄적인 단어로는 사용할 수가 없다.

반면에 다음과 같은 대체표현들은 여전히 논란의 여지가 있다.
  • 친구동물
  • 가족동물

5. 관련 문서



[1] 출처, 출처2[2] 일본에서도 해당 표현이 처음 들어왔을 때는 영어를 그대로 음차한 'コンパニオンアニマル'(콘파니온 아니마루) 표현으로 불렀으며, 지금도 외래어 표현이 더 일반적이다. '반려동물'이란 한자어로 번역한 것은 더 나중의 일이다.[3] 심지어 막연한 PC주의로만 이해해서 거부감을 가지는 경우도 있다. 물론 PC에 영합하려는 경향이 없지는 않으나 대체로 미국의 경우에 불과하고 미국에서도 동물단체가 그저 PC주의 운동에 편승하는 경향이 있을 뿐이며 그나마도 최근의 일이다. 애시당초 반려동물이란 용어가 최초로 제시된 해는 1983년이며 당시에도 PC와의 직접적인 연관성이 있다고 보기는 어렵다.[4] 혹은 '애완동물은 반려동물이란 뜻을 포함한다.'[5] 실제로 기성세대에겐 동물은 재산처럼 여겨졌었다. 동물에게 가족 같은 애정을 가지는 사람이 유별나다는 취급을 받던 세대였다. 한편 이러한 인식은 굳이 기성세대만 가지는 게 아니라 2000년대 초반까지 한국사회의 전반적인 인식이었다.[6] 혹은 '애완은 반려란 개념으로 쓰인다.'[7] 명확하게 정리하자면 애완(혹은 애완동물)이란 단어에 대해서 기성세대와 기존 한국사회는 애완이라는 한자어의 뜻이 일종의 유희적/도구적 의미라고 인정했으며, 반려동물 전파 이후의 애완 옹호론자들은 애완이라는 단어 자체가 반려동물과 다를 것이 없다는 주장을 펼쳤다. 즉 반려동물 옹호 측이 애완에 없던 부정적인 의미를 부과한 게 아니라 원래 다소 부정적인 뜻이 있었던 단어를 애완 옹호측이 무리하게 옹호한다.[8] 당장 반려동물 옹호측은 하단의 용어의 뜻을 설명하는 문단에 애완이 기존에 어떻게 쓰였고 의미변화 역시 없었다는 것을 출처를 제시하며 증명했다. 하지만 애완 옹호측은 용어와 관련해서 만큼은 자신들의 주장(애완=반려)을 입증할 어떠한 증거도 제시하지 못했다.[9] 용어의 해석 논쟁과는 별개의 주제[10] 무엇보다 애완 옹호측은 애완동물이 반려동물과 동의어라는 주장을 하고있지만 '애완동물=반려동물'이라고 해석될 만한 용례나 예문을 전혀 제시하지 못한 채 그저 개인적인 해석들만을 내세우고 있다.[11] 목적에 따라 애완, 반려를 구분한다는 주장이 있는데 이는 반려동물의 창안된 의도와 실제 사용례, 적용되는 법적인 의미까지 고려했을 때 사실과 부합되는 주장이 아니다. 한 단어가 다른 단어를 아예 대체하고자 등장한 것이지 목적에 따라 구분하기 위해 등장한 것도 아니며 실제로 구분해서 사용하는 사람도 없다.[12] 물론 반려동물을 사용하지 않고 애완동물을 사용했다는 이유로 타인을 나쁜 사람으로 몰아가는 건 부당하며 논점과도 부합하지 않는다. 반려동물 사용자들도 해당용어를 알기 전에는 애완동물을 사용했으니 지금 사용하지 않다는 게 도덕적으로 개심했다는 얘기가 아니기 때문이다. 용어에 대한 논란은 대상에 대한 변화된 인식에 맞춰 새로운 용어가 그 변화를 제대로 반영하는 표현인지가 논점이며, 대상에게 해를 입히는 건 용어 논란과 별개의 문제이다.[13] 애완동물과 반려동물이 혼용되는 것은 현 시점의 상황이지 논점이 아니다.[14] 애완이나 반려가 아닌 다른 용어로 부르자는 것도 논점이라기보단 절충안에 가깝다.[15] 1990년대 2000년대 초반까지만해도 한국 사회에선 동물을 키우는 사람들조차 동물을 아무리 사랑한다 하여도 동물은 생명의 주체가 아닌 인간의 재산으로 보는 관점이 당연하다시피 여겨졌으며 지금처럼 동물을 민법상 재산에서 제외하자는 논의가 나온다는 건 대부분의 사람들이 상상조차 못했다. 덧붙여 한국에 반려동물이란 용어가 처음 도입된 건 2004년으로 여겨지며 대중적으로 전파된 건 도입 후 10년이 더 지나서다.[16] 하다못해 반려동물이란 용어에 반대하는 동물윤리 철학자들조차도 애완동물의 애완에 사랑한다는 의미보다 인간을 위한 유희의 도구라는 관점이 있는 단어라는 것을 부정하지 않는다.[17] 심지어 어떤이는 '애완=반려'라고 까지 하는데 이는 명백한 허위 사실이다.[18] 심지어 소, 돼지 등 반려동물이 아닌 가축으로 여겨지는 동물들 조차도[19] 야생동물은 야생에서 사는 것이 이상적이긴 하나 현 시점 인간의 활동으로 인해 야생동물 서식지는 해가 갈수록 줄어들고 있다. 더군다나 우리가 반려동물로 여기는 동물 종들은 더 이상 야생동물이라고만 보기도 힘들며 야생성만 남아서 인간과의 교감을 하지 못한다면 애시당초 인간과 공존할 수가 없다.[20] 그리고 야생에서의 삶은 인간이 여가시간에 공원을 산책하는 수준이 절대 아니다. 순간마다 목숨이 오가는 전쟁터나 다름없으며 먹이를 구하는 것도 대단히 어렵다. 그렇기에 개와 고양이는 역사시기 이전부터 인간의 거주지가 먹이가 풍부하다는 것을 깨닫고 인간과의 공존을 선택했다. 심지어 개의 경우 인간이 먹는 음식도 어느 정도 소화가 가능한 잡식성으로 진화하기까지 했다.[21] 일반적으로 개는 식육목으로 분류되긴 하나 현시대 수의사들은 대체로 개를 잡식성으로 본다. 물론 인간처럼 완전 잡식은 아니다.[22] 과거라고 한들 최소 수천 년이며 수만 년에 이르기도 한다. 이쯤되면 그냥 인간과 원래부터 같이 살았다고 보는 게 무방할 정도다.[23] 반려동물에게 위로받는 건 자신과 교감을 하는 대상과의 관계에서 대상을 있는 그대로의 존재로서 사랑하고 긍정적인 심리적 위안이나 에너지를 얻고 그 대상을 내 가족으로서 여기고 보호한다는 의미지 애착인형이나 애니의 주인공을 보면서 위안을 얻는다는 것과 결이 완전히 다른 개념이다. 인형이나 애니메이션의 등장인물이 사람에게 능동적으로 정서적 교감을 하진 않지 않은가?[24] 단 해당 선언에서는 동물이 '인간처럼 의식을 가진다'가 아니라 '의식을 가질 수도 있다'는 잠정적 성격의 선언임을 명심해야 한다. 물론 이러한 선언만으로도 세계 각국의 동물보호법의 근거가 되어주었다. 예를 들자면 뉴질랜드는 동물도 의식적 기질을 가지는 생명체로서 보호해야함을 법으로 명시했다.[25] 어떤 이들은 동물은 인간과 같은 법적•윤리적 지위가 없기에 보호소 안락사는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극단적이라 할 수 있는 주장까지 펼치기도 한다. 그러나 이러한 극단적인 논의는 주장의 당사자 외에 누구도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다. 또 인간과 동물간 윤리적 지위에 대해 계층적인 입장을 철학적으로 논의한 바 있는 셸리 케이건(예일대 교수, '죽음이란 무엇인가'의 저자)교수 역시 이러한 동물의 낮은 지위를 근거로 생명권까지 부정하는 주장에 대해 아예 '논할 가치가 없다.'라고까지 밝혔다.[26] 굳이 사실관계를 짚자면 인간의 지적장애와 자폐증은 인지과학으로 그들의 의도하는 뜻을 파악하는 것이 가능한가 여부가 문제가 아니라 그들에게 아예 유의미한 언어표현 능력자체가 매우 부족하거나 없는 것이 문제이다. 그리고 지적장애와 자폐증에 관한 인지신경과학적 분석은 시냅스간 연결이나 발생과정에서 어떠한 유전적 결함이 원인인지를 밝혀내어 유전적 치료가능성에 중점을 두고 있다.[27] 동물행동학적인 관점에서 반려동물이든 그 외 기타 가축이든 인간과의 최소한의 교감능력이나 사회성이 없으면 인간의 거주공간에서 공존할 수가 없다.[28] 물론 개를 비롯한 동물들은 서열의식이 존재한다. 문제는 동물들의 서열의식이 실제론 건강한 리더십에 가깝다는 사실을 정확하게 파악하는 것이 아니라 1900년대 초중반을 지배했던 인간 사회의 권위적이고 철저히 수직적인 위계서열로 파악한 것이 문제이다. 반려견과 관련해서 제대로 된 진정한 의미의 알파독 이론을 이해한 전문가는 사실상 시저 밀란 한 사람에 불과하다고 보아도 무방할 정도다.[29] 정확히는 동물을 일종의 도구적 대상으로 여기는 의미[30] 실제로도 이러한 오해 때문에 반려동물이란 용어에 반감이 생기는 경우도 있는 것 같다.[31] 오히려 한자를 다르게 표기하기 위해 시도한 건 베트남의 쯔놈이다.[32] 출처[33] 출처[34] 주로 표범이나 호랑이 가죽 등의 기호품을 의미[35] 정확히는 비슷한 시기 동안 존속한 전근대 국가들[36] https://m.blog.daum.net/surodoa/13734071http://encykorea.aks.ac.kr/Contents/Item/E0038988https://healthyboundary.tistory.com/15 출처들에서 알 수 있듯이 제목의 해석을 왜 '달을 벗 삼아'라고 했는지는 모르겠으나 시의 내용이나 완월의 원래 뜻을 고려해보면 실제 해석은 달 구경을 같이 할 친구가 그리운데 지금 친구가 곁에 없으니 부재중인 친구 대신 달을 친구마냥 바라보겠다는 비유적인 표현이지 진짜로 달을 친구로 여긴다는 게 아니다.[37] '달을 벗삼아'라는 해석도 문학적 감수성을 목적으로한 의역이라고 보는 것이 적절할 것이다.[38] 개, 고양이를 비롯한 가정에서 기르는 동물들[39] 반대로 '반려동물이 아닌 가족'이라는 표현은 없다. 반려동물이란 단어가 가족의 구성원이라는 의미가 담긴 것이기 때문이다.[40] 21세기 들어 세계적으로 PC주의, 한국의 경우 래디컬 페미니즘이 자신들의 창조한 단어를 퍼뜨리기 위한 억지를 부리는게 만연하다보니 몇몇 신조어의 등장과 기존단어의 재해석에 대해 반감부터 가지는 경우가 많은데, 기존단어의 부정적 의미를 피하기위한 재해석과 사용기피, 아예 다른 단어로 대체하는 경우는 인간의 언어역사에서 생각보다 빈번한 일이다. 따라서 모든 용어에 대해 상술한 두가지 사상의 의도만 추측해서 해석한다면 이또한 곤란한 일이다.[41] 다음과 네이버 국어사전에서 제공하는 '희롱하다'의 예문을 살펴보면 알 수 있다.[42] 김동인의 소설 '운현궁의 봄' 14장에 '관속배와 상투를 잡고 희롱하는⋯⋯'이라는 구절이 있다. 이 문장을 보면 같이 어울린다는 뜻으로 '희롱하다'라는 동사를 쓴 것 같지만 앞뒤의 전체적인 문장까지 살펴보면 서로 놀린다는 것인지 아니면 같이 다니면서 아녀자를 희롱한다는 뜻인지 명확하지는 않다. 무엇보다 결정적으로 해당 문장은 작품의 주인공인 '흥선대원군 이하응'의 과거 상스럽고 경박한 행적을 묘사하고자 쓴 문장이다.[43] 물론 역사적인 사실만 말하자면 실제 흥선대원군의 젊은 시절 행적은 절대 소설처럼 상스럽고 체통 없지 않았다. 오히려 모범적인 왕실 인물이었다. 자세한 내용은 흥선대원군/생애 문서 참고.[44] 동물권을 연구하는 철학자 중에도 반려동물이란 단어에 회의감을 가지는 이들도 있다. 하지만 적어도 그들은 玩에 담긴 의미가 동물의 생명 그 자체의 존엄성이 아닌 도구적인 대상의 의미가 있다는 점을 부정하지는 않는다. 철학자들이 한자 전문가는 아니지만 그들이 사유를 전개할 때 단어의 기원과 뜻을 엄밀하게 다듬고 파악하면서 사유를 전개한다는 점을 미루어 보았을 때 해당 각주의 내용은 설득력을 얻을 것이다.[45] 즐겨타는 탈 것. 예를 들면 자동차나 오토바이 등[46] 덧붙여 애완동물 고수자들은 玩을 희롱할 완으로 해석하더라도 희롱하다가 같이 논다는 뜻이므로 문제없다는 주장을 하는데, 이 역시 틀린 해석이다. 희롱하다는 일상적 의미로의 같이 놀다란 뜻이 아니다. 친구끼리 놀거나 형제자매, 조카와 삼촌 등의 관계에서 같이 노는 걸 희롱하다라고 표현하는 사람은 없다.[47] 심지어 애견=애완 식으로 주장하는 사람도 있으나 대중적으로 애견가라는 단어는 '개를 아끼고 사랑(여기서는 진심이 담긴 애정)하는 사람'이라는 뜻이므로 애완과는 결이 다르다. 애완에 쓰인 愛의 경우도 일반적으로 여기는 사랑이라는 감정이 아닌 애마, 애용처럼 단순 선호의 의미가 더 강하다.[48] 내 가족처럼 여기는 유대감[49] 적토마가 관우의 말이 되는 건 연의에만 나오는 내용이며 특히 삼국지연의에서의 적토마의 최후에 관한 묘사는 결국 충성심이라는 관우의 아이덴티티를 묘사하기위한 문학적 장치로 보는 견해가 있다.[50] 어쩌면 소설 블랙 뷰티에 나온 말과 인간을 예로 들 수 있겠으나 해당 소설은 1877년에 나온 작품이고 동물을 진심으로 사랑하거나 동물권에 관심이 있는 인물은 소설 속(뿐만 아니라 당시의 현실 시간적 배경이기도 한) 사회분위기에서도 다른 사람과 다른 독특하거나 선구적인 가치관의 인물로 취급받는다.[51] http://www.openchang.com/news/articleView.html?idxno=5576https://m.blog.daum.net/jr80175340/9출처에도 애완이라는 뜻이 기존에 어떤 의미로 쓰였는지 잘 나와있다. 애완 옹호 측의 주장과는 달리 절대 '반려동물'과 동일하지 않다.[52] 심지어 완물상지항목에도 '완인상덕'이 나오며 玩의 훈독이 무엇인지까지 나와있다.[53] 혹자는 완인상덕의 완인이 사람을 사랑한다는 뜻이라면서 애완을 옹호하지만 예나 지금이나 사람을 사랑하는 건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중히 여기는 가치인데 왜 덕을 잃을 것을 경계하겠는가? 애시당초 완인이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사람을 사랑한다'는 뜻이 아니기 때문이다.[54] 玩에 '사랑할 완'이라는 뜻이 있다고 나오지만 용례를 생각해 보았을 때 해석의 근거가 불분명하다.[55] 당연하지만 완인상덕은 제외한다. 이미 '사람을 가지고 논다'라는 의미가 담긴 사자성어라는 게 밝혀졌으니 말이다.[56] 세계적으로 많이 쓰이는 SNS 중 하나인 인스타그램의 한국어 게시물 검색에서 2021년 기준 애완동물은 약 83만 건, 반려동물은 약 530만 건 이상으로 반려동물이 애완동물보다 6배 이상의 게시물 수를 보인다.[57] 물론 그렇다고해서 반려동물로 파충류나 어류를 기르는 양육자들이 자신의 반려동물에 대해 가지는 애정이 거짓이라고 주장하는 것이 아님을 밝혀둔다.[58] 이때 玩 앞에 붙은 한자 愛나, 애완의 국어사전적 해석의 '귀여워하다, 사랑하다'라는 해석은 실질적으로 기존에 있어왔던 애완에 대한 해석에서 우리가 일반적으로 여기는 사랑한다는 의미보다 단순 선호에 가까운 의미를 지닌다고 봐야 한다.[59] 음악을 즐기다, 게임을 즐기다 등[60] 즉 주로 쓰이는 대상이 달라졌을 뿐이지 과거의 용례로 사용할 수 없다는 것이 아니다.[61] 동물권을 논하는 철학적 담론에서 '가장자리 인간'이라는 비유를 들어 동물윤리를 논하는 것은 매우 기본적이라 할 수 있다. 혹시나 인간과 동물은 다르다는 식으로 논의 자체를 의도적으로 회피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러한 태도는 적절하지 않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62] 물론 단순히 아이를 입양하고 싶다고 해서 내키는대로 입양하는 것은 아니고 입양희망자의 양육능력을 검증하는 과정을 거친다. 그리고 한편으론 해외 동물문화 선진국에서는 반려동물을 입양하고자 하는 사람 역시 아이를 입양하는 과정처럼 비슷한 검증을 거치며 이는 국내에서도 조금씩이나마 개선되며 확산되어가는 중이다.[63] 반려견 훈육의 예를 들자면 투리드 루가스와 강형욱으로 대표되는 '카밍 시그널(calming signal)' 방식이 대표적이다. 이 훈련법은 기본적으로 개의 습성과 행동을 파악해서 최대한 개들 본연의 자연스러운 인지능력을 활용해 행동교정을 하는 것이 목적이다.[64] 무조건 발정기 때 짝을 지어주어서 새끼를 낳아 머릿수를 늘린들 태어난 새끼들의 입양희망자를 찾기가 매우 어렵다는 현실적인 문제도 있다. 강형욱의 경우 보호소의 안락사율이 매우 낮은 반려동물문화 선진국일수록 중성화 수술을 시키지않는 비율이 높은 것 같다는 개인의 관찰결과를 방송에서 피력한 적이 있다.[65] 실제로 푸들이나 삽살개, 비숑프리제 같은 장모종이나 털이 곱슬한 견종들은 주기적인 미용이 그들의 건강에도 좋다.[66] 반려동물로서 널리 퍼진 동물은 아니지만 돼지의 경우 인간에 의해 그들만의 (생각보다 깔끔한) 위생관념이 오해받는 대표적인 경우다. 그리고 너무 목욕을 하지 않는 것도 반려동물의 건강에 좋지 않다.[67] 이 경우는 애완동물, 반려동물 단어를 혼용해도 문제없다는 주장이 있다.[68] 이 경우는 동물을 인간의 목적에 따라 애완동물, 반려동물 같은 단어로 구분짓지 말고 다같은 '동물'로 불러야한다는 주장이 있다.[69] 야생동물의 생활 권역은 일부 종을 제외하면 10km2은 거뜬하게 넘어간다. 애완동물을 철창 없이 집 안에서 기른다고 해도 차원이 다른 넓이다.[70] 제목은 반려동물 설문조사인데 어째서인지 개에 대한 문항만 나와 있다는 점에 유의하자.[71] 농림축산식품부의 공식통계로는 개는 160만 마리 정도다.[72] 한국에서 스스로 사람의 집에 들어와서 눌러앉아 살 수 있는 동물은 길고양이나 도마뱀, 개구리들 정도뿐이다. 그외에도 아파트에 둥지를 짓고 사람이 주는 걸 얻어먹는 황조롱이가 있기는 한데 대한민국은 모든 맹금류의 사육이 불법이라서 집에서 쭉 돌보는 건 불가능하다.[73] 당연히 이 문단의 의의는 개에게 훈련을 시키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 아니다.[74] 대한민국의 대표 동물단체인 동물자유연대는 판결문에서 애완동물이란 단어를 못 쓰도록 법원을 압박하고 있다.(관련 기사)[75] 원문 知者樂水 仁者樂山[76] fireman, policeman, chairman[77] 단어 캣맘에 부정적인 이미지가 씌워진 이유가 단어 맘충 때문이라는 주장도 있는데, 맘카페,○○맘 등의 예를 보면 맘이라는 단어는 계속 쓰이고 있다. 비하적 의미는 에 담겨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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