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3-05 16:29:46

노르망디의 한국인

양경종에서 넘어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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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추측
2.1. 소련군에 징집된 일본군 포로설2.2. 고려인 혹은 중앙아시아계 소련인
3. 행로4. 미디어5. 결론6. 번외편: 타넨베르크의 한국인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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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독일 국방군 육군 동방대대 소속의 한 동양인 병사노르망디 상륙작전에서 미합중국 육군에게 포로로 잡힌 사진으로 수많은 네티즌들을 충격에 빠뜨렸고, 이후 국내에서 이 사건에 대해 큰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발단은 밴드 오브 브라더스로 유명한 미국의 사학자 스티븐 앰브로스의 책에 있었던 유타 해안에서 로버트 브루어 육군 중위가 언어가 통하지 않는 동방대대 출신의 포로를 심문했는데 그가 한국인이었다는 설명이 나온다. 원래 인터뷰에서 브루어 중위가 한국 출신으로 지목한 포로의 숫자는 4명. 이 사실이 어느 네티즌에 의해 상기의 사진이 한국에 알려지면서 많은 이들이 이 사람의 행방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한국 영화 마이웨이 홍보나 여러 매체에서는 앰브로스의 책에 저 사진이 있다고 하지만, 앰브로스의 책에는 저 사진이 없다. 그 책에 있는 어구와 저 사진의 인물을 합성한 텍스트가 돌면서 저 사진을 앰브로스가 소개한 것으로 알려진 것이다.

2. 추측

어쩌다가 한국인이 노르망디에서 독일 군복 차림으로 포로가 되었는지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은 추측이 있다.

2.1. 소련군에 징집된 일본군 포로설

이 주장에 따르면 해당 인물은 양경종이라는 인물이며, 최초로 언급이 된 것은 2004년 초 도깨비뉴스의 기사《이 1장의 사진: 민족의 비극 그러나 강인한 민초…》의 댓글 중에서였다. 위의 사진을 소개하는 이 기사의 댓글란에 'truth'라는 닉을 쓰는 익명의 인물이 다음과 같은 댓글을 남겼다:
이름: 양경종
생년월일: 1920년 3월 3일
본적: 신의주
관동군 입대: 1938년[1]
노몬한 전투 참전 때 소련군 포로[2]
1943년 여름 우크라이나 지방에서 독일군 포로[3]
1944년 6월 6일 프랑스 노르망디 유타 해변에서 미군 포로
1945년 5월 영국 포로수용소에서 석방[4].
1947년 미국으로 이주
1992년 4월 7일 미국 일리노이노스웨스턴 대학교 부근에서 거주하다 사망
평범하게 태어나 수많은 전쟁참화를 겪은 뒤 미국으로 이주
40년 넘는 세월을 평범한 미국 시민으로 생활
슬하에 2남 1녀 자녀 둠.
결코 가족들에게는 자신의 전쟁 경험을 이야기 한 적 없다고 전해짐. - 이 내용들이 전부 사실이라면… 위의 이야기는 미군에 포로로 잡혔을 당시 심문 내용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이후 이 떡밥이 알음알음 인터넷에 퍼지면서 2008년 국방일보 기사에도 소개가 되었으며, 인터넷 밀덕판에서 설왕설래가 많았는데, 2차세계대전 갤러리에선 양경종을 구라라고 보았다. 현재로서 '양경종 설'은 정체 불명의 누리꾼에 의한 낚시질이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애초에 전혀 검증될 수 없는 인터넷 댓글이 출처이며, 그 내용도 뭔가 미심쩍고 앞뒤가 맞지 않는다. 저 내용이 사실이라면 최소한 만족해야할 사항이 있다. 가족에게도 말 안하고 가족도 모르는 과거사실과 이후 생활 및 가족사항, 그리고 사망일자까지 알 정도로 가까운 사이, 즉 가족보다 더 진한 유대관계가 있는 사이거나 그런 사람을 잘 알고 있는데다 그 사람이 당사자가 가족한테도 안한 이야기를 제3자에게 술술 불었다는 거다. 특히 후자라면 사진까지 보여줬단 소리고 전자의 경우는 거의 저 사항들을 대부분 같이 겪은 전우급이 아니면 거의 불가능해 보이는 유대관계다.

어쨌거나 이 떡밥은 20세기 전쟁사 작가 앤터니 비버가 2012년 출판하고 2017년에 한국어판이 나온 제2차 세계대전의 머릿말에까지 실렸다. 그것도 위에 요약된 내용 그대로 싣고 "전쟁에서 일본군, 소련군, 독일군에 차례로 징집되어 의도치 않게 베테랑 군인이 되어버린 그는 비교적 운이 좋은 편이었다. 그러나 평범한 사람이 무시무시한 역사적 폭력 앞에서 얼마나 무력해지는가를 양경종은 강렬하게 각인시키고 있다."라는 감상까지 덧붙이고 있다. 앤터니 비버가 이름이 널리 알려진 작가라는 점에서 이를 양경종이라는 인물의 실존 근거로 내세우는 경우가 많지만 여전히 많은 점이 의문으로 남아 있다. 우선 앤터니 비버는 이 일화에 대한 어떠한 출처도 남기지 않고 있다. 이는 본인이 수집한 문서나 구술자료에 의하지 않았다는 의미로, 본인은 이를 일반적 사실로 인지했다는 의미다. 둘째, 영어 위키백과 등지에서는 앤터니 비버의 책 출간 이후로 양경종에 관한 실존 근거는 앤터니 비버의 책을 출처로 달고 있다. 이는 원출처는 증발한 순환출처에 해당한다. 셋째, 앤터니 비버는 양경종의 실체에 관해 인터넷에서 퍼지고 있는 얘기 이상의 가감이 없다. 만약 신뢰할만한 근거를 통해 이 일화를 인지한 것이라면 이 사람의 인생 자체가 연구 대상이기 때문에 절대 저 정도의 정보에서 끝날 리가 없다.

마침 영어판이 출간된 2012년은 양경종을 모티브로 했다는 영화 마이 웨이가 한창 홍보하던 시기였고, 또 머릿말에 해당하는 부분이기 때문에 논증에 절대적으로 필요한 부분이 아니어서 교차검증에 소홀했을 가능성도 있다. 거기다가 국방일보라는 이름을 들었을 때 매우 공신력 있어보이는 언론의 기사도 있었으니[5] 이만하면 추가적인 조사 없이 그냥 정설로 믿을 법도 하다.만약 그렇다면 외국 학자까지 낚은 희대의 대형 낚시가 된다. 비버는 C•SPAN과의 인터뷰에서 그 일화가 사실인지를 묻는 질문에 충분한 교차 검증을 거친 내용이라고 답했다. 여기서 또 지적해야 할 것은 앤서니 비버는 한국 인터넷에서 세계적 석학으로 잘못 알려졌으나, 애초에 학자가 아니다. 그는 존 키건 밑에서 영국 샌드허스트 재학 시절에 군사사를 배운 경력이 있는 그냥 베스트 셀러 작가다. 위에 언급된 비버의 제2차 세계대전도 중일전쟁 관련해서 학계에서 가루가 되도록 까인 장융의 음모론을 무비판적으로 수용하는 듯 비판거리가 많다.

문제는 할힌골 전투중일전쟁 때 포로가 되면 안된다고 그렇게 우겨대던 일본이지만, 나름대로 이면에는 포로 교환 교섭을 했었다는 것을 볼때 소련의 포로에서 소련군 징집은 생각하기 어려운 점이 있다. 할힌골 전투나 장고봉 사건 이후에 소련일본 제국은 불가침 협정을 맺어서 나름 국경조약을 완료한다. 이때 대부분의 포로들이 귀국하게 된다. 그러니 마이웨이처럼 일본군 포로설은 희박하다.

이에 대한 반론도 있다. 물론 역사가 기록대로 간 것은 아니기때문이다. 할힌골 전투 포로 출신으로 소련 육군 군관이 된 박성훈이라는 사람도 있다. 포로의 소련군 입대가 아예 불가능한 일은 아니다. (출처:SBS스페셜). 육군특별지원병으로 입대한 조선인들은 한반도 내 부대에 주둔하라고 했지만, 첫 번째 사망자인 이인석 상등병(당시 나이 25세, 충청북도 옥천군 서면 출신)은 화북전선에 위치한 산서성에서 전사하였다. 또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포로들 중에도 조선인에 관한 기록이 조금은 남아있으며 소련으로 전향한 사람들도 있다. 그리고 상당수의 고려인들도 독소전쟁에 참전하였다. 또한 독일도 소련군 포로들 중 전향자를 대상으로 국방군과 무장친위대를 나누어 동방대대를 편성하기도 했다. 즉 이 주장도 가능성은 분명히 있다는 것이다.[6]

한때 한국 인터넷에서만 떠돌던 이 양경종 떡밥은 마이웨이 개봉과 더불어 세계 각국으로 전파되서 Quora나 유튜브에서도 양경종 얘기를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게 됐는데, 가령 이 영상도 위에 적힌 양경종 떡밥을 그대로 다시 소개하고 있다. 다만 앰브로스의 책을 참고했는지 양경종 외에도 3명의 동양인이 더 있었으며, 연합군은 그를 독일 군복을 입은 일본군으로 생각해 그를 영국의 정치범수용소로 보냈다가 미국의 수용소로 보냈다고 적고 있는데, 위에 적혀 있듯이 수용소 출감이 1945년에 바로 이루어졌다는 엉터리 내용과 더불어 아무런 신뢰할만한 출처도 제시하지 않은 점에서 그냥 인터넷 떡밥 짜깁기한 전형적인 유튜브 정보장사라고 보면 된다.

2.2. 고려인 혹은 중앙아시아계 소련인

다른 설은 저 동양인은 원래부터 소련에 거주하던 사람, 즉 고려인으로서 징집되었다는 설이다. 독소전쟁 당시 소련군 포로 사진 등을 보면 한국인이 아니더라도 동양계 병사들도 드문드문 있다. 겐나디 한(1919~1943) 같은 경우는 동아시아계로 드물게 공군 조종사로 복무하며 나치에 맞서 싸우다가 격추당해 목숨을 잃었다. 사진이나 기록에서도 1937년 스탈린의 강제 이주 정책으로 부모와 같이 이주당한 한국인으로 나왔다. 잊혀졌던 그는 90년대에 MBC 뉴스데스크에서 잠깐 다뤄져 조금 알려지기도 했다. 게다가 소련군에는 동양인이 꽤 많이 섞여 있었고, 고려인뿐만 아니라 생김새가 한국인과 거의 같은 중앙아시아계 소련인[7]도 무차별 징집했으므로 동양인이라고 해서 조선인이라고 단정하는 것은 무리다. 소련 영화 "베를린 함락(1949)"와 독일 영화 "베를린의 여인(2007)"에서도 아시아계 소련 병사가 비중있는 역으로 나온다. 그러므로 '소련군의 동양계 병사 - 포로 - 부역자' 설이 더 신빙성이 있다.

독일 국방군에는 1942년경 부터 소련군 전향자 출신 부대가 공식적으로 편제되어 있었으므로 "아시아계 소련인설"이 가능성도 높다. 당시에는 중앙아시아 키르키즈스탄인, 우즈베키스탄인, 타지키스탄인 등 중앙아시아계 민족들과 카스피해 지역에 사는 몽골족의 후예인 칼미크인들도 상당수 소련군에 (반강제적으로) 입대해 나치 독일에 맞서 싸웠기 때문이다. 이들은 독일에 포섭되어 국방군에 참여하게 되고 각 민족별로 편성된 이른바 '동방대대(Ostbatallion)' 에서 복무하게 되며, 러시아계 포로 전향자는 이와 별도로 '러시아 해방군'이라는 이름의 러시아인 부대로 편성된다. 전후 소련은 스메르시, NKVD를 통해 송환된 포로 전원을 심사하여 처형하거나 굴라크로 보냈다. 만약 사진 속의 병사가 고려인이라면 그는 중앙아시아계 소수민족으로 편성된 투르키스탄 부대나 (언어 문제로 인해) 러시아 해방군에 편성되었을 가능성이 높지만 1944년 6월의 노르망디에는 러시아계 부대와 조지아계 부대만이 상륙지점에 배치되어 있던 것으로 확인된다.[8] 따라서 그는 러시아 부대 소속일 가능성이 높으나 사진에서는 소매에 붙어 있어야 할 부대마크(아래 사진 참조)가 보이지 않기 때문에 정확한 소속을 알 수는 없다.

파일:POA.jpg
러시아 해방군 부대마크.

3. 행로

이들이 누구이며, 또한 어떻게 되었는지는 알 수가 없는데 이들의 최후에 대해 앰브로스 등은 "아마 한국으로 돌아가서 한국전쟁을 치렀을 것이다." 라고 하고 있으며 어떤 사람들은 다시 소련으로 끌려가 처형당했다고 주장한다. 소설가 조정래의 소설 <오 하느님>이 이 주장을 따른다. 만일 위의 테크가 사실일 시 더 운이 없었으면 북한군으로 참전했다 귀순해서 월남전 테크 타고 상이용사나 일반 참전용사로 운 좋게 제대하는 거였을 게 아마도 보통이었을지도 모른다.

공산권 붕괴 후 공개된 소련 문서에 따르면 이런 대량처형은 일종의 잘못된 속설이었고 대부분 노동을 위해 굴라크로 이송되었다. 그중 협력사실이 경미한 전직 포로들은 다시 군에 들어가는 것이 허가되었고 대부분 노동부대나 굴라그 경비병으로 차출되었다. 처형된 비율은 의외로 적고 실제 전범을 감안하면 어느 정도 맞는 비율이다.[9]

또 어떤 이들은 그들이 미국에 남아 여생을 지내 1992년에 일리노이주에서 사망했을 거라고 추측한다. 북토피아에서 전자책으로 출간된 장웅진의 <노르망디의 조선인>이라는 소설이 이 주장을 따른다#.

일단은 이런 사람들이 5~10명 정도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 페이지를 보면 조선인 출신으로 추정되는 4명의 사진이 있다. 그 밖에도 투르크계 병사들의 사진도 보인다.

연합국은 소련군 전향 포로와 러시아 혁명 이전부터 망명한 코사크계, 백계 러시아인들을 소련에 다시 넘긴 사례도 있었다. 특히 동방대대 포로들의 경우에는 동유럽에서 소련군의 보호하에 있던 자국 포로들의 안전확보를 위해 국제조약도 무시한 경향이 있다. 사실상 소련군 전향 포로에 대해서 2가지 사례가 모두 공존한다고 보면 된다.

어찌보면 역사의 거대한 물결에서 기구한 삶을 산 사람들이라 할 수 있다. 비슷한 사례로 일본군에서 팔로군, 북한군을 거쳐 다시 한국군에 복무한 할아버지도 있다#

4. 미디어

2005년SBS 스페셜에서 "노르망디의 코리안"이라는 제목으로 이들에 대한 2부작 다큐멘터리를 방영했다. (21~22회) 1부 - 독일 군복을 입은 조선인SBS스폐셜 영상 1 2부 - 국적 없는 포로SBS스폐셜 영상 2

2007년에 발표된 조정래의 역사소설 <오 하느님>은 이 한국인들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현재 찾아보면 절판된 것으로 되어 있지만 사실 2009년 <사람의 탈>이라는 제목으로 제목이 변경되어 지금도 판매되고 있다. 이를 중심 소재로 삼은 영화 마이웨이(강제규 감독 작품)가 2011년 12월 22일에 개봉했다. 장동건, 오다기리 죠, 판빙빙(范氷氷) 등 캐스팅이 매우 화려하다. 한중일 합작

장웅진이 쓴 노르망디의 조선인에서는 심문관인 러시아계 정보장교가 러일전쟁 뒤 자기만 미국으로 보내고 러시아에 남았던 아버지가 재취한 뒤 얻은 딸, 그러니까 배다른 누이동생의 남편이 이 인물인 것을 알아차리고 빼돌리는 식으로 전개했다.

BN1944의 전신 격인 게임 2WAR에서 이와 관련된 이벤트를 연 적이 있었다. '노르망디의 이방인'이란 이름의 드라마 CD라는 컨셉으로 총 30화로 구성되어 있었으며 이벤트는 ARG로 진행되어 하나의 단서를 풀면 MP3 1개가 해금되는 식이었다. 작중 노르망디의 한국인은 '허민준'이란 이름의 한 남성을 중심으로 주변인들의 소식을 한 기자가 파헤치는 것으로 진행되며 일제에 강제집징되어 온갖 산전수전을 겪고 겨우 고국으로 돌아와 노인이 된 그가 자신이 알거나 의지할 수 있었던 이들이 전부 죽어버린 시점이 배경이기 때문에 극이 진행되면서 그의 비참함이 배가 된다. ARG를 모두 푼 상태에서 하나라도 누락되면 다음 내용을 알 수 없었고 해당 이벤트는 물론 2WAR의 서비스 종료와 완전히 사라졌기 때문에 해당 MP3 파일 전체는 누군가 개인 소장하고 있지 않는 이상 듣을 수 없게 되었다.

5. 결론

일단 노르망디 에 있는 2차대전 기념관에 전시되어 있는 사진 설명에는 그가 한국인이라 나와있다. 그가 누구인지는 아직 확실히 알 수 없고 한국인이 맞는지도 불분명하며 더욱 연구가 더 필요하겠지만, 확실한건 그가 기구한 운명에 처한 역사의 희생자임은 분명하다는 걸 알 수 있다.

이 사진과 별개로 국립국악원은 독일에서 독일 인류학자가 채록한 아시아인이 부른 노래를 발굴했는데, 에디슨 원통형 축음기로 녹음한 것이라 앨범화 작업에 시간이 걸렸다. 추적 결과 2차 대전 시기가 아닌 1917년에 녹음한 것으로, 제1차 세계 대전 당시 제정 러시아 군의 일원으로 참전했다 독일군에게 포로가 된 연해주 거주 한국인의 음원이었음이 밝혀졌다. 참조 바람

6. 번외편: 타넨베르크의 한국인들




1915년에 블라디보스톡과 하바롭스크의 한인 3,000명이 국적 취득 및 현역군 입대의사를 밝혔다.
- (러시아 외무성 일지 1915년 12월 7일)
1차 세계대전에 러시아군에 소집된 조선인 수는 장교 약 100명과 하사관 및 사병 4,034명이었다.
- (1918년 블라디보스토크 일본 총영사 보고서)

고종의 시종무관 김인수 참령의 후손 100년 만에 나타나다

노르망디의 한국인은 사실 여부에 관해서 논란이 많지만 이와 유사한 경우가 실제로 1차 세계 대전 당시에 존재하였다. 약 100년 전 세계 1차 대전 당시에 러시아군 소속으로 타넨베르크 전투에 참전하여 독일군에게 포로가 된 고려인들의 자료를 베를린 훔볼트 대학교에서 찾아냈기 때문이다. 이들은 세계1차 대전 당시인 1914년 8월 러시아군이 독일군에게 치욕적인 패배를 당했던 폴란드 타넨베르크 전투에서 독일군 포로가 되었고, 1916년 3년째 독일 포로수용소에서 생활하던 중 여러 기록들을 남겼다.

생생한 자필 신상카드, 군복차림의 각종 사진들, 더구나 100년 전 우리의 노래와 수수께기 등을 담은 음반도 무더기로 발견되었으며, 그들의 노래는 100년 전 우리 노래가락을 생생히 들려주는 소중한 자료들이다. 이들은 연해주의 짜레찌예 출신의 고려인이며 구한말 일본군에 맞서 두만강 변에서 의병투쟁을 벌이다 나라가 망하자 러시아 시베리아 보병사단에 몸을 의탁했던 베테랑 전사들이었다.

이들 외에도 4,000명의 고려인들이 세계 1차 대전 당시 러시아군에 입대하여 독일전선에 참전한 기록들도 찾아냈다는 내용도 있다. '노르망디의 한국인 포로'는 논란이 많지만(정확히 고려인인지 아니면 다른 중앙아시아계 인물인지 알 수 없음) 1차 세계대전 당시에 제정 러시아군 소속으로 동부전선에 참전한 수 많은 조선계 병사들은 엄연한 역사적 사실이다.



이들 중에는 1차세계 대전 이후 연해주에서 계속 항일의병투쟁을 한 경우나 또는 재불 독립운동가인 홍재하 처럼 러시아군으로 1차 대전에 참전했다가 이후에도 러시아가 아닌 타국에서 독립운동에 계속 투신한 경우 또는 고종의 시종무관 출신으로 고종의 명에 따라 항일에 투신하였다가 망국 이후 러시아 여성과 결혼하여서 러시아 제국군의 대령으로까지 진급하게된 케이스들도 존재한다. 헤이그 특사로 한국인들에게 유명한 이위종 역시 이와 같은 케이스에 속한다. '잊혀진 독립운동가' 홍재하, 프랑스 동포들이 찾아냈다 고려인 동포 이야기⑧ 고종의 시종무관 김인수 참령 <시민의 소리>


[1] 1938년에 육군특별지원병제가 시작되었는데, 이에 대해서는 <마이웨이>의 장동건은 어떻게 일본군에 갔을까?를 참조.[2] 자원입대가 아니란 사실을 밝힌 양경종은 곧바로 소련군에 편입되었다고 한다.[3] 독일군에도 똑같이 자원입대가 아니란 사실을 밝히고 ''밥만 배불리 먹으면 됩니다"'란 말을 들은 독일군 장교는 양경종을 독일군 동방대대에 편입시켰다고 한다. 그런데 카이텔이 1943년 초반에 소련 포로들에 대한 노예 노동안을 제안하기 전까지만 해도 소련군 소속의 열등인종 포로는 처형이 원칙이었다.[4] 여기서 사실 무근이라는 것을 알수 있다. 전쟁이 끝나고 전후 처리나 전쟁 범죄 조사, 피난민과 자국 병사들의 귀환때문에 적대국 전쟁포로의 귀환은 상당히 늦어지는 것이 정상이다. 전범과는 거리가 멀었던 필리핀 포로 수용소 출신의 오오카 쇼헤이도 1년 반 정도 뒤에야 석방돼서 돌아가기도 했다. 1945년 5월이면 전쟁이 끝나자 마자 석방되었다는 이야기.석방이 아니라 탈출이라면 말은 된다. 굳이을 옹호하자면 개인의 기억에는 한계나 오류가 있을 수 있다는 정도의 설명은 가능할수도 있다. 개인적으로도 포로로 붙잡혔다가 석방된 후 이주할 정도로 생활 환경의 급변을 겪었고 사회적으로도 혼란스러운 전후의 상황인데다 이 당시의 일을 수십년뒤에 다시 회상한 것임을 생각해보면 (일기와 같은 기록을 남겨둔 것이 아닌 한) 기억하지 못하는 부분이나 세부적인 내용을 잘못 기억한 부분등이 있을 수 있고, 나중에 다시 회상하는 과정에서 이런 기억의 빈틈을 채우면서 왜곡이 일어날수도 있다는 것. 적절한 참고자료 없이 기억에만 의존하여 과거를 회상할 경우 날짜등의 세부적인 부분을 적게는 수개월에서 길게는 수년까지 잘못 기억한다거나, 사건의 전후등을 잘못 기억하는 일은 쉽게 발생할 수 있는 것. 물론 이는 해당 인물의 증언에 충분한 신뢰성이 있지만 세부적인 부분에서 오류나 모순이 발견되었을 때 이런 점을 감안하여 섣부르게 거짓으로 단정하지 말라는 것이고, 양경종 설 역시 이 모순 하나만을 이유로 거짓으로 단정할수는 없다는 것이지, 이런 정황만을 근거로 (제대로 된 근거가 전혀 제시되지 않고 있는) 양경종 설의 신뢰성을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5] 군필자를 중심으로 한 국내 여론에서 국방일보의 신뢰성은 '그거 사실상 국방부 홍보지 아니냐' 수준으로 저평가되고 있기는 하나... 한국 사정에 익숙하지 않은 외국인 학자의 관점에서 보면 일단 정부 부처의 기관지(그것도 막장국가도 아니고 나름 신뢰할 수 있는 국가인 한국 정부 부처의 기관지)이니 최소한의 공신력이나 전문성은 가졌을 것이라고 보기 쉬운 것. 그리고 국방일보 기사 중에도 일부 군사 관련 기사는 상당한 공신력과 전문성을 갖춘 신뢰할 수 있는 정보원이기도 하다. 다만 양경종 관련 기사의 경우 그런 신뢰할 수 있는 정보가 아니라 프로파간다에 속하는 기사였을 뿐이다. 엔터니 비버 역시 일단 기관지에 기사 형태로 실린 내용이니 사실관계에서 오류를 범하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성급하게 신뢰한 것으로 추정된다.[6] 거기다 고려인은 2차대전이 종전하기 전에 발트3국으로 길을 떠났던 세대들 역시 존재했을 것이기에 발트 3국 군단 소속으로 나치군 측에 참전한 이들도 소수 있었을 수 있다.[7] 다만 우즈베크족 같은 황백혼혈 튀르크인들의 외모는 한국인과 어느 정도 차이가 있다.[8] 당시 노르망디 지역에는 709 보병사단 소속 635 러시아 대대, 795, 797 조지아 대대가 있었으며 716 보병사단에도 단대호 미상의 구 소련군 포로출신 부대가 있었다.[9] 만약 처형되었거나 전사한 이들, 소식을 알 수 없는 소수의 이들이 있다면 아마 운 없는 이들의 경우 진짜 답도 없는 루트가 나오는 케이스는 하필 2차 대전 종전 이전에 발트 3국으로 옮겨간 고려인들인데, 저 위의 한국인 독일군 병들은 그나마 보장된 포로 신분이 몇몇 있었겠지만 발트 3국은 유대인으로 분류당한 사람들만 아니면 독소전쟁 발발 이후부터는 너도나도 외인부대 징집행이었는데 아마 발트3국에서 무국적 상태로 표류중인 고려인들 역시 갈 길을 잃은 채로 무장친위대 측 징집대상이 되었을 가능성도 배제하기 힘들다. 아마도 재수 없는 경우, 에스토니아, 라트비아와 리투아니아 기준 5 SS기갑사단 비킹 쪽이나 20 무장척탄병사단 쪽으로 입대했다 전사하여 소식이 끊기고 아무에게도 관심을 받지 못했던 이들도 소수 있을 수 있다는 것. 추측에 불과할 뿐이긴 하나 사실일 경우면 정말로 그들 역시 안타깝기 그지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