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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사와 케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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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9년 ~ 현재
초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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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카바야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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벳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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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4~19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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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시모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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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 )
27대 28대 29대 30대
* 21대 감독인 야마모토 코지는 히로시마 도요 카프의 레전드인 야마모토 코지와는 이름의 한자가 다른 동명이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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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대 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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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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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코자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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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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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노카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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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2~19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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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external/www.fighters.co.jp/img_101007_osawa_03.jpg
이름 오사와 케이지(大沢啓二)
생년월일 1932년 3월 14일
사망 2010년 10월 7일 (향년 78세)
국적
[[일본|]][[틀:국기|]][[틀:국기|]]
출생지 카나가와현 후지사와시
포지션 외야수
투타 우투우타
신체 173cm / 77kg
소속팀 난카이 호크스(1956~1964)
도쿄 오리온즈(1965)
지도자 경력 롯데 오리온즈 감독(1971[대행]~1972)
닛폰햄 파이터즈(1976~1983, 1984[대행], 1993-1994)

1. 개요2. 선수시절3. 지도자 시절
3.1. 롯데 오리온즈 감독 시절3.2. 닛폰햄 파이터즈 감독 시절
4. 이후5. 여담

[clearfix]

1. 개요

일본프로야구의 前 선수, 감독, 해설가. 선수 시절은 난카이 호크스 황금기의 일원이었고, 감독으로써는 비인기 구단인 닛폰햄 파이터즈퍼시픽리그 우승 1회, 6년 연속 A클래스[3]로 인도한 명장. 별명은 오야붕.

2. 선수시절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275px-Keiji_Osawa_1956_Scan10001.jpg

구제 히라츠카 공업학교에 진학했으나 1학년 때 교내 폭력사건에 연루되어 퇴학되었고, 이 후 히라쓰카 상공고로 전학했으나 3학년 때 고시엔 지역예선에서 히라쓰카 상공고에 불리한 판정을 한 주심을 폭행해 본인과 야구부가 출전정지 1년을 먹는 대형사고를 친 흑역사가 있다. 그러나 당시 폭력의 피해자였던 주심이 릿쿄대학 직원이었는데, 그의 승부근성과 운동능력을 높게 평가해 릿쿄대에 체육특기생으로 추천하며 야구선수 생활을 계속 이어갈 수 있었고, 오사와는 그 직원의 기대에 부응해 두 차례나 도쿄 6대학 리그 베스트 나인에 오를 정도로 맹활약했고, 졸업과 동시에 난카이 호크스에 스카웃된다.

프로에서는 장타력은 떨어졌지만 완벽에 가까운 외야수비력으로 황금기 난카이 외야진의 주전으로 활약했는데, 그 대표적인 예가 요미우리 자이언츠와의 1959년 일본시리즈였다. 당시 그는 츠루오카 카즈토 감독으로부터 받은 거인 타자들의 타격 자료를 완벽히 숙지, 타자의 성향에 따라 수비위치를 수시로 바꾸며 안타성 타구를 모조리 범타처리해 난카이의 일본시리즈 우승에 보이지 않는 공을 세웠는데, 이 시리즈에서 TV 객원해설자를 맡은 미하라 오사무로부터[4] "MVP 스기우라 타다시가 부상으로 중형차를 받았는데, 스기우라의 호투를 보이지 않게 도운 오사와에게도 소형차가 제공되어야한다고 생각한다"는 극찬을 받았다. [5]

한편 발느린 상대팀 타자의 우전안타성 타구를 빠뜨린 척 하면서 타자주자의 2루 진루를 유도한 뒤 정확한 송구로 타자를 2루에서 잡아내는 고도의 낚시는 그의 현역시절 전매특허였다고 한다.

그러나 10년 선수 제도[6] 혜택을 1년 앞둔 1964년, 프런트가 뜬금없이 스카우트 전직을 제의하자[7] 이에 반발해 도쿄 오리온즈로 이적했고, 1965년 한 해만 뛰고 그 해를 마지막으로 현역에서 은퇴했다.

3. 지도자 시절

3.1. 롯데 오리온즈 감독 시절

파일:external/www.jiji.com/osw010-01254639.jpg

은퇴 후 1966년부터 1969년까지 도쿄-롯데 오리온즈 타격코치를 거쳐 1970년에는 2군 감독으로 전임하여 그 해 이스턴리그 우승을 달성하는 수완을 발휘한다.[8]

1971년 7월 24일, 몰수패 파동에 1위 한큐 브레이브스와 8경기차까지 벌어지는 등의 성적 부진으로 노닌 와타루와 자리를 맞바꿔 1군 감독에 취임했고, 잔여경기에서 33승 2무 19패의 호성적을 기록하며 한때는 한큐와의 승차를 없애는 정도에까지 이르면서 대행 초반에 무려 5년 계약을 이끌어냈으나, 끝내 한큐의 우승을 저지하지 못하고 2위를 기록했다.

이후 오프시즌에 타격만으로는 우승할 수 없다는 방침 아래 중심타자였던 에노모토 키하치, 아트 로페스, 에토 신이치를 방출시키는 댓가로 노무라 오사무 등을 데려오며 투수진을 강화함과 동시에 1972년 시즌에 돌입했으나, 막상 시즌이 시작되자 중심타자들을 연달아 내보내면서까지 보강한 투수진이 기대와 어긋나게 붕괴되면서 팀 성적은 단 한번도 상위권을 기록하는 일 없이 5위로 내려앉았고, 시즌 종료 후 구단 지분이 완전히 롯데에게 넘어감과 동시에 신임 오너로 취임한 신격호가 자신과 같은 재일교포 출신의 카네다 마사이치를 신임 감독으로 부르기 위해 계약 파기 및 위약금을 지불하고 오사와를 해임시키며 롯데를 떠나게 되었다.[9]

3.2. 닛폰햄 파이터즈 감독 시절

파일:external/pbs.twimg.com/CddTL-mUsAAMfXh.jpg
1차 감독 시기

1973년부터 라디오 칸토의 해설자를 맡다가 1975년 겨울, 닛폰햄 구단 사장을 역임하던 미하라 오사무[10] 닛폰햄 파이터즈 감독에 취임한다.

감독에 취임한 오사와는 시마다 마코토[11], 타카시로 노부히로[12] 등 발빠른 젊은 야수들을 중용하여 기동력 중심의 팀컬러로 변모하는 한편, 여기에 히로시마 도요 카프에서 에나츠 유타카를 영입해 팀의 뒷문을 강화하는 등 팀 전력 강화를 위해 노력한 끝에 1981년 후기 우승에 이어[13] 플레이오프에서 전기 우승팀 롯데 오리온즈를 꺾고 퍼시픽리그 우승을 달성하는 결실을 맺었으나, 일본시리즈에서는 요미우리 자이언츠에게 2승 4패로 우승에 실패했다.[14] 다음 해에도 후기리그 우승 및 종합순위 1위로 플레이오프에 진출했으나, 전기리그 우승 및 종합순위 2위를 기록한 세이부 라이온즈에게 패해 2연패가 좌절되었다.

이후 1983년을 끝으로 감독에서 물러나 구단 육성부장으로 취임하며 프런트로 전임했는데, 프런트 전임 직후였던 1984년에 후임 감독이자 자신이 추천했던 우에무라 요시노부가 성적부진으로 물러나면서 그 책임을 지는 형태로 후반기에 잠시 감독대행을 겸했으나 최하위 추락을 막지 못했다. 시즌 종료 후엔 다시 프런트로 돌아와 구단 상무로 취임해 1992년까지 행정에만 전념했으나, 1992년 시즌이 끝나고 도바시 마사유키가 1시즌만에 해임된 닛폰햄의 후임 감독 선정이 난항을 겪자[15] 구단 오너와 프런트의 요청으로 재차 감독으로 복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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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차 감독 시절.

복귀 첫 해인 1993년엔 당시 선발 로테이션 등이 어그러져 있던 투수진을 재정비한 것과 더불어 타나카 유키오 등 기존 전력 등의 부상 복귀와 히로세 테츠로 등의 신예들을 중용한 것이 효과를 보아 리그 최강 세이부 라이온즈와 불과 1게임 차인 2위로 마치며 선전했으나, 이듬해에는 부상자 속출로 인해 대다수 투타 지표가 모조리 리그 꼴찌로 추락하고 나머지 5구단에 모조리 루징을 기록한 끝에 또 다시 퍼시픽리그 최하위로 추락했고, 결국 시즌 종료 후 감독에서 물러나며 현장에서 은퇴했다. 감독으로써의 통산성적은 725승 93무 723패 및 리그 우승 1회+A클래스 7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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팬들 앞에서 도게자를 하는 오사와

여담으로 1994년 9월 29일, 도쿄돔에서의 마지막 홈경기를 마친 직후 팬들 앞에서 도게자로 사죄한 것으로 화제가 되기도 했는데, 후에 오사와는 이 퍼포먼스에 대해 "우리들은 손님들께 돈을 받고 경기를 하지만, 올해는 팬들을 즐겁게 하는 시합을 얼마 보여주지 못했다. 팬들에게 죄송하다는 마음을 표현하기 위해선 무릎을 꿇을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라고 밝히며 안 좋은 성적에도 마지막까지 응원해 준 팬들에 대한 미안함과 감사를 담아 그랬다는 것을 밝혔다.

4. 이후

감독직 은퇴 이후 야구평론가와 야구해설자로 활동하면서[16] 프로야구 마스터스 리그 회장 등을 역임하며 왕성히 활동했으나, 2010년 10월 3일 담낭암으로 별세했다. 향년 78세.

5. 여담

  • 와일드한 성격과 달리 릿쿄대 선배인 니시모토 유키오에게만큼은 공손했다고 한다. 이는 특기생으로 들어온 자신과는 달리 니시모토가 입시를 통해 릿쿄대에 진학했고, 지도자로써도 자신보다 훨씬 우수한 퍼시픽리그 우승 8회의 성적을 남겼기 때문인 것으로 여겨진다.
  • 난카이 황금기 시절의 동료인 노무라 카츠야와는 사이가 좋지 않았다. 고졸 테스트 합격생 출신인 노무라가 입단연차는 빠르지만, 연상인 오사와는 단 한번도 노무라에게 경칭을 쓰지 않았고, 난카이 시절을 회고하는 인터뷰에서는 "츠루오카 감독님 이후로 난카이는 감독의 그릇이 아닌 사람이 감독을 맡았다"면서 절묘하게 노무라를 깠다.
  • 오사와 아카네는 그의 외손녀이고, 게키단 히토리는 그의 손녀사위이다.

[대행] [대행] [3] 리그팀 6개중 3위 이상[4] 1959년 시즌까지 니시테츠 라이온즈의 감독을 맡고 있었으나 그 해 4위에 그치며 사임한 상태였다.[5] 스기우라는 일본시리즈 유일의 4연투 4승 기록자다. 단일 일본시리즈에서 4승을 거둔 투수는 스기우라 그리고 이나오 카즈히사가 있다.[6] 10년 동안 한 팀에 근속한 선수가 원 소속팀과 장기계약 또는 자신이 원하는 팀으로 이적할 수 있고 여러 팀에서 10년간 뛴 선수는 장기계약 자격을 부과하는 제도. FA 제도의 프로토타입 격으로 1947년-1975년 사이에 존재했었다. 일본프로야구 사상 최고의 투수 가네다 마사이치가 본인의 소망인 일본시리즈 우승을 이루기 위하여 이 제도를 이용해 1965년 고쿠테츠 스왈로즈에서 요미우리 자이언츠로 이적하였다.(당시의 스왈로즈는 1961년에야 팀 최초로 리그 A클래스를 기록할 정도로 하위권만 전전하던 팀이었다.)[7] 이때 츠루오카 카즈토 감독의 자택에서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 이적 관련으로 먼저 와있던 무라카미 마사노리에게 이 따위 팀에 의리 따위 가질 필요 없다란 식으로 말해 츠루오카와 말싸움을 벌였다고 한다.[8] 그 해 노닌 와타루 감독이 이끌던 오리온즈 1군도 1960년 이후 10년만에 퍼시픽리그 우승을 달성했으나, 일본시리즈에서 V9 시대를 달리던 요미우리 자이언츠에 1승 4패로 패퇴했다.[9] 결과적으로 카네다가 1974년 일본시리즈 우승을 이끌면서 이 선택은 정답이 되었다.[10] 닛폰햄 파이터즈 원년이었던 1974년에 구단 사장으로 취임한 미하라는 니시테츠 라이온즈 시절의 애제자이자 자신의 데릴사위였던 나카니시 후토시를 감독에 취임시켰으나 나카니시는 취임 후 2년 연속 최하위에 그치며 전혀 성적을 내질 못했고, 결국 미하라는 나카니시가 감독으로써의 역량이 부족하다 판단하여 그를 해임했다.[11] 코라쿠엔 말기 닛폰햄의 붙박이 1번타자 겸 중견수로, 통산 352도루에 9년 연속 100안타를 기록한 A급 테이블 세터였으나 하필 같은 시기에 후쿠모토 유타카라는 최고의 리드오프가 있었던 탓에 결국 단 1번도 도루왕을 수상하지 못한 채 콩라인으로 선수생활을 마쳐야 했다.[12] 2010년 한화 이글스 3루 주루코치를 역임했다.[13] 1973-82시즌까지 퍼시픽리그전후기 리그를 도입하여 전, 후기 우승팀이 5전 3승제의 플레이오프에서 맞붙어 승리한 팀에게 리그 우승팀 자격이 주어졌다. 단, 전후기 통합 우승 시엔 플레이오프를 개최하지 않았다.[14] 이 해 일본시리즈는 역사상 다시 없을 코라쿠엔 구장 더그아웃 시리즈로 개최되었다.[15] 당시 오사와는 감독 후보로 요미우리 자이언츠의 레전드였던 오 사다하루한큐 브레이브스의 황금기를 이끌었던 우에다 토시하루를 영입하려고 했으나, 오는 당시 후지타 모토시 감독의 경질설이 돌던 요미우리 후임 감독직을 염두에 두고 자신이 맡고 있던 세계 어린이 야구 재단 일을 핑계 삼아 감독 제안을 거절했고, 우에다는 구단 간부가 "간사이 출신 감독으론 팀이 인기를 끌기 어렵다"는 지역드립이유로 난색을 표하면서 협상이 파토났다. 다만 우에다는 닛폰햄의 창업지였던 토쿠시마현 출신이라 닛폰햄 창업자 겸 구단 오너였던 오코소 요시노리가 개인적으로 호감을 가졌었고, 결국 오사와가 물러난 직후 오코소가 직접 감독직을 제안하면서 후임 감독으로 취임했다.[16] 장훈 옹 옆에서 유카타를 입고 쓴소리에 맞장구를 쳐주는 할아버지가 오사와였다.